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08
제208화
갑작스러운 그녀의 등장에도 유리는 그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여전히 격통이 심장을 옥죄였다. 숨을 토하려고 하면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만해주세요, 정령왕.”
“막지 마시오.”
“막아야겠습니다. 제 사랑스러운 조카를 괴롭히시는데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
정령왕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거대한 고래의 콧등이 점차 그녀에게 접근했다. 유영하는 느릿한 움직임만으로도 퍼지는 물살이 거셌다.
그러나 여자는 팔을 벌린 채 정령왕과 똑바로 마주했다.
“물러서세요.”
“……후회할 거다.”
“원래 삶은 후회의 연속입니다. 우린 살면서 그 후회를 짊어지고 더 나은 것을 추구하죠.”
“실로 인간다운 대답.”
결국 물의 정령왕이 먼저 물러섰다. 이윽고 가던 길로 헤엄치며 다른 정령들을 이끌었다.
그제야 사라졌던 공기방울이 되돌아왔다. 어쩐지 아까보다 숨쉬기 편한 방울이었다.
“후으, 후우, 후우.”
“괜찮니?”
여자가 다가와서 어깨를 짚었다. 보드라운 손길에 유리의 호흡도 정차츰 정상으로 돌아왔다.
천천히 그가 머리를 들어 여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익숙한 낯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보이는구나.”
“고모님.”
미앵비슈 덴 나이트워커.
그녀였다.
* * *
유리와 미앵비슈는 정령왕의 등을 빌려 타며 그를 따라갔다. 정령왕은 그들이 매달린 걸 알고도 신경 쓰지 않고 바다를 떠다녔다.
등판은 흡사 평야와도 같을 정도로 드넓었다. 겨우 올라왔는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유리는 미앵비슈의 등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고모님이 여기 계시는 거지?’
[정령계니까 죽어서 있는 거 아니겠니?] [그렇긴 하지만 이상하긴 하네요. 여기서 마주쳤다기엔 뭐라 해야지. 우연치곤 너무 우연이에요.] [그런가?]‘들어보면 알겠지.’
잠시 뒤, 미앵비슈는 적당한 곳에 서서 유리를 돌아봤다.
“설마 너도 죽은 거니?”
첫 질문부터 강렬하다면 강렬했다.
하긴, 여긴 죽은 자의 세계이니 오해할만하지.
유리는 걱정스러워 하는 얼굴을 보며 웃었다.
“아뇨. 용왕과 용의 도움을 받아 건너왔습니다.”
“용왕이?”
“설명하자면…….”
미앵비슈가 가사 상태에 빠진 이후로 겪은 일들을 낱낱이 말해줬다.
플루토의 사용부터 다이올드의 악마 숭배까지.
이야기를 듣는 내내 그녀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처음엔 놀라워하다가 다이올드에선 심각하다 못해 화를 내기까지 했다. 마지막으로 용궁에서 있었던 일에 관해선 이채를 띠었다.
최대한 짧게 설명을 해줬는데도 자세한 설명을 해주기까진 1시간이 족히 걸렸다.
그렇게 모든 사정을 알게 된 미앵비슈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넌 내가 여기 있다는 것에 전혀 놀라지 않는구나.”
“…….”
무슨 말인지 바로 이해했다.
그간의 일들을 평범한 사람이 겪었다면 유연하게 대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리는 침착한 것도 모자라서 당연하다는 듯 일사천리로 사건들을 대처해왔다.
“내가 죽고 나서만이 아니라, 처음 가문으로 들어오고 나서도 쭉 그랬지. 넌 너무나도 모든 일들을 당연하게 해냈어.”
“제가 좀……대단하긴 했죠.”
“아니. 그렇게 치부할 수가 없어. 그건 너무…… 편리한 발상이야.”
사실 처음부터 미앵비슈는 유리를 눈 여겨 봤었다.
인간의 몸, 마검의 주인, 어딘지 모르게 비밀스러운 아이.
원체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오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으며, 가끔은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이들은 그런 유리가 인간적이라서 그렇다고 했지만.
오히려 미앵비슈는 유리야 말로 용인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정말 인간 혼자서 해낼 수 있었을까?
갑자기 스며든 의심은 사그라들 줄 모르고 그녀를 괴롭혔다.
“하나 미리 말해두겠지만, 난 널 의심하기 싫었단다. 오히려…… 널 좋아했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능력이 너무나도 비범해서 너의 존재를 의심했었단다. 지금 이 순간까지도.”
“굉장히, 뭐랄까. 절 적대하는 기분이네요.”
“적대도 아니란다. 말했다시피 널 싫어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이리 말씀하시는 연유가 뭐죠?”
“네가 알고 있는 것이 궁금해.”
서늘한 바람처럼 날아든 한 마디는 칼날이 되어 마음을 후벼 팠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예상하지 못한 대화였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유리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언젠가 들킬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미앵비슈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미 그녀라면 유리의 빙의 사실, 또는 미래를 알고 있는 예언자 정도로 추측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유리가 보기에도 지난날들을 쉽게 살아온 건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고작 그것만으로 예언자라고 추측하는 건 과했지만.
한 명 쯤은 안다고 해서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나 눈썰미가 좋은 미앵비슈라서 더더욱 그랬다.
“가문으로 들어온 건 너의 계산이었니?”
“네.”
유리는 대번에 사실을 털어놨다.
세로로 갈라진 동공이 가늘게 수축하고 눈썹은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유리도 할 말을 이었다.
“마검을 쥐던 날, 가문으로 가야겠다는 결심을 했었습니다.” “가주가 되기 위해서?”
아니면, 다른 목적이 있어서?
뒤에 나올 질문은 굳이 소리로 바꾸지 않아도 알아들었다.
“악마 때문에요.”
“아…….”
순간 미앵비슈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이미 다이올드를 통해서 악마의 존재를 알았지만, 훨씬 전부터 유리가 악마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악마 때문에 용가에 들어오고 가주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 자체도.
“어떻게 알게 됐는지는 말씀드려도 믿지 못하실 거예요. 그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마검을 쥐면서 알게 되었고, 그 마검은 다이올드 백부님께서 보내셨다는 거죠.”
“다이올드가? 그게 사실이야?”
“네.”
“하……! 하하……!”
어이없다는 실소가 흐르다가 넋을 잃은 미앵비슈.
그간 다이올드의 수많은 만행을 봐왔다지만 마검에 손을 댈 줄은 몰랐다. 애초에 마검이 가문 내에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헌데 마검을 이용해서 유리를 암살하려 했다니.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겨우 움직였다.
“미안하구나. 우리 가문이, 너한테 몹쓸 짓을 했어…….”
“고모님이 사과하실 일이 아니잖아요. 괜찮습니다.”
“그치만 네가 악마 때문이라고 말한 건 마검을 쥐면서 결심했을 테지. 맞지?”
“……네.”
닥쳐올 멸망을 알았더라도 마검이 없었더라면 유리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다이올드가 암살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면, 마검은커녕 용가에 들어간다는 상상조차 못 했으리라.
“악마 때문이라는 거지.”
미앵비슈는 혼란스럽던 마음을 다잡으며 중요한 본론으로 돌아갔다.
악마.
다이올드의 악마 숭배 이야기에서 얼핏 들었지만, 그들은 침략을 준비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유리, 부디 네가 아는 걸 모두 말해다오. 들어보니 넌 되도록 비밀로 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어차피 난 죽은 몸이야.”
“별 건 없습니다. 악마는 침략을 시작했고, 곧 이 땅을 공격하는 일만 남았을 겁니다.”
“오, 유리……!”
그 순간, 갑작스레 미앵비슈가 유리를 끌어안았다.
너무나 뜬금없어서 유리의 손이 어쩔 줄 모르고 허공을 헤맸다.
그럴수록 유리를 끌어안는 힘이 더욱 강해졌다.
“유리야, 미안하다. 우리 가문 때문에 네가 몹쓸 일들에 휘말렸어. 너무나도 큰 짐을 주었고, 결국 널 여기까지 오게 만들었구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고모님…….”
미앵비슈가 꼬치꼬치 유리의 사정과 과거를 물었던 건 단순히 그를 나무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인간인 유리가 용인답게 행동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신의 가문과 동생의 암살 때문이라니.
비록 그녀 자신이 지시한 짓들이 아닐지라도, 사죄하지 않고서 죄책감을 버틸 수가 없었다.
“괜찮습니다.”
유리도 그녀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고모님께서 이리 말씀해주시는 것만해도 전 감사해요. 솔직히 이렇게 말씀해주시지 않으셔도 저를 많이 도와주셨잖아요. 제가 감사해야 하죠.”
“그리 말해주니 나도 고맙구나.”
“그리고, 고모님. 고모님은 죽지 않았습니다.”
“어?”
미앵비슈가 그로부터 떨어졌다.
유리는 정령왕을 내려다봤다. 기껏해야 보이는 거라곤 널찍한 등판 뿐.
그러나.
“듣고 있었겠죠, 물의 정령왕이시여.”
“……날 더러 어쩌라는 거지.”
멀리 있는 고래의 얼굴 쪽에서 묵직한 음성이 잔잔히 퍼졌다.
시큰둥한 반응에도 유리는 꿋꿋이 준비해온 것들을 전달했다.
“도움을 주십시오. 이대로 악마들이 물질계를 지배하면 영혼계인 정령들도 침범 당하기 시작할 겁니다.”
“우리더러 전쟁에 참가하라는 거냐?”
“그래 주셔야 합니다.”
정령들의 참전은 원작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카이가 각성 시킨 몇몇 정령술사들이 활약을 보였고, 이미 유리는 불의 정령왕 라군도와 계약한 채럿과 물의 정령과 계약한 이자벨이 있었다.
여기서 이자벨의 계약 건을 수정할 생각이었다.
“제게 이자벨이라는 동료가 있습니다. 물의 정령과 계약했고, 전 당신이 이자벨과 직접 계약을 했으면 합니다.”
“정령왕과의 계약은 요구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다른 정령왕이라면 그랬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은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관장하는 권능의 소유자. 생명을 지닌 것들이라면 교감하기 쉬울 테죠.”
“방금 들은 이야기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물의 정령왕과 직접 계약을 맺었던 사람은 본래 따로 있다.
바로 카이였다.
지금도 계약이 되어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재 시기에서 계약을 맺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카이는 정령에 크게 관심이 없다. 전투 때도 다양한 정령과 계약을 맺어놓고도 실제로 사용한 정령은 치료할 때나 물의 정령을 불렀다.
유리는 원작을 읽으면서 그 점들이 아쉬웠다.
물질계를 배회하는 악마들에게 무엇보다 효과적인 방식이 정령이거늘.
“……난 너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
“악마들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거절하시면 곤란하다는 걸 알고 계시잖습니까.”
“악마와 싸우기 싫다는 게 아니다. 우린 싸울 수 없다.”
“싸울 수 없다니……?”
악마에 대해선 정령들도 잘 알고 있어서 굳이 설명할 필요 없이 침략한다고만 하면 도와줄 줄 알았다.
도리어 악마를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야 말로 정령들이다.
그들은 고대 드래곤이 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존재하는 것들 중 유일하게 악마를 경험해봤으니까.
그런데도 거절이라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모님?”
“유리.”
갑자기 미앵비슈가 유리의 손을 잡아 끌었다.
그녀는 유리를 잡고 꼬리 쪽으로 걸어갔다. 가면서 말하길.
“유리, 내가 어떻게 여기에서 널 기다렸는지 궁금하지 않니?”
그러고 보니 아직 여기에 대해서 묻지 않았었다.
우연치곤 작위적인 만남.
확실히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질문만 던져주고 답을 주지 않던 미앵비슈는 한참을 걷다가 어느 곳에서 멈춰 섰다.
그곳엔 웬 책상과 책장이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 꽂힌 책들 아래 쪽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유리…… 지음?”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