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23
제123화
정령왕 라군도.
그가 드래곤과 필적하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무한 환생자인 카이나 원작과 설정을 알고 있는 유리도 그 대답은 같았다.
그러나 드래곤과 맞먹는 존재라고 하면, 단언컨대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태초부터 영혼을 관장하며 이 세계의 자연을 다스려왔던 존재.
드래곤이 멸종하고 용인만이 남은 이때까지 여전히 살아있는 그.
그것은 단순히 힘으로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존엄함을 지니고 있었다.
“……!”
그 존재감을 가장 먼저 느낀 건 빅스터였다.
허공에서 마법을 난사하던 그는 돌연 공격을 멈추었다.
용암 아래, 무언가가 헤엄치고 있었다.
거대하며 고요하고, 위압적이며 여유로운 자태.
그것은 바로 고래였다.
불꽃으로 이뤄진 고래가 용암을 바다 삼아 헤엄치고 있던 것이다.
“정령왕이군요.”
빅스터는 어이없다며 한숨을 푹 쉬었다.
반면 뒤늦게 존재감을 인지한 카이는 고래가 지나가는 루트로부터 벗어났다. 마침 유리가 시야에 들어와서 그쪽으로 뛰었다.
정령왕을 부른 채럿은 용암 위에 손을 댔다.
데일 듯한 열기가 솟았지만, 더 이상 그녀에게 뜨거움은 의미가 없었다.
불의 정령왕 라군도의 영향력이 그녀에게 불에 관한 내성을 주었을뿐더러, 애초에 정령은 제 주인을 해치지 않았다.
용암 위로 고래가 거대한 얼굴 끝을 내밀었다.
내민 손과 맞닿자 잠시 고래가 잠시 멈춰서 열기를 나눴다.
“뭘 해야 할진 알지?”
푸르르르!
고래는 기이한 숨 소리를 내곤 용암 속으로 숨었다.
아까완 다른 속도로 헤엄치던 녀석은 하늘에 있던 빅스터를 향해 뛰어올랐다.
그 여파로 거대한 용암 파도가 솟구쳤다가 부서졌다. 파도로부터 떨어진 용암이 유리를 향해 떨어졌으나, 교묘하게 빗겨나갔다.
이 또한 정령왕이 내려준 힘이자 가호였다.
“여러모로 날 놀라게 하면, 참. 또 가문에 뭐라 해야 좋을지 모르겠군요.”
마지막 순간까지 빅스터는 한숨 짓고, 웃기를 반복했다.
피할 마음 따윈 없었다. 가만히 서서 거대한 고래의 위용을 감상했다.
마나나 성력 같은 기세는 없었다. 대신 차원이 다르다는 막역한 감이 전신을 들쑤셨다.
저것에 닿는 순간. 모든 게 불살라질 터.
이런 기운을 느낄 기회가 없었기에 빅스터는 지금 한 순간을 최대한 즐겼다.
화악!
벌어진 주둥이가 단숨에 그를 집어삼켰다. 그리고 그대로 용암에 처박혔다.
고래와 빅스터는 한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 테지만, 유리는 이런 걸로 빅스터가 죽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만히 당하고 있던 빅스터가 이상하게만 보였다.
“오라버니!”
채럿이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어쨌든 시간 끌기에는 충분했으니. 마침 멀리서 신수종 실버윙이 빠르게 접근했다.
유리는 채럿을 안고 신수종의 발을 잡았고, 카이도 꼬리 쪽으로 몸을 던졌다.
그렇게 신수종이 일행을 데리고 상공으로 박차올랐다.
그들이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화산 지대는 잠잠했다.
“후우.”
그때, 용암 바다 한가운데가 원형으로 갈라졌다. 찢어진 공간 안에서 빅스터가 떠오르듯 나왔다.
역시 멀쩡히 살아있었다.
옷 끝자락 하나 타지 않고, 흔한 그을음 자국조차 없었다.
그는 위로 떠올랐다가 다시 표면에 발을 대며 섰다. 발이 닿은 곳에선 한기가 흘러 용암을 굳히다 못해 얼렸다.
“하필 뺏겨도 불의 정령왕을 빼앗기다니.”
어쩔 수 없지.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었다.
정령왕이 제 주인을 나이트워커의 사람으로 택한 이상, 빅스터를 비롯한 솔리드녹스에겐 처음부터 기회가 없던 셈.
그걸 이제야 깨달아서 아쉬울 따름이었다.
“서류, 종이, 서류, 종이…….”
빅스터는 보고서에 뭐라 써야 할지 중얼거리며 공간을 찢어 그 속으로 사라졌다.
* * *
가문으로 돌아온 유리와 일행은 잠깐의 휴식을 취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았으나, 피로를 푸는 게 먼저였다.
반면 유리는 얼마 쉬지 않고 마리를 찾아갔다. 출타가 잦은 벤헬링턴 부부 때문에 오늘이 아니고선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몰랐다.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리가 창가에 서있다가 유리를 바라봤다.
“기다렸다.”
그러나 기사단 단장실에 들어서자마자 들린 첫 마디는 그런 예상을 깼다.
유리가 물었다.
“저 기다리셨어요?”
“기다리면 안 돼?”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착각하지 말려무나. 솔리드녹스에서 서신이 안 왔다면 내가 왜 널 기다렸겠어.”
그럼 그렇지.
적대 가문인 솔리드녹스 한복판에서 난리를 치다 못해 빅스터한테 얼굴을 들키고 왔으니.
유리도 이 부분을 걱정했다. 그래서 복귀하고 몇 시간도 안 되어서 보고하러 온 거였다.
“뭐라고 왔던가요?”
“그쪽에서 광산을 엎었냐고.”
“질문을 했다는 건…… 확신이 없다는 거군요.”
“들켰어?”
“빅스터에게 노출 당했습니다.”
“헛, 그 돌팔이 새끼한테? 재수가 없었구나.”
솔리드녹스가 광산 사업의 뒤를 봐준다고는 마리도 알고 있었다.
그저 빅스터인 것만 몰랐다.
그렇다고 마리는 크게 놀라지도 않았다.
“아무튼 훌륭히 시험을 통과 했으니 뒤처리는 신경 쓰지 마라. 아무리 우리라는 걸 알아도 놈들은 우리를 건드릴 수 없어.”
나이트워커와 솔리드녹스의 관계에 있어서 흔한 착각 중 하나는, 건수가 있으면 서로 물고 늘어진다는 인식이다.
물론, 지금쯤 솔리드녹스는 나이트워커를 공격할 빌미를 엄청나게 찾고 있을 테지만.
한 번 충돌했다가 발생할 피해를 생각하면 시비 걸기조차 어려웠다.
설령, 걸어도 상관없었다.
마리가 그 정도 대비를 안 했을 리 없었다.
“전부 다 알고 계셨군요. 정령석과 화산 지대, 실버윙에 관해서. 그리고, 채럿도요.”
“말했었지. 채럿에 대해 얼핏 알고 있었다고.”
“정령을 그 애한테 주시려고 했었다면 직접 주셨어도 됐을 텐데요.”
“내가 왜?”
마리는 그리 되묻곤 손님 맞이용 소파에 앉아 빈 잔에 술을 따랐다.
떨어져 있는데도 독한 알콜 냄새가 풍겼다.
마리는 단 한 모금에 술을 전부 털었다.
“채럿, 그 애는 지식의 관을 포기했다.”
“네?”
“몰랐었구나. 하긴, 알려줬을 리가 있겠어.”
지식의 관을 포기한다는 건 직계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건 곧 후계 싸움에 있어서 유리한 구도를 버리는 꼴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채럿을 다이올드가 가만히 놔뒀을 리가…….
“……백부께서 포기하셨나요.”
“맞아. 멍청한 내 아들이 지 딸을 포기했어. 그렇다면, 채럿이 어찌 될지는 너도 잘 알겠지.”
“가문의 법도에 따라 죽어야, 하죠.”
직계를 포함해서 용가의 사람은 언젠가 쓰임이 다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포기는 다르다.
강해지길 포기한 자는 용가에 필요 없었다. 특히나 나이트워커에선 나약한 자를 지독하게 싫어했다.
그것이 가문을 이끌어온 힘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죽어야만 했다.
“시험이면서 죽으라고 보내셨군요.”
시험보단 죽으라고 보낸 게 더 확실했다. 어차피 못 통과할 시험이기도 했으니, 채럿 같이 포기한 자는 당연히 죽을 거라 여겼겠지.
“이제 채럿은 어떻게 되죠?”
“죽여야지.”
죽으라고 보냈더니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
핑계에 불과했던 시험을 통과했어도 마찬가지. 이것은 능력이 아니라 자질의 문제였기에 더더욱 살릴 수 없었다.
“네가 죽여보겠어?”
마리의 섬뜩한 눈빛이 번뜩였다.
“솔리드녹스 한 가운데서 훌륭히 화산 지대를 원상태로 바꿔놨어. 그래, 그 시험은 통과다.”
“근데도 또 시험을 주시는 건가요?”
“불만이라면 그만둬. 안 해도 돼. 하지만 하는 순간 더한 보상을 얻을 수 있지.”
보상이라는 달콤한 유혹에 순간적으로 혹했다.
아무리 카이여도 이 상황에서 안 흔들릴 순 없었다. 마리가 허투루 하는 말도 아닐 테고.
그러나 유리는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어째서?”
“채럿의 정령왕보다 더 강한 보상은 없을 테니까요.”
그냥 정령술사도 아닌 정령왕이다. 그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네가 싫다면 내가 죽인다.”
“그럼 전 할머니를 막아야겠네요.”
“네가 감히?”
“가문의 법도에 따라 채럿을 죽여야 한다는 건 부정할 순 없죠. 하지만 채럿은 제가 가주가 되기 위해 필요한 구성원이라서요.”
“그딴 게 뭔 상관이라고.”
“가주가 될 사람이 제 사람 하나 못 지키면 민망하지 않겠어요?”
가주란 무릇 책임을 지는 자리, 그 아래 가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을 보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
물론, 지난 세월 나이트워커의 가주는 그런 이미지와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유리는 일전에 가주가 되겠다고 하면서 선언했었다.
“존경받는 가문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때 존경을 언급하면서 벤헬링턴이 나무라지 않았던 건 유리의 선언을 받아들이겠다는 뜻이었다.
유리는 자신이 뱉은 각오를 이젠 지켜야만 하는 입장이 되었고.
그 일환으로 채럿을 지켜야만 했다.
“전부터 느꼈지만, 주둥이 터는 건 진짜 네가 최고다.”
“칭찬 감사합니다.”
“됐다, 나도 그냥 해본 소리다. 죽여야 마땅하나 정령왕과 계약을 했다고 하면 장로들도 뭐라 하진 못할 거다.”
마리는 더 이상 그를 몰아세우지 못했다.
사실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채럿을 죽이라니. 정령왕과 계약한 정령술사를 죽여봤자 가문에 손해만 되었다.
더구나 솔리드녹스에게 제대로 ×을 먹였으니까 이득을 보았다.
“돌아가. 보고서는 필요 없어.”
“채럿은 어떻게 되는 거죠?”
“안 죽인다니까.”
“장로들을 언급하시니 막상 걱정돼서요. 단순히 정령왕을 보여준다고 설득될 사람들이 아닐 겁니다.”
“…….”
장로들을 설득할 수 있다는 마리와 달리, 유리는 좀 더 확실한 게 필요했다.
정령왕과 계약했으니까 그걸 보여주면 되겠으나.
고지식한 장로나 다른 가문 사람들이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줄 리가 없었다.
“마땅히 방법이 없다면 제게 있는데, 들어보시겠어요?”
유리는 조심히 자신의 생각을 그녀에게 내비쳤다.
* * *
아무리 생각해봐도 빅스터가 광산 사업의 뒤를 봐줬던 건 정령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흑수정?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으리라.
그보다 더 가치있는 걸 놔두고 흑수정이 뭐가 중하겠느냐만.
“마리 님도 그렇고, 솔리드녹스도, 다 알고 있던 거네요.”
“그렇지.”
채럿의 머리를 빗어주던 릴림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벌써 몇 시간 째 채럿은 릴림과 다른 시녀의 손길을 빌려서 꽃단장을 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단장이라 머리를 빗는 동안 꾸벅꾸벅 졸았다.
“정령왕이랑 계약하고 잠이 많아지신 거 같아요.”
“정령이란 게 원래 그래. 아마 앞으로 먹는 양도 두 배로 늘 거야.”
“지금도, 많이 드시던데.”
“그래?”
“성장기시잖아요.”
“……초콜릿만 주는 건 아니지?”
“…….”
릴림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얼굴도 마주치지 않는다.
유리는 입맛을 다시며 의자에서 일어나서 갑옷 거치대로 향했다.
전에 없던 거치대엔 작은 사이즈의 검은 로브가 걸려 있었다.
후드는 없애고, 옷자락엔 불꽃이 연상되는 자수를 새겨놓았다. 치맛자락은 지금의 채럿에게 발목까지 왔다. 허리엔 라인을 잡을 수 있게 체인 형태의 은으로 살짝 묶었다.
유리가 특별히 오늘 채럿을 위해서 맞춘 일종의 전투 복장이었다.
언뜻 봐선 마법사가 입을 법한 로브였다.
그러나 그냥 천이 아니라 커드라는 금속을 실로 뽑아 만들어서 로브를 짰다.
커드는 어지간한 마법 따위 쉽게 막을뿐더러, 가문의 기사가 검으로 내리쳐도 자르기가 어려웠다.
이런 복장을 갑자기 만들게 된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였다.
오늘, 채럿이 플레온 기사단 입단 시험을 치르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