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52
851화 세이브 미
성현제.
손바닥에 세 글자가 선명하게 그어진다.
세성 길드장.
양손의 글자와 함께 흐려져 가던 기억이 떠올랐다. 짜랑한 목소리가 투덜거리듯 말한다.
‘성. 현. 제. 자, 따라해 봐요. 나는 성현제다. 나는 세성 길드장이다. 나는 한유진에게 진 빚을 열 배로 쳐서 갚겠다. 나는 식빵 테두리도 남기지 않고 잘 먹─.’
“그건 싫은데.”
성현제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젖은 땅의 축축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동시에 지독한 피비린내가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머리는 멀쩡하다. 그 아래 몸뚱이와 두 팔, 손목과 이어지는 손이 천천히 느껴졌다. 손가락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두 다리 또한 제대로 붙어 있었다.
수도 없이 조각나고 조각나고 또 조각나다 보면 사지란 것이 원래 달려 있었던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애초에 없는 것이 보통이 아닌가. 원래의 형체가 안개 속에 가려지고 파편 한 조각이 내가 된다. 현재의 모습이 나인지 과거의 모습이 나인지 혹은 그보다 더 오랜 과거의 나조차 알지 못하는 내가 나인지. 시작을 기억하지 못하는 자의 현재를 과연 진짜 나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성현제는 손을 쥐었다 펼쳤다. 핏물이 조금 얼룩졌을 뿐 깨끗한 손바닥이다. 하지만 그 위를 간지럽히던 펜의 감촉을 기억하고 있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지워진 과거도 흐릿한 현재도 조각날 과거도 상관없었다. 그 두 단어가 그를 증명한다. 이어 또 다른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족관.
그는 두 가지의 기억을 남겨 두었다. 자기 자신과 목적. 손바닥 위를 긋는 이름과 수족관에 가기로 한 약속. 스스로가 완전히 지워진다 하더라도 그 두 가지가 선명히 남아 있다면 흔들림 없이 일어나 걸어갈 자신이 있었다.
금색 눈이 느릿하게 감았다 떠졌다. 그저 단순히 놀러 가자는 별것 없는 목표였다. 깜박 잊거나 무시해 버려도 되는 그런 약속이었다. 하나 그렇기에 오히려 더 깊이 새겨졌다. 일상적이고 가벼운 약속을 굳이 남겨 둔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특별하다는 뜻이기에. 평범함조차 특별하게 바꾸는 그런 누군가.
늘어진 팔이 굽어지고 땅을 짚었다. 흙 사이로 핏물이 배어 나온다. 성현제는 몸을 일으켰다. 이곳은 밤이었으나 동시에 밤은 없었다. 어둠은 하얀 달빛에 쫓겨나 사방이 온통 은빛으로 물들었다. 겨우 남은 희미한 어둠 몇 점이 오로라처럼 흔들리는 달빛 사이에 이리저리 떠밀릴 뿐이었다.
달은 밤에 뜬다. 그러나 지금 이곳을 밤이라 칭할 수 있을까. 밤새가 눈을 감고 낮새가 잠들 수 없는 은색 하늘이.
성현제는 달빛을 올려다보았다. 흐르는 달빛 속에 초승달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피조물을 향하는 신과도 같은 시선이었다. 실상 다르지 않을 것이다.
“분명 제 힘으로 이곳을 빠져나가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성현제의 주위로 금빛이 번득였다. S급은 이미 넘어섰다. 쌓인 힘의 일부와 정원사의 마석을 양육자 칭호로 다듬어 손에 쥐었다. 한 발 더 나아가면 초월자에도 다다를 수 있을 터였으나 초승달에는 못 미쳤다. 겹겹이 묶인 계약 또한 발목을 잡았다.
“그러나 당신 또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할 겁니다.”
잘랑, 잘랑─ 방울 소리가 들려온다. 등골이 쭈뼛해지는 것을 느끼며 성현제는 입꼬리를 올렸다.
작은 달은 만월로 차오르기에 충분한 힘을 지녔다. 정원사의 마석이 마지막 한 방울로, 그릇은 가득 찼다. 그러나 성현제는 스스로를 잃지 않았다. 완벽한 양육자. 그 칭호가 지닌 힘이 성현제가 자기 자신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는 것을 막아 주고 있었다.
한 끝 차이로 힘겹게 간신히 아슬아슬하게나마.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초승달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떠 있었다. 대신 달빛이 흔들렸다. 차르랑, 은빛 사슬이 사방에서 쏟아져 내린다.
콰르릉─!
달빛을 막아 금빛이 폭발했다. 수백 개의 사슬이 터져 나갔으나 그보다 더 많은 수가 황금의 파도를 내리친다. 확연한 힘의 격차 아래 빛이 부서졌다. 조각조각 깨져 흩어진다. 달빛이 피를 머금었다. 칼날처럼 사지를 자른다.
비명 하나 없이 성현제가 흩뿌려졌다. 붉은 흙 위로 다시금 붉게. 방울 소리가 잦아든다. 달빛은 다시금 고요히 흘렀다. 파편들이 다시금 성현제의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창조력마저 품은 강력한 유사근원의 힘이 ‘성현제’를 원래대로 복구하였다. 육신은 물론 걸치고 있던 옷이며 신발까지 완벽히 처음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었다. 그것은 성현제가 그 자신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힘겨운 듯 숨을 길게 내뱉으며 성현제가 드러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번에도 실패하셨군요.”
성현제를 수거한 초승달은 그의 상태를 깨달았다. 모든 것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 달은 만월로서 재탄생하지 못했다.
원래라면 ‘성현제’는 막대한 힘에 밀려 자연스럽게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한유진의 기억이 계속해서 ‘성현제’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단순히 기억을 지우는 것만으로는 ‘성현제’를 없애지 못한다. 양육자를 노리던 요람은 어린 혼돈에게 가로막혔다.
남은 방법은 ‘성현제’를 부수거나 그의 기억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는 것뿐이었다.
잘랑─.
달빛이 흔들린다. 셀 수 없이 산산조각 났다. 육체가 부서지면 그 정신까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성현제는 버텨 냈다. 그는 아직 세성 길드장이며 한유진과 수족관에 가기로 하였다. 아이스크림을 사 주면 한유진은 못 이기는 척 받아들 것이다.
“요람도 사라질 겁니다.”
약간 비틀거리면서 성현제가 일어섰다. 자신의 멀쩡한 다리가 순간 어색하게 느껴졌다.
“어르신이라면 어떻게든 해 주시겠지요.”
신입 또한 결국은 한유진을 도우려 들 것이니. 성현제가 돌아갈 세상은 안전할 터였다. 금색 눈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미소를 머금었다. 그것을 내려다보는 초승달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달처럼 무심하게까지 느껴졌다.
“그쪽 계획이 상당히 틀어지지 않았습니까.”
-너를 가급적 온전하게 완성시키고 싶었다.
변함없는 얼굴과 달리 그 목소리에는 분명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기이할 정도로 이질적이었다. 녹음된 음성을 트는 인형처럼.
콰득! 전투예지로도 반응하기 힘든 속도로 날아든 달빛이 성현제의 어깨를 꿰뚫었다. 성현제는 손으로 달빛이 변한 사슬을 잡아 끊어 냈다.
-완성의 직전까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랐다.
달빛이 쏘아진다. 몇 개의 은색 사슬이 폭발하는 전류에 휩쓸렸으나 여전히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텅! 성현제의 몸이 형편없이 나뒹굴었다. 팔이 부러지고 발목이 비정상적인 각도로 뒤틀린다.
“헉─!”
사슬이 성현제의 목을 휘감았다. 막힌 숨이 반사적으로 토해졌다. 죽이지는 않은 채 장난감처럼 거칠게 끌어당긴다. 사슬을 끊어 내고 또 끊어 내도 달빛은 무한했다. 남은 멀쩡한 다리가 찢기고 부러진 발목이 아예 잘려 나간다.
콰득─ 눈앞이 검게 물들었다. 숨이 끊어진 성현제의 육신이 다시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금색 눈이 떠졌다.
-나의 아이야, 새로운 세계에서의 너는 각성하지 못할 것이다.
겨우 일어선 성현제의 두 다리가 사슬에 꿰뚫렸다. 무릎이 굽어지며 땅에 털썩 무너져 닿는다.
-너는 목소리로도 글로도 네 의사를 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너를 원할 이는 수없을 터이니 그것이 오히려 고통이 될 것이다.
무력하며 타인과의 소통도 불가능하나 탐이 나는 존재. 그것은 결국 물건처럼 취급될 터였다. 아끼는 자도 있을 수 있으나 더없이 잔혹해지는 자도 있을 것이다. 아낌조차 동등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쌓지 못한 채로 네 스스로를 포기할 때까지. 혹은 너를 지탱하는 힘이 사라질 때까지 떠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항상 가장 높은 곳에 올랐던 자가 이제는 가장 낮은 곳을 기어야 할 것이다. 타고난 뛰어남이 결국 위를 향하게 만든다더라도 바닥을 벗어난 순간 새로운 곳으로 끌려갈 것이다.
성현제가 자신에게 쌓인 힘을 소화해 낼 틈도 없이. 초승달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여유도 시간도 없이. 재갈을 물고 목줄을 찬 채 무력하게 짓밟힐 뿐이다.
꿰뚫린 다리 대신 성현제가 날개를 펼쳤다. 그러나 얼마 날아오르지 못한 채 달빛이 날개를 찢었다. 그의 몸이 추락한다. 땅에 닿기도 전에 은색 사슬이 전신을 조각낸다. 몇 번을 일어서고 달리고 날아올라도 끝은 바닥이었다.
성현제는 다시 눈을 떴다. 늘어진 팔과 펼쳐진 손바닥이 보였다. 세성 길드장. 성현제.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니.”
한유진의 수명이 얼마나 될까. 성현제는 끝까지 버틸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한유진의 남은 시간만큼은 장담할 수 없었다. 그가 못 알아보게 나이 든다 하더라도 괜찮았다. 세상이 완전히 변해 버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수족관의 물기 하나 없이 메말라 버린 빈터라 해도 찾아가면 그만이었다. 송사리 한 마리 없다 해도 가장 큰 고래상어를 떠올리고 그려 보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성현제는 다시 일어섰다. 금빛 눈동자가 젖어 들었다. 고인 물방울이 소리도 없이 흘러내렸다. 좌절한 것도 절망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순수하게.
-슬픈 것이구나.
“슬프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저는 그 시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든 순간들을. 성현제의 삶을. 한유진의 수명이 다한다더라도 성현제에게는 아직 죽음이 남아 있었다. 성실한 그의 죽음은 반드시 찾아와 마지막을 선물해 줄 것이다.
그러니 불안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단지 슬펐다.
송태원은 성현제에게 그간의 일을 이야기해 줄 것이다. 술 한두 잔 정도 나눌 시간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했다.
“나는 내 세상에서 살아가고 싶어.”
좀 더. 욕심껏. 어린아이처럼 하고 싶은 것이 넘쳐 났다. 앞으로 있을 그 모든 시간들을 흘려보내기 싫었다.
“몇 번의 생일도 그리고 죽음까지 모두 그곳에서 맞이하고 싶어.”
자신의 생일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의 생일까지. 아직 한유진의 생일은 제대로 한번 챙겨 주지도 못했다. 송태원의 이번 생일은 전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어쩌면 이번에도 두 사람을 포함한 다른 모든 이를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리워하길 바랐다.
그곳에서는 무덤지기조차 즐거울 것이다.
“내가 나를 기억하고서.”
달빛이 비처럼 쏟아 내려 눈물을 가렸다. 흐릿한 시야가 붉게 얼룩진다. 상대가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음에도 금빛이 넘쳐흘렀다. 전류는 주인의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사납게 튀어 올랐다. 몇 번이고 또 몇 번이고.
그러나 기억은 무자비한 폭력 속에 서서히 지워져 갔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그 두 단어를 보고도 얼른 연결 짓지 못했다. 수족관. 물고기가 헤엄치는 거대한 유리 벽. 그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누군가가 그의 손을 잡고 펜을 움직인다. 낯선 공간이었다. 빛이 심장을, 머리를 파고든다. 겨우겨우 연결 짓던 기억이 뚝 잘리듯 끊어진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분열된 글자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숨 쉬는 법조차 떠오르지 않았지만 성현제가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은 깨달았다. 맑은 물속을 물고기가 맴돈다. 공기 방울이 솟아올랐다. 너른 공간, 높은 천장. 하늘에서 달빛이 내린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아무것도 없는 손바닥에 글자가 나타나는 환영이 보였다. 그는 수족관에 가기로 약속했다. 수족관이 무엇인지 생각나지 않았다. 물에 가라앉듯 몸이 무거웠다.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진 육신이 다시금 부서진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성현제라 이름 붙은 세성 길드장은 손을 뻗었다. 달빛으로 가득 찬 하늘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하늘이 원래 저러했던가. 이제 곧 이 손이 잘려 나갈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파편으로 나뒹굴 것이다.
막아야 한다는, 반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그리고 분홍색 털실.
“…털실.”
어느새 분홍색 털실이 내려와 있었다. 아니, 그로부터 뻗어진 것인 듯도 하였다. 초승달이 고개를 들었다. 털실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성현제는 반사적으로 털실을 붙잡았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목소리와 함께 기억이 흘러들어 왔다. 하늘에서 털실 뭉치가 데굴데굴 떨어진다. 은빛이 아닌 새파란 하늘 위를 가로지르는 금빛 용과 쏟아져 내리는 핫핑크색 털실.
‘손 내미세요.’
이미 내밀고 있었다. 뜨개바늘 한 쌍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비록 저는 초대받지 못했지만 선물은 드리고 가겠습니다. 치매 예방하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동시에 묻혀 가던 기억들이 우르르 터져 나왔다. 성현제. 세성 길드장. 수족관. 분홍색 털실. 한유진. 송태원. 그의 길드와 그의 세상. 화려한 폭죽처럼 머릿속을 반짝반짝 물들인다. 성현제는 몸을 일으켰다.
사라졌던 금빛 전류가 다시금 그를 감싼다. 그리고.
쩌억─ 하늘이 갈라진다. 털실이 흩날리는 끝에 황금색 날개가 펼쳐졌다.
“구하러 왔습니다, 공주님!”
한유진이 외쳤다. 성현제는 더없이 즐겁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