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67
에필로그 (10)
‘언젠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겠지.’
모든 근원이 전부 다 무사히. 정 안 되면 나도 있고. 예림이와 닮을 수도 있다 생각하니 데리고 오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금은 안 되지. 역시 한동안은 이 이상은 안 돼.
그 밖의 초월자들의 동향을 들은 뒤 성현제가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우리를 감싸고 있던 막이 사라지며 박하율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그럼 형 연예계 진출하는 거예요? 제 후배?”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달라붙으려고 드는 박하율을 밀어내려는 찰나 어르신의 회초리가 한발 먼저 하율이 놈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애 놀란다.”
“으아악, 아파라! 아무튼 형! 제가!”
“그냥 개인 방송 한다고, 개인 방송. 그것도 확정은 아니고.”
후배 소리 듣자마자 방송국에는 발끝도 담그기 싫어졌다. 애초에 무슨 연예계야. 차라리 아홉 시 뉴스에 나오고 만다.
“…개인 방송.”
하율이 놈이 날뛰는 가운데 이번에는 성현제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눈을 내리뜨고 얼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어디 모범적인 애수의 형상화로 전시해도 될 모양새로 나를 흘끔 쳐다봐 온다. 뭐요, 또.
“또다시 나를 버려 두고 다른 사람들과 즐기려는 건가.”
“즐기긴 뭘 즐겨요! 집에 가려는 건데.”
“한유진 군은 물론이고 송태원 씨의 생일마저 챙겨 주지 못했건만…….”
“아 그거, 소영 씨가 대신 챙겨 줬습니다. 저도 송 실장님 생일 챙겨 드리지 못한 건 아쉬웠어요.”
소영 씨가 저지른 짓들에 대해 말해 주자 성현제가 더더욱 울적해했다.
“내 삶과 죽음이 모두 나를 두고 떠나다니.”
“떠난 건 그쪽이겠죠.”
“홀로 외로이 남은 이가 어긋난 길을 걷는다더라도 괜찮다는 건가.”
“바로 옆에 어르신 계십니다만. 무서우니까 삐뚤어지진 마시고.”
“내 양육자는 너무나도 매정하군.”
“시끄러워요, 다 큰 어른이.”
“애정이 식었어.”
“돌봐야 할 애가 넷이나 되는 몸뚱입니다. 내일모레 불혹은 알아서 잘 사십쇼.”
성현제가 흑흑 없는 눈물을 훔쳤다. 그 옆에서 박하율도 징징거렸다. 왜 갓난애가 셋으로 늘어난 기분이 들지. 하늘이가 더 어른스럽겠다.
“박하율, 네가 무슨 소리를 하든 연예인 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제가 진짜 잘해 드릴 수 있는데요, 형! 꿈 세계에 형 얼굴을 도배해서 사람들에게 확실하게 인식시키는 거예요!”
“…무슨 세뇌하냐. 아무것도 하지 마! 자칫했다간 오히려 죽은 한유진 기억만 더 강해진다고!”
박하율이라면 그런 실수 하고도 남았다. 내가 시키는 일 말고는 절대 아무것도 손대지 말고 얌전히 있으라고 거듭 당부했다.
“성현제 씨도 어르신 말씀 잘 듣고 사고 치지 마시고요. 그래도 성현제 씨에겐 어르신이라도 계시지, 송 실장님이 더 걱정이라니까요.”
“우리 송태원 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황림이 갑자기 달라붙었더라고요. 그게 아무래도 수상쩍습니다.”
황림 그 인간이 아무 이유 없이 송 실장님에게 붙었을 리 없었다. 정원사와 두 사람의 관계를 생각하자면 뭔가 꿍꿍이가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내 말에 성현제가 애석해 마지않는 눈빛을 머금었다. 그러곤 어르신을 돌아보았다.
“휴가계를 제출하겠습니다.”
“헛소리 말고 그만 돌아가자.”
“빈아, 할아버지 빠빠이~ 하자. 세성 아저씨도 고마워요~.”
덕분에 걱정 하나는 덜었다. 어르신의 뒤를 따라 미련 가득한 표정의 성현제도 사라졌다. 그래도 저렇게 세상에 미련 짙은 걸 보니 좋네. 그만큼 살 만하다는 게 아니겠냐.
‘다음에 또 언제 볼 수 있으려나.’
방금 본 것도 진짜는 아니었지. 그동안은 오히려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얼굴을 보고 나니 약간 쓸쓸해졌다. 성현제도 같이 돌아갈 수 있으면 좋을 텐데.
“하율아, 슬슬 통로 열어라.”
“유진이 형, 개인 방송도 매니저 필요해요!”
“됐거든. 할지 안 할지도 모른다니까.”
“저 편집도 기초적인 건 할 수 있어요. 더 배우면 돼요. 꿈 세계에선 장비도 엄청 비싼 것 다 갖추고 편집할 수 있다니까요!”
“개인 방송에 웬 편집이냐.”
그냥 혼자 찍어서 올리는 거잖아. 내 말에 박하율이 답답해 죽으려고 했다.
“요즘 전문적인 갠방은 스태프도 여럿이에요! 혼자 해도 편집은 필수고요. 게다가 해외에서도 먹히려면 자막도 넣어야 하잖아요. 형 자막 만들 줄 알아요?”
“…아니.”
아이고, 형! 하며 박하율이 한동안 알 수 없는 소리들을 떠들어 댔다. 음, 뭐라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역시 방송은 관둘까. 차라리 회귀 전 던전 정보 가지고 예언가 노릇을 하고 말지. 그러고 보니 채터박스 밑에 있던 예언자 무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니까요, 형!”
“어, 그래.”
“네, 그럼 제가 시스템 통해서 매니저 해 드릴게요!”
“…뭐? 아냐! 됐거든!”
기겁하며 거절하는 나를 명우가 말렸다.
“매니저까진 아니더라도 시스템 연결은 받아. 꿈 세계의 주인이 도와주면 시스템으로 소통하기 쉬워지니까.”
“맡겨만 주세요!”
“그리고 유진아, 정말로 은혜는 안 데리고 갈 거야?”
– 삐이.
내 팔찌의 보석에서 파랑새가 날아올라 명우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은혜에게 미안한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혜를 데리고 가려면 신살창을 놓고 가야 하니까.”
우리 세상에서 얻은 아이템들은 다시 가지고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세상 밖에서 얻은 아이템에는 제한이 주어졌다.
“신살창과 교환 가능한 아이템은 은혜밖에 없고.”
– 삑 삐이.
은혜가 아쉬워하면서도 자랑스러운 듯 두 날개를 으쓱거렸다. 우리 세상에 속하지 않는 아이템을 가지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대가가 필요했다. 내 업적은 내가 한유진이 아니게 되어 버리면서 적용할 수 없게 되었고, 그 밖의 가장 쉬운 방법은 동일 가치의 우리 세상 아이템과 교환하는 것이었다.
신살창의 등급은 시스템에 표시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은혜는 원래 L급이지만, 마나의 샘을 얻고 성장을 하며 초승달과의 싸움까지 거치면서 신화급이 되었다. 그럼에도 1대1 교환은 불가능해 그 밖에 내가 가진 아이템을 상당수 내놓아야만 했다.
“솔직히 네 안전을 지키는 데는 은혜가 최적이라고 생각해.”
명우가 신살창을 두고 가라는 소리는 차마 못하고 빙그르 둘러말했다. 사실 냉정하게 생각한다면 은혜를 데리고 가는 게 맞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떼어 놓겠어. 두 번 다시는 안 되지.”
설사 신살창이 아무런 힘없는 막대기에 불과하더라도 나는 결코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은혜가 채워진 팔을 들어 보였다. 은혜의 힘은 명우 곁에 남아 우리 세상으로 들어가게 되면 평범한 장신구가 될 팔찌가 가볍게 흔들거렸다.
“대가를 치를 만큼의 업적을 쌓으면 은혜도 다시 데리고 올 수 있잖냐.”
“…유진이 네가 한유진으로 받아들여지기만 해도 정산 다시 해서 은혜를 보내 줄 수 있지만, 그 전이 문제잖아. 집에 무사히 돌아가면 누가 널 건드리겠어.”
“너무 걱정하지 마. 나 평범한 F급으로도 5년이나 버텼다. 별다른 스킬도, 아이템도 없이 말이야.”
아무렴 두 번 못 버틸까. 심지어 기간도 훨씬 짧을 거고 동생이 날 기다리고도 있는데.
– 형! 명우 형! 준비됐어요!
박하율이 다시 거대 꽃으로 돌아가며 외쳤다. 저 모습이어야 능력이 더 잘 써진다나. 저놈 역시 본체가 꽃인 게 아닐까.
유빈이를 감싼 포대기를 재차 점검하고 삐약이를 불러 포대기 앞에 달린 주머니에 넣었다. 빠뜨린 건 없고, 좋아.
“허니, 몸조심해야 해요! 빈아, 잘 가!”
“유진아, 한동안은 꿈 세계에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있으면 꿈속으로 들어와. 무모한 짓 절대 하지 말고!”
– 안녕, 다음에 또 보자~.
– 삐이이! 안녕!
거대 꽃이 흔들거리는 아래 우리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가 서서히 나타났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키고 발을 내디뎠다. 유빈이는 아직 비각성자 수준에 내게 속한 아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막힐까 봐 긴장이 되었다. 두 팔로 빈이와 삐약이를 감싼 채 통로 너머로 들어갔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진다. 단단한 땅의 감촉을 발아래로 느끼며 반사적으로 감았던 눈을 떴다.
벤치가 보였다. 하늘은 어둑하고 가로등 불빛이 켜져 있었다.
“…너는.”
기다란 벤치에 한 아이가 앉아 있다. 홀로 오도카니.
“어릴 적의…….”
어린 한유진이 나를 바라봐 왔다. 유현이를 두고 오려고 했던 그때의 나였다. 동생을 데리고 오며 대신 남겨진 어린 한유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어린 시절.
홀로 남겨진 어린 내가 내 품의 더욱 어린 아이를 바라보았다. 작은 입술이 움직였다.
“아직이야?”
내게 물었다. 계속, 이곳에서. 입을 꽉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직.”
짧게 숨을 내뱉고는 다시 말했다.
“앞으로도, 아마도. 나는. 어른이거든.”
재차 숨이 내쉬어졌다. 목 안쪽이 약간 답답해진다.
“나는, 분명 전보다 더 나를 보살필 수 있게 되었어. 그럴 여유도, 마음도 생겼지.”
예전에 비해 조금쯤은 더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나를 위한 일을 좀 더, 죄책감 없이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는 건, 역시 불가능해. 이미 다 커 버렸거든.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품 안의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벤치에 앉아 있는 아이를 마주보았다.
“이제는 내가 내 아이들에게 아이다운 시간을 줄 때야. 내가 받지 못했던 것만큼. 나는 그러고 싶고 그걸로 충분히 만족해.”
어린 나는 그 나이다운 삶을 누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로 인해 현재의 나 자체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의 ‘한유진’에게 만족했다. 이만하면 잘 살았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테니까.
그러니 과거는 과거로 둘 수 있었다.
“나는 이제 다시는 돌아가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거야.”
시간을 되돌리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그 또한 완전히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현재였다.
“그러니… 미안.”
무심코 이가 악물려졌다. 지금 이 공간의 정체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어린 한유진이 눈을 깜박였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벤치에서 내려선다. 이제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응, 알았어.”
대답을 한 아이가 작아진다. 다섯 살. 동생을 품에 안기 전의 한유진이었다. 아무것도 책임질 필요 없는 어린아이. 작은 가방을 메고 쪼그리고 앉아 작은 운동화의 찍찍이를 꾹꾹 눌러 확인을 하더니 다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한다.
“유, 유진아!”
반사적으로 불렀다. 어린 내가 나를 돌아보았다.
“왜?”
“어딜… 가는 거니.”
“불러.”
“…부른다고?”
“응. 혼자 있대.”
가야 한다면서 어린 내가 돌아섰다. 다시금 달린다. 어디선가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잠깐 멈칫하는 사이, 어린 한유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커다란 날개가 환영처럼 흔들리는 광경이 언뜻 보인 듯도 하였다.
빠앙─!
자동차의 경적이 귀를 때렸다.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익숙한 도로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줄지어 달리는 차 사이사이로 오가는 행인들이 보인다. 한글과 영어가 뒤섞인 간판이 여기저기 붙어 있다. 깜박거리며 신호가 바뀌었다.
우리 세상이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어쩌면 단순한 환각일 뿐인지도 모른다. 내가 통과해 온 곳이 꿈의 세계니까. 하지만… 거짓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빈이와 삐약이를 살펴보며 숨을 들이켰다. 탁한 공기가 코 안으로 찔러 든다. 저놈의 자동차들, 얼른 마석 연료로 싹 바꿔야 공기가 좋아질 텐데. 빈이 마스크라도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그래도 이젠 혼자 기다리고 있진 않을 테니까.’
진짜든 환상이든 마음은 좀 후련해졌다. 부른다는 그 누군가가 잘 돌봐 주기를 바랐다.
“자, 이제.”
여기가… 일단 서울인 것 같은데. 보자, 지하철 입구다. 신당역.
‘하율이 녀석, 왜 여기로 보내 준 거냐.’
이 동네 살았었나. 해외가 아닌 것만 해도 다행이지만, 아무튼 지금의 나는.
‘땡전 한 푼 없지.’
지갑도 없고 휴대폰도 없었다. 빈이 먹일 마석은 챙겨 왔지만 당장 현금화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숨 한 번 푹 내쉬곤 가까운 가게로 들어갔다.
“실례합니다, 이 근처에 경찰서가 어디 있나요?”
일단 집부터 찾아가야지. 우리 집 말고 한동안 지낼 새 집 말이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파출소가 있었다. 삐약이더러 잘 숨어 있으라 당부한 뒤 애 안고 헐레벌떡 파출소를 향해 뛰었다. 숨을 헐떡이며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섰다.
“저기, 후우. 제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리는 내게 경찰관 한 명이 다가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우는 애 달래느라 잠깐 가방을 내려놨는데, 없어졌어요…….”
빈이 외모가 독특하지만 명우가 시스템을 이용해 평범하게 느껴지도록 덧씌워 놓았다. 울상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휴대폰도 지갑도 다 거기 들었는데… 애기 젖병도요. 아무것도 없어서 얼른 집에 가 봐야 하는데 지하철비 좀 빌릴 수 있을까요?”
딱 천오백 원이면 됩니다. 바로 갚을게요. 내가 홀몸이면 그냥 걸어가겠는데 애가 있어서 말입니다. 날도 너무 덥고요. 다행히 애기를 봐서인지 분실신고 후 집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였다. 어휴, 마석부터 바로 하나 현금화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