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4
제204화
다시 며칠이 지났다.
용왕은 여전히 망설였다. 과연 물의 정령왕을 부르면 대답이라도 해줄지 고민이 많아 보였다.
비량과도 몇 번씩이나 대화를 나눠본 끝에, 마침내 유리를 다시 불러들였다.
“만나게 해줄게요.”
“감사합니다.”
“단, 조건을 바꿀게요.”
“어떻게 바꾸길 원하십니까?”
용왕은 옆에 있던 인간의 모습인 비량의 눈치를 살폈다. 비량이 한숨을 내쉬며 대신 말했다.
“용가와 인어국의 동맹, 인어국과 톤트족의 평화 협정, 이 두 가지 사안에 대해서 물의 정령왕과 화해를 주선한다면 들어주겠다.”
[뭐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니?]티르빙이 툴툴대며 불평했다.
아스칼론은 말이 없었고, 리리스는 관심 없는 듯 주머니 속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유리도 할 말을 잃긴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이건 좀…… 유치한 걸.’
이렇게까지 협조해줬는데 이런 식으로 나온다는 건 아무래도 불쾌했다.
용왕도 그걸 아는 건지. 아까부터 계속 좌불안석 곤란해 했다.
“거절, 하실 건가요?”
“거절하면요?”
“앗! 그으…….”
물론, 따지고 보면 유리에겐 세 가지 사안 중 어느 것이 우선시 되든 간에 전부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걸 모를 리가 없는 용왕. 하물며 동맹과 평화 협정은 악마와도 직결되는 문제라 그녀로서도 거절할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물의 정령왕과의 화해를 우선시 하다니.
분위기를 무겁게 잡았던 유리는 마지 못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물의 정령왕과 화해를 주선해드리죠.”
“진짜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다소 유치한 제안이라 솔직히 마음에 안 들긴 하지만.”
“으윽…….”
유치한 줄 알긴 아나 보네. 유리는 모른 척 하던 말을 이었다.
“안 들긴 하지만, 어쨌든 제 입장에선 3가지 다 필요하니까요.”
“송구스럽네요.”
“대신 저도 한 가지 조건을 더 걸겠습니다.”
“네, 말씀해보세요.”
“물의 정령왕과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그건…….”
또 비량의 눈치를 살살 살피는 용왕. 이번엔 비량이 알아서 말하라며 눈치를 되받아쳤다.
저쪽에서 먼저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갑작스레 조건을 바꿨으니.
유리 입장에서도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들을 자격이 되었다.
입술을 우물쭈물 꿈틀대던 용왕은 얼굴까지 붉혀가며 간신히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놨다.
“고백했다가 차였어요.”
* * *
예상에 예상을 뛰어넘는 대답을 듣고 나온 유리는 잠시 용왕의 방을 돌아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제가 고백했었거든요. 근데 거절당해서…….”
“그게 싸운 이유입니까?”
“아, 아니! 들어봐요! 거절하면 거절하는 거지! 나, 나보고 멍청하다면서 싫다 하잖아요! 내가 그거 때문에 왕이 되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내가 누구 때문에 용왕이 된 줄 알고!”
마지막으로 결국 울먹이기 직전까지 갔던 용왕의 눈물 겨운 사연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마침 유리를 배웅하러 뒤늦게 따라온 비량도 침통한 얼굴이었다.
“미안하다.”
“비량 님께선 알고 계셨습니까?”
“……싸우던 날에 옆에 같이 있었지.”
“볼만 했겠네요.”
“창피하기만 하다. 아직 용왕님이 세상 물정 모르시고 어리신 것도 있지만, 참.”
“실례지만 용왕님의 연세가……?”
“올해로 51세다.”
“51세가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야 됩니까?”
“사연을 듣고도 그런 질문이 나오는 건가.”
“아, 그러네요.”
겉으로 봐선 겨우 20대 티를 입은 거 같았거늘. 역시 겉모습만 보고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
속마음도 포함해서.
어쨌든.
“여러모로 미안하다. 용왕님께서 어떻게든 물의 정령왕님과 화해를 하고 싶어 하셔서 저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물의 정령왕님과는 잘 안 되어도 동맹과 평화 협정은 반드시 성사되도록 할 테니까 염려치 말라.”
“용께서 그리 말씀해주시니 믿겠습니다.”
“그나저나 이제 어쩔 건가? 전에 들어보니 물의 정령왕님을 통해 한 사람을 살리려고 하는 거 같던데.”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중에 만나 뵙고 돌아오면 알려드리죠.”
“그래, 그렇다면야.”
이로서 사연도 대충 알게 되었으니, 이제 떠나기만 하면 됐다.
그 전에.
잠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아주 잠깐, 유리는 톤트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가까운 육지로 올라갔다.
톤트들의 수영 솜씨야 바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종족이라 목적지까지는 금방 다다랐다.
“잠시 기다려주세요.”
“기다린다. 친구. 인간, 유리, 우리 친구다.”
“우오! 친구!”
“기다린다! 다녀와라!”
같이 동행한 톤트만 해도 5마리. 그들은 바다 위로 머리만 내민 채 떠들다가 조용히 잠수했다.
유리는 해안가를 벗어나 내륙 방향으로 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진 촌락 하나가 나타났다.
해안가 특유의 기둥 다리가 높은 곳에 지어진 건물들은 곳곳이 부서지고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그곳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게슐츠 단장님.”
“왔구나, 유리.”
데카라비아가 죽은 뒤, 유리는 곧장 라지닉소스에 연락을 넣었다.
악마와 관련된 정보를 얻었다고.
그렇게 되어서 오늘 날을 맞춰 만났고, 마침 게슐츠가 자리에 나온 것이다.
‘티르빙, 주변에 아무도 없겠지?’
[느껴지는 마나는 없어. 함정도 없고.] [수상하네요. 저 사람한테서 알게 모르게 불안한 기운이 느껴지는데요.]아스칼론의 조언대로 게슐츠는 어딘가 불안정했다.
아니, 어쩌면 그 불안정감은 라지닉소스에서 만날 때부터였을지도.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게슐츠가 내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속대로 악마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왔어요.”
“허어, 진짜로? 그거 놀랍군.”
“그 전에, 암흑 눈물 정보에 관한 출처부터 넘겨주세요.”
“그건 곤란해. 우리들로선 악마에 관한 정보의 진위 여부부터 파악해야 하거든.”
“그런가요.”
물 흐르듯 이어가는 대화 속에서 이해할 수 없는 긴장감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기세였다. 그러나 검을 겨누는 상대는 서로가 아니었다.
이곳에서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지만 버려진 촌락이 주는 분위기와 더불어서 공기의 흐름이 팽팽해졌다.
“그럼 그냥 악마에 관한 정보를 드리죠.”
“오! 그래주겠어?”
“그 전에 저한테 말씀하셨던 ‘오해’에 관해서 들어야겠어요.”
라지닉소스에서 깨어난 유리가 게슐츠와 재회하면서 그는 분명 말했었다.
“일단 오해는 하지 말아라. 오래 전부터 널 지켜봤다느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
“나도 윗선들한테서 언뜻 들었지만 어디선가 신의 존재를 입증할 정보를 얻은 모양이더라.”
“문제는 그 정보를 제공한 자가 카이였었어. 카이는 자신이 원하는 정보를 주지 않으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정보를 주지 않겠다고 하더군.”
“……내가 이래서 오해를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지금 생각해보면 이상한 대화였다. 게슐츠가 라지닉소스의 앞잡이이라는 오해는 충분히 받을 법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순간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었다.
“제가 왜 오래 전부터 단장님이 절 바라봤을 거라 생각하신 거죠? 제가 뭐라고요?”
“그야 넌 용가의 서자니까…….”
“라지닉소스가 용가의 서자를 주목하는 이유가 있던가요? 아니면…… 누가 그런 지시를 하던가요?”
“유리, 말했다시피 그건 오해다. 난 그런 적이 없어.”
“그런데 어째서 단장님 입에서 먼저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거죠.”
“…….”
그는 뭘 오해하지 않길 바랐던 걸까.
반대로 어떤 이야기에서, 어떤 사연에서 오해하기 쉬웠을까.
딱히 오해할 법한 이야기들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게슐츠가 뱉은 모든 말들은…… 거짓말이 아니었을까?
“호위대 일은 할만 하신가요?”
“갑자기 무슨 말이냐.”
“저희 오랜만에 만났는데 제대로 대화도 못해본 거 같아서요. 아, 참. 저 이제 술 마실 나이 됐습니다. 단장님께서 장난으로 자고 있는 동안 입에 술을 넣어서 문제 되지 않죠.”
“……그 나이란 기준은 네가 멋대로 만들었으면서.”
“그보다 어때요? 라지닉소스에서 하는 일? 심심하죠?”
“……!”
순간 게슐츠의 손이 움찔 떨었다. 검을 쥐려고 언제든 준비하던 손이었다.
그럴 수밖에.
심심하다.
이건 게슐츠의 용병단에서 용병들이 늘 사용하던 반어법이었다.
일이 고되어도 심심하고. 아무런 의뢰가 없어서 빈곤해도 심심하고. 음식이 맛없어도 심심하고.
무엇보다 게슐츠에게 심심하다는 건, 위험할 때 나오는 입버릇이었으니.
‘전부 거짓말이었어.’
눈치 챈 건 오래 전부터 라지닉소스와 일했다고 했을 때부터였다.
유리가 용병단에 몸담은 기간만 해도 10년이 훌쩍 넘었다.
어지간한 베테랑 용병보다도 오래 보내면서 내부 사정 하나 모를 수가 없었다.
심지어 게슐츠의 아내와 샤를린느가 각별한 사이일 정도로 친분이 깊었기에 모르는 속사정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랬는데 오래 전부터 라지닉소스와 일했다고?
“심심하더구나.”
게슐츠는 그리 답했고,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용병단원들 모두가 심심해하고 있어. 보수는 좋은데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멍하니 있을 시간들이 더 많아서 말이지.”
엉덩이……. 이것도 용병단의 은어였다.
어딜 다치면 항상 엉덩이가 아프다고 했었다. 엉덩이가 바닥에 붙어있다면 치명상.
즉, 용병단원 전부가 위험하다는 뜻이었으니.
‘티르빙.’
‘나도 알아.’
라지닉소스 같은 집단이 허술하게 행동할 리가 없다. 분명 게슐츠만 여기로 혼자 보냈지 않았을 것이다.
유리가 그나마 게슐츠와 친분이 있으니까 안심시키려고 보냈을 테고, 뒤따라 온 미행이 분명히 어딘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온 감각을 곤두세워봐도 제 3자가 느껴지지 않는다.
탐색 면에서는 더 뛰어난 티르빙조차 작은 기척이나 마나마저 감지해내지 못했다.
‘귀찮게 하는군.’
유리는 별 수 없이 다음 계획으로 이행했다.
시간을 끌면 라지닉소스의 오해를 받게 될 수도 있어서 위험했다. 적어도 지금의 대화에서 아무런 특이점이 발견되어선 안 되었다.
“아무래도 많이 급하신가 보네요. 저도 급하니까 별 수 없죠. 바로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요.”
“그래? 그럼 악마에 관한 정보는?”
“여기요.”
유리가 마법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불쑥 끄집어냈다.
새장이었다. 그 안에는 작아진 리리스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악마 하나를 붙잡았습니다.”
“어, 어? 아, 아아, 악마를?”
그 게슐츠조차 당황해하며 두 눈을 깜빡였다. 정보를 달라고 했지 진짜 악마를 데려올 줄은 몰랐으리라.
물론, 이 모든 건 연기였다.
리리스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고, 유리는 언제든 새장을 회수할 준비를 마쳤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슐츠만이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천천히 다가와서 새장을 살폈다.
“이게 악마라고?”
“네. 딱 봐도 악마 같이 생겼죠?”
“그렇긴 하다만…… 허, 참. 신기하네. 진짜로 악마가 실존할 줄이야. 라지닉소스의 왕이 펄쩍 뛰겠어.
“그럼, 이제 주시죠. 암흑 눈물 정보의 출처.”
“엉? 야, 이거 확인 해보고―”
“이건 확인할 필요도 없이 악마 그 자체를 생포해왔잖아요.”
게슐츠는 할 말을 잃었다. 유리 말대로 이건 확인해볼 필요도 없이 악마였다.
까만 피부에 하얀 머리, 등에는 박쥐의 날개와 머리엔 산양의 뿔이 난 생물이 세상 어디에 있다고.
누가 봐도 확연한 악마의 형상을 놓고 부정할 이는 결코 아무도 없으리라.
“아무래도 단장님에겐 이만한 권한이 없나보군요.”
유리는 그리 말하며 게슐츠의 뒤편 먼 곳을 바라봤다.
무너진 건물들 사이사이에 어떠한 그림자도, 인기척도 없다. 여전히 마나도 느껴지지 않고.
그러나 유리는 그곳에 그들이 있다고 확신했다.
그들에겐 생명력이란 게 아예 없을 테니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