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198
제198화
아무도 그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분명 그곳에 있지만 보이지 않으며, 느껴지지만 알 수가 없었다.
“가련한 아이들아. 너희 모두 새로운 마신의 이름 앞에 한낱 필멸자이거늘.”
데카라비아(Decarabia)는 그리 말하며 거대한 외눈을 반쯤 내리깔았다가 번뜩 떴다.
마름모처럼 생긴 눈동자에서 붉은 빛줄기가 쏘아졌다.
콰콰콰! 쿠웅!
빛줄기는 그대로 성채 한 구석을 강타했다.
성벽 위는 물론이고, 아래에 있던 땅까지 전부 날아갔다. 심지어 폭발로 인해 잠시 진공의 공간이 벌어졌다.
“무슨!”
[빅 톤트! 피해라!]빛줄기는 그대로 빅 톤트의 등껍질로 향했다.
비량이 급히 몸을 던져 피하게끔 유도하자 아슬아슬하게 빛줄기가 머리 위로 지나갔다.
콰콰콰콰!
보다 큰 충격파에 작은 인어들이 쉽사리 쓸려나갔다.
그렇게 빛이 지나가고.
비량이 빅 톤트를 살폈다.
[괜찮…… 아!]“크악!”
피한다고 피했으나, 철갑 같던 등껍질 윗부분이 없어져 있었다.
부서진 틈으로 검붉은 피가 왈칵 솟구쳤다. 옆으로 쓰러진 빅 톤트는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비량이 손톱으로 있는 힘껏 베어도 부서지지 않던 그 등껍질이었거늘.
[빅 톤트! 일어나라! 이러고 있을 시간이……!]“빌어먹을! 나라고 눕고 싶은 줄 아느냐! 몸이, 자꾸만……! 끄악!”
그제야 단순한 공격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마기(魔氣).
타락의 힘이 빅 톤트의 등껍질과 살을 없애버리다 못해 썩히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빅 톤트도 타락할 터.
순간 두려움이 밀려온 비량은 말을 더듬었다.
[비, 빅 톤트! 이런, 어떻게…… 어찌하면……!]물을 다스리며 사는 물의 정령왕이 오지 않는 이상 마기를 이겨낼 순 없었다.
물의 정령왕이 있더라도 가능할까.
모르겠다. 이젠 그런 판단조차 서지 않는다.
하물며 오랜 적수가 이리 쉽게 당했는데.
“가련한 것들아.”
빛줄기를 쏜 주인이 서서히 다가왔다.
그것은 거대한 마름모꼴의 유리였다. 빅 톤트보다 컸으며, 어마어마한 높이는 수면을 뚫고 나갔다.
유리 가운데엔 빅 톤트와 비슷한 덩치의 눈동자가 그들을 내려다봤다.
[데카라비아(Decarabia)!]다른 이름으로 ‘바라보는 불가사리’라 불리는 악마였다.
빅 톤트에겐 톤트들을 타락시킨 주범이었고, 비량에겐 용왕을 타락시킨 원수였다.
기껏해야 악마들 사이에선 69위 밖에 해당되지 않았으니. 비량과 빅 톤트조차 당해낼 수 없는 위력을 가졌다.
비량은 다시 본 악마의 몰골에 발악성을 질렀다.
[대체 왜! 어째서 우릴 공격하는 거냐!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 용왕님의 희생으로도 모자랐던 거냐!]“약속? 그런 걸 했던가?”
[용왕님만 타락하고, 톤트들을 지나게 해주면 건들지 않겠다고 했잖아!]“아아, 그랬었지. ……그랬었나?”
드드드드드.
거대한 유리는 점점 끝이 갈라졌고, 이윽고 오망성의 형태를 갖췄다.
이명 ‘바라보는 불가사리’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절망의 태동이기도 했으니.
[전군! 퇴각하라! 성을 버려!]“예?”
“비, 비량님?”
[얼른―]“늦었어.”
불가사리가 넘어지고 있었다.
뒤늦게 병사들이 도망쳐 보지만, 그 크기를 감당하기란 어려웠다.
그나마 속도가 느렸으나, 다가오는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눈동자가 하늘을 덮는다. 그 순간, 인어들에겐 눈이 아니라 포식자의 입과 같았다.
“너희들 중 누군가가 용왕의 타락을 풀었다. 약속을 먼저 어긴 건 너희 쪽이니, 나로선 너희들을 먹어치우는 수밖에.”
[타락을, 풀어?]누가? 어떻게? 대체……!
온갖 의문이 빠르게 머리속을 헤집었다.
그러다 아까까지 같이 있던 인간이 없다는 걸 알았다.
혹시 그 자가?
하지만 이제 와서 그딴 건 중요하지 않았다.
용왕의 타락이 풀렸다고 해서 저 악마를 막아낼 순 없었다. 이미 한 번 당했었던 인어국과 용왕이었다.
같은 재앙만이 반복되리라.
‘내가 용이 되었다면.’
죽음이 다가오자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용왕님을 지킬 용이 되었다면 악마를 막을 수 있었을까.’
용과 드래곤과의 차이점이라면, 용은 여의주의 주인을 섬기며 그들을 보호하는 사명을 갖고 살았다.
바다에 사는 이무기들에겐 용왕과 그 왕족이 곧 주인이었다.
이무기는 왕족의 선택을 받아 그들을 지켰고, 왕족은 여의주를 빚어 이무기에게 주고 시험을 치른다.
하지만 그 시험을 통과한 이무기는 비량이 살아온 세월 동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드래곤의 멸종과 더불어 마치 용도 멸종했듯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용이 될 수 없다고 여긴 이무기들은 스스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비량만이 용왕의 곁에 남아 그녀를 지켰다.
“비량. 난 언젠가 왕이 되어서 인어국을 위대하게 이끌어 갈거야!”
“그땐 비량도 같이야!”
[저도요?]“응! 비량이 나를 지켜줘야지! 누가 날 지켜주겠어?”
[그치만 전…… 이무기는 더 이상 용이 될 수 없습니다. 힘이 없어서…….]“비량만 있으면 돼!”
[…….]“비량만 있으면 되니까! 약속!”
왕족인 공주와 이무기는 그렇게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공주는 왕이 되었다. 비량은 그녀의 곁을 지키는 호위가 되었다.
행복한 삶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이무기에게 의미를 주었으니까.
[소녀 비량. 아무래도 약속을 다하지 못할 거 같습니다.]“지랄.”
갑자기 어디선가 욕이 날아들었다.
어느 틈에 그녀의 커다란 머리 옆에 인간 하나가 서 있었다.
그의 머리엔 용왕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공기 주머니가 쓰여 있었다.
아까 빅 톤트와 같이 있던 남자였다.
[네가 욕을 한 건가?]“난 아니고.”
“난데?”
남자의 목덜미 뒤로 작은 소인이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키득키득 웃었다.
본 적은 없지만 비량은 소인이 악마인 걸 알아봤다.
[너도 악마와 결탁한 건가!]“결탁한 건 맞지만, 그렇게 화낼 만한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네놈 때문에…… 어?]유리는 그녀가 큰 소리 치기 직전에 손에 들려있던 구슬 하나를 내보였다.
속에 은하가 들어찬 듯한 구슬은 보기만 해도 빨아들일 것만 같았다.
형형색색의 별들이 회전하고, 중심엔 공허가 소용돌이 쳤다.
[여, 여의주! 네가 그걸 어떻게!]“용왕이 타락에서 풀려났다고 해서 가져 왔다.”
[용왕님이, 여의주를? 아니, 그보다 그걸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당연히 너한테 주려고.”
[뭐?]유리가 피식 웃었다.
“용왕 말로는 아직 설익은 여의주라 하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급하지 않겠어?”
설익은 여의주라 해도 여의주는 여의주다. 용이 될 자격만 주어진다면 여의주는 이무기를 받아들여 용으로 만들어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걸 받아도…….]“원래는 내가 받으려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내가 받아서 내가 용이 되려고 했지만, 용왕님께서 네가 아니면 절대 내주지 않겠다고 하시더군.”
유리는 그리 말하며 비량 쪽으로 여의주를 던졌다.
비량의 덩치에 비하면 한참 작은 구슬이었으나, 비량은 능숙하게 손톱 끝으로 구슬을 집었다.
몸에 닿자 바로 반응이 왔다.
거부감.
여의주가 그녀를 밀어내고 있다.
[내가 이걸 가져도…….]“해야 한다. 안 하면 여기 다 죽어……라는 말은 별로 의미 없겠지.”
유리는 머리 위로 무너지는 악마를 노려봤다.
데카라비아.
하위 악마이지만, 악마 사회에선 나름 귀족자리도 꿰찬 놈이다.
또한 바다에선 저 놈만큼 성가신 녀석이 없다. 어지간한 함대조차 저 덩치로 단번에 부숴버리니까.
“그거 아나. 내가 아는 누군가는 한 나라에 충성을 다하며 살았다. 충직해서 바보 같았던 자였지.”
유리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비량 또한 그 말을 잠자코 들었다. 시선은 여의주에 고정한 채.
“그러나 나라는 그 자를 팔아넘기려 했고, 그 자는 나라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범죄까지 일삼았다. 물론, 거짓된 범죄였지.”
[……어리석은 자군.]“어리석을 만큼 충직했던 사람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고 싶어 하지 않는 생명체가 어디 있겠어.”
[그 자는 어떻게 됐지?]“지금은 나를 지키고 있다.”
[싱겁군.]“그러나 그 자의 신념마저 무너지진 않았다. 그 자가 검을 들었던 건 누군가를 가려가며 지키려고 했던 게 아니니까.”
기사의 검은 곧 방패다.
지키고자, 살리고자 검을 든다. 가끔은 남을 죽이기도 하며 고뇌에 빠지겠지만, 옳은 것이라 믿으며 더 좋은 옳음을 향해 나아간다.
그래도.
가끔 씩 블레이크는 후회하고 있단다.
자기가 더 대단했으면, 더 강했으면 나라를 지켰을지도 모른다면서.
“강해질 기회다, 이무기. 네 신념대로 여의주를 믿어봐라.”
이무기 비량에게 지키고 싶은 건 나라나 백성, 부하들이 아니었다.
자신의 주군을 지키고 싶었다.
그리고 그 주군이 지키고 싶어 하는 걸 같이 지키고 싶었다.
어렸던 공주가 왕이 되기까지, 같은 삶을 살아오며 그 아름다웠던 이상들은 곧 이무기의 검과 방패가 되어줬다.
[믿는다.]마침내 비량은 여의주를 입 속에 넣고 삼켰다.
그리고 갑자기 까무룩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유리는 티르빙을 뽑았다.
“얼마나 걸릴까요.”
“낸들 아니. 여의주를 물어본 적이 있어야지.”
리리스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여의주의 시험에 들어갔으니 당분간 무너지는 불가사리를 단독으로 막아야만 했다.
근데, 가능할까.
[안 돼.] [안 돼요.]“너희 둘은 매번 안 된다고만 하냐. 진짜 성검이랑 똑같다니까.”
“누구랑 대화…… 아하. 영혼에 마검이 붙어있었지. 별빛나무도 있던가? 뭐래? 둘이 안 된대?”
“네, 죽을 거라고 하는군요.”
유리로서도 아직 악마와 상대하기에 역부족이라는 건 안다.
충분한 조건을 갖추지 못했다. 적어도 아스칼론을 무기로 만들어왔다면 좋았으련만.
미다스 건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아서 검을 벼를 형편이 아니었다.
무형검, 수계(水界).
현재까지 최대로 만들 수 있는 무형검 수계는 2자루. 혈계로 만들고 싶었으나, 물의 저항력을 이겨내려면 수계가 필수였다.
리리스는 입맛을 다셨다.
“마검의 군주. 내가 도와줄까?”
“모습을 드러내면 안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네 계획을 보니 넌 데카라비아를 죽일 거잖아. 어차피 죽을 놈, 내 모습 쯤 보인다 해도 상관없겠지.”
“……데카라비아를 쫓아내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확신은 없어요.”
“그래도 괜찮아.”
리리스가 허공에 버튼을 누르듯 손가락을 댔다.
그러자 타락했던 톤트들 중 일부의 정신이 돌아왔다.
“으워? 정신, 돌아왔다.”
“아프다.”
“모르겠다. 우리.”
정신이 돌아온 톤트들은 제 눈앞에 쓰러진 빅 톤트를 발견하고 얼른 그에게 달라붙었다.
“보스. 빅. 여기 왜?”
“이, 이 놈들! 정신이 드는 것이냐!”
“모른다.”
“우리, 정신, 잃었다?”
유리가 해명을 바라며 리리스를 돌아봤다. 그녀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장난질을 해놨지. 이게 다 너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라면, 믿을까?”
“일단, 감사합니다.”
톤트들이 정신을 차리면서 그들도 곧장 위험 요소를 파악했다.
빅 톤트는 유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세드리치의 아들! 네놈이라면 방법이 있겠지?”
“방법이라 할 건 없다. 비량이 용이 되어서 돌아오는 걸 기대하는 수밖에.”
“칫, 살다살다 이무기한테 신세를 지는군. 좋아, 그럼 우리들이 시간을 끌지!”
“도망가지 않고?”
“도망간다고 해서 살 수 있겠더냐?! 이판사판이다!”
말 그대로 여기서 도망칠 수 없었다. 그러기엔 유리벽이 터무니 없이 거대했다.
빅 톤트는 정신을 차린 톤트들을 향해 소리쳤다.
“거북이들 들어라! 최후의 갑주를 준비한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