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6
제206화
“빌어먹을 새끼. 넌 항상 그게 문제야.”
정신을 차린 게슐츠는 몇 분 안되어서 멀쩡히 일어났다.
지금은 인어국이 내준 바다의 진미(眞味)들을 앞에 두고 입에 우걱우걱 쑤셔 넣고 있었다.
입 밖으로 문어 다리 하나가 튀어나와 덜렁거렸다. 볼이 터질 거 같은데도 그는 다른 음식을 쑤셔 넣었다.
인어국에서만 난다는 맥주를 들이키고 나서야 그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연기를 해도 그렇지. 제대로 언질이라도 해주면 덧나냐?”
“거기서 뭐라고 했으면 분명 라지닉소스에서 눈치 챘을 거예요.”
“그래도 그렇지. 이거 봐라. 나 사지 절단 날 뻔했다고.”
게슐츠가 분한 듯 부목을 댄 팔을 흔들어보였다.
팔뿐만 아니라 온몸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언뜻 봐선 중상 같았으나 실제로 심각한 상처는 하나도 없었다.
기껏해야 타박상에 뼈가 금이 간 정도로 끝났다.
물론, 이것도 큰 부상이라면 큰 부상이지만.
게슐츠가 실력이 없었다면 중상이 아니라 싸늘한 주검이 되었으리라.
“연기력의 생명은 리얼리티, 모르세요? 리얼했으니까 속아 넘어간 거라고요.”
“내가 배우도 아니고. 그냥 네놈이 멋대로 날 두들겨 팬 거잖아.”
둘이 티격태격해도 사실은 이 정도로 끝났음에 안도했다.
이 모든 것이 게슐츠와 유리가 서로의 시그널을 알아보고 연기를 펼친 덕이었다.
심심하다는 말 한 마디부터 시작된 판에서 게슐츠는 최대한 유리의 장단에 맞춰줬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당장 떠오르는 방법이 게슐츠에겐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품어왔던 이 말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죄송해요.”
“응? 갑자기 사과냐? 병 주고 약 주고. 아주 지랄 났네.”
“어쩔 수 없었어도, 이것밖에 방법을 강구하지 못했으니까요.”
두 사람이 오랜 시간을 같이 지냈으니까 눈빛만 보고 연기를 맞출 수 있었다지만.
속여야 하는 상대가 다름 아닌 라지닉소스였다.
적당한 연기력으론 절대 속지 않은 자들.
인형이라는 대역으로 살아온 그들의 시선에 어정쩡한 연기력은 금방 들킬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리는 최선을 다해서 게슐츠를 공격해야만 했다.
애초에 유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접근한 뉘앙스가 있어서 적당한 실력을 뽐내선 안 됐다.
그로 인해 자칫 게슐츠가 죽을 뻔했다.
그나마 미리 언질을 받은 톤트가 잘 받아줬으니 망정이지.
둘 중 한 명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됐어, 유리.”
게슐츠가 유리의 어깨를 세게 두들겼다. 그는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날 살렸다. 날 포기해도 되는데 살렸다고. 나한테 그게 얼마나 고마운지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어.”
“단장님…….”
“주눅 들지 마라. 난 고맙기도 하고 대견해. 네가 날 이길 수 있는 실력이 되었지 않냐. 한 때 널 가르쳤던 스승으로선 기쁜 날이야.”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슐츠가 먼저 웃어 보였고, 유리도 같이 웃어보였다.
누구도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몰랐다. 유리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죄스럽다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그저 라지닉소스 하나 굴복하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다고 생각하니 미안했던 것뿐이다.
강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도, 게슐츠의 말에 위안을 얻었다. 유리는 자세와 톤을 고쳐 잡았다.
“이제 설명 좀 해주세요. 다른 단원들은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게슐츠와 은어로 대화를 하면서 얼핏 듣기로, 단원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단원만이 아닐 것이다.
용병단 전체가 위험하다면 지냈던 마을 전체가 위험하다는 뜻.
게슐츠는 본격적인 이야기를 말하려다가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라지닉소스가 마검에 대해서 언급하던가요?”
결국 유리가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너, 그걸 어, 떻게……?”
“그랬군요.”
라지닉소스와 유리와의 관계는 어디에도 나오지 않았다. 설정집과 본편, 그 모두에서 유리의 존재는 마검으로 암살당하던 날을 기점으로 완전히 지워졌다.
그러나 유리는 마검을 쥐었다.
주인이 되었고, 마검의 힘을 이용해 용가에 들어왔고, 이젠 가주가 되려 했으며, 최종적으로 악마와의 종전(終戰)을 목표로 삼았다.
결국 모든 변화의 기점은 마검이었다.
마검을 쥐면서 유리의 삶이 변화했고, 라지닉소스의 개입도 그것 말고는 설명이 안 되었다.
“신과 악마에 관심이 많은 놈들이니 마검에 대해서 추적하고 있었겠죠. 그런데 제가 마검의 주인이 되었으니까 관심이 있을 줄 알았어요.”
“후우, 거기까지 알았구나.”
유리의 말이 맞았다.
게슐츠는 한참 망설이다가 겨우 그 날의 일들을 입 밖으로 꺼냈다.
*
유리가 마을을 떠나고 하루도 되지 않아서 외지인 무리가 마을을 찾아왔다.
그들의 복장은 흡사 사교 집단과 비슷했다.
검푸른 신관복으로 통일해서 입고 있었으며 얼굴과 생김새마저 똑같았다.
라지닉소스가 인형들을 보낸 것이다.
인형을 이끌고 온 한 남자만이 유일한 인간이었다.
인형이 뭔지도 몰랐던 용병단은 마을의 유일한 자경단이었고, 급히 단원들을 모아 그들과 대치했다.
남자가 부드럽게 대화를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라지닉소스라는 곳에서 왕의 명령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나라군.”
“아직은 국가의 격을 갖추지 못한 작은 도시라고 생각해주셨으면 좋겠군요.”
“그런데 그런 나라에서 무슨 일로 쳐들어 온 거지?”
“쳐들어오다니. 난폭한 발상이군요.”
용병단과 마을 사람들 눈에 그들의 군세는 그야말로 군대와 같았다.
무기만 없을 뿐. 위협적인 기운이 흘러나왔다.
긴장감에 무기를 든 용병의 손에 땀이 차고 힘이 들어갔다.
남자는 그런 단원들의 반응을 즐기고 있다가 물었다.
“마검의 주인이 이곳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뭐?”
당황하는 게슐츠. 남자가 더더욱 큰 미소를 짓는다.
“시치미 떼셔도 소용없습니다. 저희를 속일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검? 주인? 그 둘이 이 마을에 있다고?
진실을 알고 있는 게슐츠만이 안색이 굳었다.
“……그런 거 모른다. 마검 티르빙? 우리 마을에 그딴 물건이 있었다면 진즉에 몰살당했겠지.”
“그러니까 신기한 겁니다. 마검과 그 군주가 등장한 것도 그렇고. 마땅히 죽었어야 할 당신들은 여전히 살아있으니까요.”
“헛소리 지껄이지 말고 꺼져라. 당장 꺼지지 않으면 제국군에 신고하겠어.”
신고 협박은 소용없을 것이다. 이미 그들은 자신들을 한 국가 소속이라 밝히면서 제국의 국경을 넘었다.
어떤 식으로 넘었는지는 알 수 없어도,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었으리라.
무엇보다 게슐츠의 눈썰미에 보이는 혈흔들이 있었으니.
‘옷 끝자락에 피가 묻었군.’
인형들 모두에게 피를 급히 물로 씻어낸 흔적이 남아 있었다.
어디서 묻혀온 피일까.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다.’
이 집단은 위험하다.
절대 여기서 막아야 한다.
“흠, 말로는 안 되는 건가. 어쩔 수 없군요. 저희도 타국에 와서 소동을 피우긴 싫으니…….”
말끝이 흐려지더니 남자가 손가락을 튕겼다.
순간 세상이 암전되면서 새카만 빛이 내려앉았다.
그야 말로 흑빛이었다.
빛이 나고 있지만, 까만 빛. 그것들은 대기에 조금씩 번지다가 산소를 집어삼켜가면서 밀도를 높였다.
“컥!”
댕그렁!
사람들이 일제히 목을 쥐며 쓰러지면서 들고 있던 무기들도 같이 바닥을 굴렀다.
숨 쉴 공기가 사라진 것이다.
처음 겪어보는 진공 상태에 모두의 이마에 핏대가 울퉁불퉁 솟았다. 벌겋게 목부터 머리까지 달아오른 사람들을 어떻게든 숨을 마시려고 켁켁거렸다.
“이제 대답하실 마음이 생기셨는지요.”
“끄으, 개, 자식……!”
“흠,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군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남자가 손짓하자 인형들이 쓰러진 사람들을 향해 검을 들고 다가갔다.
가장 가까이 있던 단원의 목에 검끝이 닿았다.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엔 질문이 아니라 부탁, 을 좀 해보겠습니다.”
“크으……! 난……!”
“저희를 따라주시겠습니까?”
처음부터 라지닉소스는 이곳에서 마검의 주인이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한 가지.
마검의 주인을 이끌어낼 수 있는 걸 쟁취하는 것.
“인질이 되어주면 살 수 있습니다. 인질이란 게 살아있어야 가치 있으니까요. 어떠십니까.”
“컥, 끄어어……!”
게슐츠와 단원들 중 누구도 그들의 힘 앞에 저항할 수 없었다.
마지막 시선의 끝자락에서 빛을 내는 검들을 게슐츠는 바라보기만 했다.
*
꼬박 일주일 넘게 지나고 나서야 게슐츠는 정신이 들었다.
그는 눈을 뜨자마자 방을 박차고 나갔다.
자신이 누워 있던 방이 지내고 있던 집이라는 건 그때까지 전혀 몰랐다.
알게 된 건 집 밖의 풍경을 보고나서였다.
“단장님! 안녕하세요!”
문을 나오니 마침 지나가고 있던 옆집 꼬마가 인사를 건넸다.
“너, 살아있니?”
“네? 무슨 말이에요? 저야 당연히 살아있죠!”
아이는 그대로 다른 아이들 무리로 뛰어갔다.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멀쩡했다. 꽃집 아가씨, 빵집 아주머니, 용병단 사무실을 맡고 있는 행정관까지 전부.
게슐츠는 행정관의 어깨를 붙잡았다.
“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라지닉소스라 했던 놈들은! 다 간 거야?!”
“무슨 소리세요, 단장님. 라지닉소스? 그건 무슨 소스입니까?”
그들은 멀쩡한 것만이 아니라 아예 그날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른 누구에게 물어도 마찬가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간 통째로 사라졌다.
마치 혼자서 거짓된 기억을 가진 기분에 게슐츠는 미친 사람처럼 사람들을 붙들고 묻고 또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렇게 하루 종일 마을을 쏘아다니다 보니 해가 저물었다.
모두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게슐츠만 황망한 기분을 맛봤다.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얼굴이군요.”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렸다.
돌아서보니 마을을 습격했던 남자가 있었다.
전에 봤을 때와 달리 딱히 로브를 쓴다거나 얼굴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그저 평범하게 생긴 청년이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게슐츠가 그의 멱살을 잡았다.
“무슨 짓을 한 거지! 마을 사람들한테, 대체……!”
“말씀드렸잖습니까. 인질이라고. 인질은 살아있어야 하고, 또한 자신이 인질이라는 걸 모르는 게 가장 좋죠.”
“기억을 조작했다는 거냐?!”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더군요. 기억 조작. 그게 이해하기 쉽다면 그렇게 이해하십시오.”
“알아듣게 말해. 무슨 짓이야. 우리한테 바라는 게 뭔데! 왜 나만 기억이 멀쩡한 건데!”
“당신이 우리의 인형이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인질들은 이대로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네놈들의 뭘 믿고.”
“달리 선택지도 없으면서 지금 신뢰관계를 따지는 건가요.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군요. 당신이 허튼 짓을 하면 이 사람들 모두 죽는 겁니다.”
“이 새끼가!”
주먹을 들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놈의 얼굴을 힘껏 갈기고 싶었다.
그러나 그래선 안 됐다.
분노 한 번으로 사람들 모두가 죽는다는 상상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제야 게슐츠는 자신이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상황에 처했다는 걸 알았다.
결국 손에서 힘을 풀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