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02
제102화
“……!”
역시 조금 동요하다 못해 살기가 흘렀다.
카이의 전생을 모르고서 나올 수가 없는 이름이니 당연했다.
유리는 태연하게 대화를 이었다.
“자신을 계시자라고 소개하면서 계시를 통해 내가 찾아올 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랬나.”
“어. 그러면서 너도 알고 있다고 하던데. 전생에 인연이 있었나봐?”
“오랜 전 이야기다.”
“자세하게 얘기해 줄 순 없는 거야?”
“일장연설이라도 해줘야 하나?”
“그런 건 아니지만.”
어설프게나마 댄 변명이 조금은 먹혔다. 살기가 금세 누그러지고 눈빛도 한층 내려앉았다.
“근데 엘카 얘기를 왜 나에게 해주지? 나한테 안부라도 전하라던가?”
“딱히 하라고 하진 않았지만, 하지 말라고도 안 했지.”
“그럴 리가. 그녀는…… 아니다. 아무것도.”
유리는 그가 하려던 말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챘다.
전생의 연을 끊겠다던 카이의 각오를 엘카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는 카이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고, 딱히 카이에게 제 소식을 전해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전생을 거듭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약속.
허나 반대로 엘카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으니. 그래서 유리는 엘카 이야기를 꺼냈다.
그녀가 바라는 거 같아서.
“아무튼 그 분 덕분에 일을 쉽게 해결했어. 이단심문국이 처벌받을 날도 머지않았고, 무엇보다 교제가 원리주의자들을 향한 반대 의지가 강해.”
“이단심문국이 키메라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옛날엔 어땠는데?”
“환생하기 전의 이야기다. 넌 몰라도 된다.”
쳇, 싱겁긴.
알려주면 좀 좋아.
설정이나 원작을 봐도 모르는 이야기 중 하나가 카이의 전생이다.
간혹 원작 중간중간 언급되곤 하지만, 단편적인 정보로는 그의 과거를 추측하기 어려웠다.
그저 지독하게 살아왔다는 정도만 어렴풋이 추측할 뿐.
‘저 녀석 정보가 있었다면 더 쉽게 해결했을지도.’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카이가 도움을 주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유리는 그 이유를 굳이 알려고도, 캐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필요하다면 알려줄 테니까.
그보다 예상과 달리 엘카 이야기에 그리 흔들리지 않는 모습에 내심 안도했다.
“이단심문국을 조사하면서 메데스 재단이라는 곳까지 이름이 나왔어. 거길 파볼 생각으로 연회를 열은 거야.”
“그들을 초대했나?”
“그들이 먼저 나랑 만나고 싶다고 했지.”
“복잡하게 일 처리를 하는군. 그냥 다 죽여버리면 편한 걸.”
그게 카이다운 방식이긴 하다.
그러나 환생을 거듭하며 강해진 그라서 가능하지, 겨우 인생 2회차인 유리는 어려운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론 카이 방식대로 해선 곤란했다.
“카이, 언젠가 말하려고 했던 건데. 힘으로 모든 걸 해결할 순 없어.”
“어째서?”
“그걸 어째서냐고 물으면 나도 할 말은 없는데. 폭력은 다른 폭력을 불러올 뿐이야.”
“다른 폭력을 다시 제압하면 된다.”
“그러니까 안 된다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괜히 힘으로 해결해서 동료들한테 오해 사지 말라는 뜻이야.”
원작의 카이는 조력자들이 많긴 했으나, 인간적으로 그와 친한 사람은 실로 적었다.
파괴적인 그의 방식이 아무리 정의로워도 소위 불편했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 시선에서 그는 성검의 주인이지만 막 나가는 폭군에 가까웠다.
협력과는 당연히 거리가 멀었고, 이런 성정 때문에 동료들과 오해를 사곤 했다.
그나마 멸망이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으니 동료들이 따라줬지.
‘앞으로 같이 작전에 나가면 원작처럼 동료와 충돌하지 않으리라는 법은 없어.’
그렇기 때문에 베아트리체나 엘카가 더욱 특별했을지도 모른다.
유리는 자신을 비롯한 동료들이 카이에게 그런 존재이길 바랐다.
“난 내 식대로 해결한다.”
고집불통 같은 소리를 뱉은 카이는 딴 곳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 끝엔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고민하는 모양새다.
그러다 단단한 음성으로 말하길.
“메데스 재단과는 내가 먼저 만나겠다.”
“내가 한 말들은 뭘로 들은 거야.”
“오해살만한 짓은 안 한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
“대화는 끝이다. 미리 언질해준 것만해도 감사하게 여기도록.”
툭 던지듯 말해놓곤 그 길로 카이는 방을 나갔다.
저 ×가지.
끝까지 제 멋대로인 건 어쩔 수 없나보다. 앞으로 나아지길 바라는 수밖에.
그보단 카이의 의중이 더 궁금했다. 갑자기 메데스 사람들과 먼저 만나겠다니.
지금까지 유리가 해오던 일에 한 번도 개입하지 않고 신경도 안 썼던 카이가 적극적으로 나서니 수상쩍었다.
‘악마 추종자인 걸 알고 있는건가?’
생각해보면 카이가 메데스를 알게 되는 건 먼 미래였다.
제 2차 슈레빌 참사 이후, 그 배후를 조사하면서 처음 메데스 왕가의 이름이 튀어나오니까.
하지만 돌이켜보면 카이가 몰랐다고 할 수도 없었다.
악마 추종자는 오래 전부터 골치였다.
그러면서 메데스에 대해 들어봤을 수도 있다.
“밥 짓기도 전에 코 빠뜨리는 짓은 안 하길 바라야겠어.”
[코가 아니라 발이 빠질 수도 있어.]“끔찍한 소릴…….”
어차피 연회는 일주일에 걸쳐서 진행된다. 메데스 가를 만날 시간과 기회는 널렸고, 그 전에 다른 가문들을 예의상 상대해줘야만 했다.
유리도 슬슬 내려갈 채비를 하고 방을 나섰다.
* * *
별장은 본가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짜기 위에 지어졌다.
마차나 말들이 가기엔 험난한 길이었으나, 올라오는 길에 구경거리가 널려서 손님들은 심심할 틈이 없었다.
골짜기 아래론 녹음이 그득하고, 지평선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만개했다.
지평선을 지나면 다시 거대한 산맥이 보였다. 꼭대기엔 만년설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져 흘렀다.
정원에 나와서 만찬을 즐기는 손님들은 그 광경을 보며 새삼 용가의 힘을 느꼈다.
높은 산에 거대하면서 화려한 별장.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지었을 건물이 분명했다.
그들이 시간을 즐기는 동안.
유리는 본격적인 등장에 앞서 빌을 만나러 잠시 부엌으로 향했다.
그런데 1층으로 내려가니 전혀 의외의 인물과 마주쳤다.
“어머니?”
샤를린느가 사용인 사이에서 그들에게 분주히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일부러 그녀는 초대 하지 않았었다. 이런 자리가 껄끄러울 수도 있고, 단순한 연회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리는 느릿하게 계단을 내려오다 걸음을 서둘렀다.
“어머니!”
“아, 유리!”
홍조 띤 얼굴이 그를 돌아봤다.
유리는 선뜻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평소에 알던 어머니와 달리 너무나 화려했다. 보랏빛이 감돌면서 딱히 큰 노출 없이 스키니한 드레스인데도 어머니에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렸다.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유리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유리? 왜 그러니? 어디 안 좋아?”
“아, 아뇨. 어머니께서 드레스를 입는 건 처음 봐서요…….”
“아, 이거.”
샤를린느가 자랑스레 몸을 좌우로 돌렸다.
“예쁘니?”
“네. 진짜로 엄청 예뻐요.”
“너희 아버지가 줬던 선물이야. 가문에서 쫓겨나고 입을 일은 절대 없다면서, 사치 부리지 말라고 그리 말했었는데. 어느 날 기어코 이런 드레스를 사오더구나.”
아버지의 선물…….
그러니까 유산이라고 봐도 되는 걸까.
“이런 말이 어떨지 몰라도, 아버지께 감사드려야겠어요.”
“갑자기 왜?”
“어머니의 미모를 이리 돋보이는 무기를 쥐어주셨으니까요.”
“얘는! 이 엄마 부끄럽게!”
얼굴이 달아오르면서도 딱히 싫어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빈말이 아니었다.
‘이거 운이 좋으면 어머니가 더 돋보일 수도 있겠어.’
운이 좋다는 건 어머니 샤를린느 입장에서였다.
유리야 앞으로 평판과 명성을 높일 수단이 널렸다. 수단이 없다면 만들 수도 있다.
그런 반면 샤를린느는 제대로 된 데뷔탕트는커녕 용가의 일원으로 활동한 경험이 전무했다.
아마 이번 연회에 나선다면 기회가 될 터.
“아, 근데 왜 여기 계세요?”
유리는 뒤늦은 질문을 던지자 샤를린느가 겨우 혈색을 가라앉혔다.
“우리 아들이 용인의 성을 달고 처음으로 나서는 공식석상인데 엄마가 신경 써야지.”
“바쁘신 거 아니었어요?”
“엄마가 가문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잖니.”
아, 그렇지.
빌이 집사로 있다지만, 샤를린느도 그 능력을 인정 받아 가문 내부의 업무 절반 가량을 도맡곤 했다.
그 능력이 여기까지 미친 모양이다.
“이럴 거면 빌한테 맡기시고 편하게 즐기시지. 왜 고생하고 계셔요.”
“아냐. 이렇게 해야 엄마 직성이 풀려. ……혹시 엄마가 와서 실망한 건 아니지?”
“설마요! 절대 그렇지 않아요!”
유리는 있는 힘껏 진심을 담아 외쳤다. 샤를린느가 피식 웃었다.
“이 엄만 됐으니 얼른 가보렴. 다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아뇨. 기다릴게요.”
“응? 기다린다니? 이 엄마를 기다리겠다고?”
유리는 재빨리 샤를린느의 팔짱을 끼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가 에스코트 해드릴게요.”
* * *
유리도 스스로 오버스러운 면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낯 부끄럽고 창피하다. 그럼에도 유리는 어머니와 같이 입장하고 싶었다.
한 번 밖에 없는 기회인데다가, 전생 시절의 미련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그는 현생 시절 천애 고아에 부모도 없이 자랐다.
그래서일까.
유리는 창피하고 부끄럽더라고 꼭 그녀와 함께 연회장에 들어서고 싶었다.
어쩌면 어머니에겐 늦었어도 한 번 뿐인 데뷔탕트가 될 기회이지 않은가.
유리는 사람들이 가장 붐빌 때를 기다렸다.
“괜찮으시죠?”
연회장 뒤편에서 샤를린느와 함께 있던 그가 그녀에게 물었다.
샤를린느는 긴장한 기색이 설핏 비쳤다.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구나. 이건 네가 주최하고 널 위한 자리인데.”
“어차피 참석하려고 차려입고 오신 거 아니에요?”
“난 너 놀래켜주려고 했지, 이리 새삼스럽게 나타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
“몰래 얼굴만 보고 가시려고 했군요.”
“방해가 되잖니.”
또, 또 나만 생각하고 자기는…….
버릇처럼 어머니의 배려가 튀어나올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유리는 어머니와 낀 팔짱을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이미 충분히 놀랬어요. 그러니 다른 사람들도 놀라야죠.”
“어후…… 참.”
샤를린느는 천천히 심호흡을 마셨다가 뱉었다.
원래 남편을 잃은 아내가 연회나 파티장에 나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하지만 그 여성이 지체 높고 사회적 직위가 높다면 얼마든 연회에 얼굴을 비쳐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샤를린느는 애매했다.
고로 유리는 역으로 연회에 그녀가 얼굴을 비쳐서 평판이 올라가길 바랐다.
용가의 사람이 벌이는 연회에 나타난 여성이니 사람들의 이목과 관심은 물론.
더 이상 그녀를 남편 잃은 불쌍한 사람으로만 보지 않을 것이다.
“슬슬 갈까요.”
“그래.”
유리와 샤를린느는 2층 뒷복도를 올라 연회가 열리고 있는 로비 계단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서 연회를 관장하던 빌이 그들을 가장 먼저 발견했다.
‘두 분이 어째서…… 아, 아니지! 이럴 때가……!’
그는 눈을 비비고 나서야 샤를린느 모자를 알아봤다. 얼른 그들 앞으로 뛰었다.
계단 아래 선 그가 크게 외쳤다.
“유리 덴 나이트워커, 샤를린느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순식간에 이목이 쏠렸다. 한쪽에 있던 연주자들이 음악을 바꿔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객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난다.
“오오, 저분이 유리 님!”
“듣던 것보다 더 장골이시군요.”
“다른 공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군.”
“헌데 옆에 있는 사람은……?”
“샤를린느 님이겠지! 블레이머의 아내!”
“저, 저렇게 미인이었나? 장례식 땐 전혀 몰랐는데.”
“어우, 이 사람! 똑바로 쳐다보지 마요! 무슨 소릴 들으려고!”
장례식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용가에 그들이 인정받고 머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더 이상 두 사람을 무시할 수 없었다.
유리는 샤를린느보다 한 발 아래 더 내려가며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못내 민망해하던 그녀도 능숙하게 그를 따랐다.
1층에 다다르자 알아서 사람들이 길을 비켜줬다.
나이트워커 가의 일원으로서 유리와 샤를린느의 공식적인 사교계 데뷔의 순간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