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aint’s Dungeon Business RAW - Chapter (1092)
던전에서 성자가 하는 일 1199화
“에에…하지만….”
“기분 좋게 자고 있으니 깨우기 미안하다면, 기분 좋게 깨우면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분명 좋아할 겁니다, 이 사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음의 똑 부러지는 목소리와, 여자치고는 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
앞뒤에서 들려오는 전혀 다른 느낌의 두 목소리는 미묘하게 어울려서, 마치 좋은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을 선사해 줬다.
거기에 앞뒤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까지 더해지니, 이게 바로 천국인가 싶을 정도였다.
“그건 그렇겠지만요…바넷사 씨는 부끄럽지 않으신가요?”
“부끄럽습니다.”
“부, 부끄러우시군요….”
아무튼 기분 좋은 건 기분 좋은 거고, 둘은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걸까?
확실한 건, 이 둘은 지금부터 내가 좋아할 만한 행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자는 척하고 있어야지. 얘기를 들어보니 내가 깨어나면 그만둘 것 같으니까.
“슬슬 시간이 아슬아슬하지 않습니까? 이 이상 지체하면 지각하실 겁니다.”
바넷사의 얘기를 듣고 나도 눈을 감은 채 시야 구석에 시계만 띄워서 확인해 보니, 확실히 평소보다 훨씬 늦은 기상 시간이었다.
어제는 눈이 안 보이는 만큼 더 불타올라서, 결국 날이 밝아오기 직전까지 했으니까 말이야. 이 시간에 일어나도 정작 수면 시간은 평소보다 짧을 정도였다.
뭐, 힐링 섹스 덕분에 피곤하지는 않지만.
“아앗…저, 정말이네요. 그, 그럼…으, 으응…하으….”
누님도 시계를 확인한 거겠지.
당황한 것처럼 몸을 파닥파닥 움직이더니, 누님은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다만 자세가 자세이니만큼 쉽게 몸을 일으킬 수 없는 모양이었다.
옆을 보고 누워 있는 내 품에 정면으로 마주 보고 누워서 삽입까지 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보통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지만, 내 물건이 보통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게다가 누님은 날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움직이고 있다 보니, 필연적으로 그곳이 엄청나게 비벼지는 모양새가 됐다.
“응…흐읏…!”
하지만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노력한 끝에, 레이첼 누님은 겨우 삽입을 풀 수 있었다.
“하앗…하앗…그럼 이제…바넷사 씨?”
“…아무래도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습니다.”
“네?”
“으하악!?”
“꺅!?”
바넷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귀와 유두, 그리고 물건까지 세 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쾌감의 전류가 휘몰아쳐서,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들썩이고 말았다.
“가, 갑자기 뭐 하는 거야!?”
“일어나셨습니까.”
조금 전에 내 귀를 핥고 손으로 유두를 간질이면서 다른 손으로 물건까지 흔들어준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냉정한 얼굴.
심지어 뿔도 꼬리도 사라져서, 진짜 이게 어젯밤에 본 그 여자랑 동일인물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깨어나 있었니?”
“응? 아, 아니. 그게…가만히 있으면 좋은 걸 해준다는 얘기가 들려서.”
“정말…안 되잖니. 누나, 정말로 늦을지도 모르니까.”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누님은 서둘러 옷을 입기 시작했다.
서, 설마 이대로 가시려는 건가!? 이걸 이렇게 방치하고!?
“자, 잠깐!”
“응?”
“그…참고로 만약 내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뭘 해줄 생각이었어?”
“궁금한 마음은 알겠지만, 얘기를 들으면 더 간절해지지 않겠니?”
크윽…드, 듣고 보니.
“그런 것보다, 누나 이제 출근해야 하는데….”
“아, 응. 그렇지. 잘 다녀와.”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자기주장만 하다가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어나서 가볍게 키스를 하며 인사하자, 누님은 보답으로 환한 미소를 지어주셨다.
“구원이도 잘 다녀와. 오늘 내려가는 거지?”
“아, 응. 조금 이따가 보게 될 거야.”
“응. 그럼.”
까치발을 하고 내 어깨를 살짝 안으며 뺨에 가볍게 입술을 맞춰준 다음, 누님은 갑자기 무릎을 꿇고 내 물건 옆면에 쪽하고 키스를 했다.
그리고 동시에, 침대에 있던 바넷사도 내려와서 반대쪽에 가볍게 입술을…서, 설마. 안 일어났으면 해주려는 게 이거였나!?
“후훗. 이따가 봐.”
아플 정도로 딱딱해진 내 물건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난 누님은 살랑살랑 손을 흔들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너, 너무해…진짜 더 간절해졌잖아.
“후우…그럼 저도 이만….”
그리고 레이첼 누님이 만든 흐름에 동승하듯이, 바넷사도 자연스럽게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으려고 했지만.
“어딜 가려고.”
그렇게 가만히 놔둘 내가 아니었다.
누님은 출근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쳐도, 넌 아니잖아.
“저도 일이 있습니다.”
“뻔뻔하게 말해 봤자 안 통한다. 나랑 같이 밤을 보낼 거면서, 네가 그 정도 준비도 안 했을 리가 없잖아? 아침에는 조금 늦어도 괜찮도록 전부 제대로 준비해놨지?”
“…….”
역시나. 대답을 못 한다는 건, 긍정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지.
멋대로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넷사를 일으켜서 다시 침대 위로 눕혔다.
“곧 중요한 일을 하러 가실 분이 아침부터 힘흐으을!?”
“네가 그런 말을 하기냐?”
마지막 같은 분위기 내지 말라고, 자기가 먼저 그렇게 말했던 주제에. 오히려 난 네 말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거라고.
나는 곧장 바넷사의 음부에 물건을 밀어 넣고, 그 얼굴 쪽에 바짝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 가린 채 하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보이는 건 더 좋네. 네 이런 표정도 볼 수 있고.”
“크흐읏…으응…!”
그렇게 차가웠으면서 넣자마자 바로 녹아 버린 바넷사의 얼굴을 한차례 쓰다듬어준 다음, 나는 입을 맞추며 그대로 허리를 움직였다.
“그럼 갈까?”
바넷사와 조금 늦게 아침을 시작한 나는, 같이 갈 둘과 합류한 후 곧장 구미호 마을로 내려왔다.
“조심하게. 그리고 레이아 양이 함께한다고 해서 연락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네.”
“그야 물론. 우리 디아나가 걱정하느라 늙으면….”
“이 몸은 아직 탱탱하네!”
바, 반응 엄청 빠르네. 진정해. 그냥 관용적인 표현이잖아. 이쪽 세계에는 그런 표현 없어?
그리고 젊은 걸 탱탱하다고 표현하는 거, 왠지…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뭐, 확실히 탱탱하네.”
나는 디아나의 말을 지적하기보다는, 그 말을 긍정해주는 길을 택했다.
“어딜 만지면서 말하는 겐가아!?”
그러다가 딱밤을 한 대 맞게 됐지만.
아니. 네가 탱탱하단 말을 하면서 자랑스럽게 앞으로 내미니까 만져본 것뿐이잖아.
그리고 너도 실은 그다지 싫지 않지?
두 팔을 X자로 만들어서 가슴을 가리면서도, 왠지 기뻐 보이는 디아나였다.
가장 자신 없는 곳을 칭찬받았을 때, 여자는 가장 기뻐한다는 건가. 오늘도 하나 배우고 가는군.
“뭐, 아무튼 다녀올게.”
“음. 몸조심하게.”
디아나의 뺨에 마지막으로 입맞춤을 해주고 나서, 나는 텔레포트 마법진으로 몸을 던졌다.
뭐, 그렇다고 해서 곧장 비스로 가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직 인사가 다 끝나지 않았잖아? 난이도만 따지고 보면, 오히려 지금부터가 진짜라고 해도 좋을 정도지.
나는 각오를 다지고 발걸음을 내디뎠다.
“좋아.”
“으, 응?”
하지만 모처럼 각오를 다진 보람도 없이, 바프라에 있는 셋은 너무도 간단하게 내 비스행을 허락해 줬다.
아니. 물론 디아나한테 미리 이렇게 될 거라고 듣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쉽게 승낙하는 거 아니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라 얘는 무조건 따라온다고 난리 칠 줄 알았는데.
“좋다고. 레이아도 같이 가는 거잖아?”
“응….”
“그러면 됐어. 레이아가 함께라면 구원은 그러지 말라고 해도 신중하게 움직일 테니까. 그리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야.”
아니. 그렇게 말하면 괜히 더 궁금해지는데.
하지만 사라는 내가 궁금해하는 걸 알면서도, 더 말해 줄 생각 없다는 듯 묘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뭐, 뭐야 저 미소는. 왠지 모르게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내 기분 탓인가?
“그런 것보다, 출발하는 건 밤이 되고 나서지?”
“응. 그럴 생각인데.”
아무래도 그림자 이동으로 넘어가는 게 제일 편하니까.
“그럼 레이아하고 그 사람도 여기에?”
“응. 창관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어. 왜?”
“그냥 좀 얼굴을 보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왠지 모르게 사라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중2병이 진짜 같이 다녀도 괜찮은 상태인지 확인하려는 거겠지. 사라 얘는 중2병이 내게 굴복한 이후로 한 번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만약 중2병한테서 뭔가 건수를 잡으면, 그걸 빌미로 내 비스행을 막으려는 건지도 모른다. 혹시 그래서 그렇게 쉽게 허락한 건가?
하지만 말이야, 사라야.
“왜, 왜 여기에 용사가…!?”
네가 얼굴을 보러 가면, 이렇게 된다고.
요즘 내가 계속 압박하는 바람에 약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착각하기 쉽지만, 중2병은 기본적으로 자기 실력에 자신이 있고 그만큼 겁도 없는 성격이다.
괜히 자기는 남자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괜히 처음 잡혔을 때 그런 식으로 반항을 한 게 아니라는 얘기지.
하지만 그 겁 없는 녀석이, 지금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아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흐으응. 정말로 길들였나 보네.”
아니. 지금은 내가 길들여서 저러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 너한테 겁먹은 거거든?
잊었어? 너 옛날에 중2병이 덮치려고 해서 진짜 남자인 줄 알고 제대로 두들겨 팼다면서.
물론 나는 그 모습을 직접 보지 못했지만, 바프라를 죽이기 전에 사라가 바프라를 어떻게 가지고 놀았는지 생각해 보면, 중2병이 어떻게 맞았을지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됐다.
“기, 길들여진 게 아니야! 협력 관계다!”
우와…저 녀석, 그래도 일단 반박은 하네? 진짜 의지 하나는 대단한 녀석이야.
하긴, 그러니까 내 성자 스킬에 맞고도 그렇게 오랫동안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협력 관계…가짜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내는 걸로 작전을 시작한다고 했었지?”
“아, 응. 디아나한테 들었어?”
“뭐, 그렇지. 아직 안 보냈다고 했지? 그럼…줘봐요.”
아주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행사하는 것처럼, 사라는 중2병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물론, 중2병 성격에 순순히 넘겨줄 리가 없었지만.
“화, 확인이라면 이미 성자가….”
“왜 그러죠? 어차피 다 아는 내용만 쓰여 있는 거니까, 별로 상관없잖아요?”
“그, 그래도 안 돼! 내가 협력하는 건 성자지 네가 아니야! 정 확인하겠다면 성자가…!”
“수상해.”
“무, 뭐!?”
사라가 그렇게 말하며 한 발자국 다가가자, 중2병은 그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사라가 또 한발 다가가고, 중2병은 또다시 뒤로 물러난다.
몇 번을 그렇게 반복한 끝에, 결국 중2병은 등이 벽에 막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는 곳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중2병을 몰아넣은 사라는, 소위 말하는 벽치기 자세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수상하다고 했어요. 잘 들어요. 저 바보는 사람이 너무 좋으니까 쉽게 믿었겠지만, 난 아니에요.”
사라야. 다 좋은데, 꼭 이런 때까지 오빠한테 바보라고 해야겠니? 나도 일단 중2병 앞에서는 쌓아놓은 위엄이라는 게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뭔가 분위기가 그럴듯해지고 있어서, 나는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니. 같은 비스의 비수인 세이지까지 나한테 넘긴 마당에 이제 와서 중2병이 날 배신할 리는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중2병이 당황하는 모습은 확실히 미심쩍었으니까.
사라 말대로, 떳떳하면 그냥 보여준 다음에 어디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냐고 반격할 수도 있을 텐데.
“하, 하지만….”
“힘으로 뺏어가기 전에 내놔요. 나한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으, 으으윽….”
거의 울먹이는 것 같은 표정으로, 중2병은 결국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왠지 사라가 나보다 중2병을 더 잘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까?
아, 아니. 저것도 전부 내가 미리 중2병의 기를 눌러놨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 응. 그렇게 생각하기로 하자.
“흥.”
아무튼 편지를 건네받은 사라는 곧바로 편지를 꺼내서 펼쳤고, 펼치기가 무섭게 묘한 콧소리를 냈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들리는 콧소리를.
“사라야?”
“비밀 문자가 쓰여 있어. 보통 사람은 알아볼 수 없게, 마나로.”
편지를 팔랑팔랑 흔들면서, 사라는 충격적인 말을 했다.
뭐라고? 즉, 진짜로 중2병이 배신을….
“자, 잠깐만! 아니야!”
내가 중2병에게 시선을 돌리자, 중2병은 두 손으로 황급히 자기 다리 사이를 가리면서 외쳤다.
상황과 자세가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지만, 중2병으로서는 나름대로 진지한 거겠지.
“뭐가 아니라는 거죠?”
“난 배신하지 않았어! 용사 넌 읽을 수 있으니까, 보면 알잖아!”
“흥. 이제 와서 그런 변명이 통할…뭐죠 이건?”
사라도 비밀 문자가 쓰여 있다는 것만 확인하고, 아직 내용은 확인하지 않았던 거겠지.
중2병이 그렇게 필사적으로 외치자, 사라도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용을 확인했고, 글자를 제대로 확인하자마자 더욱 묘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 위로 의문 부호를 띄웠다.
“이제 알겠지!? 생사람 잡는 것도 유분수지!”
중2병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이 발까지 동동 구르며 항변했다.
다만 사라와 벽 사이에서 은근슬쩍 빠져나와서는 내 등 뒤에 숨은 채 그러고 있는 바람에, 장난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아니. 그보다 왜 하필 내 뒤야? 사라가 화나면 무서운 건 알겠는데, 사라가 그럴 땐 나도 무섭거든?
다행히도 사라는 그런 중2병의 말을 철저하게 무시했다.
사라는 그저 편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내용을 수차례에 걸쳐서 다시 확인하듯이, 뚫어져라.
그리고 그렇게 확인한 끝에 결국 사라가 내린 결론은.
“구원, 그 사람 도망 못 가게 잡아!”
중2병과 제일 가까이에 있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본인도 이쪽으로 재빨리 달려오는 것이었다.
“으하으!? 자, 잠깐만! 뭔가 오해하고 있어!”
하지만 굳이 사라까지 달려올 필요는 없었다.
내가 중2병의 몸을 두 팔로 꼭 붙들어서 베어허그를 할 때까지, 중2병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몸을 꼼지락거리기는 했지만, 이 녀석의 능력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는 저항하는 축에도 안 들어가는 거지.
“오해? 제 눈에는 가족이나 가족만큼 친밀한 사람한테 쓰는 편지로 보이는데요? 보이는 글씨로는 위험하다. 사로잡힐 것 같다는 말을 썼으면서, 보이지 않는 글씨로는 안심해라? 곧 가겠다? 완전히 함정에 빠뜨릴 생각이잖아요? 뭐가 오해라는 거죠?”
“뭐? 가족?”
저 편지의 수신인은, 비스의 수장이다.
그런데 거기에 들어간 비밀 편지가 가족에게 쓴 것 같다는 얘기는, 다시 말해서 그 비스의 수장과 중2병이 가족이라는 얘기잖아?
“으윽!? 어, 얼굴! 얼굴 너무 가까워!”
내가 깜짝 놀라서 얼굴을 들이밀자, 중2병은 황급히 얼굴을 뒤로 빼며 발버둥 쳤다. 그래 봤자 그 허리는 내 팔에 단단히 안겨 있어서, 뒤로 빼는 것도 한계가 있었지만.
아니. 그보다 이 녀석, 아까부터 왜 자꾸 하반신을 미묘하게 꾸물꾸물 움직이는 거지? 가만히 좀 있어 봐. 지금이 그런 거 의식하고 있을 때냐?
“야. 줄리안. 내가 생각하기에, 넌 아무리 목적을 위해서라도 가족까지 배신하는 녀석은 아니야.”
이미 목적을 위해 비스를 배신한 녀석인데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직접 보고 판단한 중2병의 성격은 그랬다.
“으, 응…? 고마…워?”
“그리고 넌 비스의 수장과 가족관계지.”
“아, 아닌데?”
야. 아까부터 대답이 너무 가벼운 거 아니냐? 원래 나같이 가벼운 놈이 이렇게 분위기를 잡으면, 보통은 덩달아 진지해지게 마련인데 말이야.
하지만 중2병의 대답이 너무 가벼워서, 오히려 그게 더 믿음이 가는 면도 있었다.
자기가 정말로 당당하다고, 그리고 우리도 이해시킬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으니까, 이렇게 가볍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할까?
“그럼 설명해 봐. 저 편지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그게.”
하지만 내 생각과 다르게, 정작 설명을 요구하자 중2병은 머뭇거리면서 내 눈치를 봤다.
이 녀석,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못 한다는 건 아니겠지?”
“아, 아니야! 할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그게….”
“야.”
알 수 없는 이유로 계속 머뭇거리는 중2병의 귀에 나는 입을 가까이 가져다 대고 속삭였다.
“내가 강제로 네 입을 열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약속도 서로의 신뢰관계가 확실할 때나 지킬 수 있는 거야.”
설령 다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말을 우리 애들한테, 특히 사라한테 직접 들려줬다가는 무슨 말을 들을지 알 수 없으니까 말이야.
뭐, 내가 중2병의 귀에 입을 가져간 시점에서 이미 사라의 눈은 날카로워졌지만.
아니야, 사라야. 겉보기에는 내가 중2병을 끌어안고 뭔가 정답게 속삭이는 것처럼 보인다는 거 나도 인정해. 심지어 중2병이 이 녀석은 이렇게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대기까지 하니까 더 그렇게 보이겠지. 인정해. 인정하는데, 그런 거 아니니까 조금만 참아.
“으윽…아, 알겠어. 설명할게.”
내 협박을 들은 중2병은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 교환으로 사라의 동의를 구하고 중2병의 몸을 놔주자, 중2병은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는 심호흡을 한 다음 입을 열었다.
“우선 그 남자, 카이젤과 내가 가족이라는 건 오해야. 편지의 수신인은 그 사람이 아니니까.”
“그럼?”
“브레디…전에 말한 적 있잖아? 수장의 곁을 지키는 비스의 비수가 있다고. 어차피 전서구는 ”
당연히 기억하지. 내가 세운 비스 공략 계획은 전부 비스의 수장이 생각보다 겁이 많다는 걸 전제로 둔 계획인데, 비스의 수장을 겁쟁이라고 판단한 결정적인 근거가 바로 그거였으니까.
“그럼 그 사람이 네 가족이야?”
“가족…유일하게 가족같이 지내던 사이는 맞지만,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니야.”
뭐야. 혹시 또 다른 마인의 등장인 줄 알고 살짝 기대…아니. 잠깐만. 유일하게? 그럼 진짜 피가 이어진 가족은 아예 없다는 얘기야?
혹시 이 녀석이 비스에 존재하는 유일한 마인이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마인이란 즉 용사의 종족이다. 미리엘이나 중2병 같은 예외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둘 다 용사만큼은 아닐지라도 동 레벨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엄청나게 강하잖아? 누가 봐도 용사를 하라고 만든 종족이지.
아무튼 그렇게 강한 만큼, 마인이라는 종족은 이 전쟁신 세계에서 무척이나 중요한 존재일 거다.
그리고 그런 마인, 그것도 비스 유일의 마인으로 추정되는 중2병과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이 비스의 수장 곁에 있다는 얘기는…잠깐만. 이거 얘기가 묘하게 돌아가는데?
혹시 카이젤이라는 놈이 곁에 비수를 두고 있는 건, 자신의 몸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혹시 인질이야?”
만약 그렇다면, 카이젤의 성격에 대한 평가도 정반대로 달라졌으니, 지금까지 세운 계획 역시 전면적으로 수정할 필요가 있게 되는데.
“으, 응!? 어, 어떻게 그걸…!?”
설마 내 입에서 인질이라는 단어가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는 듯, 중2병은 새총 맞은 비둘기 같은 표정을 지었다.
“뻔하잖아. 마인인 너와….”
“내가 마인이라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니. 뭘 이제 와서 그렇게 놀라냐. 대놓고 말만 안 했지, 맨날 자기가 용사인 것처럼 떠들고 다닌 주제에.”
우리한테 사로잡혔을 당시만 하더라도 완전히 마왕한테 패배한 용사가 빙의해서는 “크윽…이 내가 이런 곳에서 쓰러질 수는…!” 같은 말이나 해댔고, 미리엘 에게도 엄청나게 동질감 느끼고 있었고.
그런데도 이 녀석은 설마 숨길 셈이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물론 이 녀석이 마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결국 애널라이즈 스킬 덕분이기는 했지만.
“요, 용사인 것처럼…다른 사람들은 모두 정신 나간 것 같다는 말밖에 안 해줬는데….”
아니. 지금이 감동할 때냐? 너 나한테 출생의 비밀을 들킨 거거든?
뭐, 세이지가 이 녀석한테 했던 행동을 생각해 보면, 그 마음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속으로 상처받을 거면 애초에 중2병 짓을 안 했으면 됐을 텐데.
“아무튼 그래서, 그 브레디라는 사람은 널 제어하기 위한 인질이라고 보면 된다는 얘기지?”
“아, 아닌데?”
“…그럼?”
오늘의 교훈. 섣부른 추측으로 아는 척하지 말자.
“…으음. 그걸 말하려면 우선 내가 태어난 가문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그렇게 시작된 중2병의 얘기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내 예상대로 중2병의 비스마르크 가문은 원래는 용사 가문으로, 더 정확히 말하자면 플리투스에서 오래전에 떨어져 나온 분가라고 한다.
하지만 리리안 플리투스가 활약할 당시에는 이미 마인의 피가 옅어진 건지 더는 용사를 배출하지 못하게 됐고, 그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권력도 약해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리리안 플리투스가 대륙을 통일한 후에 행해진 대대적인 용사 숙청 작업에서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플리투스를 제외한 용사 가문이 모두 사라지니, 용사의 힘은 잃었다지만 여전히 마인으로서의 강함을 가지고 있는 비스마르크는 순식간에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됐고, 리리안 플리투스가 사라진 이후로는 자연스럽게 세력을 이뤄서….
“너희 가문이 원래 비스의 수장이었다고!?”
비스…비스마르크…내가 왜 이걸 눈치 못 챘지!? 플리투스도 바프라도 똑같이 자기들 성을 가져다 썼는데!
비스는 강자존의 원칙으로 수장이 수차례 바뀌었다는 얘기를 미리 들어서 그런가? 설마 그 정보다 독이 되어서 이런 결과를 초래하다니.
“그럼 비스를 배신하겠다고 한 것도 전부…!”
“오, 오해야! 얘기를 끝까지 들어줘! 이래서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좋아. 얘기해 봐.”
중2병이 진심으로 억울해 보인다는 것도 있었지만, 어차피 그것과는 별개로 궁금해서라도 얘기를 끝까지 듣기는 들어야 할 테니까.
나는 일단 판단하기를 보류하고, 중2병의 얘기를 더 들어보기로 했다.
내 예상대로, 비스마르크 가문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서 비스라는 세력을 이루게 됐다.
하지만 당시의 비스마르크 가문의 수장은, 중2병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앙심이 두텁고 정정당당한 호걸이었다. 다시 말해서 너무 종교에 맹목적이고 너무 사람이 좋았다는 얘기다.
그는 전쟁신의 교리를 근거 삼아서 강자존의 법칙을 내세우며 누구든 자기보다 강한 이가 있다면 기꺼이 수장의 자리를 내놓을 것이라 말했고, 그 발언은 곧 현실이 됐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를 이기고 새롭게 비스의 수장이 된 이는 전임 수장과 같은 호걸이 아니었다.
다시 힘 있는 이가 나타나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을 염려해 가능성 있는 이들을 싹부터 제거하려 했고, 그 제일 처음 타겟은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 가문이었다.
그래도 비스마르크 가문은 마인으로서의 힘이 있어서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수장이 몇 차례 더 바뀌는 동안에도 근근이 명맥은 유지하고 있지만, 결국 줄리안의 대에 와서 최악의 사태가 터졌다.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예였던 줄리안의 아버지가 무성별자인 줄리안 하나만을 남긴 채 요절해 버린 거다.
만약 줄리안이 남자로 각성하지 못하면, 비스마르크 가문은 이대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그냥 두고 볼 정도로, 카이젤이라는 남자는 멍청하지 않았다.
“카이젤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을 남자가 될 때까지 지켜주겠다는 명목으로 날 불렀어.”
“데리고 있다가 자기 여자로 만들 셈이라는 거군.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을 자기 여자로 두면, 마인의 핏줄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통성까지 생기는 거니까.”
“…아마도.”
거기까지 듣고 나니, 지금까지의 일들이 드디어 정리되어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중2병이 왜 그렇게 남자가 되는 것에 집착한 건지, 그리고 저런 성격이면서 왜 그렇게 쉽게 비스를 배신한 건지도.
물론 원래 자기 가문이 세운 세력인 만큼 비스가 무너지는 건 아깝겠지만, 그래도 비스마르크의 대가 끊어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판단한 거겠지.
“그럼 네가 아니라 브레디라는 사람이 카이젤의 곁에 있는 건?”
“브레디는 원래 우리 비스마르크를 모시던 가문의 출생으로, 나와는 소꿉친구 관계야. 카이젤이 부르자, 마침 나와 마찬가지로 무성별자였던 브레디가 내 대역을 자처했어.”
과연. 아까 인질이라는 말에는 그래서 반응한 거였군. 내가 생각했던 그런 인질은 아니었지만.
“그뿐만이 아니야. 브레디는 카이젤에게 가는 대신 다른 시종들의 안전까지 요구했어. 시종으로 분장하고 있던 카이젤에게 실력을 들켜서 여자가 될 뻔했지만, 브레디 덕분에 무사히 정조를 지킬 수 있었어. 그뿐만이 아니라 비교적 안전한 바프라로 피신까지 시켜줘서….”
과연. 이 녀석이 비스의 비수라는 역할을 지니고 있었으면서 바프라의 그런 오지에서 식도락이나 즐기며 놀고 있었던 이유가,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그래서 편지에 브레디만 볼 수 있는 글을 쓴 거야. 안심하라고. 곧 가겠다고.”
“…어떻게 생각해?”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중2병의 말을 100% 신뢰했다.
내가 많이 해봐서 아는데, 저건 그 자리에서 즉석에서 짜낼 수 있는 수준의 변명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너무 과거의 일까지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져.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까지 다 그렇게 생각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말이야.
제일 먼저 중2병을 의심한 사라에게 말을 건네자, 사라는 잠시 진실을 간파하려는 듯 중2병의 눈을 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프라의 사례를 보고 희망을 가진 건 아니겠죠?”
사라의 그 말은, 나도 무심코 감탄을 내뱉었을 만큼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어.
물론 중2병이 바프라의 변한 모습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내가 바프라를 뒤집어엎기 전에 사로잡혀서 쭉 우리 저택에 갇혀있었고, 그 이후에 나랑 같이 다닐 때도 바프라에 용무가 있을 때는 이곳 창관 지하에서 기다리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 녀석은 바보가 아니다. 중2병이 폭발해서 바보처럼 보일 때가 많지만,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니다.
아마 내가 바프라를 어떻게 손에 넣었는지, 들은 얘기만으로도 충분히 파악하고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사라의 말대로 이 녀석이 헛된 희망을 품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나와 협력 관계가 됐다고 보는 게 더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내가 비스 정복하고 바프라처럼 대리인을 내세운다면, 제일 명분이 있는 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후손이나 마인으로, 실력도 비수에 임명될 정도로 출중한 이 녀석이니까.
하지만….
“미리 말해두지만, 비스는 바프라처럼 그렇게 어중간한 형태로 남길 생각 없어.”
바프라를 그런 형식으로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에는, 바프라가 섹스를 두고 말도 안 되는 억압정책을 펼친 덕분에 때문에 생겨난 은사모의 존재가 가장 컸다.
본인들은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지만, 은사모라는 존재가 이미 여신의 교리에 반쯤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인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비스는 다르다.
여자를 경시하는 건 비슷할지 몰라도, 놈들은 섹스 자체는 딱히 금기시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강한 남자의 상징으로 이용까지 하고 있다.
여신의 교리로 세상을 뒤엎을 우리에게 있어서는, 어중간하게 섹스를 적대시하는 놈들보다도 더 까다로운 상대라는 얘기다.
거기에 비스 사람들은 뭐든지 힘의 논리로 생각하며 상대를 강자라고 인정하지 않는 이상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기질까지 가지고 있다고 한다.
만약 중2병을 완전히 내 수족으로 만들고 왕을 시킨다 한들, 바프라처럼 어중간한 형태로 플리투스에 복속시키는 건 불가능하겠지.
그런 이유에서 우리는 비스 공략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계획하고 있었다.
뭐, 지금까지 일부러 숨기고 있었으니, 중2병은 우리 계획의 전모를 모르지만 말이야.
만약 그래서 헛된 희망을 품고 있는 거라면, 빨리 꿈 깨라고 말해줄 수밖에.
“비스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거다. 영원히.”
이대로 헛된 희망을 품게 한 채 이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 방법은 리스크가 너무 컸다.
도중에 중2병이 현실을 깨닫고 적으로 돌아서면 골치 아파지니까 말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미리 현실을 알려주고, 확실하게 적이 될지 아군에 붙을지 선택하게 하는 편이 훨씬 마음 편했다.
“…그래도 브레디는 구해낼 수 있잖아?”
과연. 이 녀석도 이쪽에 붙을 메리트가 없는 건 아니라는 건가.
중2병 모습에 가려져서 그렇지, 역시 그냥 생각 없는 놈은 아니었어.
“비스나 비스마르크 가문에는 미련이 없다고?”
“미련이 없는 건 아니야. 하지만 비스는 이미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고 있어. 그리고 가문은 나만 멀쩡하면 굳이 비스가 아니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으니까.”
만약 미련이 전혀 없다고 대답했다면, 난 계획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하는 한이 있더라도 이 녀석을 계획에서 배제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니 진정성이 느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괜히 더 고민되기 시작했다.
내 감은 줄리안의 말이 모두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감만 믿고 처리해서는 안 되는 일도 있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그냥 편하게 믿고 싶기는 하지만, 만약 그렇게 했다가 일이 잘못되면 나 혼자만 문제 되는 게 아니니까.
“줄리안 씨….”
줄리안의 사정을 듣고 덩달아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시는 우리 천사님 쪽을 향해 나는 힐끔 곁눈질했다.
천사님이 동행하는 것만 아니었다면,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냥 마음 편하게 줄리안을 믿고 같이 다닐 텐데.
하지만 이제 와서 천사님은 빠지라는 얘기를 할 수도 없고.
역시 이대로 줄리안이랑 섹스를 해서 확실하게 내 여자로 만들어 버리는 게…아니. 하지만….
“좋아. 믿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결국 그렇게 결론 내리기로 했다.
“구원!?”
사라는 설마 내가 이런 선택을 할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지만, 난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괜찮아. 내가 제어할 수 있어.”
레이아도 같이 가는 거잖아. 충분히 생각하고 판단한 거야.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사라도 더는 이견이 없다는 듯 입을 닫았다.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기는 했지만, 저것도 다 내가 걱정돼서 저러는 거니까 내 눈에는 그저 귀엽기만 할 뿐이었다.
“저, 정말로 믿어주는 거야?”
“왜? 문제 있냐?”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자기가 생각해도 본인이 내 입장이었다면 믿기 어려웠을 거라는 거겠지. 이해한다.
하지만 난 네가 아니거든.
“난 남자 중에 남자니까 말이야. 이게 바로 그릇의 차이라는 거지. 너도 남자가 되고 싶은 거라면, 좀 더 날 본받는 게 좋을걸.”
“그릇의 차이….”
대충 그럴듯하게 둘러댄 말이었지만 중2병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진지한 표정으로 몇 번이나 되뇌기까지 했다.
뭐, 그 뒤에서 사라는 무슨 바보 같은 말이냐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신, 조심하세요.”
“연락은 자주 하게.”
“다치면 가만히 안 둘 거야.”
그 이후 밤이 될 때까지 줄리안의 얘기를 들으면서 적당히 시간을 보낸 다음, 드디어 우리는 비스로 향하게 됐다.
“괜찮아. 사라 너도 알잖아?”
인간 상대로는, 아니. 감각이 있는 생물 상대로는 무적이나 다름없는 성자 스킬만 말하는 게 아니다. 이제는 나도 쓸 수 있는 수가 상당히 많아졌으니까 말이야.
“…응.”
“그래. 그럼 진짜 다녀올게.”
사라와 디아나, 마틸다의 뺨에 각각 입맞춤해준 다음, 나는 그림자 이동을 통해서 비스의 수도 근처로 이동했다.
그래. 이번에는 갑자기 수도부터 시작이었다.
뭐, 그렇다고 해도 아예 수도 안으로 이동한 건 아니었고, 수도가 멀리 한눈에 보이는 위치의 평야 쪽으로 이동한 거지만.
너무 가까이 가면 간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설치하기 곤란해지니까 말이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편지랑 전서구는 준비됐지?”
“응.”
“그럼 날려.”
이렇게 떨어져 있는 편이 전서구의 행방을 지켜보기에도 쉬웠으니까.
뭐, 그래 봤자 내 눈에는 전서구의 모습이 보이지 않지만.
“상당히 어두운데, 제대로 보이냐?”
“물론! 어둠을 꿰뚫고 목표물을 정확히 포착해내는 능력도 없어서야, 진정한 용사라고 할 수 없지!”
아니. 그러니까 넌 용사도 뭣도 아니잖아.
그리고 너, 나한테 마인이란 걸 들켰다고 이젠 아예 대놓고 용사인 척한다?
용사가 되지 못한 마인이 용사를 꿈꾸는 건 본능이라는 건가. 아니. 뭐, 미리엘하고 얘는 용사를 대하는 마음가짐이 상당히 다른 듯 보였지만.
아무튼 뭐, 보인다니 됐지. 그럼 일단은 지켜보고 있어야겠군.
비스의 수장, 카이젤의 인상은 낮에 중2병의 얘기를 듣고 조금 달라졌지만, 어찌 됐든 놈이 자신의 안녕을 제일 우선시 하는 놈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에는 마인의 피를 두려워해서 브레디인지 하는 중2병의 친구를 잡아두고 있는 거니까 말이야.
그렇다면 굳이 계획을 수정할 필요까지는 없을 거라는 판단하에, 나는 이렇게 중2병을 시켜 전서구를 날리게 한 거다.
이 편지를 보낸다면, 분명 카이젤은 뭔가 반응을 보일 거야.
내 예상이 정확하다면, 아마 우선 각지의 비수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는 그 비수에게 날리는 전서구의 안내를 받아서, 비수가 있는 곳을 편하게 특정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후훗. 왠지 이러고 있으니 두근두근하네요. 아이들이 비밀기지를 만들고 장난치며 노는 기분을 조금 알 것 같아요.”
“으, 응. 그러게.”
“구원 씨?”
왜 그러시나요? 라면서 천사님은 고개를 갸웃거리셨지만, 나는 그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가슴 없는 천사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어색해서요. 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만약 그랬다가 천사님이 슬픈 표정이라도 지으시면, 난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야.
아무튼 천사님의 말대로 비밀 기지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기분을 살짝 맞보면서, 우리는 중2병이 전서구를 발견하기만을 기다렸다.
밤이 늦기는 했지만, 적 진영에 잠입했던 비수가 잡혔다는 건 상당히 중대한 사안이다. 푹 자고 일어나서 아침에 대응하겠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물러빠지지는 않았겠지.
“왔다! 왔어!”
그리고 내 예상은 정확했다.
슬슬 졸리기 시작했을 즈음에, 드디어 중2병이 내 허벅지를 탁탁 두드리며 호들갑을 떨어댔다.
“저기…윽!?”
자기가 만져놓고 뭘 그렇게 놀라냐. 오히려 갑자기 거길 만져진 내가 더 놀라고 싶다.
“일단 손부터 떼지?”
“어, 어!? 으, 으응….”
너무 놀라서 자기가 계속 손대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했던 건지, 내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중2병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래서, 전서구는 어디야?”
“저기랑 저기. 그리고 저기.”
총 세 마리라. 두 마리는 각각 영내에 있는 비수에게 보내는 것으로 생각해도 좋겠지.
그리고 나머지 한 마리는…세이지한테 보내는 건가.
이미 편지에 언제 잡힐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썼으니, 중2병에게 다시 답신을 보내는 건 리스크가 너무 크니까 말이야.
그럴 거면 아예 세이지한테 보내서 경고를 해주는 게 낫겠지. 놈들은 아직 세이지가 사로잡힌 줄 모르고 있을 테니까.
“전부 잡을 수 있겠어?”
“응. 간단해. 부르는 방법이 따로 있어. 하지만 가까이 가야 해.”
“잡은 다음에 다시 보낼 수도 있어?”
“응. 목적지를 몰라도 알아서 날아가니까.”
원래 전서구는 비둘기의 귀소본능을 이용해서 쓰는 거라고 들었는데, 뭐 이런 세계에서 일일이 따져봤자 의미 없는 얘기인가.
된다면야 나야 편하고 좋지.
“좋아. 그러면 이동하자. 레이아.”
“네. 언제든 괜찮아요!”
평소처럼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파이팅 포즈를 하는 천사님은, 그 두 팔 사이에서 묵직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가슴이 없어도 여전히 천사님이었다.
“역시 하나는 비스행이었군.”
그렇게 세 마리의 전서구를 다 잡아서 편지를 확인해본 결과, 역시나 내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고 있었다.
하나는 세이지를 향한 경고를 담은 편지였고, 나머지 둘은 영내에 있는 비수 둘을 향한 귀환 명령을 담은 편지였다.
“그러면 우선 둘 중 하나를 찾아가야 하는데…둘 중 추천하는 사람은 있어?”
“응? 시, 실은 다른 비수들과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아서…난…비스마르크의 후계자인 블레디의 후광을 업고 비수가 된 사람 취급이니까.”
조금 씁쓸하게 내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중2병의 모습은, 저도 모르게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랬군. 그래서 세이지의 반응이 그랬던 거군. 아무리 얘가 중2병 환자라고 할지라도, 같은 비수 동료를 대하는 것치고는 말투가 너무 적대적이다 싶었는데. 실력도 없는 주제에 자기랑 같은 위치에 있는 중2병이 마음에 안 들었다는 건가.
실은 중2병이 훨씬 더 강한데 말이야.
“그래? 그럼 아무나 고르지 뭐. 로빈이라. 우선은 이 여자로 하자.”
“로빈은 여자가 아니라 무성별….”
“곧 여자가 될 거야.”
뭐, 할 수만 있다면 세이지처럼 섹스 없이 굴복시키는 게 제일이지만 말이야.
내 말을 듣자마자 턱을 덜덜 떨면서 다리를 오므리는 중2병의 모습을 일부러 무시하면서, 나는 로빈에게 향하는 전서구를 보내게 시켰다.
여기까지는 우선 예상대로 잘 흘러갔으니, 이다음도 예상대로 잘 흘러가면 좋겠는데.
그렇게 기대했지만, 역시 사람 일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아니. 전서구의 안내를 받아서 로빈이라는 여자에게 도착하는 것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성격은 조금 독특하지만 그래도 현지인인 중2병의 안내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중2병은 도망자 신세가 아니라는 점이 무척이나 컸다.
바프라에서는 신과 유리, 그리고 레이까지 도망자 셋을 달고 숨어다녔으니까 말이야. 그때와 비교하면 마음 편하게 힐링 여행하며 돌아다니는 수준의 편한 여정이었다.
문제는 여로가 아닌, 도착한 다음의 일이었다.
“또 편지인가. 이번에는 어떤…응? 뭐야 이거? 이 여자보고 돌아오라는데?”
내가 사로잡아서 이용할 예정이었던 로빈이라는 이름의 비수는, 이미 다른 남자에게 굴복당해서 여자가 된 뒤였던 거다.
전서구를 뒤쫓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딘가의 세기말이 떠오르게 하는 황량한 평야에 세워진 요새 도시였다.
중2병의 말에 따르면, 강자가 많은 비스에서도 가장 파괴적인 무술을 자랑하는 블래스터 가문이 다스리는 땅이라고 한다.
이런 곳에 비수를 파견했다는 얘기는, 역시 내 예상대로 수장의 자리를 위협하는 이들을 미리 견제할 목적인 거겠지.
예상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어 가는 것 같아서, 이런 황폐한 곳에서 모래 먼지나 들이키고 있으면서도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우선 여관부터 찾자.”
전체적인 분위기는 세기말 같은 도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법 지대라는 건 아니었다. 관문도 중2병이 가지고 있는 신분증으로 아무 문제 없이 통과됐고 말이다.
그러니 숙박시설도 조금 돌아다녀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겠지. 아무도 여행 안 올 것 같은 이런 황량한 곳이라도 상인들은 오갈 테니까 말이야.
“어!? 버, 벌써!?”
내가 앞장서서 가자, 중2병이 화들짝 놀라며 졸졸 따라왔다.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렇게 놀라는 건지. 뭐, 저러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방부터 잡고 움직이는 게 여러모로 편하잖아?”
“그,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다리를 잔뜩 오므렸으면서, 이제 와서 알고 있었던 척해 봐야 설득력 없다, 이것아.
설마 벌써부터 젖은 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동안 학습된 게 있다지만, 조금 참아라. 방을 잡을 때 이상한 오해를 사면 귀찮아지니까.
“남자 셋인가…. 미안하지만, 방이 부족하군. 셋이서 같이 머무를 수 있는 큰 방이라면 아직 하나 남아 있는데.”
“흠. 그런가.”
남자끼리 여행이라면 각자 따로 방을 쓰는 게 기본이라는 듯이 말하는 여관 주인의 말에, 나는 손으로 턱을 괴고 잠깐 고민하는 척을 했다.
어차피 방이 남았다고 해도 다른 변명을 둘러대며 다인실을 잡을 생각이었으니, 사실 우리로서는 잘된 일이지만 말이야.
이렇게 시간을 끌어서 인상을 남겨둬야, 여차할 때 이 주인장을 증인으로 쓸 수도 있으니까.
“오늘은 행상인 무리가 오는 날이니, 다른 여관을 찾아가도 상황은 비슷할 거야.”
“하는 수 없지. 그럼 큰 방으로 하나 줘. 너희도 괜찮지?”
“네.”
“응….”
그러니까 중2병. 얼굴 붉히면서 여성스러운 반응 보이지 말라고.
“헤헷. 감사합니다!”
다행히도 주인장은 그런 중2병의 모습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두 손을 모으고 굽실거리며, 주인장은 함박웃음과 함께 돈을 받아들었다.
“자, 그럼.”
그렇게 일단 방을 잡고 올라오기는 했지만, 딱히 짐을 풀거나 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짐은 전부 내 인벤토리에 넣고 다니니까 말이야.
즉, 지금부터 진짜 행동 개시라는 거지.
나는 기어를 변환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숨을 정돈했다.
“준비해.”
“으, 으응….”
하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중2병은 또 이상한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안짱다리로 서서 허벅지 사이를 비비듯이 움직인 중2병은, 힐끔 내 눈치를 보더니 결심했다는 듯 천천히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는 이미 애액으로 살짝 젖은 속옷도 천천히 내리더니…항상 느끼는 거지만, 남자 속옷이 저렇게 젖어 있는 건 볼 때마다 참 묘한 기분이 들게 하네.
뭐, 그 안에 숨겨져 있는 게 여성의 그곳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 그나마 묘한 기분 정도로 끝나는 거지만.
아무튼 그렇게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진 중2병은, 침대 위로 가서 똑바로 눕더니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손을 가져다 대고 두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렸다.
아직 그 누구도 침입하지 않은 핑크빛의 예쁜 속살이 살짝 벌어지며 애액으로 촉촉하게 젖은 안쪽을 드러내는 모습은, 아무리 상대가 중2병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남심을 자극할 만한 광경이었지만.
“너 뭐하냐?”
“으, 응?”
게다가 여관에 오기 전에도 한 번 착각을 정정해 줬는데도 또 저러다니. 진짜 머리에 그 생각밖에 없나.
아니. 뭐, 내 잘못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안전을 위해서였다지만, 조금 과했는지도 몰라.
“아니. 비둘기 준비하라고. 여기에 뭐 하러 왔는지 잊었어?”
“앗!? 흣!? 헹!?”
이상한 소리와 함께 침대 위에서 벌떡 일어난 중2병은, 팬티도 입지 않고 창가로 달려가서는….
“줄리안 씨. 안 돼요. 밖에서 보이겠어요.”
창문을 활짝 열기 전에, 다행히도 우리 천사님이 먼저 말려줬다.
역시 틈만 나면 빈민가의 고아원으로 애들을 보러 다니시는 만큼, 이런 돌발 상황에 강하신 천사님이었다.
“아, 고, 고마워….”
“후훗. 천만에요.”
방에 들어오자마자 원래 모습으로 돌아오신 우리 천사님의 가슴을 의식하는 건지, 중2병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아니. 저건 가슴을 의식하는 게 아니라…뭐, 좋아.
“아직 로빈에게 가게 하지는 않았지?”
“응. 대기하고 있게 했어. 이제 보낼까?”
겨우 진정하고 다시 하의를 걸친 중2병과 함께, 나는 다시금 계획을 확인했다.
“아니. 만약을 대비해서 행동하는 건 밤이 된 이후로 하자.”
낮이든 밤이든 상관없이 투명해질 수 있는 중2병은 상관없겠지만, 나는 밤이 움직이기 편하니까 말이야.
뭐, 어차피 로빈은 이 도시 어딘가에서 평범하게 꾸미고 블래스터 가문을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만약의 사태가 일어날 일은 거의 없다고 보지만.
그렇게 생각했는데.
“…저기 그 블래스터 가문 집 맞지?”
밤이 되어 전서구를 날린 우리는, 그 뒤를 쫓아가던 중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전서구가 향한 곳은, 누가 봐도 이 도시의 영주가 살고 있을 법한 커다란 건물이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도시의 분위기에 어울리게 귀족이 사는 화려한 저택이나 성이라는 느낌보다는, 어딘가 요새의 최종 방어선을 연상시키는 건물이었지만.
“아, 아마도…?”
“즉, 로빈은 블래스터 가문의 집안에 직접 잠입해 있다는 얘기야?”
무슨 그렇게 무모한 짓을…아니. 생각해 보니까 세이지도 플리투스의 군대에 직접 잠입해서 정보를 빼내고 있었지.
혹시 비수라는 놈들은 다들 그런 모험을 즐기는 게 취미인 변태들만 모여 있는 건가?
그럴듯해. 실제로 이 녀석도 중2병이라는 중증을 앓고 있으니까.
“왜,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리둥절해하는 중2병의 시선을 대충 얼버무리면서,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럼 전서구를 따라서 로빈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저 건물 안에 직접 들어가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나야 중2병은 그렇다 쳐도, 천사님은….
“구원 씨. 어서 가요. 이러다가 놓치겠어요.”
내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천사님은 그렇게 말하며 제일 먼저 건물 쪽으로 달려가셨다.
아니. 잠깐만! 천사님! 그렇게 무방비하게 가시면 위험…!
“웬 놈이냐!”
그것 봐요! 벌써 문지기한테 들켰잖아요!
하는 수 없지. 이렇게 된 이상, 조금 계획은 변경해서…!
“죄송해요! 조금만 주무시고 계셔주세요!”
나는 천사님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려고 했지만, 그건 내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문지기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꾸벅 숙인 천사님은, 직후 가벼운 몸놀림으로 문지기의 뒤로 돌아가 그 목을 쳐서 기절시켰다.
…그러고 보니, 성녀는 대사제와 성기사 둘 다 전직이 가능한 하이브리드 직업이었지.
성녀라는 이름이 가지는 이미지 때문에, 그리고 줄곧 전문 힐러 역할만 해온 천사님의 이미지 때문에 잠깐 잊고 있었어.
미리엘의 수업을 듣고 전투 훈련도 받았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아니. 그래 봤자 문지기고, 우리 천사님하고는 레벨 차이가 어마 무시하게 나기 때문에 저렇게 간단히 제압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우리 천사님을 마냥 가녀린 힐러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내게는, 직접 보니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게다가 천사님의 파격적 행보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구원 씨. 조금 도와주시겠어요?”
문지기를 기절시키자마자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돈 천사님은, 평소에 남장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낮고 걸쭉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그래. 아까 들었던 그 문지기의 목소리로 말이다.
“…….”
“구원 씨? 왜 그러시나요?”
아뇨. 그 얼굴에 그 목소리로 제게 상냥하게 말씀 걸어주시니까 천사님이란 걸 알고 있어도 괜히 소름 돋아서요. 죄송합니다.
아무튼 천사님이 어떻게 같이 잠입할지에 관한 문제도 해결됐으니, 우리는 기절한 문지기를 마당의 보이지 않는 그늘에 숨겨두고 곧장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전서구의 모습은 창문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더 뒤쫓을 수 없었지만, 다행히도 중2병이 방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세이지 때처럼 핵심 인물의 방까지 가게 되는 건 아니겠지? 하고 살짝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았다. 아니.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우리가 도착한 곳은, 병사들이 머무르는 병영 같은 넓은 방이었다. 문도 살짝 열려 있는 것이, 그야말로 무방비하기 짝이 없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살짝 열린 문틈에서, 여성의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으아응…!? 흐읏…저, 전서….”
“헉, 헉? 뭐? 쉴 틈 없어 이년아. 뒤에 줄 밀린 거 안 보여!? 다 끝날 때까지 쉴 시간 없을 줄 알아!”
문지기로 변하고 있는 천사님이 극히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문을 열자, 거기에는 나체의 여자 한 명을 중심으로 십 수 명의 남자들이 하반신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심지어 다들 발정 나서 여자밖에 눈에 안 들어오는지, 방안으로 천사님이 들어가도 다들 눈치조차 못 챈 것 같았다.
뭐야 이거. 우리는 전서구를 쫓아왔는데, 왜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는 거지? 중2병만큼은 아닐지라도, 비수는 개개인이 상당한 실력자잖아?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잠깐 현실을 부정해 봤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나타내는 진실이 변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내 계획이 완전히 꼬였다는 거잖아.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싶더라니.
“으으응…그게, 아니라…전서구….”
혹시나가 역시나라고, 남자의 밑에 깔려 있던 여자가 손을 위로 내밀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갑자기 전서구가 모습을 드러내며 그 손가락 위로 내려앉았다.
“아? 으헉!? 까, 깜짝이야. 저건 씨발 볼 때마다 놀라네. 대체 어디서 튀어나오는 거야? 쫄아서 쪼그라들었잖아.”
“병신. 겁은 더럽게 많아요.”
“닥쳐. 이 새끼야. 야. 읽을 동안 빨아서 다시 세워봐.”
“네헤…하음….”
“그럼 난 그동안 뒷구멍 좀 쓴다.”
“내꺼 다시 서면 비켜라.”
여자를 공유하는 게 아주 자연스럽다는 듯 그런 대화를 나눈 남자는, 이것 또한 자연스럽다는 듯 여자의 손에서 편지를 건네받아서 자기가 마음대로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이번에는 어떤…응? 뭐야 이거? 이 여자보고 돌아오라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야. 어떻게 된 거야. 네 임무는 우리 감시 아니었어?”
“맞…으하응….”
“그런데 갑자기 왜 돌아오라는 거야!? 씨발 설마 들킨 거 아니겠지? 꼬박꼬박 편지 제대로 보낸 거 맞아? 만약 들키면 대장한테 우리 다 죽는다고!”
“보냈어, 새끼야! 지도 맨날 같이 봐놓고!”
갑작스러운 귀환 명령은 놈들도 예상 밖이었는지, 놈들은 웅성웅성 대면서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다 좋은데 말이야, 아니. 사실 하나도 좋지 않지만. 그래도 적어도 안 하는 놈들은 하반신에 뭐라도 좀 걸치고 있어 주면 안 될까? 진짜 보기 괴로운데.
속으로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면서, 나는 슬슬 등장할 때임을 직감했다.
“아, 미안미안. 그거 실은 우리 때문이야.”
신호를 보내서 천사님은 원래의 남장 모습으로 돌아오게 하고, 중2병은 투명 모드를 풀게 한 다음, 나는 자신도 그림자 은신을 풀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로빈을 이용하겠다는 계획은 완전히 꼬여 버렸지만, 그래.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계획대로 움직였다고.
지금까지도 순발력을 이용해 즉흥적으로 행동하며 잘 해왔잖아? 그걸 한 번 더 반복하는 것뿐이야.
“어, 어떤 새끼야!?”
“너희랑 똑같은 새끼.”
손을 살랑살랑 흔들면서 대답해주자, 놈들은 황당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무, 뭐?”
“모르겠어? 그러니까, 나도 너희랑 똑같이 카이젤의 자객을 사로잡은 몸이라고. 그쪽은 로빈이라고 했던가? 안녕. 오랜만이지? 줄리안이야.”
중2병의 어깨에 팔을 얹어서 끌어안고 그 손을 잡아서 대신 살랑살랑 흔들어주며 인사하자, 지금까지 남자들이 하라는 대로 몸을 대주던 여자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중2병을 쳐다봤다.
“그리고 비수를 손에 넣은 자가 또 다른 비수의 앞에 나타났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겠냐?”
“…이름은?”
계속해서 중2병의 손을 장난감 가지고 놀듯이 흔들면서 살짝 무시하는 말투로 도발해 봤지만, 의외로 놈들의 반응은 신중했다.
아까의 그 시정잡배 같은 말투를 생각해 보면, 당연히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덤벼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긴, 강자존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켜지는 곳이니, 그만큼 이런 것에는 신중한 건지도 모른다. 비수를 사로잡았다는 것만 하더라도, 내 강함은 어느 정도 증명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신상파악부터 하려는 거겠지만.
“나일이다.”
당연하게도, 이 녀석들이 내 신상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냥 구원이라고 했어도 모를 가능성이 큰데, 이렇게까지 해버리면 알 수 있을 리가 없지.
“나일? 야. 넌 들어봤냐?”
“아니. 처음 들어봤는데.”
그야 그렇겠지. 지금 막 지어낸 이름이니까.
난 지금 나이 조절 팔찌로 평소보다 더 늙어 보이는 모습에, 약자 태세로 매력 수치도 대폭 깎아서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처럼 이렇게 변장을 했으니, 그에 걸맞은 가명도 사용했다는 얘기다.
참고로 가명의 유래는 내 이름을 살짝 비튼 거다. 구원91에서 한영을 뒤바꿔 나인일로. 거기에서 살짝 다듬어 나일로.
“뭐, 모르는 것도 당연해. 유명한 이름은 아니니까.”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던 놈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우뚝 멈췄다.
“즉, 무명 소졸이라고?”
너희 같은 놈들한테 무명 소졸이라는 얘기까지는 듣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소졸은 아니야. 그냥 무지막지하게 강한 무명이지. 그래서, 처음 질문의 대답은 대체 언제쯤 들을 수 있는데?”
“처음 질문이라고?”
“조금 전 일을 벌써 까먹었어? 그 나이에 벌써부터 치매 온 건 아니지? 젊은 나이에…쯧쯧. 조심해. 지금부터 견과류라도 꼬박꼬박 챙겨 먹고.”
“처음 질문이 뭐냐고 물었다!”
혀까지 차면서 안타까움 듬뿍 담아 걱정해 줬지만, 놈은 그걸 도발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야. 네 딴에는 윽박지를 셈인지 모르겠는데, 하반신 드러내놓고 손에 무기 하나 없이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무섭거든?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온 이유 말이야. 뭐일 것 같아?”
“…감히 주군을 만만히 보는 거냐!?”
잠깐 침묵이 흐른 끝에, 놈들은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다는 듯 덜렁덜렁 후다닥 움직이며 각자 손에 무기를 꼬나쥐었다.
어째서 얘기가 또 그렇게 되는 거지?
보통 말이야. 비수를 사로잡은 애가 또 다른 비수한테 왔으면, 그 또 다른 비수도 사로잡을 목적으로 왔다고 보는 게 정상 아니야?
하여간 여기 놈들은 머리에 든 게 싸움밖에 없는지 꼭 생각을 해도 그딴 식으로…아니. 잠깐 기다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여기에서 굳이 부정할 필요 없는 거 아니야?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오히려 이게 더 잘된 걸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거지. 너희도 비수를 사로잡았으면 알 거 아니야? 카이젤이 비수를 어떤 목적으로 파견했는지. 그리고 너희 블래스터와 마찬가지로, 카이젤은 나한테도 비수를 파견했어. 그리고 난 그 비수를 사로잡았지. 그럼 너희 대장이랑 비교해도 딱히 손색이 없다는 뜻 아니야?”
“개소리를 잘도 나불나불 지껄이는군! 비수라면 우리도…!”
“부탁이니까 너희가 잡았다는 헛소리는 하지 마. 너희는 뒤에서 손도 못 대고 있다가 너희 대장이 나서서 간신히 잡은 그림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는데. 지금 모습만 봐도 그래. 나머지 놈들은 주위에서 한 놈 끝날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거면서 이렇게 우르르 몰려서 둘러싸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겁나는 거잖아? 만약 그 여자가 다른 마음먹고 반항하면 감당해낼 자신이 없으니까. 자신 있었으면 혼자 따먹었겠지. 안 그래? 내 말 틀려?”
“…이, 이 어디서 굴러들어왔는지도 모르는 호로잡놈새끼가!”
꼭 할 말 없으면 욕부터 하는 놈들이 있더라. 쟤들은 저러면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할 줄 아는 걸까?
뭐, 좋아. 쟤들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증명해주면 그만이니까.
“아니라고 하고 싶은 거야? 그럼 시험해 볼까? 줄리안.”
“…응.”
평소라면 또 바보처럼 ‘어? 나?’ 같은 말이나 했을 중2병이지만, 이번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시선은 여전히 로빈에게 고정된 채로, 줄리안은 덤덤하게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저 녀석들 전부 처리하는 데 몇 분 필요해?”
“분 단위까지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중2병의 두 팔에서 검은 화염이 이글이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진짜 쓰는 기술 하나는 엄청 멋있단 말이야. 아니. 난 딱히 중2병이 아니지만, 이거 실제로 보면 진짜로 멋있다고.
그 증거로, 조금 전까지 큰소리를 치던 놈들이 중2병이 투지를 불태우자마자 잔뜩 쫄아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너희가 거기에 있는 비수를 사로잡은 실력자라면, 여기에 있는 비수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지? 아, 안심해. 나도 딱히 1대1로 하라는 건 아니니까. 전부 덤벼도 좋아. 그럼 줄리안.”
가서 전부 쓸어 버려.
중2병의 어깨를 가볍게 탁 치면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그 순간 저쪽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
알몸으로 남자 밑에 깔려서 그저 남자들의 성욕배출구 역할만 수행하던 여자가, 갑자기 검을 뽑아 들고 앞으로 나선 거다.
“…로빈? 어째서?”
“너도 그 남자의 여자가 됐으니까 알잖아? 우리들 여자는, 결국 남자한테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인 거야.”
그렇게 돌려지면서도 반항다운 반항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대충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런 건가.
저 여자는 자신을 여자로 만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심으로 그 남자한테 절대복종하고 있는 거다.
뭐, 저 여자를 여자로 만든 건 저기에 있는 저놈들이 아니라 블래스터의 대장이라는 놈이겠지만, 아마 저놈들한테 협력하라는 명령이라도 받은 거겠지.
아무튼 패배하고 여자가 됐다는 이유만으로 지금까지의 자신은 전부 버리고 남자한테 절대복종하는 여자의 모습을 진짜로 보고 나니, 나는 뭔가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저게 진짜 되는구나. 그럼 여차하면 정말로 줄리안도…라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걸 진짜로 가능하게 하는 세뇌 교육의 무서움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고 할까.
“그리고 너와는 언젠가 한 번 제대로 싸워보고 싶었거든. 줄곧 궁금했어. 네가 정말로 비수에 어울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
뭐,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만.
멋대로 결투 분위기를 만드는 로빈의 막기 위해, 나는 줄리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기다려. 누가 너보고 껴도 좋다고 했지?”
그리고 아까까지의 가벼운 분위기를 완전히 지워 버리고,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분위기 잡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오오. 나이 먹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니까 뭔가 평소보다 진중한 멋이 느껴져서 좋네.’ 같은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아무튼 난 딱히 비수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싸우더라도 어차피 중2병이 이기기는 하겠지만, 둘이 싸워서 내가 득 볼 게 없잖아?
그럴 거면 차라리 저 녀석은 내가 나서서 처리해 버리는 게 간편하고 낫지.
“마치 네 허락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것 같은 말투군.”
“같은 말투가 아니라, 정확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거다. 아까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았나? 결국에는 남자한테 굴복하고 복종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훗. 그런 건가. 착각하지 마라. 내가 굴복하고 복종할 남자는 네가 아니야. 날 여자로 만들어주신….”
“틀렸어.”
“뭐?”
“네가 복종할 남자는 널 여자로 만든 남자가 아니야. 강한 남자지. 그리고 난 이곳에서, 아니.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다. 즉, 모든 여자는 내게 굴복해야 한다는 얘기지.”
음. 내가 한 말이지만 진짜 오만하기 그지없는 말이군. 악역도 이런 악역이 따로 없어.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십중팔구 내가 나쁜 놈인 줄 알 거야.
“훗. 후훗. 하하하핫!”
그래도 일단 한껏 무게 잡고 한 말이었지만, 당연하게도 로빈은 그 말을 듣자마자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뭐, 실제로 허무맹랑한 말이기는 하니까 말이야. 나도 누가 내 앞에서 저런 말을 했으면 ‘뭐야, 저 또라이는?’ 이라고 생각했을 거야.
“줄리안을 사로잡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으로 기고만장해져 있는 모양인데, 제명에 살고 싶다면 주제 파악은 제대로 하는 게 좋아. 저 녀석은 우리 비수 중에서도 유일하게 실력 검증이 안 된, 인맥으로 우연찮게 들어온 머릿수 채우기 요원에 지나지 않아.”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업신여기는 말투로 날 향해 그렇게 말하는 로빈이었지만, 과연 언제까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로빈의 말에 직접 말로 대답하는 대신, 손을 허리춤으로 가져갔다.
제발 이 모습을 보고 천사님이 환멸하지 않으시기를.
그리고 속으로 그렇게 빌면서, 바지와 속옷을 한 번에 아래로 내렸다.
“흡!? 그, 그건…!?”
바지를 벗는 것과 동시에 되살아난 자존심으로 물건을 최대로 발기 시키자, 그 압도적인 위용에 로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마치 적의 비밀병기라도 마주한 것 같은 반응이군. 아니. 그걸 노리고 벗은 거지만 말이야.
자길 여자로 만든 남자한테 꼼짝 못 하고 절대복종하는 걸 보니, 거근 신앙에도 분명 꼼짝 못 하고 영향받을 거라고.
다 계산하고 행동한 거지만, 그래도 진짜로 이게 통하다니. 사실은 여기가 여신의 세계보다 훨씬 더 섹스에 미친 세계가 아닐까?
속으로는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나는 겉으로는 태연하게 로빈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왜 그러지? 조금 전까지는 입이 꽤나 잘 돌아가는 것 같더니만. 이 압도적인 남성성을 마주하니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진짜 악당이 따로 없었다. 그것도 그냥 악당이 아니라 희대의 변태 악당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진짜로 통하고, 심지어 제일 효과적이니까.
고양이 앞에 쥐처럼 꼼짝도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져 버린 로빈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지그시 아래로 눌렀다.
그러자 별 힘들이지 않았는데도 로빈의 무릎이 천천히 굽혀지더니, 결국 바닥에 제대로 주저앉아서 내 물건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됐다.
“다시 한번 말해 보시지? 내가 복종하고 굴복할 남자는 네가 아니야?”
한껏 비꼬듯이 이죽이며 물건을 강하게 휘둘러 로빈의 뺨을 때렸지만, 로빈은 멍하니 내 물건을 보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뭐, 좋아. 어차피 로빈을 무력화시킨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줄리안.”
“어, 어? 나?”
야. 아까는 제대로 반응해놓고 이제 와서 그러기냐?
마음은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말이야. 이러고 있는 나 자신도 이렇게 기분이 복잡한데, 옆에서 보고 있는 넌 오죽하겠냐.
“그래. 너. 지금 가만히 뭐 하는 거지? 저 녀석들을 전부 도륙 내라고 말했을 텐데? 1분도 안 걸리는 것 아니었나?”
“아, 아아…응.”
내 말에 겨우 자신의 할 일을 기억해낸 듯, 줄리안은 잠깐 꺼졌던 두 손의 흑염을 다시 이글이글 불태웠다.
아까보다 상당히 투기가 옅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뭐, 상관없겠지. 투지가 있든 없든 저런 잔챙이들을 정리하는 것쯤은 일도 아닐 테니까.
“자, 자, 자, 잠깐! 잠깐 기다려 보실까! 나일! 나일이라고 했던가!?”
그러자 뒤에 물러나 있던 잔챙이들도 겨우 정신이 들었는지, 허둥지둥 대면서 손을 휘젓기 시작했다.
“뭐지?”
“네 목적은 우리들 블래스터 가에 정식으로 도전하고 싶은 거겠지? 좋아. 알았어! 우리들이 주군에게 안내해주지!”
저 녀석, 아까 제일 역정 내던 걔 아니야? 자기가 불리해지니까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꾸는구나.
아니. 이것도 강자에게 따른다는 자기들만의 원칙에 철저히 따르는 건가?
“야, 너 미쳤어!?”
아,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다.
주변에 있던 다른 놈들이 기겁하면서 놈을 말리려고 했지만, 놈의 결심은 확고했다.
“그럼 여기에서 이대로 죽고 싶어!? 저걸 좀 봐! 너도 눈깔이 있으면 저 모습을 보라고! 저 새끼 정상이 아니야!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새끼가 아니라고!”
…뭘까, 이 기분은.
아니. 아마도 말이지. 아마도 내가 생각하는, “저 변태새끼 제정신이 아니야!” 라는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 아닐 거야.
거근 신앙이라는 건 비스 전체에 퍼져 있는 상식 같은 거니, 그 영향도 여자만 받는 것이 아닐 테니까.
여자만큼 강하게 영향받는 건 아니겠지만, 남자 역시도 자기보다 더 큰 물건을 가진 남자를 보면 자연스럽게 기가 죽고 남자로서 졌다는 느낌을 받을 거라는 얘기다.
그러니 저 녀석이 내 물건을 가리키며 저런 말을 해도, 아마 “저렇게 남자다운 놈을 우리 따위가 상대할 수 있을 리 없어!” 라는 뜻으로 하는 말이겠지.
“화, 확실히….”
“저게 뭐야 씨발…무서워….”
“세상은 불합리해….”
“저게 인간인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분이 찝찝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로빈을 찾으러 올 때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정신 나간 방식으로 일을 진행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어쩌다가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일이 흘러가면서 조금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도 없었다.
애초에 계획대로 로빈을 사로잡더라도 결국 목적은 블래스터의 대장을 만나 담판을 짓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결과만 놓고 보면 계획대로 일이 흘러간 것과 똑같은 것이, 아니. 계획보다 훨씬 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게 된다.
그러니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주군! 저 그게…손님이 오셨습니다!”
잔챙이들의 안내를 받아서 건물 안을 이동하며 그렇게 속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자니, 어느샌가 우리는 척 보기에도 안에 대장이 머무를 것 같은 으리으리한 문 앞에 도착했다.
“아앙? 손님이라고오?”
그 부하에 그 대장이라는 걸까? 안에서 들려온 낮고 굵은 목소리에서는, 품위도 위엄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넷! 그, 그러니까! 그게!”
하지만 그런 목소리라도 부하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거겠지. 문을 두드린 잔챙이는 눈에 띄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옹알옹알 뭐라고 하는 거야!? 들어와서 똑바로 말해!”
아무래도 문 너머에 있는 놈은 상당히 성급한 성격인지, 부하가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있자 답답하다는 듯 입실 허가를 내렸다. 그 입실 허가가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됐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당당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앙? 너는 뭐야?”
방의 안에는 인간과 고릴라를 반반 섞어놓은 것 같은, 아니. 고릴라의 비율을 조금 더 높여서 섞어놓은 것 같은 고릴라인간이 앉아서 술병째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중2병이 블래스터 가문은 비스에서도 최고로 파괴적인 무술을 자랑한다고 했던가? 확실히 힘 하나는 엄청 세 보이네.
뭐, 그래 봤자 내 상대는 아니지만.
“내 이름은 나일. 블래스터 가문에 대결을 청하러 왔다.”
“…아앙?”
이 새끼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런 표정으로 멍하니 내 얼굴을 보던 고릴라인간은, 시간이 지나자 점차 내 말의 의미가 이해되기 시작했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해갔다.
그래. 내 목적은 처음부터 이거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비스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강자존의 세계. 수장의 자리마저도 힘 있는 자가 차지하는 세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 어느 때나 쳐들어가서 수장과 싸워 이기기만 하면 된다는 건 또 아니다.
그랬다가는 개나 소나 도전해 보겠다고 나설 테고, 수장은 하루도 쉴 날 없이 싸우기만 하느라 업무가 마비될 테니까 말이야.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비스의 초대 수장은 일 년에 한 번 수장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날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것도 처음 그런 날을 만들었을 때는 신분에 상관없이 뜻있는 자라면 누구나 수장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전에 중2병한테 얘기를 들었을 때도 생각했지만, 비스의 초대 수장이라는 사람은 좋게 말해서 상당히 호탕한 사람이었던 거겠지,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비스 내의 권력 구도가 정착됨에 따라 변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지금에 와서는 수장에게 도전할 수 있는 자리도 예전과 같은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일신의 무력이 널리 알려진 인물들만 초청되는 자리로 변해 있었다.
즉, 내가 아무리 수장을 이길 힘이 있더라도, 우선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이 갖춰지지 않으면 비스의 수장 자리를 빼앗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 수장에게 도전할 자격을 얻기 위해서, 나는 지금 이렇게 블래스터 가문에 와 있다는 얘기다.
수장의 자리에 일반인들이 도전할 수 있는 걸 벤치마킹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비스의 명문 가문들도 저마다 강자의 도전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도전하는 자는 이기면 명성을 얻을 수 있고, 명가들도 자신들이 이만큼이나 강하다는 것을 증명하여 제자를 끌어모을 수 있고, 그 제자라는 명목의 사병이 곧 자신들의 힘으로 이어지니까 말이야.
뭐, 쉽게 말해서 명가는 무협지에 나오는 문파나 세가를, 강자의 도전은 도장 깨기를 생각하면 편하다.
물론 도전을 환영한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이름이 알려진 강자에 한하는 얘기로, 이겨봤자 아무런 선전도 되지 않는 어중이떠중이들은 찾아와봤자 문전박대를 당하기에 십상이다.
그래서 나도 우선 이쪽 사정에 정통한 로빈을 먼저 사로잡은 다음, 그를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약점을 잡든 뭘 하든 해서 블래스터 가문이 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하려고 한 거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이, 난 지금 이렇게 블래스터 가문의 가주가 기다리고 있는 방까지 오게 됐다. 그것도 가주 본인의 입실 허가를 받아서.
이렇게 된 이상, 상대가 제아무리 무명 소졸이라도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들어오라고 말한 건 다름 아닌 가주 본인이니까.
그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 저 고릴라인간이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면서 화를 참고 있는 거겠지.
“이…이 쓸모없는 새끼들아!”
아, 결국 못 참았구나.
고릴라인간이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내던지자, 뒤에서 술병이 낸 소리라고 상상하기 힘든 폭발음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건지 보고 싶지만, 그러면 기 싸움에서 지는 거니까 태연하게 앞만 보고 있자.
“저딴 이름도 없는 잡놈 하나 못 막아서 여기까지 데려와!?”
야. 고릴라인간. 잡놈은 너무하지 않냐? 나일이라고 이름도 알려줬는데.
“죄, 죄, 죄송합니다!”
“로빈! 네년은 같이 있으면서 뭘 한 거냐!?”
“훗. 너무 뭐라고 하지 마. 얜 그저 자기 안에 새겨진 여자의 본능으로 알아봤을 뿐이야. 누가 더 우수한 남자인지를 말이지.”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로빈의 허리에 팔을 감고 내 옆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그리고 로빈은 그런 내 행동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가만히 내 옆으로 끌려왔다.
“앙?”
그 모습을 보고, 고릴라인간도 드디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로빈, 네년 지금 뭐 하자는 거지? 네년을 누가 여자로 만들었는지, 잊은 건 아니겠지?”
“…그건….”
“누가 여자로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누가 더 우수한 남자냐는 거지.”
“네놈은 닥치고 있어라. 로빈. 마지막으로 한번 더 기회를 주지. 지금 당장 거기에 있는 잡놈을 쳐 죽여라.”
쳐 죽이라니. 말 한번 참 무섭게도 하네.
뭐, 아무리 그렇게 눈에 힘주고 말해 봤자.
“못 하지?”
“흐윽….”
로빈의 허리에 얹고 있던 손을 위로 올려서 그 가슴을 우악스럽게 잡으며 말하자, 로빈은 더더욱 고개를 푹 숙이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이…이 개 같은 연놈들이! 감히 둘이 같이 날 무시해!?”
“주, 주군! 진정하세요!”
“닥쳐라! 저 두 연놈들을 때려죽인 다음에는 바로 네놈들 차례….”
“하지만 이 녀석, 진짜로 보통 놈이 아니라고요! 주군도 보면 알 거예요! 이걸 봐주세요! 이걸!”
어? 어!? 야 이 미친놈아! 갑자기 사람 바지는 또 왜 벗겨!?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나는 변변한 저항조차 못 해보고 그대로 바지를 벗겨졌다.
제,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여신의 힘이여! 내 물건에 힘을! 되살아난 자존심!
나는 물건을 풀발기 시키고, 두 손을 활짝 펼쳐서 가랑이 사이로 가져가며 보란 듯이 포즈까지 잡아줬다.
아니. 말해두지만, 장난하는 거 아니야. 정신이 나간 건 더더욱 아니고.
임기응변하면 구원. 구원하면 임기응변 아니겠어? 다 이 쌩쌩 돌아가는 머리로 생각한 결과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거야.
만약 내가 당황해서 바지를 끌어 올렸다고 해봐. 그랬다가는 잔챙이 하나한테 허를 찔려서 바지가 벗겨진 실력도 뭣도 없는 멍청이가 되는 거잖아?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행동하면, 오히려 알고도 가만히 내버려둔 간 크고 자신감 넘치는 놈이 되는 거지.
“뭘 보라…아.”
그리고 이렇게 물건을 보여주는 건 실질적인 도움도 된다.
아까 이 잔챙이들도 싸우기 전에 내 물건만 보고도 싸울 의지를 상실했으니까 말이야. 손자 할아버지도 말씀하셨잖아? 최고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이기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저 고릴라인간과도 싸우기 전에 이길 수 있다면, 이런 바보 같은 짓도 결코 헛짓거리는 아니라는 얘기지.
왠지 하는 짓이 동물 수컷들이 자신의 특정 신체 부위를 자랑하며 기 싸움하는 것 같은 모양새라서 상당히 기분이 착잡하지만…아, 아니. 이것도 전부 승리를 위해서!
저것 봐. 실제로 저 고릴라인간도 내 성기를 보고 기가 죽어서….
“네놈…지금 뭐하자는 거냐?”
크허흑…. 제, 젠장. 이것도 다 도움이 되는 행동이라고 정신무장을 하고 있었던 만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 반동으로 돌아오는 데미지도 그만큼 더 크군. 죽고 싶다.
“서, 성기 크기가! 흥! 뭐, 뭐가 어떻다는 거냐! 확실히. 그래 확실히 크면 더 남자다운 확률은 높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하지만 남자는 그게 전부가 아니야! 결국 최종적으로 남자다움을 결정짓는 것은 힘이다! 바로 이 주먹이다!”
어, 어라? 의외로 먹혀든 거 아니야? 저 고릴라인간 목소리 엄청 떨리는데? 아니. 그냥 떨리는 수준이 아니라 반쯤 울려고 하는데?
“훗. 그럼 한번 주먹으로 결정지어볼까? 누가 더 남자다운지를. 결투다!”
왠지 계속 분위기를 이상하게 끌고 가려고 하는 세계의 의지 같은 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는 마음을 다잡고 바지를 끌어올렸다.
이건 코미디의 한 장면이 아니야. 굳이 분류하자면, 신의 사명을 받고 이 땅에 신의 뜻을 설파하는 내용의 장엄한 성전. 그중에서도 제법 중요한 대목이니까!
“좋다. 내가 이 두 주먹으로 네놈을 다진 고기로 만들어, 성기의 크기가 남자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똑똑히 알려주지!”
야. 사람이 좀 진지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하는데 꼭 그런 말을 넣어서 초를 쳐야겠냐? 왜 그렇게 집착해? 혹시 많이 작냐?
“간드아아아아!”
이럴 때는 보통 도전자한테 선공을 양보해주지 않냐? 아니. 딱히 상관없지만 말이야.
두 주먹을 붉게 물들이며 돌진해오는 고릴라인간을 향해, 나도 똑같이 주먹에 힘을 불어넣으며 달려갔다.
우선은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혀서 상대의 역량 파악을….
“주거어어어어어!”
“이 미친 고릴라가 어딜 노리고 주먹질을 하는 거야!? 야! 너도 같은 남자면서 꼭 거길 그렇게 노리고 싶냐!?”
정확하게 물건을 노리고 날아오는 주먹을 가까스로 피하자, 얼마나 힘을 담은 건지 놈의 주먹이 그대로 바닥에 부딪히며 폭발음이 들려왔다.
맞았으면 알짤 없이 알 두 쪽 다 한 번에 터졌겠네. 저거 진짜 정신병자 아니야?
“닥쳐! 주제도 모르고 블래스터의 이름에 도전하는 잡놈에게 용서란 없다!”
아니. 누가 봐도 블래스터랑 상관없이 그냥 너 개인의 원한이잖아, 이 미친 고릴라야.
“으으아! 크하아!”
게다가 놈의 공격은 거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바닥에 그대로 맞붙이고 있던 주먹으로 땅을 그으며 팔을 휘두르자, 또다시 바닥이 폭발하며 그 여파가 내가 있던 장소까지 다다랐다.
그림자 이동이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성격이야 어찌 됐든, 그 실력만큼은 진짜라는 건가.
사실 레벨만 놓고 보면 내 쪽이 압도적이고, 월영무사의 레벨도 그림자 이동을 남용하면서 많이 올랐으니, 그냥 순수 무력만으로 상대해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레벨빨이 있어도, 결국 전투 직업의 레벨 차이에서 오는 전투력의 격차는 무시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나도 슬슬 진심으로 해볼까.
어차피 목적은 수장의 자리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만큼의 명성이니, 시간을 오래 끄는 것보다는 압도적인 차이로 끝내버리는 게 더 좋기도 하니까.
“쥐새끼처럼 쫄랑쫄랑 잘도 도망 다니는구나! 남자가 아니었나!? 남자라면 남자답게 정면에서 부딪혀봐라!”
아니. 자기는 주먹에서 폭발을 뿌려대면서 정면으로 부딪치라고 하는 건 그건 그거대로 치사하지 않냐?
게다가 맨 처음 주먹끼리 부딪히려고 했을 때는 네가 이상한 데를 노린 바람에 빗나갔잖아.
뭐, 좋아. 정 그렇게 정면에서 부딪히길 원한다면.
“쥐새끼라…. 좋아. 장난은 이쯤 하기로 하지.”
피하기를 그만두고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춰선 나는, 그대로 한 가지 스킬을 발동했다.
사라야, 내게 힘을 줘!
“으으윽!? 뭐, 뭐냐 네놈…. 뭐냐 그 힘은!?”
내 머리는 지금, 노랗게 물들어서 쭈뼛쭈뼛 서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될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 온몸에 깃드는 것이 느껴졌다.
이 힘만 있다면, 세상에 그 어떤 일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의지가 약한 자라면 이대로 힘에 취해 미쳐 버릴 것 같은 압도적인 힘.
“왜 그러지? 주먹끼리 부딪치고 싶은 것 아니었나?”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고릴라인간에게 코웃음 치면서,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긴, 한 걸음 내디딘 것만으로도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기의 여파에 대기가 요동치는 것이 느껴지는데, 이걸 느끼고도 여전히 주먹을 맞부딪치고 싶은 인간이 있다면 자살희망자밖에 없겠지. 그것도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고 싶은 자살희망자밖에.
하지만 이상하다. 전에도 이랬던가? 압도적인 힘이 몸에 흐르는 게 느껴진다는 점 자체는 똑같지만, 정도의 차이라는 게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당장 전에 플리투스의 발가스 장군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때도 용사의 힘을 몸에 둘러서 기선제압을 했었지만, 이 정도는 결코 아니었어.
비유하자면 전투종족 외계인이 삐쭉 선 노란 머리로 변신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전신에 붉은 오라까지 두른 느낌이라고 할까.
“주먹을 내밀어라. 바라던 대로 으스러뜨려 주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넘쳐흐르는 힘에 살짝 의문을 느끼면서도, 나는 계속해서 고릴라인간을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지금은 그런 의문을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니니까.
“크, 크으으윽….”
“블래스터 가문의 가주라면, 아니. 네놈도 남자라면 빼지 마라. 네놈이 말한 대로 남자답게 정면으로 부딪쳐라. 그리고 처참하게 박살 나라.”
“이…이 나를…폭쇄의 골리라를…우습게 보지 마라아아아!”
그래도 마지막 자존심은 있는 건지, 놈은 꺼져가던 투지의 불씨를 어떻게든 다시 불태우면서 내게 달려들었다.
그 주먹은 각오만큼이나 흉흉한 기세를 담고 있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내게는 어린아이의 장난처럼 느껴질 수준이었다.
너무 여유롭다 못해서, 오죽하면 ‘뭐? 고릴…뭐라고? 풉. 어떻게 이름까지 고릴라랑 비슷하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필사적으로 참아야 했을 정도니 말 다 했지.
아무튼 나 역시도 주먹을 내밀어서 놈의 주먹을 맞부딪쳐줬고.
퍼엉!
“끄아아아악!”
결과는 당연하게도 놈의 패배로 끝났다.
놈의 주먹은 이번에도 닿는 순간 폭발을 동반하기는 했지만, 내게 준 피해는 없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원래 파티에서 탱커 역할을 해왔던 내 단단함도 한몫 하기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피해가 없는 건 역시 용사의 힘 덕분이겠지.
공격뿐만 아니라 방어까지 만능이라니. 진짜 보면 볼수록 사기 직업이야.
“엄살 피우지 마라. 크게 다친 것도 아닐 텐데?”
애초에 난 딱히 공격할 의사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이겨서 명성을 얻는 건 좋지만, 너무 심하게 망가뜨렸다가 괜한 원한을 사면 그건 그거대로 또 피곤하니까.
아니. 애초에 난 용사의 힘을 완전히 자기 것처럼 다루지도 못하니, 자칫하면 망가뜨리는 정도로 끝나지 않고 아예 죽여 버릴지도 몰라.
이렇게까지 강해지면 힘 조절을 얼마나 해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단 말이지.
아무튼 그런 이유에서, 나는 놈을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뻗은 주먹을 도중에 멈추고, 놈의 주먹이 부딪혀오기를 기다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물론 그래도 놈이 주먹을 날린 기세가 기세인 만큼, 자기 힘에 못 이겨서 뼈에 금 정도는 갔겠지만.
“패배를 인정하겠나?”
나는 주먹을 부여잡고 쓰러진 놈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그 굴욕적인 구도에 당연히 고릴라인간은 화를 못 참고 폭발할 거라 생각했지만.
“…나일이라고 했던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의외로 놈은 자신의 패배를 덤덤하게 받아들였는지, 침착한 모습으로 대응했다.
정말로 의외로군. 십중팔구 앞뒤 생각 없는 다혈질인 줄 알았는데.
아니. 단순히 생긴 걸로 사람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아까까지 보여준 행동이 있으니까 말이야.
“뭐지?”
“난 이 주먹으로 모든 것을 부수고 나갈 자신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카이젤이 비스의 수장을 맡고 있지만, 그것도 올해로 끝낼 자신이 있었다. 내 힘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터였다!”
“패배를 인정하기 전에 한다는 말이 기껏해야 신세 한탄인가?”
“아니다! 난 단지 궁금한 거다. 이런 날 이긴, 네 힘은 대체 뭐지? 그런 압도적인 힘은, 내가 알기에는 단 하나밖에 없다. 네 힘은, 정말로 내가 생각하는 그 힘인 거냐?”
마치 용사의 힘이 세상에 다시 등장했다는 걸 섣불리 인정하기 힘들다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 힘에 경외심을 느끼는 것처럼, 고릴라인간은 생긴 것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렇군. 앞뒤 생각 없는 다혈질조차도 이렇게 반응할 정도로, 이 세계에서 용사의 힘이 가지는 의미는 크다는 얘기인가.
“그렇다면?”
나는 완전히 긍정하지 않고 대충 얼버무렸지만, 고릴라인간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던 모양이다.
“그런가. 그렇다면…그럼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다.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전쟁을 멈춘 건, 너냐?”
까, 깜짝이야. 뭐야, 이놈. 생긴 건 진짜 앞뒤 생각 없는 고릴라처럼 생겼으면서, 의외로 날카롭잖아?
아니. 뭐, 용사라는 게 그렇게 흔한 것도 아니고, 전쟁 하나가 멈춰 버린 사건쯤 되면 비스에까지 소문이 들려오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니, 용사와 용사를 연결 지어 생각하는 게 딱히 이상한 건 아니지만.
“뭐냐, 그건?”
“모르는 거냐?!”
속내를 완전히 숨기고 태연한 얼굴로 받아치자, 고릴라인간은 모르는 게 오히려 더 놀랍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모른다. 애초에 흥미도 없다.”
“전쟁에…흥미가 없다?”
아차. 전쟁신 세계에서 이건 너무 선 넘은 발언이었나? 깜짝 놀라서 반사적으로 부정하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만.
뭔가, 뭔가 변명을 생각해내자. 그래!
“내 피를 들끓게 하는 건 강자와의 싸움뿐이다. 오합지졸이 모여서 누가 더 많나 숫자 놀이나 하는 것 따위에 어째서 내가 흥미를 느껴야 하지?”
“숫자 놀이….”
“그렇다. 전쟁이 시작된 지 몇 년이 지났지? 아직도 결판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 전쟁이 숫자 놀이나 하는 애들 장난이라는 증거지. 만약 거기에 압도적인 강자가 있었다면, 전쟁은 순식간에 끝났을 거다.”
“너 같은…용사가 있었다면 말이냐?”
내 얘기를 듣고,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전쟁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다시 한번 떠올린 거겠지.
고릴라인간은 내 말에 설득됐는지, 묘하게 이해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이런 말에 넘어가 줘서. 진짜 말 한 번 잘못해서 큰일 나는 줄 알았네.
뭐, 그래도 이걸로 확실히 알았겠지.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전쟁을 멈춘 용사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흥. 아무튼 용건은 끝났다.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가도록 하지.”
“기, 기다려!”
용사의 힘을 해제한 나는, 마치 원래부터 내 소유물이었던 것처럼 로빈의 허리에 팔을 감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내 앞을, 고릴라인간이 황급히 막아섰다.
“뭐냐? 설마 불만이라는 건 아니겠지?”
젠장. 이제 슬슬 마나가 부족해서 용사의 힘을 쓸 수도 없는데.
물론 용사의 힘 없이도 이기려고 마음만 먹으면 성자 스킬로 이길 수는 있지만, 그래선 모처럼 정상 궤도로 돌려놓은 계획이 다시 엉망이 된다.
“아니다! 네 목적은…카이젤이겠지?”
“호오….”
아까도 잠깐 생각했던 거지만, 이 녀석, 보기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타입이잖아?
뭐, 강자와의 싸움에 피가 들끓는다고 말하기도 했고, 카이젤이 파견했던 비수를 잡아가기까지 하는 거니까 힌트는 충분히 던져준 셈이지만.
“하지만, 너 같은 무명이 날 이긴 것 정도로는 수장 선발 의식에 참여할 수 없다. 그리고 수장 선발 의식 이외의 날에는 카이젤과 싸울 수 없다. 만약 여기에 온 것처럼 멋대로 카이젤을 찾아가서 공격하면, 넌 비스 전체를 적으로…서, 설마! 상관없다고 말하는 거냐!?”
아니. 이 고릴라인간이 사람 말도 안 듣고 혼자 북치고 장구 치고 다 하네.
그래. 안 말린다. 다 네 멋대로 생각해라.
“네놈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슬슬 오해를 풀기도 귀찮아져서, 나는 그렇게 말하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고릴라인간이 생각지도 못했던 제안을 해왔다.
“기, 기다려! 우리 블래스터 가문이 발판이 되어주겠다!”
“…자세히 얘기해 봐라.”
처음부터 알고 찾아온 게 아니라 로빈을 향해 날아가는 전서구를 쫓다 보니 오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블래스터의 가주는 수장 선발 의식에 고정적으로 초대되는 멤버 중 하나라는 설명은 아까 중2병에게 들었다.
그런 블래스터 가문에서 발판을 마련해 준다는 건….
“내 힘으로 수장 선발 의식에 꽂아주겠다! 원한다면 다른 강자와의 싸움도 주선해주겠다!”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이익이 대체 뭐지?”
“나는…내 눈으로 보고 싶다. 지상 최강의 인간이, 비스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발아래에 두는 장면을!”
보기보다 머리를 잘 쓰는가 싶었더니, 결국은 그런 생각으로 귀결되는 건가. 진짜 여기 놈들은 하나같이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 없는 모양이군.
하지만 나로서는 이보다 더 반가운 제안이 없었다.
결국 내 목적도 수장 선발 의식에 참여해서 카이젤을 쓰러뜨리고 내가 비스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말이야.
뭐, 그래 아까부터 잡고 있던 컨셉이 있으니, 지금은 덥석 물기보다 조금 더 뜸을 들여 볼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난 전쟁 따위에 관심 없다. 카이젤을 이긴다고 해도 그뿐이다. 수장자리는 맡지도 않을 거고, 하물며 전쟁 따위에 나서서 잔챙이들을 학살하고 다닐 생각은….”
“하지만 그 전쟁에 네가 원하는 강자가 나온다면?”
그래. 예상대로 그 얘기를 꺼내는군. 역시 생긴 것치고는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야.
의도대로 움직여주는 고릴라인간에게 한번 씨익 웃어주면서, 나는 흥미가 생겼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자세히 얘기해 봐라.”
“아까 말했지만, 얼마 전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네가 말한 대로, 갑자기 등장한 압도적인 강자에 의해서 끝났다고 하더군. 그리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 강자의 정체는 바로….”
“용사인가.”
더더욱 재미있어졌다는 듯이, 나는 한쪽 입꼬리를 위로 잔뜩 당기며 웃었다.
나도 가면 갈수록 표정 연기가 늘어나는 것 같단 말이야. 만약 원래 세계로 돌아간다면, 배우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뭐, 우리 애들을 두고 돌아갈 생각도 없지만.
“그래! 그리고 플리투스와 바프라의 전쟁이 멈춘 지금, 다음에 용사가 나타날 곳은 분명 우리 비스와의 전선이다!”
“재미있군. 실로 재미있어.”
재미고 자시고, 난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말이야.
내가 따로 연락하지 않는 이상, 용사가 비스와의 전선에 모습을 드러낼 일 없다는 것까지 전부.
하지만 나는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한 끝에, 결정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스 따윈 아무래도 좋지만, 다른 용사와 싸울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좋아. 그렇다면 네놈은 지금부터 내 수족 1호다. 불만 없겠지?”
“없습니다!”
바로 태세 전환해서 존댓말까지 하다니. 이렇게까지 강자존의 법칙이 철저하게 지켜지니, 확실히 편하기는 하네.
그래 봤자 결국에는 내 손으로 전부 부숴 버릴 거지만.
“그러면 곧장 저희 가문의 힘으로 나일 님을 수장 선발 의식에 참여할 수 있도록 추천….”
“필요 없다.”
“네, 네?”
확실히 추천받아서 가면 편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가서 카이젤을 이기고 비스의 수장이 되어봤자, 진심으로 날 따를 사람이 얼마나 될까?
내가 원하는 건 비스 전체를 완벽하게 지배하는 것이다.
그래서는 각지의 유력자들을 직접 내 발밑에 무릎 꿀릴 필요가 있었다. 이 고릴라가 내 힘을 맛보고 나서 이렇게 태세를 전환한 것처럼.
“아까 원한다면 강자와의 싸움을 주선해 준다고 했었지?”
“네! 제 인맥으로 부를 수 있는….”
“네놈의 인맥은 필요 없다. 강자의 정보는 저 여자한테 들어라.”
“네? 저 여자…말입니까?”
로빈을 향해 턱짓하면서 말하자, 고릴라인간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는 머리 좀 돌아간다 싶더니만, 이런 건 또 못 알아듣네. 머리가 돌아가 봤자 결국 싸움과 관련됐을 때만 돌아간다는 건가.
“저 여자는 본래 카이젤이 본인의 자리에 위협되는 인물을 감시할 목적으로 파견한 여자다. 강자에 대한 정보라면 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있겠지.”
나도 그래서 데려가려고 했던 거니까 말이야.
블래스터 가문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로빈의 정보를 바탕으로 돌아다니며 도장 깨기를 할 생각으로.
“아침까지 정보를 추슬러서, 도전장을 보내라. 블래스터 가문의 도전장이라면 웬만한 놈들은 쉽게 무시할 수 없겠지.”
사실 로빈을 얻더라도, 우리끼리 하려면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블래스터 가문을 쳐부수고 나왔다는 소문이 퍼지더라도, 그전까지 완전히 무명이었던 내 도전을 쉽게 받아줄 곳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그걸 또 일일이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정보를 모으고 계획을 꾸밀 생각을 하면, 진짜 한숨밖에 안 나왔었는데.
그게 이렇게 간단히 해결되는 것만으로도, 블래스터 가문은 충분히 이용 가치가 있었다.
“그 도전장이, 내가 걷는 패도의 첫걸음이 될 거다.”
우선은 각지의 유력자들을 전부 발밑에 꿀린다.
그렇게 수장 선발 의식에 날 초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듦과 동시에, 유력자들을 내 수족으로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패도의 첫걸음이라는 표현만큼 지금 상황을 잘 설명해주는 표현은 없겠지.
“여기는 집안까지 살풍경하네.”
안내받아 온 방을 둘러보면서, 나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렸다.
“안 돼요, 구…나일 씨. 손님으로 대접해주시는 분께 그런 불평을 하시면.”
뭐, 그야 그렇지만 말이야. 병영 같은 방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런 말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하긴, 그러고 보니 아까 싸웠던 고릴라의 방도 이런 느낌이었지. 스스로 바닥을 마구 부수는 것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어 보이기도 했고.
겉보기만 철의 요새 같은 게 아니라, 내부도 요새처럼 꾸몄다는 건가. 대체 머리에 얼마나 전쟁 생각밖에 없으면 집을 이렇게 꾸며두는 건지.
이래서는 차라리 오기 전에 미리 잡아놨던 여관이 시설은 더 좋게 느껴질 정도잖아.
그렇다고 해서 진짜 여관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실례기도 하고, 이제 날 따르겠다는 놈들이랑 괜히 분란을 일으킬 필요도 없으니까.
“아무튼 전부 잘됐네. 로빈의 그런 모습을 봤을 때는 어쩌면 좋을지 막막했는데.”
“정말로요. 언제나 이렇게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가신 건가요?”
“그거야 뭐어….”
임기응변하니까 생각난 건데, 나 아까 우리 천사님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줬었지.
지금 모습을 봐서는 천사님도 딱히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역시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끄러웠다.
그나마 마지막에는 위엄 있는 모습을 보여서 어느 정도 상쇄하기는 했다고 생각하지만…아니. 그것도 딱히 내 힘으로 한 게 아니니, 사정을 다 아는 천사님 눈에는 위엄 있는 모습이 아니라 그냥 센 척하는 귀여운 모습처럼 보였을지도 몰라.
아까 내가 보여준 힘. 용사의 힘은, 당연한 얘기지만 나 자신의 힘이 아니다. 진짜 용사인 사라의 힘을 잠깐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그 비밀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이것도 사도 임명의 힘이다.
전에 사도 임명 레벨을 10까지 올리니까 종족창의 열람권이 개방됐잖아?
사실 그게 말이지, 내가 눈치채지 못했을 뿐, 나중에 알고 보니 레벨을 올릴 때마다 한 가지씩 기능이 개방된 모양이라서 말이야.
기능이라고 해봤자 레벨 10까지 개방된 기능은 전부 내 연인들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각종 스테이터스 창들의 열람권뿐이었던 것 같지만.
하지만 그 이후. 레이에게 사도 임명을 함으로써 사도 임명의 레벨이 11이 되자, 드디어 스테이터스 창 열람권이 아닌 새로운 기능이 생겼다.
그것이 바로 사도 의태. 간단히 말해서 다른 사도의 능력을 내 몸으로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그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는, 아까 보여준 모습으로 충분히 설명됐겠지.
여신이 그렇게 사도 임명 레벨 업을 권장했던 이유가 있었다는 얘기다. 설마 사도 임명에 이런 사기 스킬을 숨겨놨을 줄이야.
물론 사도 의태도 만능은 아니다.
일단 마나 소모가 무척이나 극심하다. 아까 잠깐 사라의 힘을 사용한 것만으로, 남들의 배는 되는 내 마나가 벌써 바닥을 드러냈을 정도로.
그뿐만이 아니다. 능력 자체도 우리 애들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
신체 능력이 우리 애들과 똑같이 변하더라도, 결국 그 능력을 컨트롤하는 건 나니까 말이야.
그나마 사라의 힘 같은 경우는 같은 물리 딜러의 감으로 어떻게든 사용할 수 있었지만, 디아나의 힘 같은 경우는 사도 의태로 불러와도 어떻게 써야 할지 감도 안 잡힐 정도였다.
심지어 디아나는 자기 스킬창에 있지도 않은 마법을 마구 만들고 써대니까 말이야.
게이머 능력으로 스킬창에 있는 스킬을 편하게 쓸 수 있는 나한테는 카운터도 이런 카운터가 없었다.
진짜 용사와는 다른 의미로 사기 능력이라니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도 의태 최고의 단점은 바로 이거였다.
스킬 레벨 업이 불가능하다. 사도 임명과 마찬가지로 스킬 포인트를 배당해서 레벨을 올릴 수 없는 것은 물론, 스킬을 사용해도 스킬 경험치가 올라가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 극심한 마나 효율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다.
아마 사도 임명의 부속 스킬인 만큼 사도 임명의 레벨을 올리면 사도 의태의 레벨도 같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사도 임명을 쓸 대상도 없고 더 쓸 생각도 없는 나한테는 의미 없는 얘기였다.
“그런가요….”
아무튼 얘기는 돌아와서, 천사님은 매번 위태위태하게 임기응변으로 헤쳐나갔다는 내 방식에 상당히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였다.
하지만 중2병의 눈이 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앞으로 자신이 곁에서 잘 보좌해주면 된다는 생각인지, 천사님은 입안에 맴돌던 말을 집어삼키고 대신 방긋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럼 오늘은 이말 쉴까요? 구원 씨도 힘을 많이 쓰셨으니…피곤하시죠?”
천사님. 제 하반신 쪽을 보면서 얼굴을 붉히고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건, 그런 의미로 생각해도 되겠지요?
같이 다니게 된 이후로 지금까지 매일 밤을 천사님과 함께했지만, 질리는 일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하면 할수록 천사님의 사랑이 느껴져서 더 좋아지기만 했다.
그래서 오늘도 난 천사님의 그 눈짓만으로도 바로 물건이 벌떡 설 정도로 흥분했지만.
“응. 그럼 우선…줄리안.”
그전에 우선은 평소처럼 중2병 먼저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
천사님에게 미안하지만 잠깐만 기다려달라는 눈짓을 보낸 후, 나는 중2병을 향해 몸을 돌렸다.
“어!? 나, 나 불렀어!?”
줄리안이 자기냐고 되묻는 수준에서는 살짝 발전했지만, 여전히 어리바리한 중2병이었다.
얘는 또 왜 이렇게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있는 거야?
“그래. 로빈 때문에 그래?”
별로 친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전 동료다.
전 동료가 남자들의 손에 잡혀서 그런 모습이 된 걸 목격했으니, 어느 정도 충격은 있겠지.
“어? 으, 으응….”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것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얼굴을 붉히면서 힐끔힐끔 내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 아무리 봐도 로빈 보다는 날 더 신경 쓰는 것 같이 보였다.
혹시 자기도 만약 나랑 하게 되면 로빈처럼 변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 그런 것치고는 그 눈빛에 담긴 감정이 뭔가…저 눈빛을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동경?
아, 혹시 내가 용사의 힘을 썼기 때문인가? 이 녀석은 내가 어떻게 그런 힘을 썼는지 모를 테니까 말이야.
뭐, 그런 거라면 그냥 넘어가 줘도 되겠지. 굳이 설명해 줄 얘기도 아니니까.
“그런가. 그러면 그런 생각이 안 들도록 오늘도 푹 쉬게 해주지. 준비해.”
“응….”
내 말에 한차례 움찔하고 몸을 떨더니, 중2병은 천천히 바지와 속옷을 벗고는 침대 옆 테이블에 차곡차곡 개어 놨다.
그리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서 잠시 나와 레이아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리더니, 결국 결심했다는 듯 자신의 두 손을 허벅지 안쪽에 대고는 양옆으로 벌렸다.
역시 손과 발을 무기로 쓰는 만큼 몸이 유연한 걸까?
중2병은 다리를 쫙 펼친 상태에서도 어렵지 않게 두 다리를 양옆으로 활짝 벌려 완전히 일자로 만들었다.
“자, 자아!”
그리고 그렇게 다리를 벌린 자세를 유지하면서, 중2병은 언제든 오라는 듯 그렇게 외쳤다.
비장하게 외치고는 있지만, 그 눈에 미약하게나마 기대감이 서려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과연 내 착각일까?
다리가 벌려짐에 따라 덩달아 살짝 벌려진 그 음부도, 그 기대감을 나타내듯 움찔움찔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평소라면 곧장 그 음부를 어루만지며 정신을 못 차리게 해줬겠지만.
“오늘은 위쪽도 벗는 게 어때?”
“으, 응!?”
“이 주변은 날도 후덥지근하니까 말이야. 땀 흘리면 기분 나쁘잖아?”
“그, 그런 문제…인가?”
아니. 나한테 되물어도 말이지.
하지만 내가 언제나 말하는 것처럼, 이 녀석은 바보도 아니고 상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이런 바보 같은 말을 했다는 얘기는, 내가 동의해 줬으면 좋겠다는 뜻이겠지.
“그래. 그런 문제야.”
“그, 그럼…어쩔 수 없네. 응. 어쩔 수 없어.”
말만은 어쩔 수 없이 넘어가 준다는 것처럼 하면서도, 중2병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희희낙락하게 보일 정도로 선뜻 상의를 벗었다.
진짜 이런 모습만 보면, 지난번의 세이지처럼 언제 자기 스스로 음부를 벌리고 제발 넣어달라고 매달려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아무튼 그렇게 상의까지 벗어서, 중2병은 완전히 알몸이 됐다.
참고로 이 녀석은 브래지어 따위는 하지 않는다. 아직도 자기는 남자가 될 거라는 꿈을 가지고 있고, 사실 브래지어를 해야 할 만큼 가슴이 있지도 않으니까.
뭐, 비슷한 크기인 우리 실비아는 그래도 여자로서 자존심이 있다는 듯 꿋꿋하게 하고 있기는 하지…아, 아니. 지금은 실비아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그래도 딱 하나만 말하자면, 실비아야. 난 납작하면 납작한 대로 그걸 감싸고 있는 속옷도 귀엽고 좋다고 생각해.
“이, 이제 됐어?”
“훗. 지금 설마 보채는 거야?”
그 사이에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서 다리를 활짝 벌린 자세가 된 중2병에게 천천히 다가가면서, 나 역시도 입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 그런 거 아니야! 안 하면 자게 해주지 않으니까!”
“흐음. 정말인지 의심스럽군.”
옷을 다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가서 중2병의 몸 위를 덮듯이 올라타며 말하자, 중2병은 시선을 피하며 묵비권을 행사했다.
“네 몸, 최근에는 엄청 잘 느끼게 됐으니까 말이야.”
한 손을 슬그머니 그 가슴 위에 얹자, 중2병의 몸이 움찔하고 한차례 튀어 올랐다.
안 그래도 없는 가슴이 위를 보고 누운 자세 덕분에 더 없어졌지만, 그래도 이 녀석이 여성이라는 걸 느낄 수 있게 해주는 말랑말랑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유두도 벌써부터 이렇게 쫑긋 서 있고.
“응긋…!”
노리고 만진 것도 아니고, 그냥 유두 근처를 손가락이 지나가면서 살짝 스치기만 한 것뿐인데도, 중2병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며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참았다.
“거기에 여기도 벌써부터 이렇게 촉촉하게 젖어 있고.”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천천히 내려서 그 탄탄한 복부를 지나 살짝 열린 음부로.
손끝으로 틈새의 표면 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가듯 움직이자, 그것만으로도 틈새에서 흘러나온 애액이 내 손가락을 촉촉하게 적셨다.
“으으음…히익!?”
그리고 그에 맞춰서 활짝 펼치고 있던 중2병의 다리도 뭔가를 참듯이 자연스럽게 오므라졌지만, 그러다가 허벅지 안쪽에 내 물건이 닿자 화들짝 놀라서는 다시 다리를 활짝 폈다.
너무 활짝 펼쳐서, 아예 음부를 앞으로 내밀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뭐야, 이건. 더 만져달라는 뜻이야? 부족해?”
도리도리.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중2병이었지만, 어차피 중2병의 의사는 별로 상관없었다.
“진짜 가면 갈수록 몸이 여자처럼 반응하는군. 남자가 되고 싶은 거잖아? 좀 더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게 좋지 않아? 네 의지가 무너져 버리면, 굳이 삽입까지 하지 않더라도 여자가 되는 건 순식간이라고. 세이지를 생각해 봐. 그렇게 되기는 싫지?”
“응흐읏…크흐응…!”
놀리듯이 말했지만, 중2병의 신경은 내 말보다는 내 손가락에 집중되어 있는 모양이었다.
말랑말랑한 음부 표면만 가지고 놀아지는 것이 안타깝다는 듯, 그 음부는 뻐끔뻐끔 움직이며 안에 뭔가가 들어오기를 갈망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로빈이랑 얘기할 때도 그랬지. 너, 그때 왜 부정 안 했어?”
“하앗…하앗…그, 그때애…?”
제대로 얘기할 수 있도록 손가락을 잠깐 멈추고 질문하자, 중2병이 멍한 눈으로 되물었다.
설마 기억 못 하는 건 아니겠지?
“로빈이 너랑 싸우려고 하면서 그랬잖아? 너도 그 남자한테 사로잡혔으니 알 거라고. 여자는 남자한테 복종할 수밖에 없다고.”
“아읏…!”
내가 말해주자 드디어 기억이 났는지, 중2병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다고 해서 내가 입을 멈추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평소라면 넌 여자가 된 게 아니라고 반박할 장면이었잖아?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그, 그거언….”
사실 대화의 흐름상 어쩌다 보니 반박 못 하고 그냥 넘어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한 번 꼬투리를 잡아본 건데, 저 격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냥 헛다리를 짚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설마 진짜로 원하는 거야? 그동안 내 손에 이렇게 느끼면서, 마음까지 여자가 되어 버린 거야?”
분위기를 탄 나는, 내 물건을 잡아서 그 끝을 뻐끔뻐끔 움직이는 중2병의 입구 근처에 맞댔다.
그리고 그대로 위아래로 물건을 천천히 움직이자, 귀두가 말랑말랑한 대음순을 가르면서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심지어 음부의 입구를 지나갈 때는, 귀두 끝이 살짝 그 안에 잠기는 느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으, 으흣….”
하지만 그렇게 위험한 짓을 하고 있는데도, 중2병의 두 손은 여전히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활짝 열어젖힌 위치에서 고정된 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뭐야, 이 녀석? 야. 진짜로 저항 안 해? 여기에서 내가 허리에 힘만 살짝 주면 넌 그대로 여자가 되는 거라고. 모르는 거 아니지?
이렇게까지 저항이 없으니 오히려 내가 더 당황스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타이밍에 빼면 내가 너무 겁먹은 것처럼 보이잖아? 뺄 땐 빼더라도, 적어도 그럴듯한 분위기를 만들고 나서 빼지 않으면.
“흐으음.”
속마음을 겉으로 전혀 드러내지 않은 채, 나는 마치 품평하는 것 같은 눈으로 중2병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물건을 잡고 위아래로 움직이던 손을 멈춰서, 귀두 끝을 그 음부 입구에 정확히 가져다 댔다.
“응읏…….”
서로의 거리는 아까부터 전혀 변함이 없었기에, 여지없이 귀두 끝이 살짝 잠기면서 고정됐지만, 중2병이 보인 반응은 그저 허벅지를 살짝 오므렸다가 다시 펴는 것이 전부였다.
“저항 안 하는군.”
그 상태에서 물건에 손을 떼고, 나는 두 손으로 중2병의 머리 양옆을 짚은 채 천천히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으아으읏…….”
아마 내가 이대로 삽입하는 줄 알았던 거겠지.
중2병은 온몸의 근육을 잔뜩 긴장시키며 떨리는 눈동자로 내 눈을 바라봤지만, 내가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지.
물건 끝이 음부에 살짝 걸친 상태를 그대로 유지한 채, 나는 재주 좋게 상체만 기울였다.
그리고 오른손을 중2병의 왼쪽 가슴 위에 얹어서, 그 심장 박동을 확인하듯이 천천히 어루만졌다.
“격렬하군. 왜 이렇게 두근거리고 있는 거지?”
“아……으…….”
“원하는 건가?”
“으흣…….”
“매일같이 이렇게 느끼다 보니, 이젠 느낄 수만 있으면 여자가 돼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지?”
“아니……아니야아…….”
허리를 빙글빙글 돌려서 당장에라도 삽입할 것처럼 움직이면서 중2병을 압박하자, 중2병도 드디어 위기감이 좀 생겼는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뭐, 그래 봤자 두 손은 여전히 자신의 허벅지 안쪽을 활짝 벌리고 있고, 몸도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아까보다 더 가까워져서, 이제는 귀두의 절반 정도가 중2병의 안에 잠겨있을 정도였다.
“아니라……그럼 왜 저항을 하지 않지?”
혹시 이 녀석, 여자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부분을 부정한 게 아니라, 느낄 수만 있으면 상관없다는 부분을 부정한 건가?
“동경하던 용사의 힘을 보니 생각이 바뀌었나?”
“으흣!?”
정답인가. 하여간 알기 쉬운 녀석이야.
“그런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마음속 마지막 방벽이, 용사의 힘 앞에 무너졌나. 용사의 힘을 쓸 수 있는 이 남자에게라면 여자가 되어도 어쩔 수 없어. 아니. 되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가.”
“으, 으흐읏…….”
마치 속마음을 전부 읽는 것처럼 말하는 내 오만한 말을, 중2병은 아까처럼 부정하지 못했다.
부정하기는커녕 오른손을 타고 느껴지는 그 심장 박동은 점점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가.”
“아, 아으……으흣…….”
내가 다 알겠다는 듯이 끄덕이자, 중2병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뻐끔거렸다.
끝내 부정하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다는 것처럼,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드디어 편해질 수 있다고 안도하는 것처럼.
그 얼굴을 본 나는, 허리에 힘을 주고는 있는 힘껏 내밀었다.
“응흐읏!”
“훗. 그럴 리가 없나.”
뭐, 곧장 앞으로 내민 게 아니라 물건이 위로 비껴가도록 올려쳐서, 결과적으로 물건 밑면으로 그 음부 위를 비비는 꼴만 되었지만.
“어!? 어어!?”
눈을 질끈 감고 신음했던 줄리안은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그리고 지금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 못 하겠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뜨며 당황했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계속 허벅지 안쪽에 고정되어 있던 손을 다리 사이로 내밀어서는 우리가 진짜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지 더듬더듬 만져서 확인해볼 정도였다.
“남자로서 브레디를 구하고 가문을 재건하고 싶다는 네 뜻은 나도 잘 알고 있어. 그런 네가 여자가 되고 싶을 리 없지?”
“어? 응?”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된 것 같은 중2병이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안심해. 전에도 말했지만 난 한 번 한 약속은 지키는 남자니까. 널 여자로 만들 생각은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허리를 천천히 앞뒤로 움직여 물건 밑면으로 그 음부 표면과 음핵을 지그시 비벼줬다.
“뭐, 너 스스로 내 여자가 되고 싶다고 애원한다면 또 모를까.”
전에 세이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귓가에 속삭여주자, 중2병의 몸이 다시 한번 흠칫하고 떨렸다. 내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음부에서 새어나오는 애액 역시도 아까보다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뭐, 그런 게 아닌 이상 난 평소처럼 널 기분 좋게만 해줄 뿐이야. 그러니까…….”
“그, 그러니까……?”
아니. 이번에는 딱히 분위기 잡으려고 한 거 아닌데.
대체 뭘 기대하고 그렇게 목소리를 덜덜 떨면서 호응해주는 거야?
“슬슬 손 떼는 게 어때?”
삽입됐는지 확인하려고 다리 사이로 갔던 손이 내 물건 위를 덮어서, 마치 네 음부에 더 강하게 비벼지도록 누르는 것처럼 됐는데.
아니. 난 기분 좋지만 말이야.
“혹시 기분 좋게 해주는 보답으로, 너도 날 기분 좋게 해주고 싶은 거야?”
“어!? 으학!?”
이제야 겨우 자신의 손이 뭘 하고 있는지 깨달았다는 듯, 중2병은 황급히 손을 떼서 다시 자신의 허벅지 안쪽에 얹었다.
“이, 이건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문제 아니냐? 몸이 자연스럽게 반응했다는 거잖아? 대체 얼마나 봉사 정신이 마음속에 각인되면 그렇게 되는 거야? 심지어 요즘은 시킨 적도 없는데.
전에 둘이서만 다닐 때는 가끔 성욕 해소라는 명목으로 이 녀석에게 봉사시켜서 조교 아닌 조교를 했지만, 이제는 레이아도 같이 있으니까 말이야.
“마치 여자 같은 말을 하는군.”
“그으읍……흐으읍!”
내 말에 화들짝 놀라서, 중2병은 두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러자 이번에는 쫙 펼치고 있던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오므라지더니……뭘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감는 거야? 섹스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녀석이. 진짜 해달라고 애원하는 건가?
뭐, 그렇게 원한다면, 분위기만이라도 맛보게 해줄까.
나는 마치 진짜 섹스를 하는 것처럼, 허리를 앞뒤로 격렬하게 흔들었다.
서로의 다리 사이가 부딪히며 철퍽철퍽 소리까지 나는 것이, 진짜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섹스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으으응……흐으으읏!?”
게다가 중2병도 진짜로 섹스하는 것처럼 몸을 뒤틀며 신음하고 있으니까 더더욱.
실상은 성자의 손길을 발동한 내 물건 밑면으로 음부 위를 비벼주고 있는 것뿐이지만.
“자, 오늘도 있는 힘껏 느껴. 다른 건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오로지 쾌감에만 집중해. 자, 자!”
두 손으로 중2병의 골반을 단단히 붙잡고 제대로 허리를 올려치자, 중2병은 허리를 활처럼 휘면서 몸을 뒤틀더니.
“응……하읏……읏……응흐으으읏!?”
결국 분수까지 내뿜으면서 그대로 절정에 달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물가에 나온 고기처럼 허리를 몇 차례 펄떡펄떡 움직이더니, 결국 고개를 픽하고 옆으로 쓰러뜨리며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뭐, 안 그래도 최근 매일같이 행해진 행위로 민감해진 애가 성자 스킬까지 받으면, 그야 이렇게 되겠지.
“후우……윽.”
물의 정령을 불러서 기절한 중2병의 몸과 내 몸을 씻게 하자, 내 머리에 가벼운 현기증이 찾아왔다.
아차. 그러고 보니 아까 전 전투 때문에 마나가 부족했었지.
“괜찮으세요?”
비틀거리는 내 모습에 놀랐는지, 방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우리의 행위를 지켜만 보고 있던 레이아가 쪼르르 달려와 내 옆을 지탱해줬다.
천사님은 여전히 남장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처음 이 모습을 봤을 때와 같은 거북한 느낌은 이제 없었다.
어떤 모습이든 천사님은 천사님이고, 무엇보다도.
“마나가 부족하신 거죠? 그럼 거기에 누워주세요. 곧바로…….”
그렇게 말하면서 내 몸을 침대에 눕힌 후, 천사님은 황급히 자신의 바지를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천사님의 다리 사이에는……폭신폭신해 보이는 황금빛 꼬리의 끝이 살짝 엿보이고 있었다.
그래. 변신술로 남장을 했어도, 어디까지나 남자로 보일 수 있게 외관만 살짝 바꿨을 뿐, 천사님의 그곳에는 아무것도 달려있지 않았다. 그저 평소보다 길이가 짧아진 귀여운 꼬리를 엉덩이부터 다리 사이를 지나 앞으로 돌려서, 앞섶을 불룩하게 연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거기까지 그렇게 디테일하게 바꿀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천사님이라도 만약 달려있는 모습을 봤다면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텐데, 진짜로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에 천사님이 저 모습으로 바지를 벗었을 때는 얼마나 식겁했는지.
뭐,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좋은 추억이지만.
“그럼……넣을게요?”
아무튼 바지를 벗어 던진 천사님은, 내 위로 올라타서는 내 물건을 고정하지도 않고 그냥 엉덩이만 내려서 간단하게 자신의 음부에 물건을 삽입했다.
“응……흣……흐읏…….”
처음에는 살짝 거부감이 느껴졌던 중저음의 목소리도, 지금에 와서는 그렇게 매력적일 수가 없었다.
“레이아.”
“하으……네에?”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 줘.”
뭐, 아무리 좋아봤자 결국 천사님은 원래 모습이 최고시지만.
“후훗. 그런 말이나 하시고. 벌써 기운이 돌아오셨나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내 코끝을 손끝으로 콕하고 찍으면서, 천사님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어주셨다.
“그야 레이아도 느껴지잖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은 걸 안에 넣고 있으니까.
“정마알. 엉큼하세요.”
얼굴을 살포시 붉히면서 곱게 눈을 흘긴 다음, 천사님은 나와의 삽입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빙글 돌렸다.
한 바퀴 빙글 돌면서 물건 전체에 천사님의 황홀한 감촉을 돌아가며 느끼는 건,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쾌감이었다.
그 압도적인 쾌감에 잠깐 정신을 팔린 사이에 천사님의 몸은 다시 정면을 향하고 있었고, 그 모습 역시도 어느 샌가 원래의 그 여성미 넘치고 아름다우신 천사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제 됐나요?”
“으음. 아직 살짝 아쉬워. 위에 걸치고 있는 옷만 없었다면…….”
“정마알!”
다시 길어진 꼬리로 내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리는 천사님이었지만, 그러면서도 두 팔은 앞으로 교차시켜서 손으로 자신의 상의 밑단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대로 상의를 위로 들어 올리자, 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압도적인 가슴이 아래쪽부터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꽉 끼는 옷 때문에 가슴이 위로 살짝 들리면서 보이는 밑가슴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였다.
“후우……구, 구원씨? 눈이 조금 무서우세요.”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최고야.”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어깨를 움츠리자 그에 따라 가슴이 중앙으로 모이는 것까지, 진짜 모든 게 다 완벽해.
나는 본능에 몸을 맡겨 그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려고 했지만, 그 전에 천사님이 먼저 내 손을 마주 잡아서 깍지를 끼고는 그대로 손을 침대 쪽으로 밀어붙였다.
“안 돼요. 아직 움직이시면. 적어도 한 번 싸실 때까지는……구원씨?”
그렇게 말하면서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려고 했던 레이아는, 내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을 짓자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두 눈을 빤히 들여다봤다.
“레이아.”
“네.”
“지금 그 말, 엄청 야했어.”
말뿐만 아니라, 내 두 손을 침대로 밀어붙이는 바람에 살짝 숙이며 더 강조된 커다란 가슴이나, 그 자세로 허리를 흔드는 구도까지.
“그, 그런 뜻이 아니라는 걸, 구원씨도 아시잖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부끄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을 지어도, 허리는 부드럽게 원을 그리듯 움직여주는 천사님이었다.
“우선은 한 번 싸셔서, 응흣……마나를…….”
“레이아는 내가 싸주길 바라는구나?”
“응으읏……정마알…….”
내 말에 반응한 듯 음부를 한차례 꾸우욱하고 조이더니, 천사님은 아예 내가 더 말하는 걸 원천봉쇄 해버리겠다는 듯 고개를 내려서 내 입술에 입술을 포갰다.
입술에 닿은 말랑말랑한 감촉도, 그리고 몸이 더 기울어지며 내 가슴팍에 맞닿은 폭신폭신한 감촉도, 모든 게 다 황홀했다.
천사님은 마치 ‘그런 말을 하는 입은 이 입인가요?’ 라고 말하며 혼내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마저도 내 눈에는 마냥 귀엽고 아름답게만 보였다.
“네에. 싸주세요. 제 안에 잔뜩.”
그리고 입술을 뗀 천사님이 내 귓가에 그렇게 속삭여준 순간, 내 물건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정액을 토해내고 말았다.
몸 위를 무언가가 누르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가위눌린 것 같은 기분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그 무게감은 오히려 무척이나 기분 좋아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뇌 내에 천연 마약이 자동 분비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슴팍을 짓눌러오는 이 물컹한 감촉은 특히나 더 그랬다.
“아응….”
아무래도 난 어느샌가 잠이 들어 버린 모양이다.
어제는 그 이후 마나 회복을 구실로 천사님께 몇 번 더 가만히 당하다가, 나중에는 나도 이성을 잃고 허리를 맹렬하게 흔들어댔던 게 기억의 끝이었다.
술에 취한 것도 아닌데 필름이 끊어질 때까지 해대다니.
중2병이랑 할 때는 삽입 직전까지 가서도 이성을 유지하고 버티는 내가 이렇게 되는 걸 보면, 역시 섹스는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게 제일이라는 게 새삼 실감이 됐다.
아참. 그러고 보니 중2병은?
“쌔액…쌔액….”
어젯밤의 그 이후로 쭉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거겠지. 중2병은 여전히 내 옆에서 조금 칠칠치 못하게 다리를 벌린 자세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뭐, 이걸 노리고 그런 짓을 한 거지만 말이야.
어젯밤 중2병이 스스로 바지를 벗고 다리를 벌렸던 것에서 알 수 있듯, 우리가 이런 짓을 한 건 어제가 처음이 아니었다.
처음 셋이서 비스에 온 그 날 이후로 계속, 매일같이 우리는 어젯밤과 같은 행위를 반복했다.
말해두지만, 성욕에 눈이 돌아가서 그런 건 절대 아니다.
어제만 하더라도 결국 중2병만 절정을 느꼈고, 나는 레이아랑 할 때까지 제대로 쾌감을 맛보지도 못한 채 애매한 흥분상태만 유지했잖아?
중2병이 내 물건을 손으로 봉사해주려고 했을 때도 손 떼라고 했었고.
내 목적은 쾌감이 아니었다. 단지 중2병을 기절 시키고 싶었을 뿐이다. 뭐, 거기에 더해서 조교 목적도 살짝은 있었지만.
중2병의 진실을 알게 된 그날 이후로, 얘가 절대로 날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못 하게 됐으니까 말이야.
나랑 둘이서만 다니는 거라면 적당히 내버려 뒀을지도 모르겠지만, 천사님까지 함께라면 또 얘기가 달라진다.
나는 중2병이 혹여나 허튼짓하지 않게, 계속 경계하고 있었다.
뭐, 경계했다고는 해도,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까지 크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두 눈 뜨고 멀쩡히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 녀석이 뭘 하든 금방 제압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내가 진짜로 조심해야 할 때가 있다면, 그건 이 녀석과 따로 떨어져서 행동할 때. 그리고 섹스할 때나 잠들 때뿐이었다.
그래서 결국 이렇게 된 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아니. 섹스할 때는 둘째 치더라도, 따로 떨어져서 행동할 때나 잠잘 때는 조심하고 싶어도 조심할 방법이 없잖아?
그럴 거면 아예 이 녀석을 먼저 기절시켜 버리자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물론 그냥 간단하게 목 뒤를 쳐서 기절시키는 방법도 떠오르지 않은 건 아니다. 오히려 제일 처음 생각한 건 그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힘 조절을 얼마나 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크나큰 문제가 있어서 말이야.
반면 성행위를 이용한다면, 어느 정도 자극을 줘야 얼마나 기절할지 경험을 통해 완전히 꿰뚫고 있었다.
게다가 애무를 하면 기절뿐만이 아니라, 중2병의 여심을 자극하여 배신할 생각을 원천 차단하는 부가 효과도 있으니, 그야말로 완벽하잖아?
뭐, 우리 천사님이 보는 앞에서, 심지어 천사님과 하기 직전에 다른 여자를 애무해야 한다는 중대한 문제점이 있기는 했지만, 그 점은 천사님이 너그럽게 이해해주셨다.
천사님이 괜히 천사님이 아니라는 거지.
물론 아무리 천사님이 이해해 줬어도 처음에 할 때는 엄청 미묘한 기분이었다.
그냥 애무만 하고 끝이 아니라, 기절한 중2병을 옆에 두고 이미 불붙은 성욕을 천사님한테 푸는 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하지만 천사님이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받아주시니까 나도 점점 익숙해지기 시작해서….
아무르 그래도, 어제는 조금 너무 나간 것 같았지만.
아니. 설마 그중2병이 그렇게까지 거부를 안 할 줄이야.
만약 그때 내가 그냥 허리를 밀어 넣었다면, 분명 중2병은 받아들였을 거다. 그런 확신이 들 정도의 모습이었다.
“진짜 남자가 되고 싶다면, 조금 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게 좋을걸?”
뭐, 어차피 무성별자라는 건 다 꾸며진 얘기로, 얘는 날 때부터 여자고 그게 바뀔 일도 절대로 없기는 하지만.
“읏….”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니, 내 말에 반응이라도 한 듯 갑자기 중2병의 몸이 움찔하고 떨렸다.
응? 뭐야, 이 녀석. 설마 깨어났나? 아니. 확실히 슬슬 깨어날 시간이기는 하지만.
“응….”
확인을 위해 손을 뻗어서 그 다리 위에 살짝 올려놓자, 칠칠치 못하게 벌어져 있는 그 허벅지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허벅지를 쓰다듬어 봐도, 손을 조금 더 뻗어서 그 다리 사이까지 가져가 봐도, 중2병은 여전히 자는 척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럴 때 정신 바짝 차리라고 하는 건데 말이야. 너무 그렇게 긴장 풀고 있으면….”
“으…크흣….”
손끝으로 꾹꾹 누르기도 하고 살짝 벌려보기도 하면서 그 말랑말랑한 대음순의 감촉을 음미한 다음, 나는 중지를 그 틈 사이에 슬쩍 밀어 넣었다.
어제 내 귀두를 반쯤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나 처녀. 고작 손가락 하나뿐인데도 조금의 빈틈도 없이 밀착해서 조이는 그 감촉은, 지금 당장 손가락이 아닌 다른 것을 처넣고 싶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쾌감을 참으며 자는 척하고 있는 것 때문에 괜히 더 힘이 들어가서 덜덜 떨리는 하반신은, 그 매력적인 감촉을 더욱 매력적이게 만들어줬다.
“느껴지냐? 여기가 처녀막이라고 하는 거야. 이게 찢어지면, 넌 여자가 된다는 거지.”
혹여나 상처 입지 않도록 조심조심 손끝으로 처녀막을 더듬자, 또 특유의 망상이라도 했는지 아니면 단순히 기분 좋아서 그러는 건지 그 하반신의 떨림이 더욱 커져갔다.
“너무 이렇게 떨면 잘못하다가 찢어진다. 너도 고작 손가락 따위에 정조를 잃고 여자가 되기는 싫잖아?”
“크흐으응….”
내가 그렇게 말하자, 중2병은 거의 우는 것 같은 신음을 흘리면서 억지로 힘을 뺐다.
그러자 원한대로 하반신의 떨림은 진정됐지만, 이번에는 또 힘을 너무 풀어 버린 걸까?
중2병의 다리 사이에서, 푸슛푸슛하고 분수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으으으….”
그렇게 죽을 것 같은 표정 짓지 마라. 오줌이 아닌 게 어디야?
그리고 넌 지금 자고 있는 거니까, 부끄러워할 필요도 없지 않겠어?
“여자 같은 반응을 하는군.”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아무런 반응도 안 할 정도로 푹 자고 있으라고.
“아직도 이렇게 막이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야.”
조금 전 절정으로 힘이 완전히 풀려 버린 걸까? 다시 한번 처녀막을 더듬더듬 어루만져 봐도, 중2병의 하반신이 아까처럼 힘이 잔뜩 들어가는 일은 없었다.
“내 경험상, 이렇게 반응하는 녀석은 언제 다리를 벌리고 애원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말이야.”
뭐, 이 녀석이 진짜로 그렇게 매달리면, 나도 곤란하지만.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중2병의 음부에서 손가락을 뺄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천사님한테 삽입하고 있기 때문인가? 왠지 평소에 이 녀석을 애무해 줄 때보다 더 흥분되는 느낌이 들어서 말이야.
“저, 저기이….”
하지만 그런 나와 달리, 중2병은 진심으로 위기감을 느낀 거겠지. 이 이상하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다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하던 중2병이, 드디어 두 눈을 뜨고 날 쳐다봤다.
“응? 아아. 일어났냐?”
“으, 응…그래서…이건…으흣…대체….”
“아, 미안. 조금 성욕을 분출하고 싶어서.”
별로 미안하지도 않은 말투로, 나는 당당하게 그렇게 말했다.
말뿐만 아니라, 처녀막을 더듬는 손가락 움직임 역시도 당당하게 계속 이어갔다.
“하…하응…하지 마안….”
“뭐야? 불만이라도 있어? 널 여자로 만들지는 않겠지만, 내가 성욕이 쌓이면 언제든 널 분출구로 삼겠다. 그런 약속이었잖아? 잊은 건 아니겠지?”
“그, 그게 아니라….”
그렇게 말하며 중2병의 시선이 향한 곳은, 바로 나와 레이아의 하반신 쪽이었다.
“너, 넣고…있는 거지?”
그렇군. 레이아랑 이러고 있으면서 왜 자기를 쓰고 있냐는 건가.
“넌 날 대체 얼마나 제멋대로인 놈으로 생각하는 거야? 너와는 달리, 레이아는 어제 새벽까지 날 받아내면서 고생했다고. 이대로 조금 더 자게 해주는 게 사람 된 도리라는 거잖아?”
급하게 생각해낸 구실이었지만,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흥분하고도 허리를 흔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
뭐, 중2병의 몸을 만져서 쌓인 성욕을 천사님한테 푸는 게 미안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기도 했지만.
“뭐, 하지만 너도 자는 걸 깨워서 미안하기는 하네. 아직 한잠 더 잘 시간이니, 원한다면 이대로 다시 재워줄까?”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상당히 야한 제안이었다. 내가 재워준다고 하면, 그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까.
중2병도 당연히 그걸 알고는 잠깐 당황한 눈치였지만, 말 그대로 잠깐뿐이었다.
“으, 응….”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리면서, 중2병은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냐. 그럼….”
“응흐윽!? 히이으읏!?”
처녀막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중지를 격하게 움직이자, 중2병은 이제 허리까지 활 모양으로 꺾으면서 몸서리쳤다.
“다시 한번 기분 좋게 잠들어.”
“히긋! 흐읏! 으흣…히으으으응….”
그 상태에서 내가 중지를 폭 하고 뽑자 다시 한번 몇 차례 분수를 뿜더니, 마치 브릿지 자세를 하는 것처럼 위로 잔뜩 들렸던 중2병의 몸이 다시 아래로 힘없이 푹 꺼졌다.
이것만으로 진짜 기절해 버리다니. 매일같이 잘 때마다 이런 식으로 잠드니, 이제는 아예 버릇이 들어 버린 걸까?
뭐, 내로서는 편하고 좋지만.
“후우. 이제 어쩌지.”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가요?”
손가락에 묻은 애액을 중2병의 허벅지에 문질러서 적당히 닦으며 중얼거리자, 갑자기 정면에서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헉!? 레, 레이아! 깼어!?”
대체 언제부터? 설마 중2병한테 한 짓을 본 건…미안해! 내가 잠깐 어떻게 됐었나 봐!
매일 밤 레이아의 눈앞에서 하는 건, 그래도 목적이 있어서 하는 거니 변명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조금 전 그건 성욕에 눈이 멀어서 그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선을 넘지는 않았으니 조교의 일환으로 봐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결과론이다.
“후훗. 어째서 그렇게 흥분하셨던 건가요?”
하지만 천사님은 전혀 화나지 않았다는 듯, 오히려 행복해 보이는 미소까지 지으며 내 뺨을 쓰다듬어줬다.
“그건….”
레이아한테 삽입하고 있어서 엄청 기분 좋은데, 깨우게 될까 봐 맘대로 흔들지는 못하니까.
말해두지만, 이건 진짜다. 그런 게 아니었다면 결코 중2병의 몸을 가지고 놀면서 대리만족하는 일 따윈 없었을 거라고 장담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천사님과 함께 다닌 이후로 중2병한테 성욕을 푼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렇게 말해 봤자 대체 천사님이 어디까지 믿어주실지….
“믿어요.”
크흑…처, 천사니임….
아무래도 믿음이 부족했던 건 나였던 모양이다.
“그럼 아까 하신 말도…그런 의미였나요?”
“으, 응? 뭔가?”
“조금 전에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어쩌지. 라고. 그 말은….”
천천히 그렇게 속삭이면서, 천사님은 마찬가지로 천천히 엉덩이만을 들어 올렸다. 찔꺼억 하는 소리가 아래쪽에서 선명하게 들릴 정도로.
“이 쌓여 버린 성욕을, 레이아가 깨어날 때까지 어떻게 참지. 라는, 그런 의미였나요?”
그렇게 말하면서, 레이아는 이번에는 천천히 엉덩이를 아래로 내렸다.
그것도 그냥 일자로 곧게 내린 게 아니라, 일부러 옆으로 크게 커브를 그리면서.
물건 옆면을 천사님의 부드러운 안쪽이 강하게 비벼주는 감촉도 그렇지만, 그 천사님이 이렇게 적극적으로야한 모습을 보여주시는 상황 자체가 너무도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어, 어라? 그러고 보니 천사님. 지금 눈에서 보랏빛 안광이….
“응….”
“후훗. 하지만 전 이렇게 깨어나 있는걸요?”
찰싹하고 맞부딪히는 소리가 날 정도로 완전히 엉덩이를 내린 천사님은, 자신의 대음순을 내 다리 사이에 비벼주듯 좌우로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어주기까지 했다.
“그러면 이제…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던전을 드나들 때도 매번 같이 행동하다가, 7계층으로 오면서 오랫동안 못 보게 된 반동일까? 아니면 중2병에게 애무해주는 걸 먼저 보고 나서 하는 거라 그런가? 요즘 천사님은 옛날보다 더 적극적인 것 같아.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너무 좋다.
게다가 적극적이라고 해서 마냥 이렇게 대범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이대로 레이아의 안을 쑤컹쑤컹 처박아서 그대로 제일 안쪽에 기분 좋게 싸고 싶어.”
“네…쑤…!? 네, 네헤…. 저기, 그게…구원 씨가…원하신다면….”
부끄러워할 때는 제대로 부끄러워하시거든.
아무리 구미호 모드가 되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셔도, 결국 천사님의 본질은 천사님이라는 거지.
“쑤컹쑤컹 박아도 돼?”
“그, 그…쑤, 쑤우….”
직접 말하는 건 부끄러워서 도저히 안 되겠는 모양이다.
“미안. 레이아가 너무 야해서 장난 한번 해봤어.”
“정마알! 너무하세요!”
입술까지 덜덜 떨면서 말문이 막힌 레이아에게 가볍게 키스를 해주자, 레이아는 꼬리로 내 허벅지를 탁탁 때리면서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저런 표정까지 아름다우시니, 진짜 말이 안 된다니까.
“하지만….”
“응?”
“쌓인 건…해결하실 거죠?”
“레이아!”
“꺄악!”
부끄러워하면서도 슬쩍 곁눈질로 유혹하는 천사님의 모습에, 나는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단 하나?”
아침보다는 점심에 더 가까운 시간.
내 테크닉에 기절해 버린 중2병이 일어날 때까지 천사님과 농밀하면서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어느샌가 시간이 이렇게 지나 버리고 말았다.
아니. 시간이 되면 알아서 부르러 올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어제 내가 보여준 힘이 상당히 두려웠는지 안 오더라고.
그래서 결국 상당히 늦은 시간에 방을 나오게 된 우리는, 지금 고릴라와 대면하고 있었다.
“네.”
우리한테 사람을 보내지는 않았지만, 자기 자신은 제대로 일찍 일어나서 우리를 대접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거겠지.
차갑게 식어 버린 식사를 빨리 다시 덥혀오도록 시종들을 독촉한 후, 고릴라는 생긴 것답지 않게 간사한 미소를 지으며 내 질문에 대답했다.
“제대로 로빈에게 정보를 듣고 보낸 거 맞지? 몇 개나 보냈는데?”
“그러니까 어디 보자…네 군데에 보냈습니다.”
일일이 손가락을 접어가며 세어보길래 내심 얼마나 많이 보낸 거야 싶었는데, 의외로 적잖아?
뭐, 로빈이 감시하고 있었던 건 전부 카이젤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이 있는 가문이었을 테니, 저 정도 숫자가 적당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게다가 비스 내부를 감시하는 비수가 로빈 혼자도 아니니까.
아무튼 4곳 중에서 단 한 곳에서만 결투를 받아들였다는 건가….
무명인 내 도전을 한 곳이라도 받아준 걸 놀라워해야 할지, 아니면 블래스터 가문을 이기고 그 블래스터의 가주에게 직접 추천서까지 받은 내 도전을 세 곳이나 무시한 걸 기분 나빠해야 할지.
“나한테 졌다고 제대로 공표한 거 맞지?”
비스의 결투는 결국 도전자도 도전을 받아들인 가문도 자신들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 행하는 것이다. 그러니 원래는 결투가 정해진 순간부터 결투가 행해진다는 것을 널리 알리고, 그 결과도 대대적으로 공표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나와 블래스터 가문의 결투는 그런 일반적인 과정을 거친 게 아니니까 말이야.
혹시 우리가 결투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거 아니야?
내가 나서서 알리고 다닌 것도 아니니, 이 녀석들이 입 다물고 있었다면 충분히 가능성 있어.
“무, 물론입니다!”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내게, 고릴라는 두 손을 황급히 저으며 외쳤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지만, 말을 더듬는 게 상당히 수상해. 분명히 뭔가 있어.
“하지만?”
“하지만…왠지 믿지 않는 눈치였습니다.”
내가 운을 띄우자, 고릴라도 내 눈치를 보면서 사실을 실토했다.
역시나. 하지만 이상하군. 패배한 놈들이 직접 패배를 인정한다는데도 남들이 그걸 부정하다니.
“블래스터 가문은 그 대쪽 같은 성품으로도 유명하니, 믿기 힘든 것이 아닐까요?”
“응?”
그렇게 생각한 순간, 옆에서 천사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투 자체는 평소의 나긋나긋하고 정중한 말투 그대로였지만, 목소리가 중저음의 중성적인 목소리가 되니, 왠지 유능한 남자 부하가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풍겼다.
“패배를 인정한 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고 치더라도, 그 블래스터 가문이 이전까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에게 마치 부하라도 된 것처럼 몸을 낮추고 일일이 추천서까지 써준 거니까요.”
“그렇군. 나일이라는 인물은, 블래스터가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낸 인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군.”
“네. 그렇지요?”
날 향해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준 후, 천사님은 고릴라를 향해서도 똑같이 되물었다.
천사님. 아무리 남장을 했다지만, 그렇게 남한테 함부로 눈웃음 짓지 말아 주세요.
“네,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저것 봐요. 고릴라 놈이 주제도 모르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잖아요.
천사님한테 엄한 놈들이 추파 던지는 게 싫어서 일부러 남장까지 시킨 건데, 남장을 하고도 천사님의 매력은 감출 수 없는 모양이다.
“크흠. 아무튼 그래서, 그 받아들였다는 한 곳은 어디야? 여기에서 가까워?”
“플레체 가문 말입니까. 멀지는 않습니다. 마차로 3, 4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입니다. 바로 출발하실 계획이십니까?”
“수장 선발 의식까지 그리 시간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잖아? 서둘러서 나쁠 건 없지.”
“네. 그러면 당장 플레체 가문의 무술과 대응법을 정리하여….”
“필요 없어.”
생긴 건 그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쓰고 그냥 막 들이대서 싸울 것처럼 생겼으면서, 의외로 꼼꼼한 녀석이야.
“네?”
“모처럼 강자와 싸우는 거다. 미리 다 알고 가면 재미없잖아? 거기에…상대가 누구든, 난 지지 않아.”
내가 한 말이지만 진짜 전투광이나 할 만한 오만한 대사로군.
하지만 아무리 오만하게 들릴지라도, 전부 사실이니 문제없다. 어제 잠깐 바닥을 보였던 마나도 천사님 덕분에 꽉꽉 채워진 상태니까 말이야.
지금의 내가 누구한테 진다는 건, 그야말로 진짜 용사라도 나타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다.
아니. 만약 진짜 용사가 나타나더라도, 성자 스킬이 있으니 충분히 이길 자신 있다.
“그러니 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또다시 도전장을 보낼 준비라도 해둬. 다음에 내가 돌아왔을 땐, 이번에 무시한 놈들도 계속 무시하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명성을 떨치고 있을 테니까.”
“크으으…네!”
미래는 전부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인다.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자, 고릴라는 어째선지 몸을 부르르 떨더니 감격한 목소리로 힘차게 대답했다.
…야. 다 좋은데, 왠지 표정이 아까 우리 천사님 봤을 때랑 비슷하지 않냐?
아니지? 아니. 그러고 보니 비스는 동성애가 성행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 그래도 아니지?
…그, 그러고 보니 이 자식, 로빈을 잡아놓고도 자기가 가질 생각 안 하고 없이 부하들한테 던져줬었지.
“그, 그래. 그럼 마차나 하나 준비해 둬.”
이 고릴라, 어쩌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놈일지도 몰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풍경을 보고 있으면, 왠지 이곳도 평화롭게 느껴지네요.”
“그러게.”
블래스터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타고 플레체라는 가문을 향하는 여정 길.
길을 아는 마부도 하나 붙여줬기 때문에, 도착할 때까지 우리는 마차 안에서 멍하니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처음 하루는 그래도 창밖 풍경이라도 보면서 버틸만했지만, 이틀째가 되니 그것도 지겨워졌다.
역시 이렇게 가만히 있는 건 성에 안 맞아.
천사님과 알콩달콩 수다를 떨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해도, 마부의 귀를 의식하다 보니 마음 놓고 얘기도 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대체 뭘 하면서 남은 시간을 버틸지 고민한 끝에, 나는 전에 느꼈던 의문점이나 조사해 보기로 했다.
“나일 님?”
뭐, 남이 보면 허공을 쳐다보고 멍하니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 얼굴을 엿보는 천사님의 어깨를 끌어안고 쓰다듬어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낸 다음, 나는 조사를 계속했다.
뭐, 조사라고 할 정도로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지만.
대체 이건 어떻게 된 걸까? 아니. 그 이전에, 고작 이거 하나로 그렇게 됐다고 단정해도 되는 걸까?
“으으음….”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아아…응. 잠깐만.”
천사님도 잘 모르실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혼자 끙끙대는 것보다는 같이 생각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그렇게 판단한 나는,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마차 안의 대화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막았다.
이것도 마나 소모가 은근히 크니, 그리 오래 버틸 수는 없지만.
“실은 사라의 힘이 갑자기 너무 세진 것 같아서 잠깐 조사해 봤거든. 일단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는 했는데, 이게 정말 맞는 건지 확신이 서지를 않아서.”
“어머, 사라 씨가요?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응. 사라의 직업에 배틀마스터가 추가된 건데….”
정확히 말하자면, 추가된 게 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던 직업인 궁사를 배틀마스터로 전직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무튼 원래 배틀마스터가 누구 직업인지를 생각해 보면, 어떤 경위로 이렇게 됐는지는 나도 어렵지 않게 상상이 됐다.
사라가 강해지면 그 힘을 따라 쓸 수 있는 나 역시도 안전해진다.
그런 이유로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고심하던 사라에게, 레이가 가진 배틀 마스터라는 직업이 눈에 띈 거겠지.
배틀마스터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특수 직업이다. 바꿔 말하자면 무기를 다루는 모든 직업의 상위 호환으로도 볼 수 있는 직업이라는 얘기다.
최근에는 활을 이용한 원거리전뿐만 아니라 근접전에서도 활약하는 사라다.
게다가 배틀마스터가 되면 내가 사도 의태로 그 힘을 이용할 때도 그냥 내 몸에 편한 격투술을 쓰면서 직업 보정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무기를 다루는 배틀마스터의 특성은 대충 봐도 전투와 관련된 모든 능력치를 뻥튀기해주는 용사의 특성과 시너지 효과를 무시무시하게 낼 것 같으니까 말이야.
여러모로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배틀마스터란 직업을 보고 사라는 레이에게 가르침을 청했을 거고, 레이도 내가 더 안전해질 거란 말을 듣고는 기쁘게 사라의 전직을 도와줬을 거다.
그러니 사라가 배틀마스터가 된 건 딱히 이상할 게 없다. 용사와 배틀마스터의 시너지 효과가 크다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만으로 그렇게 강해진다고?
“가, 강해지고말고!”
내가 레이아에게 의문을 털어놓자, 옆에서 듣고 있었는지 갑자기 중2병이 소리를 지르며 내게 달려들었다.
“깜짝이야. 갑자기 뭐야?”
이 녀석, 아침에 한 번 더 기절한 것 때문에 아직 다리에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어디서 이런 기운이 샘솟은 거야?
“레이는 누구야!? 아, 혹시 네가 자기 여자로 만들었다는 바프라의 새 수장!? 맞지!? 바프라의 새 수장을 말하는 거지!? 크으으! 설마 배틀마스터가 바프라에게 전승되고 있었다니! 난 분명 이름 모를 노사가 이어받아서 산속 깊은 곳에 조용히 살고 있을 거라고만…!”
“일단 진정해 이것아.”
“흐야응!?”
옷 위로 유두를 잡고 살짝 비틀어주자, 그제야 중2병은 내 멱살을 놓고 비틀비틀 주저앉았다.
“뭔가 알고 있는 눈치인데, 나도 이해할 수 있게 순서대로 설명해 봐. 우선 배틀마스터가 뭐길래 그렇게 호들갑이야?”
“대대로 진정한 용사에게 전해져 내려오는…용사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전설의 직업!”
그, 그러냐. 눈을 그렇게 초롱초롱 빛내면서 말할 정도로 전설이냐.
아니. 그보다 용사의 힘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해준다니. 그럼 지금까지 내가 봤던 용사의 힘은 그게 100%가 아니었다는 거야? 나한테는 그게 더 충격인데.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사라의 힘이 갑자기 배는 더 강해진 느낌이 드는 것도 충분히 설명됐다.
단순히 모든 무기를 다룰 수 있는 특수 직업이 아니었다는 건가.
“그래서, 산속 깊이 남겨뒀을 거란 얘기는 또 뭐야?”
“응? 그, 그건…그게…어렸을 적에 바프라의 어딘가에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을 전승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과연. 그래서 용사가 못 된다면 적어도 용사에게 전해져왔다는 전용 직업이라도 얻고 싶었던 우리 줄리안은, 어디에 숨겨 있을지 모를 기연을 찾아서 바프라 곳곳을 헤매고 있었다고.”
“으…으으읏…! 으, 응….”
자기도 부끄러운 줄은 아는지, 중2병은 얼굴을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랬군. 처음 만났을 때 그냥 할 일 없이 식도락이나 즐기며 다니느라 그런 촌구석에 있는 줄 알았더니, 기연을 찾아다니려고 일부러 그런 촌구석을 전전하고 있었다는 얘기인가.
원래부터 중증이라고는 생각하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중증이잖아?
하지만 그렇군.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에 그런 사정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문득 루이스 바프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전에 내가 놈 앞에서 용사인 척했을 때 놈이 보였던 열등감과도 비슷한 감정은, 단순히 용사의 힘에 대한 시기가 아니라, 놈이 배틀마스터라는 직업의 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가.
여기에 있는 중2병은 그거라도 얻고 싶어서 바프라 곳곳을 찾아 헤맨 모양이지만.
“흐으음. 그렇게 되고 싶냐? 배틀마스터.”
아무튼 그런 거라면, 잘 됐군.
갑자기 증폭된 사라의 힘에 대한 의문이 풀린 것뿐만 아니라, 이 녀석을 제어할 고삐마저 손에 넣게 되는 거니까.
“어, 으, 응!? 되게 해줄 거야!?”
얼굴을 화악하고 밝히며 미끼를 덥석 무는 중2병에게, 나는 진한 미소를 지어줬다.
“너 하는 거 봐서.”
마차를 타고 이동하기를 3일하고도 반나절. 창밖의 풍경이 황량한 황무지에서 푸른 초원으로 변해가기 시작할 즈음, 우리는 드디어 플레체 가문이 다스리는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왠지 떠들썩하군. 무슨 축제라도 하는 건가?”
“글쎄요…저도 무슨 일인지 잘….”
이곳에 자주 왕래한다는 마부도 영문을 모르는 모양이라, 우리는 일단 이 떠들썩한 분위기에서 눈을 돌리고 플레체 가문의 저택부터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저택에 도착하자, 우리는 이 소란의 원인을 드디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기까지 오는 도중부터 어렴풋이 깨닫게 됐다.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와 떠들썩한 인파로 이어진 길이, 우리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과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두 결투를 구경하러 온 모양이네요.”
레이아의 말대로, 플레체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니 넓은 정원의 바깥쪽에 수많은 갤러리가 모여 있었고, 안쪽에는 질서정연하게 나열해 있는 수많은 병사가 갤러리들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막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병사들의 정중앙에 있는 호리호리한 사내가 커다란 의자에 앉아서 우리를 맞이해 줬다.
“호오. 당신이 블래스터가를 굴복시켰다는 나일 씨입니까. 생각보다 젊군요.”
젊다니. 일단 이것도 평소보다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으로 변장한 건데 말이야. 대체 내 나이를 몇으로 생각했던 걸까.
“뭐, 그렇지. 그나저나 제법 성대한 환영이군. 결투는 여기서 할 생각인가?”
초면에 다짜고짜 말을 놓는 게 거슬렸던 걸까? 사내는 눈썹을 한차례 움찔 떨었지만, 그래도 침착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강자와의 결투를 상당히 즐기신다고 하시니, 도착하자마자 곧장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었지요. 무언가 문제라도?”
“아니. 문제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냥 뭔가 우글우글 몰려 있구나 싶어서.”
“훗. 여기에 있는 전원이 당신을 상대하는 것은 아니니 안심하기를. 당신을 상대하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는 저 한 명뿐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저 흥을 돋우기 위한 관중입니다.”
“흐음.”
흥이라. 자기가 질 생각은 염두에도 두지 않고 있다는 얘기로군.
뭐, 나로서도 관중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말이야. 소문도 빨리 퍼질 테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적당히 흘려 넘겼지만, 그런 내 태도를 사내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아니면…많은 이들이 지켜보고 있으면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 할 것 같습니까?”
응? 저건 또 갑자기 무슨 뜻이지? 빈정거렸다는 건 왠지 모르게 알겠지만 말이야.
“이거 실례. 블래스터 가문과의 결투는 비공개로 치러졌다는 얘기를 들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드디어 이 삐쩍 마른 해골놈이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그렇군. 결투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이 녀석도 블래스터 가문이 전해 준 진실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는 건가.
“뭐, 그렇지. 나도 사람으로서 인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말이야.”
“인정…말입니까?”
“그래. 그 사람의 본거지에서, 너무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면 미안하잖아?”
“…그러면 시작할까요?”
더 얘기를 들을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놈은 노골적으로 내 말을 무시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이야. 자기가 먼저 시작해놓고 이대로 멋대로 얘기를 마치는 건 너무하지 않아?
“그전에 하나만.”
“뭐죠?”
“진짜 관중들 안 물려도 돼? 미리 말해두는데, 나 힘 조절 같은 거 잘 못 해.”
“네. 물론 상관없습니다. 왜냐하면….”
한껏 비아냥거린 내게, 해골은 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순간, 놈의 손에는 어느샌가 검이 쥐어진 채 그 끝이 내 목 바로 앞까지 와 있었다.
“당신의 힘이 얼마나 강하든, 그 주먹은 제 몸을 스치지도 못할 테니까요.”
그렇군. 블래스터 가문의 특징이 파괴력이라면, 이쪽은 스피드라는 건가. 확실히 속도 자체는 상당했지만.
“그렇게 생각해?”
상대가 너무 나빴어.
“그럼 시작해 볼까? 와라.”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자, 해골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다시 내게 달려들어 왔다.
일단 미소를 짓고는 있지만, 조금 전의 자기 움직임을 보고도 내가 전혀 겁먹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걸까? 놈의 검은 아까보다도 훨씬 끈적한 살기를 담고 있었다.
뭐, 그래 봤자.
“어딜 보고 있는 거지?”
갑자기 등 뒤에서 들린 내 목소리에 당황했는지 놈은 황급히 몸을 돌렸지만, 그땐 이미 내 모습이 그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그러니까 느리다고.”
이 녀석은 아마 날 블래스터가 비밀리에 키운 인간쯤으로 생각하고 있겠지.
그러니 파괴력 자체는 있을지 몰라도, 스피드로는 자신을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거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이 녀석이 자랑하는 스피드는, 날 상대할 때 제일 꺼내면 안 되는 장기였다.
아니. 그도 그렇잖아? 이 녀석은 레벨이 250이 안 되니까. 아무리 속도가 빨라 봤자, 결국 민첩 스탯이 500을 넘지는 못한다는 거잖아?
즉, 진작에 레벨 250을 넘었고, 민첩 스탯도 진작에 500 한계를 돌파한 나보다는 무슨 수를 써도 느릴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차라리 블래스터처럼 파괴력이 장기였으면, 날 맞췄을 때 어느 정도 데미지라도 줄 수 있지. 이래선 굳이 사라의 힘을 쓸 필요도 없이, 내 본래 스피드와 그림자 이동만으로 농락할 수 있잖아.
뭐, 일단 나도 목적이 목적인 만큼, 사라의 힘을….
“그렇군요. 무식한 블래스터 놈들이라도,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자존심이 철저하게 짓밟혔지만, 그래도 아직 인정할 수는 없다. 그런 오기를 담은 표정으로, 해골은 최대한 덤덤한 척 그렇게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엄청 떨리고 있어서, 저게 다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좋습니다. 사실 저도 적당히 상대해주려고 했습니다만.”
적당히는 무슨. 아까까지 전력으로 달려들었던 주제에.
“과연 당신이…이 기술도 받아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놈의 칼끝이 천천히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칼날이 정확히 수직으로 들린 순간.
“키에야아아앗!”
상당히 없어 보이는 기합 소리였지만, 그 기술만큼은 진짜였다.
이런 게 바로 쾌검의 극의라는 걸까? 마치 검이 여러 개로 갈라져서 사방에서 빈틈없이 덮쳐오는 것 같은 그 기술은, 민첩 스탯이 훨씬 높은 내 눈에도 얼마나 빠른 건지 짐작이 되지 않을 정도로 엄청난 쾌검이었다.
뭐, 그래 봤자.
“이것이! 바로! 108! 방위에서! 검날이! 동시에! 덮쳐드는! 우리! 플레체의! 최종! 오의!”
야. 기술 쓰면서 말하기 힘들면 말 안 해도 괜찮아. 듣는 내가 다 숨차네.
그리고 이런 말 하기 미안한데 말이야.
“아…응. 다 끝났어?”
108방위든 1080방위든 그런 기술은 그냥 그림자 이동으로 범위에서 벗어나면 그만이거든. 그러니까 이제 그만 허공에 칼질 그만하는 게 어떨까?
“히엑…히엑…. 히엑!?”
저렇게까지 놀라니까 괜히 더 미안해지네.
아니. 일단 사라의 힘을 써서 일일이 피해 줄 수도 있기는 했는데, 귀찮아서 그만. 미안하다.
사과의 의미로…라고 하기에는 조금 그렇지만. 아무튼 네 체면도 조금은 세워줄게.
나는 곧장 사도 의태를 발동해서, 사라의 힘이 내 몸에 깃들게 했다.
“슬슬 장난은 끝내도록 하지.”
그리고 바닥의 먼지가 회오리치며 떠오를 정도로 기를 내뿜으며, 주먹에 힘을 집중시켰다.
“막을 수 있다면 막아봐라.”
그리고 흔히 무협지에서 말하는 궁신탄영의 원리를 이용하여, 몸을 튕겨 그대로 쏜살같이 해골에게 달려가며 주먹을 뻗었다.
휘유우웅. 콰아아아앙!
이게 고작 주먹을 내질러서 나온 소리라고, 대체 누가 믿을까? 심지어 주먹은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그저 허공에서 멈춰 섰을 뿐이었는데도 말이다.
손가락 하나 반응하지 못한 해골의 얼굴 바로 앞에서 주먹을 멈추자, 놈이 머리에 감고 있던 끈부터 그 뒤로 이어진 길과 벽까지 모든 것이 순식간에 초토화됐다.
“그래서.”
해골이 최종 오의인지 뭔지를 쓸 때까지만 하더라도 떠들썩했던 주변 관중도 완전히 조용해져서, 고요하게 침묵이 내려앉은 정원.
그곳에서 나는 나지막하게 해골에게 말을 건넸다.
“이대로 항복을 인정할 거냐. 아니면 결투를 계속할 거냐. 말해두지만, 계속하겠다면 다음에는 멈추는 일 없을 거다.”
뭐, 거짓말이지만. 아니. 진짜 그러면 나도 기분 나쁠 거 아니야.
속으로는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보여준 압도적인 힘은 그런 내 속내를 감추기에 충분했다.
쨍그랑하고 검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해골은 털썩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져, 졌습니다….”
“훗. 현명한 판단이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해골에게 한번 비릿한 미소를 지어준 후에, 나는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관중들이 내 힘을 두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일부러 듣지 못한 척했다.
저렇게 자기들끼리 멋대로 추측하고 떠드는 사이에 소문은 부풀어 오를 거고, 그게 다 내 명성으로 돌아오게 될 테니까.
내가 할 일은, 소문이 더 무성하게 퍼지도록 조용히 사라져주는 거다.
원래 사람이라는 건 수수께끼가 많을수록 더 상상력을 부풀려 생각하는 생물이니까 말이야.
“출발하자.”
레이아와 중2병을 데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탄 나는, 그대로 곧장 도시를 빠져나가기로 했다.
“어!? 바로 출발하게!?”
하지만 그런 내 말에, 어째선지 중2병이 제동을 걸어왔다.
“그럴 생각인데. 왜?”
“아, 아니. 그게…하루는 여기에서 쉬어갈 줄 알았으니까….”
“여기에 뭐 볼 일이라도 남았어?”
“그런 건 아니지만….”
말로는 아니라고 하지만, 중2병은 명백하게 아쉬운 눈치였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혹시 배틀마스터를 찾기 위해 바프라를 찾아갔던 것처럼, 이 근처에도 뭔가 얘만 아는 전승 같은 게 남아 있는 건가?
아니. 만약 그렇다면, 플레체에 간다고 했을 때부터 어떤 식으로든 티를 냈을 거다. 이 녀석, 얼굴에 감정이 전부 드러나는 타입이니까.
그런데 이전까지는 딱히 별다른 반응이 없다가 갑자기 여기에 와서 이런다는 건….
“너 혹시, 도시가 축제하는 것처럼 들뜬 거 보니까 덩달아 설레서 그러냐?”
“어? 아니…마, 맞아! 그거야!”
아니. 맞기는 뭘 맞아. 늦었거든.
하도 이상한 모습을 자주 보여줘서 진짜 상황 파악 못 하고 축제를 즐기고 싶은 건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너 말이야. 지금 자기 입장 알고 있는 거 맞지? 계속 그렇게 수상하게 행동하면, 네가 원하는 그건 영원히….”
“왁! 마, 말할게! 말할게! 그, 그러니까 그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어서 일단 말한다고는 했지만, 막상 말하려니까 부끄럽다.
그런 표정으로 나와 레이아의 눈치를, 그리고 특히 마부석 쪽의 눈치를 힐끔힐끔 보더니, 중2병은 최대한 애원하는 표정으로 내게 매달렸다.
“나, 나중에 말하면 안 돼?”
이 녀석, 언제 이런 조르기 기술까지 연마하게 된 걸까. 혹시 우리 천사님의 애교를 보고 따라 하는 건가?
확실히 평소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여자다운 느낌이라서 임팩트가 크기는 했지만.
“나중에 언제?”
그래 봤자 중2병이지. 우리 천사님한테는 한참 멀었어.
“어? 그, 그게…돌아가서?”
아니. 의문형으로 말해도 말이지.
“…….”
“…우…으읏….”
내가 가만히 그 눈을 바라보자, 중2병은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는 듯 힐끔힐끔 눈을 내리깔면서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흐음. 뭐, 좋아. 그럼 우선 출발하지.”
그리고 잠시 생각한 결과, 나는 그냥 중2병의 말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말해두지만, 이 녀석의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에 넘어간 게 아니다. 어디까지나 냉철하게 판단한 결과다.
아니. 말하다 보니까 왠지 모르게 느껴져서 말이야. 이 녀석이 여기에 남고 싶었던 이유가, 진짜 별거 아닌 이유일 것 같다고.
“돌아가는 길은 올 때보다 천천히 가지. 밤을 밖에서 보내는 것도 슬슬 질리니까 말이야.”
그래서 나는 중2병에게 신경을 쓰고, 마부석을 향해 그렇게 말했다.
어차피 소문이 퍼질 시간도 줘야 하니까 말이야. 올 때는 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중간에 다른 마을도 안 들르고 일직선으로 달려왔지만, 돌아갈 때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네. 그럼 밤이 되기 전에 중간에 있는 마을에 머물러 가겠습니다.”
“그래. 그렇게 해줘.”
하지만 나와 마부가 그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자, 중2병이 또 “읏…!” 하고 헛숨을 삼키면서 이상한 반응을 보였다.
얘 진짜 왜 저러는 거야?
중2병이 보여준 이상 행동의 원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그리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허무하게 밝혀졌다.
마부가 말한 대로, 우리는 날이 완전히 저물기 전에 하룻밤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찾아서 근처 마을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드디어 방으로.
고작 3일 못한 것뿐인데도, 나는 상당히 흥분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돌아갈 때는 천천히 가자고 한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었을 정도였다.
천사님과 매일 밤을 함께하는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3일만 쉬게 되어도 영겁의 세월처럼 느껴지거든.
“레이아. 그럼 잘까?”
그래서 나는 곧장 레이아의 허리를 팔로 휘감고 침대에 밀어붙이며 몸을 겹쳤다.
그리고 그대로 그 옷가지를 하나둘 벗겨내…려고 했지만, 그때 옆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이상한 소리라고 해도, 그게 무슨 소리인지는 알고 있지만 말이야.
“어어!?”
“왜 그래, 줄리안?”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거기에는 바지를 반쯤 내린 채 이쪽을 보고 굳어져 있는 중2병이 있었다.
“어, 아, 아니. 나 먼저….”
얘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했더니. 비어 있는 2인실이 없다고 해서 같은 방으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그것 때문에 착각하고 있는 건가?
“오늘은 그냥 자도 돼.”
내가 그렇게 말한 순간, 중2병은 쾅! 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표정으로 입을 쩌억 하고 벌렸다.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충격받을 말이야?
“어, 어, 어째서어…?”
“아니. 처음에 할 때 설명해 줬잖아.”
내가 자기 전에 항상 중2병을 먼저 기절시킨 이유는, 내가 잠든 사이에 중2병이 엄한 짓을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내 감은 가만히 놔둬도 중2병은 그런 짓을 안 할 거라고 말해주고 있지만, 레이아의 안전까지 걸려 있는 일인 만큼 감만 믿고 행동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기억하냐?”
“…….”
끄덕끄덕. 중2병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여서 대답했다.
뭐, 저래 봬도 바보는 아니니, 그야 기억하고 있겠지. 하지만 그걸 기억하고 있다면, 오늘 왜 그냥 자게 하는지도 알아야 하지 않아?
“네 꿈이 내 손안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더는 널 의심할 이유도 없으니까 말이야. 넌 날 배신하지 않아. 아니. 배신할 수 없어. 내 말 틀려?”
“어? 응…하, 하지만! 할지도 모르잖아? 수상한 짓. 나, 내버려 두면 어디로 튈지 몰라?”
자기 입으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 아니냐?
아니. 그보다 얘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거야?
“그럼 배틀마스터의 꿈은 영영 빠이빠이 하는 거지.”
“안 해! 수상한 짓 같은 거 절대 안 해!”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면 처음부터 협박 같은 짓 하지 마라.
“우윽…하, 하지만….”
그러고도 아직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동자로 날 바라보는 중2병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런 말을 하면 분위기가 완전히 그런 쪽으로 흘러가 버릴 것 같아서 일부러 말 안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말할 수밖에 없겠군.
“뭐야 너. 실은 나한테 그냥 애무 당하고 싶은 거야?”
“아, 아, 아니야!”
다행이다. 만약 긍정해 버리면 어쩌나 싶었는데.
“그렇지? 아니지? 하긴. 내 성자 스킬에 맞고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던 네가, 이제 와서 무너질 리가 없지?”
중2병이 다른 말을 하기 전에, 나는 재빨리 그렇게 말해서 완전히 못을 박아 버렸다.
그러자 중2병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하지! 애무 당하고 싶다니, 당치도 않아! 난 그냥 너한테 해주고…!”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벌린 자세 그대로 굳어져 버렸다.
그러다가 얼굴이 점점 더 새빨개지나 싶더니,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하고는.
“아…아니야아아아!”
그대로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고는 자리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어…음. 그 뭐냐. 일단 물어보겠는데, 뭐가 아니라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건 전부 다 아니야! 난 여신의 간악한 속삭임에 홀리지 않았어! 아무리 네가 하는 유혹이 달콤할지라도, 난 흔들리지 않아! 언젠가 남자가 되고, 용사가 되고, 이 몸에 깃든 흑염룡과 함께 정의를 실현할 거야!”
“…정의의 사도랑 흑염룡은 안 어울리지 않냐?”
나도 모르게 그렇게 태클을 걸자, 내 밑에 깔린 천사님이 조용한 목소리로 “구원 씨, 지금은 그런 말을 하실 때가 아닌 것 같아요.”라고 속삭여주셨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지당하신 말씀이기는 하지만 말이죠, 천사님.
“하지만 멋있잖아!”
쟨 저렇게 받아주는걸요. 진짜 이런 주제가 되면 무슨 말이든 받아주는 녀석이라니까. 얼굴도 제대로 못 들 정도로 부끄러워 죽으려고 하고 있는 주제에.
“뭐, 멋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대체 얼마나 기뻤던 건지, 중2병은 순간 자기가 부끄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은 채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 나랑 눈이 마주친 순간 “우읏….”하고 부끄러워하며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지만.
“그래서, 그 멋있는 기술로 정의를 실현한다는 멋진 꿈을 가진 우리 줄리안은, 갑자기 어떤 이유로 나한테 봉사해주고 싶어진 건데?”
“그, 그건….”
말문이 막힌 중2병은 한참을 머뭇거린 끝에, 손가락 사이를 벌려서 눈만 살짝 내밀어 날 힐끔힐끔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바, 바보 취급 안 할 거야?”
바보 취급? 이건 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그런 취급을 한 적이나…생각해 보니, 속으로 맨날 중2병이라고 부르는 것도 바보 취급의 일종인가. 이거 양심에 찔리네.
“그래.”
괜히 미안해져서 진지한 목소리로 그렇게 대답하자, 중2병은 내 진의를 확인하겠다는 듯 한참을 바라보더니.
“…억울하잖아.”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억울? 얘 지금 억울하다고 한 거야?
너무 예상치도 못했던 대답에, 나는 한순간 말문이 막혀 버렸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반대로, 중2병은 말문이 뻥 뚫렸는지 갑자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래! 전부 네가 헷갈리게 해서 그래! 나 하는 거 봐서 되게 해준다고 하니까! 맨날 야한 짓이나 하는 색정신의 사자가 그렇게 말하면, 헷갈리는 게 당연하잖아! 당연히 성적으로 더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잖아! 그래서 각오했는데! 도착할 때까지 속으로 각오 단단히 했는데! 도시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오늘 밤 이 도시에서…! 라고 생각했는데! 도시는 갑자기 떠난다고 하고! 오늘이 아니라고 안심하고 있자니까 또 오늘밤 다른 마을에서 묵을 거라고 하고! 또 새롭게 각오하고 따라오니까 이젠 매일 하던 애무도 안 해준다고 하고!”
순식간에 말을 쏟아낸 다음, 중2병은 씨익…씨익…하고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골랐다.
그런가. 어쩐지 상태가 좀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런 이유였던 건가. 돌아가면 말해주겠다고 한 것도, 돌아가서 같이 자게 될 줄 알고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로군.
내 예상대로 진짜 별거 아닌 이유…아니. 얘한테는 나름 중요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사정을 알았으니, 이제는 진정시킬 차례다.
“야. 줄리안. 흥분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뭘.”
“배틀마스터는 일단 떼어두고 생각해 보자고. 너 나한테 성적인 봉사를 하고 싶어?”
“…아, 아니.”
왜 그 타이밍에 목소리를 살짝 떠는 걸까요, 줄리안 씨.
“그렇지? 하기 싫은데 배틀마스터 때문에 억지로 각오했던 거잖아? 그걸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거야. 억울해할 게 아니라, 기뻐해야 할 일 아닐까?”
“그건…어…어?”
마치 ‘듣고 보니 그러네?’ 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2병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건 보통 내가 말하기 전에 먼저 눈치채지 않냐? 머리가 나쁜 것도 아니면서.
뭐, 원래 감정적으로 동요하고 있을 땐 시야가 좁아지게 마련이니, 아주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렇지? 그럼 잘 자라.”
“어, 어어…응.”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중2병에게, 나는 씨익 한차례 웃어주고 그대로 이불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썼다.
아까는 나도 살짝 흥분해서 신경 못 쓰고 있었지만, 평소와는 달리 중2병이 맨 정신으로 깨어 있는 거니까 말이야. 이불이라도 뒤집어써야, 천사님도 그나마 덜 부끄러우시겠지.
“구원 씨. 정말로 괜찮으신가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곧장 천사님의 입술을 찾아서 입을 맞추려고 했지만, 천사님은 손가락을 하나 세워서 내 입술을 막고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속삭였다.
“응? 뭐가?”
“…모르는 척하시는 건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끝까지 그렇게 잡아떼자, 천사님은 복잡한 표정으로 내 눈을 들여다봤다.
레이아가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는데 말이야. 하여간 우리 천사님은 마음이 약해도 너무 약해서 탈이라니까.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레이아는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아응….”
“지금은 나한테 집중해 줬으면 좋겠어.”
옷 위로 천사님의 유두를 살짝 비틀며 말하자, 천사님의 달뜬 한숨이 내 얼굴을 간질이는 게 느껴졌다.
그 한숨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나는 천사님의 옷을 한 꺼풀씩 천천히 벗겨 냈다.
이불 속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밖으로 벗어나지 않게 조심하며 옷을 벗기는 건, 서로의 피부가 자연스럽게 닿고 서로의 숨결이 상대방의 민감한 부위를 간질여서,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애무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아…하아….”
벗긴 옷은 이불 밖으로 손만 내밀어서 던져놓자, 레이아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이제 새하얀 속옷밖에 남지 않았다.
그마저도 위쪽 속옷은 처음부터 입고 있지 않아서, 남아 있는 건 아래쪽 속옷뿐이었다.
“이런 것도 왠지 야하네.”
“으응…몰라요….”
레이아를 내려다보며 말하자, 레이아는 살포시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물론 그래 봤자 그 가슴을 다 가릴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오히려 누워 있어도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레이아의 가슴을 두 손이 가볍게 받치고 모아주는 모양새가 되어서, 나한테 자신의 가슴골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정도였다.
“브래지어는, 남장할 때 필요 없으니까 안 하는 거지?”
“네….”
손 위로 보이는 새하얀 언덕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하자, 레이아는 부끄러운지 시선을 피했다.
이정도 크기의 가슴이다. 모르긴 몰라도 어렸을 때부터 브래지어를 차고 다니는 게 당연했을 테니까 말이야. 이제 와서 브래지어를 안 차고 다닌다니, 괜히 더 부끄러운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이아는 가슴이 민감하잖아?”
“아응!”
가슴 위쪽에 키스 마크가 남을 정도로 강하게 쪽 빨며 말하자, 레이아는 가슴이 민감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변신해서 작아져도, 감도는 변함없지 않아?”
“그, 그건….”
의문형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변신을 풀지 않은 모습으로 한 적도 있으니까 말이야.
“옷에 쓸리거나 하면 신경 쓰이지 않아?”
“신경 써본 적…없아응….”
가슴을 가리고 있는 손등 위로 쪽쪽 하고 키스 세례를 퍼붓자, 레이아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겠다는 듯 슬쩍 손을 비켜줬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그 가슴을 입에 덥석 물고 혀로 유두를 살살 간질였다.
“그래? 평소에는 이렇게 안 서 있어서 그런가?”
“으으응…!”
그러자 크기만큼이나 모양도 색도 완벽한 핑크빛 유두가 점점 더 딱딱해지는 것이 혀끝으로도 확실하게 느껴졌다.
“하으…구원 씨. 왠지. 평소보다 짓궂으세요.”
“3일이나 안 했으니까 말이야. 이제 레이아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몸이 되어 버렸어.”
“후훗. 과장이 너무 심하세요….”
아니. 제법 진심을 담아서 한 말인데 말이야.
아무튼 레이아는 내 말에 한껏 기분이 좋아졌는지, 손을 뻗어서 내 바지 벨트를 풀어주기 시작했다.
“적극적이네. 레이아도 급해?”
“으응…후훗.”
다시 한번 살짝 장난을 쳐보자, 이번에는 레이아도 부끄러워하는 기색 없이 살짝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내 귓가에 살짝 입술을 가져다 대더니.
“네. 그래요.”
그렇게 속삭여주면서, 그 특유의 길고 얇은 혀로 내 귓바퀴를 청소하듯이 빙글빙글 핥아줬다.
“그러니까 빨리해주세요.”
그리고는 어느샌가 아홉 개로 늘어난 꼬리를 이용해서 내 허리와 두 허벅지를 감싸더니, 스스로 속옷을 벗고 내 물건을 잡아서 자신의 다리 사이에 조준하게 했다.
“벌써 이렇게 준비가 되어 있는걸요.”
그리고 귀두 끝에 천사님의 끈적끈적한 애액의 감촉이 느껴진 순간, 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힘껏 허리를 내리찍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