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51
850화 기억의 길 (3)
‘수족관? 벗어 줘? 뭘 벗어……?’
“설마 고작 이런 코트가 아까울까.”
연이어 목소리가 들려온다. 실레키아. 불현듯 떠올랐다. 실레키아는 내게 있다. 하지만 성현제가 어째서 실레키아의 소유권을 넘겨주었는지 그 이유는 흐릿했다. 내 기억에는 없었지만 우리는 수족관에 가기로 했을 것이다. 그렇게 약속을 했었고 아마도.
‘지켜지지 못했다.’
성현제는 나와 한 약속을 가지고 갔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의 목소리를 향해 손을, 지느러미를 뻗었다. 저것은 성현제가 가지고 있는 나의 기억이다.
“아직 수족관에 가지 못했군.”
목소리가 멀어져 간다. 그것을 쫓아 날개를 한껏 펼쳤다. 물이 튀었다. 수조의 유리가 와장창 깨지며 반짝반짝 흩어진다.
“거기 서!”
겨우 잡은 실마리를 놓칠세라 따라잡았다. 손끝에 닿을 듯하다가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간다. 어딘가로 첨벙 떨어졌다.
“거기! 다이빙 금집니다!”
누군가가 소리쳤다. 겨우 물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지만 시야는 뿌옇게 흐렸다. 수영장 말고, 수족관!
“양배추 즙은 맛없어도 양배추 쌈은 괜찮지 않아?”
유리 벽 너머로 나와 함께 서 있는 유현이가 보였다. 나는, 그러니까 매너티가 된 나는 양배추를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맛있네. 유현이, 예림이와 함께 아쿠아리움 갔을 때구나.
“상어 수조에 들어가 볼래요!”
예림이가 뛰어오며 소리쳤다. 수족관은 맞지만 성현제가 가져간 내 기억은 느껴지지 않았다. 성현제의 집으로 가야 하나.
-매애.
한쪽 팔을 잃은 성현제가 서 있었다. 새하얀 머리를 한 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아니, 이 집이 아니야. 수조가 있는 집!
“전생에 물고기였어요?”
내 목소리가 들려왔다. 슬리퍼 신은 발바닥이 보였다. 성현제의 새집이었다. 내가 급한 발걸음으로 거실을 가로질러 소파에 올라앉는다.
“다과를 준비하지.”
“괜찮습니다. 과자는 자제하기로 했거든요. 양치라도 하고 가지 않으면 유현이가 눈치챌 거고요.”
“딸기 맛 치약을 준비해 두었네만.”
“아, 됐습니다!”
성현제가 페가수스 계약 서류를 들고 온다. 물속을 이리저리 헤엄쳤다. 여기도 아닌가. 원래 집 수족관으로-
“선약이 있어서.”
물 밖이 아닌 물속에서 희미한 속삭임 같은 것이 들려온다.
“그, 렇죠. 수족관도 안 갔고.”
성현제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다시 찾았다.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우며 희미한 기억을 쫓아갔다. 드디어 길이 느껴졌다. 모든 곳에 존재하나 그렇기에 찾을 수 없었던 초승달의 영역과 이어지는 기억의 길이.
사아아아-
수많은 기억이 내 뒤로 사라져 간다. 그 사이로 내게는 없는 기억 한 줄기만이 남았다. 가느다란 실과 같았다. 문득 지긋지긋한 핫 핑크 털실이 생각났다. 성현제는 그걸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 내 기억에 반응하듯 기억의 실이 분홍빛을 띠기 시작했다. 포슬포슬한 잔털을 지닌 진짜 털실이었다.
“이게 뭐람.”
-그렇게 구체화하는 게 좋아요, 아빠.
어느새 나타난 삐약이가 내 곁에서 날갯짓했다.
-놓치지 말고 끊이지 않게 더 튼튼한 줄로 만드세요.
“이 털실도 튼튼해. 특별 주문 제작품이거든.”
아주 질기지. 분홍색 털실이 어두운 밤을 따라 이어진다. 실의 끝을 붙잡고 날았다. 차디찬 기운이 날개를 할퀴듯 스친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사방에서 몰려드는 압박감이 강해져 갔다. 이윽고.
“윽!”
가로막는 벽에 부딪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더는 실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분홍색 털실이 저 너머에서 너울거린다. 질기다곤 하나 언제 끊어질지 모를 기억의 실이었다. 무엇보다도 만에 하나.
‘성현제가 스스로를 잃게 된다면.’
저 기억조차 끊어지게 되겠지. 마음이 급해졌다. 하얗고 검은 창이 내 손에 쥐어졌다. 검푸른 불길이 창을 휘감고 피어오른다. 앞을 막은 벽을 힘껏 두들겼다.
쾅!
불꽃이 튀었다. 반발력에 내 몸이 크게 밀려났다. 털실을 간신히 놓치지 않고 붙잡은 채 재차 공격을 가했다.
“벽 하나 못 뚫어서야!”
초승달에게 가 봤자 상대도 안 될 것이다. 또다시 콰앙, 불길이 높게 치솟았다. 이번에도 튕겨 나가는 건 나였다. 신음성 섞인 숨이 짧게 토해졌다.
-아빠! 힘을 단순하게 휘둘러선 뚫지 못해요!
“단순하게, 라니, 후우. 스킬 쓰고 있는데.”
-초승달쯤 되는 초월자에 비하면 깊이가 없어요. 초승달이 총을 쏜다면 아빠는 막대기처럼 휘두르는 것과 비슷하게 차이가 나요.
삐약이가 냉정하게 말했다. 개머리판도 제대로 후려치면 사람 머리통쯤은 깰 수 있다만. 푸른 버들잎을 펼쳤다. 잎을 디딤과 동시에 힘껏 날갯짓해 강하게 벽을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내겐!”
쾅! 몸이 빙그르 허공을 돌았다. 전신이 다 욱신거렸다. 욱신거리는 어깨에 치유 스킬을 사용했다.
“시간이 없어. 부딪치면서 익숙해지는 수밖에.”
길고 긴 시간을 살아온 초월자를 단숨에 따라잡기란 불가능했다. 동등한 힘을 지녔다 해도 다루는 실력에 따라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쓸 줄 모르면 고성능 컴퓨터도 그냥 쇳덩어리일 뿐이니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배울 수도 있겠지만.
“삐약이 너도, 전투는 못 하는 듯하고.”
-…네. 제가 깨운 힘은 시간과 공간뿐이에요. 이것도 한시적이고요.
익힌 것도 아니고 깨웠다니. 역시 평범한 새끼 몬스터는 아닌 모양이었다. 털실이 길게 흔들거린다. 기억의 실이 점차 약해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초월자에게도 통하는 스킬.’
송 실장님의 스며드는 약탈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공격용보다는 방어용으로 쓰기 더 편한 데다가.
‘삼켜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
월식을 초월자 수준으로 끌어 올린다면 나까지 잠식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피아 구분 없이 전부 삼키는 그림자이니. 약탈이 아닌 다른 하나는.
‘청염.’
유현이의 푸른 불꽃. 시스템도 수많은 초월자들도 부수지 못했던 정원사의 껍질도 녹였던 불. 그 불 또한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을 펼쳤다. 검푸른 불꽃을 그 손에 가득 쥐었다.
‘한유현의 본질 그 자체.’
섣불리 이끌어 낸다면 스스로의 존재 그 자체를 태워 수명이 줄어든다고 하였다. 유현이는 완전한 불이 되었다가 다시 내 동생으로 돌아왔다. 내게는 불가능한 일일 터였다. 초월자급의 힘을 지녔다 하나 나는 불이 아닌 인간, F급 각성자니까.
‘내 수명이 얼마나 남았을까.’
금이 간 근원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벽과 그 너머로 이어지는 털실을 바라보았다. 내 존재의 근원은 지금도 삐걱거리고 있었다. 스스로 치유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어떤 초월자도 도와줄 수 없었다. 근원은 오직 근원만이 손댈 수 있으니.
그러나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다. 손안의 검푸른 불꽃이 점차 맑아져 간다. 푸르게, 더욱 푸르게. 완전한 푸른빛을 띠기도 전에.
“……!”
눈앞이 핑글 돌았다.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전신이 식음과 동시에 속은 불처럼 뜨겁게 들끓었다.
-아빠!
날개가 꺾였다. 아래로 뚝 떨어지던 몸이 시계추처럼 매달려 흔들거린다. 털실의 끝을 손목에 휘감아 놓아 다행이었다. 창도 놓치지 않았다. 겨우 정신을 차려 다시 날아올랐다. 위험하다. 전신에 경고등이 켜진 기분이었다.
‘나는, 쓸 수 없어.’
불이 아닌 이상은 초월자든 누구든. 창을 인벤토리에 넣고 물의 힘을 끌어 올렸다. 인어여왕의 힘을 떠올렸다. 초월자가 되었던 예림이의 경험과 기억을 내 몸 가득 받아들였다. 쩌저저적- 물이 날카롭게 얼어붙어 벽을 향해 쏘아졌다.
콱! 콰드드득!
얼음 창이 산산이 부서진다. 반짝거리는 파편 사이로 털실이 더욱 가늘고 흐릿해졌다. 저 기억을 놓치면 또다시 기억 속을 헤매야만 한다. 이미 며칠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를 나로서 계속 유지할 수나 있을까. 기억의 길을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지금 가야 한다.
불을 끌어 올렸다. 그 속에 담긴 푸른빛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든 벽을 뚫고 들어가서. 하지만 그곳에서 초승달을 만나게 되면.
이길 수 있을까.
순간적으로 겁이 났다. 아니,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두려움이었다. 공포저항 스킬은 더는 나를 감싸 주지 못했다. 지금의 내 등급이 훨씬 더 높아졌기에.
무섭다. 성현제를 구할 수 있을까. 살아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마지막까지 무사할 수 있을까. 손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된다. 삐약이에게 성현제가 아닌 눈이 내리는 나무가 있는 곳을 가르쳐 달라 부탁해서 스물다섯 살 동생의 마석만이라도 찾아 집으로 가면 그만이다.
솔직히. 충분히 노력했잖아.
내 손목에 연결된 털실이 바람에 날리듯 부드러이 움직인다. 쉽게 풀어낼 수 있었다. 질긴 털실이긴 하나 가볍게 잘라 낼 수 있었다. 다른 쪽 손으로 털실을 붙잡았다. 가는 실이 담은 기억이 전해져 온다.
“…기억을 가져가도 하필.”
스스로를 잃은 채로 수족관 가기로 했었지, 하고 초승달에게서 벗어나려 노력할 성현제를 떠올리니 헛웃음이 다 나왔다. 열 살 어린애도 아니고 목표가 너무 평범하잖아.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부딪쳐 보자. 털실을 놓고 다시금 불을 이끌어 냈다. 그 순간.
팔랑. 꽃잎이 눈앞을 스쳤다.
“…꽃이.”
흩날린다. 직후 커다란 손이 내 손목을 낚아채듯 붙잡았다. 불꽃이 흐트러졌다.
“이놈아, 뭐 하는 짓이냐!”
“…어르신?”
어린 혼돈이었다. 찌푸린 붉은 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삐약이가 반갑다는 듯 크게 날개를 퍼덕였다.
“무모한 짓거리 마라. 네가 다룰 힘이 아니다.”
“하지만, 그게요…….”
돌연 왈칵 목이 멨다. 혼자 길을 잃고 헤매다가 아는 어른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 아직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음에도 짙은 안도감이 밀려들어 왔다.
“성현제 씨가 있는 곳으로 갈, 길은 찾았는데요.”
“단단해 보이기는 하구나.”
어린 혼돈이 벽을 바라보았다. 그의 주위로 무언가가 일렁였다. 솜털 같은 것이 둥실둥실 떠다닌다.
“아, 이 녀석들이 너한테 인사 전해 달라더라.”
“…네?”
“등대지기와 나무늘보는 직접 만난 적 있다고 했었지. 들꽃이 고맙다나.”
“…네?”
잠깐만.
“들꽃이라면, 오래전에 시스템 속에 잠든 초기 제작자 아니에요? 어, 저는 실제로는 본 적 없고, 그때 그건 시스템의…….”
“시스템 속이었지.”
…아. 실제 과거는 아니었지만 들꽃은 시스템에 깃든 존재다. 그러니 그때 나는 진짜 들꽃과 만났다고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과거의 환영 속에도 들꽃이 스며들어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어르신은 어떻게…….”
“녀석들이 잠깐 깨어났었어. 지금은 다시 돌아갔지만.”
벽을 살피며 혼돈이 말을 이었다.
“토끼가 잠시나마 시스템을 혼자 떠안았다더라.”
“예?! 신입은요! 무사해요?”
“괜찮을 거야. 까마득한 후배를 사라지게 놔둘 녀석들이 아니니. 덕분에 나도 가뿐해졌다. 그리고 너도.”
어린 혼돈의 주위를 맴돌던 것들이 나를 감쌌다. 따스한 마나였다. 온갖 버프가 내 몸에 스며들었다.
“저 벽은 여러 세계가 겹쳐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지금 네 힘으로도 열기 힘들 수밖에.”
“그 정도예요?”
세계 하나를 뚫고 들어가는 것도 힘든데 여러 세계라니. 어린 혼돈이 내 등 뒤에 섰다.
“틈을 내도 이내 닫힐 거다. 그러니 곧장 뛰어들어라.”
“어르신.”
“선생님 스킬을 내게 써.”
내 어깨에 손을 얹으며 혼돈이 말했다.
“지금이라면 초월자 상대로도 쓸 수 있겠지.”
“아, 네.”
“그리고 내 움직임을 느껴라.”
어린 혼돈의 다른 쪽 팔이 나를 반쯤 감싸듯 하며 앞쪽으로 내밀어졌다. 그 손에 검이 들린다. 그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이어졌다.
“지금 네가 지닌 힘은 결코 약하지 않다. 단지 제대로 다루질 못할 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스킬을 혼돈에게 사용했다. 오래된 초월자의 움직임이 느껴진다. 호흡이, 마나가, 흐르는 마력과 전신에 번져 가는 힘 하나하나가.
“들어라, 첫째야.”
자신만만하게 그가 말했다.
“나는 가장 오래된 검이다. 앞을 막는 모든 것을 베어 내니.”
검 끝이 벽을 겨눈다. 흔들림 하나 없이 선명한 예기를 품었다.
“너 또한 달빛을 벨 것이다.”
어린 혼돈의 기세가 단숨에 폭발하듯 커진다. 그 모든 것이 한 점에 집중되었다. 더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초월자지만 혼돈은 자신의 힘을 복잡하게 엮고 쌓고 새로운 무언가로 바꿀 줄은 몰랐다. 다른 초월자들처럼 마법 같은 기교를 부리지는 못했다.
다만 벤다. 부수고 잘라 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자르르-
검신을 타고 그 일념이 흐른다. 곧게 뻗은 검이 움직인다. 어린 혼돈의 두 눈이 벽을 담았다. 완벽하게 가로막힌 두터운 세계가 내게도 느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곳에는.
틈이 있었다.
모든 존재는 하나의 완전한 덩어리가 아니다. 작고 더욱 작고 그보다 더 작은 흐름의 집합. 그러니 당연하게도 존재하는 틈새. 그것이 느껴졌다.
이미 갈라져 있는 것이니 베지 못할 것이란 없다.
확신의 흐름을 타고 칼날이 움직인다.
스-윽
아주 찰나, 빛이 그어졌다. 소리도 없이 벽이 갈라지고 작게 벌어진다.
“가라!”
어린 혼돈의 손이 내 등을 밀었다. 닫혀 가는 세계의 틈을 향해 뛰어들었다.
검은 밤의 어둠이 단숨에 밀려나며 가득한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