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Side Story 94 Grow Slowly
외전 94화
천천히 자라라
‘말없이 집을 떠나면 안 된다. 혼자서는 더더욱 안 돼. 뭐? 그 날개는 아니야. 어린아이는 보호자와 함께 다녀야 하는 법이다. 나와 저 녀석 같은.’
연리유진이 꿈의 세계로 떠났던 사실을 안 어린 혼돈이 엄중하게 말했고 아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계속 잠들어 있는 아저씨를 찾아 나서고 싶어 발가락도 손가락도 자꾸 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그러는 사이 세 사람은 새로운 집에 도착했다. 하늘빛 작은 여우가 마중을 나와 셋이 머물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 어떤 형태의 집이 좋으냐는 여우의 물음에 혼돈은 첫째의 세상과 같은 것으로 부탁한다고 대답했다.
화단과 작은 연못, 모래놀이터가 있는 너른 정원이 딸린 2층짜리 단독주택. 아이는 새로운 집에 이내 익숙해졌다. 여우, 유하늘과 이따금 방문하는 관리자 유명우와도 친해졌다. 그렇게 며칠 시간이 흘렀음에도 잠든 사람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어휴, 잠꾸러기!”
성현제는 2층 침실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연리유진은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이불을 괜히 탁탁 손바닥으로 두들겨 펴는 흉내를 냈다. 혼돈이 성현제를 대할 때면 곧잘 짓는 뚱한 표정을 따라하고 팔짱도 꼈다. 못마땅하게 혀도 쯧쯧 찼다.
“이래가지고 언제 제 몸뚱이 다루겠어?”
– 삐약!
아이의 머리 위에 올라앉은 삐약이가 작은 날개를 파닥거리며 혼돈의 타박을 따라 하는 아이를 따라 했다.
“안 돼.”
– 삑!
“휴우.”
연리유진은 속상하다고 한숨을 푹 내쉬고는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이불 위, 숨소리도 약한 가슴께로 올라 납작 엎드린다. 양손으로 턱받침을 하고서 잠든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종알거렸다.
“내가 데리러 가까?”
– 삐약삐약.
아이의 말에 삐약이가 날개를 탁탁 쳤다. 아직 스스로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 해도 연리유진은 근원의 아이였다. 또다시 꿈 세계로 들어갔다간 무슨 영향을 줄지 알 수 없었기에 혼돈은 삐약이를 아이에게 붙여 놓았다. 혹 연이가 힘을 쓸라치면 곧장 자신이나 유하늘에게로 데리고 오라 당부해 둔 채로.
“아저씨 너무 약해.”
– 삐야.
“유진이가 데리고 오면 안 되까?”
– 삐약삐약삐약.
“귀여운 용이랑도 만나고 싶은데. 친구 하자고 해야지, 친구!”
연리유진은 제 머리 위의 삐약이를 두 손으로 붙잡아 들었다. 그러곤 삐약이를 마주 보며 자신이 본 일을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삐약이보다 더 컸어. 하지만 작아.”
– 삐약.
“동생이 있대. 나도 동생 가지고 싶어. 그런데 하라버지가 동생은 엄마랑 아빠가 주는 거래. 하라버지도 못하는 게 있어!”
– 삐약.
“조그만 용 동생은 조그만 용보다 작을 거야. 아이 귀여워. 보고 싶어.”
아이의 욕망이 커져 갈수록 주위를 날아다니던 작은 날개 또한 커져 갔다. 일순 어린 몸을 전부 덮을 만큼 크게 펼쳐진 날개에 삐약이가 삐약, 소리쳤다. 날개가 바람을 머금기 직전, 혼돈의 손아귀가 흰 깃털을 움켜잡았다.
“아가.”
“하부지!”
훌쩍 날아가고 싶어 하던 것을 까맣게 잊고서 연리유진이 벌떡 일어났다. 혼돈은 아이를 안아 들었다. 조그맣게 줄어든 흰 날개가 연리유진의 어깨 근처로 내려앉는다.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면 머잖아 알아서 깨어날 거다.”
“…근데요, 아저씨가 길을 모르면 어떡해요?”
손가락을 조금 꼼지락거리며 아이가 말했다.
“새 집으로 이사해서, 모를 거 같은데.”
“그놈이 제 몸뚱이도 못 찾아올까. 그리 둔한 녀석은 아니다. 되레 약삭빨라 문제면 문제지.”
길 잃을 일 없이 알아서 잘 찾아올 거라는 혼돈의 말에 아이가 시무룩해졌다. 찾으러 가면 금방, 바로 데리고 올 수 있을 거 같은데. 삐약이가 혼돈의 머리 위로 올라앉아 피이 한숨 같은 소리를 냈다.
“그러면요, 몇 밤이나 더 자아 해요?”
“글쎄다.”
한유진이 시간 파편을 못해도 7, 8할은 처리해야만 성현제도 무사히 잠에서 깨어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얼마나 걸릴지는 어린 혼돈도 예상하기 힘들었다.
“어쨌든 별일은 없을 터이니 조급해하지 말고 차분하게 기다려라.”
“…맨날 기다리래.”
연리유진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순한 아이였지만 그래도 어린애는 어린애라 계속되는 기다리란 소리에 결국 토라지고 만 모양이었다. 두 눈도 울망울망해져 혼돈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아이를 다독였다.
“벌써 이러면 어쩌려고.”
“…히잉.”
아이가 혼돈의 어깨에 얼굴을 폭 파묻었다. 울음을 참는다고 동그랗게 웅크린 서러운 등을 움찍움찍거린다.
“연아, 너는 기다릴 줄을 알고 참을 줄을 알아야 한다.”
이 아이는 주위 모든 것을 흐름에 따라 떠나보내고 다시 흐름에 따라 돌아오기를 기다려야만 하는 업을 지고 있었다. 이른 작별을 참아내지 못하고 섣불리 붙잡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흐트러질 터이니. 때에 따라 돌아오길 기다리지 못하고 섣불리 당기게 되면 세상 모든 것이 흐트러질 터이니.
“아직 네 의지에 따라 세상이 요동치지 않는 어릴 적에, 차근차근 배워 두어야 한다.”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리울 존재로 자라나기 전에.
“…많이 기다렸는데.”
“그래, 그래. 착하다.”
“기다리는 거 싫은데.”
“싫어도 참을 줄 아니, 기특하구나.”
잠든 사람을 계속 보면 속이 더 상할 뿐이니, 혼돈은 아이를 데리고 침실을 나섰다. 계단을 내려가 정원으로 향했다. 바람이 살랑 불어오고 어디서 들어왔는지 모를 토끼 한 마리가 깡총 뛰자 울먹이던 것이 천천히 멈춘다. 연리유진은 고개를 들어 옅게 붉어진 눈을 깜박였다.
“어른 되면 안 기다려도 돼요?”
“더 오래 기다리고 더 많이 참아야 하지.”
“…왜요?”
“스스로 서서 스스로 선택한 길을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아가, 천천히 자라거라.”
영원에 가까운 시간을 흘려보내더라도 흔들림 없이 굳건해질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느릿이, 작은 틈 하나 없이 옹골차고도 견고하게 쌓아올리거라.
“너는 오랜 시간을 어린아이로 남아 있어도 괜찮으니. 나도 쉬이 떠나지 않겠지만 잠들어 있는 저 녀석은 더더욱 끝까지 네 어리광을 받아 줄 게다.”
못 믿을 놈이지만 또 믿을 만한 놈이라. 어린아이가 제 둥지를 떠날 마음이 드는 날까지 썩 괜찮은 보호자 노릇을 하며 묵묵히 기다려 줄 것이다.
“연아, 세상 모든 것에는 끝이 있다. 그러니 만남에만 끝이 있는 것은 아니다. 헤어짐에도 결국은 끝이 있으니, 너무 슬퍼하지 말고 흘려보내어 즐거이 기다릴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구나.”
“하라버지, 잘 모르겠어.”
“아직은 몰라야지. 알면 안 되지.”
가능한 오래오래 몰라야지. 잠시 숨었던 토끼가 다시 폴짝 튀어나오자 아이는 이내 섭섭하고 슬픈 마음을 잊었다. 품에서 내려놓아 주자마자 토끼를 쫓아 달린다. 뛰기 시작하면 어린아이는 금세 웃어 버리기 마련이었다. 신이 나서 까르륵 하는 소리가 높이 울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어린 혼돈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흰 새 너는 저 아이의 미래 또한 보았을까.”
– 삐약?
“거기까지는 닿지 않았으려나. 네가 다다른 세계의 끝은 현재와는 다른 갈래가 되어 버렸으니.”
한유진이 이야기해 주었었다. 하얀새가 다다른 세계의 끝, 신의 탄생을. 그러나 모든 것을 삼키고 온전히 태어났을 신은 이제 온전한 세상에서 미숙한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어찌 보면 훨씬 불안정한 미래가 되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저리 웃으니 아무렴 어떨까.”
오늘 저녁은 신입 관리자에게 달달한 간식이라도 부탁해 볼까. 어린 혼돈은 고개를 들어 2층 침실을 올려다보았다.
“너무 늦으면 간식 담당 자리는 빼앗길지도 모른다.”
첫째에겐 엄하던 신입 관리자도 수명 짧아질 일 없는 어린애에게는 무른 편이니. 저놈 돌아오면 또 거짓 울상을 짓겠구나 싶어 혼돈은 옅은 실소를 머금었다.
* * *
한껏 거칠어진 바다가 그 안에 잠든 거대한 존재를 흔들었다. 그러나 온 세상을 삼킬 듯 높은 파도라 할지라도 인어여왕에게 있어선 비늘을 간지럽히는 여린 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의 잠을 깨우기에는 한없이 부족하였으나.
파도를 타고 흘러가는 꿈결과 꿈결은 우연히도 마주치고 서로 뒤섞여들었다. 인어여왕은 꿈속에서 어린 꿈을 바라보았다.
먼 미래 물의 주인이 될 아이, 왕의 칭호를 물려받을 어린 정령. 사랑스러운 나의 딸들아.
“어?”
박예림은 깜짝 놀라며 기이하게 굽어진 바다나무 줄기에 비스듬히 기대어 누운 인어여왕을바라보았다. 물의 정령 산호는 한층 커진 몸뚱이로 박예림을 감싸안듯 달라붙어 있었다.
“꿈이에요?”
– 그래, 꿈이란다. 저 아이와 나는 깊게 연결되어 있고 저 아이와 너 또한 한 몸처럼 가까우니. 불안정한 마음이 요동쳐 경계가 흐려진 꿈이 서로 뒤섞인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바람직한 일 또한 아니다.
인어여왕은 눈을 감은 그대로 박예림을 들여다보았다.
– 내 딸들아. 너희는 아직 그리 자라지 않았을 텐데.
딸이라는 호칭에 박예림이 민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어, 산호는 후계자니까 그렇게 부르실 수도 있겠지만요… 저는 아닌 거 같은데요.”
– 예림이 네가 아니면 나도 아니야!
둘의 반발에 인어여왕이 미소를 머금었다.
– 우리는 인정받은 모든 동족 여자아이들을 딸로 여겼단다. 그 어떤 길로 나아가든 지켜보고 응원해 줘야 할 어린 딸들.
어른의 위치에 서서 조언과 도움을 건네줄 수는 있으나 멋대로 재단하고 길을 정해 주어서는 안 된다. 인어여왕은 긴 시간 잊고 있었던 것을 되살려내 준 아이들을 애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음, 문화 차이라면, 이해해요. 사정을 들어 보니 그럭저럭 괜찮은 것도 같고요.”
– …하지만 예림이 넌 인간이고 난 정령이고 저 사람은 인어인데?
“산호야, 우리 애들을 봐. 요즘 세상에서 그런 건 따지는 거 아니야. 종족 좀 다르면 어때.”
– 으응, 그런가? 하긴 예림이랑 나도 종족은 다르지만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니까!
그때 짙게 푸른 물결이 박예림과 산호를 휘감았다. 박예림의 외모가 어려지고 산호 또한 작게 줄어들었다.
– 빠르게 자랄 필요는 없단다. 특히나 너희는 훨씬 느리게 자라나는 것이 맞을 터.
“…네?”
– 잡것들이 너희의 눈을 가리고 있구나.
인어여왕은 박예림을 휘감은 시간 파편의 힘을 눈치챘다. 하지만 그녀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의 바다에서도 벗어나 당당히 선 아이다. 고작 저런 조각들에게 오래 얽매여 있지는 않을 터였다.
– 너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더욱 흔들려 하고 있다.
“무, 무슨 말씀이세요?”
– 예림이한테 무슨 일 있는 거예요?
– 그러나 괜찮다. 설사 흔들려 넘어진다 해도 괜찮다.
“…괜찮지 않아요. 저는 아이들도 지켜야 하고 또 해연 길드도… 어?”
무언가 이상한 감각을 느낀 박예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끝내 떠올리진 못했다. 그런 박예림을 바라보며 인어여왕이 다정하게 웃었다.
– 내 딸들아, 나는 영원히 너희들의 편일 것이다. 또한 너희는 서로에게 믿음이며 그런 너희를 끝까지 믿어 줄 이 또한 있으니.
바다 전체가, 모든 물이 웃었다.
– 넘어져 이마가 깨지고 꼬리비늘이 죄다 벗겨진다더라도 결국 너희는 웃어 흘릴 수 있을 것이다.
“네? 잠깐만요! 저한테 뭔가-.”
큰 물결이 밀려들었다. 깊게 잠든 초월자의 꿈에 아직 어린 아이들이 엮여드는 것은 위험했다. 자칫 분리되지 못하고 함께 긴긴 시간을 잠들게 될 수 있으니. 인어여왕은 두 아이를 자신의 꿈에서 갈라내어 내쫓았다.
멀어져 가는 작은 꿈결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 좋은 꿈을 꾸렴.
오늘 하룻밤만이라도 편안하고 행복한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