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42
제142화
마수에게서 처음으로 튀어나온 제대로 된 언어가 용언 마법이라니.
그것도 ‘멸(滅)’이라는 용언은 과거 빅스터가 사람 한 명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 마법이었다.
당시의 기억에서 ‘멸(滅)’은 딱히 큰 폭발이나 전조조차 없어서 과연 용언 마법이라 일컬을만 했다.
그런 마법을 마수가 쓸 줄 누가 알았겠느냐만.
“큭!”
언령이 떨어지자 몸에 온갖 압박이 들이닥쳤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저보고 죽으라고 명령하는 듯했다.
유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었다. 신체 기관 전부부터 세포 하나하나까지. 전부 제 주인인 유리를 죽이려고 파괴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도 못 죽인다면.
자살해라.
네 스스로 죽어.
무서운 속삭임이 머릿속에서부터 울려퍼졌다.
그러면서 강력하다.
유리는 전심전력을 다해서 버텼다. 무엇으로부터 어찌 버텨야 하는지 몰라도 ‘죽자’라는 마음을 어떻게든 외면했다.
투둑!
힘을 너무 준 탓에 충혈되었던 눈에서 실핏줄이 터졌다. 볼을 타고 핏물이 눈물처럼 흘렀다.
“크악! 크아아아악!!!”
그래도 눈을 감지 않았다. 몸을 떨지도 않는다. 검에서 힘을 뺀다던지 운용하던 마나를 거두지도 않았다.
제아무리 마수들이 어머니의 머리를 하고 비죽비죽 웃고 있어도.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
“유리, 죽으렴.”
이젠 놈들이 어머니의 목소리를 흉내냈다.
유리는 벌겋게 변한 시야에 마수들을 쳐다봤다.
“유리, 죽으렴.”
“유리, 엄마를 위해 죽어줘.”
“엄마를 위한다며. 죽어줄 수 있잖아.”
네 녀석이, 누구 얼굴이랑, 목소리로……!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의 얼굴이 서서히 유리에게 다가갔다.
천천히, 느리게. 위협적이지 않고 푸근한 걸음걸이였다.
부웅! 퍽!
유리는 가까이 있던 마수에게 티르빙을 아무렇게나 휘둘렀다.
방어를 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받아들인 마수는 쉽게 반으로 갈라졌다.
잘린 어머니의 육체에 유리는 더 강하게 잇새를 물었다.
티르빙과 별빛나무가 귀에서 뭐라 떠드는 소리는 진작부터 안 들렸다.
분명 걱정하는 말들이겠지.
그러나 그들의 걱정과 달리 유리의 집중도는 오히려 최상에 다다라 있었다.
‘분명히 있을 거다. 한 마리로 처리할 수 없다면, 처리할 수 있는 단 하나가……!’
그리고 마침내 한 마리의 마수가 시야에 들어왔다.
다른 놈들은 비척대면서 걸어오는데, 단 한 마리만 가만히 있었다.
그놈은 얼굴이 웃지도 않았고 기척조차 미미했다.
‘저 놈이다!’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분리되는 마수라면 반드시 본체가 있을 터였다.
애초에 이놈들 모두가 한 들개 마수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본체를 찾기 위해, 마지막 한 번의 일격을 위해, 유리는 지금까지 크게 반격하지 않았던 것이다.
유리는 지금까지 모아뒀던 마나를 단숨에 발산시킴과 동시에 티르빙을 던졌다.
“티르빙, 먹어!”
투창처럼 똑바로 날아간 검이 중간에서 사방으로 피로 된 그물망을 펼쳤다.
뒤늦게 마수가 도망치려 뒤로 돌아섰다.
허나, 티르빙이 더 빨랐다.
피 그물은 마수를 가두더니 점점 좁아지고 촘촘해지면서 완전히 놈을 집어 삼켰다.
그리고 한 순간.
유리를 둘러쌌던 마수들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상대할 적이 사라지자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유리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서 피눈물이 흐르는 눈을 벅벅 문질렀다.
멀리서는 아직 피 주머니가 마수를 소화 시키고 있었다.
“끝난……건가?”
쿠륵!
독백이 튀어나오기 무섭게 뱀에게 잡아먹힌 쥐처럼 피 주머니 안에서 마수가 꿈틀거렸다.
얼마나 발악이 심한지, 주머니가 터질 정도로 손발이 튀어나왔다가 들어갔다.
“티르빙?”
[…….]그녀에게선 아무런 반응이 없다.
마수를 소화할 수 있을지, 불안과 걱정 어린 시선으로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느 순간에 이르자 피주머니가 홀쭉해지곤 바닥에 스며들며 사라졌다.
“끝났……다.”
긴장이 풀리면서 함께 찾아온 안도감에 유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어떻게든 마지막까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을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그렇게 쓰러지고 나니 숲에 적막감이 감돌았다.
다행히도 마수는 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웬 사슴 무리가 얼굴을 내밀었다.
특히 숫사슴 하나가 유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거대한 뿔을 자랑하는 사슴은 쓰러진 유리에게 성큼성큼 접근했고, 코를 박아 냄새를 맡더니 그의 몸 아래로 목을 밀어 넣었다.
힘에 겨워하자 다른 사슴들이 옆에서 조금씩 거들었다.
그렇게 등에 유리를 매단 숫사슴과 사슴 무리는 왔던 길로 조용히 사라졌다.
* * *
귀에서 자꾸만 누군가의 대화소리가 들렸다.
“안 돼! 깨우면 안 돼!”
“그래, 우린 나가야 해! 치료해야 해!”
“그치만 궁금한 걸!”
“나도 궁금해! 궁금한 거 참으면 괴로워!”
아이들이었다. 그들은 무언가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다.
한쪽 편에선 안 된다, 다른 한 편에선 참을 수 없다며 가벼운 언쟁이 오갔다.
그 중심에 잠들어 있던 유리는 조금씩 눈살을 꿈틀대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처음엔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 때문에 앞을 보지 못했다.
몇 번 더 감았다가 뜨고 나서야 찬찬히 윤곽이 잡혔다. 한 아이가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키며 외쳤다.
“어! 깨어났다!”
“깨어났어! 깨어났어!”
“꺄하하하! 일어났다! 알리러 가자!”
신이 난 아이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이어서 찾아온 적막, 그 뒤편으로 새의 지저귐이 따라왔다.
완전히 눈을 뜬 유리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세우니 무언가 가슴팍을 타고 굴렀다.
“이건…….”
이제보니 벗겨진 상체에 침이나 뜸이 놓여 있었다. 침은 어디 하나 빈틈없이 빼곡했고, 그 아래 있어야 할 상처는 멀끔했다.
혹시나 해서 찔렸던 옆구리에 손을 대보니 역시나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았다.
하물며 꿰메진 바늘자국조차.
뿐만 아니라 그가 누워있는 공간도 특이했다.
한 마디로 굳이 정의하자면, 잘 꾸며진 기와 한옥집이었다.
‘전생에서나 보던 의술이랑 공간이 어떻게…….’
[깨어났니?]“티르빙.”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자 한시름 마음이 놓였다.
마수와 싸우다가 쓰러져서 또 싸워야 하나 했는데.
[요즘 들어 자주 기절하네. 이렇게 나약해서야. 이 언니가 모시는 주인이 이러면 어쩌자고.]“그래서 수련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잖아.”
[그래도 그런 마수한테서 흔들릴 줄 몰랐어. 기껏해야 정신 공격만 치명적인 마수였는데, 쯧.]“역시, 무슨 마수인지 알고 있었구나.”
[몰랐겠니.]딱히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러니 티르빙에게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녀가 제안한 수련이고, 그녀가 숨겼다면 그만한 의도가 있었을 테니까.
‘반대로 내가 여전히 정신적으론 부족하다고 티르빙이 느낀 거겠지.’
유리는 그리 생각하며 말했다.
“고마워.”
[징그럽게 왜 이래.]“저번에도 그렇고. 걱정만 끼치는 거 같아서.”
[그럼 미안해 해야지, 왜 고마워?]“못난 주인 안 버리고 잘 버티고 있어서?”
[버티는 줄 알면 얼른 강해져. 마침 목적지에 왔으니까.]“목적지라면…….”
“일어났군.”
한 남자의 목소리에 유리가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도포를 입은 사내가 손에 무언가를 한아름 들고 들어왔다.
날카로운 미남자의 얼굴을 한 그는 날렵한 턱선에 칼 같은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시선만으로 세상을 도려낼 거 같은 인상이었다.
그는 아이들을 주렁주렁 달고 와서 유리 옆에 앉았다. 아이들은 아까와 달리 얌전했다.
남자가 말했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치곤 멀쩡하군. 차라리 죽었다면 더 재밌었을까.”
“…….”
“반응도 없군. 벙어리인가?”
“아닙니다.”
“헌데 어째서 날 보고도 입을 다물고 있지. 궁금한 게 많으면서. 아니면 날 어떻게 죽이고 갈지 고민하느라 바쁜 건가.”
그리 말하며 남자는 검지로 유리의 이마를 짚었다.
당혹스러운 손길에 미처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이 굳었다.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아쉽게도 자네는 날 죽일 수 없네. 창초주가 아니고선, 설령 같은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나와 대적할 이는 몇 되지 않아.”
“설마, 당신이 블랙 드래곤입니까?”
“왜 질문을 하는 거지? 날 만나러 왔으면서.”
손가락을 거둔 남자는 아예 손바닥으로 이마를 밀어서 다시금 눕혔다.
잠깐 사이 반항하려 허리에 힘을 줬으나.
‘아, 안 움직여?!’
힘으로 누구 하나 버틴다는 감각 없이, 남자의 힘은 부드럽게 유리를 눕혔다.
정작 최선을 다해서 힘을 줬던 유리만 무안해졌다.
그러나 블랙 드래곤은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알다시피 내가 블랙 드래곤이다. 동족 사이에선 세드리치라고 불린다.”
“저는…….”
“안다. 유리 덴 나이트워커. 미래에 내 후손이더군.”
“……제 기억을 보셨습니까?”
“네가 싸운 마수가 어떻게 네 기억을 토대로 변했을까, 라는 발상은 못하나보군. 내 후손이 이리 멍청한 줄은 몰랐는걸.”
욕인지 뭔지 알 수가 없는 대사에 반응하지 못했다.
기억을 읽는다니. 드래곤은 이런 걸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건가.
“마수를 보내셨다는 건, 절 죽이려 했군요.”
“안 되나?”
“제가 당신의 후손인 걸 알았다면서요.”
“그래서? 약한 놈이 죽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
“…….”
그 가풍이 어디서 비롯됐다 했더니, 여기서부터였네.
세드리치는 유리의 몸에 박힌 침을 빼고 새 침을 놓고는 다른 뜸을 얹었다. 불을 붙일 땐 벤헬링턴처럼 손가락에서 불꽃을 만들었다.
가풍만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불붙이는 습관까지 후세에 내려간 걸까.
어쨌든 몸에 침과 뜸이 올라오면서 효과는 확실했다.
세드리치는 마지막으로 간이 절구에 약초를 넣고 빻았다.
“여기엔 왜 왔지, 미래의 후손이여?”
“당신께 가르침을 받으러 왔습니다.”
“감히 드래곤의 기억을 엿보고 있는 주제에 가르침을? 미래를 보니 너는 내가 잉태할 용인이 아닌 인간이라는 아직 없는 생명체더군. 나약하고 탐욕으로 찌든 생명체. 그런 종족인 너한테 내가 어째서 가르침을 줘야 하지?”
“저를 가리키는 수식어가 많군요.”
“그럼 한 마디로 정리해주지.”
쿵!
약초를 빻는 절구에서 강한 울림이 들렸다.
“넌 약하다.”
“저에겐 드래곤 하트가 있습니다. 마검도 있고요.”
“이래서 인간이 나약하다 소리를 듣는 건가. 그딴 것들을 가졌다고 강하다고 여기다니. 자기 기억에 치여서 헤맸으면서 그게 중요하던가?”
“…….”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의 말이 맞았으니까.
드래곤 하트나 마검, 고유의 마나 코어까지 가졌으면서 어머니로 변한 마수 하나 쉽게 처리하지 못했다.
마수가 강했다고 해도 그건 변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걸 아니까 세드리치 님께 청하는 겁니다.”
“호오, 인정한다는 건가?”
“스스로의 부족함을 인정하지 못하면 나아가지 못하다고 배웠습니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지?”
“저희 어머니입니다.”
“어머니? 그게 뭐지?”
“어머니가 뭔지 모르십니까?”
“뭔데.”
그렇구나.
생각해보니 고대 드래곤들의 태생은 창조주의 손길로 빚어졌다.
그들에게 창조주가 곧 어머니이지만, 그런 걸 떠나서 가족으로서의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유리는 이에 자그마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란 드래곤과 창조주보다 위대하신 존재입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