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19
제219화
처음에 시간을 끈다는 쉐르만의 의도를 알아차렸을 때, 그만한 사연이 있다고 대강 생각은 했었다.
신의 강탈이 가까워졌으니 시간을 끄는 거라고.
그러나 봉인체를 통해 이어진 소녀와의 세계를 보는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모든 예상이 부서졌다.
“대체 여긴…….”
가장 먼저 별무리가 가득한 밤하늘이 보였다. 그 가운데 부서진 보름달이 빛을 비추었다.
한밤중인데도 별과 달 때문에 대낮처럼 밝았다.
그 아래로는 보라색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말 그대로 모래가 보라색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신비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소녀의 나이대에 걸맞은 상상력이 발휘된 세계랄까.
그러나.
끼익!
보라색 사막 위로 수많은 소녀들이 똑같은 얼굴로 서로를 죽이고 있었다.
겉모습은 밖에서 본 소녀를 똑 닮았다. 다만, 싸우는 모습은 처절한 전사와도 같았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아까 봤던 소녀의 영혼.]“정령계 같은 거네.”
티르빙의 설명을 듣자마자 바로 이곳의 정체를 알았다.
정령계는 영혼들이 머무는 세계다. 즉, 한 생명체의 영혼도 곧 작은 세계가 될 수 있는 거겠지.
카이가 몇 번의 이전 환생에서 이와 비슷한 식으로 악마에게 정신 공격을 당했었다.
카이의 내면을 보여준 세계가 묘사됐던 적이 있는데.
‘카이에 비하면 이 세계는 양반인 건가.’
물론,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던 것이 실제로 펼쳐지니 영 현실성이 없었다.
그보다 이걸 세계라 봐도 좋을지.
끼익! 끼익!
인형들은 서로를 물거나 잡아 뜯으며 끊임없이 죽이고 죽였다. 피가 나거나 살점이 떨어지는 잔악한 광경은 없었지만, 같은 얼굴이 서로를 파괴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괴했다.
죽은 인형들은 바닥에 쓰러지는 순간 보라색 모래가 되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매캐한 먼지가 피었다.
‘끔찍하군.’
어떤 이유로 인형들이 나와서 싸우는지 몰라도. 한 사람의 영혼계라면 결코 사람답지 못한 세계임은 분명했다.
유리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다행히 인형들은 유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마치 없는 사람처럼 건드리거나 쳐다보지도 않았다.
반대로 유리는 이들을 건드려선 안 되었다.
건드리는 순간.
‘전부 나를 공격하겠지.’
사람에겐 내면을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방어기재가 누구에게나 있다.
외부에서 조금이라도 간섭했다간 바로 유리를 쫓아내려 들 것이다.
유리가 아는 선에서 가장 강한 방어기재를 가진 사람은 카이였고.
악마들은 그런 카이의 내면을 몇 번이나 공격했음에도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여기까진 왔고. 이제 어떡할 거니?]“진짜를 찾아야지.”
[그거 말처럼 쉬운 거 아냐. 찾아내는 순간 널 공격할 텐데?]“대화 정돈 가능할 거야.”
[대화라니…… 너무 속편한 해결법이네.]“최선이 대화고. 최악은 싸워야겠지. 네 말대로 꼭 신이 나를 따라준다는 보장은 없으니까.”
[진짜 대책 없네.]참고로 이곳에서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게 흘러간다.
아니, 아예 흐르지 않는다고 보는 게 무방하다. 정령계에서도 그랬듯 이곳에는 시간이란 개념이 아예 적용되지 않는다.
멈춘 것도 아니고, 흐르지도 않는다.
그렇다는 건 미앵비슈의 죽음을 당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끼리리릭!
아까부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인형들.
비명인지 환호성인지 알 수 없는 소리들만이 어두운 사막의 공허함을 덜어냈다.
유리는 티르빙을 뽑았다.
[찾는다더니, 이런 식으로 부르려고?]“시간이 급해.”
[여기서 시간은 통용되지 않는다면서.]“이 세계의 주인은 아니지.”
유리와 다른 세계의 시간은 상관없을지라도.
적어도 이 세계의 주인인 소녀에겐 아니다.
그녀의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다. 정확힌 시간 속의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을 터.
“지금 보이는 광경이 신을 강탈하려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작용 같은 걸 수도 있어.”
[그러네요, 티르빙 양. 확실히 이런 세계는 뭔가 불안정해요.] [결국 타이머가 돌고 있는 거네. 쩝.]그래서 티르빙이 마나를 부었고.
끼리릭?
호전적인 스탠스를 취하기 무섭게 인형들이 모조리 유리를 쳐다봤다.
가만히 있던 인형들, 서로를 죽이고 있던 인형들, 죽어가고 있던 인형들. 모두가 기괴한 마찰음을 일으키면서 돌아본다.
생기 없는 눈동자들이 번뜩였다.
어림잡아 몇 백 명. 바깥에서 싸우던 인형들과 숫자는 비슷하면서 상황은 더 나빴다.
‘마투기를 또 쓸 순 없어.’
신과 싸운다는 가정을 하면 마투기 같은 비기는 비기로 남겨놔야 했다.
뭐, 창조주가 마투기로 굴복할지도 모르겠다만.
적어도 괜한 힘 낭비는 곤란했다.
그러나 신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인형들 중 이 세계의 주인 또한 행방을 모르고.
‘더 최악이다. 무작정 싸움을 벌여봤자 얼마나 버틸지.’
효율적으로 싸워야 한다. 낭비를 조금도 하지 않고 적들을 죽여야지만 이 힘을 온전히 보존할 수 있다.
끼리릭!
측면에 가장 가까이 있던 인형이 몸을 던지며 덤볐다.
가볍게 티르빙을 휘두르자 세로로 갈라졌다. 반으로 쪼개진 인형은 관절마다 분리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그렇게 하나, 둘, 유리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인형들 자체는 별 거 없었다.
문제는 바닥이었다. 모래 위에서 걷고 뛴다는 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당장은 마나로 육체를 강화해서 움직일 수 있다지만, 육체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부터 과한 마나 소비였다.
그래도 당장 수가 있진 않았다.
일단 무식하게 해치워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유리의 마음 한 구석엔 묘한 확신이 있었다.
인형과 신, 이 세계의 주인도 자신을 죽이지 않을 거라고.
* * *
보라색 사막에는 모래와 하늘, 인형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곳을 지배하는 주인인 소녀와 소녀의 영혼에 붙어 지내는 신도 있었다.
소녀는 부서진 달에 걸터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리가 멀어도 그녀의 눈엔 한 남자의 움직임이 선하게 보였다.
“죽일까요.”
소녀가 물었다. 정작 물음을 받아야 할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는 분명히 있었다. 그리고 대답했다
[마음대로.]“저 사람이 내 영혼에 들어왔어요. 또 날 해치려할 거예요.”
[그치만 전에 봤던 남자와는 다르구나. 죽이기보단 지켜보는 건 어떠냐.]“그러시던지요.”
신이 뭐라 할 때마다 소녀는 관심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사실 오래 전 소녀의 영혼과 마음에는 다른 남자가 침입한 적 있었다.
자신을 거둬준 양아버지였고, 지금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사람이자 충직한 신하가 되었다.
물론, 당시엔 소녀의 신이 방어기재로서 그를 막아냈지만.
이후로 남자는 몇 번 더 침입하려 했었고, 신이 소녀를 대신해서 남자를 막았다.
그 남자는 당연히 쉐르만이었다.
그리고 쉐르만의 양딸인 소녀.
[아이야. 네가 원한다면 저 남자와 바깥의 남자들까지 전부 없애줄 수 있다.]“그건 아버지가 바라는 게 아니에요.”
[너의 아버지를 많이 사랑하나보구나.]“아버지가 날 살리셨으니, 나도 아버지를 살려야죠.”
소녀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원한다면 신의 권능을 빼앗겨도 좋았고, 할 수 있다면 죽어도 괜찮았다.
그만한 은혜를 입었으니 갚는 것이 당연했다.
[그렇다면 저 남자를 죽여야겠구나.]신은 소녀의 뜻을 헤아리고 이를 드러냈다.
소녀가 아버지를 위해 죽을 거라면, 저 남자의 손에 죽어선 안 됐다.
소녀는 아버지에 의해 죽어야했다.
그것이 그녀의 소원이니까.
“너무 많은 힘을 쓰면 안 돼요. 시간이 지체되어요.”
[이미 시간은 지체되었단다. 앞으로 시간이 더 걸리겠지.]사실 조금만 있었으면 소녀의 영혼에서 신이 완전히 분리될 수 있었다.
다만, 아직 완벽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해서 불안정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급하게 신의 추출이 시작되었었다.
유리가 바다 아래서 악마를 잡아온 것 때문이었다.
‘진짜로 악마를 잡아올 줄은 몰랐어.’
악마의 존재에 관해선 소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동쪽 대륙으로 악마들이 침략할 거라곤 상상조차 못했었다.
암흑 눈물을 통해 악마들이 침략을 원한다고만 알고 있었을 뿐.
그래서 바다 아래서 악마 리리스를 잡아온 걸 본 소녀의 아버지는 위기감을 느꼈다.
이대로라면 신을 얻기도 전에 악마들이 침략하겠구나.
이에 급하게 신을 강탈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었고, 이 과정에서 유리가 라지닉소스를 공격했다.
시간을 끌려고 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젠 시간 끌기도 무의미해졌다.
“가만히 놔둬도 죽지 않을까요.”
[죽이고 싶나보구나.]“제 발로 죽으러 온 사람이라 신경 쓰기 싫을 뿐이에요.”
[네 말도 맞구나. 여기서 저 남자가 살아나갈 방법은 없지.]결국 소녀와 신은 조금 더 남자를 구경하기로 했다.
꽤나 대단한 남자라고는 알고 있었다.
용인이 아닌 몸으로 용가에 들어가서 당당히 가주 후계 싸움을 선언했고, 지금은 마검 티르빙의 주인이자 전 대륙에서 관심있게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걸어온 행보가 과연 어떤 결말을 맞을지 궁금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리라.
소녀도 그에게 조금은 관심이 있었다.
고로 그가 싸우길 바랐다.
용인이 아닌 인간으로 용가의 가주가 되려는 자, 그리고 마검의 군주는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그렇게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시간 흐름이 의미 없어도 몸이 가지고 있는 체감 시간은 똑바로 돌아갔다.
‘아직도 싸운다고?’
꿋꿋이 궤적을 그리는 티르빙에는 지친 기색이 없었다.
쉴 틈 없이 인형들이 공격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찬찬히 앞으로 나아가며 길을 개척했다.
이상했다.
바깥에서 싸울 땐 힘들어하던 사람이 어째서 여기선 멀쩡하게 싸우고 있는 거지?
심지어 마투기라 불리던 기술도 쓰지 않았다.
대체 뭘까.
소녀의 호기심이 점점 커져갔다.
유리가 무슨 기술로 싸우고 있는지보다, 그냥 유리라는 사람이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무슨 목적과 의지로 저 사람은 여기까지 와서 싸우는 건지.
하루가 꼬박 지날 무렵이 되어서 처음으로 신이 소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이대로라면 인형들이 모두 죽겠구나.]“…….”
[아이야?]“……인형은 죽지 않아요.”
소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유리가 인형을 베고 있다곤 하지만, 인형은 죽지 않는다.
정확힌 잠시 동작을 멈추는 것에 불과했다. 테엽을 감아주듯이 힘만 준다면 저들은 다시 살아나리라.
“인형을 죽일 수 있는 건 인형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너와 나도 가능하지.]“그러니까 저 사람은 인형을 죽이지 못해요. 그런데…….”
[그런데?]“어째서 제 눈에 안 죽이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내가 저 남자를 죽이지 않을 거라는 걸, 저 남자도 알고 있는 거 같아서요.”
[죽이지 않는다? 죽이려고 했던 거 아니더냐?]“…….”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죽이려고 했다. 그건 확실했다.
하지만 알게 모르게 그녀의 무의식이 인형들에게 투영되고 있었고.
인형들은 유리에게 달려들기만 할 뿐이지, 살의는 하나도 없었다.
[안 되겠구나.]결국 신이 빙긋이 웃으며 나섰다.
[내가 죽이고 오겠노라.](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