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int’s Dungeon Business RAW - Chapter (1078)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29화
“키야! 그래서 그래서?”
하지만 내 냉정한 감상과 다르게, 주변에 모여 있는 사내놈들은 탄성까지 내지르며 로리콤의 말에 몰두하고 있었다.
대체 방금 그 말의 어디에 “키야!”라고 반응할 만한 포인트가 있었지? 내가 이상한 거야? 나 혼자 눈치 없이 분위기 못 맞춰주는 거야? 아니지? 그냥 쟤들 대낮부터 취해서 저러는 거지?
짧은 순간에 온갖 상념이 교차하게 되는 모습이었지만, 이것조차도 아직 최악은 아니었다.
정말로 최악인 건, 지금부터 내가 저 무리에 자연스럽게 끼어들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괜히 이목을 끌면 지금까지 해온 노력이 전부 물거품이 되니까.
젠장. 저 로리콤 녀석. 아무리 내가 약자 태세를 쓰고 있다지만, 성자님이 왔는데도 눈치를 못 채다니. 차라리 저놈 대신 호랑이 머리였으면 날 알아보기라도 했을 텐데.
“놈들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주춤하더군. 하지만 그래 봤자 어린아이에게 손을 대려고 한 본성이 어딜 가지는 않았어. 자신들의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한 미소가 놈들의 입가에 떠오른 순간, 나는 직감했지. 또 내 창에 쓸데없는 피를 묻히게 될 거라고. 잠시만 뒤를 돌아주고 있어 주겠니? 금방 끝날 거야. 나는 떨고 있는 아이를 달래주고는, 이 아이를 이렇게까지 겁에 질리게 한 놈들을 향해…….”
“키야아아아아! 멋있다!”
“…….”
주문한 맥주잔을 손에 들고 자연스럽게 끼어들어 본 나였지만, 그 순간 술집에 묘한 정적이 흐르게 됐다.
어, 어라? 이 타이밍이 아니었어? 젠장! 어쩔 수 없잖아! 어느 타이밍에 감탄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단 말이야! 댁들은 대체 왜 저딴 얘기에 집중하고 있는 거야!?
너무 무안해서 필사적으로 자기변호를 하고 있자니, 옆에 있던 형씨가 갑자기 호탕하게 웃기 시작했다.
“그래! 멋있다!”
“크하하하! 형씨. 얘기에 너무 집중한 것 아니오?”
“그래! 감탄은 얘기가 끝나고 나서 합시다!”
그리고 그 아저씨를 시작으로 다들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색한 분위기는 사라져서 다행이기는 한데 말이야, 난 진짜 이 사람들을 모르겠어. 저 로리콤은 잘도 이런 사람들이랑 동화되어 있네.
그렇게 생각하며 힐끔 듀크를 보자, 저쪽도 드디어 내 존재를 깨달았다는 듯 눈짓으로 인사해왔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멋있다는 데 형씨가 그걸 왜 막아!? 그런 얘기라면 얼마든지 해도 돼! 내 얘기 따위 얼마든지 끊어!”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역시 남자 모험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는데!? 사람 궁금하게 하지 말고 계속해 봐!”
“맥주 한잔 더 시키고 합시다 좀. 그래서 말이지…….”
아니! 그렇다고 그걸 또 계속하냐!? 나 너랑 중요한 얘기 하러 온 거야! 눈치 못 챈 거 아니지!? 결국 듀크의 영웅담. 아니. 헌팅썰이 마무리된 건 그로부터 한 시간이 더 지난 후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이 일에는 자연스러움이 중요하다 보니.”
듀크가 그렉과 함께 머무르고 있다는 여관방에 그림자 이동으로 몰래 들어온 나는, 곧장 고개를 숙이는 듀크의 사과를 받아줘야 하는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아니. 심술부리는 게 아니라, 이 녀석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냥 즐긴 것 같단 말이지.
“뭐, 됐어. 그보다 중요한……아니. 그전에.”
한 시간 동안이나 썰을 들으면서 새삼 느낀 거지만, 이 녀석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정의 변태다. 그걸 깨닫고 나니 이런 놈이랑 길게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없어졌다. 아니. 애초부터 그런 마음은 없었지만.
아무튼 그래서 빨리 본론만 얘기하고 넘어가려고 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 그런 얘기 함부로 하고 다녀도 되냐?”
“네? 뭐가 말입니까?”
뭐긴 뭐야. 네가 지금까지 한 얘기가 하나 말고 더 있냐?
“내가 모를 줄 알았냐? 아까 그 얘기, 위에서 여자 꼬시던 썰이잖아.”
성별도 모호하게 말하고 나이도 실제보다 더 어리게 말하는 등 살짝 각색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정의 변태의 본모습을 아는 나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네? 아닙니다. 정말로 남자아이였습니다.”
“……뭐?”
“성자님.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시면 안 됩니다. 구해지는 것은 언제나 여자라고 누가 정했단 말입니다. 저는 남녀의 차별 없이,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얼굴 들이밀지 마. 새끼야! 뭘 자랑이라고 떠들어! 결국 자기 파티에 데리고 다닌 건 마찬가지면서!”
“억울합니다. 전 그저 흐뭇하게 지켜만 봤을 뿐입니다.”
억울하긴 뭐가 억울해! 내가 이 녀석을 너무 얕봤어!
“그리고 이곳에서의 행동을 더 조심하자는 말씀을 하고 싶으시다면, 저도 할 말이 있습니다.”
진지한 표정에 진지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는 듀크였지만, 이미 듀크에 대한 신뢰가 바닥에 떨어진 나로서는 이마저도 같잖은 말을 위한 사전준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뭔데?”
“구원 님의 그 레벨 속이기 스킬 덕분에 확실히 평소보다 주목도는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구원 님의 얼굴이 극적으로 변하는 건 아닙니다. 곰곰이 보면 동일인물이라는 걸 알 수 있는 수준입니다. 조금 더 확실하게 이목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무리 떠들어봐야 팔찌 안 찬다.”
“하지만……!”
역시 이럴 줄 알았어.
놈의 의도를 깨닫고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해주자, 이 정의 변태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손바닥으로 자기 허벅지까지 탁탁 때렸다.
“아무튼 잡담은 이제 그만 됐어!”
중요한 얘기를 전달하러 왔는데 이 자식 페이스에 말려들어서 계속 얘기가 딴 길로 새잖아!
젠장. 이럴 거면 진짜 그 호랑이 머리가 차라리 나았는…….
“아아~그 빛나는 검은 하늘을 가르고~.”
넌 대체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나타나는 거야!? 아니. 그보다!
“야이 고양이 새끼야! 너 정상적인 노래도 부를 줄 알았잖아!?”
“우오오! 성자님! 오셨습니까!”
뒤늦게 여관으로 돌아온 그렉에게, 나는 참다 참다 못해 폭발하고 말았다.
그동안 그 지옥 같은 노래를 버프라면서 참고 들었던 내 노력은 대체 뭐였던 거야!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겨우 다 같이 모여 제대로 된 얘기를 할 수 있게 된 우리는, 각자 그동안 있었던 정보를 주고받았다.
그렉과 듀크는 효율적인 소문 전파를 위해 각자 다른 구역을 돌아다니며 이렇게 점심에만 잠깐 만나 정보를 공유했다고 한다.
뭐, 소문 전파라고 해도 아직 성 쪽에서 소식이 들려오지 않은 만큼 살짝 떠보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었고, 사람들과의 친목 도모에 더 힘쓰고 있었던 모양이지만.
즉, 내가 예상했던 그대로 행동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둘의 활동을 대충 전해 들은 다음, 나는 둘에게 간략하게 이쪽에서 있었던 일과 정보를 전달했다. 그리고 동시에, 성에서 이런 소문이 퍼지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다니라는 지령을 내렸다.
요리스의 계산이 정확하다면 며칠 이내로 사람들이 여신의 마나에 영향받기 시작할 거다. 그전에 소문을 퍼트려라. 바프라는 이미 여신의 손에 넘어갔고, 성의 지하에서는 매일같이 난교파티가 벌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 있었던 몬스터 대군의 침공도, 성의 지하에서 느껴지는 요사로운 기운에 지하 수로의 몬스터들이 자극받아서 벌어진 일이다.
바프라가 쭉 모습을 보이지 않던 것도 섹스에 빠져서 그랬던 거고, 최근 모습을 드러낸 것도 본인의 실수로 일어난 몬스터 대군의 침공을 무마하기 위해서다.
안 그래도 최근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바프라의 신경을 박박 긁고 있을 텐데, 거짓과 진실이 교묘하게 섞인 이 소문이 퍼져 봐라. 분명 바프라는 필요 이상의 격한 반응을 보일 거다.
귀족 측에 심어둔 케이로스와 요리스가 다른 귀족들을 구슬리기에 충분할 만큼 격한 반응을.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위험한 임무라는 건 말 안 해도 알겠지? 아마 소문이 어디에서 흘러나왔는지 찾아내려고 혈안이 될 거야. 우리도 최대한 빠르게 행동할 거지만, 너희도 최대한 추적당하지 않게 조심하면서 행동해.”
“오오! 구원 님이 저희를 이렇게까지 걱정해주시다니! 이 그렉, 그 위대한 마음 씀씀이를 노래로 만들어 후세의 사람들에게 전달하겠…….”
“성에서 대충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기는 하다니까, 지금부터 바로 움직여. 그럼 난 간다.”
이미 헛소리라면 저기에 있는 정의 변태한테 충분히 들었으니까, 너까지 가세하려고 하지 마라. 이 덩치 크고 줄무늬 있는 고양아. 고양이는 귀엽기라도 하지.
그렉이 또 이상한 노래를 부르기 전에, 나는 황급히 자리를 뜨기로 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돌아가서 우리 애들 얼굴이나 보고 싶었지만, 이왕 여기까지 내려왔으니 케이로스 아저씨한테도 대략적인 상황은 설명해 줘야겠지.
“우오오오! 난 살아 있다! 살아 있다고! 이것이 바로 콘돔! 이것이 바로 섹스! 합쳐서 콘! 돔! 섹! 스!”
아니. 아저씨. 대낮부터 대체 뭐 하는……진짜 우리 애들 얼굴이 너무 그립다.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 걸까? 왜 다 벗은 아저씨가 대낮부터 힘쓰는 모습을 봐야 하는 거냐고!?
이미 변태 듀오와 대화하면서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내 정신은, 아저씨의 섹스신으로 완전히 가루가 되고 말았다.
“크흐윽! 얘들아아아!”
케이로스에게도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해주고 나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우리 애들이 있는 방을 향해 달려갔다.
차라리 계속 7계층에 있었으면 내성이라도 있었을 텐데. 하필이면 하렘 플레이를 한 직후에 이런 지옥을 보여주다니.
하늘은 왜 이 구원을 낳고 듀크, 그렉, 케이로스, 요리스 기타 등등 다른 고추 달린 새끼들 전원을 또 낳았는가!
그런 말도 안 되는 한탄이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내게도 한 줄기 빛은 있었다.
우리 애들의 품에 안겨서 안정을 취하면, 이 바스러진 멘탈도 조금은 회복될 거야.
“야! 구원! 너 진짜……!”
하지만 우리 애들이 머물고 있는 방의 문을 활짝 여니, 날 맞이해 준 건 사라의 앙칼진 목소리였다.
셋 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고, 특히 실비아와 레이는 서로 반대편 구석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는 걸 보니, 대충 그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는지 짐작이 갔다.
하렘 플레이까지 경험했으니까 그 정도 얘기는 그냥 넘어가 줄 줄 알았는데, 역시 그렇게 쉽게 넘어가 주면 사라가 아니라는 건가.
하지만 사라야. 화낼 날을 잘못 골랐어.
평소라면 또 장난치다가 당하거나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하거나 하겠지만, 지금의 난 그럴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사라야아아!”
“이 변……꺄응!? 무, 뭐 하는 거야 갑자기!?”
내가 갑자기 가슴에 달라붙자 밀쳐내지도 못하고, 사라는 엉겁결에 내 머리를 감싸 안아주고 말았다.
“나, 나 너무 힘들었어!”
“왜 그래? 그냥 얘기만 하고 온 거 아니었어? 말 돌리려고 엄살 부리는 거면…….”
“엄살 아니야!”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감정 공유를 발동하고 레이까지 끌어안자, 구석을 보고 있다가 갑자기 내게 안기게 된 레이도 화들짝 놀라서 내 얼굴을 쳐다봤다.
“으윽……이 느낌은……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하렘 플레이 이후로 나랑 말도 잘 안 하던 애가 이런 반응이라니. 그 변태들 때문에 내 마음이 얼마나 황폐해졌는지 새삼 깨닫게 됐다.
“지옥을……보고 왔어. 그러니까 잠깐만 이대로 있어줘…….”
내 목소리에서 진정성을 느꼈는지, 사라도 레이도 그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양쪽에서 가만히 날 끌어안아 줬다.
“저, 저도 돕겠습니다아!”
그리고 마무리로 실비아까지 내 등에 찰싹 붙어서 바들바들 기분 좋은 진동을 전해 준 덕분에, 내 정신은 급격하게 제컨디션을 되찾아갔다.
“이러고 있으니까 괜히 그때 생각나네.”
그렇게 중얼거리자, 날 껴안고 있던 레이의 몸이 움찔하고 떨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하반신 쪽이 움찔하고 떨리며 반응을 보였다.
“그, 그때라니?”
은근슬쩍 허벅지까지 비벼놓고 모르는척하기는. 애초에 지금 너랑 나는 감정이 연결된 상태라고. 숨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알면서 왜 그래?”
“모, 몰라!”
“에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시치미 떼는 레이의 왼쪽 가슴 위에 은근슬쩍 한 손을 올려놨다.
말해두지만, 딱히 감촉을 즐기려고 이러는 게 아니다. 그냥 심장 박동을 확인하려는 것뿐이다.
물론 감촉이 끝내주기는 했지만.
“그때 생각나서 또 흥분돼?”
그때. 마틸다와 레이아가 힘이 다한 후, 디아나와 사라, 바넷사와 레이첼 누님까지 상대한 후.
눈앞에 성녀 샌드위치와 용사 대마법사 샌드위치가 나란히 늘어져 있는 걸 내려다보면서도, 내 고양된 감정은 좀처럼 가라앉으려 하지 않았다.
바넷사는 뿔과 꼬리까지 드러낸 채로 내 다리 뒤에 기대어 축 늘어져 있었고, 내 물건을 빨고 있는 레이첼 누님 역시 정신이 온전치는 않아 보였다.
아무리 하렘 플레이에 감정이 고양됐어도, 이쯤 했으면 진정될 만도 한데. 계속 이렇게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건, 한가지 이유밖에 없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서 이 감정의 원인을 바라봤다. 저쪽 바닥에 누워서 쾌락에 바들바들 떨며 분수를 뿜고 있는 레이를.
대체 어느 시점부터 감정 공유를 발동한 걸까?
나한테도 분명 레이의 감정이 전달됐을 텐데,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정도로 하렘 플레이에 푹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눈치챘으면 나도 멈췄…아니. 솔직히 말해서 멈췄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뭔가 조치를 취했을 거다. 그 정도로 레이의 상태는 위험했다.
내가 하렘 플레이를 하면서 느낀 감정을 고스란히 맛보려고 하다니. 자살 행위에도 정도가 있지.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직 죽은 것 같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브릿지 자세를 하는 것처럼 하반신만 위로 들고 간헐적으로 애액을 내뿜는 레이의 음부를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그쪽으로 다가갔다.
“야. 레이. 괜찮아?”
당연한 얘기지만, 레이는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다.
지독한 쾌감의 연속으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완전히 쾌락에 넘어갔는지, 감정이 공유되는 나까지 이성을 잃고 그 몸을 탐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는 간신히 이성을 유지하고, 그 음부에 내 물건을 밀어 넣었다.
말은 그럴싸하게 해놓고 결국 삽입하는 거냐고 태클 걸지 마라. 만약을 대비해서 힐링 섹스를 발동한 것뿐이니까. 아니. 진짜로.
“크윽….”
물론 아무리 그런 의도로 삽입했어도 레이의 안이 기분 좋은 건 변함이 없어서, 살짝 이성을 잃을뻔하기는 했지만.
“야. 레이. 정신 차려. 야.”
“흐으읏…! 하앗, 넌…구, 구원…?”
그 뺨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깨우자, 정신을 잃고 있던 레이가 겨우 눈을 떴다.
하지만 말 그대로 눈만 떴을 뿐 정신이 온전히 돌아온 건 아닌지, 레이는 상황 파악 안 된다는 표정으로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난…흐으응! 하읏!”
일단 몸을 일으킬 생각이었는지 상체를 들어 올린 레이였지만, 지나친 쾌감으로 기절까지 했던 애가 그렇게 쉽게 몸을 가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나랑 이어져 있기까지 했으니까 더더욱.
레이는 자신의 하복부 아래로 느껴지는 거대한 존재감을 겨우 눈치챈 듯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시선을 아래쪽으로 돌렸다.
“하, 하는 거야…?”
…너야말로 유혹하는 거야? 왜 그렇게 기대감에 찬 눈으로 바라보냐?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말이야. 감정 공유가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까.
하지만 진짜로 얘가 이런 상황에서조차 저런 눈을 할 정도로 쾌감에 무너져내린 모습을 보니, 기분이 조금 묘했다.
“아직.”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레이는 대놓고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렇지만 그 안타까움은 단순히 쾌감을 얻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안타까움이 아니었다. 성적인 고양감과 더불어서 나한테까지 살짝 전달된 이 감정은….
“이상한 생각하지 마라.”
“무, 무슨 생각? 난 별로….”
“시치미 떼지 마. 지금 너랑 나랑 감정 공유되고 있는 건 알지? 네가 발동했으니까.”
“…하지만.”
내 말에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는지, 레이는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래. 레이는 지금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다. ‘역시 난 저 사람들하고 다르구나.’라고.
차별 대우하는 게 아니라, 자기 몸 걱정해 줘서 이러는 건지도 모르고.
“내가 진짜 너랑 안 하고 싶을 것 같아? 너도 내 감정이 느껴지니까 알잖아? 진짜로 아까랑 지금이랑, 그렇게 다른 것 같아?”
“그, 그런 거….”
“모른다고 하지 마. 그게 궁금해서 감정 공유를 켠 거잖아?”
아직 감정 공유를 자유자재로 켰다 껐다 할 수 없는 레이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랄 때만 그 스위치를 작동시킬 수 있다.
즉, 조금 전에 내가 하렘 플레이를 즐기는 동안, 레이는 간절하게 내 마음을 알고 싶다고 바란 거다.
그 상황에서 그렇게 간절하게 알고 싶었던 내 마음이라고 하면, 결국 하나밖에 없잖아?
분명 자기랑 할 때랑 비교해 보고 싶었던 거겠지. 며칠 동안 위에서 같이 지내면서, 내가 우리 애들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절실히 느꼈을 테니까.
“그래서 어땠어? 그렇게 달랐어?”
솔직히 말해서, 나도 다른 애들을 대할 때랑 레이를 대할 때의 감정이 완전히 똑같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러기에는 우리 애들이랑 쌓아온 시간이 너무 많으니까.
하지만 레이를 내 여자로 받아들이기로 한 이후로, 난 많이 노력했다. 단순히 레이가 날 좋아하게 되는 것에만 노력을 기울인 게 아니다. 나 역시도 레이를 진심으로 좋아하기 위해 많이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러서는, 레이가 부족한 상식 때문에 푼수 짓을 해도 예뻐 보일 정도로 좋아하게 됐다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물어본 거다.
분명 레이도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걸 느꼈을….
“응…달랐어.”
어, 어라? 잠깐만. 내가 기대한 대답은 이런 게 아닌데?
“다, 달랐다고?”
“응…. 아까 넌….”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는 조금 분한 것 같은, 그러면서도 동시에 몸이 달아오른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표정을 보고 나서야, 나는 레이가 뭘 말하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아니! 흥분이야 당연히 아까가 훨씬 더 컸겠지! 나도 하렘 플레이 같은 건 처음 해본 거라고! 평소보다 훨씬 흥분하는 게 당연하잖아! 내가 말하는 건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알잖아! 애초에 네가 알아보고 싶은 것도 그거였으니까! 사랑하는 감정! 그게 그렇게나 크게 다르게 느껴졌냐고 묻는 거야!”
“그, 그건….”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봐. 내가 널 좋아한다는 게 거짓말 같아?”
나는 레이와 눈을 똑바로 마주 보고, 아니. 거기에 더해서 그 손을 내 가슴 위에 얹어주고, 그렇게 외쳤다.
“모, 모르겠어….”
하지만 그런 내 짙은 감정 호소에도, 레이는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아니. 인정하려 들지 않는 건 줄 알았다.
“뭐? 야! 이걸 왜 몰라?”
“하지만! 이 감정이 네 건지 내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내가 답답해서 외친 말에, 답답한 건 자기도 마찬가지라는 듯 레이 역시도 똑같이 소리 질렀다.
…아니. 확실히 감정 공유되는 중에는 이 감정이 내 감정인지 네 감정인지 알기 힘들지만 말이야. 그래도 그렇게 말한다는 건….
“야. 너 지금….”
“아으으읏! 마, 말하지 마!”
레이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 깨달았다는 듯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지만, 말하지 말란다고 말 안 할 내가 아니었다.
“엄청 뜨겁게 사랑 고백한 거 아냐?”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왜 말한 거야!?”
“나 혼자 부끄럽기 싫어서.”
뭐, 감정 공유 중에 이런 말을 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변명….
“최, 최악이야!”
이었는데. 이게 또 통하네.
내가 단호한 말투에 넘어간 건지,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쩜 사람이 이럴 수 있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훗. 그런 표정 지으면 내가 죄책감을 느낄 거라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약해. 그동안 우리 애들한테 단련된 나한테는 너무 약하다고. 조금 더 연습하고 와라.
“그리고 넌 그런 최악의 남자를 이렇게나 좋아하는 거고.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다시 들으니까 이거 참….”
“말하지…으응흣!? 왜, 왜 그쪽까지 반응해…!?”
“그럼 좋아하는 사람이 열렬하게 고백하는데 반응 안 하고 버티겠냐. 마침 잘됐네. 넌 아직 내 마음을 확신하지 못하는 모양이니까.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줄게. 사도 임명까지 하면 너도 내 말을 믿겠지. 사도 임명이 뭔지는 너도 전에 같이 들어서 알지?”
“사, 사랑의 징표 같은 거….”
“그래. 잘 아네. 그리고 그 사도 임명을 하려면 일단 여기에 싸는 게 필요해서 말이야.”
레이의 아랫배를 손끝으로 콕콕 두드리면서 말하자, 레이가 안 그래도 빨간 얼굴을 더욱 붉히며 중얼거렸다.
“뿌, 뿌리는 걸로 스킬이 발동하는 거야? 성자는 다 그래?”
보통 이렇게 하복부를 두드리면, 뿌린다는 생각보다는 다른 생각이 먼저 들지 않니?
여전히 어딘지 나사가 하나 빠져 있다니까. 뭐, 그런 점도 귀엽기는 하지만.
“아니. 그럴 리가.”
“그, 그렇지?”
“밖에 뿌리는 게 아니라 안에 싼다는 뜻이야.”
“…응? 아, 아앗! 나, 나도 알아!”
알긴 뭘 알아 이것아. 지금도 내가 말한 순간 바로 깨닫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주제에.
“아무튼 그런 거니까, 너도 슬슬 섹스해도 기절하지 않을 정도로는 진정됐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봐도 레이의 몸은 그다지 진정된 것 같지 않기는 했다.
유두는 여전히 빳빳하게 서서 숨 쉴 때마다 내 가슴에 슬쩍슬쩍 비벼지고 있었고, 음부는 아직도 내 물건을 꾸욱꾸욱 사정없이 조이면서 간헐적으로 애액을 울컥울컥 뱉어내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바꿔말하면, 대화하는 내내 나는 그런 레이의 몸이 주는 자극을 계속 견디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레이의 몸이 완전히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기에는, 내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와 감정을 공유하는 레이 역시도 마찬가지일 거다.
“응흐읏!? 하읏!?”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자, 지금 내가 느끼는 쾌감을 레이가 대신 대변해주는 것처럼 그 입에서 달콤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역시 생으로 하니까 더 기분 좋네.”
다른 애들하고는 이게 기본이지만, 레이랑은 쭉 콘돔을 낀 채 해왔으니까 말이야.
이렇게 생으로 레이의 안쪽 감각을 맛보니 새삼 신선하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을 하고 말았다.
“마, 말하지…으응…괜히 의식하게…아응….”
“의식하라고 한 말이야. 콘돔 끼고 할 때랑은 느낌이 전혀 다르지?”
그냥 쾌감에 절어 있던 레이도 내 말을 듣고 새삼 의식하게 됐는지, 내 물건의 감촉을 재확인하는 것처럼 음부 안쪽을 움찔움찔 조였다.
“…그, 그런 표정 짓지 마.”
자기도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는지, 그리고 자기가 한 행동이 어떻게 보일지 잘 알고 있는지, 레이는 곧장 내 표정을 살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어떤 표정?”
하지만 난 딱히 이상한 표정 안 지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오히려 이상한 표정이라면 지금 네가 더….
“시, 시끄러워!”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 표정으로 생각을 읽은 건지, 아니면 감정 공유로 생각을 읽은 건지, 레이는 아무 말 없는 날 보며 괜히 더 부끄러워했다.
“닥치고 허리나 움직여?”
“그, 그런 말은 안 했잖아!?”
“그럼 움직이지 마?”
“싫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건…!”
또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은 건지 레이는 황급히 수습하려 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멈추는 건 싫어?”
“으응…흐읏…!”
무슨 말을 해도 내게 말려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레이는 이제 입을 꾹 다물고 조용히 내 허리 움직임에 맞춰서 허리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도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내가 불리하면 입 다물어 버리는 여자 상대하는 법도 모를 것 같아? 내 여자 중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도 있거든.
그리고 그 전문가로 말하자면, 지금 바로 저쪽에서 뿔과 꼬리를 내놓은 채 축 늘어져 정신을 잃고 있었다.
전문가조차 저렇게 됐는데, 따라 하는 수준에 불과한 레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알았어. 여기에 집중하고 싶다는 거지? 하여간 너도…으읍!”
허리에 조금 더 힘을 줘서 레이의 안쪽을 쿵쿵 두드리는 느낌으로 움직이며 그렇게 말하자, 레이가 갑자기 손을 뻗어서 내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춰왔다.
설마 얘가 이런 것까지 할 줄이야. 혹시 아까 우리가 하는 거 보면서 배운 건가? 너도 보면서 하고 싶었어?
그런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딱히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나도 레이를 괴롭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냥 솔직하게 쾌감을 인정하게 하고 싶었던 것뿐이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의미로 혀를 놀리기로 했다.
무작정 입술만 문지르는 레이의 입안으로 혀를 뻗어서 레이의 혀를 찾아낸 다음 휘감고 빨아주자, 레이의 하반신이 움찔움찔 떨리며 가볍게 절정을 느끼는 게 느껴졌다.
혀를 빨아준 것만으로 이렇게 되다니. 아니. 단순히 키스 때문이 아니라, 감정 공유로 증폭된 행복감 때문인가.
“그렇게 기분 좋아?”
“기, 기분 조아아….”
살며시 입을 떼고 미소와 함께 속삭여보자, 그사이에 완전히 정신 방벽이 무너진 건지 레이가 녹아내린 목소리로 솔직하게 그런 말을 내뱉었다.
“평소보다?”
“응…평소보다…응…쪽. 조아아….”
“혹시 생으로 해서?”
“생…응흐읏…조아아….”
이렇게 말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줄 알고 한 말이었는데, 설마 솔직하게 인정할 줄이야.
그 솔직한 모습에 나까지 기분이 더 고양돼서, 나는 조금 더 짓궂게 레이를 추궁했다.
“하지만 이대로 계속하면 여기에 싸게 될 텐데?”
레이의 하복부를 슬쩍 문지르며 말하자, 레이는 아무 말도 안 하게 됐다.
역시 아무리 쾌감에 정신이 나갔어도, 이 말을 말로 받아주는 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말만 하지 않았을 뿐, 레이는 행동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현해 줬다. 내 허리를 자신의 두 다리로 꽉 감싸 안고 놔주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그 행동을 감지한 순간, 나도 더 이상 참기 힘들어졌다.
“알았어. 그럼 원하는 대로….”
다시 레이와 입을 맞추면서, 나는 물건 끝을 레이의 안쪽에 꽉 맞추고는 허리를 잘게 떨어서 사정을 서둘렀다.
“응흐으으으읏!?”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레이의 안쪽을 꽉 채울 정도로 잔뜩 사정한 순간, 레이의 몸도 퍼득퍼득 떨리며 강렬한 절정을 맛보게 됐다.
서로의 절정을 감정 공유로 공유하는 그 감각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감각이었다.
키스하며 얽힌 서로의 혀가 그대로 녹아서 붙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입술을 떼고, 우리는 서로의 입 사이를 연결하는 타액의 실을 끊을 생각도 못 한 채로 가만히 마주 봤다.
“사랑해. 최고였어.”
“응…나도…더 하고 싶어….”
이제는 솔직하게 조르기까지 하는 레이였지만, 그전에 잠깐 할 일이 있었다.
“싫어…빨리….”
“괜찮아. 이것도 엄청 기분 좋을 테니까.”
이번에는 실패할 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저 당연하게 스킬을 사용하자, 내 눈앞에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사도 인장을 설정하는 창이 떠올랐다.
레이를 이곳에 데려오고 우리 애들이 받아들여 준 순간 사도 임명 조건은 만족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놀랍지 않았지만, 곧장 레이에게 사도 인장을 새기지는 못했다.
아니. 인장을 어디에 새겨야 좋을지 고민돼서 말이야.
아직 내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르겠지만, 얘가 딱히 눈에 띄는 성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섹스 시의 특이점이라면 감정 공유로 흥분이 배가 된다는 점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보통 감정이 있다고 여겨지는 가슴. 심장 쪽에 새기는 게 제일이겠지만, 거기는 이미 마틸다가 차지하고 있었다.
모처럼 다들 다른 곳에 새기고 있고, 저마다 자신의 인장에 애착이 있는 것 같은데, 겹치는 곳에 새기는 건 마틸다한테도 레이한테도 실례잖아?
그래서 고민하느라 잠시 가만히 있었는데, 레이에게는 그 잠깐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내가 하렘 플레이를 즐기는 동안 그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으며 몸이 달아올랐고, 겨우 이렇게 이어지게 된 거다.
고작 한 번으로 만족할 수 없다는 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아직…할 수 있지? 힘내?”
얘가 이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거야!?
손을 아래로 뻗어서 내 고환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며 귀여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레이의 모습에, 나는 다시 이성을 잃을 것 같았다.
사도 임명이라는 중요한 일이 있으니 억지로 참고 있었을 뿐, 나 역시도 감정 공유에 영향받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하읏…역시 좋아하는구나….”
역시? 역시라니? 그게 무슨…아, 설마 얘, 아까 그거 보고 배운 건가!?
“그래. 사실 감정 공유에 좋은 기억은 없었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는 이번에는 내 가슴에 얼굴을 가져가더니, 혀로 유두를 할짝할짝 핥아줬다.
그래. 지금 레이가 하는 행동은 전부, 아까 우리 애들이 내게 해줬던, 그중에서도 내가 크게 반응을 보였던 행동들이었다.
감정 공유를 통해 내 기분을 더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레이는, 우리 애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어도 내가 어딜 어떻게 만져줘야 좋아하는지 빠르고 정확하게 학습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애가 저 6명이 이성을 잃고 제대로 보여준 기교를 전부 직접 보게 됐으니…지금의 레이는, 내가 알던 섹스에 어수룩한 그 레이가 아니었다. 적어도 기교만큼은.
“이런 사용법도, 흐읏, 있다면…나쁘지 않을지도.”
“굳이 이게 아니더라도 나쁘지 않잖아? 그야 조금 불편한 점도 있지만, 그래도 서로의 마음을 이렇게나 느낄 수 있으니까.”
애초에 처녀를 대가로 발동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사랑하는 사람과 이어지는 것을 전제로 하는 종족 패시브니까.
이 감정 공유라는 종족 패시브의 본래 목적은 사랑이라는 감정을 두 배로 느끼기 위함이라는 게 내 생각이었다.
“하응…할짝. 저기…안 할 거야?”
꽤나 좋은 말을 했다고 속으로 자찬하고 있었는데, 레이는 그 말을 듣고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일부러 반응을 안 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몰려오는 부끄러움을 성욕으로 어떻게든 무마시키려는 것처럼, 유두를 입술로 가볍게 깨물며 다그치는 걸 보니 말이다.
간접 경험치를 그렇게 듬뿍 먹었는데도, 이런 분위기를 부끄러워하는 성격은 쉽게 극복되지 않는 건가.
“그렇게 하고 싶어?”
“…하고 싶어.”
진심으로 이것보다 아까 그게 더 부끄러워? 원래라면 그런 식으로 더 놀리면서 즐겼겠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성욕에 지고 말았다.
결국 나는 사도 임명도 뒷전으로 미루고 일단 섹스부터 즐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섹스는 감정 공유를 통해 하면 할수록 더 흥분하는 연쇄작용까지 일어나게 됐다.
다른 때 같았으면 콘돔 때문에 답답한 느낌이 적절하게 브레이크 역할을 해줬겠지만, 이번에는 그런 제동 장치도 없어서, 우리는 그대로….
생각하니까 또 흥분되는군. 그리고 이 기분은, 레이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감정 공유가 아니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비벼지고 있는 레이의 두 허벅지가, 손안에서 느껴지는 그 고동 소리가 똑똑히 알려주고 있었다.
“하긴. 그때 너 그런 짓까지 했으니까, 흥분…아야!”
레이의 가슴 위에 올려둔 손에 살짝 힘을 주면서 그렇게 말한 순간, 옆구리에 무시무시한 격통이 느껴졌다.
아, 아차! 회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잠깐 잊고 있었어!
“야. 구원. 너 아까 그것도 연기였지!?”
“아, 아니야! 진짜 지옥을 겪고 왔어! 오빠를 그렇게 못 믿겠어!? 지금 감정 공유도 하는 중이니까 정 못 믿겠으면 얘한테 직접 물어….”
“아응!?”
이, 이런! 너무 당황해서 가슴 만지던 중이었다는 것도 깜빡했네! 걸 난 그냥 끌어당기려고 한 것뿐인데!
“사, 사라야? 이거 진짜 오빠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일단 거기에서 손부터 떼고 말해 이 변태야!”
그렇게 용사의 분노에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바람에, 나와 레이 사이에 흐르던 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뭐, 사라가 원래 목적을 잊어버린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할까.
무슨 말이냐고? 아니. 아까 방에 들어오자마자 사라가 얼굴 새빨개져서는 화내려고 했잖아. 그거 십중팔구 그동안 여기에서 있었던 나와 실비아와 레이의 3P 얘기를 듣고 흥분해서 화내려 했던 걸 테니까.
“그래서, 어때? 직접 느껴본 이 세계의 감상은.”
아무튼 처음과는 다른 이유로 한바탕 사라한테 혼나고 나서, 나는 분위기를 바꿔 사라에게 질문을 던졌다.
여기에 와보니 의외로 일이 진전되어 있어서 이곳저곳 바쁘게 돌아다니게 되기는 했지만, 원래는 사라에게 적응할 시간을 준다는 이유로 예정보다 빨리 왔던 거니까 말이야.
뭐, 요리스를 만난 이후로 계속 이 방에만 있었으니, 아직 감상을 내뱉기에는 이를지도 모르겠지만.
“음…얘기로는 들었지만….”
별 기대 안 하고 던진 질문이었지만, 의외로 사라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모양이었다.
“들었지만?”
“생각보다 더 약하네. 여기 사람들. 아까 본 그 남자, 이곳에서는 상당한 실력자라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신랄한 말을 하시는 용사님이었다.
아니. 요리스가 바프라에서 힘 좀 있는 사람인 것도 사실이고, 사라보다 훨씬 약하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사라 쟨 그걸 또 어떻게 알았대?
“혹시 아까 화낸 거, 시험해 보려고 그런 거였어?”
어쩐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 협력해주는 사람한테 너무 박하게 구는 것 같기는 했는데. 그런 의도도 숨기고 있었던 거였군.
“아니. 그 남자 눈빛 진짜 기분 나빴어.”
…그, 그러니. 아니. 사라는 과거가 과거니만큼 충분히 이해되는 반응이기는 하지만.
“구원은 다른 남자가 나한테 그런 시선을 보내는데 기분 안 나빴어?”
어, 어라? 사라야? 잠깐만. 갑자기 얘기가 왜 또 그렇게 흘러가니?
하지만 이 정도 탈압박도 해내지 못할 내가 아니지!
“당연히 살짝 안 좋기는 했지만, 그보다는 같잖았지. 그 아저씨가 아무리 그런 눈으로 봐봤자 사라 널 어떻게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아니까. 그리고 뭐, 그렇게 침 흘리면서 볼 정도로 예쁜 여자가 내 여자라는 생각에 기분 좋기도 했고.”
“치, 바보 아니야?”
봤냐? 요리스의 더러운 시선을 생각해내고 살짝 나빠졌던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면서,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변호까지 완벽하게 해내는 이 말솜씨.
“그럼 요리스의 실력은 어떻게 파악한 거야?”
“응? 그냥 보면 대충 알잖아? 구원도 그렇지 않아?”
아니. 난 애널라이즈가 있으니까 아는 건데. 넌 대체 정체가 뭐니? 아, 용사였구나. 저 사기 직업 같으니라고.
저 용사라는 사기 직업의 한계를 이해하려 하는 건 애초에 포기했기 때문에, 나는 순순히 납득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아마 무협지처럼 기 같은 거라도 읽어서 상대방이 고수인지 하수인지 파악한 거겠지.
“설마 한 세력의 간부라는 사람이 저 정도밖에 안 될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 여기 사람들 의외로 별로 강하지 않다고. 벌써부터 괜히 왔다는 생각 들지?”
“전혀 안 들거든 바보야. 그리고 내가 그 말을 어떻게 믿어? 맨날 괜찮은 척 무리하면서.”
“아니. 내가 또 언제 그렇게 무리를 했다고 그래?”
“4계층에서.”
야. 치사하게 그 얘기를 꺼내냐?
“아니. 그때는 특수 상황….”
“그때 아니더라도 내가 보기엔 맨날 무리하거든? 실비아, 그동안 마음고생 심했죠?”
야. 옆에서 가만히 있는 실비아까지 끌어들이지 마라.
안 그래도 조금 전까지 실비아 테라피로 날 위로해주느라 진이 다 빠졌을 텐데, 왜 괜한 애를 건드려?
자, 실비아. 눈치 볼 거 없어. 사라한테 똑바로 말해 줘. 내가 무리는 무슨 무리를 했다는 건지.
“아, 아닙니다! 고생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시, 실비아야? 대답이 내가 예상했던 거랑 조금 다르네? 그렇게 말하면 마치 내가 무리했던 것처럼 들리지 않니?
그야 여기서도 혼자 돌아다닌 경우가 많기는 했지만, 그 와중에 네가 레이랑 둘이서…응. 생각해 보니까 많이 고생하기는 했구나.
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은신을 나 혼자만 쓸 수 있으니, 은밀성 확보를 위해 어쩔 수 없었잖아?
“역시. 오길 잘했어.”
“설마 이제부터는 계속 따라다니려고?”
“그럼 혼자 행동할 생각이었어!? 하아…실비아. 진짜 고생 많았겠네요.”
응. 실은 당장 오늘 밤만 하더라도, 바프라의 반응을 엿보러 갈 생각이었는데.
조금 전에 막 지령을 내려놓고 무슨 오늘 밤부터 반응을 보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 모험가의 친화력과 행동력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아까도 사람들이랑 거의 10년은 알고 지낸 사람처럼 떠들어대는 거 봤잖아?
분명 밤이 되기 전에 어느 정도 소문이 확산되어서, 바프라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거다. 안 그래도 지금 바프라는 소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양이니까.
아무튼 그런 이유로 성에 잠입해서 바프라의 반응을 엿볼 생각이었는데, 사라가 따라가겠다고 억지를 부리면 시작부터 일이 꼬이게 된다.
“사라야. 넌 은신술을 못 쓰잖아.”
“구원도 별로 잘하는 거 아니잖아.”
…그러고 보니, 사라는 아직 내가 그림자 은신 쓰는 걸 제대로 볼 기회가 없었지.
그러니까 이렇게 걱정하는 거였군. 내가 여기에선 성자 스킬도 함부로 못 쓴다는 걸 알고 있으니, 만약 들켰을 때 힘으로 돌파해 줄 사람이 한 명은 붙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부터 내가 은신을 쓸 테니까, 사라 네가 한 번 날 찾아내 봐. 찾아내면 같이 가는 거고, 못 찾아내면 나 혼자 가는 거야. 어때?”
어차피 가기 전에 한 번 사라로 시험해 볼 생각이었으니, 오히려 잘 됐다.
아무리 여기 사람들 평균 수준이 낮다고 해도, 바프라만큼은 예외다. 레벨도 상당히 높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배틀마스터라는 특수 직업의 잠재력이 엄청났다.
그걸 어떻게 아냐고? 레이한테 사도 임명을 했으니까 말이야. 살짝 스탯 창을 열어서 이것저것 확인해 봤거든.
250레벨도 되지 않은 레이만 봐도 잠재력이 엄청난 직업이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 250레벨은 한참 뛰어넘은 바프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봤자 용사에게 당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즉, 사라한테 은신이 들키지 않으면 바프라한테도 들키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내가 염탐 가기 전에 사라한테 은신을 시험해 보려고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흐으응? 그래. 좋아.”
아무튼 그런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사라는, 내가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게 조금 의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마 의심스러운 마음 이상으로 자신의 감각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진짜지? 말 바꾸기 없기다?”
사라의 마음이 변할세라, 나는 황급히 창문으로 다가가서 커튼을 쳤다.
“잠깐! 이 변태! 이상한 생각하는…어?”
지금 누가 누구한테 변태라는 거야? 이 변태 용사. 너야말로 커튼 좀 친 것 가지고 대낮부터 너무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냐?
마음 같아서는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위치를 들킬 테니 참자.
그래. 커튼을 닫음과 동시에, 나는 은신을 쓰면서 반대편 벽 쪽으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그리고 사라도 내 모습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훗. 아무리 찾아봐라. 내 그림자 은신을 간파할 수 있나. 이대로 움직여도 안 보일걸? 내가 여기에 와서 은신을 얼마나 자주 썼는데. 덕분에 스킬 레벨도 엄청 올라가서 안 그래도 좋았던 스킬이 더 사기가 됐다고.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진짜로 당황한 것 같은 사라의 모습에, 나는 그림자 속에 숨어서 춤까지 춰봤다.
하지만 그래도 사라는 내 모습을 발견하지 못하는 눈치였고, 결국.
“이걸로 내가 이긴…끄아아아악!?”
너무 신난 나머지 사라의 뒤로 몰래 다가가 가슴을 덥석 잡으며 귓가에 속삭여준 순간, 살이 떨어져 나갈 것 같은 격통이 손등에 엄습해왔다.
“이 변태! 너 여기에 와서 은신술만 연습했지!?”
모, 모함이 너무 심하잖아!
“지금까지 그런 말 한 적 없잖아.”
내가 지금까지 7계층에서 얼마나 잠입 활동을 많이 했는지, 은신 실력이 왜 이렇게 향상될 수밖에 없었는지 얘기해주자, 사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그렇게 툭 내뱉었다.
그렇군. 아까의 그 말도 그냥 모함이 아니라, 나한테 들었던 얘기를 바탕으로 나온 결론이었다는 얘기인가.
어쩔 수 없군. 엄한 사람을 변태로 몰고 간 벌로 오늘 하루 오빠라고만 부르게 할 생각이었지만, 그런 이유였다면 봐주도록 하지.
“그야 전부 말해주면 걱정할 테니까 적당히 생략하면서 말했지.”
“나중에 알게 되면 더 기분 나쁘거든 이 바보야.”
“미안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그 허리를 가볍게 끌어안아 주며 사과해도, 사라의 표정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야 그도 그럴만한 것이.
“사라야. 그래도 약속은 약속인 거 알지?”
이것 때문에 사라는 지금 사기당한 기분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것만큼은 나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만약 진짜로 사라가 같이 따라가면 일이 제대로 꼬일 테니까. 그럴 거면 차라리 안 가고 말지.
뭐, 이렇게 내가 양보해주지 않기만 하면, 사라도 사기 당했다면서 생떼를 부리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흥.”
이렇게 고개를 홱 돌리면서도 싫다는 말은 안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얘가 은근히 고지식한 면이 있어서 사기든 뭐든 자기 입으로 한 번 뱉은 말은 착실히 지키거든.
“남들 앞에서 키스 어필이 너무 심한 거 아니…아야!”
오리처럼 삐죽 내밀고 있는 사라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주자, 사라가 내 손가락을 콱하고 깨물어 버렸다.
젠장. 지금까지 단독 행동이 많았다는 걸 알고 나니까 괜히 더 기분이 안 좋아졌잖아. 그냥 변태라는 누명을 쓰더라도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을 걸 그랬나.
“너무 그런 표정 짓지 마. 자, 이거 봐. 사라 너도 진짜 모르겠잖아?”
이렇게 된 이상, 사라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내 은신이 얼마나 완벽한지 제대로 인식시켜주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사라의 눈앞에서 다시 한번 그림자 은신을 사용했다.
이렇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완벽한 은신술이잖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도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오늘도 아무 문제 없을 거야.
“알거든.”
“크헉…치, 치사하게.”
하지만 우리의 용사님은 내가 사라진 그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도 내 옆구리를 정확히 노리고 쿡 찔렀다.
“진짜 어디 다치고 오면 가만 안 둘 거야.”
“밤에? 잠깐! 타임! 타임!”
다시 은신하면서 옆으로 피했는데 얘는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내 급소를 노리고 들어오는 거야!? 안 보인다면서!? 설마 이제 내 회피 동작도 예상하고 예측샷 날리는 거야!?
“이 바보는 진짜…하아. 나도 은신술이나 배울까.”
그만둬. 이것 때문에 그나마 내가 요즘 활약하고 있는데, 내 아이덴티티를 뺏으려고 하지 마. 넌 진짜로 배우면 금방 나보다 더 숙달할 것 같아서 무섭단 말이야.
“미안해……. 원래라면 내가 따라가야 할 텐데. 저번에 그 일 때문에 아직 자신이 없어서.”
한숨 쉬는 사라의 옆에서, 레이가 살짝 풀죽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아, 레이 쟤 사라한테 반말하는구나. 아니. 생각해 보면 레이가 더 연상이고, 위에 있을 때 둘이 계속 붙어 있었으니까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레이가 사라보다 연상이라는 게 왜 이렇게 어색하게 느껴질까.
아무튼 그런 것보다, 레이 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저번에 그 일이라는 건 아마 지하 감옥에 갔을 때를 말하는 거겠지. 감정 공유로 나까지 말려들게 하면서 기절하는 바람에 민폐를 끼친 일 말이다.
마음의 상처라는 게 그렇게 쉽게 낫는 일도 아니고, 한 번 저지른 적이 있으니 더 조심스러워지겠지. 이해한다. 나는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아니. 딱히 그 문제 아니더라도 넌 안 데려갈 거거든?”
쟤는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원래라면 자기가 무조건 따라갈 것처럼 말하는 거야?
“뭐어!?”
“왜 그렇게 놀라? 뭐 문제 있어?”
“나도 은신할 줄 아는데!?”
아니. 그야 그렇겠지. 너랑 나랑 처음 만난 곳이 그런 곳이었으니까. 물론 방안에 은신해 있는 경비병들의 기척을 못 느끼고 당당히 행동하는 바람에 들키기는 했지만, 거기까지 잠입한 것만으로도 이미 최소한의 은신술은 할 줄 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그래 봤자 코스프레 수준이잖아.”
“또, 또 코스프레라고…! 코스프레 아니었거든!?”
이 암살자 코스프레녀가 또 했던 말을 또 하게 하네.
너 전에 그거 코스프레 맞아 이것아. 대체 어떤 암살자가 그렇게 노출 심한 옷을 입고 돌아다녀? 특히 너 같은 애가 그런 옷 입고 있으면 눈에 엄청 띄거든?
하지만 이렇게 말해 줘 봤자 저 녀석은 인정을 안 하겠지. 그렇다면.
“그럼 한번 여기에서 은신해 봐.”
“지, 지금?”
그럼 지금 아니면 언제 하려고?
그런 시선을 보내며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이가 두고 보라고 말하는 표정으로 입을 앙다물었다.
그리고는 벽에 있는 가구 그늘로 쪼르르 달려가더니…오오. 솔직히 말해서 웅크릴 때까지는 그냥 웃기기만 했는데, 저러니까 진짜 안 보이기는 하네.
뭐, 그래 봤자 나한테만 안 보이는 거겠지만.
“사라야.”
“레이. 다 보여요. 그만 나와요.”
내가 눈짓을 하자, 사라가 한숨 듬뿍 담긴 목소리로 그렇게 말해 줬다.
역시 용사님의 눈은 피할 수 없었던 건가.
“치사해! 그쪽은 용사니까…!”
하지만 이렇게 자기 은신술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도 레이는 쉽게 수긍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야 용사가 치사한 직업이라는 건 나도 백번 공감하지만, 포기하라고. 너 진짜 어설프다니까. 그냥 은신술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방심하다가 들켰던 그 마음가짐 자체가.
진짜 이런 애가 어떻게 바프라의 눈을 피해서 몇 년이나 숨어지냈는지 몰라. 이건 그냥 내 짐작인데, 분명 헬레나가 엄청 고생했을 거야.
아무튼 오기를 부리는 레이였지만, 그런 레이의 오기를 단번에 꺾어 버리는 이가 있었다.
“저한테도 보였습니다.”
우리 기사님 말이다.
누구한테나 귀여움 받을 정도로 성격 좋은 실비아지만, 레이한테만큼은 은근히 쌀쌀맞다니까. 뭐, 레이랑 있었던 일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쌀쌀맞은 정도로 끝나서 다행인 수준이기는 하지만.
“거, 거짓말!?”
“정말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구원 님에게도 보였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실비아는 무척이나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아, 아니. 실비아야. 실은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난 마나가 없는 세계에서 온 만큼, 너희처럼 마나 감지라든가 그런 게 말이지.
“그, 그래! 당연히 나한테도 보였지! 레이. 너 진짜 어설프다.”
“구원. 레이 지금 그쪽에 없어.”
어, 어라!? 방금 목소리는 저쪽에서 들린 것 같았는데!?
“이쪽이거든 바보.”
드, 득의양양한 표정 짓기는. 내 눈을 속인 것 정도는 전혀 자랑할 게 못 된다는 건 아냐?
…내 입으로 말하고도 조금 슬퍼지는 사실이지만.
“하아. 정말 미안해. 내 힘이 꼭 필요했을 텐데. 하필…미안해?”
아무튼 내 눈을 속인 것으로, 레이는 ‘내 은신술은 완벽하지만 바프라와 접촉하면 트라우마가 어떻게 발동할지 알 수 없으니 따라가지 못하게 됐다.’라고 혼자 멋대로 결론 내린 모양이었다.
반박하려면 못할 것도 없었지만, 이쯤 되니 슬슬 의미 없는 소모전처럼 느껴졌다.
그래. 여기에서 레벨도 제일 낮은 애가 그래도 자기 실력에 자신 있는 모습이 귀엽잖아. 내가 좀 져주면 어때.
“괜찮아. 언젠가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나아지겠지. 전에는 바프라 이름만 나와도 벌벌 떨었는데, 이제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앞으로도 같이 노력하자.”
그래서 태도를 바꿔 친절하게 말해 준 건데.
“가, 갑자기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이 지골로!”
아니.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조심해요 정말. 잠깐 방심하면 꼭 이러니까.”
사라 넌 또 왜 옆에서 부추겨!? 둘이 같이 다니면서 죽이 맞기라도 했어!?
레이 쟤는 실비아랑 같이 있어도 이상한 시너지를 내더니, 사라랑도 다른 의미로 이상한 시너지를 내네!
“저, 전 구원 님의 그런 점도 멋지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손을 번쩍 들고 날 두둔해주는 실비아라도 있어서 다행이지. 저 둘만 있었으면 어쩔뻔했어.
“크흑! 역시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
“히야으응!”
유일한 내 아군은 내가 끌어안는 순간 순식간에 전선에서 리타이어 해버렸지만.
“구원. 또 실비아 괴롭히지 마.”
“괴롭힌 거 아니야!”
뭐, 이런 식으로 살짝 피곤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사라까지 끼어드니까 대화에 활기가 도는 느낌은 들었다.
안 그래도 실비아도 레이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둘 사이의 관계도 조금 미묘하니까 말이야.
아무튼 결국 그렇게 밤에 염탐은 나 혼자 가기로 결론이 난 후, 우리는 사라에게 구경도 시켜줄 겸 밖으로 나와 주변을 걸었다.
그래 봤자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어서, 산 중턱에 있는 폭포수까지 내려가는 게 고작이었지만. 눈이 좋은 사라는 그곳에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대략적인 분위기는 느낄 수 있었던 모양이다.
국경 지대에서는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우는 전쟁신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평화로운 곳은 이렇게나 평화롭다고 말이다.
그리고 드디어 밤이 되어서, 나는 바프라의 반응을 보기 위해 나설 준비를 했다.
사실은 요리스를 시켜서 성에 다녀오게 하면 더 좋았겠지만, 요리스가 말하길 “저희 가문은 이 산에서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적의 기습을 방어하는 임무도 부여받고 있습니다. 때문에 다른 이들에 비해 성에서의 활동이 많지 않고, 특히나 이런 늦은 시간에는 더욱 찾아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제가 하필 오늘 같은 날에 움직이면 괜한 의심만 사게 될 것 같습니다.”라고 한다. 쓸모없는 아저씨 같으니라고.
그나마 디에른 가문에서 활발하게 돌아다니며 활동하는 게 신이었다는 모양이지만, 그것 때문에 유리랑 사랑하는 사이라는 게 덜미 잡혀서 도망자 신세가 됐으니까 말이야.
어쩜 저렇게 부자가 쌍으로 쓸모없을 수 있을까.
어찌 됐든 그런 이유로 직접 내가 나서게 되자, 사라가 또다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아까처럼 토라진 것 같은 표정은 아닌 게 다행이기는 하지만, 저런 표정으로 보니까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닌데 괜히 미안하네.
“사라야. 걱정 붙들어 매고 이 오빠 올 때까지 다소곳이 기다리고 있어. 돌아오면 바로 침대로 데려가서….”
“장난치면서 긴장 풀지 말고 똑바로 해 이 바보야. 전에 그건 잘 챙겼지?”
아니. 장난 아닌데. 장난처럼 들려? 나 진짜로 돌아오면 곧장 너랑 레이랑 실비아 전부 다 침대로 끌고 갈 거야.
이렇게 말하면 가기 전부터 등짝에 부상을 입을 것 같으니 가만히 있을 거지만.
“그래. 쓸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사라가 말하는 물건은 바로, 언젠가 디아나가 건네준 적 있는 마법 신호탄이었다.
사라가 지금 끼고 있는 선글라스 같은 물건과 세트가 되는 물건으로, 선글라스를 낀 사람 눈에만 신호탄의 불빛이 보인다고 한다.
게다가 건물 밖에서도 건물 안에 있는 신호탄의 불빛이 똑똑히 보인다고 하니, 그야말로 대마법사님 만만세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물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쓸 타이밍 놓치고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사라는 등에 메고 있던 활을 손에 쥐고 성이 잘 보이는 위치로 이동했다.
그래. 만약 내가 신호탄을 쓰면, 사라가 여기에서 보고 있다가 활로 지원 사격을 해준다는 게 사라의 계획이었다.
어제의 말도 안 되는 위력의 화살, 아니. 유성우를 생각해 봤을 때, 지원 사격이 그냥 지원 사격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니 사라까지 나서는 건 말 그대로 최후의 수단이다.
“침대에서?”
“너 진짜…!”
“너무 그렇게 긴장하지 말라는 얘기야. 적당한 긴장감은 필요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긴장하면 괜히 어깨에 힘만 들어가서 실수한다.”
“응…으읏…이 변태가 진짜. 빨리 다녀오기나 해.”
활을 들고 있던 사라의 겨드랑이를 살짝 간질이며 말하자, 사라가 요염한 소리를 흘리며 날 노려봤다.
“다녀올게.”
그런 사라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춰주고, 나는 그림자 이동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성으로 이동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성안은 대낮처럼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잠입할 틈이 없는 건 아니었다.
샹들리에가 주렁주렁 달려 있는 천장에는 그림자에 숨어들 구석이 무척이나 많았거든.
게다가 한 세력의 도성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천장이 무척 높기까지 해서, 오히려 다른 곳보다 잠입하기 쉬운 느낌마저 있었다.
자, 그럼 바프라는 어디에 있으려나.
바프라를 찾으면서 둘러본 성의 내부는 더없이 평화로웠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예상했던 거랑 그림이 조금 다르잖아?
바프라의 귀에까지 소문이 들어갔다면, 놈은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다. 심하면 일단 본보기로 몇 명 죽이고 시작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이 분위기로 봐서는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설마 소문이 아직 바프라의 귀까지 안 들어갔나?
아니. 그렉과 듀크 콤비가 그 정도로 일 처리가 느릴 것 같지는 않은데. 정이 안 가는 변태들이지만, 그래도 이런 임무에서만큼은 믿을만한 놈들이니까.
낮에도 봤잖아? 세상에 또 어떤 놈이 그런 바보 같은 썰을 풀면서 그렇게나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겠어? 진짜 다시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되네.
아무튼 바프라를 찾는 게 우선이다. 놈의 태도를 확인하면 이 분위기의 이유도 자연스레 파악될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자리를 옮기려고 한 그 순간, 밑에서 복도를 지키고 있던 경비병 둘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침번을 서다 보면 심심함을 견디지 못해 뭐라도 말하고 싶어진다. 그 기분은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경비병 둘이 떠드는 것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다. 중요한 건 그 대화 내용이었다.
“소대장님. 들었습니까?”
“뭘?”
“조금 전에 출근하면서 들은 얘기입니다만. 지난번 그 몬스터의 대공습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 시작이 글쎄….”
“쉿! 그만! 조용히 해!”
후임 경비병의 말을 들은 선임 경비병은, 안색을 바꾸고 낮게 외쳤다.
“왜, 왜 그러십니까?”
“오기 전에 전달 못 받았어!? 그 소문 얘기는 성 안에서 절대 하지 마! 특히 바프라 님 귀에는 절대 들어가면 안 돼!”
“하, 하지만 수상하지 않습니까? 지하….”
“너 진짜 죽고 싶어!? 바프라 님한테는 비밀 직속 부대가 있다는 소문 못 들었어!? 혹시 우리 얘기를 누가 듣고 있기라도 하면 너나 나나 죽은 목숨이야!”
“죄, 죄송합니다….”
…뭐지 이 분위기는? 선임 경비병의 저 태도는 마치, 바프라의 귀에 소문이 흘러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잖아? 그렇다는 건 혹시….
나는 경비병 둘밖에 없는 그 자리를 벗어나서, 성안을 오가는 다른 이들의 안색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러자 아까까지 평화롭게만 보였던 성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전혀 다른 그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모두의 얼굴에서, 어딘지 모를 공포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가. 본보기로 몇 명 죽이고 범인 색출을 시작할지 모른다는 생각은, 나 혼자만 떠올린 생각이 아니었나.
성에 있는 고위 관료 중 누군가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는, 바프라의 귀에 소문이 닿지 않도록 막고 있는 거다. 만약 진짜로 바프라가 눈이 돌아가면, 본보기가 누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수완이 좋은 모양이군. 성안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전부 장악해두지 않았다면 엄두도 못 낼 일을 실제로 해내다니.
하긴, 바프라가 모습을 보이지 않는 몇 년간 일 처리는 전부 신하들이 대신해서 했을 테니, 그런 인물이 한둘 정도 있어도 이상할 건 없지만.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면, 내 계획이 상당히 어긋나게 되는데.
바프라가 분노에 눈이 멀어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할 때, 놈의 비밀을 전부 폭로하여 몰락시킬 셈이었는데.
게다가 바프라를 몰락시켜도 지금 성을 장악해놓고 있는 누군가가 그 자리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버리면 의미가 없다.
만약 그 누군가가 은사모의 일원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그렇게 입맛에 딱 맞게 일이 풀릴 리가 없겠지.
아무튼 이래서는 바프라의 모습을 염탐해봤자 의미가 없다. 그리고 원래 계획을 밀어붙일 수도 없다.
일단 케이로스한테 가서 부족한 정보를 보완하고, 처음부터 계획을 다시 검토해봐야겠어. 성에 자주 드나든다는 케이로스라면 성안에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한 누군가의 정체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곧장 성을 빠져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는 발끝을 지하 감옥 쪽으로 틀었다.
아니. 시내에서 변태 듀오가 퍼트린 소문이야 바프라의 귀에 안 들어갔다고 쳐도, 지하에서의 일은 바프라가 확실히 알고 있는 거잖아? 그쪽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문득 궁금해져서 말이야. 뭐, 지하와 이어지는 벽을 대충 틀어막고 말았을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일단 확인해보자고.
지하 감옥에서는 여전히 바프라의 직속 부대에 의한 난교 파티가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여기에서 똑같은 짓을 하다가 죽은 놈들이 나왔는데도 이 모양이라니. 담이 좋은 녀석들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 그냥 생각이 없는 건가.
바프라도 내려와서 같이 섹스를 즐기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일단 놈들의 면면을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역시나 바프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허술하지는 않나. 전에 우리가 지하수로에서부터 찾아왔을 때도 바프라 본인의 모습은 안 보였고.
하지만 바프라가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여기에 온 수확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지난번에 와서 뚫어 놓은 지하 수로로 이어지는 벽이 여전히 뚫려 있었기 때문이다.
아예 몬스터를 제압조차 하지 못한 거라면 모를까, 이렇게 깔끔히 몰아냈으면 벽을 다시 막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닐 텐데.
“아. 씨발. 나도 존나 하고 싶다. 치사하게 니들끼리만 하지 말고 우리한테도 한 명 돌려!”
“옳소! 옳소! 말 잘한다!”
대신 뻥 뚫려있는 통로에는, 병사 다섯이 옹기종기 모여서는 난교 파티장을 향해 엄청 없어 보이는 말을 큰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개소리하지 말고 똑바로 지키기나 해. 병신들아. 그러다가 대장한테 깨지지 말고.”
“벌써 며칠째 안 돌아오고 새끼한테 깨지기는 무슨! 그 새끼들 다 뒈진 거 아니야!?”
상당히 입이 더러운 놈들이군. 아니. 남이 욕 좀 하는 걸 지적할 정도로 나도 고상한 놈은 아니지만, 우리 애들이랑 같이 지내면서 바른 말 고운 말만 하다 보니 괜히 그렇게 느껴지네.
아무튼 말투는 더럽고 하는 행동거지는 더 없어 보이는 놈들이었지만, 놈들이 나누는 대화에는 은근히 중요한 정보가 숨겨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자리를 잡고 한동안 내용을 들어본 결과, 이런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바프라는 이 벽이 뚫린 걸 단순히 몬스터의 소행으로 보고 있지 않다. 이 일은 사람이 꾸민 일이다.
그리고 그 범인의 정체는 바로, 왕위 찬탈을 노리는 자신의 신하 중 하나다. 몇 년 동안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지금의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못한 누군가가 슬슬 욕심이 생긴 거겠지.
분수를 모르는 욕심이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지위가 있는 사람이어야만 품을 수 있는 욕심이기도 했다.
게다가 범인은 지하 수로와 성이 이어져 있다는 비밀까지 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보면, 지하 수로의 입구 관리를 맡은 귀족 중 하나가 범인일 공산이 크다.
그러니 직속 부대의 대장을 시켜서 지하 수로에 남은 흔적을 역추적하게 해보자. 분명히 그 흔적은 어딘가의 입구로 이어질 거다.
이상이 놈들의 대화를 통해 알아낸 정보였다.
뭔가 상당히 핵심을 짚은 것 같으면서도, 크게 엇나간 것 같은.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대로 내버려 두면 엉뚱하게도 정답에 도달해버릴 것 같은 그런 얘기였다.
틀렸는데 맞았다고 할까.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게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인가.
바프라 녀석, 전혀 엉뚱한 데서 성안을 장악한 누군가의 존재를 눈치채버렸잖아.
이대로 내버려 두면, 알아서 바프라도 성 밖에 퍼진 소문을 듣게 되는 거 아니야?
아니. 어쩌면 벌써 들었을지도 몰라. 다 들었으면서, 직속 부대의 대장이 정보를 물고 올 때까지 기다리는 걸지도.
바프라가 있는 곳으로 찾아가면 당장 진실을 알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그것보다 더 급한 용무가 생기고 말았다.
지하 수로에 들어가서 우리가 남긴 흔적을 역추적하고 있는 놈들 말이다.
대부분의 흔적은 몬스터들에 의해 지워졌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그렇다고 내버려두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만약 케이로스가 관리하는 수로 입구까지 그 흔적을 쫓아간다면…아니. 거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뒷산의 폭포로 이어지는 배수구 근처에만 도달해도 위험하다.
거기에는 쓰레온이 무식하게 뚫어놓은, 그리고 거대 몬스터의 성기로 조잡하게 틀어막혀 있는, 산으로 이어진 구멍이 있으니까.
나는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지하 수로 안으로 그림자 이동을 사용했다.
우리 애들이 짐이 된다는 얘기는 결단코 아니지만, 나 혼자 지하 수로를 이동하는 건 다 같이 행동할 때보다 훨씬 더 빠르고 편했다. 뭐니뭐니 해도 전투를 아예 안 해도 되니까 말이야. 그저 그림자 이동으로 슝슝 옮겨 다니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지하 수로의 구조는 이미 만들어놓은 맵으로 훤히 꿰고 있어서, 바프라 직속 부대 놈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며칠 전, 성의 지하에서 수로로 이어지는 구멍을 발견하자마자 바로 출발했다고 하니 상당히 걱정했지만, 역시 흔적을 추적하며 이동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까? 놈들은 아직 내가 걱정하던 위치까지는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진짜 흔적이 남아 있긴 있는 건지 방향 자체는 확실히 잡고 있어서, 이대로 내버려뒀다면 분명 산으로 이어진 그 구멍의 존재를 들켰겠지만.
아무튼 그 전에 찾아냈으니 다행이지.
“끝났군. 그쪽은?”
“이상 무! 일대의 몬스터는 전부 정리된 것 같습니다!”
“음. 그러면 계속해서 이동….”
“하기 전에. 잠깐 나 좀 보자.”
“어떤 녀석…크허으억!?”
막 몬스터와의 전투를 끝내고 이동하려던 놈들의 눈앞에 나타난 나는, 우선 성역 선포부터 발동했다.
요즘 월영무사의 레벨도 많이 오르기는 했지만, 이 수를 상대로 정공법으로 싸워 이기기에는 아직 조금 무리가 있으니까.
이 녀석들, 지하 수로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주 떼로 몰려왔네.
여신의 힘이라고는 기껏해야 디에른 가문에서 만든 미약밖에 못 느껴본 놈들이다. 내가 진짜 여신의 힘을 보여주자, 놈들은 하나같이 다리 사이를 부여잡고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나마 아까부터 똥폼 잡고 있던 대장으로 보이는 놈 하나만 간신히 무릎을 땅에 대지 않고 서 있었지만, 그래 봤자 저놈도 내 성자의 손길이 담긴 펀치 한 방이면….
“크으윽…네, 네놈…이 힘은…?”
“어? 너….”
가볍게 뺨을 후려주기 위해 다가가자, 나는 놈의 얼굴이 묘하게 낯이 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예쁜 여자라면 모를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사내놈의 얼굴은 그 수가 무척이나 한정적이었다. 게다가 그 사내새끼가 7계층의 주민이라고 하면 더더욱.
잠깐 머리를 굴려서 놈의 얼굴을 기억과 대조해본 결과, 나는 놈의 정체를 손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네가 여기에 왜 있냐?”
놈은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없는,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녀석은 지금.
“무슨…크윽…헛소리를 하는 거지…!?”
이 진지남은 저번에 지하로 갔을 때 실비아한테 실컷 두들겨 맞은 다음, 우리가 디에른 가문까지 몸소 질질 끌고 가줬는데?
어떻게 이놈이 또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거지? 디에른 가문에서 풀어주지 않은 이상…잠깐만. 설마. 아니. 하지만.
“뭐, 됐어. 넌 일단 좀 맞자.”
정확한 사정은 아직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놈이 우리 레이를 괴롭혔던 그 진지남과 똑같은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성자의 손길을 두른 주먹으로 놈을 흠씬 두들겨 패준 다음, 놈들의 몸을 밧줄로 묶어서…아차. 그러고 보니 혹시 이것 때문에 흔적이 진하게 남은 거 아니야? 전에도 이런 식으로 질질 끌고 갔었잖아.
물론 바프라가 곧장 또 새로운 흔적 추적 부대를 투입할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또 흔적을 남겨줄 필요는 없었다.
쳇. 귀찮아. 그렇다고 해서 다 죽여버릴 수도 없고. 하는 수 없지.
“뭐, 뭐 하는 거냐!? 그만! 그만 두어푸푸!”
나는 밧줄을 이용해 놈들의 몸을 일렬로 줄줄이 묶은 후, 한꺼번에 수로 안으로 집어 던졌다.
이렇게 해서 끌고 가면, 흔적 같은 건 안 남지 않겠어?
“죽지 말고 잘 버텨라.”
그렇게 해서, 나는 놈들을 데리고 수로를 통해 디에른 가문으로 돌아갔다.
“구원 님 돌아오셨…그, 그자는…!?”
그리고 여지없이 날 마중 나와준 요리스는, 내가 끌고 온 진지남의 얼굴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까 내가 진지남의 얼굴을 알아챘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내가 이럴 줄 알았어.”
“또, 똑같이 생겼군요.”
디에른 가문의 감옥에 갇혀 있는 놈과 내가 지금 막 데려온 놈. 똑같이 생긴 두 명의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요리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놀라지 않아도 딱히 아저씨가 배신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했어. 그도 그럴 것이, 분명 성자 스킬로 제압하고 감옥에 처박아 뒀으니까. 만에 하나 디에른 가문이 배신하고 풀어줬다고 하더라도, 멀쩡하게 돌아다닐 수 있을 리가 없다.
역시 그냥 닮은…아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닮았고, 소속 부대마저 같다. 아마 쌍둥이 같은 거겠지.
“그나저나 상당히 심각하군.”
“여자…여자아아….”
감옥에 갇혀서 벌써 며칠째 내 성자의 기운에 중독당해 있는 놈들은, 하나같이 이성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중2병은 대체 이걸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버틴 거지? 아니. 물론 중2병도 마차를 습격했을 즈음에는 상당히 맛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네.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하는 수 없지. 모처럼 생포했는데 이대로 버리기엔 아까우니까. 꺼내….”
“구원. 여기서 뭐해?”
꺼내서 데려가야겠어.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뒤에서 들려온 예쁜 목소리가 내 말을 끊었다. 바로 사라 말이다.
얘는 또 여길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걸까. 분명 호수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여기로 왔는데.
아니. 감각이 좋은 사라니까 내가 돌아온 걸 알 수 있었다 쳐. 하지만 밖에 있는 경비병은 어떻게 뚫고…쫄아서 비켜줬겠구나.
“넌 진짜….”
“여자아아아아!”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나보다 더 격하게 사라를 반기는 무리에 의해 내 목소리는 또다시 끊기고 말았다.
“기분 나빠.”
하지만 사라가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감옥에서 발광하던 무리가 차례차례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뭐야 이거.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운 거야? 탄지신공? 점혈? 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용사라는 직업은 보면 볼수록 무협지에 있어야 어울리는 직업 아니야? 여긴 판타지 세계잖아. 왜 이런 세계관에 저런 사기 직업이 있는 거야.
하고 싶은 말이 아까보다 더 늘어나 버렸지만, 여기서는 나도 용사들의 대장이다. 용사의 힘을 보고 놀라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지.
뭐, 요리스도 눈이 빠져라 놀라는 중이라 일일이 날 신경 쓸 겨를도 없어 보이지만.
“뭐야 저거?”
“보다시피 인질이야. 이대로 놔두면 인질로서 가치가 없어질 것 같으니 데려가려고.”
“저쪽으로?”
“그래. 미약 중독 상태를 풀려면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흐으응. 그래.”
내가 그렇게 말하자, 사라는 별로 흥미 없다는 듯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조금 전 대화만으로는 상황 파악이 안 될 테니 더 깊게 캐묻고 싶겠지만, 다른 사람의 눈도 있으니까 말이야. 적당히 자제하고 맞춰주는 거겠지.
“그러니까 사라 넌 다른 애들이랑 같이 조금만 기다려줘. 최대한 빨리 다녀올 테니까.”
“…알겠어.”
사라는 조금 불만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는 끄덕여줬다.
내가 성에서 무사히 돌아온 걸 확인한 것만으로도 여기에 찾아온 목적은 달성했을 테니까.
고마워 사라야. 부족한 설명은 돌아와서 다 제대로 해줄게.
“그럼 아저씨. 감옥 좀 열어줘. 이제 내가 데려갈 테니까.”
“네? 아, 네.”
뭐, 설명이 부족한 건 이 아저씨도 마찬가지인지 상당히 곤혹스러운 눈치였지만.
그래도 이제 완전히 나랑 한배를 탔다고 생각하는 건지, 요리스는 군말 없이 감옥 문을 열어줬다.
이 아저씨도 나중에 또 따로 설명을 해줘야겠군.
아무튼 그렇게 전에 생포한 놈들과 오늘 생포한 놈들. 두 무리를 전부 밧줄로 엮어서 묶은 후, 나는 다시 한번 호수에 다이빙했다.
목적지는 물론, 호수 밑바닥에 있는 텔레포트 마법진이다.
“구원 씨! 이렇게나 빨리…어머? 그분들은?”
“적이야. 위험하니까 조금 떨어져.”
텔레포트 마법진을 타고 구미호 마을로 돌아가니, 바로 눈앞에 레이아가 서서는 날 마중해 줬다. 아니. 레이아뿐만이 아니다. 디아나도 마틸다도, 그리고 레이첼 누님까지?
“레이첼도 여기에 왔어?”
“응. 생각해 보니까 저택보다 여기에서 지내는 게 출퇴근하기에 더 좋은 것 같아서.”
아니. 그야 그렇겠지. 텔레포트 마법진만 타면 순식간이니까.
하지만 은근히 부끄러워하면서 말하는 걸 보니, 그냥 단순히 출퇴근하기 편하다고 눌러앉은 게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켈베로스까지 데려온 걸 보니, 완전히 여기에 눌러 살 생각이잖아.
“그다지 문제 될 일도 아니지 않은가? 길드에서 필요한 절차는 다 밟게 했네. 거기에 레이첼양도 오랜만에 자네를 만나니 더욱….”
“디, 디아나님!”
저게 정답이었군. 디아나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냥 하루 한 번이라도 나랑 대화하고 싶어서 온 거였어.
그런 이유라면 굳이 감출 필요 없는 것 같은데. 하여간 레이첼 누님도 여전히 부끄러움이 많으시다니까.
“그런데 당신? 그 사람들은 대체 누군가요? 조금 전에 적이라고 하셨죠?”
“아, 응. 그게 말인데.”
그래. 당황하는 레이첼 누님의 모습은 무척이나 흐뭇했지만, 지금은 흐뭇해할 때가 아니다.
오늘 밤도 할 일이 엄청 많으니까, 빨리 끝내야지.
나는 우선 이놈들의 정체부터 데려온 경위까지 차근차근 설명했다.
“흠. 사정은 이해했네. 하지만 이곳으로 데려와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마음 같아서는 그냥 감옥에 처박아서 굶어 죽을 때까지 방치해 두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전쟁 포로처럼 죽으면 전쟁신 부활이 앞당겨지는 원인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잖아? 그럴 바에야 그냥 필요한 곳에 이용하는 편이 낫다.
그래서 떠올린 것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거 말인데, 혹시 이 마을에 남자 필요 없어?”
전에 얼핏 들은 얘기로는, 여자밖에 존재하지 않는 구미호들은 아이를 낳기 위해 산 아랫마을에서 남자를 데려온다는 모양이니까.
게다가 마을 전체를 여신의 마나로 덮은 바람에 구미호들의 성욕은 커져만 가는데, 위로 데려가서 신전 체험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어서 곤란하다는 얘기도 들었고.
그런 구미호 마을에 딱 어울리는 인재들이 이놈들이라는 얘기다.
적당히 레벨 높고 섹스 좋아하는 놈들이니, 평생 갇혀서 정액 탱크 역할을 하기에 이놈들보다 더 좋은 놈들도 없잖아?
“그, 그런 의미로…말인가요?”
“그런 의미로.”
우리 애들이 나보다도 더 구미호들의 상황을 잘 알고 있으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부끄러워하며 되묻는 레이아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레이아는 귀를 앞으로 접으며 더욱 부끄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최근에는 저기…많이 곤란해지기는 했지만요. 로엘 씨에게 상담해 볼까요?”
“지금 바로 할 수 있을까? 부탁할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로엘은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니. 그냥 받아들인 정도가 아니라,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솔직히 말해서 바프라의 정예 부대원들이라는 말을 듣고 겁먹을 줄 알았지만, 전혀 아니었다.
구미호들이 핍박을 이겨내지 못했던 건 어디까지나 구미호 쪽이 소수였기 때문이지, 구미호들이 약하기 때문이 아니니까.
오히려 일 대 일이라면 구미호만큼 남자 상대로 강한 종족도 찾아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단순히 정기를 흡수하는 능력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강력한 속박 스킬도 가지고 있으니까.
거기에 저택에서 중2병을 구속해놓은 디아나 특제 구속구까지 투입되니, 내가 데려온 바프라의 직속 부대원들은 아무런 반항도 못 하게 됐다.
“안녕? 오랜만이지?”
그렇게 떨거지들은 전부 구미호 마을에 있는 용도 불명의 커다란 집에 가둬둔 다음, 나는 오늘 데려온 진지남 하나만 따로 빼내서 대화를 시도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 진지남을 포함한 전원 다 성자 스킬의 영향은 풀어줬다. 이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
“…넌…일전에 배에서 만났던 그놈이로군.”
역시 이 녀석이 배에서 강간마랑 있었던 그 진지남이었군. 어쩐지 아까 성역 선포를 맞고서 아는 척을 하더라니.
실은 나도 그것 때문에 디에른 가문에서 대충 감옥 확인만 하고서는 재빨리 여기로 데려온 거였다. 이 녀석이 깨어나서 괜한 말을 시작하면 곤란해지니까.
“그래. 그래도 기억은 하고 있나 보네.”
“그런 능력을 쓰는 놈을 쉽게 잊을 리가 없지. 묘한 능력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설마 구미호였을 줄이야.”
응? 구미호? 얘 지금 뭔가 대단한 착각을 하는 것 같은데?
야. 네가 잘 모르는 모양인데, 구미호는 태생적으로 여자밖에 태어나지 않아요.
“네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이냐?”
“남자로 보이는군. 하지만 구미호는 둔갑술의 대가지.”
…그러고 보니 레이아의 종족 스킬창에도 습득하지 않은 스킬 중에 그런 스킬이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이런 곳까지 데려와서 시치미 뗄 생각인가?”
“하긴. 그럴 필요 없기는 하지.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 볼까?”
헛다리를 제대로 짚고 있었지만, 생각해 보니 굳이 착각을 수정해 줄 필요도 없었다. 그냥 계속 착각하고 있으라지.
“나 혼자만 따로 빼 왔다는 건, 내게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로군.”
“그래. 그래도 넌 말이 좀 통해서 다행이네. 내 요구는 간단해. 바프라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를 전부 넘겨.”
“나도 우습게 보인 모양이군. 그런 어설픈 협박에 내가 주군을 배신할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한 건가?”
온갖 폼이란 폼은 다 잡으면서 말하는 진지남이었지만, 얘 아까부터 계속 헛다리만 짚고 있네. 이렇게 계속 헛다리만 짚는 것도 재주라면 재주다.
“협박이라니. 전혀 아니야. 내가 원하는 건 거래지. 그야 레이한테 한 짓을 생각해 보면 때려죽여도 시원찮기는 하지만, 난 그렇게 폭력적인 놈이 아니거든.”
“거래? 웃기는군. 네년 따위가 내게….”
“섹스.”
“무, 뭣…?”
“아닌 척하지 마. 그 바프라 밑에서 일한 놈이 섹스를 싫어할 리 없잖아? 아까 봐서 알겠지만, 구미호라는 종족은 기본적으로 다들 눈이 휘둥그레질 만큼 미인이거든.”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네가 입을 열기만 하면, 그 미인들 사이에서 평생 섹스만 즐기면서 맘 편하게 살다 갈 수 있다는 거지.”
거짓말은 아니다. 다만 언제 어딜 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만.
아니. 구미호들은 정기, 그러니까 생명력을 빨아먹잖아? 나 정도 되지 않으면 할 때마다…뭐, 구미호들도 오래 빨아먹으려면 적당히 조절하면서 하겠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지? 그럼 다시 한번 말해 볼래? 주군을 배신 못 한다고 했던가? 참고로 말하자면, 네 동료들은 먼저 즐기는 중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슬쩍 디아나한테 신호를 보내자, 디아나가 마법을 사용해 건물 안의 모습을 잠깐 우리 눈앞에 띄워 줬다.
그리고 자기 동료들이 각양각색의 구미호 미인들에게 둘러싸여 황홀한 경험을 하고 있는 장면을 본 순간, 지금까지 굳건하던 진지남의 눈동자가 드디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닌 척해 봤자 결국 이 자식도 같은 족속이었군.
“…바프라에 대해 뭘 말하라는 거지?”
우와. 얘 좀 봐. 주군에서 바프라로 바로 말놓는 거 봤어?
바프라야. 넌 무슨 직속 부대를 이런 식으로 키웠냐? 용케 지금까지 배신 안 당했네.
아니. 섹스 때문에 충성하던 놈한테 더 황홀한 섹스 라이프를 약속해 줬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건가.
“말했잖아? 전부야. 알고 있는 건 전부 다. 바프라가 그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고 뭘 했는지, 몬스터의 대공습 이후로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지, 바프라는 어떤 생각으로 널 지하에 보냈는지,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인지. 알고 있는 걸 전부 말해.”
“…바프라는 자신의 생각을 좀처럼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설령 그게 자신의 직속 부하라고 할지라도.”
“즉, 모르시겠다?”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극히 적다는 얘기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진지남은 나불나불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놈이 우리에게 말해 준 정보는, 처음에 보여준 자신감 없는 태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도움되는 정보로 넘쳐났다. 다만….
“아무리 그래도 한 세력의 수장이라는 놈이? 그 말을 전부 믿으라고?”
놈이 말해 준 정보는, 신뢰성에 의심이 갈 정도로 너무한 정보가 섞여 있었다. 그것도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차라리 불리한 정보였으면 더 믿을만했을 텐데, 이렇게 유리한 정보가 쏟아져 나오니 의심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믿을지 말지는 네년의 자유다. 난 알고 있는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다.”
물론 이 녀석은 그 정보가 우리한테 유리한 정보라는 걸 모르고 하는 말 같기는 했지만.
으음…이걸 어쩌면 좋지.
결국 이 녀석이 한 말을 전부 믿을지 말지는 나중에 정하기로 하고, 나는 우선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하기로 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넘쳐나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뒷수습은 부탁 좀 할게.”
“아니에요. 이쪽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돌아가기 전에 다시 한번 우리 애들한테 사과하자, 레이아가 손사래를 치며 날 안심시켜줬다.
하지만 천사님은 착하니까 이렇게 말해주고 있을 뿐, 앞으로 레이아와 마틸다가 한동안 고생해야 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기껏 쌓아 올린 신전과의 협력 시스템이 무너져 버린 거니까.
“고마워. 부탁할게.”
하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이런 것밖에 없어서, 나는 그렇게만 말하고 텔레포트 마법진에 올라탔다.
“끼잉…끼잉….”
품에는 구슬피 우는 똥개 한 마리를 안고.
야. 똥개. 아무리 그렇게 울어 봤자 안 놔줄 거다. 한낱 미물 주제에 약아빠져서는. 그렇게 슬픈 눈으로 구조 신호 보내봤자 안 통해.
“켈비! 힘내!”
저것 봐. 우리 레이첼 누님은 은근히 나사 빠진 구석이 있다니까. 생긴 건 완벽 커리어 우먼인데.
“나한테 맡겨줘! 그럼 가자! 켈비!”
파이팅 포즈를 지으며 기운을 북돋아 주는 레이첼 누님한테 환한 미소를 보여주고 나서, 나는 품에 안긴 똥개가 도망가기 전에 황급히 텔레포트 마법진을 가동했다.
“그르르르르….”
그리고 호수 밑바닥으로 이동되자마자, 똥개는 거대한 늑대 모습으로 변하더니 내게 이빨까지 보이며 낮게 그르렁거렸다.
이 똥개가 사람 못 알아보고 설치네. 야. 던전에서 못 나오고 있던 널 구해 준 게 나라는 사실, 벌써 잊은 거 아니지? 레이첼 누님 품에 맨날 안겨 있다 보니 힘들었던 기억은 다 잊은 거야?
“수틀리면 여기에다 버리고 가는 수가 있다.”
“…멍! 멍!”
내 나지막한 협박에, 케르베로스는 순식간에 다시 강아지 모습으로 돌아가서는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약아빠진 녀석.
그래도 강아지 모습으로 있으면 귀엽기는 해서, 본의 아니게 마음이 풀리기는 했다. 애완동물이라는 녀석은 이래서 치사하단 말이야.
아무튼 내가 갑자기 케르베로스를 데려온 건, 그냥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니. 진짜로. 레이첼 누님 가슴에 안겨서 맘 편히 꼬리나 살랑살랑 흔드는 모습이 눈꼴시었다든가 하는 이유로 데려온 게 아니라고. 다 필요한 곳이 있어서 데려온 거야.
나는 케르베로스를 데리고 산 중턱에 있는 폭포수로 빠져나가서, 전에 쓰레온이 뚫어놨던 그 구멍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구멍을 막아두고 있었던 몬스터의 성기를 인벤토리 안에 집어넣고, 뻥 뚫린 구멍 쪽으로 켈베로스를 들이밀었다.
“자, 너 땅의 정령 쓸 줄 알지? 막아.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멍?”
이 똥개, 지금 ‘고작 이런 잡일 때문에 날 데려온 거라고?’라는 눈빛으로 나 쳐다본 거 맞지?
그야 내 생각대로 일이 풀린다면 바프라가 다시 병력을 풀어서 지하 수로를 탐색하게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이래 봬도 난 철저한 남자거든. 이런 사소한 것도 꼼꼼히 뒤처리해놔야 후환이 없지.
“이거 하라고 데려온 거 맞으니까 얼른 막기나 해.”
“…….”
똥개 주제에 할 말 잃지 마라. 똥개 주제에.
어쩔 수 없잖아. 나도 마음 같아서는 디아나를 데려오고 싶었다고. 능력 면으로 봐도, 디아나가 마법으로 흔적을 지우는 게 제일 완벽할 테니까.
하지만 아직 미리엘한테서 연락이 없었다고 하잖아. 디아나는 거기에서 언제 올지 모르는 미리엘의 연락을 기다려야 한다는 역할이 있으니, 남은 게 너밖에 없었다고.
그리고 애초에 우리 애들은 데려올 수 없는 이유가 또 한 가지…뭐, 그건 말해 줄 필요 없나.
“아무튼 알았으면 빨리하기나 해. 아, 너 벽돌 같은 것도 만들 수 있냐? 이왕이면 수로 내부까지 완벽하게 수복해두고 싶은데.”
“끼우으….”
이 자식, 지금 한숨 쉰 거야?
상당히 비협력적인 태도의 케르베로스였지만, 그래도 괜히 그 세월 동안 던전에서 홀로 살아남은 게 아니라는 듯, 정령 다루는 솜씨는 상당했다.
땅 위의 잔디를 자연스럽게 모아서 완벽한 위장을 해낸 것은 물론, 수로의 벽까지 완벽하게 수복해내서, 원래 여기에 구멍이 있었다는 걸 알고 있는 내가 봐도 흔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 정도까지는 기대 안 했는데 말이야.
“너 이런 식으로 많이 숨어다녀 봤나 보구나?”
“멍….”
기특한 마음에 머리까지 쓰다듬으면서 칭찬해 줬지만, 켈베로스는 귀찮다는 듯 머리를 흔들어서 내 손을 치우고는 빨리 구미호 마을에 보내 달라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그런데 이걸 어쩌냐.
“아니. 너 오늘 집에 못 가.”
“멍!?”
배신당했다는 표정 짓지 마라.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그렇게 금방 돌아갈 수 있으면 내가 널 데려왔겠냐? 디아나를 데려왔지.
“너 데려다줄 시간 없어. 아직 할 일 많이 남았어.”
“그르르르….”
“아무리 그래 봤자 지금은 못 간다. 가자.”
거대한 늑대 모습으로 변해서 그르렁거리는 켈베로스의 눈길을 애써 무시하며, 나는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내에서 작업하고 있는 변태 듀오와도 다시 한번 얘기를 해야 하고, 그다음에는 케이로스한테 가서 사정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돌아가서는 요리스에게 가서 부족했던 설명까지 마저 해야 하니, 이거 오늘 밤중에 제대로 잠이나 잘 수 있으려나.
결국 내가 모든 일을 마치고 다시 우리 애들이 있는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건, 낮이 거의 밝아올 무렵이 되어서였다.
“늦었네. 많이.”
“안 자고 기다리고 있었어?”
“잘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바보야.”
시간이 이렇다 보니 당연히 다들 먼저 자고 있을 줄 알았지만, 그건 우리 애들을 너무 과소평가한 거였다.
당연하다는 듯이 날 기다리고 있는 사라와 실비아, 레이의 모습을 보니, 밤사이 피곤함에 찌들어 있던 몸에서 순식간에 피로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매일 이런 식이었어?”
“아니. 오늘은 특이 케이스야. 사라 네가 생각해도 그렇잖아? 내가 매일 이렇게 성실하게 일할 리가….”
“장난치지 말고.”
“정말이라니까.”
“흥. 믿을 수가 있어야지. 갈 때도 금방 온다고 했으면서.”
“아…그건….”
원래는 그럴 생각이었는데, 진지남한테 들을 정보 때문에 계획을 살짝 수정해야 할 것 같아서 돌아다니다 보니 그렇게 됐네.
“미안해. 많이 바빴어. 얼마나 바빴으면 내가 이 녀석도 못 돌려주고 데려왔겠어.”
“어!? 켈비!?”
케르베로스의 뒷덜미를 잡아서 앞으로 내밀자, 레이가 반색하며 케르베로스를 품에 껴안았다.
사라나 실비아도 아니고 레이가 제일 먼저 반응하다니. 아니. 애초에 너희 둘 구면이었냐? 뭐, 위에서 며칠 지내는 동안 볼 기회야 몇 번이나 있었겠지만.
“꺄우응…멍! 멍!”
그리고 레이가 품에 안아 들자, 케르베로스도 기다렸다는 듯이 얼굴을 비비며 애교를 부려댔다.
저 자식, 아까까지만 하더라도 한숨 푹푹 내쉬면서 세상 다 산 것 같은 표정 짓고 있었으면서.
“켈비가 여기에 왜?”
“그냥 쟤 힘이 필요한 일이 있어서.”
설명해주는 건 간단하지만, 사정을 다 설명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
“우선 같이 잠부터 자자. 너희도 안 자기 기다리느라 피곤했잖아? 사정은 일어나서 얘기해 줄 테니까.”
“이 변태는 진짜….”
아, 아니. 이 타이밍에 갑자기 변태가 왜 나와!? 같이 자자는 건 진짜 말 그대로 같이 잠이나 자자는 의미지, 섹스하자는 의미가 아니야!
“흥. 정말인지 몰라.”
“물론 사라 네가 원한다면….”
“됐거든.”
사라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그렇게 딱 잘라 거절하면 나 상처받는다.
“…다음에 할 때는 둘이서만 하는 게 좋아.”
“사라야아아아!”
“꺄악! 이 바보!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뭐, 그런 식으로 자기 전에 사라한테 달라붙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날은 야한 짓 같은 거 하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밤사이에 이런저런 일들을 많이 처리하느라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정신을 잃듯이.
내가 정신을 차린 건, 창밖으로 햇살이 강하게 들어올 정도로 쨍쨍한 한낮이었다.
하지만 햇빛 때문에 눈을 뜬 건 아니었다. 눈을 뜬 이유는 다름 아닌, 다리 사이에 느껴지는 달콤한 쾌감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 아래를 바라보니, 하반신 쪽의 이불이 부풀어 올라 바스락바스락 움직이고 있었다.
“응…쪽…하음…아, 이, 일어났어? 조, 좋은 아침…점심? 쪽.”
슬쩍 이불을 들어서 안을 엿보니, 레이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내 물건에 입을 맞췄다.
그러고 보니, 예절이라면서 이런 것도 가르쳤었지. 하지만 얘도 참 겁도 없지. 어떻게 사라 바로 옆에서 이런 걸 할 생각을 하지? 너도 그날 봤잖아? 사라가 질투하면 어떻게 되는지.
사라가 아직 자고 있으니 망정….
“크윽….”
어, 어라? 지금 사라 쪽에서 나지막하게 분한 목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방금 어깨가 살짝 떨리지 않았어? 사라야? 너 설마 지금 깨어 있니? 진작에 깼는데 레이가 하는 짓 때문에 일어나지는 못하고 자는 척하는 거야?
“…이런 식의 아침 인사는 섹스하고 난 다음 날 아침에만 하는 거라고 말했잖아.”
아무튼 사라가 자는 척을 계속한다면 굳이 지적해서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다.
나는 황급히 하반신 쪽 상황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읏!? 그, 그랬던가…?”
내 지적에 레이는 자기가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는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실은 전날 밤에 섹스를 했든 안 했든 이런 식으로 깨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건 굳이 말해주지 말자.
“그, 그럼…여기서 그만해? 얘 괜찮아?”
아무튼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는 레이였지만, 그래도 눈앞에 우뚝 선 물건을 두고 선뜻 봉사를 멈추는 것도 망설여지는 모양이었다.
제, 젠장. 안 그래도 그만두게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인데, 그런 눈으로 보기까지 하다니.
레이의 예쁜 눈동자에서 희미하게 엿보이는 사도 인장은, 날개 부분은 대폭 줄이고 하트만 강조한 모양이라, 언뜻 보면 그냥 눈에 하트를 띄워놓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저것 때문에 또 우리 애들한테 “앨리시아한테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정상적인 곳에 해준 거야!?” “자네, 아예 방침을 바꾼겐가!? 이제야 한 곳에는 안 하기로 한 겐가!?” 라는 불평을 엄청 들었지. 특히 엉덩이 위랑 자궁에 인장이 있는 용사랑 대마법사의 반발이 심하더라고.
실은 방침을 바꾸기는커녕, 이것도 섹스랑 엄청 관련된 위치인데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아니. 전에 하렘 플레이할 때 얘가 감정 공유를 이용해서 너희 기술을 보고 배우더라고. 그래서 눈동자에 해준 거야.”라는 말을 할 수는 없어서, 쏟아지는 불평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그런 하트 눈으로 내 물건을 보며 주저하는 레이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그만하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안 괜찮은 거 같아. 미안한데 한 발 뺄 때까지 계속해….”
“계속하긴 뭘 계속해! 이 변태야!”
하지만 그런 내 욕망은, 참다 참다 폭발한 용사님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오늘도 바쁘다면서! 빨리 안 일어나!?”
“아니! 하지만 이래놓고 그만두는 건 고문이잖아! 사라 넌 남자가 아니라서 모르겠지만, 이건….”
“그럼 빨리 싸고 일어나 이 변태야!”
아마 내가 일어나기 전까지 상당히 참고 있었던 거겠지.
사라는 흥분해서 정상적인 판단을 못 하게 된 건지, 내 물건을 덥석 잡더니 위아래로 강하게 흔들기 시작했다.
흥분해서 이성을 잃은 주제에 그 손놀림은 내 약한 부분을 정확히 자극해 줬고, 레이가 묻혀놓은 타액 덕분에 미끌미끌 잘도 움직이기까지 해서, 자는 사이에 레이에게 실컷 괴롭혀진 내 물건은 순식간에 폭발하고 말았다. 바로 앞에 있던 레이의 안면을 향해서.
“응으으읏!?”
그리고 내 정액을 안면에 맞은 레이는, 그대로 자기도 절정에 달해 버리고 말았다.
“레, 레이!? 당신은 왜 느끼는 거예요!?”
“가, 감졍 공유우….”
아, 이 녀석. 감정 공유 또 켜고 있었냐.
“애, 애초에 구원 넌 왜 이런 인사를…우으읍!”
사라야. 아무리 너라도 내 큰 그림을 찢어 버리려고 하는 건 용서 못 해. 내가 얼마나 공들여서 레이한테 이런 상식을 주입해놨는데.
나는 사라의 턱을 잡아서 입술로 입술을 틀어막고, 다른 손은 아래로 내려 물건을 잡고 레이의 입술에 비볐다.
그러자 절정의 여운에 덜덜 떨리고 있는 레이의 혀가, 할짝할짝 내 물건을 핥아서 깨끗하게 해주기 시작했다.
이럴 생각 전혀 없었는데, 왠지 3P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아? 어쩌면 이대로….
“후아아! 하아…하아…저, 적당히 하지? 오늘도 할 일 많다면서?”
그렇게 생각했지만, 역시 용사님은 용사님이었다. 이런 때마저 판단을 흐리지 않다니.
아니. 판단이 잠깐 흐려져서 대딸을 해준 덕분에 이런 일이 되어 버린 거지만. 아무튼 슬슬 물러날 때인 것 같군. 용사님도 자기 잘못도 있는 만큼 여기까지는 봐줄 것 같으니까.
“흐으응.”
침대에 걸터앉아서 팔짱을 낀 채 날 내려다보는 사라. 완벽하다는 말로도 부족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다리를 내 눈앞에서 보란 듯이 바꿔 꼬고 나서, 사라는 가볍게 코를 울렸다.
“정말로 바쁘기는 했나 보네.”
“응. 그런데 사라야.”
“왜?”
“팬티 보…헛차! 피했다!”
보여서 보인다고 말해 준 것뿐인데, 사라의 긴 다리가 정확히 내 다리 사이를 노리고 휘둘러졌다.
얘가 위험하게 뭐 하는 짓이야!? 내가 매번 말하는 거지만, 여기가 망가지면 불운해지는 건 나뿐만이 아니거든!? 그 점 알고 있는 거지!?
“이, 이 변태가 진짜….”
설마 내가 피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사라는 매서운 눈초리로 날 노려봤다.
사실 우리 용사님의 운동 신경이라면 내 피하는 동작을 보고도 따라와서 추가타를 날릴 수 있었겠지만, 방금은 두 손으로 자기 치맛자락을 누르느라 동작이 제한된 거겠지.
그렇게 누르고 있어봤자 별로 소용없는데 말이야. 그도 그럴 것이, 난 지금 바닥에 무릎 꿇고 있으니까.
“넌 이런 때에도 그런 곳에 눈이 가!?”
“당연하지. 다른 사람도 아닌 사라 너니까. 내 눈은 언제나 네가 있는 곳을 따라가게 되어 있어.”
“…농담할 때 안 할 때 구분 좀 하지?”
사라가 날 찌릿 노려보며 그렇게 말한 순간, 옆에서 “오오….” 하고 감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굳이 돌아볼 것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은 명확했다.
레이야. 네가 이런 말에 유독 약하다 보니 딱 끊어 버리는 사라가 멋있게 보이는 모양인데, 실은 사라 얘도 말만 이러는 거지 속으로는 엄청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설마 일이 그렇게 됐다니….”
이것 봐. 원래라면 더 쏘아붙였을 텐데, 지금은 그냥 넘어가 주잖아.
뭐, 사라가 지금 한 말로 알 수 있듯, 중요한 얘기를 하던 도중이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그래. 내가 이렇게 무릎 꿇고 있는 것 때문에 아까 전 소동으로 벌 받는 중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우리는 지금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중이었다.
아, 참고로 무릎 꿇고 있는 건 아침에 그 일 때문이 맞아.
“그래. 이 오빠가 밤사이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이제 좀 느껴져?”
“…그런 건 늦을 때부터 느끼고 있었거든, 바보 오빠야.”
“…….”
“뭐, 뭐야 갑자기 조용해지고.”
“아니. 시키지도 않았는데 불러준 기습 오빠에 감동해서.”
“바보 오빠라고 했거든.”
“내 귀에는 오빠밖에 안 들려.”
“하아. 진짜 이 바보는….”
보란 듯이 한숨 쉬면서 말하는 사라였지만, 내가 눈에는 아까보다 훨씬 기분 좋아진 모습처럼 보였다.
“아무튼 진짜 많이 걱정했나 보네?”
“…당연하지.”
어머, 솔직해라. 사라야. 기분 풀렸다고 너무 귀여워진 거 아니야?
“사라 네 성격에 용케 안 뛰쳐나오고 얌전히 기다렸네?”
“아, 그거!”
갑자기 솔직해진 사라의 모습에 조금 더 장난을 쳐보자, 갑자기 레이가 손을 번쩍 들고 앞으로 나섰다.
“너 나한테 감사해.”
얘는 또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저 으스대는 표정은 또 뭐고?
“내가 아니었으면 진짜로 너 찾으러 뛰쳐나갔을 테니까.”
아니. 내가 생각하기에도 금방 온다는 놈이 그렇게까지 소식이 없었으면 사라 성격에 뛰쳐나가려고 했을 것 같기는 하지만, 레이 네가 사라를 말렸다고? 대체 어떻게?
“…구원한테 문제가 생긴 건 아니라고 알려줬으니까.”
내 지극히 당연한 의문은, 사라의 짧은 설명으로 말끔하게 해소됐다.
과연. 감정 공유를 사용하면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을 테니, 그걸로 사라를 안심시킨 건가. 하지만 그렇다는 건….
“어쩐지 케이로스 집에서 얘기하던 도중부터 갑자기 심장이 엄청 뛰더라니. 그거 네 탓이었냐!?”
난 그냥 바프라에서의 일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는 느낌에 설레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아침에 내 사정과 동시에 이 녀석도 느껴 버린 이유 역시도 그렇다. 어쩐지 감정 공유가 왜 켜져 있나 했더니, 그때부터 켜놓고 있던 거였어!?
“꺄악! 난 시키는 대로 한 게 다야!”
“애초에 너 감정 공유 컨트롤도 제대로 못 하잖아!? 어떻게 켠 거야!?”
“그, 그래서 못 껐잖아!”
“그게 자랑…후우, 아니다. 됐다.”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반사적으로 윽박지르고 말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렇게까지 화낼 일도 아니기는 했다.
결국 감정 공유로 생긴 문제라고 해봤자 조금 전 그 소동 정도가 전부였고, 무엇보다 스킬 컨트롤도 못 하는 레이가 감정 공유를 발동시켰다는 건 그만큼 간절히 바랬다는 의미도 되니까.
즉, 레이도 날 무척 걱정했다는 얘기다.
“뭐, 뭐야…할 말 있으면 똑바로 해.”
하지만 내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자, 레이는 괜히 더 불안해진 모양이었다.
음. 내가 생각해도 조금 전 태도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 같아.
아니. 레이 얘가 가끔 되지도 않는 백치미를 자랑하는 캐릭터라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좀 막대하게 되는 게 있더라고.
얘도 이제 사도 임명까지 하고 정식으로 내 여자가 됐으니, 조심하지 않으면.
“별거 아니야. 그냥. 너 나 진짜 좋아하는구나?”
“가, 갑자기 왜 그런 얘기가 돼!?”
그런 의미에서 살짝 달달한 분위기를 유도해 봤지만, 이런 쪽으로 면역이 전혀 없는 레이답게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면서 전혀 받아주지 못했다.
사도 임명까지 주고받은 애가 이렇게까지 면역이 없는 것도 신기하다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흐뭇하게 레이를 보고 있자니,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구원 님?”
“아, 응?”
“지난밤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오늘도 할 일이 많습니까?”
질문 형식이었지만, 아마 실비아도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닐 거다. 오히려 내게 본래 목적을 상기시켜주기 위해 말을 건 거겠지.
보통 이런 대화를 할 때는 웬만해서는 끼어들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는 실비아인데, 그 실비아가 이렇게 끼어들 정도라니. 얘기가 삼천포로 많이 빠지기는 했나 보구나.
“그래. 케르베로스를 데려다 줄 시간도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여야겠지.”
“깽!?”
기특한 기사님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그렇게 대답하자, 레이의 품에 있던 켈베로스가 충격 받은 표정으로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강아지 주제에 표정 참 풍부한 녀석이다.
“그럼 켈비는 내가 봐줄게!”
하지만 그런 케르베로스와 반대로, 레이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케르베로스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활발하게 외쳤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활발한 척하면서인가. 감정 공유 꺼놨다고 해서 내 눈썰미를 너무 무시하지 말라고.
“…그래. 어차피 오늘 당장 결단이 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레이 넌 여기에서 기다리면서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어.”
처음 만났을 때의 독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요즘은 백치미만 선보이는 레이지만, 그래도 분명 마지막에 자기가 맡은 역할이 있을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을 거다.
아니. 설령 역할이 없더라도 뭔가 하고 싶을 거다. 나와의 관계에 더 신경이 쏠리게 되면서 언급하지 않게 됐지만, 원래 바프라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이유로 날 따라온 녀석이니까.
“…응.”
역시나 내 생각은 정답이었는지, 레이는 ‘무슨 마음의 준비?’ 같은 말을 하며 백치미를 뽐내는 일도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형용하기 힘든 표정과 함께.
그래. 네 마음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지?
“미리 말하는데, 난 따라갈 거야.”
그리고 물론 여기에 남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고 싶은 사람도 있는 법이다.
행여나 따라오지 말라고 할까, 사라는 얼른 자기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래. 혹시 용사의 힘이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나도 딱히 혼자 갈 생각은 없었다.
어젯밤처럼 그림자 이동을 이용해서 여기저기 재빨리 이동해야 할 일도 없었고, 은신을 써서 어디에 잠입해 들어갈 생각도 없었으니까.
“대신 실비아가 레이랑 같이 기다려줘야 할 것 같은데. 실비아, 괜찮지?”
딱히 디에른 가문이 배신할 걱정을 하는 건 아니지만, 여기 바프라에서 레이는 누구한테 어떻게 노려져도 이상하지 않은 존재다.
아무리 그래도 혼자 둘 수는 없으니, 경호원 하나쯤은 남겨두지 않으면.
“네, 넵!”
목소리가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저건 어쩔 수 없다. 우리 실비아는 내가 곁에 있으면 항상 저러니까.
“고마워. 좋아. 그럼 용사님. 가실까요?”
나는 실비아에게 레이를 맡기기로 하고, 사라를 향해서 팔을 내밀었다.
“바보. 어디 데이트하러 가?”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는 사라였다.
좋아. 우선은 요리스한테 말해서 길을 열어달라고 해야겠지?
앞으로 중요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고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라와 함께 방을 빠져나갔지만, 가벼운 발걸음은 문을 열자마자 순식간에 무거워지고 말았다.
“아, 형님! 드디어! 일어나셨습니까!”
신과 유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신의 얼굴을 봤다는 이유만으로 기분이 다운된 건 아니다. 바보 같은 녀석이지만, 그래도 일단 믿을만한 놈이라는 건 여기까지 같이 오면서 충분히 알았으니까.
문제는 신의 표정이 마치 사형 선고라도 받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는 점이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버지께서… 아버지께서 바프라에게 불려 갔습니다.”
“그게 왜? 디에른 가문이 유일한 미약 공급원이니, 불려 갈 일은 많잖아?”
솔직히 말하자면, 말한 나도 그런 이유 때문에 부른 건 아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희망을 걸고 해본 말이었지만, 역시나 신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제 아버지뿐만이 아닙니다.”
응? 뭔가 말투가 묘한데? 아, 설마….
시선을 유리 쪽으로 옮기자, 유리가 역시나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조금 전 연락이 왔습니다만, 케이로스님도 성으로 불려 가셨다고 합니다.”
“언제?”
“조금 됐습니다. 약 1시간 전에….”
젠장. 방에서 느긋하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잖아. 설마 바프라가 이런 식으로 선수를 칠 줄이야.
원래라면 사라가 방 밖에 있는 이 둘의 기척을 느끼고 말해 줬을 텐데, 내가 계속 장난을 거는 바람에 감각이 흐려진 건가.
“불려 간 건 그 셋뿐이야?”
“아닙니다. 정확한 인원은 모릅니다만, 고위관료 상당수가 불려 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일정 이상의 지위에 있는 사람 전원이….”
망할. 그 셋만 불려 갔다고 하면 차라리 희망이 있었을 텐데.
“…일단 확인하겠는데, 유리네 아저씨는 은사모의 회원이 아니지?”
갑작스러운 바프라의 소환. 거기에서 제일 걱정되는 건, 역시나 은사모였다.
어제 도시에 소문을 내는 걸 기점으로, 케이로스도 더 적극적으로 은사모와 뜻을 같이할 사람을 모은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조금 더 적극적인 활동을 선언한 지 만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설마 진짜로 벌써 실수해서 꼬리가 잡힌 건 아니겠지?
안 그래도 어제 진지남이 해준 말 중에 “바프라는 세력 내부에 무언가 목적을 가진 비밀 조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는 말이 있어서 살짝 불안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어. 사라야. 미안한데….”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렇게 말하기도 전에, 사라가 먼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고글 같은 물건을 꺼내 들었다.
“신호탄은 제대로 가지고 있지?”
“고마워. 사랑해.”
너무 듬직한 그 모습에 새삼 반하면서, 나는 황급히 건물 밖으로 나가 산 아래를 내려다봤다.
목표는 물론, 어젯밤과 마찬가지로 성 내부로의 잠입이다.
해가 쨍쨍한 낮인 만큼 밤과 같은 절대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힘들었지만, 그래도 그림자만 골라서 숨어드는 것으로 내 은신술은 톡톡히 밥값을 해냈다.
아무에게도 들키는 일 없이 성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나는, 곧장 바프라가 있는 곳을 찾았다.
성의 내부 구조는 어제 잠입하면서 대강 꿰고 있었기 때문에,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바프라는 물론 불려 갔다는 고위관료들까지 전원 알현실에 모여 있었으니까.
신이 말한 대로 진짜 고위관료란 고위관료는 싹 다 불러모았는지, 딱 봐도 높으신 분들이 알현실을 빽빽하게 채운 모습은 마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회의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회의를 하는 것치고는 상당히 이질적인 물건이 알현실의 한중간에 있었다.
“…쓰레기가.”
지금도 가슴에 뚫린 구멍에서 피가 왈칵왈칵 쏟아져나오고 있는 시체를, 왕좌 같은 곳에 앉아 있는 바프라가 혐오스럽다는 눈으로 쳐다보며 그렇게 내뱉었다.
“정말로, 정말로 실망스럽기 그지없군. 고작해야 몇 년이다. 고작해야 몇 년이, 그렇게 내가 우스워 보일 정도로 긴 시간이었나?”
그렇게 말한 후, 바프라는 나지막하게 “이래서 인간들이란.”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과연. 다크 엘프의 순혈주의라는 말이 그냥 섹스 때문에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는 건가.
진지남의 정보를 들으면서도 생각했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아무래도 바프라의 본모습은 내 상상과 많이 다른 것 같다고.
“그래서, 다음은 누구지?”
놈이 내뿜는 살벌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신하들은 얼음이 되어있었지만, 바프라 자신은 무척이나 여유로워 보였다. 여유를 뛰어넘어서, 권태로움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권태로운 목소리로, 바프라는 좌중을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았다.
갑자기 다음은 누구냐니. 대화의 흐름을 생각해보면 다른 반역자를 찾는 것 같지만, 설마 반역자가 제 발로 나오길 바라는 건 아닐 테고.
그런 생각을 한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는지, 고개를 숙이고 있던 신하 중 한 명이 더욱 허리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폐하. 소인들의 미천한 머리로는 폐하께서……커허억.”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바프라가 던진 무언가에 목이 뚫리고 말았지만.
저건……펜? 어쩐지 왕좌 앞에 책상이 있는 게 조금 안 어울리기는 했어. 보통 왕좌는 의자만 있잖아? 아마 이러려고 일부러 준비해둔 모양이다. 저기 바닥에 있는 시체도 바프라한테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가슴에 구멍이 뚫려 죽어있는 걸 보니, 같은 방식으로 당한 것 같고.
그리고 슬쩍 들여다본 책상 위의 펜꽂이에는 아직도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은 펜이 꽂아져 있었다.
“네놈이었나. 네놈은 이전부터 남을 구슬리고 아첨하길 좋아하는 놈이었지.”
바프라는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면서, 펜꽂이에 손을 뻗어 또 펜 하나를 들고는 빙글빙글 돌려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신하 중 몇 명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는 것을, 바프라의 눈은 매섭게 포착한 것처럼 보였다.
저 책상, 지금 보니 그냥 단순히 펜을 손닿는 위치에 두기 위한 목적만으로 가져다 둔 게 아닌 모양이군.
이런 식으로 펜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걸 어필하며 위압감을 주면, 찔리는 놈들은 알아서 티를 낼 거라고. 만약 그런 것까지 계산하고 책상을 가져다 둔 것이라면,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머리가 돌아가는 타입인 모양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바프라가 다른 세력과 가장 차별화된 특징이, 꼼수를 써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는 점이었지. 그런 곳의 수장이라는 놈이 머리 안 돌아가는 바보일 리가 없나.
게다가 놈이 더 골치 아픈 점은, 머리는 물론 전투력 역시도 이곳에서 최고라는 점이었다.
이런 식으로 위압감을 준다는 계획도, 펜만으로 신하를 어렵지 않게 죽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바탕이 되어야만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이니까.
물론 여기 놈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높지 않고, 그에 반해 바프라의 레벨은 우리 파티하고도 크게 꿀리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니……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별생각 없이 애널라이즈를 썼다. 그리고 눈앞에 뜬 화면을 본 순간, 나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루이스 바프라. 레벨 279.
이 녀석, 원래 레벨이 이랬나? 분명 며칠 전 몬스터의 대공습 때는, 279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그렇다고 해서 레벨이 정확히 몇이었는지 확실히 기억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어쩌면 그때도 279였을지도 모를 일이고.
그냥 레벨뿐만 아니라 직업인 배틀 마스터의 레벨까지 279인걸 보면, 단순히 내 착각일지도 모른다.
이 녀석이 딱히 레벨을 올릴 일이……아, 그런가. 방금 둘 죽였지. 그래서 레벨이 올랐을 수도 있는 건가. 뭐야. 괜히 설렜네.
아무튼 바프라는 진짜로 다른 반역자가 제 발로 나서길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니. 지금 죽은 저 사람이 반역자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바프라는 그렇게 생각하는 거겠지.
“그럼, 다음.”
그렇게 사람 둘은 순식간에 죽이고 나서, 바프라는 또다시 권태로운 목소리로 신하들을 종용했다. 물론, 바프라의 부름에 그 누구도 입하나 뻥긋하지 않았지만.
그야 그렇겠지. 입 열면 죽을 게 뻔한데 누가 나서려고 하겠어?
“또 내가 나서서 쓸데없는 시간을 들이게 하지 말고 빨리 나와라. 굳이 저놈들과 한패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바프라는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물론 놈이 사정을 다 알고 있을 리가 없지만, 그래도 그 묘한 말투 때문에 살짝 불안해지기는 했다.
저놈들과 한패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니. 설마 은사모를 얘기하는 건 아니겠지?
아니. 애초에 지금 죽은 저 둘이 은사모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건 아니라도 믿고 싶다. 케이로스도 제법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고.
“정말 아무도 없나? 저런 겁쟁이들조차 모반을 꾀했는데. 윽. 후우…….”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 바프라였지만, 놈은 말을 끝맺는 대신 그 권태로운 표정을 갑자기 찌푸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응? 잠깐만. 뭐야 저 반응은? 뭔가 살짝 익숙한 반응인데? 저 새끼 설마…….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지만, 확인해봐야겠어. 내 은신술은 사라한테도 들키지 않을 수준이니, 분명 괜찮을 거야.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바프라가 앉아있는 왕좌의 뒤쪽 그림자를 향해 그림자 이동을 시도했다.
역시나 그간 연마해온 내 은신술은 완벽해서, 내가 바로 뒤까지 이동해도 바프라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안심하면서 몸을 숙여 책상 아래를 엿봤고, 거기에서 내가 본 건…….
“……응. ……읍.”
이, 이런 미친놈아! 책상은 이래서 가져다 놓은 거였냐!? 이 와중에도 그렇게 섹스가 하고 싶어!? 이런 대낮에!?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남들 다 보는데!?
젠장! 내가 아까부터 얼마나 이 책상을 가져다 놓은 계략을 감탄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내 감탄 돌려줘! 이 부러워 죽을……아, 아니. 이놈 진짜 미친 거 아니야!?
그래. 아니나 다를까. 책상 아래에서는 놈의 물건을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게다가 지금 이곳은 바프라를 제외한 전원이 잔뜩 긴장하고 있어서, 숨 쉬는 소리도 조심할 정도로 정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정적 속에서 조금의 소리도 흘리지 않으면서 봉사한다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잖아.
“네놈들도 잘 알겠지만, 나는 시간 낭비가 싫다.”
또다시 무게를 잡고 말하는 바프라였지만, 책상 아래의 진실을 알고 난 나에게는 이제 그 말투가 전혀 다른 의미로 들렸다.
‘빨리 아무도 없는 데서 마음껏 섹스하고 싶으니까 대충 알아서 자진신고하고 꺼져라.’ 이런 느낌으로 말이다.
물론 그런다고 해서, 이런 분위기 속에 나설 사람이…….
“바프라님.”
있네. 심지어 이번에는 나도 아는 얼굴이었다.
케이로스 아저씨! 미쳤어!? 죽고 싶어!? 설마 내가 여기 온 거 알고 여차하면 구해줄 거라 생각하는 거야!?
그야 물론 성자 스킬 다 쓰면서 진심으로 싸우면 바프라를 포함한 여기에 있는 전원이랑 싸워도 딱히 못 이길 것도 없지만, 그러면 내 계획이 전부 물거품이 되잖아!
“호오. 케이로스 네놈인가.”
케이로스의 돌발 행동에 지켜보던 나까지 당황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바프라의 손에 있는 펜이 케이로스를 향해 날아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케이로스를 믿어서 그런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네놈은 권력보다는 그저 자신의 가늘고 긴 명줄만 붙잡고 있으면 그만인 겁쟁이였을 텐데?”
“네. 그렇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긍정하는 케이로스의 모습에, 바프라는 유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크큭. 여전하군. 그래. 그런 네놈이 무슨 일이지?”
“이쯤 하면 바프라님을 의심하던 이들도 생각을 바로잡았을 것 같습니다.”
“큭. 의심이라. 반역자의 대표로서 하는 말로 이해해도 되겠지?”
“겁쟁이의 대표로서 하는 말입니다.”
케이로스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바프라의 손 위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던 펜이 처음으로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얼마간의 정적.
케이로스를 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바프라는, 흥이 식었다는 듯 펜을 다시 펜꽂이에 던져 넣었다.
반역을 꾀한 놈이 더 없는 게 아니라, 있지만 이쯤 하면 놈들도 생각을 접었을 거라고 말한 게 주효한 건가.
생각보다도 훨씬 자신감이 넘치는 놈이군. 보통 이런 타입은 후환을 남겨두지 않으려 할 거라고 봤는데 말이야.
“치워라.”
바프라가 턱짓으로 시체 둘을 가리키자, 밖에서 병사들이 쏜살같이 달려나와 시체를 수거해갔다.
그리고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젓자, 쥐죽은 듯 있던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인사를 올리고서는 알현실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잠깐.”
대부분의 사람들이 뒤를 돈 바로 그 순간, 바프라가 펜꽂이에서 펜을 한 움큼 집어 들더니 앞으로 뿌렸다.
그러자 그 펜들은 마치 유도 기능이 달린 것처럼, 정확히 펜 하나당 한 명씩 목을 뚫고 지나갔다.
저건……나도 정확한 건 아니지만, 아까 펜을 만지작거리면서 겁줄 때 떨었던 놈들이잖아?
“그놈들도 같이 데려가라.”
바프라의 기습에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란 듯 굳어져 버렸지만, 바프라는 여전히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태도로 턱만 까딱 까닥 움직이면서 명령했다.
그제야 드디어, 알현실에서는 길었던 심문 시간이 끝이 났다.
“케이로스.”
성 밖으로 나와서 삼삼오오 흩어지는 권력자들의 행렬. 그중 아는 얼굴이 있는 곳으로 조용히 다가가서 슬쩍 말을 거니, 케이로스가 흠칫 놀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구원님이셨습니까.”
“뭘 그렇게 놀라? 아까는 그렇게 배짱 좋더니. 아저씨, 다시 봤어?”
일단 아는 얼굴은 모두 무사했으니 살짝 장난기를 섞어서 말해봤지만, 케이로스의 표정은 풀릴 기색이 안 보였다.
오히려 더욱 표정을 어둡게 하면서, 케이로스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일을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혹시 아까 죽은 사람 중에, 은사모에 중요한 인물이라도 있었어?”
어제 케이로스에게 들은 건데, 아무래도 성에서 소문에 관한 정보를 통제하고 있던 이 역시도 은사모였던 모양이다.
언젠가 신이 “저도 잘은 모르지만 은사모 회원 중에는 대단한 권력자도 있다고 합니다.”라고 한 적이 있잖아? 그게 바로 그 사람을 말하는 거였다고.
만약 그 인물이 조금 전에 죽은 거라면, 확실히 케이로스가 이런 표정이 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아니요. 그 반대입니다.”
그렇게 혼자 지레짐작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모양이다.
케이로스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도, 무거운 마음을 나타내듯 다시 한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반대라니?”
“어제부터 시내에 나도는 그 소문이 생각보다 상당한 여파를 낳았는지, 어제부로 저희 은사모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됐습니다.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은 넘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게 왜? 잘 됐잖아?”
“하지만 아까 바프라의 손에 죽은 사람 중, 저희와 뜻을 함께하기로 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뭐? 그게 말이 돼?
아까 있던 이들 중 7할이 은사모라면, 대충 펜을 던져도 최소 한 명은 은사모에서도 사상자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가 아예 없다는 말은…….
“네. 어쩌면 바프라는, 저희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내 뇌리에 다시 한번 어제 진지남한테 들었던 정보가 떠올랐다.
바프라는 세력 내부에 묘한 움직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그 정보.
그 망할 진지남 녀석. 이래서는 그냥 어렴풋이 생각만 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을 서두르면 더 꼬일 수도 있어.”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이면 확실히 그냥 부딪혀도 승산은 있다.
하지만 이건 도전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는 승부. 지면 그걸로 끝이다.
우리 목적은 그냥 그냥 바프라를 장악하는 게 아니잖아? 바프라 장악은 물론,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다시 한번 섹스를 부담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게 우리 진짜 목적이니까.
그러려면 적어도 여신의 마나가 담긴 물이 시내로 유통되어서 사람들이 들고일어날 때까지는 기다리지 않으면.
사람들의 인식을 한 번에 바꾸려면,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지지를 얻고 들고 일어나는 정도의 소동은 필요해.
“며칠이면 일반인들도 슬슬 들고일어날 조짐이 보일 거야. 그때까지만 기다리면 돼.”
“하지만 구원님.”
나도 알아. 그 사이에 바프라가 먼저 치고 들어오면 전부 물거품이 돼버리겠지.
뭔가, 뭔가 바프라의 발을 묶어둘 방법이 없을까?
애초에 그놈은 왜 은사모를 전원 살려둔 걸까? 정말로 은사모의 존재를 깨닫고 있는 거라면, 굳이 살려둘 필요 없이 전원 처리해버리면 그만이잖아?
제법 머리도 돌아가는 놈이고, 후환을 남길 성격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 잠깐만. 어쩌면, 혹시 바프라 그놈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한 가지 가능성을 깨닫게 됐다.
“……나한테 생각이 있어.”
일단 케이로스를 그런 식으로 안심시키고 나서, 나는 다시 한번 성안으로 잠입을 시도했다.
물론 목적은 바프라를 만나기 위해서.
“야.”
아까는 바글바글 들어서 있던 사람들이 물러나고 홀로, 아니. 책상 아래에 있던 여자와 둘이서 남은 바프라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응……하응! 흐응! 바, 바프라니임!”
그것도 당당하게 책상 위에 여자를 올려놓고 섹스를 하면서.
다시 한번 생각하는 건데, 쟤도 진짜 어지간히 또라이 같아.
아니. 그보다 쟤 지금 내 말 안 들렸나? 나 지금 은신도 풀었는데?
“야!”
왕좌를 향해 다시 한번 소리를 지르자, 그제야 바프라가 허리를 멈추고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훗.”
“아응! 흐앙!”
저, 저 씹어 먹을 놈이 진짜! 야! 허리 안 멈춰!?
내가 살면서 이런 굴욕을 당한 적이 있었나?
너무나도 뻔뻔한 놈의 태도에, 나는 한순간이나마 진지하게 자신의 삶을 돌이켜보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거슬렸는지, 바프라는 작게 혀를 차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쯧. 케이로스 놈. 그간 조금은 배짱이 붙은 줄 알았건만. 겁쟁이는 결국 겁쟁이라는 건가.”
아까도 살짝 느꼈지만, 상당히 혼잣말을, 아니. 혼잣말하는 척하면서 빈정대기를 좋아하는 놈이로군. 어째서 갑자기 케이로스를 빈정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으흣! 흐으응!”
아니. 그런 것보다 일단 허리부터 멈춰 이 미친놈아!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셈이야!?
“가서 케이로스에게 전해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오라고.”
…응? 쟤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이쪽을 보지도 않고 툭 내뱉은 바프라의 말뜻이 바로 이해되지 않아서, 나는 잠깐 오작동이 걸린 기계처럼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즉, 저 새끼는 날…그런 뜻이지?
이상하다? 나 혹시 아까 케이로스랑 대화할 때 썼던 약자 태세를 아직도 안 풀었나?
잠깐 스스로의 상태를 점검해 봤지만, 내가 이 중요한 때에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저놈이 오해할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걸 이해한 순간, 나는 이미 놈에게 단검을 날리고 있었다. 그것도 스킬까지 사용해가면서.
그간 7계층에서 지내면서 내가 성장한 건 은신과 그림자 이동 스킬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당연히 월영무사의 레벨도 착실히 올라가고 있었고, 새로운 스킬도 제법 배울 수 있었다.
지금 선보인 이 그림자 투척도 그중 하나로, 간단히 말해서 그림자 이동을 손에 쥔 사물에 한정하여 쓸 수 있는 능력이다.
단독으로도 쓸만한 스킬이지만, 단검 투척과 같은 스킬과 혼용하면 효과가 배가 되는 스킬로, 특히나 이곳처럼 화려한 장식물로 인해 그림자가 많은 곳이라면 그 효용성은 무궁무진했다.
“크윽!”
비록 바프라의 배틀마스터 레벨이 내 월영무사 레벨보다 조금 더 높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암습을 쉽게 막아낼 정도로 압도적인 격차도 아니었다. 심지어 그냥 레벨은 내가 더 높으니까 더더욱.
“네놈….”
놈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는 것으로 목 옆에 긴 자상이 남는 정도의 수준에서 가까스로 내 단검을 피해냈다.
사실 그냥 맞고 죽으면 그건 그거대로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던진 거였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당할 녀석은 아니라는 거군.
“케이로스의 수하가 아니군.”
그렇게 말하면서, 놈은 드디어 아래에 깔린 여자에게서 자기 물건을 뽑았…으악. 젠장! 더러운 걸 뭘 뚝뚝 흘리면서 뭘 이쪽을 향하는 거야!? 안 치워!?
그나마 놈도 자기 물건을 남에게 보이는 취미는 없는지, 여자의 머리칼을 움켜잡고 그 얼굴을 끌고 와 입에 자기 물건을 처넣었다.
아니. 확실히 저러면 꼴 보기 싫은 건 가려지지만…뭐, 좋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어딜 어떻게 봐야 내가 누구 수하로 보이는 거야? 시력이 많이 안 좋니?”
일단 케이로스와의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해 모르는 척을 했지만, 통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저 녀석은 왜 계속 케이로스를 언급하는 거지? 진짜 뭘 알고 있는 건가?
“흥. 그 건방진 말투, 내 세력 아래에 있는 놈도 아니군. 그렇다면…그런가. 네가 레이를 데려간 그놈인가.”
그렇게 말하고, 바프라는 왕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까부터 느끼는 거지만, 여자는 진짜 그냥 쾌락을 위한 도구 취급이로군.
구역질이 날 정도로 역겨웠지만, 그 역겨운 태도와 별개로 머리는 꽤나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설마 말투만으로 내 정체까지 꿰뚫어볼 줄이야.
그리고 동시에 놀라운 자신감이기도 했다. 바프라 내부 사람이라면 절대 자기한테 함부로 입을 못 놀릴 거라는 자신감이 없으면 나올 수 없는 판단이니까.
“정체는?”
“설마 얘기해 줄 거라고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지?”
“나와 대화하고 싶어서 찾아온 것 아니었나?”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대화해 줄 마음도 없다는 얘기인가.
하지만 날 너무 우습게 봤군. 미안하지만 아까 단검을 던졌을 때, 마음속으로 이미 결단을 내렸거든.
만약 처음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라고.
그렇게 되면 계획은 많이 어그러지겠지만, 수도에 있는 귀족의 7할을 이미 장악했다고 했다는 케이로스의 수완을 믿어보기로 하자.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보다, 이런 역겨운 놈을 이대로 살려주는 게 더 문제일 것 같아.
“네놈의 정체 여하에 따라서는 내게도 대화 의사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놈은 그렇게 말하는 것으로 내 결단을 살짝 흔들었다.
칫. 운이 좋은 녀석. 딱 내가 원하는 대답을 내놓다니.
어차피 놈을 해치우는 건 간단하다. 해치우기 전에 정체를 밝히는 것쯤이야 별문제 없겠지.
방심한 악당이나 할법한 판단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지만, 물론 방심한 건 절대 아니다. 이것저것 다 계산해 보고 내린 이성적인 결론이라고.
생각해 봐. 놈은 조금 전까지 여자랑 섹스하고 있었잖아? 다시 말하면 이 근처에는 놈과 나, 그리고 여자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는 얘기다.
“그전에 여자는 치우지?”
물론 바프라야 어찌 됐든 여자까지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나는 우선 여자부터 밖으로 내쫓기로 했다.
왕좌 앞의 책상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지만, 아마 지금도 바프라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겠지.
“그렇군.”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에, 나는 당연히 바프라가 여자를 밖으로 내쫓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었다. 그 사실을, 나는 곧장 깨닫게 됐다.
“바, 바프라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 끄윽…끄르륵….”
책상 아래에서 들려온 끔찍한 소리로 인해서.
“이제 여기에는 우리 둘밖에 없다. 다시 한번 묻지. 네놈의 정체는?”
저 새끼…지금….
“상당히 분노하는군. 고작 여자 하나가 죽은 것치고.”
“고작…여자…?”
솔직히 말해서, 나도 그렇게 정의로운 성격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런 내가 보기에도, 놈의 행동은 그 하나하나가 전부 너무 역겨웠다.
“네놈의 세계에서는 아닌가 보지?”
내 세계라고? 저 새끼는 또 무슨…아니. 그런가.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진실을 깨닫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면 나도 앞으로….”
“그래. 우리 플리투스에서는 남녀가 평등하다.”
“…플리투스?”
이죽거리면서 말하는 놈에게, 이번에는 내가 한마디 해주자, 놈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당혹감이 엿보였다.
지금까지 쭉 알고 있었다는 듯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놈이 이런 표정을 짓게 된 건 상당히 유쾌했지만, 아직 끝난 건 아니었다.
“그래. 정체를 밝히라고 했지? 소개하지. 플리투스의 용사님이시다.”
“…네놈이? 용사? …여신 세계의 용사 같은 것 아니라 말이냐?”
역시나 그렇게 예상하고 있었군.
설마 직접 만난 진지남도 알아채지 못한 내 정체를, 보고만 들었을 이 녀석이 먼저 알아채고 있었다니.
아니. 이 녀석이기 때문에 알아챈 건가.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애널라이즈를 써봤다.
이름 : 루이스 바프라
종족 : 다크 엘프 238
직업 : 배틀마스터 279
레벨 : 280
그러자 내 눈앞에 뜬 창에는 내 생각을 뒷받침해주는 정보가 적혀 있었다.
아까 이 녀석이 섹스하던 게 떠올라서 혹시나 싶어 해본 건데, 설마 이렇게 타이밍 좋게 레벨업을 했을 줄이야.
이번에는 아까 애널라이즈를 섰을 때의 수치도 제대로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아니. 이젠 기억하고 있지 않더라도 상관없나. 이렇게 레벨과 직업 레벨이 달라서는 말이야.
“여신의 용사? 무슨 말을 하는 거지? 플리투스라고 말했을 텐데?”
“…플리투스인가.”
“그래. 뭐, 나는 리리안 플리투스의 직계는 아니지만.”
“……!”
나는 이라는 단어를 통해 리리안 플리투스의 직계도 있음을 암시하자, 바프라의 눈썹이 아까보다 더 심하게 꿀틀거렸다.
그야 그렇겠지. 238살이면 순혈 다크 엘프치고는 젊은 나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리리안 플리투스의 통일 왕국 시대를 겪기에는 충분한 나이니까.
이 녀석은 순혈 다크 엘프라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고 인간을 무시하는 것 같은 언행을 보이기도 했으니, 어쩌면 리리안 플리투스한테 자격지심 같은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자, 그래서? 네가 생각하기엔 어떻지? 이 용사님이 대화 상대로 충분한 것 같아?”
이렇게까지 상황 파악이 끝나니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나는 아까보다 훨씬 더 편하게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눈앞의 자식이 역겹다는 건 변함이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철저하게 이용해 줘야겠어.
“…어이없어서 말도 안 나오는군.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라진 지 몇 년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거지? 인간이라서 세월의 흐름이 가늠이 안 되나? 이제 와서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하면, 진심으로 내가 믿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래. 처음에는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어. 그래도 한 세력의 수장인데, 당황했다고 곧장 흐트러지거나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말이지. 이미 흐름은 나한테 왔거든.
“그럼 증명해 줄까?”
“증명이라고? 어떻게 말이지?”
“간단해.”
그렇게 말하고 살기를 집중시키자, 놈의 얼굴에서 완전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 나를…?”
“왜? 못할 것 같아?”
“못할 것 같군. 이 성안에서 그런 일을 벌이면 아무리 네놈이 강해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그럴 것 같아? 그거 이상하네. 혹시 프리움 성문에서의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아직도 못 들었어?”
“그건 네놈이 멀쩡했을 때의 이야기지.”
과연. 만약 내가 진짜 용사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곱게 죽지는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는 건가. 그리고 아무리 용사라도 상처 입은 상태에서는 이 성을 곱게 빠져나가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다.
자신감이 지나쳐 만용에 가까운 생각이었지만, 나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부정하는 것보다 더 효과적인 말이 있으니까.
“걸레년의 유혹에 넘어간 이단자를 용사가 직접 나서서 죽였다는데, 대체 어떤 놈이 덤벼든다는 거지?”
“……!”
“모를 줄 알았나 봐? 너 너무 용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니야? 나한테는 느껴지거든. 네 몸에서 풍기는 걸레년의 더러운 냄새가 풀풀.”
“그런 말을 누가….”
“지하 수로에 보낸 부하들, 아직 소식이 없지? 왜 그럴까?”
사실 이런 식으로 쓰려고 데려간 건 아니었지만, 역시 죽이지 않고 끌고 가길 잘했어. 이래서 사람은 선행을 쌓으면 복이 온다는 건가.
“그놈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아, 그건 걱정 마. 다 듣고 있거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건틀렛을 벗고 빛나는 반지를 놈에게 보여줬다.
“그렇지 디아나?”
“음. 제대로 다 들었네.”
역시 대마법사님이야. 실은 지금 막 반지를 발동해서 말을 건 건데, 제대로 분위기를 읽고 말을 맞춰주잖아.
“…그래도 넌 날 죽일 수 없다.”
퇴로가 완전히 막혀서 패닉에 빠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래도 바프라는 아직 겉으로는 냉철함을 잃지는 않았다. 뭐, 하는 말을 보니 속으로는 엄청 당황하는 모양이었지만.
그것도 그럴 것이, 저렇게 말하면 내가 자길 죽일 실력이 된다고 인정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즉, 놈은 이제 완전히 내가 용사거나, 적어도 그에 준하는 실력이라고 믿고 있는 거다.
“그래? 내가 왜?”
“네놈은 대화를 하러 왔을 텐데?”
끝까지 네놈 네놈 거리는 건, 마지막 남은 알량한 자존심이라는 건가.
“그건 네놈한테서 더러운 걸레년의 냄새를 맡기 전 얘기고. 아, 그래. 그래도 궁금하기는 하네. 넌 대체 무슨 말을 할 셈이었어? 내가 걸레년의 용사라면.”
“무슨 말인지 모르….”
“이제 와서 모르겠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 다 들켰는데. 너도 내가 걸레년의 용사라는 생각에 대화해 보려고 한 거잖아? 대체 무슨 말을 할 생각이었어? 한번 말해 봐. 혹시 알아? 내가 들어줄지.”
내가 그렇게 선심 쓰듯 말하자, 놈은 조금 고민하는 눈치를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네놈의 목적은, 바프라를 흡수 합병이라고 생각해도 되겠지?”
“뭐, 당장은 아니겠지만. 그게 왜?”
“내가 도와줄 수 있다.”
얘가 살고 싶어서 별말을 다 하는구나.
놈의 말을 듣고 처음 든 생각은, 그런 생각이었다.
“야. 너 아까 내가 한 말 못 들었어? 나한테 할 말이 아니라, 걸레년의 용사가 찾아왔으면….”
“마찬가지다. 난 이제 세력 유지에 흥미가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 새끼 진짜 뭐야? 설마 진짜 섹스에 빠져서 이제 다 필요 없어졌다고 말할 셈은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