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0
제220화
“아니요.”
소녀는 신을 말렸다. 그녀의 발치에서 부서진 달의 파편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질 거 같은 달의 조각에선 심상치 않은 마나가 흘렀다.
그러나 마나 속엔 어떠한 살의나 살기가 없었다. 그저 넘치는 힘을 마지 못해 뱉어내는 것들이었고, 이는 소녀가 가진 힘이었다.
“저들은 알아서 죽을 거예요.”
[인형이 너무 약하다.]“인형이 약해도, 저 사람 또한 약해졌어요.”
이곳은 전적으로 소녀의 공간이다. 그녀의 영혼이고, 그 주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맘만 먹는다면 죽이는 것 또한 생각대로 가능했으니.
실제로 유리의 육체는 이곳에서 크게 의미가 없었다. 물질계가 아닌 영혼계에서 육체는 돌아갈 곳이자 껍데기일 뿐.
단련을 거듭하며 단단해지고 드래곤 하트까지 가진 유리의 몸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물론, 당장 유리 본인은 느끼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신은 불안했다.
약해졌을 유리가 너무나도 쉽게 인형들을 물리치고 있었으니까.
‘도대체 어찌 저런 게 가능한 거지.’
소녀도 그렇고, 신은 유리의 등장이 몹시 당혹스러웠다.
거기다 과감하게 남의 영혼 세계에 침범한 것도 모자라서, 인형들마저 너무나 쉽사리 처리했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건지 신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아이야.]신이 최대한 조급함을 숨긴 채 소녀를 불렀다. 그러나 소녀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아래 광경을 주시할 뿐이었다.
그 신조차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 없었다. 말하자면 신은 당장 소녀의 생각을 읽어 헤아리고 싶었다.
그러지 못해 답답한 마음에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고 설득해봤지만.
소녀는 좀처럼 신의 입모양에 귀를 기울여주지 않았다.
이런 점이 마음에 들어서 소녀에게 붙었건만.
[지금은 저 남자를 쫓아내야 한다. 네가 원하는 대로 세상을 꾸리기 위해서, 그리고 나의 소원을 위해선 반드시 쫓아내야 해.]“…….”
[내가 부탁하마. 부디 저 자를 쫓아내라고 말해다오. 너는 말만 하면 된단다.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쿠르르르!
뇌기를 머금은 마법이 펼쳐졌다. 다가오던 인형들이 번개 폭풍에 휘말리면서 불타기 시작했다.
인형들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소녀가 지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인형들에게 꼭 남자를 죽이라고 명령하지도 않았다. 인형이 소모되는 건 애초에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어차피 인형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러나 이대로라면 분명 소녀의 세계는 무너질 것이다. 갑자기 침범한 한 명의 남자와 그가 쥔 마검에 의해서.
때문에 정작 속이 타는 쪽은 신이었다.
사실상 소녀에게 기생해서 겨우 존재성을 유지하고 있기에,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길 바라는 간절한 쪽은 단연 신일 수밖에.
또한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은 신만이 아닌, 소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죽길 바라는 것이냐?]결국 신은 던져선 안 되는 질문을 던졌다.
자신이 소녀에게 던진 질문이 돌팔매와 같다는 걸 알면서도 신은 기어코 물었다.
소녀가 천천히 신을 올려다봤다.
“저에게 죽고 싶은 거냐고 묻는 거네요.”
[아이야.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다. 네가 온갖 실험을 당하면서도 지금껏 살아있는 것이 누구의 덕인지는 잘 알고 있지 않느냐.]“그러니까 자살하고 싶냐고 물으신 거잖아요.”
[반대다. 죽지 말라는 것이다.]“……절 못 믿으시는군요.”
[지금의 널 이해하지 못하는 거란다.]“왜요? 제 마음과 영혼에 계시면서 어째서 절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죠?”
[그건 네가 벽을 두었기 때문이지.]신이라고 해서 소녀의 영역을 완전히 침범할 수 없었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녀의 영역은 신의 권능조차 발현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신은 항상 소녀가 궁금했다.
정확히는, 소녀가 자신과 함께 해줄지가 궁금했지만.
오늘로서 그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신의 경고는 어느 때보다 묵직하고 무서웠다.
그러나.
소녀는 여전히, 아직도 구경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신은 몰래 권능을 발휘하기로 했다. 소녀가 모를 정도의 약간의 권능, 하지만 생명 하나쯤은 우습게 해치울 권능이기도 했다.
* * *
유리는 손을 타고 뻗어나갔던 뇌기를 거둬들였다. 남은 뇌기의 폭풍 속으로 인형들이 쓸려 올라갔다가 잔해가 되어서 추락했다.
지금까지 잡은 인형 숫자만 해도 대략 100 구 남짓.
적당한 마법만으로도 인형들은 맥없이 휩쓸려 죽어 나갔다.
치열할 줄 알고 긴장했던 유리도 조금은 여유를 되찾았다.
“이상해.”
유리가 멀리서 몰려오는 인형들을 보면서 중얼댔다.
“어째서 여기 인형들이 더 상대하기가 쉬운 거지.”
[그러게.] [분명 밖에 있던 인형들보단 강해요. 근데…… 이건 마치.]“맞아, 싸울 의지가 없어.”
적어도 밖에 있던 인형들은 한 명, 한 명의 무위가 어지간한 기사 버금갔다. 마나로만 따져도 최소 6~7서클 이상. 마나를 다룰 줄 모르고 마법이나 기술들을 몰랐다 해도, 몰려왔던 병력 수로는 유리조차 상대하기 버거웠다.
마검과 마투기의 힘이 있었기에 그나마 상대가 가능했지.
그에 반해 소녀의 내면으로 들어온 뒤로는 마투기는커녕 티르빙을 제대로 휘둘러보지도 않았다.
무위는 물론, 인형들의 움직임은 살의가 전혀 없었다.
살의와 살기를 구분해서 발산할 줄 아는 유리로선 그 기운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싸울 의지가 있긴 한 건가.”
아니, 없을 것이다.
없는 걸 알면서도 유리는 그리 말했다. 마치 신에게 들으라는 듯이.
위를 올려다보니 부서진 달의 파편 위로 소녀와 거대한 그림자가 앉아 있었다. 소녀를 무릎에 앉힌 그림자는 새까만 색만 가득했다.
그들은 아까부터 유리의 싸움을 구경만 하고 있었다.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듯했지만, 유리에겐 하나도 안 들렸다.
높다란 곳에 위치한 달의 파편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었다.
“티르빙, 어떻게 생각해?”
[뭐가.]“이대로 싸워봤자 애꿎은 힘 싸움만 계속 될 거야.”
[끌어내릴 방법이 딱히 없어. 저기까지 뛰어오를 수 있지도 않고. 이럴 때 반이라든가 릴림의 날개가 있으면 좋으련만.]“너로 날개를 만들 순 없을까?”
[아이디어는 좋긴 한데, 난 추천하지 않아. 날개가 있다고 해서 날 줄 아는 건 아니잖니.]사실 릴림도 날개가 생기고 나서 바로 날아다니진 못했다. 연습에만 꼬박 몇 주를 투자하고 나서야 제 몸 하나 겨우 가눌 수 있었다.
아스칼론이 답답한 심정을 토해내듯 말했다.
[이래선 주인님이 바라던 대화조차 할 수가 없네요.] [대화를 원하지 않는 걸 수도 있어.]“증명하라는 걸 수도 있고.”
[증명? 뭔 증명?]“내가 자신에게 검을 들이댈 수 있는지, 자격시험이랄까?”
저 위에 있는 그림자는 신이 확실했다. 그리고 신과 신을 가지고 있는 소녀는 유리가 자신들의 세계에 들어오는 걸 허용했다.
바꿔 말하자면, 유리가 관을 꽂아 이 세계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얼마든지 유리의 접근 자체를 막을 수 있었다.
신이 있으니까.
그런데도 그들은 유리가 들어오는 걸 허용했다.
‘원하는 게 있다.’
그게 아니고서야 자신들을 죽이려는 사람을 들여보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유리는 소녀와 신을 포섭하러 오긴 했지만.
그들 입장에선 마지막으로 봤던 바깥의 상황을 고려하건데, 유리는 그저 저들을 죽이려고 찾아온 침략자에 불과했다.
‘뭘 원하는지는 차차 확인해보면 되고.’
그 전에 이것이 정말 자격시험이라면 무슨 시험인지를 알아내고 통과해야 했다.
일단, 무얼 시험하는지는 대강 알 법했다.
‘인내심.’
아무리 상대가 쉬워도 인형은 무한대에 가깝게 만들어지고 있다. 소녀와 신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세계이니 생성된 인형의 숫자는 끝이 없었다. 지금도 바닥 아래서 좀비처럼 인형이 흙을 파헤치고 올라온다.
이건 체력이나 지구력을 요구하는 시험과는 달랐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곳에서 줄지 않는 적과 끊임없이 싸우는 것.
인내하고 견뎌야 하는 싸움인 셈이었다.
다만, 이 시험을 통해서 뭘 해야 되느냐는 건데.
인내심이야 도서관에서 보냈던 시간들이 있으니, 유리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평소에 책상에 앉을 때도 한 자리에서 68시간 동안 책만 주구장창 봤던 적도 있다.
릴림이 그러다 허리 부러진다고, 오죽하면 억지로 유리를 끌고 연무장에 나가 교육 대련을 하곤 했다.
쿠우우우……!
그때, 갑자기 대지 아래서부터 검은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늪처럼 끈적이고, 바다처럼 파도쳤으며, 호수처럼 속이 새까맸다.
순식간에 발목부터 종아리까지 차오른 수면.
‘이대로 수장 시키겠다는 건가!’
하늘 위로 뛰어 오르지 않는 이상 빠져 나갈 곳은 없었다.
도망가기 위해 몸을 돌려봤지만, 어차피 뛰어봤자 나아지는 건 없었다.
유리는 부서진 달을 다시 쳐다봤다.
소녀를 안은 신이 사악하게 웃고 있었다.
‘인내심이 없는 건 신이었군.’
대강 예상은 했었다. 소녀의 세계에 신은 붙어서 사는 입장, 위기를 느끼는 건 소녀 본인보다 신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장단 맞춰 줄 마음이 없어.”
유리는 티르빙을 거두고 하나의 힘에 집중했다.
항상 이론으로만 고민하던 것들을 실현 시킬 때였다.
‘영혼은 하나의 세계. 지금 내가 여기 있기에 그 가설이 증명되었어.’
아직 이곳이 소녀의 영혼인지, 아니면 신이 만든 세계인지.
아니면 둘이 같이 구성한 세계인지.
무엇 하나 확신이 없어도 분명한 건 이곳은 누군가의 영혼이자 세계였다.
그리고 유리는 이런 세계를 구성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무형검, 혈계(血界)
촤라락.
형체가 없는 검들이 뽑아져 나오고, 붉은 피가 무형검에 색을 더했다.
세 자루의 무형검은 다시 형체를 분리하고 퍼뜨렸고, 유리 주변으로 돔 형태로 막을 형성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형들은 무식하게 막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 순간, 막과 닿는 신체가 먼지가 되어 얕은 바람에 흩날렸다.
작지만 유리의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다.
‘드래곤들이 보여줬던 계(界) 역시 이곳처럼 한 영혼이 가진 고유의 세계.’
드래곤들을 비롯해 정령들이 관장하는 속성들은 단순히 역할 구분을 해놓은 것이 아니다.
물, 불, 바람, 어둠, 그리고 유리의 혈(血). 이것은 계를 가진 이들이 오랜 시간 구축해온 자신들만의 영역이자 영혼이었다.
영혼이 클수록 계 또한 컸고, 계(界)를 키울수록 마나를 담을 수 있는 그릇도 커졌다.
드래곤이 최강의 생명체라 불릴 수 있던 것도, 어떤 생명체보다 커다란 계(界)를 지녔기 때문이다.
‘아버지에 비하면 아직 멀었군.’
세드리치가 무형검에 대해 가르치면서 그의 계를 보여준 적 있었다.
여러 드래곤과 여러 계(界)가 있었지만, 세드르치의 흑계(黑界)는 애초에 크기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이름 그대로 흑계는 그곳에 서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며, 끝을 모르는 어둠은 유리의 인내심마저 조급하게 만들었다. 땅을 딛고만 있어도 아래로 꺼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쉼 없이 내달렸던 기억이 있다.
그 때에 비하면 유리의 혈계는 미미한 수준이었다.
드래곤이 보여준 계에 발끝도 따라하지 못했으니.
“후우.”
그래서 이 참에 유리는 계를 넓힐 작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이곳을 ‘내’ 세계로 만들 정도로.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