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50
제150화
백 여 자루의 무형검이 운석을 향해 일제히 날아올랐다.
아까는 빈 퀴네가 신경 쓰여서 운석을 멈추기만 했었다. 어떤 식으로 그들이 싸울지 몰랐으니까.
그러나 빈 퀴네가 대련에서 물러나면서 더 이상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고로 멈추는 게 아닌, 없애면 된다.
‘없어지라는 의지를 발휘할 수 없어서 아쉽네.’
아쉬워하면서 유리는 웃었다. 그 틈에 무형검이 구름들 사이를 비집었다.
서걱! 서걱! 서걱! 서걱! 서걱!
구름치곤 자르는 감각이 선명했다. 그렇게 자르고, 다시 조각내고, 또 조각내고.
마침내 구름과 불꽃이 먼지가 되고 나자 청량한 하늘이 보였다.
“후읍!”
끝났다는 생각에 유리는 뒤로 넘어지며 대(大)자로 뻗었다.
마나와 체력 모두 바닥나버려서 더는 싸울 힘이 없었다.
이대로 카바드가 일격을 날린다면 꼼짝없이 패배였으나.
“축하한다, 유리 덴 나이트워커! 이 몸의 대련을 하루만에 통과했군!”
머리 위로 카바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의 말처럼 빈 퀴네와 카바드와의 대련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아이리스 님에 비해 상당히 짧아진 기간이라 대련이 부실한 거 아닌가요.”
“그건 아니에요, 유리. 내가 강하게 가르친 보람이 발휘된 거죠.”
바닥에 널브러진 유리 위로 아이리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진짜입니까?”
“못 믿어요? 방금 나랑 똑같이 무형검 백 자루를 만들어놓고? 그 전에는 내 무형검을 조종해놓고? 드래곤을 이겼으면서 욕심이 많네요.”
“욕심이 없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겁니다.”
사람들은 욕심과 욕망을 나쁜 걸로 치부한다.
그러나 인간에게 욕심과 욕망을 빼앗는다고 과연 세상이 나아질까?
그런 세상은 없다.
생명체로 태어난 이상 생존 본능이 있고, 생존을 위해서 사람들은 욕심을 쓰기 마련이다.
그저 욕심을 부리겠다고 해를 끼치는 게 문제라서 그렇지.
“그리고, 이 기억 세계는 더 욕심을 부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왜죠?”
“왜냐하면 저를 위해서 만든 세상이니까요.”
“어머, 눈치 챘어요?”
티르빙과 세드리치의 대화에서 드래곤을 이긴 유리가 말이 안 되었듯.
유리 본인도 자신이 드래곤의 힘을 이긴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잠시나마 그들을 압도했다.
무형검 한정으로 이겼다 쳐도, 그들이 이룩한 무형검의 경지는 유리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이곳이 기억 세계이기 때문이다.
“드래곤을 기록만으로 남길 순 없었겠죠. 그러니까 제가 드래곤님들을 이겼을 테고요.”
세드리치가 티르빙에게 해줬던 답을 유리는 스스로 떠올렸다.
설정집에 나오는 클라우드 하트는 뇌를 읽어낸다거나 기억 정보를 그대로 카피해서 옮기는 방식이 아니다.
클라우드 하트에 저장하고 싶은 기억만 직접 추출해서 저장하는 방식이지.
‘이 기억 세계는 세드리치 님이 필요한 정보만 넣었을 거야.’
드래곤이 가진 힘을 기억 따위로 전부 저장할 수 없겠지만.
유리의 생각엔, 세드리치가 직접 고른 기억만 담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억을 남긴 목적도 따로 있겠지.
“티르빙에게 들었지만, 머리가 좋네요. 하지만 꼭 유리를 위해서만은 아니에요. 그보단 예언을 위해서였죠.
“그러고 보니 아까 카바드 님이 예언과 예언을 막을 자라고 하시더군요.”
“이 몸이 그런 말을 하긴 했지.”
그때 마침 카바드와 빈 퀴네도 다가왔다. 그리곤 카바드가 유리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예언과 예언을 막을 자. 세드리치는 그를 위해서 이 기억을 만들었다고 하더군. 뭐, 우리들 입장에선 한참 뒤에 일이지만 말이야.”
“예언이란 게 뭡니까?”
“뭐긴 뭐야. 멸망이지. 설마 세드리치가 설명해주지 않았나? 이거 참. 그럼 네가 왜 우리한테서 배움을 얻는지도 모르고 있는 거잖나.”
“따로 사연이라도 있습니까?”
“있다마다! 쩝, 이거 대화가 길어지겠군. 우선 식사부터 하지! 배가 많이 고플 텐데 말이야. 누나, 부탁할게.”
“으응.”
빈 퀴네가 용언 마법 몇 가지를 중얼대자 어지러워진 주변이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떨어진 불꽃이 꺼지고 무너진 건물이 세워진다. 구덩이가 생긴 땅은 평평하게 변했다.
건물로 들어서니 엎어졌던 밥상도 멀쩡하게 그들을 기다렸다.
달라진 거라곤 인원에 맞게 늘어난 수저와 밥그릇 뿐.
‘허, 이런 건 볼 때마다 신기하네.’
이곳에 온 뒤 식사를 할 때면 항상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당에 찾아가면 매번 밥상이 차려져 있고, 식후 고개를 돌리면 모든 식기류가 사라져 있곤 했다.
뭐랄까.
코앞에서 우렁각시가 있다는 느낌이랄까.
“유리는 이리와요. 치료부터 하죠.”
식사에 앞서 유리는 아이리스의 손길을 빌려 한쪽에 앉아 치료를 받았다.
빈 퀴네와 카바드는 자연스레 수저를 들고 식사를 시작했다.
말문은 카바드가 먼저 열었다.
“오래 전, 우리 드래곤은 창조주로부터 세상이 멸망할 거라는 예언을 들었다.”
“진짜입니까?”
“그래, 진짜다.”
세드리치가 도움을 주는 이유가 멸망 때문이라고 알고 있긴 했다.
그는 유리의 기억을 봤다고 했으니까.
물론, 멸망과 자신은 상관없다며 무시했던 세드리치였기에 자존심을 긁어서 가르침을 받게 됐지만.
애초에 예언을 통해 멸망을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예언을 들은 우리는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우리가 멸망의 시대까지 살 수는 없거든. 살아있다고 해도 창조주께서 멸망을 막으라는 사명까지 주진 않으셨다.”
하긴, 멸망을 막으려 했다면 드래곤들에게 멸망을 막으라는 사명을 줬겠지.
“그런데 세드리치 그 자는 생각이 달랐어. 멸망을 막아야 한다고 하더군.”
“그래서 기억을 남기셨군요.”
“뭐, 기억을 남긴 시점은 여기서 먼 미래의 일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랬겠지.”
시간적으로 현재 기억 세계에서 세드리치는 기억을 남길 마음이 없었다고 들었다.
현 시점으로부터 먼 훗날, 그때가서야 기억을 남겼을 것이고 기억 속에서 다른 드래곤의 기억까지 같이 남겼으리라.
그렇다고 헷갈리지 말아야 할 건, 오늘 날 유리와 만나서 기억을 남기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니었다.
기억 세계의 접속이 시간 역행이나 회귀는 아니었으니까.
“세드리치 님에겐 기억을 남길 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었나보군요.”
“이 몸도 너와 같은 생각이다. 원래 우리는 예언을 받고 이를 어떻게 해볼 마음이 없었어. 근데 그 녀석은 예언을 듣자마자 멸망을 막아야 한다고 했어. 이유 없이 그랬을 놈이 아니야.”
“왜 그랬는지 아시나요?”
“알면 좋겠군. 누나도 모르지?”
“으응.”
“난 알 거 같아요.”
유리의 등에 손을 대며 치료하고 있던 아이리스가 대뜸 그리 말했다.
모두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어지간해선 속내를 알 수 없는 세드리치였다. 알려고 해도 워낙 과묵해서 알 수가 없었다.
헌데 아이리스가 알고 있다니, 없던 호기심도 저절로 생긴다.
그녀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사랑하는 연인이 멸망에 휘말리지 않게 하려고요.”
* * *
밤이 되어서 유리는 간만에 여유를 갖고 밖을 서성거렸다.
오늘 정자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번에 유리가 수면 시간을 망쳤다며 세드리치가 강제로 아이를 재우러 갔으리라.
그는 정자에 올라 낮에 아이리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세드리치에겐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어요. 그녀도 드래곤이었고, 어느 날엔가 갑자기 모습을 감추었죠.”
“못 찾은 겁니까?”
“못 찾았어요. 이별의 한 마디 없이 떠나는 바람에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길이 없죠.”
“…….”
“그때부터 세드리치는 세상 만사에 관심이 많아졌어요. 창조주께서 돌보라고 했다가 거절했던 용인도 그때부터 돌보기 시작했죠.”
묘하게도 용인이 이 땅에 나타난 시기와 창조주의 예언이 나온 시기가 겹쳤다.
원래 그 이전에 용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창조주의 설득에도 이를 반대했던 이가 바로 세드리치였다.
“설마, 아니겠지.”
유리는 거듭 고개를 저으면서 불현 듯 스쳐가는 가정을 지웠다.
세드리치가 좋아했다던 연인.
그리고 하필 이럴 때 떠오르는 어머니의 반인반용(伴人半龍)으로 변한 모습.
이 두 가지마저 교묘하게 겹치는 건 정말 우연일까.
그렇다면, 유리에게 세드리치는…… 혈육?
“아우, 모르겠네.”
설령 추측이 진짜라고 해도, 너무 막연해서 감이 오질 않는다.
유리는 고개를 젓고 또 저으며 불안한 발상들을 떨쳐냈다.
“심란한가 보군.”
하필 이 타이밍에 세드리치가 나타났다.
그는 정자 위를 올라와서 유리와 나란히 섰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하지만 선뜻 무어라 물어야할지 모르겠다.
애초에 묻는 게 맞는지도 헷갈린다. 뭔가 괜히 비밀을 들춰서 잘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치만 딱히 크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아이리스한테서 내 이야기를 들었나.”
답답한 분위기 속에서 세드리치가 쉬이 대화를 열었다.
유리는 내색하지 않고 답했다.
“네, 조금이지만요.”
“네놈이나 나나 우리는 몰랐던 사이다. 미래엔 알 수밖에 없겠지만, 적어도 현 시점의 우리 둘에게서 특별한 의미를 찾지 말도록.”
“그렇다는 건,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군요.”
당신과 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기쁘면서 슬프고, 아련하면서 먹먹하다.
아버지, 아버지. 부르고 싶어도 없어서 못 불렀던 그 사람이 눈 앞에 있다.
그 사람이 인간이든 드래곤이든, 유리에겐 실존하며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그러나 마냥 좋을 수만은 없었다. 왜냐하면 이 세계는 기억이니까.
실존이 아닌, 이미 죽어버린 시간을 돌이켜보는 수단일 뿐.
“이렇게 뵐 줄은, 몰랐습니다. 뭔가 늦은 거 같기도 하고요.”
“말했을 텐데. 너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다.”
“하지만 이 기억 세계를 남기신 건 저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글쎄.”
세드리치는 버릇처럼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오늘만은 솔직해졌다.
“너를 위해서가 아니다. 난 진심으로 멸망을 막고 싶다.”
멸망을 막는다.
솔직히 위대한 드래곤인 그조차도 멸망이 갖는 의미를 좀처럼 헤아리지 못했다.
대체 어떤 세상이 어떻게 없어지는지도 모르겠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허나, 멸망을 막을 이유가 생겼다.
“멸망을 막아 어딘가에 살아있을 그녀가 더 살수만 있다면 난 그걸로 족한다.”
“어머니 때문에 멸망을…….”
“그래, 너의 어머니이자 나의 반려. 그녀를 위해서 말이지.”
‘그녀’가 홀연히 떠나간 이후, 세드리치는 그녀를 잊으려 몇 번이고 노력했다.
그러나 어디 그게 쉽던가.
쉽게 잊을 상대였다면 애초에 그녀를 반려라고 여기지도 않았으리라.
그러던 중 창조주로부터 멸망의 예언을 들었다.
세드리치는 이대로 세상이 망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처음엔 언젠가 그녀를 만날 수 있는 기대감 때문에, 나중엔 자신이 죽고도 살아있을지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서.
그렇게 몇 천 년 간 멸망을 막을 준비를 해왔다.
이 기억 세계도 그가 준비한 일환 중 하나였으니.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둘 사이에선 아무런 대화 없이도 수많은 감정이 오고 갔다.
“그럼 세드리치 님.”
어색함을 깨보기 위해 유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좀 더 망설이다가 물었다.
“저희 어머니는 드래곤인 겁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