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01
제101화
평소 출타 중이라 얼굴 보기가 힘든 벤헬링턴.
그가 가문으로 왔다는 소식에 유리는 한 달음에 그를 찾아갔다.
여느 때처럼 집무실에 앉아 산더미 같은 서류를 살피던 그는 유리가 들어왔는데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유리도 굳이 문을 조심히 닫고 발소리도 죽인 채 다가갔다.
“무슨 일이더냐.”
가까이 가니 숙인 머리로부터 물음이 날아들었다.
유리는 표정을 조금 풀었다.
“교국 건으로 보고 드릴 겸 왔습니다.”
“보고라면 하지 않아도 돼.”
“제가 사고라도 쳤으면 어쩌시려고요.”
“사고 쳐놓고 내 앞에 당당히 온 놈은 미앵비슈 말곤 없었어.”
고모가 사고를 친 사실도 놀라운데, 직접 말하러 왔었다니.
괜히 차기 가주로 언급되던 용인은 아닌가 보다.
벤헬링턴은 마지막 사인을 갈기고 펜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들었다.
“흑마법사는 아직도 꼬리를 못 잡았다고?”
“이단심문국이 연루된 사실을 인정하긴 했지만, 자금의 흐름, 실험을 돕던 자들의 이름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광신도 녀석들. 기어코 지랄을 했구먼.”
츳! 탁!
그는 능숙한 손길로 손에 들린 시가에 불을 붙였다.
무영창으로 손가락에 마법을 붙이는 기술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습, 후. 끝까지 잡아볼 테냐?”
“그러려고 오늘 다른 용무도 들고 왔어요.”
“다른 용무?”
말로 설명하기에 앞서 미리 들고온 종이 하나를 내밀었다.
지겹게 보던 보고서가 아니었다.
작지만 검은 종이를 바탕으로 화려하게 꾸민 초대장이었다.
“이게 뭐지?”
“연회를 열어보려고 합니다.”
“연회?”
“보고 안 해도 알고 계시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이번 사건에 메데스 왕실과 그 재단이 얽혀있는 걸로 추정돼요.”
“그래?”
관심이 없던 벤헬링턴이 초대장을 뚫어져라 살폈다.
이 틈에 유리는 채럿과 블레이크로부터 모은 정보 일부를 그에게 설명해줬다.
“멘데스 재단은 다양한 학회와 협회를 후원하면서 판공비, 정기 회비 등을 받아 운영하고 있어요.”
“흥, 인간 놈들 머리치곤 꽤 괜찮은 운영법이군.”
“그런데 몇몇 마법 학자들이 몇 해 전에 흑마법 연구 관련 자료를 소유하고 있다가 발각되어서 협회에서 쫓겨났던 적이 있었죠.”
이는 꽤나 유명한 사건이라 유리도 기억하고 있었다.
학술의 본산지로 일컫는 메데스 왕국에서 일어난 흑마법 연구 사건.
세간에는 당사자인 흑마법사를 추적하던 메데스 왕실이 이들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죽였다고 알렸다.
“……해서?”
“제 추측이지만, 그때 죽이지 않았을 확률이 높아요.”
“근거 없이 씨부리는 주둥이는 아니겠지?”
“최근 자금 흐름을 추적해본 결과, 다른 단체와 달리 후원이나 기금을 일절 받지 않고 재단이 후원만 해주는 단체가 있었습니다.”
“그게 어디지?”
“이요.”
“이름부터 구리군! 이 세상이 멸망이라도 한다더냐?”
차마 웃기 애매한 농담에 유리는 애매하게 웃었다.
“그쪽 단체로는 돈이 나가고만 있고 수익이 전혀 없었습니다. 액수가 상당한데도요.”
“얼만데?”
“달에 10만골 정도입니다.”
10만골이면 마법학회의 몇 년치 예산에 해당 됐다.
이는 실질적으로 메데스 재단이 벌어들인 돈의 다수를 세계구원기금에 쏟는 꼴이었다.
“수상하긴 하구나. 돈 좋아하는 인간들이 무작정 투자만 하고 있다…….”
“좀 더 조사를 해봐야 하겠지만, 할아버님 말씀처럼 사이비종교. 아니, 아예 아링턴 교를 불신하고 흑마법을 숭상한다는 정황도 있습니다.”
“정황 증거의 출처는?”
“이단심문국을 통해 발부된 부적이 그쪽으로 흘러 들어갔거든요.”
“호오.”
이단심문국으로부터 돈이 흐르지 않았을지언정 부적은 어디론가 계속 흘러 들어갔다.
흑마법사들에게 각자 제공되는 줄 알았지만, 대량의 부적을 어디론가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있었다.
그곳이 바로 세계구원기금이었다.
“거길 쑤셔보면 될 것이지, 초대장은 뭐냐?”
“메데스 재단과 왕실은 편이 많죠. 잘못 건드렸다간 벌집을 쑤시는 격이 될 겁니다.”
“교국 벌집을 쑤셔놓고 일개 왕가를 무서워해?”
“교국은 확실한 신념과 교리가 있어서 뒤처리가 훨씬 쉽죠. 뭐든 교리대로 처리하면 되니까요. 그러나 왕실은 달라요. 많은 이권이 얽혀 있어서 어디서 어떤 식으로 폭탄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흐음, 그래. 그 말도 일리가 있구나.”
메데스 왕실이 흑마법사들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밝혀져도 그들을 비호하는 세력들이 어찌 나올지는 미지수다.
애초에 메데스 재단을 둘러싼 조직이 너무 많다.
그들을 설득하거나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확실한 무언가가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메데스 재단 사람들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그들과 직접 접촉하겠다고?”
“마침 그들이 저와 만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더라고요.”
“단독으로 만나면 세간의 시선이 꼬여.”
“그러니까 연회죠. 저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모두 초대하는 연회.”
“……용가의 힘으로 쉽게 해결할 일을 어렵게 하는구나.”
“어려워도 해결하면 되니까요.”
당돌하다 못해 자신감 있는 모습에 벤헬링턴은 할 말을 잃었다.
‘제법 용인다워졌군.’
분명 키 작고 말라 비틀어진 허약한 인간 꼬맹이었던 시절이 엊그제 같거늘.
벤헬링턴 눈앞엔 장성을 목전에 둔 건실한 청년이 마주했다.
당돌하다는 표현은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감? 그 역시 모자란 수식어다.
용인다움.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믿으며 앞을 볼 줄 아는 시선과 용기.
그런 점이 유리에게서 설핏 엿보였다.
‘다른 놈들 같았으면 연회고 나발이고 나한테 제안조차 못했을 걸. 이 놈은 참…….’
연회에 관련한 고민은 하지도 않았다. 벤헬링턴은 초대장을 돌려주지 않고 제 품에 넣었다.
“내게 바라는 게 정확히 뭐냐? 집을 빌려주랴? 알겠지만 용가는 연회 따위 하지 않는다. 데뷔탕트 같은 것도 안 해.”
“집은 안 된다는 거네요.”
“자기 침대에 누가 벌레가 꼬이고 싶겠더냐. 용인도 파리나 모기는 싫어.”
제법 그럴싸한 비유다.
유리도 벌레가 꼬이는 건 사양이었다. 모기나 파리, 기생충은 더더욱.
“그럼 괜찮은 별장 하나를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덤으로 가문의 사용인들도요.”
“사용인은 왜?”
“그래도 나이트워커에서 처음 여는 연회인데 면이 살아야 할 거 같아서요.”
“크핫! 제법 정치인 나부랭이 같은 소릴 지껄이는구나.”
벤헬링턴이 담배를 끔뻑 빨았다가 길게 뿜었다.
“빌린다는 건 대가를 지불한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주신 돈이 있으니까요.”
“돈으로 퉁치겠다?”
“다른 걸 원하시나요?”
“아니, 됐다. 어차피 바랄 것도 없어. 돈이면 돼.”
그 자리에서 시가를 문 채 그는 간단한 계약서를 썼다.
나이트워커가 보유한 가장 근사한 별장과 10년차 이상된 사용인들 모두.
거기다 집사 빌까지 붙여줬다.
“액수는 마음대로 적어라.”
“1골드만 적어도 되나요?”
“진짜겠냐!”
쩝, 아쉬워라.
유리는 100만 골드를 적고 계좌번호까지 쓰고 나서야 사인으로 마무리했다.
벤헬링턴이 액수가 적어서 아쉬워했다는 건 아무도 몰랐다.
* * *
초여름이 다가올 시기가 되면 여성 귀족들의 데뷔탕트가 곳곳에서 열렸다.
이름 있는 가문의 주최로 젊은 남녀가 파티에 초대받았고, 이곳에서 연애와 나아가 약혼까지 이뤄지곤 했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시끌벅적해야 할 한 달 동안 어느 가문에서도 제 자식들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았다.
유리가 개최한 연회 때문이었다.
당일이 되자, 나이트워커 가의 입구는 때 아닌 마차 행렬이 병목현상을 이뤘다.
“우리 딸! 오늘 꼭 그 분 눈에 들어야 한다! 알지?”
“이 놈아, 꼴이 이게 뭐더냐. 용가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망신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이거 바르고, 이것도 써보렴. 아니다, 아냐! 이게 낫겠구나!”
부모들의 북새통에 고생을 하는 건 그 자식들이었다.
마차 안에서부터 옷을 다듬고, 화장을 고치고, 어떤 부모는 급히 시종을 시켜서 아예 마차를 바꿔 탔다.
이 모든 게 나이트워커와 유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었다.
유리는 자기 방에서 이 광경을 내려다봤다.
“이래서 할아버지가 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그의 뒤에선 릴림이 옷 매무새를 다듬어줬다. 더 뒤에는 블레이크와 이자벨이 테이블에 앉아서 핀잔을 줬다.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파티건 뭐건 초대의 ‘초’자만 새어나가도 사람들이 거품 물고 달려들 거라고.”
“블레이크 경까지 잔소리야?”
“잔소리가 아니라 각오하라는 겁니다. 맞지 않나, 이자벨 양?”
“블레이크 단장님 말씀이 맞다. 왕좌에 올라서려는 자. 이 정도 부담은 감당해야지.”
“그렇게 말하는 블레이크 경과 이자벨 옷이, 좀. 음.”
유리가 보기엔 두 사람의 복장이 더 부담스러웠다.
뭔가 연회라서 힘을 준 듯 한데, 투머치해서 해괴망측하기까지 했다.
블레이크는 계절에 안 맞게 두꺼운 코트와 검은 깃털이 치렁치렁 달린 옷을.
이자벨은 반짝을 넘어 번쩍이는 보석이 발광하는 오버사이즈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아무리 봐도 부담은 저들이 더 커보였다.
블레이크는 제 옷을 내려다보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마, 많이 이상합니까?”
“이상합니다, 단장님.”
“그, 그러는 이자벨 양도 이상해!”
“저는 왜, 왜 걸고 넘어지십니까! 나름 비싼 거라고요!”
“됐고. 둘 다 나가서 급하게 쇼핑이라도 하고 와. 돈은 내가 내줄 테니까.”
“진짭니까, 유리 님?”
“그, 그래도 되나, 유리?”
어째서 좋아하는 건데. 난 핀잔을 주고 있건만.
유리는 질색하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돈 막 써도 된다고 했지만, 또 비싼 보석이나 옷감으로 치렁치렁하게 오면 연회 참석 못할 줄 알아. ……릴림, 부탁할게.”
“네에.”
“네!”
“응!”
그렇게 들뜬 얼굴로 세 사람이 나가고.
그 동안 유리는 혼자서 차림새를 마무리 짓고 가만히 서서 밖을 지켜봤다.
‘초대한 숫자보다 더 많이 몰렸어.’
이번 연회는 유리에게 만남을 청한 사람만 불렀다.
하지만 오늘 온 숫자만 봐선 그보다 더 많이 왔다.
원래는 안 되는 짓이지만, 누구 누구의 친구라든가 8촌의 사돈이라며 변명을 붙여서 동행이랍시고 찾아왔을 거다.
그렇다고 딱히 그들을 막지도 않았다.
“쓸데없는 짓을 벌였군.”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지 않아도 카이였다.
“언젠가 한 번 쯤은 연회를 열었어야 해. 내가 아니어도 성인식 때 또 열릴 테니까.”
“그럼 성인식 때나 열지 뭐하러 지금 연회를 열었지?”
“교국에 갔던 건 때문에.”
“뭔가 건졌나?”
유리는 잠깐이나마 고민했다.
교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직 카이에게만 알려주지 않았다.
이자벨이나 블레이크, 릴림, 채럿도 들은 사실을 알려주지 않은 건 엘카 때문이었다.
필연적으로 엘카의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선 설명이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렇다고 카이에게 엘카 이야기를 해줘도 되는지 모르겠다.
‘베아트리체 때만 해도 그렇게 감정적으로 흔들렸던 녀석이 엘카라고 다를까.’
유리가 아는 카이는 전생에서의 인연은 모두 끊고 사는 매정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여겼다.
그는 전생에서 많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끝없는 은혜를 입었다.
어떤 때는 카이를 대신해서 죽기도 했다.
베아트리체가 그랬고, 엘카도 자신의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
당연히 카이가 바라던 희생은 아니었다.
그래서 카이는 환생을 한 뒤로 전생에서 만났던 이들을 찾지 않았고, 어떤 때는 일부러 피해 다녔다.
그것이 그의 속죄이자, 도망, 혹은 배려였으리라.
‘그래도 엘카는 알 권리가 있어.’
유리는 심호흡을 하고 창가에 등을 기대며 돌아섰다.
“엘카를 만났어.”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