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871
에필로그 (14) – 프롤로그
발아래 물이 일렁였다. 모이다가 퍼지고 다시금 모이다가 흐른다. 성현제는 규칙 없이 흔들리는 물결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공기가 옷깃을 적신다. 사방이 습기를 잔뜩 머금었다.
“엽서가 눅눅해지겠군.”
한유진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세 번째 근원으로 오면서 거리 또한 너무도 멀어졌다. 그러니 한동안은 보내지 못할 엽서였다. 그가 없는 세계에서 그가 소중히 여기는 두 사람은 살아갈 것이다.
씁쓰레한 감정이 성현제의 심장을 적셔들었다. 성현제는 그 감정 또한 관찰하고 즐겼다. 아쉽고도 아쉬워라. 쓸쓸하기도 하여라. 그러나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 것 자체도 즐거운 일이었다. 한동안은 이 씁쓸함을 곱씹으며 인내해야 하겠지.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다 보면 어쩌면 조급해질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돌아가려 들지도 모른다. 그런 무모한 짓 또한 재미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도 뻔하고 시시해서.”
구르릉- 물 아래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어린 혼돈이 잠깐이나마 자리를 비우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온갖 것이 꼬여들었다. 유사근원을 노리는 초월자만이 아니었다. 탐이 나는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도 그 지닌 힘에 비해 약한 먹잇감을 포착한 이름 없는 괴물들. 제 세계에서 쫓겨나 틈새를 떠도는 삿된 것들.
수면을 스치는 검은 그림자들이 핏물에 취한 상어 떼처럼 빙그르르 맴을 돈다. 찰박, 저만치서 물이 튀었다. 차가운 물방울이 코트에 점점이 짙은 얼룩을 그렸다. 원을 그리다 부서지는 물결을 금색 눈동자가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후우욱- 짐승의 숨소리가 더욱 커진다. 그르렁거리고 이빨을 갈며 발톱을 드러내고 꼬리를 세운다. 장갑 낀 손끝에 들려 있던 엽서가 안주머니에 넣어진다. 비워진 손가락들이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듯 공기를 내리누르고, 그 끝에서 매끄러운 음률 대신 빛이 튀었다.
조용히 반짝, 반짝. 그리고.
콰르릉-!
번득이는 빛이 신호탄이 되어 짐승들이 치솟았다. 촤아아, 물이 수십 미터에 이르게 선을 그리고 비가 되어 쏟아져 내린다. 사나운 으르렁거림들 속에서 성현제가 다시 한번 손을 움직였다. 어느새 나타난 황금색 사슬이 물을 향해 내리꽂히고 그 길을 따라 빛이 흐른다.
직후.
콰아앙!
모든 물이 한 번에 터져 나갔다. 마나를 듬뿍 머금은 호수다. 그 물을 전류가 파고들고 갈라놓으며 다시 뒤섞어 충돌시켰다. 검은 덩어리들이 무시무시한 폭발에 휘말려 녹아내린다. 순식간에 증발되다시피 한 물은 겨우 구두 굽이 잠길 만큼 찰박찰박 고였다.
하지만 모든 괴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 그르르.
뜯겨져 나간 몸의 일부를 순식간에 회복하며 짐승이 송곳니를 드러낸다. 성현제는 자신의 오른팔에 사슬을 휘감았다. 동시에 짐승이 얕은 수면을 미끄러졌다. 소리도 없이 삽시간에 코앞으로 다다르며 입을 쩍 벌린다. 성현제는 피하는 대신 그 시커먼 목구멍으로 팔을 집어넣었다.
콰득!
이빨이 천을 찢고 피부를 파고든다. 어깨까지 닿아 온 송곳니가 뼈를 으깨기 직전, 물린 팔에 감겨 있던 사슬의 끝이 짐승의 목구멍 더욱 안쪽으로 차르륵 파고들었다. 동시에.
퍽-
짐승의 두터운 목이 내부의 폭발을 견디지 못하고 터졌다. 잘려나간 몸뚱이가 철퍽 물웅덩이 위로 떨어지고 성현제는 아무렇지 않게 팔을 움직여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죽은 머리통을 떼어냈다. 회복 스킬이 상처를 빠르게 치유해간다. 하지만 완벽히 회복되기 전에.
텅.
내내 한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성현제가 급히 수면을 박찼다. 흔들리는 물 위로 쾅! 거대한 꼬리가 떨어진다. 얼마 남지 않은 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돌풍이 휘몰아쳤다. 성현제는 바람을 타듯 길게 미끄러지며 거리를 벌렸다. 그의 상체를 휘감은 사슬이 찰랑거린다.
“이런.”
금색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떠도는 것들 중에서도 초월자에 근접하는 존재가 있었다. 혹은 긴 시간 속에 깎여나가 자아를 잃은 초월자였던 것이기도 했다. 아직은 상대하기 버거운 짐승들이었다. 귀찮게도.
촤아아아- 짐승의 꼬리가 모든 것을 훑어 짓누른다. 속도는 느렸지만 한번 휘말리면 벗어날 수 없는 진득한 마나를 휘감고 있다. 성현제는 날개를 펴며 뒤로 물러나려다가 멈춰 섰다.
피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가 고개를 들고 올려다본 까마득한 짐승의 머리가.
스걱.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잘려나간다. 두꺼운 가죽도 겹겹이 휘감은 마력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무너지고 녹아내린다. 다시금 차오르는 물 위로 어린 혼돈이 사뿐히 내려섰다. 붉은 눈이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온다.
“잠시도 조용할 틈이 없구나.”
“얌전히 그리움을 담은 편지를 쓰고 있었을 뿐입니다만.”
“숨어 있으라 했지.”
“흔들리는 물결에 낯익은 그림자가 어른거려 그만 눈길을 빼앗겨 버렸답니다.”
“네놈 낯짝밖에 더 비칠까.”
향수병이라도 걸린 양 한숨짓는 성현제의 모습에 혼돈이 혀를 쯧 찼다. 어쩔 수 없이 데리고 다니고는 있지만 여러모로 골치 아픈 녀석이었다.
“이만 두 번째 근원으로 가자.”
“벌써 이동하는 겁니까.”
“샘이 전과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물의 의지를 알아낼 방법이 없다. 인어여왕이라도 깨어 있었으면 모를까. 물 속성의 초월자 중에서는 그 녀석이 가장 강하니.”
혹은 무해의 왕도 무언가 알아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어여왕은 잠들었고 무해의 왕은 죽어 그 흔적만이 남았다. 하필 물에 가장 가까운 두 초월자가 자리를 비운 것이었다. 어린 혼돈의 말에 성현제가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꼬마 아가씨가 생각나는군요. 박예림 양의 정령이 인어여왕의 후계자 칭호를 이어받았다고 했습니다.”
“셋째는 백 년쯤은 일러. 세계 밖에 발 들이는 것조차도 빨라야 10년 이상 걸릴 거다. 어쨌든 당장은 아무것도 못 한다.”
가장 깊은 샘과 교감할 수 있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무언가 시도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만한 존재가 없었다.
“연이어 허탕이군요.”
어린 혼돈을 대신하여 시스템에 접속하며 성현제가 말했다.
“한유진 군에게 애를 넷이나 더 가지게 하는 것은 내키지 않습니다만.”
“평범한 애들도 아닌데 첫째가 감당이나 할까. 내가 봐도 하나 이상은 안 돼. 나머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그래도 샘은 변화가 있었으니 시간의 문제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체인!]시스템 메시지가 반짝 나타났다.
“오늘은 딱딱한 관리자님이 아니시군.”
유명우가 맡을 때는 용건 외의 메시지는 받기 힘들었다. 가끔은 미리 만들어 둔 인공지능을 켜놓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아빠는 이놈의 꽃 뽑아 버려야겠다며 잠깐 나가셨어요.]“흥미로운 이야기인데. 자세히 들을 수 있을까.”
[안 돼요. 아빠가 체인이랑 길게 대화하지 말랬어요. 용건을 말씀해 주세요!]성현제가 아쉬워하면서도 두 번째 근원으로 가려 한다고 대답했다. 유하늘이 시스템 연결을 통한 세계 간 이동 포털을 열어 주었다.
“끝없이 흐르는 날개는 말 그대로 흐름이다.”
포털을 타고 들어가며 어린 혼돈이 말했다.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힘을 지닌 것으로 추정된다. 단순히 공간만이 아닌 시간까지도 거스르고 앞지를 수 있다고도 하지. 때문에 모든 색의 보석 이상으로 접근하기 힘든 근원이기도 하다.”
“휘말릴 수 있기 때문입니까.”
“그래. 날개를 휘감아 도는 바람에 자칫 휩쓸리면 시공간이 뒤엉켜 버리지. 그러니 혼자 튕겨 나가지 않게끔 목줄이라도 걸어라.”
성현제는 사슬을 자신의 손목에 휘감고 그 끝을 내밀었다. 혼돈이 사슬 끝을 붙잡고 이내 포털의 끝이 나타났다. 두 사람을 감싸던 시스템의 힘이 사라지며 별이 반짝이는 어둠이 펼쳐졌다.
어린 혼돈은 자신의 감각을 따라 곧장 두 번째 근원으로 향했다.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감을 지닌 근원인 만큼 별다른 잡기 없이도 장소를 찾아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쯤 지나.
“저것이 두 번째 근원이로군요.”
새하얗고 거대한 날개와 깃털 사이사이를 휘감아 도는 은빛 바람. 끝없이 흐르는 날개가 분명해 보였건만 어린 혼돈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저게 왜… 접혀 있지.”
“예?”
“원래는 금방이라도 날아오를 듯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하얀 날개는 무언가를 감싸듯 둥글게 접힌 채였다. 은빛 바람 또한 그 기세가 약했다. 오랜 굶주림 끝에 심각하게 쇠약해져 버리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너를 해칠 생각이 없다. 도와주려고 한다.”
알아들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걸며 어린 혼돈은 성현제를 끌고 바람을 피해 접힌 날개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건.”
“숲이군요.”
날개 안에는 작은 숲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가운데 꽃이 가득 핀 놀이터가 보였다. 미끄럼틀, 그네, 시소 등등. 알록달록한 피크닉 매트와 도시락 바구니, 어린아이용 텐트와 장난감 자동차. 둥글고 커다란 소파에는 어린아이 하나가 앉아 있었다.
“저 애…….”
혼돈이 눈가를 조금 찌푸렸다. 성현제 또한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선가 들이비치는 따스한 햇살 속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이에게 두 사람이 다가가려는 순간.
쇄액-!
거친 바람소리와 함께 거대한 날개가 순식간에 줄어들며 아이 곁으로 날아들었다. 아이의 작은 몸을 넉넉히 감싸 안을 크기가 되어 두 사람을 경계하듯 펼쳐졌다.
“…응? 뭐야아?”
아이가 졸린 눈을 부비며 고개를 들었다. 날개 너머의 두 사람을 보더니 깜짝 놀란다. 약간 무서워하는 듯도 했다.
“역시 닮았군요.”
“첫째 말이냐. 기척도 비슷해. 이게 어찌 된 영문인지.”
어린 혼돈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그의 몸이 작게 줄어들었다. 소년의 모습이 된 혼돈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신기한 형아다!”
마술 쇼라도 본 듯 박수를 짝짝 친다. 혼돈은 성현제에게 가까이 오지 말라고 한 뒤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날개가 움찔거리긴 했으나 막아서지는 않았다.
“아가야. 네 이름이 뭐냐.”
“응. 유진이라고 했어.”
“…몇 살?”
어린 한유진이 손가락을 네 개 펼쳤다가 다시 다섯 개 다 폈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하나를 접었다. 네 살 혹은 다섯 살.
“둘째가 태어나기 전이로군.”
그 말인즉. 어린 혼돈이 성현제를 흘끔 돌아보았다. 아직 품에 아무도 끌어안지 않은 한유진. 회귀 전 성현제가 시도하려고 했던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의 양육자. 성현제가 슬그머니 다가오며 혼돈에게 작게 물었다.
“정말로 한유진 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른다. 아까 말했듯이 날개는 시간을 벗어날 수 있어. 과거로 돌아가 어린 첫째를 데리고 온 것일 가능성도 있지. 혹은 첫째의 어린 시절의 조각이나 흔적을 찾아낸 것일지도 모르고. 그래도 이런 어린애를 데리고 어쩌자는 것인지.”
혼돈이 날개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아이에게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온 것이냐. 부모님은.”
“…없는 거 같은데. 나는 혼자 있었는데요, 같이 있자고 불렀어.”
작은 손이 날개의 끝을 붙잡았다. 날개가 아이의 등에서부터 펼쳐지듯 하며 감싼다.
“이 애도 혼자야. 으으음, 유진이가 오면, 그럼 좋겠다고 말했어.”
잘 모르겠다며 아이가 끄응 팔짱을 꼈다. 어린 혼돈이 성현제에게 작게 말했다.
“과거의 어린애를 납치해 온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첫째와 연관은 있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아직 태어나지 못했어야 할 두 번째 근원이 저렇게 자아를 가지고서 활발히 움직일 리 없으니.”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었다. 모든 곳을 흐를 수 있는 날개의 바람이 눈이 내리는 나무의 탄생의 영향을 받아 자신 또한 본능적으로 양육자를 찾고자 한 것이 아닐까. 혼돈은 그렇게 추측했다.
“한유진 군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한유진 군의 일부라고는 볼 수 있겠군요. 저와 한결 군과 비슷한 상태인 걸까요.”
“어쩌면 두 번째 근원과 뒤섞이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저 날개가 자아를 가진 듯은 하나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고 의사 전달도 하지 못한 채 아이의 보호에만 집중하고 있으니.”
“이 아이 자체가 두 번째 근원이고 날개는 근원을 보호하는 힘의 형상화일 수도 있다는 뜻이군요.”
“아무튼 여기 내버려 둘 수는 없다. 너무 위험해.”
두 번째 근원의 위험성이 익히 알려졌기에 그간 접근해 온 초월자가 없어 무사했던 것이지 지금의 상태를 들키기라도 한다면 곧장 노려질 게 분명했다. 어린 혼돈이 다시금 성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새 익숙해졌는지 어린아이는 놀라지 않고 오히려 재미있어했다. 혼돈이 아이를 안아들려 하자 날개가 흠칫거렸다. 하지만 막지는 않고 더욱 작게 줄어들어 날개 모양 머리핀처럼 아이의 검은 머리칼 위로 내려앉았다.
혼돈의 품에 안긴 아이가 이내 다시 졸더니 잠에 빠져들었다. 몸집은 너덧 살이나 갓난아기처럼 잠이 많은 듯했다. 성현제가 근처에 있던 작은 가방과 장난감 몇 개를 챙겨들었다.
“…맡길 곳을 찾아야 하는데.”
“어르신 곁이 가장 안전하지 않습니까.”
“어린 것을 데리고 어딜 어떻게 다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면서 혼돈이 한숨을 내쉬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린 것을 제대로 키울 줄을 몰라.”
쓴 것이 섞인 목소리였다. 성현제는 그것을 눈치챘으나 깊게 묻지 않았다.
“오래 머물러 좋을 건 없으니 일단은 자리를 옮기자.”
세 사람과 작은 날개가 떠나갔다. 한 아이를 위해 만들어진 놀이터가 신기루처럼 서서히 흩어졌다.
* * *
화면이 켜졌다. 비치는 풍경이 어지럽게 흔들린다.
[아니 무작정 해보라고 해도…….]작게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면은 여전히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손가락이 구석을 가렸다가 사라진다.
[라이브는 좀 그렇지 않나. 보는 사람도 없긴 하지만.]어둑해져가는 풀숲이 비춰졌다. 강가인 듯했다. 어딘가 내려놓은 듯 흔들림이 멈추었다.
[와, 이거 진짜 못 하겠다. 안 돼. 역시 다른 방법을 찾는 게…….]작은 목소리가 중얼중얼거렸다. 그러다 화면에 하얀 얼굴이 나타났다가 이내 홱 옆으로 사라진다.
[…빨리 익숙해지려면 라이브로 사고 치는 게 최고라니, 믿음이 안 가는데. 아 메시지 창 좀 줄여. 눈앞에 들이대지 마!]한숨 소리가 연거푸 터져 나왔다.
[박하율 너 그냥 재밌어서 이러는 거 아니냐. 관둔다, 관둬. 징징대지 마.]어디서 삐약, 하는 새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구독자 없을 때 연습해 보는 것도 좋긴 하겠지. 하지만 대본이라거나… 그때야 걸려 있는 게 많았잖아. 아니, 지금도 중요하긴 한데. …그러게 내가 그땐 무슨 정신이었는지.]탁, 탁, 탁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신발 끝이 바닥을 지익, 긁는다.
[글쎄, 막상 닥치면 말이 술술 나올까. 일단 켜긴 했으니 일기예보라도… 헉!]텅! 어딘가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악, 하는 신음성도 희미하게 들려온다.
[아니, 죄송. 그런데 왜… 어.]화면에 얼굴이 나타났다. 쑥스러운 듯 정면으로 쳐다보지는 못한 채 꾸벅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한유진입니다. 그, 지금이, 6월 7일 오후 8시 4분쯤 되었고요. 해가 지고 있습니다. 구름이 많이 꼈네요. 비가 온 곳도 있다고 합니다.]헛기침을 조금 한다.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죄송합니다. 연습 삼아 켜본 거라서 누가 보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니까 이건 정식 방송 예고쯤 된다고 할까요, 네. 그래도 봐주셔서 감사하고요, 앞으로… 사실 할지 안 할지 잘 모르겠는데, 하게 된다면 그때도 한번 들러 주세요~.]긴장이 좀 풀렸는지 마지막에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좋은 저녁 되시고요, 음… 아, 언제나 행복하세요!]어색한 손하트와 함께 방송이 종료되었다. 화면이 검게 물들었다.
프롤로그 끝.
작가의 말
안녕하세요.
연재를 시작한 지 어느덧 4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지나갔습니다. 우선 마지막까지 함께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즐거웠습니다.
긴 시간 동안 꾸준하게 연재를 하는 것 자체도 쉽지는 않았으며 중간중간 이런저런 일들도 꽤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간의 마침표를 찍고 돌이켜보니 생각보다도 더 재미있었고 행복했던 4년으로 느껴집니다.
소설의 분량이 많은 만큼 다양한 소재를 욕심껏 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작은 제가 보고 싶은, 재미있어하는 이야기였으며 마지막까지 그런 마음으로 키보드를 눌렀습니다. 먼 여정을 나란히 걸어 주신 독자분들이 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자분들께서도 즐겁게 쓴 글과 함께하신 시간 동안 즐거우셨기를 바랍니다.
소설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마지막 부분은 초반 부분과 함께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부터 시놉시스가 나와 있었습니다. 한유진이 성장하면서 한유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성현제와 서로의 양육자 관계로 발전하여 자기 자신을 제대로 마주보게 된다면 25살 한유현을 보내 주면서도 다시금 맞이하는 해피엔딩이 가능해진다, 였지요. 덤으로 세상도 구하고요.^^
다섯 번째 근원과 하얀새, 25살 한유현의 상태와 초승달, 성현제의 자세한 설정까지 완성되어 있었기에 결말 부분을 쓰는 것은 다른 때보다 쉬운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말까지 가는 길이 쉽지 않아 보였기에 초반에는 정해 놓은 마지막에 무사히 다다를 수 있을까 걱정도 했었습니다. 다행히 처음 생각했던 그대로의 엔딩에 다다랐고 만족스럽게 완결이라는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소설의 본편은 한유진이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가장 큰 목표를 이루는 것에서 끝이 났습니다. 한유진은 25살의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었던 말을 전했고 비로소 제대로 된 작별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1화에서 한유진이 한유현과 솔직한 대화를 나누며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말을 해주었더라면 그때 동생의 죽음을 힘겹게나마 받아들였을 겁니다. 소원석이 죽은 사람을 살릴 수 없다 하였을 때, 슬퍼하면서도 시간을 되돌린다는 생각까진 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회귀를 하고 동생의 시신을 되찾겠다 마음먹었다더라도 죄책감에 휩싸여 스스로를 필사적으로 몰아세우기까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미 보내 준 동생보다는 현재 곁에 있는 가족들을 더 소중히 여겼겠지요.
하지만 한유진은 동생과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표하지 못했고 사랑한다는 말은 키워드로 남게 되었습니다. 감화 키워드는 한유진이 해야 하는 말임과 동시에 함부로 할 수 없는 말이었습니다. 소설은 한유진이 하지 못했던 말과 함께 끝이 나며 키워드는 사라지게 됩니다.
이룰 것을 모두 이루고 쌓여 있는 것을 모두 풀어낸, 마침표를 찍기 가장 걸맞은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 후 이어진 에필로그는 마무리 짓는 후일담이면서도 시작인 프롤로그입니다. 가장 크고 중요한 목표를 이룬다 하더라도 삶은 끝나지 않으니까요. 한유진을 비롯하여 소설 내에 등장한 모든 캐릭터들과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들까지 각자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이어집니다.
남은 네 개의 근원은 또 다른 이야기를 가지게 될 겁니다. 가장 높은 산은 어린 혼돈이 머물던 곳으로 그와 연관이 되겠지요. 끝없이 흐르는 날개는 에필로그에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가장 깊은 샘은 박예림과 산호, 인어여왕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모든 색의 보석은 자신을 드러내 줄 그림자를 필요로 하게 될 겁니다. 그 그림자는 자칭 동생 때문에 골치를 썩이고 있죠. 유명우와 유하늘은 시스템 관리자로서 협력하며 각 근원의 세계에 속한 사람들 또한 어떠한 방식으로든 함께하게 되겠지요. 자신들의 일이니까요.
태초의 불은 일단은 물러났으나 한유현이라는 또 다른 길을 보게 된 이상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다시금 한유현의 자리를 탐내게 될지도 모르죠. 문현아는 마리사와 엮이게 되며 본편에서보다 오히려 더 바빠집니다. 시한부인 마리사는 점찍은 후계자를 자신의 자리에 앉히려 들 테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에블린에 마리 또한 모친과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할 겁니다. 강소영은 일단은 길드원인 에블린 때문에 비명을 지르게 되겠지요. 강소영의 SOS에 리에트가 뛰어들고 에밀리와 힐러&보조계 체계를 새로 잡으려던 노아 또한 뒷덜미를 붙잡힙니다. 깨어난 시그마는 신세를 졌으니 문현아를 도울 테고 인형술사도 어쩔 수 없이 거들겠지요.
아이들은 학교를 가며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고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동생들을 지키고 싶은 한결은 성현제의 재산과 함께 가지게 될 권력의 효용성에 대해 고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도하민은 햄스터를 사랑하는 평범한 카페 주인이 되고 싶겠지만 쉽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석하얀은 바깥 세계와 접촉하려 노력하고 석시명은 미국 지부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겠지요. 민지수도 국내를 넘어 해외까지 진출하려 할 겁니다.
그 밖에도, 그 모든 이야기가 서로 영향을 주며 가지가 가지를, 또다시 가지와 가지를 끝도 없이 뻗어 나갑니다. 이름조차 제대로 등장하지 않은 캐릭터 또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겠지요.
그렇기에 한유진의 에필로그는 프롤로그이기도 합니다. 한유진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새로운 시작입니다.
소설의 본편과 에필로그까지도 이렇게 제가 생각해 두었던 대로 끝이 났습니다.
다만 그래도 고생한 주인공을 집에는 보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조금 들더군요.^^; 때문에 한유진이 집에 도착하는 외전을 고려 중입니다. 성현제까지 집에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확정은 아니며 외전의 연재를 한다면 내용상 에필로그처럼 짧게 끝낼 순 없을 것 같아 내년 이후가 될 듯합니다. 덧붙여 이북 단행본에는 권마다 외전을 넣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외전 미수록 권도 후에 추가가 가능하지 싶습니다.
연재 중에는 언제 끝날까 싶기도 하였지만 이렇게 막상 끝을 맞이하니 홀가분하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듭니다. 당장 내일부터 연재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니 이상한 기분이기도 하네요. 외전도 쓰기 시작해야 하고 게임도 마무리해야 하며 밀린 일들도 처리하는 등 할일은 많건만 마음 한구석이 벌써부터 허전해집니다. 작품 밖의 일들을 포함하여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니 이후로도 간간이 소식을 전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연재 내내 도움을 주신 많은 분들과 긴 여정을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언제나 행복하고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