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41
제141화
유리가 마수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이를 지켜보는 다른 시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각기 다른 눈동자 색을 빛내며 어둠을 은신처 삼았다. 그 아래선 히죽거리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우와, 죽였어! 또 죽였어!”
“키키, 안 돼. 안 돼. 곧 저 놈도 죽을 거야.”
“난 생각이 달라! 살 거야. 산다고!”
“쿠헤헤헤, 살면 대박! 쩔어!”
요상한 말투에 어린아이의 목소리를 가진 그들은 유리의 전투를 놓고 저마다 결과를 예측했다.
대부분 죽는다고 봤다.
살아남기엔 마수가 강했다. 심지어 유리가 조우한 마수는 멋대로 기억을 읽어내서 그 안에서 가장 치명적인 존재를 복사해냈다.
치명적인 존재라 함은, 강력한 존재가 될 수 있고. 어떨 땐 약점이 될 존재일 수도 있다.
그 중 유리는 전자에 속했다.
그를 죽음으로 내모는 존재가 마수로부터 복사되었다.
여태까지 잘 버티고 있긴 했지만.
구경꾼들 눈에는 오래가기 글렀다.
처음엔 잘 버티다가 공격을 허용하더니 지금은 작은 충격에도 몸이 쉽게 휘청거렸다.
그러다 반격을 하면.
“용인이 또 복사됐다!”
“또 다른 용인! 또, 또, 또 다른 용인! 쿠헤헤헤! 쟤 죽는다! 무조건 죽어!”
“용인이 용인한테 죽는다!”
“용인이 용인한테 죽는다!”
“용인이 용인한테 죽는다!”
“그만. 조용.”
그들 뒤로 어른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그의 등장에 어둠 속이 조용해졌다. 깔깔웃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마저 무겁게 변했다.
그들 사이로 새로운 눈동자가 빛을 내며 나왔다.
아니, 빛이라기엔 뭔가 달랐다.
분명 번뜩이고 있지만, 색이 까맸다. 말 그대로 까만 빛이 눈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눈의 주인이 어둠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블랙 드래곤이었다.
“흐음, 흥미롭군.”
“그치! 흥미롭지?”
“흥미로워!”
“흥미로워!”
드래곤의 한 마디에 아이들이 따라서 외쳤다.
그가 흥미로울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일단 용인이 저기에 있었고, 그 용인은 저기에 있어선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용인은 오로지 블랙 드래곤의 품에만 살고 있으니.
“용인을 닮은 이상한 생명체와 그 생명체의 기억에서 나온 용인이라.”
흥미가 안 가려야 안 갈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생명체일까.
가짜 용인이긴 하지만 용인을 상대로 저리 악바리로 싸우고 있는 이유는 또 뭘까.
무엇보다.
‘1000년 만에 흥미라는 게 돋았군.’
태생 이후 지루한 삶의 연속이었다. 그 시간이 무려 1000년? 아니지, 더 됐을지도.
그간 무색무취한 일상의 반복에서 튀어나온 기현상은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렇지만.
‘더 즐겁고 싶다.’
알다가도 모를 저 용인이 더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발악해라.
싸워라.
죽여라.
무엇을 위해 그리하는지 몰라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투쟁으로 이룩해봐라.
“그리하여 날 더 웃게 해보아라.”
블랙 드래곤은 조용히 마나를 퍼뜨려 유리와 싸우고 있는 마수에게 보냈다.
그리곤 아예 똬리를 틀고 앉아 한참 동안 전투를 관망했다.
* * *
푸욱!
티르빙이 복제된 벤헬링턴의 가슴팍에 찔렸다가 나왔다. 피 대신 묽은 진흙 같은 것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잠깐의 대치 상황.
유리는 몇 발 뒤로 물러서서 숨을 골랐다.
그의 몰골은 엉망이었다.
옷은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겉옷 아래 입은 갑옷이 드러나 있고 팔다리엔 크고 작은 상처 때문에 피칠갑이 되었다. 코에서도 계속 피가 주르륵 흘렀다.
치료를 해보려 해도 챙겨온 마법 주머니는 진작에 찢겼다.
“시작부터 다 잃고 시작하네. 후우…… 지금까지 몇 마리 죽였지?”
[대략 서른?] [아니에요, 티르빙 양. 마흔이에요.]서른이든 마흔이든, 유리 앞에는 그보다 많은 개체가 도사렸다.
벤헬링턴만 수십 명, 그 곁에는 미앵비슈나 다이올드, 제몬, 타나토 같은 용인도 수십이 함께했다.
이놈들을 벌써 몇 시간째 상대하고 있는지.
숨 고를 시간조차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예상보다 약하다는 건데…….”
벤헬링턴이 마수에게서 튀어나왔을 땐 벽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은 처음 벤헬링턴과 직접 만났을 때와 같은 감각이었다.
하지만 직접 싸워본 복제들은 예상보다 쉽게 죽었다.
‘내 머릿속을 읽어서 복제한 게 분명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로만 만들어진 개체라는 거지.’
거대 들개 마수가 어떤 식으로 기억을 읽었는지 모르겠으나.
그게 아니고선 지금까지 유리가 만났던 사람들을 갑자기 복제한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또한 기억 속의 타인을 복제해서 실제로 가진 힘과는 차이가 컸다.
미앵비슈만 하더라도 유리가 상상한 딱 그 정도만 강했다.
물론, 그 ‘정도’라는 게 여전히 어마어마해서 그렇지.
‘내가 약하게 할아버지랑 고모님을 상상하면 된다.’
[되게 쉽게 말하네. 역사상 최강이라 불리는 용인 둘을 상상 속에서 약하게 만든다고?]“그러니까, 그러려고 하고 있잖아.”
크락!
가짜 미앵비슈가 검을 치켜들고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유리는 최대한 그녀가 약하다는 상상을 하며 팔뚝을 향해 티르빙을 휘둘렀다.
그러자 가짜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팔목과 쇄골까지 잘려서 엎어졌다.
좋아. 여기까진 됐다.
상상, 상상력을 죽이자.
그간 유리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과 용인을 향한 상상력을 죽이면 해결이 됐다.
헌데, 진짜 문제가 하나 더 있었으니.
크르르.
잘린 신체 부위에서 각각 새로운 신체가 돋았다.
무슨 플라나리아도 아니고.
놈들을 베어낼 때마다 개체가 생성되는 것이었다.
그 덕에 서른 남짓이었던 가짜들이 백 단위로 불어났다.
이것이 유리가 고전하고 있는 이유였다.
크라!
크락!
“칫!”
또 시작이군.
쓰러진 한 마리를 목격한 다른 개체들이 좀비 떼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래서 좀비가 아포칼립스물에서 흔한 소재로 쓰이는 걸까.
“그래도, 용인, 좀비는, 싫다, 고……!”
후웅! 쿠득!
대검처럼 티르빙을 바꿔서 한 번에 개체를 쓸었다.
상상력으로 어떻게든 용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죽이면 쉬운 싸움 같았으나.
고정관념이라는 게 괜히 고정이라고 말하는 게 아녔다.
한 번 뇌리에 박힌 이미지를 잠시 바꿔놓더라도, 전투에 집중하면 다시 원래의 이미지로 돌아갔다.
심지어 바꿔야 할 고정관념이 벤헬링턴 한 명 말고도 다른 사람까지 있고, 옆에선 계속 개체를 늘리는 마수가 끊임없이 공격했다.
어디 하나 제대로 집중하기 힘든 상황인 셈.
“큭!”
그때.
갑자기 옆구리가 따가웠다.
아니나 다를까.
벤헬링턴과 미앵비슈에만 생각의 편도가 치중된 사이, 옆구리에 제몬을 닮은 개체가 단검을 찔렀다.
드득!
황급히 몸을 틀어봤으나 야트막한 자상이 생기면서 옷가지가 틑어졌다.
순간 제몬의 낯이 활짝 웃었다.
그야말로 티 없이 해맑은 미소에 속이 울컥 뒤집어졌다.
“이게……!”
미소를 본 유리는 얼른 놈의 머리를 반으로 가르고 불을 붙였다.
쓰러진 마수는 뭍으로 올라온 생선처럼 퍼덕거리다가 잠잠해졌다.
“젠장.”
구멍이 난 옆구리에서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강하게 손으로 쥐어서 지혈을 해보지만 쉽게 되질 않는다.
처음으로 제대로 당한 공격이었다.
그러나 다친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애초에 이 많은 놈들에게 둘러싸이고 당하지 않은 게 지금까지 이상했다.
그보단.
죽여야 할 죽일 놈을 죽였는데, 오히려 불쾌했다.
만들어진 걸 알면서도 하는 행동이 실제와 똑같은 모습. 웃는다거나, 사소한 표정, 작은 습관.
단순히 외형만 따라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니 형용하기 힘든 불쾌함이 밀려왔다.
‘제몬 형님한테 미운 정이라도 들은 건가…….’
미운 정까지는 모르겠다. 당연히 제몬과 타나토가 좋은 것도 아녔다.
그런데 누가 싫으냐고 물으면, 확답을 하긴 어려웠다.
가짜 마검 사태 이후 만난 형제는 극심한 불안에 시달렸다. 유리에게도 그 불안에 눈에 선했다.
그런 그들에게 처음으로 동정심이 생겼던 건 사실이다.
그래서 싫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런 불쾌함이 생기는 거겠지.’
유리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전투에 집중했다.
뭐가 되었든 이들은 가짜다.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진 존재들.
감정이 치솟기 전에 먼저 더 가감 없이 형님을 닮은 개체들을 죽였다.
동시에 감정들도 같이 잘라내었다.
크라아악!
그 순간, 공격이 멈추더니 분에 찬 듯 마수들이 더 크게 포효했다.
놈들이 하늘로 머리를 쳐든다. 그리고 대지를 타고 수상한 기운이 흘렀다.
‘이건…… 드래곤 하트!’
동류의 기운이라서 알 수밖에 없었다.
분명 바닥을 통해 흐르는 기운은 드래곤 하트로 만들어진 마나였다.
출처를 알 수 없는 마나는 곧 각 마수들에게 흘러 들어갔고, 머리통이 흐물대면서 일그러졌다.
그리고 모든 머리가 단 한 사람으로 변했다.
“어머니를……!”
유리는 손에 피가 나도록 티르빙을 강하게 쥐었다.
놈들의 머리가 하나도 빠짐없이 샤를린느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종종 어머니가 섞여 있었지만, 모든 개체가 어머니가 되자 제아무리 유리라 해도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기괴했다.
달리 표현할 길 없이, 샤를린느의 얼굴이 모두 유리를 바라보고 있는 광경은 기괴하기 그지없었다.
히죽. 히죽. 히죽.
유리와 눈이 마주친 머리들이 입꼬리만 위로 끌어올렸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만 찢어지도록 웃고 있다.
[꼬맹이. 정신 차려. 이거 전부 다…….]“마수인 거 알아.”
유리는 참았다. 뭔지 몰라도 참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느꼈던 역겨움, 구역질, 불쾌함, 하다못해 마수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어떻게든 자제하려 애썼다.
이 모든 걸 참지 않는다면 전투에서 이기더라도 자신마저 놓아버릴 것 같았다.
킥?
유리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머리가 갸웃거렸다.
좌우 두서없이 구부러진 모가지는 90도 이상으로 꺾였다.
마치 “안 통하네?”라고 묻는 듯한 제스처였다.
그러더니 놈들이 다시 변했다.
이번엔 가짜 마검과 싸우기 전에 보았던 뿔과 날개가 달린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그때엔 말 그대로 반인반용 같았거늘. 놈들이 변한 모습은 반용보다 반마(半魔)에 가까웠다.
“이것들이!”
결국 유리는 참지 못하고 검을 휘둘렀다.
선두에 있던 녀석이 검의 궤적을 피해 뒤로 도망갔다.
꺄하하하!
심지어 이번 변신에선 웃음소리까지 흉내 냈다. 한 마리가 웃자 다른 놈들도 같이 웃었다.
뒤이어 모든 마수가 공격하진 않고 어지럽게 유리 주변을 감싸고 돌았다.
“……………….”
잠시 검을 늘어뜨리며 숲 멀리 시선을 두었다.
갑자기 드래곤 하트의 마나가 느껴졌었다. 이는 블랙 드래곤이 지켜보고 있다는 뜻이 되었다.
즉, 블랙 드래곤이 시험을 주고 있는 셈.
‘얄궂은 도마뱀이군.’
하필 어머니의 얼굴을 따라하는 마수라.
그렇다면 확실히 약점을 잘 짚어냈다. 유리에게 유일한 약점이라 하면 단연 어머니였으니까.
오죽하면 다이올드가 샤를린느를 납치하라고 지시했겠는가.
용인, 혹은 드래곤이니까 인간인 유리가 감정에 약점이 있을 거라 판단했으리라.
그래, 그게 맞다.
그치만 그들은 그 약점이 유리를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끝끝내 알지 못했다.
‘난 어머니 때문에 여기 있는 거니까.’
유리는 쥐고 있던 옆구리를 놓았다. 피가 나오든 말든, 신경 안 썼다.
드래곤 하트에 있는 모든 마나를 개방시켰다.
쿵! 쿵! 쿵!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올라간 심박수만큼 상처에선 더 많은 피가 흘렀다.
키리리릭!
도망치던 마수들이 이번 공격이 마지막인 걸 알고 전부 멈춰서더니 유리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다시 블랙 드래곤으로부터 비롯된 마나가 마수에게 모여들었다.
유리에게 모여든 마나가 발산되는 동시에, 마수들이 주문을 외웠다.
“멸(滅).”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