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14
제114화
샤르트앙 밸바스터 리펠리온.
그를 알아본 유리는 그제야 찬찬히 얼굴을 살폈다.
벤헬링턴이 태산 같은 용인이라면, 샤르트앙은 산속에 사는 도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얀색에 가까운 복장이 그런 느낌을 더 강조했다.
‘아무 반응 없을 줄 알았더니 여기까지 직접 행차할 줄이야.’
뾰족한 귀를 봤을 땐 직계나 장로급이 왔다고 생각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가주가 다른 가문에 가는 경우는 정말로 없었으니까.
샤르트앙은 그 부분을 짚었다.
“해링에 이어서 샤르트앙까지. 용가에서 벌어질 수 없는 일들을 네놈이 다 만드는구나.”
“해링 님이 오신 거, 알고 계셨군요.”
“용인이 다른 용가에 갔는데 어떻게 몰라? 쯧.”
“걱정이 되긴 하셨나봅니다.”
“걱정은 무슨! 그딴 놈 어찌되든 내 알바더냐!”
“그럼 로시가 걱정되셨던 걸까요?”
순간 찻잔을 다시 들던 손이 멈췄다. 옆에선 벤헬링턴이 태연하게 차를 마시며 둘의 대화를 엿들었다.
유리는 굳이 되물었다.
“로시 때문이 아닙니까?”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지.”
“몰라서 질문을 드렸을 뿐입니다.”
“…….”
샤르트앙은 멈췄던 찻잔을 들이켰다.
유리에 대해선 샤르트앙을 비롯하여 용가 사이에선 유명한 일화가 되어 퍼졌다.
나이트워커의 서자이자 인간인 그가 유명하지 않다면 그게 더 이상했다.
대부분은 평이 좋지 못했다.
이 또한 서자이고 인간이라서 그랬다.
그래서 더더욱 벤헬링턴이 어떤 심보로 유리를 가문으로 들였는지 의아했다.
허나 오늘 직접 보니 알겠다.
‘인간 주제에 패기 하나는 벤보다 대단하군.’
속 빈 강정이라 해도 인정할 건 인정할만했다.
용가의 가주를 두고 저리 당당하게 구는 자는 적어도 인간 중에선 없었다.
“이야긴 다 들었다.”
한층 누그러진 음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해링이 로시 그 애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고?”
“그렇습니다.”
“네가 그걸 도왔고.”
“맞습니다.”
“인간이라 그런지 감상적이구나. 다른 용인이었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을.”
“감상적이라고요?”
“아니냐?”
뭐, 감상적이지 않냐고 하면, 딱히 그렇진 않지.
아무리 이기적으로 제 이익만 위했다면 그건 인간답지 못했다.
차라리 용인이라면 모를까.
물론, 유리는 그 중간에 서서 밸런스를 맞춰갔다. 지금도 그 스탠스는 똑같았다.
“감상적인 면이 있었다면 채럿 때문이겠네요.”
“채럿? 그게 누구지?”
“제 동생입니다.”
채럿은 자기 또래 아이를 보고 유독 기뻐했다. 로시가 여기에 머무는 동안 해링보다 더 많이 시간을 보낸 사람이 채럿일 정도였다.
만에 하나 로시가 정말 변고를 당한다면, 채럿이 슬퍼할 거다.
유리는 그게 싫었다.
“그리고 언젠가 리펠리온에 대가를 요구할 생각이었습니다.”
“뭘 한 게 있다고 대가를 바란다는 거지?”
“그야 많이 있습니다. 리펠리온과 메데스 왕실의 골치인 세계구원기금을 괴멸시켰고, 핵심 증거 자료를 제가 다 수거 해왔죠. 리펠리온에서도 이 증거를 바라지 않던가요? 이게 있어야 재단에 책임을 물을 수 있으니까요.”
재단의 치부가 까발려지면서 중요한 자료와 증거는 유리, 그리고 교국의 엘카에게 전해졌다.
그 밖에 더 핵심적인 자료는 유리에게 있었고.
이게 없으면 재단에게 책임, 나아가 해체할 명분이 없었다.
지금이야 흑마법 연구 정황과 그 관련자들을 체포해서 증언을 얻었다지만.
결국 중요한 건 물적 증거다.
이것 없이는 수사건 뭐건 아무것도 안 되었다.
“리펠리온에선 이 증거가 없어서 입장표명을 안 하고 있었죠?”
“큼! 흠흠! 그야 확실한 거 없이 어찌 입장을 밝히겠느냐!”
“그렇다면 더더욱 자료를 넘겨드릴 수 없겠네요.”
“뭐, 뭐라?”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고 세상에 알릴 용기도 없는 용가에 제가 뭐하러 엎드려 절을 받아야 하나요?”
“어, 엎드려? 절?”
“남이 먼저 책임을 묻기 전에 먼저 책임지는 자세를 가지시라는 겁니다. 세계의 군림자인 용가답게요.”
정치인들의 아주 흔한 수법이 있지 않던가.
잘못과 책임을 끝까지 부정하다가 확실한 무언가가 튀어나와야 겨우 허리를 숙이는 자세.
유리는 그 꼴이 보기 싫었다.
“먼저 책임을 지겠다고 공표해주십시오. 그럼 제가 가지고 나온 자료를 모두 넘겨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무슨 책임!”
“흑마법이 성행하면서 수 많은 빈민들이 실험체로 당했는데, 그 책임을 지지 않으시겠다고요?”
“그야 그건 재단 놈들이 멋대로―!”
“재단이 멋대로 설치는 동안 리펠리온과 메데스 왕실은 힘을 쓸 수 없었죠. 그렇다면 간단하군요. 저희를 비롯해 다른 용가에 도움을 청하면 되잖습니까?”
“용가끼리 도움을? 얼토당토않은 소리! 무슨 치욕을 맛보라고 그딴 짓을 하느냐! 벤헬링턴, 자네였어도 그러진 않았을 거 아닌가!”
화살이 벤헬링턴에게 향하자 그는 “글쎄다. 난 모르겠는 걸.”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유리는 관자놀이를 긁으며 이어 말했다.
“리펠리온에서도 흑마법의 존재는 알고 있었잖습니까.”
“그렇지. 해링 그 놈이 말해줬었으니…….”
“그럼 그 흑마법 연구를 방치 하셨군요? 타이카 공국의 빈민들이 실험체로 죽어갈 때까지?”
“……!”
일순 샤르트앙의 얼굴이 있는대로 구겨졌다.
“비록 타이카 공국에서 벌어진 참사지만, 메데스 재단으로부터 비롯된 사건입니다. 그렇다면 왕실에 책임이 있고, 왕실은 리펠리온에 도움을 청했었죠. 그런데 리펠리온은 자신들이 곤란해지자 사안을 해결하려 하기보다 그냥 놔뒀습니다.”
“우린 몰랐다! 사람들이 죽어가는 줄 몰랐다고!”
“몰랐을 겁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이젠 아시잖습니까.”
용가의 자존심과 긍지.
그게 대체 무어라고 쉽게 포기하지 못하곤 한다.
원작에서 다이올드 가주가 있는 나이트워커 또한 비슷한 고집 때문에 굴복하지 않고 자멸의 길을 걸었다.
리펠리온도 그랬을 것이다.
해결할 수 없으면서 해결할 수 있다고. 그 사이 누구도 모르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는 그 부분을 책임지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비록 몰랐어도, 몰랐던 죄를 인정하고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겠노라고.”
“말도 안 된다. 우리가 저지르지도 않은 잘못 때문에 그런 치욕을 겪으란 말이냐!”
“그럼 로시는요?”
“어?”
구겨졌던 표정이 이번엔 다림질 한 것처럼 쫙 펴졌다.
“로시도 저들에게 이용당하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근데도 놔뒀던 건 무엇 때문이죠? 이것도 몰랐다고 하실 건가요?”
샤르트앙은 로시만큼은 모른다고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해링이 로시 때문에 얼마나 설득을 했던가.
재단이 로시의 목숨을 쥐고 자신에게 더러운 일들을 시키고 있다. 그러니 부디 내가 아니더라도 가문에서는 로시를 지켜달라고.
죽더라도, 꼭 마지막을 함께 해달라고.
“그나마 해링 님은 용기가 있으셨습니다. 빈민들을 살리지 못했어도 딸을 살리려 이곳에 몰래 들어왔었으니까요.”
“그, 그 놈이 여기에 몰래 왔었다고? 초대장이 아니라?!”
그건 진짜로 몰랐던 모양이다.
하긴, 남의 용가에 잠입하겠다고 선언하는 용인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해링의 잠입 의도가 불순했으나, 이제 와서는 신경 쓰지 않았다.
유리에겐 그의 침입이 중요한 기회였으니까.
“크으…….”
샤르트앙은 뜨거운 찻물을 단숨이 마셨다. 목구멍이 뜨거워도 개의치 않았다.
그렇게 잠시 침묵이 흐르고.
“살릴 수 있는 건가?”
갑자기 샤르트앙이 그리 물어왔다. 아까보다 떨리는 목소리에는 원인 모를 먹먹함이 묻어 있었다.
“내가 모든 걸 인정하면, 로시 그 애를 살릴 수 있냐고 물었다.”
“가, 가주님!”
곁을 지키던 모든 기사들이 놀랐다.
이는 마치 나이트워커에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움을 받을 거란 기대감이 없었다. 그저 유리가 굴욕을 주기 위해서 샤르트앙을 압박했다고 여겼다.
헌데 갑자기 벤헬링턴이 불쑥 상체를 내밀었다.
“약조하지. 자네 증손녀를 반드시 살려주겠네.”
* * *
무엇이 샤르트앙을 움직이게 했는지 알지 못했다.
가족애일까, 아니면 가족을 죽도록 방치한 가주가 되기 싫어서일까.
뭐가 되었든 샤르트앙은 그 자리에서 서약서 한 장을 썼다.
나이트워커에 도움을 받고 제대로 된 입장 표명을 하기로.
해링의 무단침입과 드힐노어 암살미수에 대한 책임 또한 제대로 물었다.
그만한 대가까지 약속받고.
서명을 마친 샤르트앙은 별채에서 잠시 쉬고 싶다며 2층으로 올라갔다.
리펠리온의 기사들도 잠시 해산되자 나이트워커 기사들이 물러났다.
유리와 단둘이 남은 벤헬링턴은 서약서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크핫! 속이 다 시원하군. 나이트워커에서 어째서 메데스 재단 일에 끼어드냐면서 기사들을 끌고 오는데, 당장 면상을 갈아버리려다가 겨우 참았구나!”
“고작 그런 이유로 기사들을 끌고 온 거였나요? 나이트워커에?”
“그러게나 말이다! 한심한 놈. 저놈은 예나 지금이나 힘 빠지는 짓은 참으로 많이 했지.”
그러고 보니 두 분이 의외로 친한 거 같았는데.
더 묻고 싶었지만, 유리는 서약서에 더 관심이 갔다.
“또 다른 백지수표가 생겼네요.”
“네가 바라던 거 아니더냐?”
“그렇죠.”
서약서엔 아직 쓰이지 않은 공백란이 덩그러니 있었다.
유리의 요구사항 란이었다.
이 부분은 유리 본인이 원하기도 했지만, 벤헬링턴이 먼저 꼭 넣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혼이 반쯤 나간 샤르트앙은 마음대로 하라며 사인만 빠르게 휘갈겼다.
“가져가라.”
벤헬링턴은 서약서를 읽다가 던지듯 유리에게 넘겼다.
“할아버지께서 갖고 계셔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도 가문 간의 서약이잖아요.”
“난 샤르트앙 그 놈 당황하는 꼴을 봤으니 됐다! 내겐 필요 없어.”
“그럼.”
서약서를 물끄러미 살피다가 고이 접어서 품속에 챙겼다.
이걸로 어찌 됐든 간에 리펠리온은 꼼짝없이 나이트워커에 보상을 해야만 했다.
아마 오늘 그걸 확인하러 왔던 자리였을 거다. 기사들을 몰고 온 것도 그런 일환이었겠지.
해링의 무단침입 건도 있어서 그만한 책임 또한 피할 수는 없었다. 설령 피하려 해도 유리는 제대로 따질 계획까지 세워놨다.
“유리 님!”
그때 별채로 뛰어드는 한 사람이 있었다.
블레이크였다.
그는 뒤늦게 벤헬링턴을 발견하고 경례를 올렸다.
“소, 송구합니다. 가주님께서 같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됐다. 어차피 가려던 참이었다만……. 그래도 여까지 뛰어온 이유가 궁금하긴 하군.”
“아, 그게!”
블레이크가 유리를 향해 몸을 살짤 돌렸다.
“마법학회 학회장이 사살된 채 발견됐다고 합니다.”
* * *
메데스 왕국 동부, 이름 모를 항구 한 구석.
달빛으로부터 도망친 한 남자가 피칠갑이 된 꼴로 바닥을 기었다.
그는 어둠이 깔린 골목에 들어서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을 추격하는 자와 조금이라도 멀어지려면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러나 다친 몸으로 멀리 갈 수는 없는 법.
푸욱!
“커어억!”
검 한 자루가 종아리를 관통해 땅에 박혔다.
전진하기는커녕 몸을 뒤집을 수도 없게 된 남자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아리를 부여잡았다.
“끄, 아! 대, 대체 왜! 누군데 날!”
“메데스 재단 후원을 받는 마법학회 학회장. 이름이……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군.”
“헉!”
마법학회 학회장이라 불린 남자가 헛숨을 삼켰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날 알아봤지?
그리고 여긴 어떻게 알고 쫓아 왔고!
“네, 네 녀석! 누구냐! 배, 배신자냐? 네놈이 배신하고 흑마법까지 까발린 거야?!”
“…….”
정체 모를 사내가 말없이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아래, 먼지 같은 빛이 모여 한 형체를 이뤘다.
학회장을 그걸 보고 기함을 터뜨릴 뻔 하다가 참았다.
“미미미미, 미, 미뭉! 하지만 넌 그때의 그 녀석이……!”
“더러운 건 잘라낸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학회장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과거 성검의 주인이 줄곧 입에 달고 살았던 대사였다. 이 세계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은 필요 없다면서.
하물며 더러운 건 살려놓을 일말의 가치도 없다면서.
“사, 살려줘! 제―”
[죽여라.]푸확!
미뭉의 끝자락은 망설이지 않고 학회장이라는 자의 목을 그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