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46
제146화
눈 깜빡할 틈에 바람의 검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피와 살이 낭자하면서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큭!”
깊은 내상을 입히는 공격은 없었다. 작고 얕은 상처를 연달아 냈고, 그 상처를 다시 후벼팠다.
반격하려 본능적으로 티르빙을 찾으려 했으나.
유리에겐 어떤 무기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뒤늦게 도망치려 해봐도 종아리부터 아킬레스건까지 근육이나 힘줄이 차례로 잘렸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진다. 이내 얼굴이 땅바닥에 처박히고 나서야 아이리스의 공격이 멈췄다.
순식간에 피칠갑이 된 유리는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을 뿐. 끝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내가 너무 심했나.”
아이리스는 어머어머, 소리를 내며 입가를 손끝으로 가렸다.
실상 유리가 죽어가는 데도 그녀는 여유로웠다. 살릴 수 있으니까.
“와하하! 졌다! 또 졌어!”
“자주 진다! 히히!”
아이들이 뱅글뱅글 돌면서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겉보기엔 완벽한 패배.
그러나 아이리스는 작은 희망을 보았다.
왜냐하면 유리는 버텼기 때문이다.
‘다른 생명체였다면 이 몸의 무형검을 보고 겁을 먹고 도망갔을 것을. 이 아이는 가만히 서서 몸으로 받아냈단 말이지.’
그뿐이랴.
작은 걸음, 솔직히 걸음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의 걸음을 그는 나아갔다.
바닥에 미세하게 끌린 발자국이 증거였다.
그것이 발악이었는지, 아니면 반격하고자 하는 의지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다만, 그의 걸음은 아이리스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그러한 자그마한 태동이 아이리스에겐 인상적으로 남았다.
“지루하던 차에 재미있는 장난감이 굴러왔어.”
아이리스가 손가락으로 유리를 들어올리는 시늉을 하자 그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녀는 앞장서서 걸어갔고 떠오른 유리가 그 뒤를 따랐다.
떠나는 아이리스의 낯에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감정이 오롯이 묻어났다.
* * *
다음날.
유리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며 잠에서 깨어났다.
햇살이 들어오는 각도를 봐선 정오를 막 넘기기 시작한 무렵인 듯했다.
눈을 완전히 뜨고 나서 그는 누운 채로 몸을 살폈다.
거짓말처럼 몸이 싹 나았다. 오히려 기억에 접속한 첫날보다 컨디션이 더 좋았다.
‘살아있으면 됐어.’
어제 아이리스의 기습적인 공격을 직접 받아보면서 느끼기로, 죽는 줄로만 알았다.
당연했다.
지독한 연격을 당했는데 어찌 죽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쓰러지기 직전, 뇌리에선 살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내상을 입히지 않고 외상만 당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해서 아이리스는 유리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견딜 수 있는 수준까진 아니어도 언젠가 극복해야 할 수준까지만 보여준 것이다.
‘무형검을 가르쳐 주겠다면서 무형검으로 무차별적인 공격이라…….’
유리에겐 무기가 없다. 게슐츠의 검은 진작에 가져갔고, 티르빙도 빼앗겼다.
있는 거라곤 오로지 몸뚱어리.
‘결국 아이리스 님을 상대하려면 같은 무형검을 써야 한다는 건가.’
아이리스는 비록 호수를 가르진 못했어도 구름을 가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했다.
어찌됐든 무형검만 쓸 줄 안다면 대련에서도 쓸 수 있다는 얘기였겠지.
“…….”
유리는 이불을 밖을 훌쩍 나와서 바로 밖으로 향했다.
마침 밖에서 아이리스가 용인 아이들이 함께 있었다.
‘전에 못 보던 아이들도 있다.’
세드리치가 돌보는 용인이 검은 머리였다면, 오늘은 검은 머리 용인 사이에 하얀 머리 아이들이 섞였다.
아마 아이리스가 데려온 용인이리라.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어울려 뛰고 잡고 놀았다.
아이리스는 정자에 앉아 그런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유리를 발견하고 이리 오라 손짓했다.
“여기 앉아요.”
손으로 옆자리를 툭툭 치자 유리는 거부하지 않고 앉았다.
“어제 어땠어요?”
“난감했습니다.”
“후후후, 난감하기만 했다면 곤란하네요. 난 당신이 포기하도록 했던 공격이었는데 말이죠.”
“그 점은 솔직히 불만스러웠습니다.”
“포기하게 해서요?”
“그 반대입니다.”
유리는 아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대화를 이었다.
“어떤 의도로 대련을 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무형검을 숙달하기 위해선 실전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는 거겠죠.”
“제대로 봤네요.”
“하지만 실전과 달랐죠. 아이리스 님은 절 죽일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일까요?”
“전 어제 위기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처음엔 당황스러워서 이대로 죽나 싶긴 했지만, 끝끝내 살 수 있다는 판단과 여유가 있었습니다. 아이리스 님께서 이런 걸 의도하진 않으셨겠죠. 그래서 불만스럽고, 화가 났습니다.”
극한으로 상대를 몰아붙여서 단단하게 하는 훈련은 자유의 관에서 실컷 경험해봤다.
그리고 그런 훈련이 있기에 지금의 나이트워커가 있었다.
유리는 그런 수련을 선호하지 않을지언정, 나쁘다고 보진 않았다.
그러나, 아이리스의 무형검은 유리를 봐줬다.
일부러 내상을 피하고 외상만 입혀서, 넌 죽지 않을 정도만 당할 거라는 식으로.
“난 죽는 것보다 고통스러운 편이 더 좋은 거 같아서 그랬는데. 혹시…… 당하는 편이 쾌락을 느끼는 취향?”
“아닙니다!”
유리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말하고 보니 어감이 이상했다.
아이리스가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후후후, 농담이에요. 드래곤 중에서 그런 드래곤이 있거든요. 가끔은 역해서 싫어질 때가 있는 드래곤이죠. 누군지 궁금하나요?”
“아……뇨.”
“세드리치에요.”
대답을 무시하고 대답이 날아왔다.
그 대상이 세드리치라는 사실에 유리는 할 말을 잃었다.
무뚝뚝하기 그지없어보이는 블랙 드래곤이 사실은 그런 취향이라고?
“세드리치한테는 비밀. 알았다간 내 목이 날아가요.”
“아, 네.”
“어쨌든 실전처럼 해달라는 거죠?”
“네, 그렇습니다.”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요?”
“각오라면 이미 말씀드렸을 텐데요.”
“아뇨. 이건 정말로 농담이 아니에요. 우린 드래곤이니까요.”
생명체의 정점에 섰던 드래곤, 그들을 상대로 실전처럼 대련을 해달라는 게 얼마나 무모한지 유리도 잘 알았다.
그러니 거듭 강조해서 부탁했다.
“아이리스 님께서 치료해주실 테니 겸허히 받아드리겠습니다.”
“어머~ 예의 발라라. 이런 점은 세드리치랑 완전히 다르네요.”
“…….”
“그럼 바로 시작할까요.”
후웅!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어제와 같은 돌풍이 두 사람을 빠르게 스쳤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달랐다.
세상을 억누르는 압도.
살기나 살의를 넘어선, 그야말로 드래곤 발아래에 모든 것이 하찮다고 느껴지는 그런 압도감이 유리를 짓눌렀다.
그러나 몸은 도리어 강풍에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끅?!”
쿠당탕, 갑작스러운 바람에 앉아있던 유리는 옆으로 몇 바퀴 굴러야만 했다.
겨우 중심을 잡았으나 어찌나 바람이 강한지, 가늘게 뜬 눈꺼풀 사이로 흙먼지가 마구 들이닥쳤다.
조금이라도 상체를 일으켰다간 금방 날아갈 듯이 온몸이 들썩거렸다.
이 와중에 아이들은 더 신나게 뛰어다녔다.
“와하하하! 바람이다!”
“아이리스 이모가 바람을 일으켰다! 아하하!”
“날아간다! 근데 안 날아갈 거야! 힛!”
아이들만이 아니라 아이리스는 그 자리에 앉아서 여유롭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장난기 가득한 미소는 덤이었다.
‘집중 해야 한다!’
유리는 최대한 온 신경을 끌어올렸다.
이건 그냥 바람이 아니었다.
아이리스가 불러온 모든 바람이다. 어쩌면 숨 쉬는 공기 그 자체가 언제든 흉기가 되어 몸을 가를 터.
“무형검을 꼭 검으로 보지 않아도 돼요.”
어느 틈엔가 아이리스의 형체가 흙먼지가 가려졌다.
대신 거센 바람 소리를 뚫고 아이리스의 음성이 선명히 들렸다.
“거듭 말했다시피 무형검은 용언과 같아요. 당신의 의지를 발현시키는 힘이니까 어떤 형태로든 될 수 있고, 어떤 곳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어요.”
“끄읏!”
언제 어디서든 어떤 형태로 발현되는 힘이라.
유리는 구름을 갈랐을 때처럼 손에 보이지 않는 검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바람이 정말 죽일 듯이 거세지자 손아귀에 무언가가 잡혔다.
‘방어할 수 있―!’
하지만 무형검이 만들어졌을 땐 이미 늦고 말았다.
툭!
보다 작고 거세며 날카로운 바람의 단검이 사지를 관통하고 지나갔다.
시작은 한 자루였다.
폐부를 뚫고 지나간 뒤, 이어서 다른 단검이 우수수 쏟아졌다.
투두두두둑!
피가 튈 틈도 없이 곳곳에 구멍이 뚫렸다. 마치 총알을 맞는 사람처럼 사지가 부르르 떨린다.
한바탕 바람 구멍이 지나가자 눈알이 뒤집어진 그는 그대로 쓰러졌다.
첫 대련 때보다 더 처참한 결과에 아이리스는 혀를 찼다.
“……또 과했나.”
봐주지 말라고 해서 봐주지 않았건만.
물론, 아이리스는 이 상황이 재밌기만 했다.
왜냐하면 유리가 살아있었다.
심지어.
“윽…….”
처음 무형검을 받았을 땐 정신을 잃었던 유리가.
오늘은 더 무자비한 공격을 받고도 정신이 멀쩡했다.
유리는 신음소리를 내며 바닥을 짚고 천천히 일어났다.
피 웅덩이에 담갔다가 빠져나온 꼬락서니였다. 입에선 한 움큼 피가 울컥 나왔다.
“어머. 진작에 이렇게 괴롭힐 걸 그랬나요.”
“후우, 후우……. 아이, 리스, 님은, 그런, 취향, 이셨습니까?”
“그럴리가요. 전 그저 놀라워하는 것뿐이랍니다.”
거짓말. 얼굴에 아주 즐거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게 티 난다고.
유리도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오기가 생겼다. 적어도 또 다시 정신을 잃는 꼴 사나운 짓은 싫었다.
툭!
그때, 유리가 무언가를 짚으며 몸을 똑바로 세웠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니, 들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아이리스는 더욱 활짝 웃었다.
“어머머!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무형검을 유지하고 있다고요? 이거 더, 더 재미있어 지는 걸요!”
“큽, 후우우…….”
이젠 귀가 들리지 않아서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다.
고막이 터져서 피가 구멍을 막은 듯했다.
그리고.
여기가 한계였다.
쿵! 소리와 함께 기껏 일으켰던 몸이 넘어갔다. 아까와 다른 점이라면 앞에 아니라 뒤로 넘어갔다는 정도.
뒤통수가 바닥과 부딪히기 직전, 아이리스가 바람으로 몸을 받쳤다.
두 번째 패배, 하지만 유리의 의욕은 더욱 커져만 갔고.
“세드리치한테 달라고 할까?”
의미심장하게 자문하며 아이리스는 자리를 떠났다.
* * *
그날부로 유리는 총 50번 이상을 더 죽어야만 했다.
가끔은 진짜로 생사를 오갈 정도로 치명상을 당했다.
그때마다 아이리스의 행복 지수가 극에 달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시간이 흘렀고.
70번째 대련에 들어섰다.
후우우웅!
“후우.”
오늘도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바람이 주변을 감싸돌았다.
전과 달리 이제 유리는 무형검을 손에 아무렇지 않게 만들 수 있었다.
문제는 무형검을 어떤 식으로 쓰느냐였다.
상대도 보이지 않는 검을 수백 자루로 싸우고 있기 때문에 고도의 방어술이 요구됐다.
그러나 오늘, 유리는 그 방어를 포기했다.
“갈게요.”
아이리스의 시작 선언과 동시에 바람의 검들이 동시에 유리를 향해 날았다.
처음 했던 결심대로 유리는 방어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가만히 서서 단검이 다가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순간.
모든 바람이 피부에 닿기 직전,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