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7
제207화
참담한 그늘이 게슐츠에게 드리웠다. 내리깔은 눈동자가 먼 곳을 바라봤다.
“이후 라지닉소스에게 결국 충성을 다하며 살아야 했어. 거절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제국에 알리시지 그러셨어요. 아니면 저라도.”
“유리. 네가 직접 그 놈들의 힘을 봤더라면 내 심정을 이해할 거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마법은 항상 용병들과 일반인들에게 공포였다.
그나마 마법을 자주 조우해봤던 용병단조차 삽시간에 공기를 없애버린 괴물 같은 힘은 아무리 게슐츠라 해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저항할 바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더 믿기로 했다.
“나 혼자 개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살 수 있다.”
그가 용병단장이자 마을의 자경단이 되기로 마음 먹은 이상.
그에겐 사람들을 지킬 의무와 책임이 있었다.
게슐츠는 자신의 결심을 따라 행동했다. 개가 되어 부림을 당하더라도 말이다.
“후우, 어쨌든 내가 죽은 걸로 되었으니 이젠 어떻게 될지 모르겠구나.”
사실 게슐츠가 걱정하는 건 자신의 안위보다 마을 사람들이었다.
죽어버린 이상 과연 그들이 마을 사람들을 가만히 놔둘지 의아했다.
유리도 곰곰이 고민하다 조심스레 말했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어째서?”
“그들은 인질로서 살려뒀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제국 땅이에요. 살인을 저지르는 짓을 하진 않을 테죠.”
“그건 단순한 바람이다, 유리. 그리고 내가 그들을 봤을 땐 이미 살인을 저지르고 온 뒤였어.”
“그 피가 진짜 사람 피라고 할 수 있어요?”
“그건…….”
거듭 떠올려봐도 라지닉소스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시작한 시점은 채럿의 트리가 넘어가고 난 뒤였다.
그들의 힘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정보력. 강한 군사력과 마법 따위가 아니었다.
하물며 용가의 비호를 받는 베리온 제국에서 피를 보면서 마을에 쳐들어갔다?
“그들도 연기를 했을 거예요.”
“하지만, 하지만……!”
“그런 마법이 있긴 할까요?”
불현 듯 나온 질문에 게슐츠가 할 말을 잃었다.
순식간에 공기를 없애다 못해 사람들의 기억을 조작하는 마법.
유리가 아는 한에 그런 마법은 용언 마법 밖에 없다.
마법은 어디까지나 자연에 존재하는 것들을 빌려 쓰는 힘에 불과했다.
“생각해보세요. 기억을 조작할 힘이 있었다면 굳이 협박하지 않고 그냥 조종하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그, 그런가?”
“만에 하나 정말로 기억을 조작하는 마법이 있다고 해도, 굳이 인질로 삼을 필요가 있나요. 용병단으로 의뢰를 넣기만 해도 됐을 텐데요.”
돌이켜 보면 게슐츠에게 해온 라지닉소스의 행위들은 이해 못할 구석이 많았다.
유리가 말한대로 간단히 의뢰를 넣으면 되었다. 굳이 인형들을 끌고 와서 인질극을 벌일 필요 없이.
물론.
그들이 유리를 미행하라거나 마검에 대해서 뒷조사를 지시했다면 협박은 유효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리는 용가로 들어가버렸다.
아무리 라지닉소스가 모종의 이유로 마검과 그 주인을 노렸다고 해도, 용가까지 미행하고 뒷조사 하라고 용병단에게 지시하진 않았을 것이다.
“단장님, 그들이 무슨 요구를 했죠?”
“별 건 아니었다. 처음엔 라지닉소스에서 하고 있는 일처럼 신과 악마에 관한 증거들을 모으러 다녔지. 그들이 정보를 제공해주면 내가 회수하러 가는 형식이 많았다.”
“그 밖에는요? 저랑 마검에 관련되어서는 뭔가 말하지 않던가요?”
“그게…….”
몇 년 전 일들부터 머리 속에서 끄집어 내던 게슐츠는 아차 하며 입을 벌렸다.
“맞아. 좀 특이한 게 있긴 했다.”
“뭐였죠?”
잠시 후 게슐츠가 대답했다. 말을 하면서도 그조차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너를 보호하란 거였어.”
* * *
밤이 되기 전, 유리는 비량을 만났다. 그녀는 인어국의 성채 밖으로 나가는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 일은 끝났나?”
“네, 덕분에요.”
“그 인간에 관해선 걱정하지 마라. 용의 이름을 걸고 지킬 거다.”
그 인간이라 함은 게슐츠를 가리켰다.
당분간 그는 여기서 머물러야 했다. 적어도 라지닉소스를 처리할 때까지는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마을에 남은 사람들이 걱정된다고 해서 유리는 엘라트리오에게 서신을 보내 제국군 파견을 보내놨다. 서신에는 자세한 사정까지 적었다.
서신은 비량이 전해주고 왔다. 30분 만에 다녀왔으니 마을에 대한 대비는 충분하리라.
만에 하나 라지닉소스가 벌써 마을을 건드렸다면…….
‘제국이 공격할 명분을 만들어주겠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엘라트리오는 거기까지 계산을 끝냈을 것이다.
절대 대충하는 법은 없는 사람이니까.
“가지.”
비량의 몸이 진흙처럼 뭉쳐졌다가 기다란 용으로 변했다. 언제 봐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유리가 등에 올라타자 비량이 용언의 힘을 개방했다.
“개(開), 명계(命界), 수(水).”
옆으로 늘어진 구체 형태로 물들이 모였다가 얼어붙었다. 그리곤 이리저리 늘어지고 뭉치고 부서지길 반복하다가 포탈을 열었다.
물의 정령계로 가는 문이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난 배웅만 해줄 뿐, 정령계 앞에서부턴 그대 혼자 가야 해.”
“압니다.”
물의 정령왕과 용왕의 사이 때문에 비량조차 물의 정령계 깊숙이 들어가지 못한다.
갔다가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며, 용(龍)인 그녀는 물질계에서나 최강일 뿐. 영혼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무엇보다 물의 정령왕에게 찾아간다는 말조차 하지 않았으니.
괜히 갔다가 문전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리라.
“그럼 출발한다. 영혼이 빠져 나가는 기분이라 거북할 수 있다.”
“네.”
슈욱!
미끄러지듯 기다란 몸체가 물살을 가르며 포탈로 헤엄쳤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꼬리짓에 충격파 버금가는 물결이 퍼져 나갔다.
유리도 힘껏 갈기를 붙잡으며 저항력을 버텼다. 마치 온몸이 찢기는 기분이었다.
실제로 영혼이 육체와 떨어지려고 하면서 밀려오는 고통이었다.
영혼계로 가고 있으니 물질인 육체를 거부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비량과 용왕이 이를 해결해줬다.
비량이 용언 마법을 걸었고, 용왕도 용과 맺어진 권능 일부를 유리에게 부렸다.
고로 격통은 잠시였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비량이 헤엄을 멈췄다.
“도착했다.”
눈앞에 물의 정령계가 펼쳐졌다.
아니, 엄연히 그것은 ‘세계’라 불리는 공간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무것도 흐르지 않는 물의 세계. 수면 위에선 햇빛이 물길을 뚫고 들어와서 파도의 그림자를 따라 일렁거렸다.
그 아래에서 물처럼 속이 투명한 흰수염 고래가 부유하고 있었다.
그 크기가 인어국의 성채보다 훨씬 크다 못해 한눈에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유리에겐 고작 고래의 지느러미 끝자락만 보였다.
고래의 주변으론 다양한 정령들이 따라다녔다.
인어보다 작은 운디네부터 날치라든가 돌고래, 상어, 거북이 등등. 바다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모여 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 모두가 정령으로, 고래와 마찬가지로 속이 비쳤다.
“이게 물의 정령계…….”
바다를 하늘 삼아 부유하는 거대한 영혼의 계.
그리고 이를 이끌고 다니며 가는 곳을 곧 명계(命界)로 만드는 존재.
‘물의 정령왕, 엘 더 하임.’
용과는 전혀 다른 위압감이 전신을 적셨다. 용이 압도적이고 위협적이었다면, 물의 정령왕은 보고 있기만 해도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상상은커녕 이런 존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지 않는다.
“난 가겠다.”
어느 틈에 비량이 슬쩍 몸을 빼냈다. 졸지에 유리는 바다 가운데 헤엄치고 있는 꼴이었다.
거리가 벌어지자 비량이 다시 포탈을 열어 그 뒤로 사라졌다.
‘어째 도망가는 거 같다만…….’
유리라도 별 다른 용무가 없었더라면 물의 정령왕을 만나자 마자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조금 가까이 헤엄쳤다.
살아있는 것의 등장에 가장 먼저 운디네들이 반응했다.
“살아있는 사람!”
“인간이다!”
“우와! 신기신기!”
“대박대박!”
순간 유리는 낭패 어린 표정을 지었다.
‘들키지 않을 순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빨리 들킬 생각까진 없었는데!’
보통 영혼계에 물질계가 들어오게 되면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
상식적으로 살아있는 것이 죽은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으니까.
원작에서 카이도 살아있는 몸으로 물의 정령왕을 만나러 왔다가 된통 당해서 쫓겨났었다.
십고초려 끝에 겨우 말 한 마디 섞었었기에 유리도 첫 만남에선 싸울 각오까지 하고 왔다.
그런데.
“우와~ 만져 봐도 돼?”
“나 만질래!”
“나도나도!”
“어어?”
긴장한 유리와 달리 정령들은 서슴없이 다가와서 친화력을 뽐냈다.
빙빙 주변을 돌면서 헤엄치거나 용기가 있는 운디네들은 유리의 머리카락을 산호초 삼아 드나들며 놀았다.
“우웅? 인간……이……다…….”
이번엔 아래서 헤엄치고 있던 상어 무리가 유리를 발견했다.
유리가 기억하기로 상어 형태의 물의 정령은 상급 정령인 에르힘이었다.
그들은 콧등을 유리에게 대면서 애교를 부렸다.
“신기……하다…….”
“익숙한……냄새…….”
“맡고……싶다…….”
[나만 이상하게 들리니? 나만 음란마귀 씌인 거야?] [티르빙 양이 듣고 싶은 대로 듣나 보죠.] [나 변태 아니거든?]나오는 말들과 달리 상어들은 친근하게 유리를 맞아줬다. 상어만 아니라면 반려견이라 해도 믿을 법했다.
유리도 가까이 있던 상어 한 마리의 콧등을 쓸어줬다.
기분이 좋은지 상어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어째서 날 반기는 거지?”
유리가 묻자 상어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살아있다…… 하지만.”
“익숙하다……. 우리…… 아는 냄새…….”
“반갑다…….”
아는 냄새라니.
내가 여기에 온 적 없을 텐데 알 고 있을 리가.
하지만 정령들이 허튼 소리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특히나 육체의 기억과 달리 영혼의 기억은 절대성을 지녔다.
거짓이 아닌 오로지 진실로 꾸며진 것이 영혼의 기억이다.
그들에게 무슨 말인지 물어보려 했으나, 갑자기 물살이 그를 밀어내면서 말할 틈을 잃었다.
고래, 물의 정령왕 엘 더 하임이 고개를 돌려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유리는 기껏해야 그의 눈동자 하나만 겨우 바라봤다. 나머지는 보고 싶어도 너무나도 커서 볼 수 없었다.
눈동자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끔뻑거렸다.
“넌 누구지?”
“반갑습니다, 물의 정령왕이시여. 전―”
“유리 덴 나이트워커로군.”
소개가 나오기도 전에 엘 더 하임은 그를 알아보았다.
새카만 눈동자가 유리에겐 하나의 세계처럼 거대했다. 심해보다 깊고, 심연보다 어둡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세계는 실로 심오했다.
그래서일까.
스스로가 한없이 작게만 느껴져서 엘 더 하임으로부터 형언하기 어려운 공포가 밀려왔다.
‘이게 뭐야…….’
엘 더 하임이 말을 걸어온 순간부터 가슴께를 깊게 찌르는 감각이 속을 헤집었다.
그래, 이게 정령왕이지.
다른 정령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바람에 기껏 끌어올렸던 긴장감이 잠시나마 풀어졌었다.
엘 더 하임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자신의 존재감으로 유리를 억눌렀다.
“넌 여기에 와선 안 됐다.”
꼬르륵!
머리에 씌워져 있던 공기방울이 갈라지더니 물줄기가 들이닥쳤다. 그리고 곧 바로 방울이 부서지면서 졸지에 심해 한 가운데 빠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 오는 바람에 세계가 가속화되기 시작했다.”
“뭐……라, 큽!”
유리는 검을 꺼낼 준비를 했다. 역시 한 번에 대화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문답무용.
“잠시만요!”
그때, 유리와 엘 더 하임 사이로 한 정령이 끼어들었다.
다른 정령들과 달리 인간형에 가까운 정령이었다. 그렇다고 인어처럼 다리 대신 꼬리가 달리지도 않았다.
말 그대로 인간과 똑 닮은 ‘그녀’는 어딘지 모르게 뒷모습이 익숙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