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27
제127화
유리가 사람들에게 멸망에 대해 털어놨을 때.
카이는 그의 선택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악마 공략은 동료 따위로 어찌 될 문제가 아니었다. 동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
가령 악마를 죽일 수 있는데도 동료를 택해야 하는 순간이 닥치곤 한다.
또한, 악마는 그러한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 것이다.
그래서 카이는 최근 환생에선 줄곧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했다.
환생을 거듭하며 쌓은 경험과 힘이 있으니 공략이 쉬워질 터. 실제로 생을 거듭할수록 마왕에게 한 걸음씩 더 가까워져 갔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전생에 맺었던 인연과는 멀어져갔다.
‘그들에게 끼어들어선 안 된다. 난 그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환생을 반복하며 카이는 사람들을 이용할 줄만 알았다.
감정을 배제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다 오해를 받거나 욕을 먹었으나.
괜찮다.
악마를 죽일 테니까.
그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으니까.
그랬거늘, 하필 그녀가 나타났다.
‘엘카…….’
얼마 만에 보는지 모르겠다.
10년? 20년? 젊다 못해 어렸을 적 보았던 소녀는 온데간데없었다.
허나 카이에게 엘카는 자꾸만 어린아이로만 비쳤다.
그렇기에 더욱 그녀를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날 아나?”
“내가 늙어서 못 알아보는 걸까요. 난 당신의 얼굴과 목소리가 바뀌어도 바로 알아봤는데요. 하긴, 몇십 년이 지나서 만났으니 보잘것없겠죠.”
“누가…….”
반박하려던 카이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보잘것없어졌다니.
한때 계시자로 추앙받으며 교제 버금가는 추기경이었던 그녀가 무너져 내린 모습은 순전히 카이 자신 때문이었다.
상처받고 살았을 시절만 몇십 년일 텐데, 자책하는 모습은 카이의 속을 헤집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
엘카의 작은 부름은 큰 외침처럼 퍼졌다.
성검 미뭉.
카이를 가리키는 그 칭호는 엘카의 등장보다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엘카 하모니, 계시를 받아 당신께 다시 무릎을 꿇어 경배하나니. 부디 제게 얼굴을 비추어 주십시오.”
“난…….”
카이는 망설였다. 귓가에선 미뭉이 무어라 떠든다.
[전부 죽이고 달아나라.]‘……그래야만 하나.’
[마검의 주인이 수작을 부리는 걸 수도 있다. 무엇보다 아직 세상에 나를 드러내기엔 이르다.]성검이 등장할 때면 항상 성검을 좇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탐내거나 혹은 이권 다툼을 위해서 성검을 좇았다.
그 때문에 카이는 몇 번의 전생에서 헛된 죽음을 맞았었다.
그러나, 그런 계산적인 문제가 중요한 게 아녔다.
‘엘카의 계시는 살아있다. 그녀가 나 하나 만나자고 여기 온 게 아니야.’
[그걸 어찌 장담하지?]‘엘카와 세 번째 만남이다.’
그녀는 이번이 카이와 두 번째 만남으로 기억하겠으나, 그는 아니었다.
그녀가 처음 태어났을 무렵에 옆에 우연히 같이 있으면서 계시 능력을 알아봤고, 다음 생에 그녀의 계시 능력을 이용하려 접근했었다.
그리고 오늘 세 번째.
많은 생과 많은 시간을 보았기에 카이는 확신했다.
‘모를 수가 없어.’
[어리석군. 그녀와 연을 끊겠다고 했던 결심은 벌써 잊은 건가.]‘계시를 듣고 나서 결정해도 된다.’
분명 엘카는 어떤 계시를 받아서 이곳까지 왔다. 그것만은 듣고 싶은 충돌이 일었다.
“엘카.”
“네, 성검의 주인이시여.”
“거추장스러운 이명으로 날 칭하지 마라. 카이 안데르센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있다.”
“카이……. 그렇군요.”
그제야 이름을 알게 된 엘카의 낯에 작은 기쁨이 묻어났다.
티 나는 감정에 카이는 동요 한 번 않고 물었다.
“어떤 계시를 받았기에 날 찾아왔지. 분명 떠나기 전에 다신 날 찾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성검의 주인과 마검의 주인이 만난다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들을 보필하여 멸망을 막으라는 신의 전언까지 들었죠.”
“그 계시는 일전에 마검의 주인에게서 들었다. 설마, 알고 있는 계시를 전하겠다는 핑계 때문에 나와의 약속을 어긴 건가? 멸망이 우습나 보군, 엘카.”
“그때는 카이라는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었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그리고 얼마 전에도 계시를 받았습니다.”
엘카는 한껏 숨을 죽였다가 이어 말했다.
또 다른 계시의 등장에 모두가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두 신물의 주인이 서로 조우하는 것을 악마가 깨달았으니. 곧 멸망이 더 빨라질 거라고요.”
이 얘긴 유리도 처음 들었다.
멸망이 더 빨라진다니.
악마들이 성검과 마검이 조우했다는 사실을 알기라도 한다는 걸까?
묻고 싶은 게 많은 유리였으나, 당장은 참았다. 그보다는 엘카가 카이를 설득하는 쪽이 더 중요했다.
“성검의 주인이시여.”
“날 그런 식으로 부르지 말라 했다.”
“전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
죽음과 삶의 언급, 그것은 강하게 카이를 뒤흔들었다.
“당신이 그랬었죠. 자신에게 성검이 주어진 건, 어쩌면 앞으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
“저의 계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남은 생을 계시를 잃은 몰락한 계시자로 살고 싶진 않습니다. 적어도 다음 세대에게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야죠. 내게 계시를 주고자 하는 뜻은 그런 의미일 겁니다. 그러나 난 실패했어요. 당신은 더 많은 실패를 했고요. 고독하게 싸운 대가였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더는 고독하게 싸우지 말고, 당신이 먼저 손을 내밀어 달라고요.”
오랜 시간 카이를 묵묵히 봐왔던 엘카는 그의 거듭된 실패가 도리어 고독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느꼈다.
분명 그는 도움받을 기회가 있었다.
그 기회에 손을 뻗었더라면 몇 번이고 살 수 있었으리라.
물론, 삶에 미련 없이 죽는 게 카이답긴 했지만. 그런 그가 엘카는 가여웠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말할 순 없다. 동정은커녕 위로조차 해선 안 되었다.
그건 오만이자 기만이니까.
“이게 마지막이다.”
드디어 카이의 결심이 섰다.
엘카가 본 계시가 무언지 몰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그가 정면으로 손을 뻗었다.
벌어진 손아귀에 황금 빛무리가 찬찬히 모여들어 검의 모습을 갖춰갔다.
이내 손잡이와 검신의 구분이 없는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검 미뭉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유리도 마검을 뽑았다.
이제는 자연스러운 출혈이 옷자락을 적시지 않고 검으로 변했다.
“세상에! 성검과 마검이 한 곳에……!”
제일 놀란 해링은 기함을 지르려다가 참았다.
성검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마검의 존재마저 몰랐던 이들에겐 지금의 광경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반대로 계시처럼 멸망이 정말로 도래했음을 암시해주는 사건이었으니.
가장 믿지 못했던 엘라트리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았다.
“진짜 세상이 멸망하려 하나 보네요. 하, 하하.”
“착각하지 마라, 엘라트리오 황녀. 멸망은 오래전부터 동쪽 대륙을 위협했다.”
카이는 곧장 성검을 거두며 으름장을 늘어놓았다.
“경고하건대, 마검의 주인과 달리 난 너희들을 믿지 않는다. 이번 공략만 방법을 달리할 뿐.”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내 역할은 여기까지겠지, 유리 덴 나이트워커.”
“그래.”
그 길로 카이는 방을 나가버렸다.
폭풍처럼 지나간 놀라운 일들의 연속에 방안은 한동안 적막만이 흘렀다.
그래도 유리에겐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엘카에게 설득을 부탁했지만, 쉽게 넘어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 화를 내며 난리 치지 않았으면 더 다행이었고.
그런 불안감과 달리 나름 순조롭다면 순조로웠다.
“황녀, 이제 날 믿을 수 있겠나?”
“싫어도 믿을 수밖에 없겠어요.”
구체적으로 멸망을 증명할 순 없었다.
그러나 자리에 있는 모두가 똑같이 느꼈다.
성검과 마검, 계시자가 한곳에 모인 건 운명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그렇지 않고서 이 세 가지가 한 곳에 모인다는 건 설명이 되지 않았다.
더구나 성검의 능력 중 하나인 환생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리고 엘카와 카이와의 대화를 통해서 어렴풋이 환생이 증명되었다.
즉, 카이가 바다 건너에서 악마와 마주쳤던 전례가 있고.
과거 악마가 실존한다고 했던 엘카의 주장이 진짜라는 것이 되었다.
“정치적인 빌미는 나중에 얼마든지 만들어주겠다. 당장은 앞서 해결해야 할 사안들이 많아.”
“공자가 그렇다면 그렇겠죠.”
“좋아.”
유리는 자신이 세운 계획 일부를 그들과 공유했다. 악마의 특징, 약점, 그들의 습성 등등. 도움이 될 법한 이야기는 아는 선에서 전부 말했다.
또한, 엘카도 카이로부터 들었던 악마에 관해서 첨언해줬다.
처음 악마에 대해 듣는 이들은 놀라다가도 이성을 찾고 머리를 맞대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 것이다.
* * *
악마와의 싸움엔 여러 가지가 요구되었으나, 결정적으로 강력한 힘이 필수적이었다.
그에 반해 아직 동료들의 힘은 너무나 약했다.
유리 본인도 나이도 어리고, 길러야 할 힘이나 기술들이 더 필요했다.
무엇보다, 가주가 되지 않고선 전쟁을 준비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엘카가 말했던 ‘가까워진 멸망’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유리 님.”
대략적인 계획을 공유하고 헤어질 즈음이 되자 블레이크가 말을 걸어왔다.
멸망에 대해 듣고 난 뒤로 그의 눈빛은 한층 더 진하게 변했다.
“저에게 주시기로 한 검. 잊진 않으셨겠죠?”
“그래.”
“그럼……. 감히 청하는 겁니다만, 과한 선물을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블레이크의 심경 속에서 불이 타올랐다. 유리에게도 그것이 전해질 정도로 뜨겁다.
어떤 심경으로 장작이 타올랐는지 모르겠으나, 기사도 정신이 투철한 그라면 이해되었다.
“잠깐만, 유리.”
그때 나가려던 이자벨이 불쑥 끼어들었다.
“단장님께 검을 드리기로 했었나?”
“하나 내가 해 먹어서.”
“그, 그럼 나도!”
“어? 너도?”
“이런 말 하긴 실례지만, 나이트워커에선 쓸만한 지팡이를 찾기가 어렵다.”
“지팡이 안 쓰잖아.”
“지팡이를 가공해서 검의 손잡이나 일부로 활용할 순 있다.”
“아아.”
블레이크만큼이나 이자벨도 활활 타고 있다. 둘 다 열정과 의지만은 가히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유리는 약간은 장난스레 물었다.
“진짜 어떤 과한 선물이어도 상관없겠지?”
“제 단장 봉급을 포기해도 좋습니다.”
“나, 난 돈은 없는데…….”
“아니, 돈으로 과한 게 아니야.”
이미 블레이크에겐 어떤 검을 선물할지 여러 후보를 골라놨었다.
그 중 적당한 걸 구해다 줄 참이었지만, 적당한 수준으로 블레이크 성에 차지 않을 듯싶다.
이자벨도 어정쩡한 마도구보단 기왕 좋은 게 좋은 거로 구해주는 편이 맞겠지.
“어떤 건 돈으로 해결할 수 있고. 어떤 건 몸이 고생할 수 있고. 또 어떤 건 죽음을 각오해야만 한다.”
“다 주실 순 없습니까?”
“욕심이 많군, 블레이크 경.”
“세상이 망한다는데 욕심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 유리. 이런 말을 듣고 어떻게 가만히 있겠나!”
그렇다는 거지.
유리는 돌아서서 급하게 종이에 뭔가를 적고 찢어서 각자에게 나눠줬다.
쪽지를 본 그들은 하나 같이 경악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