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int’s Dungeon Business RAW - Chapter (1065)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084화
목소리가 들렸다. 마치 숨결로 간질이는 것 같은 부드러운 속삭임 소리가.
하지만 귓가에서 들려오는 건 아니었다. 소리가 들려오는 건 조금 더 아래. 안 그래도 작은 속삭임 소리는 내 귀까지 닿기 전에 뭔가에 막힌 것처럼 희미하게 울려서, 나는 소리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눈도 뜨지 않고 모든 신경을 귀에 집중시켰다.
“…괜찮겠지? 얼마나 있는지 모르겠지만, 모두가 그럴 리도 없고, 너도 이렇게 반응해주고 있고.”
목소리와 동시에 하반신 쪽에서 부드러운 숨결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갑자기 물건이 콕콕 찔리는 느낌까지 났다.
그 갑작스러운 감각에 반사적으로 물건을 움찔움찔 떨자, 아래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살짝 안도감이 섞였다.
“응. 그렇지?”
그러니까 걔는 별개의 지성을 지닌 생명체가 아니라니까….
드디어 사건의 전모가 보이기 시작한 나는,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려 그 안을 엿봤다.
“뭐하냐 너?”
“꺅! 인사하고 있었단 말이야! 갑자기 끼어들지 마!”
인사는 무슨. 너야말로 내 물건이랑 비밀 얘기하지 마.
하아…. 하는 수 없지. 얘하고 만큼은 웬만해선 낯부끄러운 분위를 만들고 싶지 않지만, 이대로 놔둘 수도 없는 일이니까.
“야. 레이.”
“으, 응?”
“어제 디아나를 봤으니 너도 알겠지만, 난 상당히 눈이 높아. 웬만한 여자는 거들떠보지도 않지.”
“…갑자기 무슨 말이야?”
머리를 쥐어짜서 최대한 부끄럽지 않은 표현으로 완곡하게 돌려 말해 봤지만, 아무래도 레이는 내가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젠장. 조금만 머리를 굴리면 알 수 있는 일이잖아. 왜 그걸 눈치 못 채는 거야.
“…그런 내가, 넌 내 여자로 하겠다고 결심한 거야.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냐?”
“…아…으, 으응….”
그런 쪽으로 아예 생각을 안 해서 눈치채지 못한 것뿐, 레이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놓고 말했는데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바보도 아니다.
드디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챈 레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부끄러운지 자기 눈앞에 있는 내 물건을 괜히 콕콕 찌르면서.
으윽. 젠장. 안 그래도 부끄러운데, 이 녀석까지 부끄러워하니까 감정 공유로 심장이…. 이래서 이 녀석하고 만큼은 부끄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는데.
“너도 충분히 예쁘고 매력적이라는 얘기야.”
하지만 이왕 여기까지 온 거다. 아예 못을 박아둘 생각으로,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어설프게 끝내면 오늘 다른 애들을 만나고 다시 기죽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넌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인데. 어젯밤에 나 너랑 잔 거 알지?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어?”
사실 디아나가 같이 자주라고 보낸 거고, 나도 사도 임명을 시험해 볼 생각도 겸해서 레이랑 같이 잔 거지만.
참고로 사도 임명은 또다시 실패했다. 도중까지 콘돔을 끼고 하다가, 레이가 지나친 쾌감으로 정신을 잃은 타이밍을 노려 콘돔을 빼고 안에 싸는 노력까지 감수했는데.
“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아무튼 부끄러움을 이겨내고 내가 꿋꿋이 할 말을 계속하자, 결국 먼저 버티지 못하게 된 레이가 손을 뻗어서 내 입을 틀어막았다.
“으으으….”
내 얼굴을 마주 보기도 부끄러운지, 레이는 두 눈을 꼬옥 감아 버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렇게 눈을 감아도, 가까이에서 느껴지는 내 존재감까지 지울 수는 없었겠지. 애초에 레이는 지금 내 다리 사이에 있었고, 심지어 손을 뻗어 내 입을 틀어막고 있는 거다. 아무리 팔을 쭉 뻗어도 레이의 얼굴은 내 물건에 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느껴지는 내 존재감에서 레이는 눈을 감아도 내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더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부끄러운 감정이 해일처럼 레이로부터 내게로 밀려들어 왔다.
그리고 그 감정은 내 감정과 만나며 더욱 증폭되어서는 내게서 레이에게로 전해져갔고, 또 그게 배의 크기가 되어 내게로 돌아온다.
끊을 수 없는 연쇄 작용에 나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용해주겠어! 어차피 사도 임명을 위해서는 또다시 부끄러운 말도 해야 하잖아? 나중으로 미뤄서 또 이런 경험을 하느니, 이번 기회에 한 번에 전부 다 끝내주겠어!
“레이, 난 이렇게나 널 좋아해! 넌 어때!?”
비록 내 목소리는 레이의 손에 틀어막혀 제대로 된 말을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으으읍 거리는 소리만으로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손바닥에 닿은 입술 감촉으로 해석한 건지, 용케 내 말을 이해한 레이는 손바닥을 더욱 내 입술에 밀어붙이며 고개를 푹 숙였다.
묵비권을 행사하려는 모양이지만, 그렇게는 안 돼. 내가 이렇게 부끄러운 경험을 하고 있는데, 너 혼자 빠져나가게 둘 것 같아? 난 반드시 내 목적을 완수해주겠어!
나는 레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껴서는, 그 몸을 위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얼굴이 정확히 내 얼굴과 마주 보게 되는 위치까지.
그래도 레이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어서 나와 눈이 마주치지는 않았지만,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지그시 그 얼굴을 바라봤다.
진짜 부끄러워 죽을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아까 내가 한 말은 빈말이 아니다.
진짜 예쁘긴 예뻐. 지금껏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예쁜 줄 알았다고 착각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레이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자니, 레이도 뭔가 안절부절못하게 된 모양이었다. 이렇게 끌어당겨 놓고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니, 대체 뭘 하는 건지 불안하겠지.
꼭 감고 있던 레이는 상황을 살피기 위해 슬그머니 눈을 떴고, 나와 제대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으읏…! 대, 대체 원하는 게 뭐야!?”
지나친 부끄러움에 반쯤 울먹이는 목소리로, 레이는 내게 투정을 부렸다.
원하는 거라. 그야 뻔하잖아? 간단해.
“대답.”
이번에도 레이의 손에 막혀서 목소리는 제대로 나오지 않았지만, 아까 그 긴말도 알아들은 레이다. 이번에도 제대로 알아들었겠지.
“이, 이 세계는 원래 이렇게…아, 아니야! 너도 부끄럽잖아!? 너 자기만 부끄러운 말 하기 싫어서 이러는 거지!?”
얘가 웬일로 또 날카로운 말을 하네. 그런 마음도 없는 건 아니야. 없는 건 아니지만, 목적이 그것만은 아니거든.
나는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빤히 레이의 얼굴만을 쳐다봤다.
“으, 으으…또, 또 장난치는 거지…? 꼭 말로…우으….”
이제는 피부색이 아예 빨간색이 된 것처럼 달아오른 레이는 시선을 피했다가 힐끔 내 얼굴을 보고 다시 시선을 피하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마지막 저항을 시도하더니, 결국 고개를 푹 숙이고는.
“나, 나도…좋아는…하는데….”
그런 말과 함께, 이마를 내 어깨에 파묻고는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듯이 바들바들 떨었다.
제, 젠장. 이거 상상 이상으로 부끄럽잖아.
아니. 이렇게까지 절절히 서로의 마음이 느껴지는데 그놈의 사도 임명은 왜 안 되는 거야!?
설마 서로에 대한 호감도가 문제가 아니라, 또 히든 퀘스트니 뭐니 하는 게 문제인 건가!? 그거라면 레이를 바프라의 수하들에게서 구출해 준 시점에서 달성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뭔가 말해….”
필사적으로 딴생각을 하면서 부끄러움을 잊으려고 해봤지만, 이 사악한 다크 엘프는 날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부끄러움의 늪에 잠기면서 내 다리를 끌어당기다니. 내가 했던 짓을 그대로 갚아주겠다 이거지?
“무, 무슨 말을…?”
“뭐라도!”
떼쓰지 마 이것아! 여기서 더 무슨 말을 하라는 거야! 아니. 내가 시작한 거니까 내가 뭐라도 말해야 하는 게 맞기는 하지만!
“그…서, 서로 같이 좋아하는 걸….”
“으으으읏!”
야. 부끄러움에 발버둥 칠 거면 애초에 이런 걸 시키지를 마! 나도 뭐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 아니. 그렇다고 널 안 좋아한다는 건 아니…으악! 젠장! 누가 좀 도와줘!
레이와 둘이 같이 몸을 밀착시킨 채 부끄러움에 몸서리치면서, 나는 확실히 깨달았다.
이 부끄러움의 구렁텅이는 절대 혼자 탈출하는 게 불가능해.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둘 다 부끄러워 죽을 거야.
똑똑.
“구원 씨? 아직도 주무시고 계신가요?”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을 일어나지 않았다. 문 너머로 우리에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온 거다.
말해두지만, 내 이름으로 말장난한 거 아니다. 저 엔젤 보이스를 어떻게 감히 내 목소리와 비교하겠어.
“아, 아니! 일어났어! 레, 레이! 나갈 준비!”
“으, 응!”
튀어 오르듯이 서로에게서 떨어진 우리는, 일단 주섬주섬 옷부터 챙겨입었다.
방을 나갈 때까지도 얼굴이 화끈화끈해서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그 문제는 방을 나가자마자 곧바로 해결됐다.
“구원 씨!”
“당시이인!”
미소 짓는 천사님의 얼굴이 보였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옆에서 마틸다가 달려들어 내 몸을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그 뭉클한 감촉은 내 가슴을 메우고 있던 부끄러움을 밀어내듯이 내 가슴에 밀착해왔고, 레이는 레이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서 부끄러움을 잊은 듯 보였다.
드, 드디어 이 연쇄 부끄러움 지옥이 끝났다. 역시 성녀님과 추기경님이야. 예로부터 지옥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성직자가 제일…아니. 이건 별로 상관없나.
“이제는 언제든 오갈 수 있다면서요!?”
내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마틸다는, 눈을 반짝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평소처럼 키스 세례를 퍼붓지는 않는군. 레이 앞이라고 자제하고 있는 건가?
“아, 응. 맞아. 디아나한테 들었어?”
“네!”
아침 일찍 일어나 다른 사람들을 데려온 것뿐만 아니라, 설명까지 미리 끝냈다니. 걷기도 싫어서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주제에 성실하잖아.
아니. 그냥 우리가 늦잠을 잔 건가. 어제도 결국 잠이 든 시간은 엄청 늦었으니까.
“그러면 이분이 그분이신가요? 안녕하세요. 마틸다에요.”
역시나 레이를 신경 써서 자제하고 있었던 건지, 마틸다는 다시 한번 가볍게 입술을 맞춘 후 내게서 떨어져서는 레이에게 악수를 청했다.
“전 레이아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네? 아, 레이에요….”
“어머, 비슷한 이름이네요.”
“그, 그러게요….”
그러고 보니 둘이 이름 비슷하구나. 이미지가 전혀 달라서 그런지 지금까지 눈치 못 채고 있었어.
아무튼 꼬리까지 살랑살랑 흔들면서 살갑게 레이를 맞이해주는 천사님이었지만, 레이는 어색하게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쟤 또 레이아랑 마틸다의 미모에 기가 눌린 건가?
“야. 레이.”
“아앗…으, 응…괜찮아….”
내가 나서서 신경 써주려고 했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다.
내 얼굴을 보자마자 조금 전 그 대화가 생각났는지, 레이는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며 아까보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인 거다.
어색한 느낌이 사라진 건 다행이지만, 모처럼 벗어난 지옥에 다시 한발 걸친 기분이었다.
네가 그러면 나까지 상태 이상해지니까 제발 너무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런데 둘만 데려왔어? 사라는?”
분위기 전환을 위해, 나는 빨리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데려온다면 당연히 이곳에서 지내는 네 명이 다 올 줄 알았는데, 어째선지 사라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사라 양은 안 왔네. 그자를 감시할 사람도 필요하니 말일세.”
그자? 아, 중2병을 말하는 건가. 하지만 딱히 사라가 그 녀석 담당인 것도 아니라면서? 그런데도 사라가 빠지다니.
오랜만에 내 얼굴을 보는 거니까 무조건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어차피 저택에는 바넷사도 남아 있을 테니, 맡기고 올 수도 있을 테고.
“후훗. 전에 그런 식으로 사라씨 만 구원 씨를 독점한 게 아직도 마음에 걸리나 봐요. 나중에 구원 씨가 직접 찾아가 주세요.”
표정을 보고 내 생각을 읽었는지, 레이아가 쿡쿡 웃으면서 그렇게 대답해 줬다.
그건 사라 차례를 까는 것으로 끝난 얘기 아니었던가? 하여간 사라도 너무 고지식해서 탈이라니까.
아무튼 사라가 안 왔다니 한편으로는 다행이기도 했다.
아니. 딱히 사라가 문제아라는 건 아니지만, 우리 애들 중에서 레이랑 트러블이 생길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자면 솔직히 말해서 누가 봐도 사라잖아. 겉보기에는 차가운 도시녀에, 심지어 직업은 용사니까 말이야.
만약 어제 처음 만난 게 디아나가 아니라 사라였으면…뭐, 아무튼 잘 됐지.
“구원 씨. 그런데 이번에는 언제까지 계실 수 있는 건가요? 디아나 씨에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아마 며칠은 괜찮을 거야.”
어차피 지금 내가 가봤자 할 일도 없다.
슬슬 지하 감옥에 풀어놓은 몬스터들을 바프라의 수하들이 발견했을 타이밍이니까. 그 소문이 성내로 퍼져 나가고, 그에 맞춰 그렉과 듀크, 그리고 케이로스가 소문에 살을 덧붙여 공작을 가할 때까지 내가 나설 차례는 없으니까.
“어머, 그러면 오늘은 느긋이 얘기할 수 있겠네요. 듣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천사님은 내 팔을 껴안아 자신의 가슴 사이에 파묻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닐 텐데, 무척이나 오랜만에 맛보는 기분이었다. 행복하다.
“자, 레이 씨도요. 같이 가요.”
“네, 네에.”
내 팔을 껴안은 천사님은 나머지 팔로 레이의 등까지 떠밀면서, 다 같이 지하로 내려갔다.
얘기라고 하길래 우리끼리 알콩달콩한 얘기라도 나눌 줄 알았는데, 일단은 쓰레온과 헬레나가 있는 곳으로 가는 건가.
아니. 그대로 내버려 둘 수도 없으니 걔들이랑 같이 얘기하는 게 우선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가끔은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해도 될 텐데. 천사님은 배려심이 너무 많아서 탈이라니까.
지하에 다 같이 모인 우리는, 제일 먼저 헬레나의 거취에 관한 얘기부터 하게 됐다.
감정 공유 해결을 위한 사도 임명 문제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당장 더 급한 건 이 지하에서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는 헬레나니까 말이야. 게다가 쓰레온이나 헬레나의 앞에서 사도 임명 같은 얘기를 하기도 좀 그렇고.
“그래서, 나도 웬만하면 헬레나를 안전한 곳에 있게 하고 싶은데….”
지금처럼 곁에 두고 싶은 욕망은 있지만, 그래도 헬레나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 게다가 이제는 텔레포트 마법진도 설치해서 저쪽과 이쪽을 왕래할 수도 있으니, 헬레나는 이곳에 남겨두는 게 제일이다.
어젯밤 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그런 결론을 내린 거겠지. 쓰레온은 복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얘기가 아니었다.
헬레나는 레벨이 낮은 만큼 여신님의 마나에 남들보다 더 심하게 영향을 받으니까 말이야. 여기에 놓고 간다고 해도 지낼 수 있는 곳은 여기 지하뿐. 아무리 우리 애들이 도와준다고 해도 반쯤 감옥에 갇힌 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게 될 거다.
“텔루나 님.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힐끔힐끔 내 눈치를 보다가 난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쓰레온은 잽싸게 디아나 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고개를 숙였다.
현명한 판단이다. 아마 이 방에 있는 마나 변환기도 디아나가 만든 것일 테니, 이런 걸 더 만들어서 설치해놓으면 그만큼 헬레나의 행동반경도 넓어질 테니까.
그러니 현명한 판단은 맞지만, 왜 이놈은 이렇게 밉상일까.
“흠. 이 몸보다는 우선 신전의 도움을 받아 보는 것이 좋을 것일세.”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그런 건 아니겠지만, 디아나는 일단 쓰레온의 부탁을 보류했다.
“네? 신전…말씀입니까?”
“아,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실은 말이에요. 레온씨.”
“네, 넵!”
자식. 그래도 나름 지조는 있네.
우리 천사님이 저렇게 미소 지으면서 말을 걸면 웬만한 남자는 옆에 애인이 있든 없든 침을 질질 흘리면서 홀린 듯이 쳐다볼 텐데, 쓰레온은 진심으로 헬레나의 문제밖에 머릿속에 없다는 듯 필사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남 돕기를 좋아하는 천사님은, 쓰레온과 헬레나 커플을 도울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듯 환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천사님. 다 좋은데 말이에요. 고개 끄덕일 때 너무 몸까지 흔들지 마세요. 천사님은 조금만 흔들어도 그…미드가….
“헬레나 씨가 여신님의 마나에 영향을 받지 않을 방법이 있어요.”
“뭐? 그런 게 있었어!?”
잠시 딴 곳에 한눈을 판 사이에, 천사님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가 튀어나왔다.
이건 나도 몰랐던 사실이었기 때문에 깜짝 놀라서 되묻자, 천사님이 미소와 함께 한 번 더 가슴을 출렁…아니. 지금 거기에 집중할 때가 아니지.
“그, 그 방법이라는 게 뭡니까!?”
“헬레나 씨께서 사제가 되시는 거예요.”
옆에 있는 헬레나의 손을 꽉 잡으면서 몸을 내미는 쓰레온에게, 레이아는 미소와 함께 대답했다.
그런가. 그런 간단한 방법이 있었던 건가. 확실히. 생각해 보니 일리 있는 방법이었다. 여신님의 사제가 여신님의 마나에 이상 반응을 보이는 건 말이 안 되니까. 용케 그런 방법을 생각해냈네.
“생각해낸 게 아니에요. 알게 된 거죠.”
감탄하는 내게, 마틸다가 옆에서 고개를 저었다.
응? 그게 무슨…아, 그런가. 그러고 보니 구미호들을 선발해서 위로 데려가 교육하는 활동을 한다고 했었지. 난 그냥 구미호들 성욕이나 풀어주는 활동인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응? 잠깐만. 하지만 그러면 이상한데? 그런 방법으로 구미호들에게 여신님의 마나에 대한 저항력을 심어줄 수 있다면, 이방은 대체 왜 존재하는 거지?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외에도 이것저것 의문점이 있었다.
“당신 생각이 맞아요. 모두가 사제가 될 수는 없어요. 당신. 여신님의 사제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자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세요.”
자질? 사제 레벨을 엄청 올리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냥 얻기만 하겠다는 건데 자질까지 필요해? 그냥 여신님을 믿기만 하면 되는…아, 그런가.
“그런 거예요.”
이곳 사람들은 당연한 얘기지만 전쟁신을 믿는다. 그리고 전쟁신을 믿는 대부분은 여신님을 증오한다.
아무리 우리를 만나고 여신님에 대한 인상이 변하더라도, 여신님의 사제가 될 수 있을 만큼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인가.
솔직히 지금까지 새로운 마법 계열 학습에 집중하는 디아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여기에서 무슨 할 일이 있다는 건지 잘 이해가 안 됐었는데, 드디어 그 답이 보이는 기분이었다.
진짜로 그냥 날 기다리려고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다들 나름대로 할 일을 하고 있었구나.
“하지만 헬레나 씨라면 분명 괜찮으실 거예요. 레온 씨와 정말 잘 어울리시는걸요.”
뭐, 확실히. 내가 천사님처럼 세상 모든 걸 긍정적인 눈으로만 보는 성격은 아니지만, 헬레나라면 괜찮을 거라는 말 자체는 동의했다.
헬레나는 지금까지 줄곧 우리가 여신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러면서도 쓰레온과 저렇게 이어진 거니까. 실제로 우리가 여신님의 사람들이라는 걸 밝혔을 때도 거부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러니 사제가 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네! 게다가 사제가 되면 저희 세계의 특성을 전부 가지게 되는걸요. 레온 씨와 앞으로 같이 지내는 데에도 분명 도움이 되실 거에요.”
생각보다 이 문제는 쉽게 해결되겠군.
그렇게 생각한 순간, 천사님의 입에서 또다시 생각지 못했던 정보가 튀어나왔다.
“잠깐만. 레이아. 우리 세계의 특성이라고 말하면…레벨 업 방식도 포함되는 얘기야?”
“…네.”
돌려 말했는데도 조금 부끄러운지, 천사님은 살포시 뺨을 붉히며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가련한 표정과 묵직한 가슴의 출렁임이 대비되어 무척이나…아, 아니. 그게 아니라.
“야. 쓰레온. 잠깐 나랑 얘기 좀 하자.”
마음 같아서는 나도 남의 커플 얘기는 대충 정리하고 빨리 우리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같이 지옥까지 헤쳐나오면서 지낸 놈이다. 같은 남자로서 파국이 다가오는 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잖아?
“뭐, 뭐야? 왜?”
“잔말 말고 따라와.”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는 쓰레온을 잡아끌고, 나는 방을 벗어났다.
“야. 너 괜찮겠냐?”
“뭐가?”
하. 이것 봐라. 이 형님이 기껏 생각해서 걱정해 줬더니 표정하고는. 진짜 내가 착해서 다행인 줄 알아라. 딴 놈 같았으면 네 면상 보고 기분 더러워서 그냥 가버렸을 테니까.
“야. 만에 하나 헬레나 씨가 성공적으로 사제가 됐다고 치자.”
“그게 뭐?”
“섹스로 레벨이 오르게 되겠지? 너 헬레나랑 레벨 차이 몇이냐?”
“잘됐잖아. 헬레나가 레벨이 쑥쑥 오르면 나도….”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야, 쓰레온은 드디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래 새끼야. 너랑 섹스하면 헬레나는 순식간에 쑥쑥 레벨이 오를 거야. 그나마 직업 레벨에 제한이 걸려서 100에서 멈추겠지만, 너 그 정도 레벨 여자랑 섹스해 본 적 있지? 어땠냐?”
“…….”
이 반응을 보아하니, 굳이 확인해 볼 필요도 없겠군. 몇 번 흔들다가 찍. 여자랑 레벨이 100이 넘게 차이가 나도, 압도적인 매력 수치 차이 앞에서는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신님의 사제는 기본적으로 다들 예쁜 거 알지? 헬레나 씨도 사제가 되면 날이 갈수록 더 예뻐질 거야. 그렇게 되면 너….”
“그, 그만! 그만해! 아, 아니야! 난 조루가 아니야! 너희가! 너희가 너무 명기인 거야! 나, 난…난 평범! 안 돼! 그런 눈으로 보지 마!”
…야. 반응하기 힘든 트라우마 발동하지 마라. 뭐라고 해줘야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래서, 어쩔래? 네가 싫다고 하면 내가 어떻게든 둘러대서 반대해 줄게. 지금까지처럼 헬레나 씨를 같이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 그건 안 돼! 그런 이유 때문에 헬레나를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어!”
쓰레온이 처음 헬레나에게 빠지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면, 속궁합이라는 건 이 커플에게 있어 엄청나게 중요한 문제일 거다.
그래서 나도 일부러 이렇게 이놈을 데리고 나온 건데, 쓰레온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헬레나에게 더 푹 빠진 모양이었다.
“그럼 어쩌려고? 이대로 헬레나가 사제가 되도 된다고?”
“…그, 그래! 이, 이렇게 된 이상…! 야!”
자기도 고민되는지 잠깐 동공이 진동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쓰레온은 이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어깨를 움켜잡았다.
이놈이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전쟁신을 없애는 수밖에 없어!”
“…즉, 헬레나 씨가 레벨이 오르기 전에, 네 저주를 풀겠다?”
“그래!”
야. 그게 그렇게 말처럼 쉬웠으면, 나도 진작에 전쟁신을 해치우고 우리 애들이랑 하하호호 느긋하게 인생을 즐기고 있었겠다.
그런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꿈을 꺾을 필요는 없겠지. 이 녀석이 의욕에 불타는 건 나로서도 나쁜 일이 아니고.
“뭐, 힘내자고.”
“조, 좋았어! 빨리 바프라를 해치우고, 그다음 나머지 둘도 해결하면 되잖아! 별거 아니잖아! 다 덤비라고 그래! 이 용사님이…!”
“비스는 동성애가 만연하는 남탕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다, 다 덤비라고 그래!”
야.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 뭐, 이놈도 나랑 같이 5.5계층의 지옥을 겪었으니까, 그럴만하지만.
“미안. 기다렸지. 잠깐 남자끼리 할 얘기가 있어서.”
아무튼 대충 쓰레온도 결심이 선 것 같으니, 우리는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후훗. 아니요. 저희도 할 얘기가 있었는걸요.”
천사님의 말대로 여자끼리도 뭔가 얘기를 나눴는지, 방안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레이의 표정도 아까보다 더 부드러워진 걸 보면 디아나나 레이아, 마틸다가 분위기를 잘 만들어준 모양이다.
여기에 있는 셋은 내 여자들 중에서도 특히나 어른스럽고 온화한 멤버들이니까 말이야. 참으로 믿음직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아, 헬레나 씨가 사제가 되면 된다는 거였지? 그러면 지금 당장 시험해 보는 게 어때?”
“여기서는 안 돼요. 사제가 되려면 그에 맞는 의식이 필요한걸요.”
“그러면 신전으로 가야 해?”
“네! 그럼 지금 당장 가볼까요?”
위기에 빠진 쓰레온 커플을 어서 빨리 도와주고 싶은지, 천사님은 짝하고 손뼉을 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행동이 한편으로는 쓰레온을 위기에 빠뜨리는 행동이라는 것도 모르고.
“지, 지금 당장이요?”
“괜히 시간 끌 이유도 없잖아? 가자고.”
…쓰레온. 굳세게 살아라. 미안하지만 같은 남자로서 도와주는 건 아까 그걸로 끝이야. 나도 언제까지 너한테 시간 잡아먹히고 있을 수 없잖아?
그런 이유로, 우리는 우선 다 같이 구미호 마을 중앙에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 위로 이동했다.
도중에 남자 냄새를 맡고 구미호들이 몰려오기는 했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나는 폴리모프 팔찌에 약자태세까지 사용해서 평범한 꼬맹이로 둔갑했고, 쓰레온은 뭐…쓰레온이니까.
그럼에도 나와 쓰레온의 정조를 노리는 구미호가 없는 건 아니어서, 우리 애들이 왜 그렇게 구미호들 앞에 날 보이지 않으려고 했는지 실감하기는 했지만.
안 그래도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구미호가 여신님의 마나로 몸까지 달아오르니, 여러모로 대단하더라고.
아무튼 무사히 위로 올라온 우리는, 곧장 신전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헬레나는 계속해서 여신님의 마나에 영향을 받고 있으니까 말이야. 최대한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흠. 자네. 헬레나 양은 성직자 둘에게 맡기고, 이 몸들은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어떻겠는가?”
하지만 아무래도 디아나의 의견은 조금 다른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넌 왜 내 등에 달라붙어 있냐.
“이런 곳에서 비행 마법을 쓰고 있으면 이 몸의 정체를 들키지 않는가.”
아니. 여전히 마법사들한테 인기 폭발해서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건 알겠다만, 그러면 그냥 평범하게 걸으면…아니다. 됐다. 그냥 업혀 있어라.
“음. 좋은 마음가짐일세.”
내가 자세를 고쳐서 제대로 업어준 게 마음에 들었는지, 디아나는 내 머리를 마구잡이로 쓰다듬었다.
이제 와서 하는 생각이지만, 얘 지금까지 유독 내 등에 업혀 있으려고 했던 게, 스킨십이 좋아서가 아니라 그냥 걷기 귀찮아서 그랬던 건 아니겠지?
“그럼 구원 씨. 다녀올게요.”
아무튼 굳이 우리까지 신전에 따라갈 필요가 없다는 디아나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실 겸사겸사 레이도 사제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잠깐 안 한 건 아니지만. 아니. 여신님의 마나에 영향을 별로 안 받아도, 섹스로 레벨업을 할 수 있게 되면 편할 것 같아서 말이야.
하지만 그 생각은 바로 그만뒀다.
어차피 사도 임명을 하면 섹스로 레벨도 올릴 수 있겠지.
아직 그렇다고 확정된 건 아니지만, 나는 묘하게 그런 확신이 들었다.
사제가 되는 것만으로도 그게 가능한데, 사도 임명으로 불가능할 리가 없어. 사도 임명은 여신님이 전쟁신 세계 공략을 위해 적극 추천했던 스킬이니까.
“응. 이따가 봐.”
손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레이아와 떨어지기 아쉽다는 듯 짧은 키스를 해주고 간 마틸다에게 인사를 하며, 나는 새삼 감회에 젖었다.
이따가 보자니. 우리 애들한테 이런 말을 하는 게 대체 얼마 만인지.
“그럼 우리도 가자.”
목적지는 저택…이지만, 그전에 우선 레이첼 누님한테 짧게라도 얼굴을 비쳐야 했다.
“그러면 저녁에 봐요.”
이지적인 미모와 대비되는 귀여운 동작으로 손을 흔드는 누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안내 데스크를 빠져나왔다.
아쉽게도 레이첼 누님과 차분히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길드장의 딸이라고 특별 취급당하기를 원치 않는 누님인데, 내가 누님 앞에서 판 깔고 앉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때문에 누님과는 던전 귀환 수속이 진행되는 동안 짧은 인사만 몇 마디 나누는 게 전부였다.
다행히도 디아나가 아침에 레이아와 마틸다를 데려오면서 다른 사람들한테도 상황 설명을 해줬는지 내가 더 부연 설명을 할 필요는 없어서, 짧은 인사만 나누는 것으로도 충분하다면 충분했지만.
그래도 역시 감정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구미호 마을로 내려오는 애들하고는 매일 반지로 대화도 하고 가끔 얼굴도 보고했지만, 레이첼 누님하고는 진짜 오랜만인데 인사도 길게 못 하다니.
“하아….”
그렇게 아쉬워하면서 길드 건물을 나오니, 옆에서 레이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얜 또 왜 이래? 아무리 레이첼 누님이 살갑게 대해 줬다지만, 처음 보는 누님과 대화 몇 마디 못하고 간다고 아쉬워할 성격도 아니잖아?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레이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힐끔 이쪽을 쳐다보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훑어봤다.
길드의 앞 광장은 각양각색의 모험가들과 그들을 상대로 한 장사꾼들로 활기가 넘치고 있었다.
그런가. 전쟁이 일상인 세계에서 살다 온 레이는 이런 평화로운 광경이 익숙지 않은 건가.
사실 아래에서도 전쟁이 일어나는 곳을 직접 본 경험은 없었기 때문에 나로서는 잘 실감이 나지 않았지만, 직접 살다 온 레이로서는 다르게 느껴지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 이걸로 레이가 이 세계에 더 좋은 인상을 가져준다면, 나로서도….
“너…눈 높다는 말 진짜였구나.”
무슨 생각 하나 싶었더니, 고작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거야!? 설마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감회가 새로워진 게 아니라, 그냥 거리에 있는 사람들 외모 평균치를 스캔한 거였다니!
진짜 이 녀석은 어떻게 이렇게 무슨 생각하는 건지 알기가 힘든 거야!? 심지어 감정 공유까지 되고 있는데!
“음. 레이 양도 잘 알고 있구먼. 이자가 원래….”
“너까지 뭘 맞장구치는 거야. 누가 들으면 내가 얼굴만 보고 너희를 좋아한 줄 알겠다.”
“음?”
내가 퉁명스럽게 내뱉자, 디아나가 한차례 몸을 움찔 떨더니 어깨너머로 얼굴을 들이밀어서 내 뺨에 자기 뺨을 바짝 밀착시켰다.
“으으으음?”
방금 자기도 좋아서 움찔한 주제에 이제 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놀리기는. 레이처럼 감정 공유가 안 된다고 해서, 내가 네 마음도 못 읽을 것 같냐?
“내가 너희를 좋아하는 건, 그냥 예뻐서 그런 게….”
“아….”
이대로 놀림거리가 될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나도 아무렇지 않은 척 받아쳐 주려고 했지만, 하필 또 그 타이밍에 레이와 눈이 맞아 버렸다.
야. 잠깐만. 지금 이건 디아나를 맞상대하려고 그런 거니까!
“으읏…!”
제, 젠장! 아, 아니야! 난 안 부끄러워! 레이 얘가 아무리 부끄러워해 봤자, 나만 안 부끄러우면 연쇄 지옥에 빠질 일은 없어! 난 안 부끄러워!
“으음? 자네, 부끄러운 겐가? 뭔가 말이라도 해보게. 응? 으응?”
“시, 시끄러워. 확 후드 벗겨 버린다.”
“그, 그만두게!”
계속 뺨을 문지르며 장난치는 디아나의 머리 쪽에 손을 가져다 대자, 디아나는 두 손으로 황급히 자기 후드를 누르면서 고개를 뒤로 뺐다.
훗. 이겼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기세를 몰아 반격까지 하고 싶지만, 덕분에 연쇄 지옥에 끌려가지는 않았으니 봐주기로 하지.
“다녀오셨습니까.”
아무튼 그렇게 적당히 레이에게 거리도 구경시켜주면서 저택으로 돌아가니, 집사님이 현관에서부터 우리를 마중해 줬다.
오랜만에 봤는데도 여전히 표정은 없었지만, 우리가 도착하고 튀어나온 게 아니라 처음부터 여기에 있었던 거다. 줄곧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겠지.
“응. 오랜만. 아 참. 여기는 레이. 레이 이쪽은 내 여자 중….”
“집사인 바넷사입니다.”
“야. 너 진짜 이러기냐?”
“…농담입니다. 구원 님의…도 겸하고 있습니다.”
…얘 지금 부끄러워서 얼버무린 거 맞지? 내 뭘 겸하고 있는 건데!? 애인이라고 왜 확실히 말을 못 해!? 아니. 그보다.
“너 왜 말하면서 한발 물러섰냐?”
“…특별히 이유는 없습니다.”
“설마 자기가 지금 집사가 아니라 내 여자라고 하면, 내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물러난 건 아니지?”
“…….”
“왜 거기서 대답을 안 해!?”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넌 농담이 농담으로 안 들린다고! 아오 진짜 오랜만에 보니까 더 적응 안 되네.
하지만 말이지. 이쪽에는 널 컨트롤할 수 있는 치트키가 있다고!
“디아나. 집사가 계속 장난만 치잖아. 뭐라고 한 마디 꾸중이라도 해줘.”
“음? 자, 자네, 지금 지위로 바넷사를 찍어누르려고 하는 겐가아!?”
크윽. 디아나. 너도 바넷사 편이었냐…! 그리고 눈 동그랗게 뜨고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 마! 네가 그런 표정 지으면 연기라는 걸 알아도 괜히 죄책감이 생긴단 말이야!
“…그냥 사라한테 안내나 해줘.”
주종이 쌍으로 장난을 거니까 벌써부터 진이 빠지네.
아니. 뭐, 바넷사 성격에 이런 식으로 얼굴 보자마자 장난부터 친다는 건, 그만큼 오랜만에 날 봐서 기쁘다는 뜻이겠지만 말이야. …그런 뜻 맞지?
“야. 너 말이야.”
저택에 들어와서 다시 둥둥 떠다니는 디아나와, 앞장서서 안내하는 바넷사. 그 둘의 뒤를 따라 지하로 걸어가는 도중, 레이가 몰래 내게 귓속말을 해왔다.
“응?”
“너…여기서는 조금 인상이 다르네?”
“그래?”
아래에서나 여기서나 별로 달라진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적진 한가운데도 아니고 우리 애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마음이 풀어져서 평소보다 더 편하게 행동하는 건 있지만.
“응. 혹시…잡혀 살아?”
크헉. 이, 이 녀석…비밀 얘기하는 척하면서 이런 암습을…. 괘, 괜찮아! 밤에는 내가 다 이기니까! 낮에 좀 잡혀 사는 게 무슨 문제…아, 아니! 잡혀 사는 것도 아니야!
“그러면 나도….”
당황하는 내 모습을 보고 약점을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레이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내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아마 아까 디아나가 그랬던 것처럼 내 얼굴에 뺨이라도 비비면서 놀리려는 모양이지만.
“쪽.”
“으히읏!?”
내가 먼저 그 뺨에 가볍게 키스를 해버리자, 화들짝 놀라서는 뒷걸음질 쳤다.
훗. 감히 누굴 놀리려고.
“넌 가서 일반 상식이나 더 키우고 와라.”
“어,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곳에는 처음 오니까!”
아니. 이쪽 세계의 상식만 가지고 얘기하는 게 아닌데.
그렇게 얘기해주고 싶었지만, 두 손으로 자기 뺨을 가리고 빨개진 모습이 귀여워서 봐주기로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오자마자 뭘 보여주는 거야? 뭐야?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어느새 도착한 지하실 저편에서 한풍이 휘몰아치는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말이야.
“오, 사라야. 오빠가….”
“드디어 만났군. 걸…하아, 여신의 개.”
지금부터 레이랑 대면시켜야 하는데, 시작부터 기분이 안 좋으면 잘 풀릴 일도 잘 안 풀린다. 일단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황급히 앞으로 나선 나였지만, 그런 우리 사이에 끼어들어 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떻게 용사를 구슬렸는지는 묻지 않겠어. 하아, 원흉을 제거하면, 하아, 결국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니까.”
바로 중2병이었다. 뒤쪽에서 레이가 “요, 용사…?”라고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지금은 잠시 놔두자.
저 중2병, 폼이란 폼은 다 잡은 말투로 말하고 있는데 말이야. 방금 여신님한테 걸레라고 하려다가 사라 눈치 보고 말 바꿨지?
“각오는 되어 있겠지? 하아, 여신의 개. 하아, 그때는 네 더러운 술수를 간파해내지 못해, 하아, 당했지만, 하아, 내게 같은 방법은 두 번 통하지 않아.”
“너 저번에 나한테 당한 게 두 번째잖아.”
설마 처음 만났을 때는 도망갔으니 당한 게 아니라고 할 셈은 아니겠지? 다시 만났을 때 눈에 핏발까지 서서는 성자 스킬에 고통받고 있었으면서.
“세 번은, 하아, 통하지 않아.”
…인정하는 자세는 보기 좋다만, 너무 태세 전환이 빠른 거 아니냐?
“적의 개라지만 날 두 번이나 곤란하게 한 강적. 하아, 이런 삭막한 지하실에서 마무리를 짓기에는 아까운 상대지만, 하아, 이것도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겠지. 하아, 자, 여신의 개! 성자 구원! 각오해라!”
다시는 지지 않겠다는 각오를 담아서 외치는 중2병을 보고, 나는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사라야. 쟤 아까부터 하아하아 거리면서 뭐라고 하는 거야? 바닥에 엎어져서는.”
“나한테 묻지 마. 저 사람 좀 이상하니까.”
마치 더러운 거라도 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중2병을 내려다보면서 옆으로 한 걸음 물러난 사라는, 그대로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저런 것보다. 야. 구원. 너….”
“저런 것이라니! 용사! 설마 날 두고 하는 말인가!? 하아, 하아, 적의 손에 타락해서는 전쟁신 님이 가르쳐주신 긍지마저 잊어버린 것인가!? 하아, 어서 이 수갑을 풀고 나와 성자 구원의 정정당당한 결투를…!”
“풀어 줄 리가 없잖아. 바보 아니야?”
“요, 용사아아아!”
사라가 차가운 말투로 그렇게 내뱉자, 중2병은 상처받은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야. 상처받은 건 알겠는데 왜 날 쳐다보냐? 그렇게 그렁그렁한 눈으로 쳐다봐도 안 풀어줄 거다.
뭐, 그래도. 계속 하아하아거리는 것도 듣기 불편하니까.
“응흐으읏!?”
가볍게 성자의 파동을 한 방 날려주자, 안 그래도 손발이 묶여서 엎어져 있던 중2병은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신음했다.
그래. 이렇게나마 조용하니까 좀 낫네.
하지만 사라는 그런 중2병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차가운 표정을 유지한 채 이쪽으로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레이 앞에 멈춰 섰다.
“그래서, 이 사람이 전에 말한 그?”
그리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레이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다.
조금 전 중2병의 말로 사라가 용사라는 걸 알아낸 레이는 살짝 기가 죽은 표정으로 사라의 시선을 마주 봤고, 사라는 그런 레이를 더욱 차가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야. 너 혹시 컨셉질하는 중이냐?”
“커, 컨셉질이라니!”
내 한 마디에 바로 차가운 가면이 벗겨지고 말았다.
생긴 것만 차갑지 바넷사처럼 무표정 유지도 잘 못 하면서 컨셉잡기는.
“오랜만에 봤는데 오빠한테 인사도 안 할 거야?”
“…다른 여자 뺨에 뽀뽀하면서 온 주제에.”
“에이. 그래도 아침에 사라 너 안 온 거 보고 바로 이렇게 찾아왔잖아. 좀 봐줘.”
“그 덩치에 애교부려봤자 하나도 안 어울리거든? 바보.”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라는 은근슬쩍 내 쪽으로 다가와 살포시 품에 안겼다.
나는 그런 사라의 턱을 받쳐 들고 그 입술에 살짝 입술을 얹었다가 뗀 다음,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녀왔어.”
“응. 다친 데는….”
“요, 용사를…구슬리고 있어….”
뭐, 그 달콤한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지만.
야. 레이. 너희 세계에서 용사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입 밖으로 그런 말을 꺼낼 필요는 없었잖아!
“누, 누, 누가 구슬려진다는 거죠!?”
“네, 네!? 그, 그게….”
레이 너 진짜 나한테 빚 하나 크게 진 줄 알아라.
도움을 청하는 레이의 눈빛을 무시할 수도 없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사라의 칼끝이 내 쪽을 향하도록 몸을 던졌다.
“누구긴 누구야 너지.”
“무, 뭐!?”
“왜? 이 오빠한테 구슬려지는 게 싫어? 못 보던 사이에 부끄럼이 많아…크허억!”
보, 복부에 주먹이….
“어…? 꺄악!? 괘, 괜찮아!? 나도 모르게 그만 저 사람한테 하던 대로…!”
중2병…넌 대체 홀로 어떤 싸움을 하고 있었던 거냐. 어쩐지 묘하게 사라 눈치를 본다 싶더니….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하아…다행이다. 정말 미안해.”
“안 괜찮다니까!”
“미안해 오빠. 응?”
야. 이럴 때만 오빠라고 하는 건 치사하지 않냐?
젠장.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괜히 더 예뻐 보이니까 화낼 생각조차 안 들잖아.
“자기도 모르게 이런 행동을 하다니. 사라 네가 중2병 감시를 전담한 것도 아니라면서?”
“그래도 처음에 심하게 반항할 때는 내가 제압했단 말이야.”
그때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는지, 사라는 심히 불쾌한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렇게 심했어?”
“당연하지. 성자 스킬은 왜 걸어놓은 거야? 그것 때문에 저 사람은 날 덮치려고 하고, 나도 저 사람이 남자인 줄 알았으니까 반쯤 죽…아무튼 아침부터 최악이었어.”
야. 너 지금 반쯤 죽였다고 말하려다가 말았지? 무서워 이것아.
“미안. 미안. 제법 강한 놈이니까, 그런 식으로 해놓으면 제압하기 쉬울 것 같아서 그랬어. 아침부터 네 기분을 나쁘게 할 생각은….”
잠깐만. 아침부터?
“왜 그래?”
갑자기 말을 멈춘 날 보고, 사라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앨리시아가 저 중2병을 데려온 게, 아침이라고?”
분명 내가 저 녀석을 맡긴 건…밤이었지?
내 기억이 틀렸을 리가 없다. 아직 시간이 밤일 때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 서둘렀던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다는 말은….
아라크네가 중2병을 맡고 있었던 밤부터 아침까지,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답은 중2병이 전부 알고 있을 테지만, 이 녀석한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전혀 들지 않았다.
아니. 이 녀석도 실은 여자라는 모양이니, 내가 제대로 실력 발휘만 하면 못 들을 것도 없기는 하지만, 이런 때에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잖아?
“야. 일어나 봐.”
“으흐읏….”
그래도 일단 물어보기라도 하기 위해 바닥에 얼굴을 박고 있는 중2병을 툭툭 건드려서 깨워봤지만, 놈은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이래선 제대로 대화를 나누는 것도 불가능하겠군.
“구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상당히 찝찝한 기분이기는 했지만, 나는 애써 그 기분을 억눌렀다.
그래. 고작 밤부터 아침이야. 그 사이에 그놈들이 이 중2병을 데리고 뭘 할 수 있었겠어?
사라한테 그렇게 얻어터지고도 입을 안 열었다는데, 아라크네 클랜한테는 술술 입을 열어서 협력할 리도 없고 말이야.
지금은 그런 것보다, 내 여자가 더 중요했다.
“그보다 사라. 이쪽은 레이야. 디아나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지? 레이. 이쪽은….”
“본처인 사라에요.”
내가 설명할 것도 없이, 사라는 자기가 먼저 레이아에게 다가가서 손을 내밀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평범한 반응이군. 손을 내밀면서 내뱉은 말은 별로 평범하지 않지만 말이야.
차가운 말투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사라도 자신이 레이보다 갑의 위치에 있다는 걸 각인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한 건 아닐 거다.
얘가 이래 봬도 그런 성격은 아니거든. 자기가 본처라고 주장하는 것도 비슷한 입장인 디아나 레이아가 있을 때가 아니면 전혀 하지 않으니까.
아마 자기 나름대로 장난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려고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나로서는 웃어넘길 수 있는 장난이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누가 본처라는 겐가!?”
“저요.”
“본처는 이 몸일세!”
…디아나야. 이왕이면 조금 더 어른스러운 대응을 하자. 실제로 어른이니까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구원을 제일 처음 만난 건 저예요!”
“흥! 누가 먼저 만났는지는 중요한 일이 아닐세!”
“섹스도 제일 먼저 했거든요!?”
“후흥. 사라 양은 그걸 먼저 했다고 주장할 셈인가? 자네에게 한 것은 의료행위일세. 의. 료. 행. 위.”
“의료행위 아니었거든요!? 디아나가 봤어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네! 제대로 된 행위를 따지자면 저자가 눈을 뒤집고 덮쳐 들은 이 몸과 한 섹스야말로 진정한 첫….”
“디아나도 스킬 연구 목적으로 쳐들어가서는 자기가 꼬신 거잖아요!”
“꼬신 적 없네! 저자가 순수하게 이 몸의 미모를 보고…!”
오랜만에 보는 사라와 디아나의 본처 자리다툼은 전에 없이 치열했다. 치열한 만큼 둘은 진심으로 다투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는 내 입가에서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아니. 둘이 날 두고 다투는 게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다. 그냥 저걸 보니까 진짜로 얘들 곁으로 돌아온 실감이 들어서 말이야.
하지만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볼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나 혼자뿐이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나랑 같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레이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로 전혀 다른 감상을 내 귓가에 속삭였다.
“…야.”
“응?”
“저기…여, 여기는 원래 이렇게 성적으로 개방되어서 섹….”
아니. 속삭이려고 했다.
하지만 레이가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사라와 디아나가 우리가 정답게 귓속말을 주고받는 모습을 포착하고 말았다.
원래 저렇게 싸우면서도 나랑 레이아가 둘이서 좋은 분위기가 되면 바로 견제했으니까 말이야. 말다툼하면서 주변을 견제하는 게 습관화된 건지도 모른다.
“거기! 치사한 짓 하지 마세요!”
하지만 이런 전개가 익숙한 건 우리뿐이지, 레이한테도 이런 전개가 익숙한 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사라가 가진 용사라는 위명에 기가 눌려 있던 레이는, 사라의 지적에 깜짝 놀라서 목소리를 드높이고 말았다.
“원래 이렇게 섹스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해!? 아, 아앗…!”
“무…!”
“뭣…!”
자기 실수를 깨달은 레이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심한 정신적 타격을 입은 사라와 디아나는 짜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무릎을 털썩 꿇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말 한마디로 용사와 대마법사를 한 번에 물리치다니. 레이 이 녀석. 보기보다 제법이잖아? 과연 배틀마스터야.
“디, 디아나…저, 저희는….”
“이, 이 몸들은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구원한테 물든 건가요!?”
“저자에게 물든 것인가아!?”
“그건 왜 내 탓으로 돌려 이것들아! 그냥 너희가 발랑 까진 거잖아!”
심지어 이 녀석들, 하모니 했어! 아까까지 그렇게 둘이서 투닥투닥 싸우고 있었던 주제에! 진짜 얘들은 사이가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하여간 진짜. 애초에 치사한 짓은 또 무슨 치사한 짓을 했다고 그래. 레이 얘는 그런 거 할 성격도 못 된다고.”
뭐, 따지고 보면 우리 천사님도 그런 거 할 성격이 아니지만. 실제로도 치사한 짓을 한 게 아니라, 그냥 사라랑 디아나가 둘이 노니까 남은 우리끼리 얘기하다 보니 좋은 분위기가 된 거였고.
“흥. 구원은 이상한 곳에서 둔한 면이 있으니 모르는 거야.”
모르긴 뭘 몰라. 내가 둔하기는 또 뭐가 둔하고. 맨날 너희랑 표정과 눈짓만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건 기억 안 나니?
“음. 어젯밤에 레이 양이 말하지 않았는가. 히이익! 잘못했어요! 다른 여자 따위 다 물리치고 혼자 독점하려는 생각 같은 거 안 했어요! 라고 말일세.”
…그거 지금 레이 흉내 낸 거냐? 용케도 그 긴 대사를 토시 하나 안 틀리고 정확히 기억하고 있네. 그 좋은 머리를 쓸데없는 데에 쓰기는.
디아나의 말은 어디부터 태클을 걸어야 할지 고르기 힘들 정도로 태클 걸 곳이 많았지만, 나는 제일 먼저 여기부터 태클 걸기로 했다.
“야. 사라 앞에서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흐으으응….”
느, 늦었다. 사라가 엄청 차가운 눈으로 레이를…아니. 저건 차가운 눈이 아니잖아? 저건 대체 무슨 표정이야?
“레이 씨라고 했죠?”
“네, 네엣!?”
레이 이 녀석은 이 녀석 대로 엄청 기죽었네. 괜찮아. 사라도 딱히 잡아먹으려는 건 아닐 거야. 아마도.
“당신 구원하고…큭…!”
왜, 왜? 왜 또 갑자기 날 노려봐? 난 또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알 수 없는 사라의 행동에 잠깐 위축…아니! 위축되지는 않았어! 그냥 영문을 알 수 없어 궁금증이 더해졌을 뿐이지!
아무튼 그랬던 나지만, 이어지는 사라의 다음 행동과 말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
“…가, 같이 안 자봤어요?”
살짝 뺨을 붉히면서 또다시 날 노려보는 사라.
그런가. 아까 레이가 한 말 신경 쓰고 있는 거구나. 그런 말을 들어 놓고 또 섹스 얘기를 하게 됐으니까.
그런데 사라야. 그게 날 노려볼 일이니?
“네? 자? 아아…야. 저 사람…세, 섹스…말하는 거지…?”
게다가 사라의 말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레이는 귓속말로 내게 그런 귓속말까지 하는 바람에, 사라의 수치심은 더욱 증폭됐다.
아까처럼 디아나랑 다투고 있던 것도 아니고, 이렇게 우리한테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귀가 좋은 사라가 귓속말을 못 들을 리가 없으니까.
“대, 대답이나 해요!”
“해, 해봤어요!”
얘들 진짜 뭐 하는 거야? 한쪽은 수치심에 떨면서, 한쪽은 공포에 떨면서 섹스 얘기를 하고 있다니. 진짜 내가 말하고도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정작 이런 상황을 만들어낸 대마법사님께서는, 가만히 보고 있으라는 듯 내게 슬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데 독점할 생각을 했다고요? 이 변태를 혼자 감당할 수 있겠어요?”
그리고 사라가 그 말을 하고 나서야, 나는 디아나가 뭘 노렸던 건지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사라와 레이의 공감대를 형성해서 사이좋아지게 하려는 계책이겠지. 중간에 내가 희생양이 되기는 하지만, 내 여자들의 관계가 원만하게 되기 위함이다. 그 정도는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었다.
혹시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계산하고 그런 말을 꺼낸 거였다면, 아니. 분명 그렇겠지. 디아나는 역시 머리가 좋고 어른스럽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지 디아나야.
“아…크흠. 흠. 그, 그게 말이지 사라야.”
사라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는 레이를 대신해서, 나는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뭐야.”
야.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뭔가 짐작했다는 표정으로 째려보지 마라. 그 짐작, 아마 정답이지만 말이야. 하여간 감은 엄청나게 좋다니까.
“그…말이지. 저쪽에서 지내는 건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고생스러운 일이어서 말이지.”
“본론만 말해.”
“레이 얘랑 잘 때는 대부분 실비아랑 같이…아따가!”
“이, 이 변태가 진짜!”
“며, 몇 번…! 몇 번 안 잤어!”
찰싹찰싹 등을 노려오는 사라의 손바닥을 회피하며 필사적으로 변명해 봤지만, 사라는 용서가 없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가차 없이 내 등짝에 파고든 사라의 손바닥은 순식간에 날 녹다운 시켰고, 사라는 쓰러진 날 발치 아래에 두고는 당당하게 외쳤다.
“이 변태가 진심으로 하면 하루도 제대로 못 버텨요! 그런 걸 매일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독점 같은 건 꿈도 꾸지 마요!”
…아니. 사라야. 뭐, 날 공유하자는 그 마음가짐은 정말 기쁜데 말이야. 그거 그렇게 당당하게 외칠 말이니?
“…으, 으읏…!”
아, 자기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구나.
하는 수 없지. 여기선 이 오빠가 멋지게 네 위기를 구해주는 수밖에.
“헤헤헷. 나랑 하는 게 그렇게 좋았어? 하루도 제대로 못 버틴다니, 어떤 느낌이햐악! 아파! 아파 사라야! 타임! 잠깐만!”
“절. 대. 안 봐줘!”
“끄아아악!”
“흥. 이런 변태는 내버려 두고 가죠!”
“네? 저, 저도…? 아….”
잔인하게도 아까 자기가 손바닥으로 때린 부분을 꼬집어서 더욱 극심한 고통을 준 사라는 내가 바닥에서 움찔움찔 떠는 모습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레이의 등을 밀며 함께 방을 빠져나가 버렸다.
“자네 괜찮은가?”
“안 괜찮아. 죽을 것 같아. 당장 힐링 섹스가 필요….”
“괜찮구먼.”
그러니까 안 괜찮대도. 아까 사라도 그렇고 왜 내 말을 곧이곧대로 안 믿어줄까. 디아나야. 난 매우 슬프다.
뭐, 장난은 이쯤 하기로 할까. 실은 나도 엄살을 피운 거지,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거든.
“사라가 못 보던 사이에 앙탈이 더 심해진 것 같아.”
“쑥스러워서 저러는 것일세.”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렇게 말하자, 디아나가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순간 닫혔던 문이 다시 열리더니.
“아니거든요!”
사라가 고개만 들이밀고 그렇게 외친 후 다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사라야. 굳이 다시 문 열고 들어와서까지 부정하고 가야 했니?
“뭐, 좋아서 그러는 건 알지만 말이야.”
혹시 또다시 사라가 돌아올까 싶었지만, 이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사라 양 나름대로 신경을 써준 것일세.”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대로 레이 양은 이 몸들에게 맡기고, 자네는 할 일을 하라는 얘기일세.”
“할 일이라니 그게 무슨….”
솔직히 말하자면, 디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도 바로 이해가 됐다.
하지만 모처럼 이렇게 돌아왔는데 처음부터 다른 일 때문에 혼자 행동한다는 게 마음에 걸려서, 시치미를 뗀 거다.
하지만 그런 어설픈 연기가 우리 대마법사님한테 통할 리가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 디아나도 아까 내가 반문하는 걸 들었으니까.
“이 몸들을 속일 생각은 하지 말게. 자네도 신경 쓰이는 것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디아나….”
“괜찮네. 어차피 레이 양과는 한 번 자네 없는 곳에서 대화할 필요가 있었네.”
“그건 또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후흥. 여자들만의 비밀이라는 것일세. 엿들으러 오면 안 되네?”
“그거야 알지만.”
“음. 착하네. 착해.”
공중에 둥둥 떠 있는 덕에 이제는 자유롭게 내 머리를 만질 수 있는 디아나는, 귀엽다는 듯이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면 이 몸도 가보겠네. 방에서 나갈 때는 밖에 있는 메이드를 한 명 부르게. 아무리 저자가 손발이 묶여 꼼짝도 못 한다지만, 거동을 감시할 사람이 한 명은 필요하니 말일세.”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 내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맞추더니, 자기도 그대로 방을 빠져나갔다.
디아나도 그렇고 아까 사라도 그렇고,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 계산하고 행동한 건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지. 진짜 난 아마 평생 쟤들은 못 당할 거야.
그런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나는 디아나가 말한 대로 할 일을 하기로 했다.
“야. 중2병. 이제 슬슬 그만 기절한 척 그만두고 일어나지?”
내 목소리에 중2병은 움찔하고 반응했지만,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기절한 척을 고수했다.
“야. 일어나 있는 거 다 알거든? 야.”
“비겁한 놈에게 할 말은 없다.”
바로 앞까지 다가가서 쪼그려 앉고 놈의 뒤통수를 콕콕 찌르자, 놈은 겨우 고개를 들고 그렇게 내뱉은 후 다시 이마를 바닥에 박았다.
할 말이 없기는. 지금 말했잖아.
내 성자 스킬의 위력에 놀라서 쫄은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정정당당하게 안 싸워준다고 삐진 거였냐.
“그럼 수갑 풀고 다시 싸워주면 말할 거야?”
“다시 싸워주겠다는 건가!? 처음부터 난 믿고 있었어! 전쟁신님에게 힘을 받은 용사와, 걸레년의 힘을 받은 너! 우리는 숙명의 라이벌이라는 것을! 비록 서로 믿고 싸우는 것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상대방과 진심으로 싸우고 싶은 마음만큼은 너도 나와 같을 것…!”
“아니. 싸워주겠다고는 안 했는데.”
고개를 들고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자기 망상을 토해내던 중2병은, 내 짧은 대답에 다시 빛을 잃은 눈으로 고개를 바닥에 처박았다.
“…이런 식으로 내 진심 농락하다니…더러운 걸레년의 종자다운 더러운 수법이야….”
야. 너무 눈에 띄게 실망하니까 괜히 내가 다 미안해지잖아.
뭐, 그래도 받아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런 걸 하나하나 전부 받아주면 끝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런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중2병은 특히나 더.
“애초에 다시 싸운다고 네가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아?”
“당연하다! 그 비겁한 술수만 쓰지 않고 정정당당하게 싸우면 전쟁신님에게 힘을 받은 내가 질 리가….”
“비겁한 술수라는 건, 내 스킬을 말하는 거지? 그건 내가 여신님께 받은 힘이야. 넌 마신한테 힘을 받은 모양인데, 자기는 그 힘을 쓰면서 내가 여신님께 받은 힘은 비겁하니까 쓰지 말라고? 그게 정정당당한 거야? 그냥 정정당당하게 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게 하고 넌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룰로 싸우자고 하지?”
“크, 크으으으!”
할 말 없으니까 괜히 울먹이지 마 이것아. 내가 괴롭히는 것 같잖아. 난 그냥 정당한 반론을 했을 뿐이라고.
이 녀석, 처음 봤을 때는 분명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뭐, 중2병이니까 그것도 전부 컨셉인 건가.
“제, 제, 제법 일리가 있군! 그렇다면 어디 서로 전력을 다해서 붙어보자!”
“참고로 말하자면, 나 너한테 스킬 쓸 때 일부러 위력 낮춰서 쓴 거다. 내가 전력을 다하면 너 한 방에 죽어.”
“훗. 허풍 칠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게 그흥기이이잇!”
직접 겪지 않으면 믿어줄 눈치가 아니어서, 나는 풀파워 성자의 손길을 발동하고 중2병의 이마를 가볍게 콕 찍어줬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중2병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까뒤집고 기절해 버렸다.
그래도 여자라는 걸 알고 나니까 보기에 좀 낫네. 남자인 줄 알았을 때는 진짜 보기 괴로웠는데.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언제까지 기절해 있을 셈이야? 모처럼 우리 애들이 준 시간을 쓸데없이 낭비할 생각은 없다고.
“응흐응으읏!”
내가 다시 한번 그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찍자, 중2병은 사시나무 떨듯이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흐아아…하아…대, 대체에 이게에….”
“봤지? 손가락 한 방에 이 정돈데, 내가 진심으로 널 만져대면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그, 그만뎌어어!”
“그래도 정 나랑 싸우고 싶으면….”
“흐익! 그, 그먀안…!”
계집애처럼 울부짖기는. 아니. 뭐, 계집애지만.
바닥에서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해보지만, 아까의 쾌감으로 허리가 빠졌는지 상반신을 움직이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중2병. 그런 중2병의 뒷덜미를 잡아채고, 나는 그 몸을 똑바로 세워줬다.
손발이 묶여 있다고는 해도, 이렇게 하면 설 수는 있겠지.
“이대로 10초만 서 있어 봐. 그러면 풀어주고 원하는 대로 제대로 싸워줄게.”
그렇게 말하고 손을 놓자, 아니나 다를까 중2병은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그야 그렇겠지. 허리가 빠졌으니까. 하지만 왜일까? 나는 중2병이 처음부터 서 있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야. 너 설마 무서워서 일부러 넘어졌냐?”
“나, 나르 모요카지 마라! 이, 이거슨…!”
“이것은 뭐?”
“…비거판 놈가 할 마른 업따….”
결국 처음으로 되돌아와 버린 건가.
아니. 그래도 조금 전까지의 대화가 완전히 무의미했던 건 아니다. 이걸로 중2병의 전투 의지가 완전히 꺾였으니까.
이걸로 편안하게 원하는 정보를 캐내야지.
“뭐, 좋아. 지금까지 네가 원하는 게 뭔지 잔뜩 들어줬으니, 이제는 내가 원하는 걸 말할 차례야. 내가 널 아라크네 클랜에게 맡긴 게 밤. 하지만 네가 이 저택으로 옮겨진 건 아침. 그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비거판 놈가 할 마른….”
“그 말대로. 난 비겁한 놈이라서 말이야. 계속 입 다물고 있을 생각이라면 아까 그 스킬을 계속 먹여주겠어. 기분 좋아 죽을 것 같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그 몸에 똑똑히 새겨주지.”
“으크흣…!”
이대로 입을 다무는 건가. 허리를 떠는 걸 보니, 내 성자의 손길이 얼마나 위험한 스킬인지는 충분히 인지한 모양인데 말이야.
혹시 자기 같은 중요 인물을 그렇게 쉽게 죽일 리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후우. 얘가 날 너무 우습게 보네.
콕. 콕. 콕. 콕. 콕. 콕.
“응흐으읏! 하으응! 흐이잇! 흥기잇!”
내가 그 이마를 사정없이 찔러주자, 중2병은 위험한 사람처럼 온몸을 떨면서 연속 절정을 경험하게 됐다.
진짜로 죽일 생각은 없지만, 이 정도 위협은 해줘야지. 너무 쉽게 물러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대답은?”
계속되는 쾌감으로 기절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입가에 타액까지 질질 흘리면서 축 늘어진 중2병을 내려다보며, 나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무 친근하게 대해 준 게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사라를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사라처럼 차가운 척을 해보자.
“하아, 하아, 비, 비거판 놈가아…하아…할 마른…업따아….”
하지만 그런 내 노력에도, 중2병은 그렇게만 말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젠장. 이래선 혀가 풀려서 말투가 조금 귀여워진 것 말고는 처음이란 변한 게 전혀 없잖아. 성자의 손길을 연속으로 맞고도 이렇게 버티다니. 괜히 성자 스킬의 효과를 몸에 담은 채로 내가 있는 곳까지 쫓아온 게 아니라는 건가.
이렇게 되면 이제 이 녀석의 입을 열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그래. 미리엘한테 했던 그 방법 말이다.
“…하아. 그래. 나중에 보자.”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아니. 포기한 건 아니다. 하지만 얘한테 미리엘한테 했던 그 방법을 똑같이 다시 쓰느니, 차라리 그냥 미리엘 본인한테 직접 가서 물어보는 게 더 편하고 빠르잖아?
사실 이 중2병한테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 말고도 물어볼 것이 있어서 물고 늘어져 봤지만, 이렇게 된 이상 그건 나중 기회로 미루는 수밖에.
디아나의 말대로 밖에 있던 메이드에게 중2병을 감시하게 하고, 나는 저택을 나섰다.
나가기 전에 우리 애들한테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바넷사에게 들어보니 사라와 레이 둘이서 레이를 데리고 나갔다는 모양이다.
이 세계에 익숙해지게 하려고 거리 구경이라도 시켜주려는 걸까?
아라크네 클랜은 이번에도 아무 문제 없이 프리패스로 들어갈 수 있어서, 나는 곧장 미리엘의 집무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안녕. 성자님. 기다리고 있었어.”
노크도 없이 바로 들어갔지만, 미리엘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바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얼굴을 내 다리 사이에.
“멈춰.”
가져가서 입으로 내 바지를 벗기려고 했지만, 그전에 내가 그 머리를 잡아서 멈춰 세웠다.
이런 식으로 조교 한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매번 얼굴을 볼 때마다 이러니 또 불편하네. 조교 효과가 풀리지 않았나 나중에도 쉽게 알 수 있도록 이렇게 조교 한 건데, 잘못 생각한 건지도 모르겠어.
“오늘은 됐어.”
“성자님을 보는 것만으로 달아오르는 몸으로 만들어놓고 애태우기 플레이라니. 성자님은 너무 짓궂군.”
시원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말 하지 마라 이것아. 그러니까 네 말에 신용이 안 생기는 거야. 허벅지를 살짝 비빈 걸 보면, 몸이 달아올랐다는 건 분명 사실일 텐데도 말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서 어이없다는 심경을 내비친 다음, 나는 아까 미리엘이 앉아 있던 집무용 책상 앞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그러자 어째선지 미리엘이 책상 아래로 들어가더니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은 됐다고 했을 텐데?”
“하핫. 알고 있어. 성자님의 마음이 언제 바뀌어도 대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는 것뿐이야.”
이 녀석, 나한테 조교 돼서 이러는 게 아니라 그냥 자기가 즐기고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의문이 잠깐 들었지만, 이런 걸로 시간을 끌 생각은 없으니 무시하기로 했다. 어차피 이 녀석한테 조교 효과가 남아 있는지 아닌지는, 곧 밝혀질 테니까.
“오늘은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그래? 무슨 일이야?”
“몰라서 그래? 너도 알고 있을 텐데? 아까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었지?”
내가 흘려들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야. 이 녀석은 분명 말했다. 마치 내가 올 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하핫. 난 여기에 있을 때는 언제나 성자님을 기다리고 있어.”
하여간 말은 잘해요.
특유의 무협지 주인공 같은 시원스러운 미소가, 지금은 왠지 능글맞은 미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내가 묻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다?”
“물론 짐작 가는 일은 있어. 하지만 성자님이 묻고 싶은 것이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것인지는 알 수 없잖아?”
하지만 언제까지 그 미소를 유지할 수 있나 보자고.
“중2병. 바로 안 데려다줬지?”
“맞아.”
허를 찌를 생각이었지만, 미리엘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 정도로 빈틈을 보일 녀석이 아니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이유는?”
“밤이 너무 늦었으니까. 대마법사님들을 이런 일로 감히 깨울 수는 없어서. 아침까지 기다린 거야. 라고 말하면, 믿어주겠어?”
“아니.”
“하핫. 역시 성자님은 못 당하겠군. 맞아. 실은 다른 목적이 있었어.”
“말해.”
“줄리안을 구슬렸어.”
줄리안. 중2병의 이름이다. 나는 애널라이즈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뱉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 이름을 이 녀석이 알고 있다는 건, 역시 본인에게 직접 들었다는 뜻이겠지.
“구슬려?”
“그래. 비스가 숨겨 놓은 비장의 한 수. 줄리안은 자신을 그렇게 자칭했어. 하지만 줄리안은 진심으로 자기가 남자에 용사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으니,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
구슬린 방법을 물어볼 셈이었는데, 미리엘의 입에서는 전혀 엉뚱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엉뚱한 대답이 훨씬 내 구미를 당기는 대답이어서, 나는 미끼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앞뒤가 맞잖아?
아까 중2병이랑 얘기할 때도 묘하게 신경 쓰였거든. 마치 자기가 용사라도 되는 것 같은 말투로 말하는 게.
애널라이즈에 표시된 녀석의 직업에는 용사의 용자도 안 보였는데도 말이야.
“무슨 말이야? 자세히 말해 봐.”
“줄리안은 용사를 직업이 아니라 선택받은 핏줄이 대대로 이어받는 호칭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 그래서 나도 그걸 이용해 줬지. 실은 나도 용사라고. 할머니의 이름 꺼내며 아버지께 배운 검기를 보여주니 바로 믿더군. 하핫. 순진한 여자야.”
…아니. 네가 영악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뭐, 중2병이 순진하다는 건 일정 부분 동의하지만.
“그래서? 어떤 식으로 구슬렸는데?”
“나도 줄리안과 마찬가지로 성자에게 잡혀 온 거라고 했지. 그 이후로 성자에게 복종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도 했고,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도 했어.”
“복종하는 척하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하핫. 물론 거짓말이야. 내가 성자님께 그럴 리가 없잖아?”
그거야 모르는 일이지. 넌 의심스러워도 너무 의심스럽거든.
뭐, 지금은 자세히 파고들지 않고 넘어가 주겠지만. 우선은 얘가 뭐라고 하는지 얘기를 듣는 게 먼저지.
“주제넘을지 모르겠지만, 성자님으로서는 줄리안에게 정보를 얻는 게 힘들어 보였거든.”
“그래서 네가 대신 정보를 캐내기 위해 일부러 그런 연기까지 했다는 거냐?”
“그래. 덤으로 성자 밑에는 나 같은 사람이 얼마나 더 많이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저항하려 하지 말라고도 충고해 줬지.”
아니. 야. 너 지금 칭찬해달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말이지, 걔 나한테 정정당당하게 싸우자고 엄청 졸랐거든. 네가 해준 충고는 전혀 안 통했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녀석의 말에는 모순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앞뒤가 맞는 것 같지만, 잘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잖아?
“그렇게 날 위해서 일해 준 거면, 어째서 바로 우리 애들한테 말해주지 않았지?”
그래. 이게 문제란 말이지. 그렇게 밤사이에 고생해서 정보를 알아냈으면, 바로 우리 애들한테 말해 줬으면 됐잖아?
그러면 우리 애들이 걔한테 정보를 캐내 보려고 고생할 일도 없었고, 내가 이 녀석을 의심해서 이렇게 찾아올 일도…잠깐만.
“성자님은 왜 그랬다고 생각해?”
“…내가 찾아오기를 바란 거냐.”
“하핫. 역시 성자님은 여심을 잘 아는군.”
여전히 시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미리엘은 은근슬쩍 내 허벅지 안쪽에 자기 뺨을 가져다 댔다.
그러니까 네 미소는 너무 수상해서 말이 앞뒤가 다 맞아도 의심이 생긴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