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03
제103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문 사람들은 일절 초대하지 않았다. 이런 연회를 싫어할 줄 알았다.
혹시라도 예의상 참석하는 거?
말도 안 되지.
그런데 갈라진 길 끝에 벤헬링턴뿐만 아니라 보좌관 겔런, 미앵비슈도 같이 있었다.
어쩌다가 들린 느낌은 아니다.
그들은 연회와 맞는 복장을 하고 있었다.
벤헬링턴은 검고 긴 롱코트에 잘 다린 정장 바지와 기장이 긴 숄을 걸쳤다.
미앵비슈도 검은 레이스와 자수가 놓인 드레스를 입었다.
“뭐하냐. 남의 얼굴 보고 멍청하게 있고.”
“아, 죄송합니다.”
벤헬링턴의 따가운 소리에 유리가 샤를린느를 이끌었다. 그녀도 어째서 벤헬링턴이 여기 있는지 모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와 마주하자 주변이 알아서 거리를 벌렸다.
벤헬링턴은 유리와 샤를린느를 빠르게 훑었다.
“제법 태가 괜찮군. 다른 인간 놈들보다 훨씬 나아.”
“감사합니다, 할아버님.”
“연회 준비는, 샤를린느가 한 건가?”
“아, 네에.”
이번엔 그의 눈이 파티장 곳곳을 누볐다.
파티장은 예상보다 밝으면서 화려하지 않지만 따듯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두운 곳 하나 없이 촛불과 아티팩트가 곳곳을 밝혔다.
차려놓은 음식은 식지 않게 소량으로 계속 제공되었으며, 한쪽에 마련된 디저트바는 형형색색으로 보석처럼 빛났다.
빌에게 맡겼더라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연회 구성이었다.
“흥, 빌보다 훨씬 낫게 꾸몄군. 그놈이었다면 칙칙하게 시커먼 장식으로 도배했겠지.”
“안 그래도 집사님께서 계속 가문의 풍조에 맡게 검은 장식이 많다고 해서…….”
“아직도 빌한테 ‘님’이라 부르는 거냐?”
“아, 그으게에…….”
유리는 몰랐으나, 샤를린느는 아직 가문 사람 몇몇을 어려워했다.
빌이나 겔런, 그 밖에 기사들에게도 존칭을 붙였다. 미앵비슈가 하지 말라고 해도 입에 붙어버려서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됐다. 네가 남한테 뭐라 지껄이든 내 알 바 아니지.”
그리 말한 벤헬링턴인 옆에 있던 샴페인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분위기가 어색해질세라 유리가 그 틈에 끼어들었다.
“근데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안 오실 것처럼 말씀하셨잖아요.”
“내가 내 발길도 마음대로 못 가더냐?”
“그건 아니지만…….”
“면을 세워달라고 해서 왔다.”
“……네?”
단연코 그런 말을 했던 기억은 없다.
물론, 용가의 체면을 위해서 집을 빌려달라고 했지만. 그렇다고 가주된 이로 와달라고 하진 않았다.
요청해봤자 오시지 않을 게 뻔하지 않은가.
벤헬링턴이 한심하다는 콧방귀를 끼며 그런 유리를 내려다봤다.
“더 주절대지 마라. 어차피 네놈 얼굴만 보고 갈 생각이었어.”
“그러셨군요.”
“근데 네놈이 이리 늦게 나와서 한 소리하려 했건만.”
그는 다시금 샤를린느의 얼굴을 쓱 훑어살폈다. 그리곤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간신히 한 마디 꺼냈다.
“평소에도 꾸미고 다녀라. 기껏 용가의 사람이 되어서 매번 수수하게 입어 갖고 날 욕보일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지.”
“알겠습니다.”
“난 가마.”
정말로 얼굴만 보러 온 사람처럼 매정하게 돌아선다. 같이 온 겔런과 다른 이들도 그를 따랐다.
미앵비슈만이 떠나기 전 샤를린느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저래 보여도 예쁘다고 칭찬하시는 거예요.”
“네에.”
“후후, 그럼 재미있게 즐기다 와요.”
화려했을 등장에 비해 허무한 퇴장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그들의 등만 보더라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을 맛봤다.
용가, 나이트워커의 가주가 참석한 연회.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춘 그 자체가 분명 밖에서 엄청난 가십거리가 될 것이다.
어쩌면 연회에서 나이트워커의 가주를 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더더욱 의미가 있는 등장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벤헬링턴이 사라지자마자 사람들이 모자에게 몰려들었다.
어머니 샤를린느 곁은 다른 가문의 영부인들이 선점했다.
“저어, 샤를린느 님이라 하셨던가요. 잠깐이나마 담소를 나눌 수 있을까요?”
“저도요! 저도 같이 대화를 나누고 싶어요!”
그밖에 남성들의 시선을 멀리서 한 몸으로 받았다. 그들의 눈빛은 호기심, 몇몇은 그를 넘겨서 사모에 가까운 감정을 드러내기까지 했다.
유리는 그런 놈들의 사이를 가로 막고 싶었지만…….
“고, 공자. 혹시 날 기억하는가? 부친의 장례식 때 만났었는데!”
“어허, 이 사람! 예의 없게 부친의 장례식을 들먹이다니! 미안하군, 공자.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처음 뵙겠소. 난 게니아 공작이라 하오. 초면이지만 그대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소.”
가지각색 가식으로 무장한 이들의 아첨이 쏟아졌다.
결국 그들로 인해서 유리는 어머니를 보호할 순 없었다.
‘어머니가 알아서 잘 대처하시겠지. 어차피 막 대쉬할 놈들이 있을리도 없고.’
용가의 사람한테 관심을 표했다가 관으로 들어가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어지간해선 적극적인 사람은 없으리라.
유리는 그런 생각을 하며 무언의 입 모양으로 샤를린느에게 말했다.
잠시 떨어져야겠다고.
그녀는 괜찮다며 웃더니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어울렸다.
안도한 유리도 무리를 이끌듯 다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예상대로 첫날의 대부분은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과 보내는 데 시간을 썼다.
딱히 시간 낭비까진 아니었다. 친해둬서 괜찮은 손님도 여럿 있었다.
다만.
‘메데스 사람이 나타나질 않는군.’
몇 시간이 꼬박 지나도록 메데스 가(家)라고 밝히거나 재단 사람이라고 말한 이가 없었다.
혹시나 해서 메데스에서 왔냐고 묻어봤지만 마찬가지.
명단에는 그들이 온 게 확실했다. 미리 언질을 받았던 빌이 그들을 확인했다.
일부러 날 피하는 건가?’
아니, 그럴 이유가 없다.
사전 조사를 해본 결과, 메데스의 지적인 집착은 엄청났다.
재단과 관련없는 누군가가 괜찮은 논문이나 발표를 하면 연회나 다른 여러 빌미로 그 사람을 찾아간다고 한다. 그런 지식인들에게 후원을 약속하는 대신 자신들이 만든 협회에 들어와달라고 부탁하곤 했다.
상대가 다른 가문의 후원을 받아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워낙 큰 액수를 불러서 거절하기 곤란했으며, 어떤 가문은 메데스 재단에 사람 장사를 하는 곳도 있다.
그 정도로 인재에 목을 매는 곳이 메데스 재단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리는 한 가지 가정을 세웠었다.
[일부러 널 피한다고 생각한 건, 네가 인재라는 거니, 설마?]같이 기다리던 티르빙이 살포시 물었다. 유리는 장난기 묻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응, 맞아.’
[……우리 꼬맹이 사회활동 하려니까 많이 힘든가 보구나.]‘농담한 거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
유리가 아니어도 이곳엔 다른 인재들도 널렸다.
마법사, 공학자, 인문학자, 나아가 음유시인들까지.
메데스가 미끼를 물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은 유리가 먼저 초대장을 보내서 참석시켰다.
그런데도 이후 몇 시간 동안 남 몰래 헤매봤으나 메데스 재단 사람들의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엔 다른 미끼를 뿌려야겠다.
……라는 생각을 하자.
“오랜만이네요, 유리 공자.”
한 목소리가 몰려든 인파를 뚫고 나왔다.
사람들을 헤집고 나타난 그녀는 우아한 발길과 함께 다가섰다.
“엘라트리오 황녀?”
“뭐 그리 놀라시나요? 제가 오면 안 될 자리인가요?”
유리의 동맹이 등장하자 대화를 나누던 이들이 알아서 공간을 벌렸다.
엘라트리오는 놀리듯이 말하며 치마를 살짝 들고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유리도 얼결에 가벼이 고개를 숙였다.
“바쁘다고 해서 못 온다고 하더니.”
“누가 주최한 연회인데 어찌 빠질 수 있겠어요.”
사실 유리가 가장 먼저 연회에 초대했던 사람은 엘라트리오였다. 어쨌든 이 연회를 열게 된 원인이 그녀와의 동맹이었으니까.
그러나 아직 황태자 사건이 정리되지 않은 황녀는 빠르게 거절 의사를 표했다.
그 밖에 할 일이 많았으니 솔직히 연회를 여는 것부터가 미안했다.
“다들 서프라이즈를 너무 좋아하는 거 같군.”
“누가 또 저 말고 몰래 왔나요? 애인? 아니면 정혼자?”
“……어머니다, 어머니.”
“아아. 실례를.”
엘라트리오가 쿡쿡 웃었다.
어느 틈엔가 주변 사람들은 완전히 자리를 물리고 떠났다.
베리온 제국의 주축이 될 수 있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어쩌면 거리를 두고 탐색을 하려는 건지도 모르고.
자연스레 둘만의 자리가 생긴 유리와 엘라트리오는 눈치 안 보고 대화를 이었다.
“바쁜데도 와줘서 고맙군. 그래도 안 오면 섭섭할 뻔했어.”
“저야 말로 섭섭하네요. 혼자서 이런 근사한 자리를 기획하고. 일찍 알려주면 좀 덧났나요.”
“렉슬러는?”
“내가 여기 왔으면 대신 일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벌써부터 부려먹고 있는 건가.”
“그 사람이 절 쫓아낸 거예요. 제발 부탁이니까 쉬라면서. 이번 기회에 진탕 마셔도 되니까 놀다 오라고 하더라고요.”
대체 얼마나 일만 했으면…….
안 봐도 그려지는 두 사람의 그림에 유리는 자그맣게 웃었다. 엘라트리오도 따라 웃곤 목소리를 살짝 낮췄다.
“연회를 꽤 급하게 준비한 거 같네요. 보통 몇 주 전에 초대장 돌리기부터 천천히 하는 게 정석인데. 이번엔 무슨 작당을 꾸미고 있는 거죠?”
“작당이라니. 꼭 내가 악당 같네.”
“악당은 아니시죠. 하지만 다들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을 걸요?”
연회에 초대하고 여는 시기가 빨랐다.
연회의 장소와 주최자가 용가다.
이 두 가지 사실만 하더라도 초대 받은 이들은 머릿속에서 바쁘게 계산기를 두들겼다.
이 연회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며, 그 의도를 빠르게 알아채는 사람이 이득을 취할 수 있었다.
고로 주최자인 유리와 계속 부딪혀가며 대화를 원했다. 비록 가문의 서자여도 말이다.
“우선 자리를 옮기지.”
답하기에 앞서 유리는 자연스레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테라스 쪽으로 향했다. 테라스는 예의상 대부분 비어 있었다.
사적이고, 또는 은밀한 자리를 위해서.
정작 유리와 엘라트리오는 그런 점은 신경 안 썼다.
그는 테라스에 한 발 내딛기도 전에 말문을 열었다.
“상황이 조금 급했다.”
“급해요? 뭐가요?”
“이때가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유리는 교국에서 있었던 일들, 그리고 흑마법사 단체에 대해서 그녀에게 알려줬다.
나아가 메데스 왕실과 재단에 대해서도 털어놓자 그녀가 흥미로운 듯 깊은 콧소리를 냈다.
“흐으응. 교국에서 소동이 났다고 해서 뭔가 했더니. 저 몰래 근사한 짓을 벌이셨군요.”
“근사한 건 모르겠고. 나름 화려했지.”
“그래서? 메데스 재단과는 접촉하셨나요?”
“아직. 출입부 명단에는 확인이 됐는데, 어디 있는지 전혀 안 보여.”
“그런 거라면 미리 말씀하시지.”
엘라트리오가 테라스 난간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마침 재단에서 관심 있어 하는 사람이 제 편에 있거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