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5
제205화
끼득, 끼득, 끼득.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던 건물들 사이사이에서 사람의 형체가 천천히 걸아나왔다.
그들이 관절 하나를 움직일 때마다 기괴한 마찰음이 났다.
삐걱거리고, 꿈틀대고. 마치 고장 난 마네킹 같았다.
그리고 그들 모두 진짜 마네킹처럼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지닉소스의 인형들…….”
초점 없는 눈동자와 감정을 잃은 이목구비, 처음 라지닉소스에서 깨어났을 때 봤던 인형들이었다.
놈들의 작동원리엔 생명력이라든가 마나조차 들어가지 않았다.
처음부터 죽어있는 것들이니 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총 10개. 많이도 끌고 왔네요.”
“아, 아니야! 난 몰랐다, 유리!”
“알아요. 단장님께서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아니죠.”
게슐츠를 믿기 때문에 생긴 확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라지닉소스의 왕을 믿어서 생긴 확신. 그 자라면 결코 게슐츠 혼자서 보내지 않았겠지.
그도 그럴 것이 게슐츠와의 방금 전 대화로 한 가지 사실을 캐치해냈다.
‘게슐츠 단장님은 라지닉소스에 위협을 받고 있겠지.’
[어떻게 확신하니?]‘아까 대화에서 다 들었잖아. 단장님은 나랑 재회했을 때부터 전부 거짓말을 했어. 라지닉소스의 산하에서 일한다는 것부터 전부 다.’
[협박이라도 당한다는 거네.] [어쩌면 인질일지도 몰라요. 용병단인데 다른 단원들 얼굴을 못 봤잖아요.]아무래도 아스칼론의 의견이 가장 중론에 가까웠다.
유리가 아는 라지닉소스의 왕이라면 더더욱 협박일 가능성이 높고.
“왕이여, 듣고 있겠죠.”
끼득! 끼득!
선두에 있던 인형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어서 섬뜩한 목소리가 흘렀다.
“듣는다. 나.”
역시.
여기에 왔군.
“음, 아무래도 저도 그렇고, 단장님도 그렇고. 왕께선 우릴 믿지 않았나보군요.”
“믿는다. 아니. 나.”
“제가 쉽게 제안을 받아들여서 의심하셨나보군요.”
“치밀하다. 너.”
“그래서 이제라도 죽이시려고요? 이렇게 악마를 붙잡았는데도요?”
“…….”
라지닉소스의 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럴 만도 하리라.
악마에 관한 실존 증거를 찾아달라고 했지, 정말로 악마를 찾아올 줄은 몰랐을 테니까.
원하던 결과보다 그 이상을 얻었다. 그러나 악마의 실존을 증명해버리는 바람에 신을 부정할 수 없게 된 라지닉소스였다.
즉, 그들의 역린을 건드린 셈.
하지만 유리는 그 어떤 것도 내색하지 않았다.
“이 악마는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처리한다? 너?”
“예. 어차피 라지닉소스에선 신에 관한 정보가 없길 바라지 않습니까.”
“맞다. 부정한다. 우리. 악마. 신. 전부.”
“그러니…….”
화르륵!
갑자기 새장에서 불이 피어올랐다. 평범한 불꽃이 아닌 헬파이어로 피운 검은 불꽃이었다.
잠들어 있던 리리스는 갑작스러운 열기에 벌떡 일어나서 새장을 붙잡고 흔들었다.
끼익! 끼이이익~!
리리스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불꽃이 새장을 삼킨 뒤였다.
불꽃 너머로 하늘에 뻗었던 손이 끝끝내 산화하는 모습이 보였다.
새장마저 불에 타고 재가 되어 떨어졌다. 유리는 손에 묻은 까만 재를 털어냈다.
“악마를 없앤다면 누구도 신을 믿지 않겠죠.”
“만족. 너.”
왕의 인형들이 동시에 입술로 호선을 그었다.
분명 아름다운 인형들이지만, 그 기괴함에 하마터면 눈살을 구겨질 뻔했다.
애써 표정을 고쳐 잡았다. 여기서 사소한 감정의 흔적은 의심을 사기 쉬웠다.
“만족하시다니. 곤란합니다, 왕이시여. 아직 남은 증거가 있지 않습니까.”
“……?”
유리는 게슐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검기 한 줄기가 그를 향해 날았다.
“유리……!”
쿵!
간신히 검기를 막아내긴 했으나, 더 이상 게슐츠가 알던 예전의 검술이 아니었다.
검기라니.
떡잎부터 남달랐던 유리라고 해도 예상을 웃도는 위력이 게슐츠가 저만치 뒤로 날아갔다.
“악마를 목격한 사람이 있으니, 이 자도 죽여야겠죠.”
“너! 네가 어떻게……!”
“죄송합니다, 단장님. 저도 이것말곤 방도가 없군요.”
먼지가 피어나도록 바닥을 구른 그는 아픔에 괴로워할 틈도 없이 일어나서 달리기 시작했다.
도망가야 한다.
이대로라면 라지닉소스와 유리가 죽일 테니까.
하지만 어디로?
“숲으로 가면 제가 못 찾을 줄 아시고요?”
망설이는 틈에 유리가 달라붙었다.
카각!
검과 검이 불꽃을 튀겼다. 유리는 숲으로 도망가려는 길을 가로 막고 바다 방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캉! 카칵! 캉! 캉!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연격에 게슐츠는 방어에만 급급했다.
“칫!”
어쩔 수 없이 게슐츠는 바닷가로 달렸다. 숲으로 어떻게든 뚫고 가고 싶어도 인형들이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바다로 가봤자 바닷속 말고는 답이 없다는 걸 알지만.
일단은 살아야 했다. 그게 먼저였다.
“허억, 허억!”
해변에 다다르자 순식간에 호흡이 가빠졌다. 모래사장을 뛰어다닌다는 건 아무리 훈련과 실전을 거듭한 게슐츠에게도 벅찼다.
안 그래도 그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방금 전 유리에게 받은 일격으로 종아리 근육이 찢어진 것이다.
한 발짝씩 뛸 때마다 피와 모래가 엉켜서 튀었다.
“어딜 가시려고요.”
갑자기 뒤편에서 기척이 사라지더니, 머리 위에서 음성이 들렸다.
머리를 들기도 전에 발등이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묵직한 타격에 게슐츠는 그대로 얼굴을 모래에 처박았다.
“크헉!”
아파할 수조차 없었다. 게슐츠는 바로 일어나서 반대로 몸을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도 벌써 인형들이 쫓아왔다.
진퇴양난에 빠진 그가 모든 동작을 멈췄다.
“젠장…….”
싸울 수가 없었다. 아직 제대로 부딪혀 보지 않았어도 그간의 경험들이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유리와 제대로 싸워봤자 이길 수 없다고.
그 정도로 유리는 성장했다. 어렸을 적 눈 여겨 보았던 떡잎이 드디어 꽃을 피운 거겠지.
“이런 와중에 난 너의 성장이 대견스럽다니. 참, 이래서 정이란…….”
“칭찬 감사합니다.”
“칭찬 아냐, 인마.”
게슐츠는 용병이었다. 기사가 아니라 길바닥을 굴러가며 배운 것들이 있고, 가끔은 무뢰배에 버금가는 짓을 일삼기도 했다.
물론, 나쁜 짓을 하고 살진 않았고.
그저 기사로서의 품위가 없을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위대하게 싸우다 죽을 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리.”
“도망이라도 가시게요? 어디로요?”
갈 곳이라면 있지.
육지가 아니라서 그렇지.
첨벙!
게슐츠는 있는 힘껏 바다를 향해 달렸다. 뒤늦게 유리가 검기를 날렸다.
그러나 그것이 실수였다.
검기를 막으면서 그 반발력을 이용해 게슐츠는 더 깊은 곳까지 단숨에 도착했다.
“이런!”
뒤늦게 유리도 그를 쫓았다. 인형들은 물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니, 오지 못했다.
게슐츠는 인형들이 오지 ‘못’한다는 점을 알지 못했으나, 어쨌든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허리까지 물 높이가 올라오자 게슐츠는 그대로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
잠수를 한 그는 더 이상 유리의 시야에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사라진 곳으로 유리가 검기를 쏘아댔지만, 끝끝내 시체가 떠오르지 않았다.
“놓친 건가.”
잠잠해진 바다를 뒤로 하고 유리는 뭍으로 나왔다. 인형이 물었다.
“놓쳤다. 책임.”
“걱정마세요. 이 바다가 어딘지 잊으셨습니까.”
“여기?”
그워어어어!!!
인형이 고개를 갸웃하자 동시에 바다에서 기괴한 괴수의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그리고 하늘 위로 게슐츠의 시체가 뛰어올랐다.
* * *
라지닉소스의 왕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두운 방, 곱게 뜬 눈 위로 회색 벽돌이 끼워진 천장이 그녀를 반겼다.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자 곁을 지키던 남자가 고개를 내밀며 기웃거렸다.
“일어나셨습니까?”
“치우세요.”
“아, 죄송합니다.”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얼굴을 치웠다. 라지닉소스의 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손은 습관처럼 옆에 있던 찻물을 찾았다.
차가운 찻물을 한입에 털어 넣고 크게 숨을 뱉었다.
“게슐츠가 죽었어요.”
“음? 게슐츠가요?”
남자가 진심으로 놀라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은 아무렇지 않게 해변에서 겪었던 일들을 털어놨다.
“해변에서 유리를 만났습니다. 그 자가 악마를 직접 잡아왔고, 나와의 신뢰를 위해서 악마와 게슐츠를 전부 죽이더군요.”
“헛! 그거 참. 옛 동료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 자는 실리를 추구하는 자에요. 인간의 몸으로 나이트워커에 직접 들어갈 때부터 목표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사람이라는 거죠.”
유리가 왜 갑자기 악마를 죽이고 신에 관한 증거를 지우려 하는 건지 의아하긴 했다.
하지만 어쨌든 게슐츠까지 죽이면서 신임을 얻은 건 확실했다.
“당분간 서로를 이용하자고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거 알아보려고 당신이 있는 거 아니겠어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악마에 대해서 알아내세요.”
“악마요?”
“그 자가 악마를 데리고 왔어요. 그건 진짜 악마였어요. 대체 어디서 어떻게 잡아왔는지 모르겠지만, 평범한 루트로 얻은 건 아닐 거예요.”
“저희도 못 찾는 악마를 무슨 수로 찾습니까? ……잠깐만요. 저보고 유리에 대해 알아보란 건 뒷조사를 하라는 의미셨습니까?”
“그럼 뭐라고 알아들으신 거죠?”
남자는 단순히 유리를 미행하라는 임무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악마에 대해서까지 알아보려면 미행만이 아니라 유리의 뒷조사까지 해봐야 했다.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악마와 조우할 수 있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악마를 새장에 가둘 수 있었는지.
왕과 남자가 아는 바에 따르면, 악마와의 조우는 갑작스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오래 전부터 악마의 존재를 믿어야만 가능한 일.
애초에 악마라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그런데 유리는 단번에 신에 관한 증거인 악마를 찾아왔으니.
남자는 난감한 얼굴로 대꾸했따.
“거긴 용가입니다. 괜히 잘못 건드려서 용가의 주목을 받았다간 곤란해집니다.”
“나이트워커는 미앵비슈의 죽음 때문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어요. 우리 같은 학술 집단에 관심 있어할 리가 없어요.”
“뭐, 그렇긴 하지만…….”
“우린 악마와 신에 관한 모든 걸 없애야 해요. 그 과업을 완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후우, 알겠습니다. 되는대로 해보죠.”
* * *
게슐츠가 간신히 눈꺼풀을 위로 움직였다.
안면에 힘을 주기도 힘들었으나 의식을 차리면서 마지막 기억이 돌아오자 위기의식이 몰려왔다. 그리고 그 의식이 어떻게든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얼른, 도망, 쳐, 야…….”
“도망친다고요? 어디로요?”
장난스러운 타박이 귓가에서 따갑게 울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유리가 있었다.
“여기…….”
“용궁입니다. 음, 바닷속이죠.”
“바다, 속? 죽은, 거, 야?”
“제 정신 아니시네, 우리 단장님.”
“어련하겠어.”
이번엔 다른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새장에 들어있던 악마, 리리스였다.
그녀는 새장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심지어 유리보다도 키가 커서 그녀의 턱이 유리의 정수리를 괴었다.
하얀 머리칼이 뺨 위를 간지럽혔다.
“이런 인간 하나 때문에 죽는 연기까지 해야 하다니. 어땠어? 나 배우해도 될 거 같아?”
“리리스 님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요.”
“큭큭! 그러는 너도 만만치 않던 걸. 혹시 우는 연기도 할 줄 알아?”
“우습게도 특기입니다.”
게슐츠는 뒤늦게 유리가 어렸을 적 일을 떠올렸다.
그때 뭐 때문에 그랬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분명 어린 나이의 유리가 혼신의 눈물 연기를 했던 걸로 기억한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유리는 리리스를 죽이는 척 연기를 했고, 게슐츠까지 몰아세운 건 모두 연기였던 것이다.
거기다.
“단장님 연기도 괜찮던 걸요?”
유리의 익살스러운 웃음에 게슐츠도 힘 없이 웃었다.
그는 까무룩 정신을 잃어가며 생각했다.
다신 연기를 하지 않겠다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