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68
에필로그 (11)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한시름 놓았어요.”
“우리 애가 결혼을 일찍 했는데 손자가 딱 그만할 때라.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이제 제법 혼자 잘 앉는데 참 귀여워. 그 애는 몇 개월 되었나.”
“이제 5개월입니다.”
실제로는 4개월이 채 안 되었지만 빈이 성장이 조금 빠르다 보니 5개월이라고 대답했다.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들이 지나갔다. 오랜만에 보는 서울은 변함이 없었다. 다들 잘 지내고 있겠지.
“요즘은 던전 터지는 일도 없고, 평화롭지요.”
“그렇지. 세상이 망하느니 어쩌니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정부와 헌협은 이제는 별일 없을 거라고 말하지만 도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애 키우기 무서운 세상이야.”
“괜찮을 거예요. 괜찮아야죠.”
슬쩍 던전 관련 이야기를 꺼내 봤지만 경찰관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내 외모는 그대로인데 한유진 닮았다는 말조차 없네. 동일인물은커녕 비슷하다는 인식조차 할 수 없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곤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내렸다. 번듯한 대단지 아파트를 보자 절로 흐뭇해졌다.
‘집이 제일 걱정이었는데 말이야.’
돈은 당연히 없고 가지고 올 수 있는 마석에도 한계가 있었다. 마석이나 아이템을 현금화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등급 높은 마석과 아이템은 관리가 철저하기 때문이었다. 경력 전무의 F급이 팔겠다고 나섰다간 자칫하면 감옥행이다.
결국 하급 마석만 급한 대로 처분해 어디 저렴한 월세 방이라도 구해야 하나 싶었는데.
“보자, 몇 동이더라.”
성현제가 보낸 엽서를 꺼내들었다. 엽서 아래쪽에 아파트 주소와 비밀번호가 적혀 있었다. 세성 길드장님의 별장들 중 하나였다.
‘추석 때 거긴 아닌 모양인데.’
아파트가 몇 채냐. 아무튼 비밀리에 둔 안전가옥 같은 거라 몰래 지내기 좋다고 하였다. 관리인은 매달 말일 아침 일찍 방문해 청소만 한다니까 그때만 잠깐 나가 있으면 되고. 관리비 세세하게 확인하는 사람도 없을 거라고 했지. 지난번의 보안 철저한 펜트하우스와 달리 여기는 일반 아파트였다. 들어가는 입구도 엘리베이터도 평범하게 비밀번호만 누르면 되고 집에 따로 방범장치도 없었다.
“집 좋네~.”
– 삐약!
말이 일반 아파트지 거실 넓이 봐라. 방도 네 개는 되는 듯했다. 숨어 있느라 갑갑했던 삐약이가 파다닥 날아올랐다. 가전제품도 꽉꽉 들어차 있구만. 마침 오늘이 말일이라 관리인은 다녀간 후였다. 한 달간은 신경 안 쓰고 지낼 수 있겠네.
집을 한번 둘러보고 침대가 있는 침실로 들어갔다. 드레스 룸에는 계절별 옷이 걸려 있고 이불장에 이불도 다양하게 채워져 있었다. 욕실용품까지 완벽히 구비된 게 무슨 호텔 같구만. 정작 집 주인은 여기 한 번도 안 왔을 텐데 말이야.
“오, 시계도 있잖아. 하나 슬쩍 내다팔까.”
너무 비싼 거라 의심받는 거 아니냐. 일단 인벤토리에서 아기 침대를 꺼내 빈이를 눕혔다. 명우가 만들어 준 특수 아이템이라 가져오느라 A급 장비 하나와 교환해야 했지. 환경이 휙휙 바뀌어 피곤했던지 빈이가 인형을 꼭 붙잡고서 이내 잠들었다.
“나도 좀 졸리네.”
– 삐약.
“오늘은 푹 쉴까.”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기가 무섭게 졸음이 밀려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서 깊이 잠에 빠져들었다.
* * *
“빈아, 착하게 잘 있을 수 있지?”
“아우우.”
조그만 손이 내 손가락을 움켜잡았다. 두고 가고 싶진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빈이를 어르며 무해의 왕의 서랍을 꺼내들었다. 71번 서랍은 명우와 하늘이의 도움을 받아 충전을 하고 기능도 바꾸었다. 여전히 내부 공간을 쓸 수 있었지만 그 크기는 확 줄어들었다. 예전에 비해 훨씬 아담해져 마나 소모도 적어졌다.
대신 그 남은 부분으로.
“71번.”
큐브 형태의 서랍에 빛이 감돌며 형태가 변화한다. 순식간에 커진 아이템이 인간으로 변했다. 서랍 안의 71번을 밖으로 소환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어… 응.”
노아의 모습을 한 71번이 내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이번에는 노아 씨구나……. 71번 소환 기능을 만들면서 모습도 바꾸려고 했다. 아는 얼굴이면 아무래도 부담도 가고 다른 사람 눈에 띄면 곤란해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결국 내가 아는 사람 중 랜덤이 되고 말았다. 여전히 내 호감도가 영향을 미치는지 유현이가 가장 많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럼 나 없는 동안 유빈이를 부탁할게.”
71번은 서랍 속에서처럼 만능 집사는 아니었지만 밖에서도 평범한 인간 수준의 활동은 할 수 있었다. 아이도 제법 잘 보살폈다. 71번이 없었더라면 아이를 맡길 곳부터 찾아야 했겠지.
“삐약아,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아빠한테 오는 거야. 알겠지? 위험하다 싶으면 빈이도 데리고서. 여기 미니미니 쿠키야.”
– 삐약!
아기 침대에 보호막 기능도 붙어 있었지만 혹 모르니까.
“자, 리모컨. 케이블 TV도 연결되어 있더라. 그렇다고 TV에 너무 빠져 있진 말고.”
– 삐약삐.
눈이 내리는 나무야, 잘 부탁한다. 눈나무도 이름을 따로 지어 줘야 하지 않을까. 눈… 설이, 는 이미 있고. 흰 나무니까 백목. 나무 수 자를 쓸까? 백수…는 아니고. 근데 지금은 빈이가 눈이 내리는 나무, 근원이잖아. 음, 천천히 생각하자.
머릿속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며 집을 나섰다. 소량의 F급 마석은 비각성자라도 헌터 마켓에 가 정식으로 판매할 수 있었다. 던브 때 죽은 몬스터 마석을 우연히 줍거나 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F급 두어 개 팔아 봐야 몇 푼 안 된다. F급은 가지고 있지도 않았지만.
정식 판매 루트는 E급부터는 헌터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D급부터는 출처도 확인했다. 뭐, S급 헌터라면 상급 마석을 떡하니 내놔도 별다른 절차 없이 사들이겠지만. 그러니 지금의 내가 중급 마석을 판매하려면 암거래 쪽으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B급 이상은 위험하고. D급이 적당하겠지.’
약해 보이는 놈이 B급 마석을 들고 나타났다간 뭐 더 가진 거 없나 따라붙는 꼬리가 분명 있을 테니까. C급도 좀 그렇고, D급 몇 개면 한동안 넉넉할 것이다.
6월로 접어든 후덥지근한 하늘 아래 차비가 없어 도보로 열심히 걸어갔다. 휴대폰이 있었으면 집안 물건 몇 개 중고거래로 후딱 팔아치웠을 텐데. 돈 생기면 폰부터 하나 장만해야지. 명우가 주민등록번호 그대로 쓸 수 있도록 처리해 놨다고 하긴 했는데. 아마 인식 관련 적용을 해놓은 거겠지.
“저기… 실례합니다…….”
기억을 더듬어서 중하급 헌터 물품을 밀거래 하는 가게 중 가까운 곳을 찾아갔다. 겉보기엔 작고 허름한 수족관이었다. 쇼윈도는 대형 수조들로 가려진 채 바깥쪽에 열대어 금붕어 구피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내부는 겉보기보단 깔끔했다. 통통한 금붕어들과 알록달록한 열대어들이 수조 속을 헤엄친다.
“음, 친구가 알려줘서 찾아왔는데요.”
주눅 든 티를 팍팍 내며 가게 안쪽을 향해 말했다. 멋모르는 초보자처럼. 초짜 취급당하면 제값 받고 팔진 못하겠지만 대신 안전할 테니까.
“친구? 어떤 친구요.”
귀찮은 티가 나는 목소리와 함께 서른 중후반 즈음의 가게 주인이 걸어 나왔다. 열대어 모양의 큼직한 귀걸이를 보니 하얀 씨가 생각나네.
“그게, 여기 가면 팔 수 있을 거라고…….”
“팔긴 뭘 팔아요. 내가 팔지 사진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강에 풀어 주진 마시고.”
“물고기 말고요, 이거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D급 마석 하나를 꺼내들었다. 사장님이 미간을 확 찌푸리며 내 팔을 낚아채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아니 어떤 놈이 이런 초짜를 보냈어? 귀찮아 죽겠네.”
너무 어설프니까 오히려 안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혀를 쯧 차더니 나를 향해 손을 내민다.
“개당 오십.”
“네? 아니 그건 너무…….”
“싫으면 돌아가고.”
D급 마석 평균 매입가가 이백인데! 최상급이면 삼백 이상도 나가고. 암거래라도 마석은 워낙 환전성이 좋아서 공식 매입가의 절반 이상 쳐주건만 너무했다.
“…마켓에서는 최하급이라도 백은 한다던데요.”
“싫으면 돌아가고.”
너무해. 흥정하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고 D급 마석들 중 제일 품질 낮은 걸로 네 개 꺼냈다. 그래 봤자 다 상급은 되었지만. 아까워라. 마석 대신 5만 원권 40장이 든 봉투와 함께 명함이 내밀어졌다.
“다음에는 이 번호로 문자 남기고 찾아와요. 여기 이 숫자를 보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어쨌든 무사히 돈이 생겨 수족관을 나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많이 뜯겼지만 말이야.’
뭐, 정확히는 첫 거래 수수료를 포함한 거긴 하겠지만. 명함도 평범한 물건은 아닐 터였다. 역시나 인벤토리에 들어갔다.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두 번째 거래부터는 제대로 된 거래를 해주겠지.
사실 저런 뒷거래 루트는 하급 헌터에게는 필수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신입 헌터는 던전에 들어가 봤자 배당이 얼마 되지 않았다. 경험 쌓게 해주는 거라며 마석 부스러기 하나 주지 않거나 되레 돈을 뜯어내는 경우도 있었다.
강해지려면 경험도 필요하지만 장비도 필수였다. 일정 이상 장비를 갖추어야 제대로 된 팀원 취급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돈을 못 버는데 어떻게 장비를 장만할까. 원래 넉넉한 형편이 아니고서야 결국 마석을 슬쩍하는 수밖에.
‘인벤토리가 있으니 과욕만 부리지 않으면 몰래 챙기긴 쉽지.’
그렇게 빼돌린 마석은 정식 루트로 팔지 못하니 뒷거래를 이용했다. 암암리에 다들 알고 있는 일종의 관행 같은 것이기도 하였다.
‘법적으로 던전 보상 비율 최저선을 정해 놓으면 좀 나아질 텐데.’
헌터 자율이라. 던전 안은 영내라고 보기도 힘들고 공권력이 미치지도 못하니 대부분의 국가가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어떻게 못 바꾸나. 법으로 정해도 또 무력 앞에서는 별 소용없긴 하겠다만…….
“헌터 등록을 하긴 해야겠지.”
이백만 원 가지고 얼마나 버티겠어. 휴대폰 개통하고 생필품 좀 사고 나면 얼마 안 남는다. 심지어 옷도 필요했다. 성현제 옷은 죄다 커서 실내용으로 가운 정도나 입을까. 역시 시계를 팔아 버릴까 보다.
휴대폰부터 장만하고 은행 가서 통장도 새로 만들었다. 내 주민등록번호를 써도 정말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다들 너무도 태연하니 살짝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지하철을 타고 서초 쪽으로 향했다. 명우가 도담과 해연 근처로는 가급적 가지 말라고 당부했지만 한 번은 가고 싶었다. 역내에 커다랗게 해연 길드 방향을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그 아래로 도담 사육소도 새롭게 넣어져 있다. 출구 쪽에는 피스 사진이 들어간 광고도 보였다.
‘카페와 기념품 샵.’
피스 사진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계단을 올랐다. 눈에 익은 풍경은 변함이 없었다. 가벼운 옷차림의 행인들이 길을 따라 오간다. 그중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손에 도담 팸플릿을 들고 사육소에 대해, 한유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씁쓸하게 무거운 기분 속에 도담 빌딩으로 향했다. 그 앞에 다다른 순간 기막힘이 우울함을 퍽 쳐서 날려 보내 버렸다.
“…와.”
진짜 내 동상이야. 심지어 그 앞에서 관광객들이 사진 찍고 있어. 즐겁게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에 뒷목이 화끈거렸다. 실제로 보니 더 끔찍하구만. 내가 한유진이라는 걸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는 게 지금만큼은 천만다행이었다. 누가 알아챘다간 쪽팔려서 정말로 죽어 버릴 것이다.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
으아아아아악 창피해! 집에 돌아오면 저것부터 없애 버릴 거다! 동상을 차마 제대로 쳐다보지 못한 채 지나쳐갔다. 목적지는 다름 아닌 기념품 가게였다. 그새 확장한 가게에도 사람이 많았다. 처음 보는 상품들도 있었다. 여름이라서인가 부채와 미니 선풍기도 파네. 미니 선풍기 가격을 보고 부채만 하나 집어 들었다. 비싸. 빈이 줄 겸 피스 인형 하나 사 갈까. 삐약이도 좋아 할 거 같은데. 음, 비싸네.
눈길을 끄는 것은 많았지만 원래 목적은 포토 카드였다. 그러니까 사진. 새로 산 저렴한 지갑 속에 넣어 둘 가족사진. 한동안 직접 만나진 못하니까 사진이라도 한 장 가지고 싶었다. 유현이와 예림이, 피스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지.
‘설이와 별이는 어쩔 수 없어도 결이랑은 한 장 찍어 둘걸.’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그땐 사진 찍기 쑥스럽고 거부감도 들었었는데 말이야. 역시 남는 건 사진이라는 건가.
옆의 카페에는 줄이 제법 길었다. 여기까지 온 김에 들러 보긴 해야겠지. 내가 도하민 얼굴 보러 줄까지 서게 되다니. 그래도 운 좋으면 예림이나 노아 씨가 방문할지도 모르니까. 유현이야 올 리 없고.
그놈의 햄스터 장식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웠다. 하민이 놈 진짜 황금 금동이 만들었구나. 카페에 들어섰지만 정작 도하민은 보이질 않고 낯선 카페 알바생만 있었다. 김민의는 잠깐 나왔다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장사 잘되네. 날도 더우니 시원한 카페라떼를 주문했다.
‘커피는 여전히 맛없구만.’
애들 보고 싶다. 텅 빈 앞자리가 허전했다. 원래라면 이내 채워졌을 자리인데. 내가 한유진이라고, 소리치며 사육소로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거 생각보다 더 쓸쓸하네. 빈이랑 삐약이가 있어서 다행이지.
유리잔을 비우고 카페를 나섰다. 다시 지하철로 향하는데 익숙한 차가 신호를 받고 멈춰 서 있었다.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는 검은 차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신호가 바뀌며 차가 멀어져간다. 뒷좌석 손잡이 쪽에 무언가 알록달록한 것이 묻어 있었다. 아마도 작은 손이 직접 차문을 열려고 했겠지. 무심코 미소가 머금어졌다.
“얼른 집에 가야지.”
피스 인형을 들고 아파트로 돌아갔다. 마트는 유빈이와 함께 가기 위해 폰으로 유모차를 검색해 보았다.
“…너무 비싸!”
아니 뭐가 이렇게 비싸냐. 기본 몇십에 백만 원이 넘는 것도 많잖아. 인벤토리 수납 가능 던전 부산물 제작 유모차는 무려 이천만 원이었다. 명우가 만들어 준 거 가지고 올걸. 인벤토리가 부족해도 손에 들고 오면 되는 거였는데.
“…빈아, 한동안은 아빠가 안고 다녀야겠다.”
빈이가 까르륵 웃었다. 요 앞 대형마트 집 앞까지 배송해 주겠지. 밥솥 있으니까 쌀이랑 반찬거리 좀 사고, 빈이랑 내가 갈아입을 옷에 아기용 목욕제품……. 아파트에 웬만한 건 다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다. 빈이 슬슬 보행기도 사줘야 하는데. 유아용 의자도 두고 왔고.
돈 나갈 곳이 생각보다 더 많았다. 빈이와 함께 마트로 가 필요한 것들을 산 뒤 다시 혼자 집을 나섰다. 만약 세성 쪽에 걸리면 아파트에서도 쫓겨날지 모른다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성현제 엽서 들이대며 그쪽 길드장님이 빌려줬다고 우겨 볼까.
리에트가 화끈하게 깔고 앉았던 각성센터는 그새 다시 재건되었다. 헌터 등록도 이제는 각성센터 쪽으로 가야해서 버스를 한참 타고 갔다.
‘기억과 달라졌네.’
무너진 김에 아예 바꾼 것일까. 부지도 훨씬 커지고 건물 수도 더 늘어났다. 안내판을 확인하고 헌터 등록소를 향해 걸어갔다. 아직 시범 단계지만 각성 업무도 시작해서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전투계와 전투보조, 힐러 각성만 가능하네.’
그 셋을 묶어서 일반 각성, 나머지를 특수 각성이라 칭하는 모양이었다. 특수 각성은 아직 준비 중이고 현재는 일반 각성만 가능했다. 홈페이지 안내에 전투 관련 소질과 적성이 없다고 생각되시는 분은 특수 각성 센터 개장을 기다려 달라고 적혀 있었다.
‘이러면 사람도 덜 몰릴 거고.’
현대인은 아무래도 전투와는 거리가 머니까 말이야. 게다가 일단 내 사례가, 흠, 유명해졌으니 특수 각성을 원하는 사람들이 더 많겠지.
내부는 깔끔하고 넓었다. 접수처로 향하는데 커다란 모니터에서 각성센터 홍보 영상이 흘러나왔다.
[특수 각성센터? 전투계가 최고 아닌가요?몬스터를 물리치고 던전을 공략하고! S급 헌터 진짜 멋있어요!]
…조금 불안해지는데. 호들갑스러운 목소리 뒤에 아니나 다를까, 내 동상이 나타났다. 아니 최소한 사진을 써 줘! 왜 자꾸 동상을 집어넣는 건데!
[여러분도 될 수 있습니다! 헌터계의 새로운 샛별, 특수계 각성자!]도담 사육소장의 업적…을 늘어놓으며 여러분 특수 각성 하세요~ 하는 홍보 영상이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광고 마지막 하단에 조그맣게 특수 각성에는 별도의 비용이 필요합니다, 라는 문구도 보였다. 일반 각성과 다르게 자기 적성을 찾아야 하니 돈과 시간이 드는 각성이긴 하지. 무슨 학원광고 같구만.
각성자 등록 접수를 하고 팸플릿 하나를 들고 대기석에 앉았다. 보자, 마켓과 헌터 협회 2건물도 그대로 있고. 응? 몬스터 부서가 따로 생겼네. 기승수 때문인가. 그 밖의 처음 보는 시설들이 몇 눈에 띄었다. 확실히 바뀌긴 바뀌었구나.
팸플릿을 훑은 뒤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F급, F급, E급, F급, C급.’
떡잎 스킬은 목록에서 사라졌지만 집중을 하자 각성 등급과 성장 가능성이 눈앞에 나타났다. 옛날 생각나네. 벌써 1년이 훌쩍 지나갔지.
[201번 한유진 님. 3번 측정실로 와주십시오.]방송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킬은 예전처럼 정신력 업과 민첩 업 E급 두 개로 등록했다. 하지만 스탯은 그때보다 오른 상태였다. 레벨 대비 F급치곤 준수한 정도였지만.
“마력 스탯이 유독 높군요.”
스탯을 확인한 담당자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다른 스탯은 동레벨 F급 상위에서 E급 하위 수준입니다만 마력 스탯이 25입니다.”
1년 전에는 고작 2였지. 무려 열 배가 넘게 올랐다. 명우가 마나각인을 잠재워 놓지 않았다면 더 높았을지도.
“상급 헌터와 달리 중하급 헌터들은 마력 스탯이 낮으며 성장도 무척 더딥니다. 그래서 스탯 등급도 마력 스탯을 제외하고 측정하지요.”
다른 스탯 10 오를 동안 마력은 1은커녕 아예 변화가 없는 경우도 흔했다. 그래서 상급 헌터와 그 아래 헌터를 나누는 능력치가 마력이라고도 말하고.
“이 정도의 마력 스탯이라면 최적화 각성 시 마법이나 특수 계통 스킬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경우엔 다른 스탯이 낮아도 등급이 높게 측정되지요. 지금도 D급에서 최대 C급으로 등록 가능합니다만.”
“그냥 마력 스탯 제외 등급으로 부탁드려요. 나중에 스킬이 생기면 그때 가서 바꾸겠습니다.”
E급도 가능하다고 하였지만 F급으로 등록했다. 등급이야 언제든지 다시 올릴 수 있으니까 새롭게 시작하는 뜻에서. 스킬 습득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는 길드를 추천해 주겠다 말해왔으나 사양하고 스탯 측정하느라 잠시 빼두었던 이어링을 다시 했다.
“붉은색 이어링이네요.”
“아, 네.”
혹시 알아본 건가? 흠칫하는데 담당자가 웃으며 자기 귀를 가리켰다. 내 것과 비슷한 이어링이었다.
“요즘 각성센터에서 유행이죠. 행운을 빌며 한유진 소장님과 비슷한 차림으로 방문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 그래요?”
담당자의 시선이 내 옷차림을 의미심장하게 훑어 내렸다. …그냥 평소 입는 옷입니다만. 따라 한 거 아닙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아 헌터 자격증이 발급되었다. 이제는 등록 보조금은 나오지 않았다. 아쉽네.
‘F급 한유진.’
자격증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새로 찍은 사진 속의 나는 제법 편안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