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int’s Dungeon Business RAW - Chapter (1071)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01화
정문에서부터 쭉 이어진 어색한 공간을 헤치고 나아가 미리엘의 집무실에 도착한 나는, 오늘도 노크 한번 없이 활짝 문을 열었다.
매너 없다고 하지 마라. 난 지금 미리엘한테 화내러 온 거니까. 정문에서 그런 모습을 보였던 건, 아무것도 모르는 말단 클랜원들한테까지 화낼 수 없어서 그런 것뿐이다.
“어서와. 하루만이네.”
하지만 그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리엘은 오늘도 흐트러짐 하나 없는 담담한 미소와 함께 날 맞이해 줬다. 알몸으로.
“…왜 알몸?”
“갈아입는 중이었어.”
그렇게 말하면서, 손에 든 옷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는 미리엘.
확실히. 이렇게 보면 갈아입는 중이었다는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지만.
“…너 내가 올 줄 알고 있었잖아?”
문제는 이거였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초대장까지 보내놓고 모르는 척이라니.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설마 이렇게나 급하게 찾아올 줄은 몰랐어. 난 스스로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경계 받고 있는 것 같군.”
담담한 말투로 입가에 미소도 지우지 않은 채 그렇게 말하는 미리엘이었지만, 그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이렇게나 효과가 좋을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아껴둘 걸 그랬어. 원래는 성자님이 날 더 이상 찾지 않게 됐을 때를 대비한 비밀 병기였는데, 나답지 않게 조바심을 냈어. 하핫. 성자님과 엮이면 항상 이렇게 되는군.”
조바심이라. 그 이유는 역시, 앨리시아가 내 여자가 됐기 때문인 걸까?
“하지만 그 덕분에 성자님이 날 만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오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니, 나쁘지는 않군. 고작 이런 것으로 기뻐하다니. 성자님이 이 몸에 직접 가르쳐주신 대로, 나 또한 여자였던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엘은 한 손을 은근슬쩍 자신의 가슴으로 가져가서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 젠장. 이럴 때가 아닌데. 나도 모르게 눈이 그쪽으로 가버렸잖아.
“쓸데없이 이상한 말투 쓰지 마라.”
“하핫. 그렇군. 잡설이 길었군.”
고개를 훌훌 털면서 유혹을 뿌리치자, 미리엘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또다시 시원스럽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치 “역시 성자님이야.” 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고 나서 손에 들고 있던 옷을 책상 위에 던져놓더니, 미리엘은 알몸인 채로 뚜벅뚜벅 내게 걸어왔다. 그런 다음 두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고 내 앞에 꿇어앉더니, 오늘도 역시나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하는 것처럼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가져갔다.
“그만. 됐어.”
물론 내가 멈춰 세웠기 때문에, 그 시도는 오늘도 실패로 끝났지만.
“성자님. 이틀이나 기다려를 당하는 건, 아무리 인내심에 자신 있는 편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나라도 조금 괴로워.”
겉보기에는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진짜로 내심 안달이 나기는 한 건지, 미리엘은 드물게도 가벼운 투정을 부렸다.
“그래서, 내 말을 못 듣겠다고?”
“그렇게 말하면 할 말이 없군. 성자님의 말에 따르지.”
내가 단호하게 맞받아치자 금방 고분고분해졌지만.
젠장. 그렇게 말하면서도 얼굴을 치울 생각은 없는 모양이군.
딱 내가 멈춰 세운 시점에서 움직임을 멈췄지만, 이미 그 얼굴은 내 다리 사이에 바짝 들이밀어져 있었다.
나도 남자다 보니 물건은 이미 진작에 부풀어 올라 있어서, 바지를 뚫을 듯 부풀어 오른 물건의 끝이 미리엘의 코끝에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는 정도의 거리였다.
바지만 없었다면 그 조용한 숨결이 내 물건을 간질이고 있었겠지.
이대로 바지를 벗고 그대로 저 건방진 입에다가 물건을 처넣으면 얼마나 기분…아니야. 아니야아니야. 구원아. 정신 차리자. 지금 유혹에 질 때가 아니야. 아무리 성자라는 직업 때문에 성욕이 넘쳐 흘러도, 자제할 땐 자제해야지!
“그래서, 6계층 주인의 마석을 일부러 레이첼 누님에게 정산했다는 건, 나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미리엘을 내려다 보면서, 나는 진지한 목소리로 용건을 꺼냈다.
“그렇군. 어쩌면 재조교가 필요한 걸지도 모르겠어.”
자기가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지 마라. 너 실은 그냥 네가 당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대답해. 너 언제부터 이렇게 장난기 많은 성격이었냐?”
“응? 성자님에게 맞춰줄 셈이었지만…어렵군. 알았어. 진지하게 대답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미리엘은 자세를 고쳤다.
그래 봤자 얼굴이 내 다리 사이에 바짝 붙어 있는 건 변함이 없고, 표정 역시도 딱히 변화는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대답해 줄 생각은 든 모양이다.
“그래서, 오늘 그 마석을 정산한 이유는? 반항?”
“하핫. 전혀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지.”
“반대라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반항의 반대라면, 복종? 마석을 보여준 게 어떻게 복종의 의미가 되는 거지?
“그래. 거기 걸린 주머니를 건네주겠어?”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인상만 찌푸리고 있자니, 미리엘이 내가 등지고 있는 벽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을 뻗어서 벽에 걸린 주머니를 건네주자, 미리엘은 손을 넣고 잠시 뒤적이더니 한 가지 물건을 꺼냈다. 그 물건이란 바로….
“…딜도?”
“안심해 줘. 그런 목적으로 쓰려고 가지고 있는 물건이 아니니까. 어차피 이런 물건으로는, 아니. 그 어떤 물건으로도 성자님의….”
너무 예상외의 물건이 튀어나온 바람에 말문이 막혀 있자니, 미리엘이 평소보다 조금 빠른 말투도 변명하듯 그런 말을 늘어놓았다.
얘가 지금 대체 뭐라는 거야.
“아니. 안 물어봤거든.”
“…성자님은 매정하군.”
은근히 상처받은 것 같은 표정 짓지 마라. 괜히 내가 잘못한 것 같잖아.
“그래서 그건?”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의 성기를 합성한 물건이야.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발견된 모든 몬스터의 성기를 합성한 거지. 하지만 이걸로 충분하다는 건 확인했어.”
“…뭐가?”
왠지 모르게, 대답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7계층으로 가는 통로를 여는 열쇠 역할을 말하는 거야.”
젠장. 역시나 그런 건가.
나 이전에 여신님이 보냈다는 이세계인은 남자만 있었던 게 아니다. 개중에는 여자도 있었고, 당연한 얘기지만 여자도 그 통로를 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걸 보여주는 게 어떻게 반항이 아니라는 거지?”
내가 보기에는 재조교 받고 싶어서 발버둥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말이야.
“성자님. 난 이런 걸 가지고 있고, 7계층으로 가는 통로를 직접 열어보기까지 했어.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크읏.”
계속해서 빙빙 돌려 말하는 미리엘의 태도에 짜증 난 나는, 그 머리에 손을 얹고 거칠게 내 다리 사이로 잡아당겼다.
그 거친 행동에 미리엘은 짧은 침음성을 흘렸지만, 몸이 잘게 떨리는 걸 보니 내심 기분 좋기도 한 모양이었다.
젠장. 너무 변태로 조교해 버린 바람에 이런 짓을 해도 효과가 약하잖아.
“돌려 말하지 말고 확실히 말해.”
“이런 걸 가지고 있는데도, 난 성자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단 한 번도 7계층에 가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 성자님이라면 알 수 있잖아?”
내 물건에 얼굴이 짓눌린 상태로도, 미리엘의 태도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뺨이 조금 붉어지기는 했지만, 저 정도는 애교라고 봐야겠지.
“…내가 알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알지?”
“간단한 추리야. 성자님이 모습을 계속 보이지 않을 때도, 다른 파티원들은 꾸준히 모습을 보였으니까. 그 사람들은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거지?”
“내 여자들의 동향까지 감시한 건가?”
“아니야. 물론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 되지만, 감시까지는 하지 않았어. 그럴 필요도 없었지. 우리 클랜은 사람이 많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모험가 활동만 하고 있어도, 소문은 자연스럽게 들어온다는 건가?”
“그래.”
거기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겨우 미리엘의 머리에서 손을 놔줬다.
반대로 이 녀석은 내 물건에서 얼굴을 뗄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야. 좀 떨어져.”
“응? 그래도 괜찮겠어? 성자님의 이곳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걸? 이렇게 두근두근 건장하게 맥박치고 있어. 난 대체 성자님의 위쪽 입과 아래쪽 입 중 어디를 믿으면….”
“위쪽 입을 믿어! 아니! 애초에 남자는 아래쪽 입 같은 거 없어! 너 그런 말투는 대체 어디에서 배운 거야!?”
“응? 성자님한테.”
“…….”
그러고 보니, 조교할 때 그런 말도 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런가. 여성의 이곳이 입과 닮았다고 해서 그런 말을 했던 건가. 이제 이해했어. 하핫. 성자님은 센스가 있군.”
으아아! 그런 거 일일이 설명조로 말하면서 감탄하지 마!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거야!?
아니. 그보다 이 녀석!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 못 하고 있었던 거야!? 진짜 조교 제대로 된 거 맞아!?
“아, 아무튼 그래서! 이제 와서 새삼 내게 신뢰를 확인시켜준 이유가 뭔데!?”
“아무래도 내가 성자님의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도움이라니 무슨 도움? 네가 여기서 뭘…아니. 잠깐만. 너 설마.”
“그래. 성자님. 7계층으로의 입장을 허락해 줘. 줄리안에게 들었어. 아래쪽의 세계는 지금 3개의 세력이 전쟁 중이라는 걸. 성자님은 그중 바프라라는 세력을 먼저 점령 중인 거지?”
젠장. 그중2병 녀석.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미리엘한테 쓸데없는 정보를 흘려 버리다니.
내가 하고 있는 건 점령이라는 표현 보다 감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것이지만, 아무튼 미리엘의 추측은 정확했다.
그것만으로도 이미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미리엘의 말은 아직 끝난 것도 아니었다.
“바프라를 제외하면 남은 세력은 두 개가 되지. 줄리안이 속해 있다는 비스. 그리고 플리투스. 플리투스라. 용사 가문의 성이군. 용사 가문의 성이면서, 동시에 우리 할머니의 성이기도 하지.”
“…….”
“거기에 듣자 하니 그 세력은 세계를 통일하고 사라진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의 의지를 잇는 세력이라고 하더군. 성자님은 아실지 모르겠지만, 사실은 우리 할머니의 이름이 바로 리리안 플리투스야.”
나도 알아. 어쩌면 너보다도 더 잘 알지. 용사 리리안 플리투스는 네 할머니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라의 할머니이기도 하니까.
아무튼 이런 얘기까지 꺼냈다는 건, 아마 그런 의미겠지.
“야. 내가 아까 말했지. 돌려 말하지 말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히 하라고.”
미리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짐작하면서도, 나는 일단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을 확실히 들어보기로 했다.
“내가 플리투스로 가서 성자님의 일을 도울게.”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 건가.
“너 말이야….”
“성자님. 성자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쟁을 멈추는 거잖아? 하지만 지금 7계층은 세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매일같이 전쟁이 일어나고 있어. 한 가지 세력만을 제압해서는, 전쟁을 멈출 수 없지. 적어도 두 개의 세력은 제압해야, 잠깐이라도 전쟁을 멈출 수 있어. 나라면 그 도움이 될 수 있어.”
정곡이었다. 아니. 사실 내가 그냥 바프라를 제압하는 거였다면, 별로 상관없는 얘기였다.
언제 전쟁신이 부활할지 모르는 만큼 시간 압박은 있었지만, 바프라는 레이나 은사모에게 맡기고 곧장 다른 세력을 교화시키러 가면 된다.
문제는 그쪽 사람들한테 우리가 플리투스에서 왔다는 거짓말을 해놨다는 거다.
바프라를 물리치고 세력을 휘어잡으면, 사람들은 플리투스와의 전쟁을 중단하려 할 거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플리투스는 공세를 멈추려 하지 않을 거고, 그때부터 일이 꼬이게 된다는 얘기다.
미리엘이 그런 것까지 알고 말하지는 않았겠지만, 바프라를 완전히 장악하기 전에 플리투스에도 손을 써놓는 작업은 확실히 필요했다.
“마치 네가 가면 플리투스를 당장 장악할 수 있는 것 같은 말투로군.”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겉으로 티 낼 수도 없는 일이라서,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일단 미리엘의 의중부터 더 파악해 보기로 했다.
“할 수 있어. 이것만 있으면.”
미리엘은 겨우 내 다리 사이에서 얼굴을 떼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상 뒤쪽 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벽에 걸린 장식용 세검에 손을 뻗더니, 우아한 동작으로 검을 뽑아 내게 칼끝을 내밀었다.
그 날카롭게 빛나는 칼날을 눈으로 확인한 순간, 나는 이 검이 그냥 장식용 검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내가 줄리안에게 어떻게 신뢰를 얻었는지, 기억하고 있지?”
확실히 아버지께 물려받은 검기를 선보였다고 했지.
용사 사우론 아우덴의 검기. 그 검기는 당연히 리리안 플리투스에게 배운 것일 테고, 그렇다는 얘기는….
검날을 쭉 따라가 손잡이 부분에 시선을 가져가 보니, 거기에는 어딘가 익숙한 문양이 양각되어 있었다.
쓰레온의 검에 새겨져 있는 것과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문양. 저게 진짜 플리투스의 문양이라는 얘기인가.
“확실히. 리리안 플리투스의 정신적 후계자를 자처하는 놈들에게 있어서 그 검이 지닌 가치는 엄청나겠지.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위험할 수도 있어. 그리고….”
플리투스가 아닌 바프라에서조차 용사의 문양은 통했잖아. 뭐가 문제야?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얘기다.
바프라 놈들은 리리안 플리투스라는 이름이 가진 힘보다는, 용사의 힘 그 자체에 압도당한 느낌이니까.
우리는 쓰레온이 가진 진짜 용사의 힘을 보여줌으로써 증명할 수 있었지만, 미리엘은?
리리안 플리투스의 이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플리투스 놈들의 앞에, 진짜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손이 그 유물을 들고 갑자기 나타나는 거다. 그것도 용사의 힘조차 없는 후손이.
모든 게 이상적으로 잘 흘러가리라는 보장은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저 세검만 놈들의 손에 빼앗기고, 미리엘은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물론 리스크는 있겠지. 하지만 성자님.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짊어질 리스크야. 만약 일이 실패로 끝나더라도, 어딘가에 숨어 살고 있던 리리안 플리투스의 후손이 등장한 사건에 불과하지. 여신님과는, 그리고 성자님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로 끝날 테니, 성자님이 하는 일에 지장이 생길 일은 없을 거야. 위험부담은 나 혼자만 짊어질게.”
“너는 그만큼이나 이 일이 위험하다는 걸 알고도, 위험을 무릅쓰고 한 번 해보겠다고?”
“그래.”
“이유는?”
“그건…처음에도 말했잖아? 새삼 내 입으로 말하자니 쑥스럽군.”
미리엘은 전혀 쑥스러워 보이지 않는 시원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대답했다.
역시나 그렇게 나오는 건가.
미리엘이 처음에도 했다는 말은, 아마 오늘 마석을 정산한 이유를 말하는 거겠지.
즉, 미리엘은 이렇게 말하는 거다. 마석을 그런 식으로 정산한 이유도,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플리투스를 장악하겠다고 나서는 이유도, 본질적으로 같다고.
한마디로 내 관심을 받고 싶다는 얘기다.
하지만, 그 말을 전부 믿어도 되는 걸까?
아니. 미리엘이 말이 거짓말이라는 건 아니다. 아까 마석 얘기를 할 때 “원래는 성자님이 날 더 이상 찾지 않게 됐을 때를 대비한 비밀 병기였는데, 나답지 않게 조바심을 냈어.” 라는 말까지 했었으니, 내게 관심받고 싶다는 게 거짓말일 확률은 적다고 봐야겠지.
문제는 이유가 그것뿐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다.
“그러니까 날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플리투스를 장악해 볼 테니, 널 보내달라고? 용사의 힘을 탐냈던 너를? 용사를 만들 수 있는 신이 봉인된 곳에? 그것도 딱 마지막 용사를 신봉하는 세력으로?”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얘가 예전에 내 배를 찌르려고 한 걸 가지고 앙심을 품고 있다든가, 워낙 분위기가 수상한 녀석이라서 믿을 수가 없다든가, 그런 수준의 얘기가 아니잖아.
나한테 위험부담이 없기는. 네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네 말을 믿느니 차라리 넌 지금까지 자기 목적을 단 한 번도 포기한 적이 없고, 그 목적 하나를 위해서 지금까지 차근차근 빌드업을 쌓아간 거라는 말을 믿겠다.
나한테 조교 당한 것도, 반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앨리시아한테 질투하는 모습을 보인 것도 전부 내 신뢰를 얻기 위한…하지만, 사도 임명이 가능했단 말이지.
비록 정상적인 방법으로 가능한 게 아니라고 추측하고 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내 추측이 정확하다면, 어느 쪽이든 얘가 날 위험에 빠뜨릴 짓을 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아니. 잠깐만. 혹시 그때는 사도 임명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사도 임명이 불가능한 수준까지 다시 되돌아갔을 가능성도….
“성자님. 나는 딱히 용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야.”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한계였는데, 거기에 더해 옆에서는 미리엘이 엉뚱한 소리까지 해댔다.
“야. 이제 와서 그 얘기를 또 하자는 거냐? 너 그것 때문에 내 배를…아니다. 됐다.”
젠장. 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 사건에서 엄연히 피해자는 나고, 쟤는 가해자인데. 왜 내가 내 마음대로 얘기도 못 꺼내고, 오히려 더 미안해해야 하는 거야.
“미안해.”
이것조차도 내가 위협으로 느낄지 모른다고 생각한 건지, 미리엘은 내 쪽으로 내밀었던 검을 황급히 다시 검집 안에 집어넣었다.
“됐다고 했잖아. 너 사람 계속 그렇게 불편하게 할래? 차라리 그냥 아까처럼 수상하게 웃기라도 해라.”
뭘 그렇게 미안해하는 거야. 네가 그걸로 다시 내 배를 찌르려고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봤거든?
“응…하핫…. 내가 그렇게 수상해…으윽.”
으아아아! 진짜! 그게 뭐가 수상하게 웃는 거야?! 미안한 표정으로 입꼬리만 올리니까 괜히 더 불쌍해 보이잖아! 너 진짜 그만 안 할래!?
“성자님. 아파.”
내가 그 뺨을 꼬집고 양쪽으로 마구잡이로 잡아당기자, 그제야 미리엘의 눈빛이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아픈 게 기분 좋잖아! 이 변태가!”
“그렇지만 방치 플레이를 당하는 중이라 괴로워.”
“방치 플레이 같은 거 한 적 없어!”
겉으로는 이렇게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말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안심했다.
아까 같은 분위기는 진짜 견디기 싫거든. 특히 이 녀석은 사라랑 이복 자매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혀 있어서 그런지, 아까 같은 표정을 지을 때마다 괜히 사라가 겹쳐 보여서 더 불편하단 말이야.
“아무튼 그래서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가자면…무슨 얘기하고 있었지?”
“나는 딱히 용사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는 얘기.”
“그래. 그거. 너 그거 네가 말하고도….”
“성자님. 우선 내 얘기를 들어줘.”
“…말해 봐.”
아무래도 진심으로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우선 얘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십중팔구 헛소리겠지만, 일단 들은 다음에 반박해도 늦지는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강해지는 거였어. 물론 용사가 될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딱히 용사에 집착한 건 아니야. 용사보다 강해져서, 아버지의 검기를 완전히 깨우치고, 그 힘을 다른 사람들에게 증명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어.”
“…그게 그거잖아?”
용사보다 강해진다니. 용사가 되고 싶다는 말이랑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거야?
네가 같이 안 다녀봐서 잘 모르는 모양인데, 용사라는 직업은 사기 직업이에요. 전투에 관해서 그보다 더 강해지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니까?
네가 보기엔 쓰레온이 강함을 추구해서 끊임없이 노력하는 성격 같아? 아니잖아? 오히려 그 쓰레기는 그런 노력 쥐뿔도 안 해요. 그런데도 말도 안 되게 강하다니까?
“전혀 그렇지 않아. 성자님도 알고 있잖아? 용사보다 더 강한 사람을.”
“…설마.”
“그래. 이 세상 그 어디에도, 대마법사님이 용사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야. 그건 디아나가 사기인 거고.”
“나도 그렇게 되면 된다고 생각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예외 중의 예외를 들먹이면 어쩌자는 거야?
이건 단순히 레벨 문제가 아니다. 물론 디아나가 그만큼 압도적으로 강한 건 레벨 500을 찍었기 때문이지만, 그만큼 레벨을 올리려면 그 이전에 우선 250레벨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우리 파티가 내 힘 덕분에 다들 쉽게 쉽게 전직해서 한계 돌파가 우스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디아나를 제외한 마법사 협회의 협회장 누님들 전원이 아직 그 한계를 돌파하지 못하고 250레벨에 머물러 있으니까.
그만큼이나 이 세계에서 250레벨 돌파라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맨날 전쟁만 한다는 밑의 세계에서도 250레벨을 넘는 건 루이스 바프라 한 놈밖에 못 봤고, 아니. 그렇게 멀리 갈 필요 없이, 최강의 모험가라는 너 자신도 250레벨 돌파를 못 했잖아?
“7계층으로 가면 그 단서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그럼….”
“성자님. 전에도 말했잖아. 다 옛날 일이야. 성자님에게 굴복한 이후로, 나는 내 꿈을 포기했어.”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얘기하는 거잖아.
돌고 돌아서 다시 이 얘기에 도착하다니. 서로의 얘기가 완전히 평행선을 그리고 있군. 이래서는 끝이 없겠어.
“아무래도 이 얘기는 여기서 끝내야 할 것….”
“그리고 사실.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어.”
“…뭐?”
그 순간, 오싹하는 한기가 내 온몸을 덮쳤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더 강해지는 걸 꿈꿀 필요가 없다고? 설마.
황급히 애널라이즈를 사용해서 미리엘의 정보를 살펴봤다. 하지만 눈앞에 보이는 정보는….
“너 진짜 사람 깜짝깜짝 놀라게 할래!?”
여전히 250레벨이잖아! 어디서 사람을 가지고 놀려고 하고 있어!
“성자님. 난 성자님한테 거짓말 같은 거 안 해. 성자님이 믿을 수 없다면, 그렇군. 지금부터 섹스하자.”
“…뭐?”
지, 지금 내가 잘못 들었나?
“섹스 말이야. 좋아하지?”
“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에는 거짓말이…이게 아니야아아!”
젠장. 이놈의 주둥이. 반사적으로 나불나불 대기는.
“하핫.”
“웃지 마!”
“미안해. 하지만 농담이 아니야. 정말로 섹스를 하면, 전부 알 수 있어.”
얼굴에 띤 시원스러운 미소를 지울 생각조차 하지 않고, 미리엘은 아까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너랑?”
“응.”
“내가?”
“다른 남자를 불러서 하라고 하면 아무리 나라도 상처받아.”
내 여자가 된 것 같은 말투 쓰지 마라.
“지금 여기서?”
“장소는 성자님이 원하는 곳에서 해도 상관없어. 어디든. 성자님의 말에 따를게.”
어디든에 힘줘서 말하지 마라.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난 디아나 같은 노출광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섹스하면 알 수 있다고?”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얘랑 섹스하고 있을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사실 여기에 오게 된 것만으로도 시간이 아까워 죽을 지경이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얘한테 시간을 허비하고 있어야 한다니.
하지만 이 녀석이 꺼낸 말들은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말들이었다.
젠장. 그 망할 중2병. 그 녀석이 괜한 소리만 안 했어도…아니. 잠깐만. 중2병? 그래. 중2병이라….
“성자님?”
좋아. 어차피 이 녀석한테 여전히 사도 임명이 발동되는지도 확인해 봐야 한다. 게다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거잖아? 시간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자.
“따라와.”
“알았어. 처음에는 노출 산책 플레이로군. 역시 성자님이야. 나한테는 난이도가 조금 높지만, 성자님이 원하신다면….”
“옷 입고!”
대체 언제까지 벗고 있을 셈이야!
“으핫?!”
미리엘이 옷 입기를 기다렸다가 문을 열자, 갑자기 앨리시아가 굴러들어왔다.
얘는 또 여기에서 뭐하는 거야. 아니. 반대 상황이면 나 같아도 이럴 것 같기는 하지만.
“아, 안녕. 야. 이건.”
“앨리시아. 미안. 지금 조금 바빠서.”
“뭐? 왜?”
“얘기는 나중에 미리엘이 해줄 거야. 그럼 난 이만 갈게.”
벌떡 일어난 앨리시아에게 가볍게 입을 맞춰주자, 멀리서 새된 비명 같은 게 들려왔다.
앨리시아 이 녀석, 내가 간 다음에 엄청 고생하겠군.
“미리엘. 가자. 따라와.”
“…그래. 그럼 앨리시아.”
눈앞에서 나와 앨리시아의 키스를 봤는데도, 미리엘은 표정 변화 없이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표정을 숨기는 건지, 아니면 진짜 별로 상관없는 건지. 뭐, 조금 있으면 확실해지겠지만.
“바넷사. 지금부터 난 지하에 있을 거야. 중요한 일을 할 테니까 그 누구도 못 들어오게 해. 그 누구도야.”
“…네.”
미리엘과 함께 저택에 돌아온 나는, 우선 제일 먼저 바넷사부터 찾았다.
그 누구도라는 표현에는 당연히 디아나도 포함되어 있는 만큼 반발이 있을 거라 예상했지만, 바넷사는 내 진지한 분위기를 읽었는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여줬다.
“넌 내가 신호할 때까지 여기에서 기다려.”
미리엘을 대동하고 지하실 입구까지 내려간 나는, 우선 미리엘을 그 앞에서 대기하게 했다.
“여. 중2병. 잘 있었지?”
안에서 지키고 있던 메이드도 밖으로 내보내고 혼자 남은 나는, 우선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볍게 인사부터 건넸다.
“…….”
지하실에서 손발이 꽁꽁 묶인 채 누워 있던 중2병은, 고개를 들어 날 확인하고는 다시 아무 말 없이 눈을 감아 버렸다.
나 같은 놈이랑 더 할 말 없다는 건가.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있을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생각인가 본데, 이젠 그렇게 안 돼. 미안하지만 내가 참을성이 없어서 말이야. 억지로라도 입을 열게 해주지.”
“더러운 걸레신의 더러운 종자다운 더러운 말투로군.”
야. 모처럼 무게 잡으면서 말했는데 벌써 입을 열면 내가 뭐가 되냐? 조금만 더 버텨보지.
뭐, 좋아. 그래 봤자 앞으로 할 일에는 변함이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