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74
제174화
채럿이 아버지인 다이올드와 등을 지고 산지는 오래되었다.
다이올드도 채럿이 유리와 가까이 지내고 있는 걸 알면서도 그녀를 놔뒀다.
아니, ‘놔뒀다’라기보다.
버리고 방치했다.
그것도 꽤 오래 전부터.
하지만 이는 채럿의 선택이었다.
“채럿은 과감히 백부님으로부터 멀어졌습니다. 형님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요.”
“그 애는 그냥 비겁자일 뿐이야! 도망친 거라고!”
“도망칠 용기조차 없는 형님들보단 훨씬 낫습니다.”
“이게 말도 안 되는 궤변을……!”
“궤변이라고요? 제몬 형님만 모르시는 겁니까. 아니면 모른 척 하시는 겁니까. 백부님이 형님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샤를린느를 기습했을 때부터, 아니면 유리가 모르는 훨씬 옛날부터 다이올드는 자식들을 이용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부지기수로 모진 말을 들었을 테고, 몹쓸 짓도 수도 없이 당했을 터.
채럿도 그렇게 백부에게 당했었으니까.
“가짜 마검 때 어땠습니까. 백부님이 마검을 주면서 위험성을 경고하던가요? 위험하니까 다른 방법을 먼저 강구하라고 하던가요? 애초에 살아 돌아오라곤 하셨나요?”
“아버지는, 가주가 되기, 위해서! 컥!”
꾸욱, 유리는 손에 더 힘을 줬다. 쥐어진 멱살이 단단하게 조여진다.
숨이 막히면서 얼른 놓으라고 유리의 손목을 쳐보지만, 힘만으로 이겨낼 순 없었다.
그러나 더 할 말도 없었으니.
유리는 힘을 풀어 그를 놔줬다.
“그만하죠. 지금은 이럴 시간도 아깝네요.”
“켁! 켁!”
제몬은 목을 부여잡고 바닥에 엎드려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그런 그를 무시하며 유리가 블레이크로 눈길을 돌렸다.
“블레이크 경, 형님들을 모시고 부상자들을 추리도록. 목적을 달성했으니 내일 아침 바로 떠난다.”
“알겠습니다.”
블레이크를 비롯한 기사들이 무거운 마음으로 상황 수습을 시작했다.
그 사이 유리는 멍하니 서 있는 채럿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무너져 내린 타나토에게서 좀처럼 시선을 떨어뜨리지 못했다.
“채럿.”
“오라……버니.”
“채럿, 괜찮아. 치명상을 피했으니까 죽지는 않을 거야. 릴림이라도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의무병들도 실력이 좋으니까 괜찮아.”
“…….”
“채럿.”
“…….”
“채럿!”
“아.”
한 번 흔들려버린 정신이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을 흔들고 나서야 먼 곳을 보던 눈동자가 유리에게 돌아왔다.
“전, 전 어떡해야죠.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렇겠지.
아무리 다이올드와 오빠들로부터 등을 졌다고 해도 가족은 가족이다.
그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였기에 타나토의 치명상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겠지.
아무리 살 수 있다고 말해도 귀에 들리는 남의 말보다 직접 눈으로 본 끔찍한 광경을 더 믿으리라.
“채럿, 형님들은 어쩔 수 없어. 우리가 뭐라 해도 계속 이런 식으로 싸우려 들 거야. 타나토 형님도 이렇게 당하고도 변하지 않겠지.”
“알아요. 그치만……. 하지만 오라버니들은 매번 아버지가 시키는대로만 한다고요. 이렇게 자꾸만 싸우는 건, 옳지 않잖아요. 그렇잖아요? 네?”
“그러니까 네가 더 정신 차려야 해.”
유리는 힘주어 말했다.
“채럿, 넌 내가 왜 가주가 되길 바라는 거지?”
견족의 기습이 있기 직전에 채럿과 대화를 나누면서 잠깐 다이올드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도 그랬지만.
채럿은 원체 백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불편했던 기색이 역력해졌다.
아직 아버지 다이올드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완전히 미련을 버렸다면 불편해할 이유가 조금도 없었으니까.
지금까진 그런 감정을 묵혀두고 지내왔다지만, 이젠 정리해야만 했다.
“말해줘, 채럿. 네가 나를 가주로 지지하는 건 단순히 옛날의 은혜와 고마움 때문이야?”
“그건 당연한…….”
“백부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어?”
“……!!!”
온실 속 화초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았지만, 채럿도 엄연히 용인이다.
보고 배우며 자란 게 있으며, 투쟁의 본능을 깨달으면서 자라왔다.
그 안엔 복수심도 분명 있었다.
‘채럿에겐 다른 일행들처럼 실력적인 성장은 필요 없었어. 그보다는 심정적인 성장이 요원했지.’
채럿에게 멸망이라는 동기는 중요치 않았다.
너무 먼 미래이기도 하고, 아직 주변에 다이올드와 오빠들이 남아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를 완벽히 해소하지 않는 이상. 그리고 채럿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지 않는 이상.
이 상황은 끝없이 이어질 터.
“네가 날 선택해가면서까지 백부님과 멀어진 이유를 잘 생각해봐. ……이자벨.”
“아, 응!”
여지를 남긴 유리는 이자벨에게 채럿을 맡긴 채 돌아섰다.
아쉽게도 누굴 위로하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견족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고, 다이올드가 다른 계획을 세워놨을 수도 있다.
얼른 전후 상황을 수습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했다.
* * *
그날 밤.
견족이 쳐들어온 직후라 야생 지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흘러갔다.
물론, 양동작전의 일환으로 딱히 큰 사상자가 발생한 전투는 아니었지만.
용가가 야생 지대에 들어온 직후에 일어난 충돌이라 수인들 사이에서 뒤숭숭한 말들이 오갔다.
유리도 이에 대한 책임 때문에 크로무슈와 마주해야만 했으니.
작은 나무 아래, 등불 하나만 놓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크로무슈는 옆에 놓인 병들을 가리키며 물었다.
“차? 술?”
“괜찮습니다.”
“긴장한 듯하네요.”
“본의 아니게 묘족에게 폐를 끼쳤으니까요.”
“흐응.”
비음을 내던 크로무슈는 고양이에서 인간으로 모습을 바꿨다. 그리곤 바닥에 깔아놓은 음식들 중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손으로 집었다.
한 입 먹기 전, 그녀가 말했다.
“우리 묘족은 당신과 용가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 거예요.”
뜻밖의 이야기에 유리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솔직히 어떻게 보상하고 책임져야 할까 고민하던 유리로선 낯부끄러워지는 순간이었다.
그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건 저를 기다리고 있던 신수님과 관련이 있는 겁니까?”
“제가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당신을요?”
“미다스에게 안내해줄 때 분명 말씀 했었죠. 미다스가 기다리고 있다고요.”
기다리는 건 미다스였지만, 그런 미다스가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안내를 한 장본인은 크로무슈였다.
그녀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 아니고선 나올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의문스럽긴 했으나, 당시엔 그걸 따질 이유나 적의를 느끼지 못했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맞아요. 당신을 기다리고 있었죠.”
“할아버지가 부탁한 건가요?”
“어머, 그거까지 바로 알아차리다니. 기껏 비밀로 한 게 의미가 없군요.”
크로무슈가 그제야 입 속 가득 고기를 베어 물었다.
이번 작전에 많은 이권이 개입되면서 누가 어떤 목표와 목적을 지녔는지 복잡해졌다.
다이올드는 미다스와 타나토를 죽일 계획을 세웠고, 벤헬링턴도 다른 방면으로 시나리오를 짠 듯했다.
다만, 벤헬링턴의 목적이 불분명했다.
그가 과연 다이올드의 계획을 모두 알고서 새 시나리오를 짰을까.
알고 짰다면 무얼 위해서였을까.
그 답을 크로무슈가 하나씩 설명해줬다.
“나야 나이트워커의 내부 사정을 모른다지만, 벤헬링턴 말로는 장로들이 어느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가주 후보 싸움이 전혀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차라리 제가 돕길 바란다며 미다스와 함께 서신을 보냈었습니다.”
서신에는 미다스를 돕고, 가문의 직계가 찾아오면 묘족의 방식에 맞게 맞아주라고 했단다.
그래서 크로무슈와 충돌이 불가피했었고, 유리의 승리로 끝났다.
‘백부님이 빅핸드와 손을 썼다는 걸 알고 균형을 잡으시려 한 걸까.’
이번 작전의 진정한 목표는 미다스가 아니라.
작전 결과에 따라 졸업 시험을 결정하고 차기 가주 싸움 구도를 판가름 짓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시험이라는 관점에서 이번 작전은 유리에게 불리했다.
실질적으로 다이올드가 짜놓은 판에 휘말리는 꼴이니까.
‘결국 크로무슈 님이 원작과 달리 여기로 온 건 할아버지 때문이었다는 거네.’
드디어 흩어져 있던 의문점들이 자리를 찾아갔다.
납득한 유리는 고개를 야트막하게 끄덕이다가 크로무슈를 향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신수님께 많은 폐를 끼쳤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부탁 받아서 한 건데, 왜 당신이 죄송해 하나요? 그런다고 해서 당신께 죄를 묻진 않을 거랍니다. 어림없어요.”
“그러니까 더 죄송하죠.”
유리는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어찌됐든 자신들의 방문으로 인해 야생 지대에 다시 한 번 피 냄새가 풍겼다.
견족이 쳐들어왔고, 묘족은 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 마당에 유리는 빠르게 떠나야만 했다.
어지간해서 같이 남아서 견족과 싸우고 가고 싶었다.
그러나 묘족 내에서 용가에 대한 신뢰가 깨졌다.
견족이 쳐들어오면서 용가가 배신했다고 여겼고, 타나토가 미리 양동작전을 견족과 펼쳤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이 악화됐다.
그러나 크로무슈는 아무렇지 않은 듯 유리를 대했다.
“익숙한 일이에요, 유리 덴 나이트워커. 이곳에 살면 싸우지 않고서 살 수 없죠. 이겨야만 살 수 있거든요. 그리고 내가 유리 당신을 도운 건 개인적인 이유가 따로 있어서예요.”
“할아버지 때문이 아니라는 겁니까?”
“후후, 궁금한가요? 비밀로 해주면 말해줄 수 있는데. 어때요?”
보통 비밀이라 하면 듣고 싶어지고, 들으면 괜한 걸 알게 되어서 후회하곤 한다.
그러나 유리는 굳이 참지 않았다.
“알려주십시오.”
“그럼…….”
크로무슈의 입술이 순간적으로 귓가에 다가왔다. 조그마한 틈 사이로 작은 목소리가 나왔다.
처음엔 감흥없이 듣고 있던 낯빛이 시간이 흐를수록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잠시 후, 그녀가 멀어지고 유리가 믿을 수 없다며 되물었다.
“……진짜입니까?”
“못 믿겠어요?”
“아뇨. 신수님께서 그렇다고 하는데 제가 무슨…….”
당황스러워서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그렇다고 안 믿을 수도 없고. 안 믿을 이유도 없었다.
아무튼 사연을 알고 나니 더더욱 묘족을 그냥 두고 떠나기가 미안해졌다.
“신수님, 무너진 산 아래 미다스가 남긴 보물이 있을 겁니다.”
“흐음? 그래요?”
“원래는 제가 나중에 가져가려 했지만 그냥 남겨두겠습니다. 아마 땅을 개간하고 미다스 없이 필요한 물건을 사기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제가 떠나거든 대륙 남부에 있는 딥 커버라는 곳을 찾아가보십시오.”
“거긴 왜요?”
“그곳에 산군(山君)이라는 묘족이 살고 있거든요.”
“네?”
뜻밖의 정보만 던져주고 유리를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산군(山君)은 같은 고양이과 중에서 유일한 호랑이의 피를 이어받은 신수로.
워낙 강력해서 많은 신수와 수인들의 표적이 되어 멸종됐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원작에선 유일하게 살아남은 부류가 있다.
원작대로라면 나중에 카이가 구하러 가겠다만.
‘묘족이 먼저 구한다고 해서 나쁠 건 없지.’
같은 묘족이니 친해지기까진 쉬울 거다. 그렇게 해서 산군이 묘족에 합류하면 앞으로 야생 지대의 판세가 완전히 바뀌리라.
이번 일을 인연으로 삼는다면 멸망을 막는 데 도움을 받을지도 모른다.
안 그래도 미래에 신수들은 멸망에 동조해주지 않아 골치였으니 말이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유리는 마지막 인사를 올리고 돌아섰다.
그러면서 그녀가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이없으면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그러나 그 어떤 사연보다도 강력한 이유가 되는 한 마디였다.
“제가 블레이머 님을 사모했었답니다.”
아무래도 아버지는 어머니 말고도 사랑을 많이 받았던 모양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