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52
제152화
모든 드래곤들은 각자가 수호하는 계(界)가 있다. 이는 창조주가 수호하라고 사명을 부여한 세계로, 마법사들은 크게 화(火), 수(水), 풍(風), 흑(黑) 등등으로 나누었다.
물론, 인간의 시점으로 바라본 한정적인 계(界)에 불과하며 고대엔 더 많은 계가 존재했다고 한다.
이를 입증하는 사례가 바로 드래곤과 정령이었다.
괜히 그들의 이름 앞에 바람이라든가 밤, 불 따위가 붙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드래곤들은 유리와 대련을 하면서 각자가 수호하는 계만 사용했다.
그래서 유리도 사용할 수 있는 계를 구축했다.
바로 자신이라는 세계였으니.
“엇?”
빈 퀴네는 허공을 뚫는 감각에 당혹스러워했다.
수많은 경험을 해본 그녀라 할지라도 설마 계까지 유리가 통달했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심신일검이라도 다다랐다면 충분했다 여겼거늘.
심신일검에서 계(界)를 구축하길 바라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이건 불가능했기에 상정조차 하지 않았었다.
헌데 유리가 해내고 말았다.
스륵.
유리의 검붉은 무형검이 당황한 빈 퀴네 입술 끝에서 멈췄다.
“끝났습니다.”
“응, 그런 거 같네.”
빈 퀴네가 복부에 박힌 손을 천천히 빼냈다. 피가 묻어나진 않았다.
그녀가 물러나자 유리의 무형검이 사라졌다.
잠깐 심신일검에 이어서 계까지 통달해버리고 나니 온몸에서 진이 다 빠졌다.
그는 허리를 숙인 채 멈췄던 호흡을 터뜨렸다.
“헉, 헉.”
싸우는 동안 숨 쉬는 법도 잊고 무형검과 계에만 집중했다.
처음 해보는 것들이기도 하고, 드래곤만 가능한 기술이라 드래곤 하트에 있는 모든 마나를 쏟아 부어야만 했다.
그렇긴 한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대충 빈 퀴네를 보면서 따라 해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딱히 무얼 해보겠다며 방법을 고안하진 않았다.
그러나 그게 답이었을지도.
원인이나 이유를 찾아봤자 알 수 없다. 무형검은 ‘한다’는 의식이 곧 모든 근원이었으니까.
“이야! 과연 예언을 막는 자 다운 걸! 우리가 알려주려던 길보다 더 나아가다니.”
아이리스가 손뼉을 마주치면서 다가왔다.
옆에 있던 카바드도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대단하긴 하군. 새로운 계(界)를 창조해낸 거잖아? 드래곤만 가능했던 영역을 다른 생명체가 해낼 줄이야! 그간 몸으로 부딪히면서 가르친 보람이 있어!”
“그러게. 우린 무형검의 초(初)와 정반(程半)만 가르쳐 주려고 했는데. 멋대로 종(終)까지 익혔으니.”
“정반과 종이 뭡니까?”
“초(初)로 심검을 이루고, 정반(程半)으로 심검을 다루고, 종(終)으로 심검과 하나가 된다. 이게 우리가 세운 무형검의 기본 세 가지야. 그런데 넌 종(終)에서도 끝자락까지 갔던 거야. 심지어 종에선 새로운 계를 만들어냈지.”
“계를 만든다는 게 대단한 겁니까?”
“어머, 얘가. 쉽게 설명하자면 넌 정령계 하나를 창조해낸 격이야.”
“음음! 맞아! 신이나 가능한 일을 해낸 거지!”
세계를 만든 창조의 권능은 신에게만 있다. 그러니 신의 피조물인 유리는 당연히 세계를 만들 수 없었다.
그러나 유리 본인의 견해는 달랐다.
“정령계는 영혼의 세계죠?”
“어? 응. 그렇지.”
“그렇다면 제 안에 있는 영혼과 그 속에 살았던 티르빙. 결국 저라는 영혼이 계였던 건 아닐까요.”
생명체가 있는 이곳을 중간계라 부르고, 중간계는 물질계와 정령계로 나뉘었다.
두 곳으로 중간계를 나누긴 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을 있었다.
바로 영혼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한 가지 가정을 세웠다.
영혼의 존재 여부가 세계가 있다는 근거라면, 유리의 영혼도 하나의 세계이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의 영혼에는 티르빙과 별빛나무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정을 통해 유리는 자신의 계(界), 혈(血)을 만들어냈다.
“어머,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나? 카바드는 어떻게 생각해?”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말이 맞다고 해서 그게 되던가?”
“유리는 했잖아.”
“누나, 했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니까. 우리라고 해서 태어나면서부터 계를 다뤘어?”
“아, 아니지.”
“그래! 근데 이 녀석은 바로 해냈어! 이야, 창조주께서 보시면 속 좀 뒤집어시겠어. 큭큭.”
유리를 앞에 두고 그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쨌든 계를 만든 게 대단한 건 알겠다. 유리는 다른 무형검을 만들었을 때처럼 그저 그냥 그렇게 했을 뿐이지만.
“그치만 다시 하라면 못 할 거 같습니다. 유지하기도 벅차고요.”
“드래곤 하트를 써버릇 하지 않아서 그래. 그간 이렇게까지 드래곤 하트만 극한으로 썼던 적은 없지?”
“네, 처음입니다.”
드래곤 하트를 개방해야 했던 적은 종종 있었어도, 드래곤 하트‘만’ 썼던 적은 드물었다.
드래곤 하트를 써야했던 순간은 항상 위험했기 때문에 다른 마나 코어와 티르빙까지 사용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드래곤 하트만 오롯이 사용했다.
“혹시 일부러 드래곤 하트만 썼어?”
“아뇨, 그냥 그래야만 할 거 같았습니다.”
“어머머, 대견해라.”
“그러게 말이야. 세드리치가 제대로 심장을 넘겨줬는 걸? 나도 하나 후손에게 남겨볼까.”
카바드의 농담이 유리에겐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불의 영혼.
드래곤 하트는 아니어도 언젠가 후손을 위해 힘을 남길 그였으니까.
“어때, 유리? 나도 하나 남기면 멸망에 보탬이 되지 않겠어?”
“카바드 님 좋을 대로 하시죠.”
“뭐야, 반응이 싱겁군. 이 몸의 드래곤 하트가 미래엔 없나 봐?”
“말씀드려서 미래가 바뀌면 안 되지 않습니까.”
“아, 그렇긴 하지. 좋은 조언이야. 그리고 생각해보니 우린 기억 속 세상에 있잖아? 내가 뭘 하든 미래는 바뀌지 않겠군.”
카바드에겐 솔리드녹스가 불의 영혼이 어떤 식으로 다뤘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불의 영혼을 계승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이가 죽었다고 하면 그의 성격상 화부터 낼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여기서 미래를 바꿀 수도 없는 노릇.
‘이들과 헤어질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
참으로 오묘한 기분이었다.
기억 속이라고 하지만 유리에겐 살아있는 거나 별 반 다르지 않았다.
이런 이들이 사실은 죽었고 미래에서도 볼 수 없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무엇보다 아버지인 세드리치를 볼 날이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어깨를 빈 퀴네가 툭툭 건드렸다.
“유리, 괜찮지?”
“아, 네. 괜찮습니다.”
“으응, 그럼 다행이고. 아무튼, 기억 밖을 나가더라도 훈련을 더 많이 해야 해. 지금 같은 감각은 우연일 뿐이니까. 알지?”
“네, 알고 있습니다.”
“응, 그거면 됐어.”
빈 퀴네는 유리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작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그녀에게 마음 속 감정을 들켜버린 기분이었다.
기억을 읽을 줄 아는 드래곤들이니까 알았을 수도 있고, 유리 얼굴에 티가 났을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빈 퀴네는 마지막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이들은 기억 속에 저장됐을 뿐인데도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그제야 유리는 사사로운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들 앞에서 감상적인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세드리치가 저장한 이 기억 세계와 그들은 멸망을 막기 위해서 모였다. 그들이 원하는 유리는 기억 세계가 남겨진 의도에 맞게 행동하기 바랄 것이다.
유리도 그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러려고 여기 오지 않았던가.
“끝났나.”
때 마침 세드리치가 나타났다. 그의 옆에는 티르빙도 같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별빛나무가 요 근래 보이지 않네.’
대련에만 몰두하느라 시간 관념이 모호해졌다. 그래서 별빛나무를 못 본 시간이 얼마나 됐는지도 헷갈렸다.
딱히 위협을 당할 곳이 아니라서 신경 쓰지 않았던 것도 있다만.
“자신만의 계를 만들어 내다니. 1년도 안 되어서 엄청나게 성장했군.”
“칭찬 감사합니다.”
“빈 퀴네가 해준 조언을 잊지 마라. 네놈이 여기서 계를 완성시켰다 하더라도 저 밖에 있는 네 몸은 아직 무형검을 익히지 못한 육체다. 육체로 돌아가면 더 혹독하게 훈련을 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말하다 말고 세드리치가 티르빙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티르빙이 허공 속으로 꽃잎이 흩어지듯 핏물을 튀기곤 사라졌다.
이윽고 귓전에서 티르빙의 목소리가 들렸다.
[후우! 여기가 편하긴 은근히 편하네.]유리의 영혼으로 돌아온 것이다.
헌데 별빛나무는 없었다.
“세드리치 님, 별빛나무는 어떻게 됐죠?”
“여기 있다.”
세드리치가 소매자락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티르빙과 똑같은 모양새이면서 색감이 달랐다. 흡사 미뭉처럼 금빛이 감돌았으나 그보단 훨씬 새하얬다.
그야 말로 별의 빛을 담아놓은 형상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별빛나무의 껍데기 정도다.”
“그렇다는 건, 그게 별빛나무……?”
일전에 별빛나무에게 이대로 지낼거냐고 물었던 세드리치.
그는 그녀를 쫓아내려고 했던 게 아니라 그녀를 티르빙처럼 무구로 만들어주려 했고.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었다.
“이곳이 기억 세계이기 때문에 이것은 진짜 검이 아니다. 아마 밖으로 데리고 나가면 그녀는 다시 티르빙과 같이 지내겠지. 내가 보여주는 건 도안에 불과하다.”
“그런데 저에게 이걸 보여주시는 이유가 뭡니까?”
“시험이자 선물이다.”
설마 했지만 진짜로 자신에게 준다는 말에 눈동자가 터지기 직전이었다.
선물이라니.
둘도 없을 신물을 두 개나 얻는 기분에 실감이 안 났다.
“벌써 들떴군.”
“드래곤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들뜨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요.”
“허나 거듭 말했듯이 이건 내가 보여주는 도안이다. 밖으로 가지고 나가거든 이걸 만들 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그 사람은 어디서 만나야 하죠?”
“날 이기거든 가르쳐주마.”
후웅!
순간 세드리치가 별빛나무로 만든 검으로 이마 정중앙을 찔렀다.
“……!”
카가가각!
간신히 반응한 유리가 티르빙으로 살짝 궤적을 비틀었다. 목옆으로 선혈이 그어졌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허나 이어진 힘 싸움에 점점 유리가 밀려났다.
“갑자기 이러시기 있습니까?”
“마지막 시험이다, 유리 덴 나이트워커. 난 다른 드래곤처럼 무르지 않아. 그러니 어중간하게 할 생각 말도록.”
“제가 지면 끝이라는 거군요.”
“그렇다.”
카득!
기어코 세드리치가 힘으로 유리를 밀어냈다. 그러나 쫓아와서 연격을 가하진 않았다.
유리도 잠시 숨을 돌리려는 찰나.
바뀐 풍경을 뒤늦게 눈치 챘다.
‘아무도 없어?’
방금까지 그들을 지켜보던 아이리스, 빈 퀴네, 카바드, 그리고 용인들 모두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적막감이 감돌았다.
“한 눈 팔 여유가 있나 보군.”
세드리치가 경고하자 유리는 다시 그에게 집중했다.
그는 별빛나무가 깃든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안 그래도 하얀 검신이 더욱 밝은 빛을 발하며 청량했던 하늘로 올라갔다. 그러자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별빛나무가 내뿜는 빛만이 세상을 밝혔다.
마치 별빛나무의 빛이 대낮의 빛을 밀어내는 것 같았다.
그만한 힘이 빛과 함께 섞여있었으니.
세드리치는 일격으로 시험을 끝낼 생각이었다.
‘고작 한 자루의 검, 하지만 아이리스 님의 무형검보다 틈이 없다.’
기억 속 세계라 드래곤들은 제 힘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었다.
허나, 세드리치는 아니다.
이곳은 그가 가진 기억을 토대로 만들어졌다. 그가 곧 주인이고, 주인인 그야 말로 가장 드래곤과 흡사한 힘을 발휘했다.
받아쳤다간 무조건 죽을 터.
‘받아낸다.’
유리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행동 방향을 결정했다.
어차피 실력으로 그를 이길 순 없다.
드래곤이 아니고서 어찌하랴.
그러니 가능성을 계산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그랬듯.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자기 자신 밖에 없었다.
‘나도 일격으로 끝낸다.’
빈 퀴네와의 대련으로 인해 드래곤 하트에 저장된 마나는 전부 고갈되었다.
대신 유리는 자신의 코어와 티르빙으로 마지막을 준비했다.
스르릉!
티르빙과 비슷한 색을 가진 무형검이 하늘에서 형상을 갖췄다.
만들 수 있는 무형검은 9자루. 그나마 경도가 강한 건 3자루 뿐이었다.
그 검들이 유리 머리 위에서 세드리치를 겨냥했다.
다른 마법이나 검술은 쓰지 않았다. 세드리치를 상대하려면 무형검이 아니고선 어려웠다.
“훌륭하군.”
한 치의 거짓이 없는 감탄이 세드리치에게서 흘러나왔다.
색(色)은 계(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미지다. 검붉은 색은 카바드의 화(火)와 달리 훨씬 진하고, 잔인한 기운을 띠었다.
실로 아름다운 자태에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분명 반하고도 남았으리라.
“전력을 다해 보거라.”
빛 무리가 머리 위로 무너지듯 쏟아져 내렸다.
유리의 무형검이 쏟아지는 빛을 향해 쏘아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