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int’s Dungeon Business RAW - Chapter (1090)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90화
“응, 응, 응, 아응!”
“그래서.”
사정 후 물건을 빼지 않고 계속해서 허리를 흔들면서, 세이지를 내려다봤다.
미리엘의 밑에서 빠져나온 세이지는 현재 침대 밑으로 내려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옷을 챙겨입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남아 있던 옷마저 스스로 다 벗어 버리고 알몸이 되어서.
“뭐든 하겠다고?”
“…네!”
고개를 숙이고, 거의 엎드려 빈다는 느낌으로 간절하게 대답하는 세이지.
처음에는 그렇게 앙칼졌던 여자가 이제는 제발 내 물건으로 자기에게 박아달라고 엎드려 빌고 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달성감이라고 할까 지배욕이 충족되는 느낌 같은 게 들었다. 세이지 개인한테는 딱히 감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간절한 모습은 보기 좋군. 하지만 넌 기회를 제 발로 걷어찼지. 내 여자가 될 기회는 그리 흔한 게 아니야. 흐음….”
나는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하는 척을 했다.
그 와중에도 허리는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으니 남이 보면 엄청 웃기게 보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날 바라보는 세이지의 눈동자만큼은 그저 간절함만이 가득했다.
“좋아. 그러면 이렇게 하지. 우선은 우리 일에 협력해라.”
“네? 네에….”
어차피 내 여자가 되면 나한테 협력하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굳이 그런 말을 하는 내 의도를 모르겠다는 거겠지. 세이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충분히 도움이 됐다고 생각이 들면, 그때 내 여자로 만들어주지.”
“아…그, 그럼 협력은 어떻게 하면…?”
“그건…미리엘.”
어차피 나머지 비수와 관련된 일이라면 중2병도 똑같이 알고 있다.
물론 이 녀석은 바로 직전까지 비스와 연락하고 있으니 정보를 더 알고 있을 가능성도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전진에 잠입한 첩자에게 굳이 본국이 정보를 전해주려고 할까? 정보는 일방통행으로 오갔을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봤다.
그렇다면 이 녀석이 우리의 도움이 될 수 있는 건 바로….
“미리엘.”
나는 마지막으로 안쪽을 깊게 찔러서 절정을 느끼게 해준 다음, 물건을 뽑고 미리엘의 이름을 불렀다.
“응하읏….”
하지만 미리엘은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이쪽으로 내민 엉덩이를 파르르 떨면서 나와의 섹스가 준 쾌감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뭐, 처음에는 분위기를 맞춰주기 위한 연기였다고 하더라도, 결국 얘도 내 조교를 받았던 애니까. 계속해서 시달리다 보면 결국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이렇게 되는 건 당연한가.
“정신 차려.”
“응흣!? 네, 네헤…?”
엉덩이를 한대 찰싹 때려주니, 미리엘은 그제야 조금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뭐, 아래쪽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애액량은 더 많아졌지만 말이다.
내가 저렇게 만든 거지만, 진짜 말도 안 되는 체질이야. 진짜 저런 몸으로 평소에는 어떻게 검을 휘두르고 싸우는 거지?
“세이지한테 뭘 협력해야 하는지 설명해.”
난 딱히 도움받을 일이 없지만, 미리엘은 다르다.
비스의 첩자를 밝혀내고 사로잡은 것도 모자라 첩자의 입에서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빼낸다면, 그것도 다른 모두가 보고 있는 앞에서 첩자가 미리엘에게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며 그렇게 한다면, 미리엘의 주가는 지금 이상으로 엄청나게 올라갈 거다.
그야말로 전쟁에서 세운 공훈 따위는 필요 없어지는 수준으로 말이다.
“아흣…네에….”
몸을 일으킬 힘도 없는지 세이지 쪽에 얼굴을 향하고 나른하게 누운 미리엘은, 지금부터 세이지가 뭘 어떻게 하면 좋은지 자세히 설명해 줬다.
저런 상태에서도 저렇게 말이 술술 나오는 걸 보면, 진짜 유능하기는 엄청 유능한 녀석이야.
“후우.”
미리엘이 세이지와 대화하는 동안, 나는 침대의 헤드 보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서 중2병에게 손짓했다. 이리로 와서 아직 쌩쌩한 내 물건의 뒷마무리를 하라고.
“우읏….”
아무리 중2병이라도 이렇게 손짓으로 자기를 콕 집어 부르면 “나!?” 같은 바보 같은 소리는 할 수 없겠지.
중2병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그러면서도 아까 하던 펠라의 여운이 아직 남아 있는지 살짝 흥분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서는, 내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쭈웁. 츄릅.”
뒷머리에 한 손을 가볍게 얹은 채 아래쪽은 중2병에게 맡기고, 나는 미리엘과 세이지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세이지가 자신의 역할을 전부 이해했을 즈음, 가볍게 폭탄 하나를 투하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그동안 난 곁에 없을 거다.”
당연한 얘기다. 애초에 우리가 여기에 있는 목적은 세이지를 잡아서 비스와의 연락을 끊는 것이었으니까.
목적을 달성한 지금, 여기에 계속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네!? 하, 하지만 그러면 전…!”
그 당연한 얘기가, 세이지에게는 청천벽력이 되겠지만 말이다.
“어서 빨리 여자가 되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이겠지. 하지만 그게 뭐? 내가 준 기회를 차 버린 녀석한테는 딱 맞는 벌이야.”
“아, 아아…!”
세이지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질리기 시작하는 걸 보고, 나는 세이지도 납득할 만한 이유를 더 추가해주기로 했다.
너무 몰아붙이기만 하면 그대로 마음이 꺾여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말이야.
“이 내 여자가 되는 거다. 그 정도 충동도 제어 못 하고 아무 남자한테나 다리를 벌리는 평범한 여자 따위는 애초에 필요 없어. 내 여자가 되고 싶다면, 너 스스로 그 자격을 증명해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다시 한번 미리엘의 엉덩이를 찰싹하고 때렸다. 당장 눈앞에 있는 미리엘만 보더라도 평범한 여자가 아닌 용사이지 않냐는 뜻으로.
사실 미리엘은 내 여자도 아니지만, 어차피 세이지는 그렇게 착각하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이해했겠지?”
“네, 네에….”
잘 해낼 자신은 전혀 없지만, 내 말이 너무 타당해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느낌으로, 세이지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았어! 드디어 끝났다! 후우. 설마 섹스도 안 하고 일을 해결할 수 있을 줄이야.
물론 섹스를 해버리는 게 더 간단한 길이었고, 섹스를 안 하는 만큼 세이지가 완전히 굴복했다는 걸 이중삼중으로 확인하느라 더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해결하고 나니 달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중2병과 섹스 없이 협력 관계를 맺어서 그런지, 막상 세이지의 처녀를 빼앗으려고 하니까 마음이 무거웠거든.
오기 전에 필요하다면 내 여자가 아닌 여자와도 얼마든지 섹스를 하겠다고 각오를 다지고 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안 할 수 있으면 안 하는 게 제일이지.
“그럼…후우.”
“응흐읍!? 응긋. 응읍.”
아무렇지 않게 중2병의 입에 사정하자, 중2병은 움찔하고 놀라면서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그 뒷머리에 얹은 손에 힘을 줘서 누르자, 결국 목을 꿀꺽꿀꺽 울려서 입안에 쏟아지는 정액을 전부 마시고 덤으로 청소 펠라까지 시작했다.
“그럼 오늘은 시간도 늦었으니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지. 미리엘. 세이지는 네가 데리고 있어. 맡겨도 되겠지?”
“아아. 물론이야!”
…그런데 넌 또 왜 그렇게 신나 보이냐?
아니. 나도 그냥 여기서 같이 자자고 엉겨 붙는 것보다는 훨씬 낫기는 하지만,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얘가 웬만하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낼 애가 아닌데?
게다가 내가 간다고 하는데 이렇게…수상해.
“잠깐 와봐.”
중2병의 입에서 물건을 빼고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미리엘의 손목을 붙잡고 방의 구석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소리를 차단한 다음, 바로 미리엘을 추궁했다.
“야.”
“…성자님. 날 유혹하려고 해봤자 소용없어. 난 이미 성자님의 매력이 푹 빠져 있으니까.”
아니. 어쩌다 보니 이런 자세가 되기는 했지만, 딱히 널 유혹하려고 벽치기 자세를 한 게 아니거든? 뭘 갑자기 부끄러워하는 거야.
“너 말이야. 저 녀석이랑 둘이 내버려 두면 또 나 몰래 뭔가 비밀 얘기 같은 거라도 하려는 건 아니겠지?”
여기에서 반응하면 미리엘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갈 뿐이다. 나는 미리엘의 말을 철저히 무시하고, 내가 할 말만 간단하게 말했다.
이 녀석은 전에도 중2병이랑 둘이 비밀 얘기를 해서 사람을 헷갈리게 한 전적이 있으니까 말이야.
물론 자기 딴에는 내 도움이 되기 위해서 한 거였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나한테 숨기고 멋대로 일을 진행하는 것 자체가 마음에 안 들어.
만약 이번에도 또 그런 짓을 하려는 거라면….
“응? 아, 아아….”
아차, 그런 얘기였군. 평소에 너무 수상하게 군 반동인가.
마치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미리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찮아. 성자님. 그런 게 아니었어.”
“그럼 왜 그렇게 기분 좋아 보였던 거지? 심지어 내가 간다고 하는데?”
“하핫. 가지 말라고 붙잡길 바랐어?”
“농담 아니야. 질문에 대답해.”
“…….”
대답하지 못 한다라. 이건 역시 그런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겠지.
“아니. 그런 게 아니야. 그저 조금 평소 행실을 반성하고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리고?”
“…아무리 나라도, 성자님에게 자기감정을 솔직하게 얘기하는 건 부끄러워.”
진짜로 귀 끝까지 새빨갛게 붉히면서, 미리엘은 살짝 내게서 시선을 피하고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응? 아니. 뭐야. 그럼 즉, 얘가 기분 좋아 보였던 이유는….
하지만 왜? 그럴 일이 있었었단 말이야? 오랜만에 나한테 찐하게 조교를 받아서…는 왠지 모르게 아닌 것 같고.
아, 서, 설마…설마 내가 자길 내 여자 취급해 줘서?
“…….”
평소의 시원스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시선을 피한 채 두 손을 뒤로 마주 잡고 몸을 가볍게 좌우로 흔드는 소녀소녀한 미리엘의 모습.
그 모습에, 나는 내 생각이 맞을 것 같다는 확신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아니.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널 딱히 내 여자로 받아들인 게 아닌데 말이야. 물론 미리엘도 알고 있을 거다. 이 눈치 빠른 애가 그런 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겨우 그걸로 그렇게 감정을 숨지기도 못 할 정도로 좋아했다는 얘기야?
“그래. 그러면 세이지는 맡길게.”
그렇게 생각하니 이 이상 추궁할 기분도 들지 않아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벽에서 떨어졌다.
그러자 미리엘도 “후우….”하고 깊은 한숨을 한번 내쉬더니, 언제나처럼 시원스러운 미소와 함께 이렇게 말했다.
“응. 맡겨줘.”
제, 젠장. 쟤가 저러니까 괜히 미안해지잖아.
아니야. 안 돼. 지금까지 유일하게 내가 실컷 섹스하고도 감정이 안 흔들렸던 녀석인데. 그래서 오늘도 세이지랑 하는 건 피하면서도 대신 이 녀석이랑 잔뜩 한 건데.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감정이 흔들릴 수는 없어!
애초에 내가 다른 여자랑 감정 안 섞인 섹스를 할 거라고 다짐한 이유도 미리엘 상대로 잘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데, 그 미리엘 상대로 감정이 생겨 버리면 전에 했던 다짐까지 무너지잖아!
중2병과 세이지는 섹스를 안 하고 넘어갔다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어! 여기서 다짐이 무너질 수는 없다고!
물론 지금 느낀 이 감정은 연애 감정이라기보다는 동정심에 가까웠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동정심으로 시작한 감정이 결국 연애 감정으로 발전해서 맺어진 케이스가 지금까지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 흔들리면 안 돼, 구원아. 침착하자. 침착하게 감정을 정리하는 거야.
그래. 애초에 저 녀석이 좋아한 이유도, 전부 내 추측이잖아? 직접 얘기를 들은 것도 아니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얜 사라 동생이야! 사라 동생! 내 여자 동생! 바꿔 말하면 처제 될 사람!
그래. 난 지금 이 녀석의 모습에 사라를 겹쳐봐서 이런 감정을 느낀 거야. 이 녀석을 안는 감촉이 사라랑 조금 비슷해야 말이지.
아까도 다른 여자한테 느끼다가 사정할 때 삽입해 버리는 플레이를 했었고.
의식하고 한 건 아니지만, 분명 미리엘의 몸이 사라와 안는 감촉이 비슷해서 나도 모르게 사라한테만 했던 플레이를 얘한테 해버린 걸 거야.
비장의 카드, 미리엘은 사라의 동생이라는 정신 방벽을 세우고 이성적으로 내 감정을 분석하자, 그제야 동요됐던 감정이 조금 진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맡길게.”
하지만 여기에 오래 있으면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우선 1초라도 빨리 미리엘의 얼굴을 안 보는 게 좋겠어. 일단 자고 일어나면 이 감정도 말끔하게 사라져 있겠지.
나는 도망가는 도둑놈처럼 황급히 옷을 챙겨입고, 중2병과 함께 미리엘의 방을 뒤로했다.
당장에라도 떠날 것처럼 얘기했던 나였고 실제로도 그럴 생각이었지만, 결국 나와 중2병은 이 전초기지에 며칠 더 머무르는 신세가 됐다.
세이지가 모두의 앞에서 순종적으로 자기가 아는 정보를 털어놓는 것을 보면서 그 정보 중에 진짜로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없는지 확인하는 건, 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까 말이야.
결론부터 말하자면, 예상대로 세이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중2병과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중2병보다도 아는 게 더 없다고 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중2병은 내 성자 스킬에 당한 시점에서 이미 비스와 연락을 못 하게 됐다고 하니, 바로 며칠 전까지 비스와 연락을 주고받은 세이지가 조금이라도 최신 정보를 더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의심을 안 한 건 아니다. 자신의 음부까지 활짝 벌리면서 나한테 빌었던 여자라지만, 시간이 지나면 생각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니까. 세이지가 일부러 정보를 골라가며 말하고 있을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세이지가 정보를 말했을 때 직접 본 사람이라면, 도저히 그런 의심은 할 수가 없었다.
다수의 압박. 특히나 세이지에게 깜빡 속아서 비밀 호위까지 맡겼던 린 어쩌고의 거센 압박에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말이야.
세이지 녀석, 그 장군한테 위축된 나머지 나중에는 허벅지까지 움찔움찔 떨 정도였다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알 수 있다. 그거, 본능적으로 벌어지려는 다리를 억지로 닫으려고 힘주는 모습이었어.
그러면서 내 눈치를 엄청나게 살폈으니, 아마 그때 내가 같은 방에 없었다면 진짜로 다리 벌리고 그 장군한테 매달리지 않았을까?
그렇게 될 거라고 압박을 준 건 나였지만, 진짜로 다른 남자가 조금만 위압적으로 굴어도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을 보니, 세뇌 교육의 무서움을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별다른 소득도 없이 여기에 며칠 더 머무르며 시간만 허비했다는 얘기다.
그동안 머무르면서 건진 소득을 굳이 찾자면.
“음쭈웁. 응흡. 츄릅.”
그나마 이 녀석한테 감정이 없다는 걸 재확인했다는 점이겠지.
오늘도 내 물건에 열심히 봉사하는 미리엘을 내려다보면서도 아무런 감정 동요도 생기지 않는 걸 보고, 나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때는 이 녀석을 안는 감촉이 사라랑 너무 비슷해서 그냥 좀 착각을 한 거야.
“싼다.”
“츄르르릅.”
내 말에 맞춰서 더욱 강하게 흡입하는 미리엘의 입에,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정액을 토해냈다.
미리엘 역시 아무렇지도 않게 내 정액을 입으로 받아내서, 목을 꿀꺽꿀꺽 울리며 전부 삼켰다.
“이제 깨끗하게 해.”
“응읍.”
지금 이러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미리엘의 말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강한 남성성은 성기의 크기에서 나오고, 성기가 큰 강한 남자는 성욕도 마찬가지로 강하다. 그런 강한 남자가, 바로 곁에 자신의 여자가 있는데도 성욕 처리를 하루라도 거르는 건 이상하다.
라는 논리를 미리엘이 들고나왔거든.
아니. 지금까지 내가 세이지 앞에서 보여준 태도를 생각해 보면 딱히 틀린 말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그래서 결국 이렇게 보여주기식으로 매일매일 미리엘에게 성욕 처리를 시켜왔다는 얘기다.
뭐, 그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지만.
“너희도 오늘 출발한다고 했지?”
“쪽. 맞아. 츄릅.”
“세이지는 계속해서 너한테 맡기게 될 텐데, 어때? 잘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아?”
“응. 쮸웁. 맡겨둬.”
이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이 녀석도 린 어쩌고 앞에서 세이지가 오들오들 떠는 걸 같이 봤으니, 지금 세이지의 상태가 상당히 불안정하다는 것쯤은 알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근거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이 녀석이 이렇게 자신감이 넘치면 묘하게 믿음직스럽단 말이지.
“그래. 믿지. 그리고….”
“응?”
“슬슬 그만 그 입 떼는 게 어때? 더 깨끗하게 할 것도 없잖아.”
“…성자님은 가끔 보면 여심을 너무 몰라주는군.”
아니. 네 지금 행위가 나타내는 건 여심보다는 단순한 성욕이라고 생각하는데.
뭐, 원래는 성행위에 그렇게 담백했던 애를 내가 이렇게 만든 거니까, 내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은 없겠지만 말이야.
“아무튼 슬슬 가자.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수는 없잖아.”
그래. 보여주기식으로 성욕 처리를 시켰다고 했지만, 지금 이곳에는 나와 미리엘 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게 보여주기식이 아니라는 얘기는 아니다.
제대로 세이지가 있는 앞에서 미리엘의 신호를 받고 같이 여기로 온 거니까.
각자 다른 타이밍에 화장실을 핑계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최소한 중2병과 세이지는 나와 미리엘이 이런 목적으로 둘이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거다.
뭐, 눈치 못 챘어도 나중에 강제로 눈치채게 할 거지만.
“그것도 그렇군. 쪽. 쪽.”
아쉽다는 듯 마지막으로 내 물건 전체에 키스 세례를 퍼부은 다음, 미리엘은 품에서 부드러운 손수건을 꺼내 내 물건에 묻은 자신의 타액을 정성스럽게 닦아내 줬다.
“그럼 가자.”
그리고 나서 내 바지를 끌어 올리고 벨트를 채우는 것 역시도, 내 앞에 무릎 꿇은 미리엘이 직접 해줬다.
모든 뒤처리를 끝낸 다음, 나는 미리엘과 같이 모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오, 오셨습니까.”
따로 나갔던 둘이 동시에 돌아온 거다. 그것도 화장실에 간 것치고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흐른 다음에야.
이렇게 되면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가 뭘 하고 왔는지 눈치채지 않을 수가 없겠지.
“…….”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 둘을 향해 뜨거운 시선이 쏠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시선을 하나만 꼽자면, 저기에 있는 발가스 장군의 이글이글 불타는…아니. 역시 앨리시아의 저 야성미 넘치는 시선인가.
아무리 그래도 상황이 이렇게까지 됐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일단 앨리시아한테는 사정을 얘기하고 양해를 구하기는 했는데 말이야.
그래도 역시나 질투가 나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눈짓으로 몇 번이나 미안하다는 뜻을 보냈지만, 앨리시아의 눈에서는 좀처럼 힘이 빠질 생각을 안 했다.
“미리엘 님. 출발 준비가 모두 끝났습니다. 이제 미리엘 님만 준비되시면 언제든 출발 가능합니다.”
나와 앨리시아가 그렇게 아이컨택트를 하고 있는 사이에, 이쪽으로 이글이글 거리는 시선을 보내던 다른 한 사람, 발가스 장군이 한 발 앞으로 나오며 미리엘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한테 그렇게 이글거리는 시선을 보낸 주제에 이제 와서 나만 철저하게 외면하려고 하다니.
진심으로 충고 하나 하자면, 더 추해 보이기만 하니까 그만두는 게 좋아. 아니. 난 딱히 무시당해도 상관없지만 말이야.
“그런가. 그럼 성자님. 나도 준비를 하러 가야 할 것 같아.”
이것 봐. 어차피 댁이 날 무시해도 미리엘은 날 신경 쓸 테니까, 괜히 댁만 더 비참해지거든.
“그래. 다녀…아니. 그냥 준비 끝나자마자 바로 출발해도 괜찮아. 나도 이제 슬슬 가볼 생각이니까.”
“그런가. 알겠어. 그럼 나중에 또 봐.”
“그래.”
아까까지 둘이서 그런 짓을 했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담백한 인사를 나눈 다음, 미리엘은 다시 자리를 벗어났다.
그리고 나도 미리엘에게 말한 대로 중2병과…여길 떠나기 전에.
“잠깐 좀 보자.”
나는 앨리시아의 손을 붙잡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올 때 주변 사람들이 전부 ‘그렇게 하고도 아직 부족해서 다른 여자까지 데려가는 건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거 아니거든?
뭐, 오해라면서 변명하는 것도 이상하니까 아무 말 안 할 거지만.
“앨리시아, 미안!”
나는 앨리시아와 단둘이 되자마자 곧장 두 손을 모아서 사과했다.
안 그래도 앨리시아는 내 여자가 되고 나서도 나와 있을 기회가 없었는데, 거기에 더해서 미리엘과 계속 붙어 있는 모습을 보이며 신경을 긁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일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제대로 보상해주자. 라고 혼자 속으로 변명하면서 넘어가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나중에 보상하는 건 보상하는 거고, 일단 지금은 급한 대로 사과부터 해야겠어.
조금 치사한 짓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왜냐하면….
“칫.”
내가 이렇게 먼저 사과를 해버리면, 앨리시아 성격에 폭발도 못 하고 넘어가 줄 거라는 건 알고 있으니까.
“잘못한 건 알고 있냐, 새끼야.”
“당연하지. 진짜 미안해. 계획상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널 두고….”
“착각하지 마. 난 그런 속 좁은 여자가 아니야.”
“으,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네가 속 좁은 여자가 아니라는 건 그야 내가 제일 잘 알지. 오히려 너무 터프해서 살짝 걱정될 정도로 털털하잖아.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도라는 게 있지. 이번에는 아무리 너라도 화난다는 거, 나도 충분히 이해해. 내가 널 두고 계속 미리엘이랑 붙어 있어서 화난 거잖아?
“아니야, 새끼야. 아니. 짜증은 나지만, 그래도 그런 것 때문에 이렇게 화내는 건 아니야.”
그런 것이라니.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렇게 쿨하게 넘어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나도 누님들한테 얘기는 다 들었어. 필요하면 아무 여자나 붙잡고 섹스해도 신경 안 쓰기로 했다면서? 그렇다면 나도 그걸로 뭐라고 할 생각은 없어. 막내로 들어온 주제에 누님들의 결정에 거스를 정도로 파렴치한 년으로 보여, 내가?”
아니. 자기 남자가 딴 여자랑 놀면 기분 나쁜 게 사람으로서 자연스러운 감정이니까, 딱히 파렴치한 건 아니지 않냐?
진짜 얘는 가끔 보면 털털하다는 말로도 부족한…그래. 완전히 상남자다.
직접 말해주면 “누구보고 남자라는 거야, 새끼야!” 라면서 화내겠지만.
“그러면? 왜 화난 거야?”
“그걸 몰라서 물어, 새끼야!? 네가 필요하다면서 붙잡고 섹스해대는 그 아무 여자가 우리 미리엘이니까 화난 거잖아!”
아, 그런 거였어?
질투가 아닌 동료애 때문에 화를 내다니, 앨리시아 답다고 해야 할지.
“그래, 새끼야! 너 어쩔 셈이야!”
“아니. 어쩔 셈이고 자시고, 미리엘은 사라의…아니. 그게 말이지.”
“나도 아니까 숨길 필요 없어. 사라 누님이 미리엘의 이복 언니인 거지?”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뭐, 전에 미리엘이 대놓고 언니라고 부른 적도 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지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그동안 미리엘이랑 붙어 있으면서 확인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는데, 왠지 모르게 확인할 기분이 안 생겨서 말이야.
가만히 있으면 아무 일 없을 지뢰를 괜히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다고 할까.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인거야. 미리엘도 네 여자로 받아줄 각오가 있는 게 아니라면, 적당히 해.”
야. 그렇게 말하면 넌 내가 미리엘을 받아줘도 괜찮은 것처럼 들리잖아.
“별로 상관없는데? 누님들도 날 인정해 줬는데, 뒤늦게 합류한 내가 그런 걸 막는 것도 웃긴 일이잖아.”
아니. 그대는 우리 애들이 널 인정해 줬다는 느낌보다는, 네가 막무가내로 들이닥쳐서 무릎까지 꿇고 비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뭐, 이제 와서 그런 얘기해 봤자 무슨 소용이냐.
“거기에 막내 탈출도 가능하고, 어차피 여기에서 한 명 더 늘어봤자 티도 안 나잖아.”
티, 티도 안 난다니.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 않을까요?
“아무튼 그런 게 아니라면, 적당히 해. 그 세이지라는 여자한테 보여줄 목적이면 굳이 미리엘이 아니어도 그냥 날 육변기 취급하면 되잖아? 내, 내가 다 받아줄게! …용사가 아니니까 효과는 떨어지겠지만.”
유, 육변기라니. 넌 또 그런 말을 대체 어디서…아니. 미안하지만 효과가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라 거의 없는 수준이라고 생각해.
아마 그게 가능했으면 나도 너한테 부탁했을 거야. 사실 처음 너희랑 합류했을 때는, 나도 드디어 너랑 같이 지낼 기회가 생기게 됐다고 기대했을 정도니까 말이야.
내 여자가 되고 나서도 같이 지낼 기회가 거의 없었던 너랑 드디어 애인다운 짓을 조금은 할 수 있을 거라고.
세이지 일이 그렇게 되지만 않았으면, 진짜 너하고만 붙어 있었을 거야.
“가, 갑자기 낯부끄러운 소리 할래, 새끼야!?”
네가 아까 한 말이 훨씬 더 낯부끄러운 말이라는 생각은 안 드냐?
“칫. 아무튼 우리 미리엘의 마음을 흔드는 짓은 적당히 해. 그 녀석, 보기와는 다르게 애정 결핍인 부분이 있으니까. 적당히 안 하면 진짜로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알았어. 명심할게.”
앞으로 미리엘하고는 절대 섹스를 안 하겠다는 장담은, 솔직히 말해서 못 하겠지만. 그래도 나 따위보다 미리엘과 훨씬 오래 알고 지낸 앨리시아가 해준 충고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지.
나는 앨리시아의 충고를 가슴속 깊이 새겨두기로 했다.
앨리시아와의 대화를 마친 후, 우리는 다음 계획을 위해 헤어져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앨리시아는 아라크네 간부 및 발가스 휘하 군사들과 함께 플리투스의 수도로. 그리고 나와 중2병은 일단 구미호 마을로.
“조금 더 글씨를 흘려 써봐. 급박한 사람치고는 너무 또박또박 쓰고 있잖아.”
“흐, 흘려……이렇게?”
그리고 그 구미호 마을에서, 나는 중2병을 시켜 편지를 쓰게 했다.
편지의 수신인은 비스의 수장. 내용은…….
“그래. 나쁘지 않네. 하려면 잘하잖아.”
“후, 후훗! 당연하지! 이 나한테 걸리면 이 정도쯤은……!”
아니. 기껏해야 사기 편지 한 통 쓰는 것뿐이잖아. 그게 그렇게까지 우쭐할 일이야?
세이지가 굴복한 그날 이후, 중2병은 묘하게 이런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중2병답게 원래부터 자기가 뭔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망상하는 일은 자주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망상에 그치지 않고 자기가 대단한 사람인 걸 남이 알아주길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묘하게 날 향한 어필이 늘어난 것 같단 말이지.
아마 세이지의 모습을 보고 위기감을 느껴서, 자기 딴에는 ‘난 이렇게 대단하니 앞으로도 약속을 깨지 말고 협력 관계를 유지하자!’ 라는 뜻으로 하는 것이겠지만……중2병아. 네가 그렇게 유능하면, 나같이 언제든 여자를 굴복시킬 수 있는 남자는 그냥 편하게 널 자기 여자로 만들고 평생 부려 먹으려 할 거라는 생각은 못 하는 거니?
아니. 뭐, 그렇게 안 할 거지만 말이야.
“다 썼다!”
“잠깐 보여줘.”
나는 혹시 빠뜨린 점은 없는지 편지를 꼼꼼하게 확인했다.
편지의 내용은 이랬다.
지금까지 도피 생활을 하느라 연락을 할 틈이 없었다. 적의 허를 찔러 겨우 틈을 만들어 편지를 쓴다. 적은 다수. 어떻게 된 일인지 내 보법을 꿰뚫어 보고 있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비스의 비수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 걸음걸이나 사용하는 무술이, 그리고 그 강력함이 바프라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스에서 파견된 자일 가능성 있음. 만약 이 이후에 더 편지가 없다면.
뭐, 간단히 말하자면, 비스의 대장이라는 자의 의심을 증폭시킬만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비스 내부에 비수를 더 많이 둘 정도로 의심이 많은 성격인 것 같으니까 말이야. 그 의심을 이렇게 살짝 더 부추겨주면, 어떻게 행동할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않아?
“마지막 글자는 펜을 떼지 않고 옆으로 죽 그어서 긴박감을 나타내 봤어! 어때!?”
“좋네. 응용력이 괜찮은데?”
“그, 그렇지!?”
그러니까 그게 그렇게까지 좋아할 일이냐?
이 녀석, 사실은 위기감이고 뭐고 대단한 꿍꿍이 같은 거 없이, 단순하게 칭찬 듣는 게 기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겠지?
세이지의 태도를 생각해 보면, 이 녀석 비스에서 친구 하나 없이 지냈던 것 같으니까.
“그럼 당장……!”
“잠깐 기다려. 그렇게 서두르지 마.”
곧장 전서구를 날리려고 하는 중2병을 나는 황급히 제지했다.
이걸 보내면 비스의 수장은 반드시 뭔가 액션을 취할 거다. 그리고 그걸 이용하기 위해서는…….
“가시는 건가요?”
중2병과는 다르게, 역시 척하면 척이로군.
내 다음 행동을 금방 알아챈 천사님에게, 나는 미안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응. 미안해. 오자마자 금방 이렇게 가게 돼서.”
오늘도 성실하게 이 구미호 마을에서 언제 올지 모를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던 천사님한테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으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하지만 천사님은 오늘도 그저 천사 같은 미소만을 지어 주셨다.
내 두 손을 한데 모아서 살포시 포개 잡은 천사님은, 끝까지 배웅해주시려는 건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럼 구원씨. 갈까요?”
응? 처, 천사님? 지금 뭐라고?
“……텔레포트 마법진까지 같이 가자는 거지?”
“아니요.”
아니.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하아……. 하긴. 플리투스로 향할 때도 중2병이랑 둘이서만 가는 걸 엄청 반대했었지.
금방 돌아올 거라는 얘기로 어떻게든 무마시키고 간 거였고, 그래서 이번에도 이대로 은근슬쩍 가려던 거였는데. 역시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넘어가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대화는 불가피한가.
“레이아. 우리는 지금부터 비스로 갈 생각이야. 하지만 레이아도 알다시피 비스는 여자가 함부로 돌아다니기에…….”
“구원씨.”
그렇지 않다는 거, 구원씨도 잘 아시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눈속임 같은 말은 하지 말기에요.
그저 이름을 부른 것뿐인데도, 천사님의 목소리는 그런 말이 되어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나도 모르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게 되는 것 같은 목소리라고 할까, 진짜 우리 천사님은 진짜 천사보다도 더 천사 같아서 가끔 곤란하다니까. 진짜 여신 상대로도 이런 기분은 절대 되지 않는데.
“잠깐 둘이서만 얘기할까?”
천사님을 설득하려면, 제대로 상황을 이해시킬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얘기는, 중2병한테 들려줘서 그다지 좋을 게 없는 얘기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잠시 중2병을 기다리게 하고 천사님과 둘이서 방을 빠져나왔다.
“그래. 레이아 말대로, 내게 굴복된 여자인 척하면서 돌아다니면 비스를 돌아다니는 것 자체는 문제 될 게 없어. 하지만 레이아. 생각해 봐. 그런 세계잖아. 아무리 남의 여자라고 해도, 다른 놈들이 레이아한테 어떤 시선을 보낼지는 뻔하잖아? 그것도 레이아처럼 매력적인 여자라면 더더욱 그래.”
“매, 매력적이라니……구원씨도 참…….”
“아니. 레이아는 자각이 너무 부족해. 위에서도 레이아가 내 여자라는 걸 모두가 알고, 이제는 성녀이기까지 하니까 아무도 안 건드리는 것뿐이지. 레이아는 사실 남자라면 눈이 안 돌아가는 게 이상할 정도로 매력적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런 레이아가 남자에게 굴복한 여자라는 신분으로 돌아다닌다고 생각해봐. 이상한 시선을 보내는 놈들만 있으면 다행이지, 혹시 자기들한테 빌려달라고 하는 개……그런 놈들까지 나올지도 모른다고!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런 꼴은 절대로 못 봐!”
상상한 것만으로도 욱해서 나도 모르게 욕까지 튀어나올 뻔했잖아.
“구원씨. 진정해주세요.”
내가 화를 주체 못하고 씩씩대면서 말하자, 레이아가 내 어깨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날 진정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걸 보니, 내 말이 상당히 와 닿긴 한 모양이다.
사실 이걸 노리고 감정적이 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 된 것 같군. 이대로 살짝만 더 강하게 나가면, 레이아도 분명 내가 중2병과 둘이서만 가려는 이유를 알아줄 거야.
“이게 진정할 일이야!? 심지어 레이아는 남장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레이아가 나랑 같이 비스에 갈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고!”
그래. 차라리 다른 애들이 같이 가겠다고 했으면, 어떻게든 남장을 시도라도 해봤을 거다.
하지만 레이아만큼은 안 되잖아? 우리 애들 중 남장이 제일 안 어울리는 사람을 딱 한 사람만 꼽으라면, 아마 만장일치로 레이아가 꼽힐 거다.
이유는 물론……말 안 해도 알잖아? 저 존재감을 지울 수 있는 남장 따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런 걱정이라면 하지 않으셔도 괜찮은걸요.”
응? 레이아? 뭔가……같이 안 가겠다고 하는 말 앞에 덧붙이는 말치고는 말투가 묘하지 않아?
“후훗. 이걸 봐주세요.”
내 감정이 그대로 표정에 드러났는지, 레이아는 쿡쿡 웃으며 말했다.
오랫동안 준비한 장난이 성공한 것 같은 표정. 저런 표정마저도 아름다우시지만,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에잇!”
묘하게 힘 빠지는 기합성과 함께 펄쩍 점프해서 뒤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도는 레이아. 그러면서 그 황금빛 꼬리가 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고, 좁은 복도에서의 공중제비에도 균형을 잃는 일 없이 사뿐하게 착지한 레이아는 그 거대한 가슴을 출렁……어? 어라? 이상하다?
믿기지 않는 눈앞의 현실에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해봤지만, 눈물이 날 정도로 눈을 비벼대도 눈앞의 광경이 변하는 일은 없었다.
“후훗. 어때요? 이렇게 하면……꺄악! 구, 구원씨!?”
아니야. 이럴 리 없어. 이래선 안 돼. 세상에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속으로 끊임없이 그렇게 되뇌며 손을 뻗어서 직접 만져보기까지 했지만, 손안에 느껴지는 건 그저 한없이 평평한 감촉뿐이었다.
어째서지? 어째서 이렇게 손이 쫙 펴지는 거지? 손안을 가득 채우던, 그러고도 넘치던 그 압도적인 감촉은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거야!?
“레, 레이아아아……!”
“꺄아악!? 구, 구원씨? 울지 마세요! 자, 여기요. 여기에 있어요.”
다리부터 힘이 풀려서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자, 레이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한번 공중제비를 돌더니 황급히 내 얼굴을 자신의 가슴으로 끌어안아 줬다.
이건……이 넘치는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포근한 감촉은…….
“훌쩍. 레이아……?”
“네. 구원씨. 저에요. 제 가슴……아응! 거, 거기에 있어요.”
쥐어짜듯이 가슴을 꽉 붙잡혀도 불평조차 하지 않고, 오히려 가슴을 더 내밀기까지 하면서, 레이아는 차분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진정하셨나요?”
당연히 진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이아의 가슴에 이렇게 얼굴을 파묻고 레이아가 뒷머리까지 쓰다듬어주고 있는 거다. 이러고도 진정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정신과의 상담이 필요한 인간뿐일 거다.
하지만 이렇게 진정하고 나니까, 조금 전 내가 보여준 행동이 엄청나게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당황했지만, 아무리 상실감이 컸다지만, 그런 모습을 보여버리다니.
“……응. 미안. 일단 변명 좀 하자면 말이지, 난 결코 레이아한테 가슴만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야. 단지 말이지. 단지 난…….”
“구원씨. 괜찮아요.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내가 생각해도 조금 구차한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레이아는 그런 변명마저도 전부 포용해줬다.
크흐흑……진짜 사랑합니다, 천사님.
“어머어머. 구원씨, 그사이에 어리광이 늘어나셨나요?”
“그럴지도. 역시 난 레이아가 곁에 있어줘야 하나 봐.”
“후훗. 그러면 허락해주시는 거죠?”
허락?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지. 아까의 충격이 너무 커서 잠깐 잊고 있었어.
“진짜로 같이 가려고? 아니. 그보다 아까 그거는 대체……?”
“후훗. 이것 말인가요?”
내게서 살짝 떨어진 레이아는, 다시 뒤로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아서 아까의 그 모습으로 변했다.
그 압도적인 가슴이 완전히 사라진, 아니. 그것뿐만이 아니다. 가슴이 제일 눈에 띄어서 그렇지, 잘 보면 가슴 말고도 많이 바뀌어있었다.
일단 머리카락이 짧아져 있었고, 구미호 특유의 귀와 꼬리도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얼굴도 왠지 평소보다 조금 각이 지고 옷 위로 보이는 몸선도 왠지 모르게 튼실해 보이는 것이…….
“남자?”
“네! 남자로 변했어요!”
목소리까지도 살짝 중성적인 느낌으로 변했잖아!? 설마 아래쪽에 달려있기까지 한 건……아, 아니. 그런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그건 아닌 것 같아.
“대체 어떻게 한 거야?”
“후훗. 실은 구미호의 능력 중에는 모습을 바꾸는 능력이 있었어요!”
내가 아까처럼 당황하지 않는 걸 보자 안심했는지, 레이아는 장난이 성공한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이면서 신 나게 설명해줬다.
아마 꼬리가 있었다면 좌우로 열심히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건 그렇고 변신 능력인가. 확실히 구미호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능력 중 하나지.
그러고 보니 레이아의 종족 스킬 창에서 본 기억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스킬 활성화가 아예 안 되어 있어서 적당히 넘어가 버렸지만 말이다.
아, 그럼 설마 요즘 들어서 천사님이 틈만 나면 구미호 마을에 내려왔던 것도……?
생각해 보니까 레이아가 구미호 마을에 자주 내려온 시기가, 내가 돌아오고 나서 이제 비스를 공략하러 갈 차례라고 밝힌 시기와 딱 겹치잖아? 이렇게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눈치를 못 채고 있었다니.
“네! 이곳에서는 필요 없는 능력인 만큼, 능력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분이 로엘씨 뿐이셔서…….”
역시 이걸 배우러 다닌 거였나.
나와 함께 다니기 위해 레이아가 뒤에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생각하니, 괜히 뭉클해지는 기분까지 들었다.
뭐, 저 장난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레이아는 그냥 날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몰래 연습한 것뿐이겠지만.
“하지만 그거, 오래 유지할 수는 있는 거야?”
“네! 2, 3일은 문제없이 견딜 수 있어요!”
뭐, 그야 그렇겠지. 종족 스킬도 일종의 고유 스킬 같은 거니까. 일반적 스킬과는 효율이 차원이 다를 거다.
디아나도 단신으로는 오래 쓸 수 없는 폴리모프를 바넷사는 꾸준히 유지하는 걸 생각해 보면 된다.
그렇다는 얘기는…….
“저도 구원씨와 함께 비스로 가고 싶어요! 남자 동료로!”
레이아의 제안은 반대할 이유도, 그리고 반대할 생각도 들지 않는 제안이었다.
나도 레이아가 험한 일을 당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반대한 것뿐이지, 그런 문제만 없다면 같이 가고 싶은 게 당연하잖아.
아까 말했던 난 레이아가 곁에 있어 줘야 한다는 건, 결코 빈말로 한 말이 아니라는 얘기다.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는 레이아는, 존재만으로도 내게 도움이 되니까.
비록 내 마음을 더욱 보듬어주고 치유해줄 그 가슴은…가슴…레이아의 가슴이 없다니….
“아, 지금은 이러고 있을 필요 없었네요.”
대체 얼마나 티가 났던 건지, 내가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천사님은 황급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주셨다.
치유된다. 특히 공중제비를 돈 반동으로 묵직하게 출렁이는 움직임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 모든 것을 평화롭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여자의 가슴을 자주 보는 남자일수록 평균 수명이 높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는 걸 언젠가 본 기억이 있는데, 이렇게 레이아의 가슴을 보고 있자니 알 것 같아. 그 연구 결과는 사실이야.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레이아의 가슴만 신경 쓴다는 얘기는 절대, 절대 아니지만!
“크, 크흠. 레이아. 아까도 말했지만.”
“괜찮아요. 오히려 기쁜걸요. 구원 씨가 제 원래 모습 그만큼 그…애착이 있으시다는…뜻이죠…?”
“당연하지이이!”
진짜 천사님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존재가 있을 수 있지!?
평소의 가련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물론, 지금도 말하면서 살짝 자신 없어져서는 내 눈치를 살짝 보며 마지막을 의문형으로 끝내는 모습까지, 진짜 모든 게 전부 다 사랑스러워!
“꺄악! 구, 구원 씨. 진정하세요.”
내가 몸에 달라붙어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자, 레이아는 너무 정열적인 대답에 오히려 자기가 더 당황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날 밀어내기는커녕 손으로 등을 살살 쓰다듬어 주시는 것이, 진짜 천사님은 최고야.
아무튼 이렇게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되어주시는 천사님의 동행은, 나로서도 두 팔 벌려 환영할만한 일이라는 거다.
게다가 천사님이 도움 될 만한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바프라나 플리투스를 공략할 때와는 다르게, 저쪽에 가서는 전투도 종종 일어날 예정이니까 말이야.
물론 이쪽 세계의 평균 실력과 내 지금 실력을 생각해 보면, 전투가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웬만해서는 별문제 없이 끝나겠지만.
그래도 역시 강력한 힐러가 한 명 동행하는 건 든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 레이아의 마음은 잘 알았어. 혼자서 이렇게까지 노력하고 있었다니. 지금껏 몰라줘서 미안해. 같이 가자, 레이아!”
“아니요. 제가 숨긴 거니까요. 구원 씨가 미안해하실 이유는…정말인가요!?”
여느 때와 같이 따뜻한 말을 해주며 날 다독이던 레이아는, 같이 가자는 말을 듣자마자 하던 말까지 멈추고 꼬리를 좌우로 맹렬히 흔들며 기뻐했다.
“응! 물론!”
설령 진심이 아니었다고 해도, 그렇게 환한 미소를 앞에 두고 실은 농담이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비정한 인간이 세상에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그렇게 해서 결국 비스 행에는 레이아도 동행하게 됐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면, 중2병 앞에서 레이아와의 거리감을 얼마나 조절할 수 있냐는 건데.
아니. 모처럼 여자 위에 서는 남자 컨셉으로 그렇게 분위기를 잔뜩 조성해놨는데, 이제 와서 레이아 앞에서 순한 양이 되어 치유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전부 허사가 될 우려가 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뭐,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으려나. 중2병도 눈치가 없는 녀석은 아니니까. 위쪽 세계에서의 내 여자와 내게 굴복한 여자는 취급이 다르다는 걸, 그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겠지.
위에서 감금되어 있었을 때, 이미 우리의 알콩달콩 한 모습을 몇 차례 보기도 했고.
“돌아왔군. 그럼 이제 편지를….”
빨리 편지를 보내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던 걸까? 중2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고 있었다.
저 녀석은 저러면 자기가 수상해 보일 거라는 자각이 없는 걸까.
그럴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서로의 입장상 완전히 믿을 수는 없으니 일단 나도 어느 정도 경계는 하고 있는데 말이야.
“응? 그 사람은…?”
아무튼 그렇게 방안을 서성이던 중2병은, 다시 방으로 들어온 우리 모습을 보고는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사람이라니. 아까까지도 방에 같이….
“후훗. 모르시겠나요?”
레이아. 또 어느새 변했었어? 수인족 특유의 사뿐사뿐 한 발걸음 때문일까? 분명 또 변신하려고 공중제비를 한 바퀴 돌았을 텐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어.
“그 말투…서, 설마 가슴 큰 사제!?”
“가, 가슴 큰….”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이번에는 살짝 충격을 받았는지, 천사님은 살짝 비틀거리며 내 팔에 몸을 기댔다.
…천사님이 몸을 기댔는데 팔에 풍요로운 감촉이 느껴지지 않다니. 진짜 적응 안 되네.
“너도 무성별자였어!? 하지만 구미호는 여자밖에 없는 게…아니. 혹시 여자밖에 없다는 뜻이 그런 뜻이 아니라….”
그리고 팔에 느껴지는 위화감에 내가 잠깐 반응하지 못한 사이에, 중2병은 또 특유의 망상을 부풀리면서 이상한 오해를 하기 시작했다.
대체 이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런 오해를 하는 건지. 무성별자라는 게, 여자가 돼도 다시 무성별자 때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였어? 아니잖아?
진짜 저 녀석은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꼭 저렇게 이상한 망상을 한단 말이야.
아무튼 저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또 폭주하겠군. 그렇게 되기 전에….
“바보냐. 그럴….”
“그, 그럼 혹시 나도 여자가 되면…가슴이 그렇게 커질 수도 있다는…건가?”
좋아. 그냥 내버려 두자. 왠지 재미있을 것 같으니까.
자신의 평평한 가슴을 슬쩍 내려다보면서 묘한 표정을 짓는 중2병의 모습에, 나는 빠르게 그렇게 결론 내렸다.
그리고 그냥 내버려 두는 걸로 그치지 않고 한술 더 떠서.
“그럴지도 모르지. 흔히들 주무르면 커진다고 하니까 말이야.”
이렇게 맞장구까지 쳐줬다.
옆에서 레이아가 “구원 씨. 그러다가 정말로 믿으시겠어요.” 라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속삭여줬지만, 괜찮아. 믿으라고 하는 말이니까.
뭐, 저 녀석이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가슴을 달고 싶어지는 게 아닌 이상, 이 오해가 뭔가 커다란 사건으로 발전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재미있잖아?
“그러고 보니 네 여자는 다…그 마법사는 가슴을 안 만져줬어?”
쟤가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큰일 날 소리를 하고 있어! 너 진짜 이 자리에 디아나가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디아나는 엘프족이라 성장이 느린 거야. 다 크면 레이아한테 크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커질걸.”
우리 디아나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있는 힘껏 디아나의 가슴을 두둔해줬다.
사실 내가 한 말이 딱히 거짓말도 아니잖아?
“그런 거야?”
“그런 거야. 그런데 묘하게 여자 가슴에 관심이 많잖아? 아직 남자도 못 된 주제에, 여자한테 성욕은 느끼는 건가?”
“어!? 그, 그게…다, 당연하지! 난 언젠가 남자가 될…!”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도, 중2병은 있는 힘껏 허세를 부렸다. 누가 봐도 그렇지 않다는 게 보이는, 그런 허세를.
성욕은 느끼지 못했지만, 성욕을 느끼는 남자가 되고 싶다. 라는 걸까?
내가 그런 식으로 여자를 굴복시키는 걸 봤으니, 남자가 되고 싶어 하는 저 녀석으로서는 그런 것에 동경하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성욕을 느끼는 건 본능이니까 상관하지 않겠지만, 내 여자한테 성욕을 드러내지 마라. 네가 주제넘게 내 것을 넘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장난스러운 분위기에서 갑자기 돌변해서, 나는 일부러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며 중2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다리 사이를 향해, 주저 없이 손을 집어넣었다.
“히극…!?”
당연히 중2병은 다리를 황급히 오므렸지만, 이미 내 손은 다리 사이에 제대로 파고들어 간 후였다.
바지 위로도 정확히 중2병의 음부 위치를 파악해낸 나는, 입구 쪽을 손끝으로 강하게 누르면서 중2병의 귀에 속삭였다.
“넘볼 수 없는 몸으로 만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겠, 흐읏…알겠으니까아….”
살짝 겁만 준 건데도 다리를 심하게 떨면서, 중2병은 거의 애원하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알았으면 됐어. 나도 약속은 깨고 싶지 않으니까. 서로 조심하자고.”
“흐아앗…하앗…하앗….”
내가 떨어지고 나서도, 중2병은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고 그저 숨을 고르기에 바빴다.
아무리 그동안 한 게 있다지만, 보통 저렇게까지 흐트러질까? 진짜 저런 모습만 보면 언제 내게 다리를 벌리고 애원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이야.
보면 볼수록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다.
뭐, 어찌 됐든 잘 됐지. 저 모습을 보아하니, 저 녀석 앞에서 레이아와 알콩달콩한 모습을 보인다고 해도, 쟤가 날 만만히 보거나 딴마음을 먹지는 않을 것 같지는 않으니까.
사실 이걸 확인하려고 일부러 화난 척을 한 거였다.
그렇잖아? 어차피 무성별자라느니 남자가 되느니 하는 건 다 헛소리고, 이 녀석은 결국 여자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내가 얘가 우리 애들 가슴에 관심 좀 가진다고 해서 그렇게 갑자기 화낼 리가 없잖아?
이 녀석의 반응을 살피고 덤으로 가볍게 경고해줄 생각이었던 것뿐이다.
그리고 또 하나.
“구원 씨….”
레이아에게 맛보기를 보여줄 생각도 있었다.
이 녀석한테는 앞으로도 종종 이런 식으로 경각심을 일깨울 일이 있을 거다. 그리고 앞으로 동행하게 될 레이아 역시고, 그 모습을 종종 보게 될 거다.
나도 내 여자 앞에서 다른 여자 상대로 이러는 모습 같은 건 웬만하면 보여주고 싶지 않지만, 이것만큼은 앞으로의 계획상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니 만약 레이아가 지금 내 모습을 못 견뎌 하는 것 같으면….
“줄리안 씨라면 분명 괜찮을 거에요. 성실한 분이신걸요. 그렇죠, 줄리안 씨?”
뭐, 그럴 리가 없었지만 말이야.
우리 천사님은 이래 봬도 내가 다른 여자와 자는 걸 처음 허락해준 사람이자, 다른 여자들과의 하렘 플레이도 처음으로 주도했던 사람이니까 말이야.
나긋나긋하고 부드러운 겉모습과 행동 때문에 착각하기 쉽지만, 우리 천사님도 마냥 연약하기만 한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거다.
“으, 응….”
레이아에게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그러는 것처럼, 중2병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시선에서 남자가 여자한테 품는 것과는 또 다른 묘한 감정이 느껴지는 것 같은데…뭐, 우리 천사님이니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나.
“그리고 하나 더 조심할 게 있어. 앞으로 레이아도 우리와 같이 다닐 거야. 이 모습으로, 너와 마찬가지로 남자 동료로서. 무슨 말인지 알지?”
“아, 아아. 아예 여자 취급하지 말라는 거지? 알겠어.”
“그래.”
진짜 이런 걸 보면, 눈치가 없는 녀석은 절대 아닌데 말이야.
아무튼 대충 얘기는 일단락된 것 같으니, 이제는 정말로 움직이어야 할 때다.
“자, 그러면 곧장 비스로…가기 전에, 우선 디아나한테 얘기해야겠네. 마을에 내려가 있다고 했지?”
“네. 제가 다녀올게요.”
그렇게 레이아가 데려온 디아나에게, 나는 다시 한번 레이아와의 동행 경위를 설명했다.
뭐, 설명이라고 해도, 레이아가 그동안 구미호 마을에서 변신술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걸 디아나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라, 얘기는 상당히 간단하게 끝났지만 말이다.
“그러면 바로 출발하려는 겐가?”
“응. 그럴 생각인데.”
뭔가 문제라고 있어?
그런 의미로 디아나를 쳐다보자, 디아나가 갑자기 한숨을 포옥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번에 가면 또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이니, 제대로 인사는 하고 가게.”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일단 시치미를 떼 봤지만, 너무 갑자기 허를 찔린 바람에 제대로 대처가 안 됐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아니. 그게 말이지. 당연히 나도 얼굴 보고 인사는 하고 싶지.
하지만 전에 사라를 필두로 바프라에 있는 삼인방이 끈질기게 매달렸던 걸 생각해보라고. 이번에야말로 진짜 어디 못 가게 감금당해도 이상하지 않을지 몰라.
“레이아 양이 동행한다면 지난번처럼 크게 붙잡는 이는 없을 걸세. 바프라에 보낼 때도 실비아 양을 동행시키는 것으로 다들 넘어가 주지 않았는가.”
디아나도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거겠지. 다시 한번 포옥하고 귀엽게 한숨을 내쉰 다음, 디아나는 그렇게 말해줬다.
“그렇게 티 났어?”
“음! 이 몸의 눈을 속이려면 아직 천 년은 이르네.”
스케일 엄청 크네. 그럴 땐 보통 백 년이라고 하지 않아?
그야 디아나한테는 천 년도 스케일 작게 줄여 말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몸에게도 천 년은 짧지 않네!”
우왓. 깜짝이야. 뭐야 이 토닥토닥 어택은!? 속마음을 읽고서 하지도 않은 말에 태클 거는 건 너무하잖아!?
“크윽!? 커헉!”
“아픈 척도 하지 말게! 자네가 무릎까지 꿇을 정도로 아플 리가 없지 않은가! 오히려 이 몸의 주먹이 더 아프네!”
아니. 난 그저 분위기 맞춰준 것뿐인데, 이것까지 혼내는 건 진짜 너무하지 않아?
뭐, 눈물 글썽이면서 주먹을 호호 부는 모습이 귀여우니까 봐줄 거지만.
디아나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나는 비스행을 미루고 일단 우리 애들한테 인사부터 하기로 했다.
인사하는 데 얼마나 걸린다고 비스에 가는 걸 미루기까지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디아나가 인사하고 오라고만 했다고 해서 정말로 다녀오겠다는 말만 하고 갈 리가 없잖아?
어차피 당장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급한 일도 아니고 말이야.
세이지가 우리에게 붙잡힘으로써 비스와의 연락이 끊기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스가 곧장 이변을 알아채고 대응해오지는 않을 테니까.
무엇보다도 어차피 비스 공략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플리투스를 공략한 미리엘과 합을 맞출 필요가 있었다.
바프라 때처럼 어중간하게 국경 지대만 장악해서 적당히 말을 맞추는 것으로는 넘어갈 수 없다.
비스의 성향을 생각해 보면, 바프라처럼 플리투스에 자연스럽게 합병되는 형식으로 전쟁을 멈출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불사할 테니까.
즉, 내가 비스를 장악하는 것보다도 더 먼저 플리투스를 완전히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그러니 미리엘에게 하루라도 더 시간 여유를 주기 위해 쉬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쉬어가는 것도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뭐, 그냥 내가 우리 애들이랑 같이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싶다는 것이, 아무래도 제일 큰 이유이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그런 이유로, 나는 레이아와 중2병을 대동하고 일단 위로 올라왔다.
마음 같아서는 디아나도 같이 오고 싶었지만, 누구 한 명은 거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안 되니 어쩔 수 없지. 디아나는 나중에 따로 인사해야지.
우선은 위에 있는 넷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겠지.
“어머, 빨리 돌아왔네?”
제일 처음 얼굴을 보게 된 건 역시나 길드의 안내 데스크에 있는 레이첼 누님이었다.
이렇게 빨리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조금 전까지 안내원으로서 영업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봤던 만큼, 나만을 위한 미소라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든다고 할까.
“응. 생각보다 일이 훨씬 잘 풀려서.”
설마 나도 세이지를 그렇게 빨리 추적해내고, 또 세이지가 그렇게 가까이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최소 한 달은 예상하고 있었고, 그래서 플리투스로 가기 전에 우리 애들을 설득시키는 것에 그렇게 애를 먹었던 건데, 그런 것치고는 너무 허무하게 일을 끝마치고 돌아오기는 했지.
“그럼 한동안은 여기에 있는 거니?”
“아니. 그게…얘기하자면 조금 길어지니까. 그 얘기는 이따가 집에 가서 하자.”
혼자 안내 데스크를 독차지하고 앉아서 하루 종일 떠들 수도 없는 일이니, 나는 일단 그렇게만 얘기했다.
내 뒤에서 줄 서 기다리는 모험가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거기에 레이첼 누님의 일을 방해하는 꼴도 되어 버릴 테고.
“그러니…응. 그러면 오늘은 빨리 돌아갈게.”
반차라도 쓰려는 걸까?
아무튼 누님과는 일단 그렇게 말 그대로 간단한 인사만 하고, 우리는 길드를 뒤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구원 씨. 저희는 먼저 돌아가 있을게요.”
그리고 길드를 나와서는 레이아가 내 신경을 써줘서 중2병을 데리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준 덕분에, 혼자 남은 나는 곧장 다음 인사를 하러 갔다.
그렇군. 우선은….
***
“으하응!? 자, 자기. 돌아오자마자 너무…흐응…격렬해애!”
“네가 섹스에 집중 못 하고 이상한 말이나 하니까 그렇잖아. 성욕 과다 체질에서 벗어났다고 벌써부터 이러기야?”
“이상한 말이 아느햐앙!?”
“네가 섹스할 때 섹스 말고 다른 얘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한 거야.”
“너무해애….”
펠리시아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가 잠깐 멈추자 빨리 더 움직여달라는 듯 허리를 은근슬쩍 움직였다.
뭐, 그런 느낌으로 점심까지 펠리시아와 인사 겸 섹스를 즐기고 나서, 나는 이번에는 마틸다를 찾아 신전으로 갔다.
말해두지만, 신전에서는 섹스 같은 거 안 하고 그냥 평범하게 마틸다의 곁에 있기만 했다.
지난번에 찾아왔을 때 신전에서 섹스하다가 그대로 여신 강림 되면서 난리가 났었는데, 연이어서 또다시 섹스로 소동을 일으킬 용기는 아무리 나라도 없으니까.
그래서 마틸다가 성기사들을 훈련시키는 모습을 보기도 하고, 오랜만에 소피아 대사제와 차를 마시면서 대화도 나누면서, 정말로 저녁 시간까지 조용히 있다가 왔다.
그리고 저녁 식사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돌아온 저택에서는, 식사 전까지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집사님의 뒤를 졸졸 쫓아다니면서 얘기를….
“구원 님.”
계속 따라다니는 내게 살짝 짜증이 난 건지, 드디어 걸음을 멈춘 바넷사가 날 돌아봤다.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아니.”
“…하?”
바넷사야. 농담 좀 했다고 분위기 너무 험악해지는 거 아니니?
너도 내 성격 잘 알잖아. 그냥 이유 없이 너와의 대화를 거부할 내가 아니라는 것 잘 알면서 그래? 당연히 이 뒤에 이어질 말이 있지.
“또 집사로서 충고하려는 거라면, 안 들을 거야. 난 지금 집사 바넷사가 아닌, 내 애인 바넷사하고 얘기하고 싶은 거니까.”
“후우….”
표정 자체는 무표정에서 변하지 않았지만, 명백하게 질렸다는 반응이었다.
야. 너무 그렇게 매정하게 굴면 나 진짜로 상처받는다? 일단 나도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거라고. 내가 무슨 괜히 네 일을 방해하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뭐, 이런 얘기를 무시하지 않고 이렇게 걸음을 멈춰 세워서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바넷사로서는 장족의 발전일지도 모르겠지만.
“너도 알다시피 이번에 가면 또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잖아?”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의 눈썹이 꿈틀하고 한차례 움직였다.
이유가 어찌 됐든 한창 일하는 도중에 내 애인으로서 대화하자고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걸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나도 포기할 수….
“구원 님의 여자로서 할 말이 있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어, 어? 어엉….”
어라? 이건 내가 예상했던 대답이 아닌데?
너무 갑자기 허를 찔리는 바람에 바보 같은 목소리를 내고 말았잖아.
“무슨 문제라도?”
“아니. 내 애인으로서 말한다는 거 맞지?”
“네.”
내가 재차 그렇게 확인하자, 바넷사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고 확인시켜줄 셈인지 손에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어서 자기 가슴 주머니에 꽂았다.
그리고 단정히 매고 있던 자신의 넥타이를 쭉 잡아당겨 풀더니, 자신의 목까지 단단히 채워진 셔츠 단추까지 하나 풀었다.
“이렇게 하면…으읍!?”
그리고 그 모습을 멍하니 지켜보던 나는, 정신을 차려 보니 바넷사를 벽에 밀치고 그 몸에 바짝 밀착해서는 그대로 그 입술을 훔쳤다.
“지금은 내 여자지?”
“…네.”
갑자기 이렇게 밀어붙여서 또 차가운 시선을 보낼 줄 알았는데, 바넷사는 의외로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여줬다.
일하던 중에 갑자기 내 여자로서 행동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거지? 오늘의 바넷사는 행동 패턴이 평소와 너무 다른데?
뭐, 좋아. 모처럼 이렇게 바넷사가 고분고분 행동해주는 거다. 나는 생각하는 건 뒷전으로 미루고 우선 욕망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럼 지금부터 같이 내 방에 가자고 하면, 따라올 거야?”
“그전에 한마디 해도 괜찮겠습니까?”
그 말은 즉, 얘기만 다 들으면 따라오겠다는 거야?
아니. 그전에 우선은 얘기를 듣자.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뭔가 할 얘기가 있다고 했었지.
이렇게 내 여자로서 얘기하겠다는 모습을 보면, 평소처럼 ‘디아나 님의 이름에 먹칠이 되지 않도록 행실을 바르게 하십시오.’ 같은 얘기를 하려는 것도 아닌 모양인데.
“당연하지. 내 여자와의 대화는 언제나 환영이야. 무슨 얘긴데 그래?”
“이것으로 마지막인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건 자제해주십시오.”
“으, 응?”
가볍게 건넨 말에 돌아온 대답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진지한 내용이었다.
나는 가슴속에서 타올랐던 욕망을 억누르고, 진지하게 바넷사와의 대화에 임하기로 했다.
“바넷사. 확실히 난 좀 들떴을지도 몰라. 너도 알다시피….”
“알고 있습니다. 구원 님은 언제나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넘쳐흐르는 사람이니, 분명 이번에도 완벽하게 마무리 지을 생각뿐이겠지요.”
어? 지금 나 칭찬받은 거야? 갑자기 이러니까 적응 안 되잖아. 오늘 진짜 왜 이래? 칭찬 맞지? 내가 착각하는 거 아니지?
뭐, 그런 것보다. 언제나 긍정적이고 자신감 넘쳐흐른다는 부분은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일단 뒷말은 맞는 말이었다.
그야 그렇잖아? 좋든 싫든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럴 거면 괜히 지레 겁먹고 움츠러드는 것보다, 완벽하게 끝낼 각오로 부딪히는 게 훨씬 나으니까.
“하지만 저희 같은 평범한 사람은 구원 님과 다릅니다. 이 일은 신까지 관여된, 수천 년 동안 이루지 못했던 대업입니다. 그런 일이 최종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의식하게 하시면, 저희는…이런 곳에서 그저 구원 님이 무사히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것밖에 없는 저는….”
그 얼굴을 덮고 있는 무표정의 가면은 깨지지 않았지만, 바넷사가 얼마나 분해하고 있는지는 나한테도 절실하게 느껴졌다.
이렇게 피가 안 통해서 하얘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고 있으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잖아.
아마 지금도 무표정을 계속 유지하고 있는 건, 단순히 저 표정 외에는 표정 짓는 방법조차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겠지.
하여간 이 녀석은…어쩐지 오늘따라 상태가 이상하다 했더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이런 곳에, 기다리는 것밖에 인가. 이거 진짜 우리 집사님이 한 말 맞아? 집사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건….”
“적어도 나는 계속 자부심을 느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사람은 돌아갈 곳이 있어야 더 힘낼 수 있다는 말도 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바넷사가 여기에서 내가 돌아올 곳을 지켜주고 있으니까, 나도 안심하고 아래에 내려갈 수 있는 거야. 그런 걸로는 부족해?”
“…….”
저기, 바넷사씨? 저 지금 멋들어진 말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죠?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시면, 상당히 쪽팔…아니. 분위기가 이상해지는데 말이지요.
에, 에잇! 바넷사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난 나대로 강제로라도 대답을 듣고야 말겠어!
“뭐, 조금 진부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렇군요.”
“긍정했어!? 이 녀석 지금 긍정한 거야!? 빈말로라도 아니라고 해줄 줄 알았는데!”
“죄송합니다. 솔직해서.”
“전혀 위로가 안 돼…아니! 잠깐만! 지금 그거 위로도 아니잖아!? 너 말이야! 솔직한 게 언제나 미덕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큰 착각이야! 때로는 상냥한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농담입니다.”
그러니까 네 농담은 농담으로 안 들린다니까! 적어도 표정이라도 좀 바꾸면서 농담을 해라!
아니. 그보다, 대체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농담이었다는 거야!? 무서워서 물어보지도 못하겠네!
“진정하셨습니까?”
억울해서 어깨까지 들썩이며 씩씩거리고 있자, 바넷사가 내 어깨에 사뿐히 손을 얹고 내 얼굴을 빤히 들여다봤다.
나는 그 손에서 떨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서는, 숨을 고르는 척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 아무튼. 네 말이 무슨 말인지는 이해했어.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는 거지?”
바넷사에게 지적당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확실히 바넷사뿐만 아니라 다들 모습이 조금 이상하기는 했다.
그 섹스 좋아하는 서큐버스 공주님이 섹스 도중에 갑자기 “그런데 자기, 그거 알아? 이 도시는 모험가들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군이 약하다는 건 절대 아니야. 오히려 강한 모험가가 난동을 부려도 제압할 수 있게,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강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야. 자기가 원한다면, 그 군대를 지원해 주는 것도…아흐응!” 같은 얘기를 해댔으니까 말이야.
그때는 그냥 허리를 더 강하게 흔들면서 섹스에나 집중하라고 말하고 말았지만, 생각해 보니 펠리시아도 어떤 식으로 끝나든 이걸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불안해서 그랬던 건지도.
그 펠리시아가 그런 감정을 품다니 믿기지 않았지만, 역시 날 때부터 여신을 믿고 자란 애들과 난 여신의 사명이 끝을 향해간다는 것에 대한 감정이 전혀 다른 걸까?
“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곧바로…지금부터 내 방에 같이 갈래?”
경박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말투로, 바넷사의 허리를 꽉 끌어안으면서 그렇게 말하자, 바넷사의 입에서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아무리 그렇게 보란 듯이 한숨을 쉬어도,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나아졌다는 건 숨길 수 없다고. 뭐, 여전히 무표정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