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57
제157화
릴림은 잠시 어찌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어떤 식으로 말하든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둘러서 말할 것도 없었다.
“카이 경, 떠났어요.”
“네? 카이가 떠났다고요?”
블레이크가 소스라치듯 놀라며 물었다.
“진짜입니까? 정말로 떠났습니까?”
“네에, 갈 곳이 있다면서 사라지더라고요.”
“이런……! 이건 명백한 탈영입니다, 도련님. 당장 병력을 풀어서 잡아들이겠습니다.”
“내버려둬.”
“네, 그렇게…… 예?”
“내버려두도록.”
유리는 하나도 놀라지 않고 덤덤하기만 했다.
카이의 이탈은 어느 정도 예정된 수순이었다.
원작에선 플레온 기사단이 망하면서 떠났지만, 그 때문에 떠난 건 아니었다.
그저 떠날만한 시기에 플레온 기사단이 망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뿐이다.
‘몸이 정상궤도에 오르면서 떠났었지.’
이번에 빙의한 몸의 주인 카이 안데르센은 카이의 어떤 전생보다 잠재력은 높았다.
문제는 시작점이 어떤 전생보다 낮았다.
원체 몸이 약하기도 하거니와.
특히 코어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몸을 키우고 나서 깨닫게 된다.
‘원작에서도 헬헤임에서 제 컨디션을 되찾았어. 코어가 이상하다는 것도 거기서 깨달았고. 성검의 각성도 알게 됐지.’
진짜로 도망간 건지, 어쩐 건지 몰라도.
유리는 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편의를 제공해줬다.
그도 그럴 것이 카이에겐 또 따로 편지를 전달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카이가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루트라던가 필요한 아이템이 있는 위치 등등이 담긴 편지였다.
미뭉이 그 내용을 본다면, 어떻게 이 내용을 알고 있냐며 유리를 죽이자고 하겠지만.
“멸망을 막기 위한 마음만큼은 진심인 녀석이니까. 내버려두자고.”
“도련님은 상당히 카이를 믿으시는군요.”
“블레이크 경도 믿지 않는 건가?”
“믿고 있습니다.”
암흑가의 경매장에서 카이를 구출하던 날에 봤던 그 눈빛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땐 분명 독기로 가득해서 건드렸다간 누구라도 하나 죽일 기세였다.
하지만 블레이크가 그를 가르치고 지켜보면서 의외로 순수함을 가진 사람이란 걸 알았다.
아이 같은 순수함이 아닌.
목표 하나만 정해놓고 그것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그런 순수함 말이다.
실제로 카이가 기사 생활을 하면서 나쁜 짓을 한다거나 불의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간혹 블레이크가 어떤 일을 지시하면 무서울 정도로 치밀하게 해결하곤 했다.
유리가 다독이듯 말했다.
“돌아오지 않더라도 멸망을 앞두고 다시 만나게 될 거야. 그러니 섭섭해 하지 말길.”
“……섭섭해 하는 티가 났습니까?”
“많이.”
“쩝, 그래도 아끼던 놈이라서.”
아쉬운 마음에 입맛만 다시던 블레이크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리도 그런 블레이크의 마음을 이해했다. 원작이나 지금이나 같은 심정이었으니까.
“근데 이자벨은 언제 오는 거지? 금방 온다 하지 않았나?”
“외부 업무를 나갔으니까 좀 늦을 수도 있습니다.”
“힘든 임무라도 맡긴 건가?”
“아닙니다. 이자벨 양, 아니지. 이자벨 경이 저희 중에선 가장 늦게 돌아와서 겸사겸사 간단한 순찰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래서 늦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늦는다니.”
그게 무슨 말이지, 라고 물으려는 찰나.
“꺄아아! 이자벨 경! 제발 사인 한 번만요!”
“손만이라도 잡아주세요!”
갑자기 로비 쪽 방향이 시끌벅적해졌다.
이자벨의 이름이 들리는 걸 봐선 그녀가 돌아온 모양이다.
그런데 뒤따라 들려오는 다른 인파의 소리는 뭐지.
블레이크에게 어찌됐냐며 쳐다봤으나 그는 “나가보시죠.”라고만 했다.
밖으로 나가보니 웬 여성들이 로비를 꽉 채우고 있었다. 분명 아까만 하더라도 보다 한산했던 공간이 꽉 찰 정도의 인원이었다.
어깨와 머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그 중심엔 포니테일로 묶은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있었다.
“자, 잠깐만! 여기까지 와서 이러면 곤란, 끄억!”
“이자벨?”
온 여성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그 주인공은 분명한 이자벨이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에게 치여가며 오도가도 못했다.
기사단의 다른 직원이나 경비들은 손을 놓고 그 광경을 구경했다. 딱 봐도 오랫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고 이젠 포기한 모양새였다.
“이자벨 경이 인기가 좀 많습니다.”
“갑자기?”
“돌아오고 나서 바로 치안대 업무를 맡겼더니 너무 열심히 하더군요. 벌써 몇 건 해결하기까지 했고요. 그래서 마을 주민들한테 인기가 많아졌습니다. 요 며칠 동안 결혼하고 싶다고 온 편지만 수 백 통 일겁니다.”
“어떤 의미론 대단하네.”
그밖에도 기사단에 온갖 먹을 거나 보양식 같은 물건이 수 십 개씩 배달되곤 했다.
어른들 중에는 이자벨에게 인사하고 싶다며 찾아오는 건 기본, 몇몇 부호들은 이자벨의 매력에 이끌려 터무니없는 재산 기부까지 하곤 했다.
물론, 이자벨 선에서 전부 거절하고 있지만.
그녀가 활약할수록 팬들의 숫자는 배로 늘어났다.
“엇, 유, 유유, 유리?!”
용케도 이자벨은 사람들 머리 틈으로 유리를 발견했다.
그녀가 이름까지 불러가며 알아본 사람의 등장에 모두의 눈동자가 일제히 유리를 향해 돌아갔다.
순간 그는 클라우드 하트에서 봤던 기억을 읽는 마수보다 섬뜩한 공포를 맛봤다.
그때도 똑같이 시선이 일제히 움직였는데, 여기선 그 시선들에서 마음이 읽혔다.
‘어떤 놈이 우리 이자벨 님을!’이라는, 마수와는 다르지만 더 무서운 마음이었다.
그러나 유리는 아랑곳 않고 그들 사이로 걸어갔고, 그들은 비켜설 수밖에 없었다.
검은 망토와 금테가 둘러진 검은 펜던트 때문이었다.
“나, 나이트워커!”
“저분 그 유리 님 아니야?”
“야야! 어, 얼른 비켜드려! 괜히 가로막다가 한 소리 듣지 말고!”
가문의 일원이자 직계의 증표를 본 이상, 아무리 이자벨을 향한 팬심이 극진하더라도 물러서야 했다.
덩달아 인파에서 한숨 돌린 이자벨은 그에게 성큼 뛰어왔다.
“무사했군!”
“이자벨이야 말로 무사하네. 좋아보이기도 하고.”
“아, 이거. 큼, 흠흠! 좀 민망하군. 나도 이런 걸 바라진 않았는데.”
“이자벨이 열심히 한 결과지, 뭐. 민망하더라도 감수해야지. 안 그래?”
“더 민망하게 만들지 마라! 안 그래도 부끄러워 죽겠다.”
“큭큭.”
그 길로 유리는 자연스레 이자벨과 다른 동료들을 데리고 로비 한쪽에 있는 계단을 올랐다.
몰려들었던 인파는 그들이 떠나가는 길을 비켜주되 지켜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들이 2층으로 복도 너머로 모습을 감추자.
“야야, 근데 유리 공자님, 은근히 멋있지 않아?”
“그, 그러게. 난 나이트워커 직계라 해서 마냥 무서우신 분인 줄 알았는데.”
“특히 아까 이자벨 님한테 웃으셨을 때! 너무 멋있더라!”
“혹시 두 분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야?”
“그런가?”
“그럴지도 모르지! 넌 나이트워커 사람들이 웃는 거 본 적 있어?”
“없어.”
“나도 없어.”
“근데 이자벨 님에게 웃어줬다는 게 무슨 의미겠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거지!”
순식간에 인파 사이에서 뜬구름 잡는 소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위 이자벨 추종자(?)들이라 불리는 그들은 그 소문에 멋대로 살을 붙여갔다.
이를 지켜보던 기사단 직원들은 “저러다 유리 님을 미워하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을 했으나.
“유리 도련님이라면 괜찮을지도?”
“그러니까 말이야. 이자벨 님도 은근히 좋아하시는 거 같기도 하고.”
“음음! 우리야 이자벨 님이 행복하면 그만이니까!”
“그치! 이자벨 님이 행복한 게 우선이고 말고!”
솔리드녹스로부터 버려진 공녀와 처음엔 서자였지만 나이트워커에서 인정받은 공자.
그런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라니.
진실이 어찌됐건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기엔 너무나 매력적인 스토리였다.
훗날 이 러브 스토리는 음유시인들 사이에서 아리따운 동화로 각색되어 퍼져나가기에 이른다.
* * *
기사단 본부 제일 꼭대기엔 유리의 개인 집무실 겸 회의실이 있었다.
유리가 올 때까지 주인이 없던 집무실은 그간 관리를 잘해둔 덕에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또한 본가에 있던 집무실에서 모든 짐을 옮겨뒀기에 유리가 손 쓸 일은 없었다.
집무실 가운데에는 회의용 원탁이 놓였다. 이제부터 이 자리에서 멸망에 관한 내용을 주고받으며 대책을 세울 예정이었다.
광장을 비롯해 영지가 내려다보이는 창문에 서있던 유리는 찬찬히 방을 둘러보곤 원탁에 앉았다.
카이와 해링의 자리만 빼고 딱 맞춰진 의자에 모두가 앉았다.
“이자벨도 코어가 많이 커졌네.”
“이게 다 유리 덕분이다. 이젠 청염(靑炎)까지 다룰 수 있으니까.”
“진짜? 청염까지 이르렀다고?”
솔리드녹스의 마법사들은 화(火)계 마법에 특화되어서 다른 어떤 원소보다 잘 다루었다.
이런 화계 마법을 홍염, 백염, 청염으로 나뉘었는데, 일전에 이자벨은 백염에 머물러 있었다.
불의 영혼을 계승받았다 하더라도, 청염으로 반등하기 위해선 그만한 코어나 마법 이해도가 요구되었다.
이자벨은 그런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이자벨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갑자기 물방울이 모여들더니 작은 인어가 나타났다.
심지어 인어는 살아서 움직였다.
“물의 정령과 만났구나.”
유리가 이자벨에게 줬던 숙제는 물의 정령이 사는 대륙 북부에 있는 툰드라 지대였다.
불의 영혼을 계승하고 화계 마법에 탁월한 그녀에게 유일한 약점은 당연히 수(水)계 마법이었다.
물론, 마법 자체를 잘 다루는 솔리드녹스 출신이라 수계 마법을 익히는 건 문제가 안 됐지만.
악마와 상대를 하게 되면 어쨌든 취약점을 없애야만 했다.
그래서 물의 정령과 계약시키기 위해서 그녀를 물의 정령이 있는 툰드라 지대로 보냈다.
문제는 정령 친화력이 없는 이자벨이 어떻게 정령과 계약하느냐의 문제였는데.
‘할머님이 줬던 드래곤의 알이 힌트였지.’
친화력과 별개로 정령과 만나는 방법은, 솔리드녹스에서 불의 정령왕 라군도를 만났던 것처럼 드래곤의 알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채럿의 정보망에 따르면 드래곤의 알이라 불리는 미지의 알이 여럿 있었고.
그 중 물의 정령과 관련됐을 거라 추측되는 알을 찾아서 이자벨에게 숙제와 함께 건네줬다.
툰드라 지대에 관한 정보는 설정집에서 찾아낸 것이라 명확하게 일러줄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툰드라에서 혹한을 견디면서 불의 영혼을 강화할 수도 있었기에 이자벨도 군말 없이 북부를 다녀왔다.
“안 될 줄 알았는데, 해냈구나.”
“나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물의 정령왕께서 의외로 내게 관심이 있기도 하셨고.”
“물의 정령왕이?”
“불의 영혼 계승자와 계약하면 재미있을 거 같다고 하더군. 아직 중급 정령까지 다루진 못하지만…….”
“그래도 솔리드녹스 출신에 물의 정령과 계약한 건 네가 최초일 걸.”
“그렇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
“이제 물의 정령이랑 계약했으니 절대영도 아티팩트는 필요없겠네?”
물과 불이 상극 같아도, 반대로 서로를 보완해줄 수 있는 힘이기도 했다.
특히나 불의 영혼으로 인해 죽어가던 이자벨에겐 물의 정령만큼이나 좋은 치료제가 없었다.
이자벨은 머리에 묶은 아티팩트를 만지작 거렸다.
“필요하다.”
“필요하다고?”
“응, 필요해.”
“왜…….”
“이유는 묻지 말고.”
“뭐어, 그래.”
갑자기 어색해지는 기류에 더 묻지 않았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 듯했다.
유리도 그 사정이 뭔지 알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고민해봤자 근심만 늘어나는 법.
[꼬맹이 인기 좋네.]‘하나만 해. 인기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진정한 골수 팬이 두 명이라도 있으면 인기 있는 거지.]‘어째서 두 명이야?’
[한 명은 이 언니지!] [어머. 나도 있어요, 티르빙 양.] [그럼 세 명이네.]유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물의 정령을 구경했다.
테이블 위에서 헤엄치듯 자유로이 돌아다니던 정령은 이자벨의 붉은 머리카락 위에 앉았다.
‘이로서 퍼즐이 얼추 맞춰졌다.’
착착 계획대로 진행되어 가자 조금이나마 안도감이 들었다. 이제 원작 주인공인 카이만 본래 힘을 되찾으면 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건 겨우 시작에 불과했으니.
“자, 그럼 멸망을 막을 계획을 세워보자고.”
유리는 그 시작점 앞에 서서 모두를 향해 말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