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47
제147화
피부 끝에 닿은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멈춰 있었다.
당장이라도 살갗을 꿰뚫을 기세였던 모든 바람의 단검이 그렇게 정지한 것이다.
‘됐다!’
유리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처음부터 검 하나로 수 백 자루의 검을 막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만화나 영화처럼 악당이 순서에 맞춰 공격하는 것도 아니고.
당연히 당할 수밖에 없는 공격이었다.
물론, 서른 몇 번째 대련을 하면서 마법을 써서 대응해보기도 했다.
결과는 참패.
처음엔 마법을 쓰고도 막지 못했고, 세 번째 시도 즈음에선 용언 한 번으로 마법이 차단되었다.
그래서 유리는 그녀가 준 가르침을 되새겼다.
무형검은 곧 용언 마법과 같다. 즉, 언령(言令). 언어를 통한 명령과도 같았으니.
그렇다면 방어를 하지 않고 상대의 무형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을 떠올렸다.
문제는 어떻게 상대의 검을 빼앗느냐, 였다.
용언 마법을 쓸 줄 모르고, 겨우 무형검 한 자루를 만들 줄 아는데 상대의 검을 용언으로 빼앗을 수 있을 리가.
그러나 이를 극복하는 답 또한 이미 주어졌다.
‘한다. 그냥 한다. 그저 한다.’
단순할수록 의지는 강해진다. 그 강해진 힘이 곧 용언의 기초였다.
그 사실을 깨달은 유리는 40번째 대련부터 계속 아이리스의 무형검을 자기 것처럼 다루려고 애썼다.
그간 괜히 당하고만 있던 게 아니었다.
“어머머, 놀라워라.”
아이리스는 순수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방어하라고 만든 수 백 자루의 무형검은 단연 아니었다.
그렇다고 무형검을 통제하는 걸 기대했느냐.
아니.
다름 아닌 드래곤의 언령이자 용언이다. 용인의 피가 반쯤 섞였을지라도, 설령 유리가 순수한 용인이라 했어도 절대 다다를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무형검을 멈추게 해도 그녀가 준 시험은 통과였다.
그런데 일시에 모든 무형검을 멈췄다.
일수로 100일, 80번의 대련, 80번의 죽음을 경험한 것에 비해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당연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
투두두둑!
잠깐의 방심이 곧 화를 불러일으켰다.
멈췄던 단검들이 유리의 몸 구석구석에 박히기 시작했다.
전과 다른 점이라면 관통이 아니라 박힌 채 멈췄다는 점인데. 그것이 더한 격통을 불러왔다.
“꺽……!”
머리와 목만 빼고 칼이 꽂힌 유리는 평소처럼 기절하면서 쓰러졌다.
구경하고 있던 아이들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와하하! 오늘도 졌어!”
“맨날 져! 근데 또 싸워!”
“바보 같은데 멋있어!”
아이리스는 그에게 다가가며 손짓으로 무형검을 거뒀다. 그제야 뚫린 구멍에서 피가 흘렀다.
이전 대련보다 덜 흉측하다면 흉측했다.
끔찍하게 당했다는 사실은 똑같았지만.
“슬슬 난 손을 떼야겠는 걸.”
그리 말한 아이리스는 익숙하게 용언으로 지혈을 하고 공중에 그를 띄워 데려갔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 * *
그날 밤.
세드리치는 정자에 앉아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난간에 몸을 기댄 티르빙과 같이 마주 앉아 술을 기울이는 별빛나무가 있었다.
티르빙이 호수 쪽을 멍한 눈길로 바라보며 물었다.
“오늘이 우리가 온지 얼마나 됐던가요.”
“100일 하고도 보름이 지났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흐르네요.”
바깥의 시간과 이곳 기억 속의 시간은 같이 흘렀다. 어느 하나 빠르거나 느리지 않았다.
때문에 바깥 일이 궁금했으나 알 길이 전혀 없었다.
알고 싶다면 기억을 나가는 수밖에.
“우리 꼬맹이가 잘 버텨줘서 다행이네. 어머니 혼자 두고 와서 꽤나 심란해 보였는데.”
그리 말하며 세드리치의 눈치를 살피는 티르빙.
어머니라는 단어에 들려고 하던 술잔이 잠깐 멈췄다가 움직였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난 당신보다 오랜 삶을 살았어. 이 기억 속의 당신은…….”
“창조주로부터 태어난 지 4천 번의 달이 뜨고 졌다.”
“얼마 못 살았네.”
“한낱 신물 주제에 건방지군.”
“그 신물이 마신의 것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겠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지.”
“예언에 대해서 의심하는 거 같아서.”
유리로부터 티르빙을 빼앗은 뒤, 세드리치는 곧장 그녀와 이것저것 대화를 나눴다.
많은 내용이 오갔으나, 그 중 핵심은 예언과 멸망이었다.
세드리치는 그 예언과 멸망을 의심했다.
“정말로 예언이 있긴 한 건가.”
“당신도 들었다면서.”
“우리들이 들은 건 예언이 아니라 창조주의 푸념 정도에 불과했다.”
“창조주의 예지력을 무시하는 거야?”
“창조주가 미래를 못 본다는 게 말이 안 되니까.”
드래곤들이 처음 중간계에 떨어지던 날, 창조주는 그들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해주었다.
먼 훗날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이 그것이었고, 이를 위해 너희들을 낳았다는 이야기였다.
그로부터 4000년 넘게 흘렀다.
드래곤에겐 긴 시간이라 할 수 없었으나, 예언이 거짓된 게 아니냐는 의문이 생기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의문은 창조주의 능력까지 의심하게끔 만들었다.
“창조주는 만물을 관장할 수 있는 신이다. 시간마저 그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지지. 그런데 창조주께선 미래를 얼버무리셨다. 멸망만 있다고 했을 뿐, 어떤 형태의 멸망이 다가오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지. 그래서 난 창조주를 의심했다. 그분께서 정말로 멸망을 보긴 한 건가?”
“신성모독이야, 그거.”
“미래엔 합리적인 의심도 모독이라 하나보군.”
“하여간 말은…….”
“그럼 드래곤께선.”
가만히 듣고 있던 별빛나무가 끼어들었다.
“드래곤께선 어찌하여 제 주인님을 돕는 건가요? 멸망과 창조주의 예언까지 믿지 않으시면서.”
“우리의 사명이니까.”
“모순되는 발언이네요. 믿지 않으면서 사명을 다하다니. 그거야 말로 합리적이지 못한 걸요.”
“…….”
“당신께서 무얼 위해 멸망을 대비하는지 저희가 알 바 아니죠. 그저 우리가 궁금한 우리 주인의 안위. 혹여 유리 님에게 해가 된다면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어요.”
“도구 따위가 드래곤에게 맞서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우습군.”
도구.
그래, 그러고 보니 고대 드래곤은 티르빙이나 미뭉을 그리 취급했다. 자아를 가졌어도 도구, 물건, 무구에 불과하다며.
자존심 상할 법했지만, 티르빙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다만, 한 가지 경고 하고 싶었다.
“혹시 우리 꼬맹이도 도구 취급하는 건 아니겠지? 멸망만 막을 도구 정도로 말이야.”
“그러면 안 되나?”
티르빙과 별빛나무의 움직임이 동시에 같이 멈췄다.
티르빙이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를 도구 취급하는 것도 열받는데 꼬맹이까지 그러면 많이 난감한 걸. 안 그래, 별빛나무 양?”
“동감이에요, 티르빙 양. 전 당장 이 도마뱀을 죽이고 싶을 정도라니까요.”
유리와 시간을 보내본 티르빙과 별빛나무는 그가 얼마나 마음씨 좋은 인간인지 알고 있었다.
가끔은 오지랖을 부릴 정도로 착해서 탈이긴 했지만, 유리는 항상 오지랖을 쉽게 해내왔다.
그건 그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자신감의 바탕에 확실한 근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티르빙과 별빛나무는 그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가끔 바보스러울 정도로 착한 주인이 좋아서 그가 꼭 원하는 바를 이뤘으면 했다.
고로 그가 무시당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들을수록 가관이군.”
“가관인지 아닌지 재볼까? 어차피 너는 기억 속에 불과한 존재잖아.”
“…….”
세드리치는 대답 대신 술한잔을 들이켰다.
소모적인 말싸움은 여기서 자연스레 끝났다. 어찌됐든 신물(神物)인 그녀들과 싸워봤자 괜한 신뢰만 깎였다.
또한 그녀들이나 세드리치나, 중요한 건 유리라는 건 변함없었으니까.
유리만 기억 세계에서 배움을 얻어간다면 그걸로 되었다.
무엇보다.
‘난 저들을 이길 수 없다.’
세드리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잔을 비웠다.
마찬가지로 잔을 비운 별빛나무가 조금은 억지스럽게 화제를 바꿨다.
“그래서, 결국 예언과 드래곤께선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거네요.”
“그렇다.”
“그럼 대체 나이트워커 지하 깊숙한 곳에 누가 설정집을 쓴 걸까요?”
이들 사이에서 지금껏 결론을 내리지 못한 이야기가 바로 이거였다.
나이트워커로 유리가 들어간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이트워커의 도서관 1티어 섹터를 열람할 기회가 생겼던 유리는 그곳에서 ‘설정집’을 발견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유리와 티르빙은 블랙 드래곤이 설정집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기억 속 세계에 들어와서 세드리치로부터 멸망의 예언에 관해 들었다.
결국 유리가 농담 삼아 카이에게 예언서를 봤다고 했던 말이 정말로 사실이 된 것이다.
헌데, 세드리치는 이 사실을 부정했다.
“그 설정집이라는 예언서를 누군가 썼다면, 당연히 창조주가 썼겠지.”
“드래곤께서 쓰신 게 아니고요?”
“말했다시피 난 예언을 믿지 않는다.”
“말했다시피 예언을 믿지 않으시는 분이 주인님을 돕고 있죠.”
반복되는 대화 속에서 티르빙이 지그시 세드리치를 바라봤다.
세드리치는 끝을 모르는 어둠과 그림자를 닮은 남자였다. 속을 알 수 없을뿐더러, 알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티르빙에겐 아니었다.
기억 밖에서 오랜 세월 그를 지켜보았었으니까.
‘대체 뭐가 부끄러워서 숨기고 있는 거지.’
옛날부터 세드리치는 의외로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감정 표현이 겉으로 티가 안 날뿐이지, 당황스러운 일을 겪으면 어색한 논리를 갖다 붙였다.
지금처럼 말이다.
특히 부끄러운 짓을 할 때면 더더욱 어색해졌다.
‘가령 누굴 좋아할 때 그랬지.’
드래곤이라고 해서 사랑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사랑을 비롯한 감정 자체에 무뎌서 그렇지.
‘세드리치가 누굴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티르빙도 몰랐다. 그녀만이 아니라 다른 드래곤, 심지어 마신과 창조주도 몰랐다고 한다.
신마저 속이는 비밀 연애를 했다기에 아이리스 같은 드래곤은 아예 믿지 않았다.
‘연애 상대 때문에 예언서를 썼다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는다. ……많이 이상한 걸.’
앞뒤가 잘 조합되지 않는 이야기에 궁금증만 더 커졌다.
이후 티르빙과 별빛나무는 계속해서 추궁을 해보았으나 같은 말만 돌아왔다.
나중에 가선 별빛나무도 수상한 걸 알아채서 더 집요하게 물었으나 먼저 체념했다.
애꿎은 술만 동 났고, 밤이 깊어질 무렵이 되자 세드리치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별빛나무, 네놈은 계속 이대로 있을 건가?”
“쫓아내시려고요? 우리 주인님이 허락해준 따스한 보금자리를 버리긴 싫은데요.”
“내 말 뜻은 티르빙처럼 있을 마음이 없냐는 의미다.”
“티르빙 양처럼요?”
세드리치가 마지막 잔을 털어내며 일어났다. 옆에 잔뜩 쌓인 술병에 비해 취기 하나 없는 낯이 처음으로 미소를 띠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