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1
제221화
신이 만든 세계.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은 무엇인가? 신은 무엇인가? 그저 전지전능한 자를 가리켜 신이라 부르는 건가?
오만가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봤자 누구도 그 답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신은 적어도 자신이 만든 세계에서 전능하다는 것을.
추르르륵.
핏물들이 서로서로 부딪히고 얽히면서 세계를 넓혀갔다.
아칸 검법의 4식을 펼쳤을 때와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아칸 검법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점점 커져가는 느낌이라면.
지금의 혈계는 하늘로부터 범람하는 계곡과 같았다.
유리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무형검들이 회오리치고, 무형검들이 지나간 자리엔 끈적이는 핏물들이 줄기를 만들었다.
하늘에서 내려온 핏물은 바닥에서 올라오던 검은 물들을 붉게 물들이고 도로 밀어내고 있었다.
세계와 세계가 충돌한다.
소리 없이 힘겨루기를 하며, 결국 유리의 무형검이 만든 계가 소녀의 세계를 차츰 잡아먹었다.
비록 유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공간이었지만.
이것만으로도 유리를 죽일 수 있는 영향력은 사라졌다.
“후우우…….”
유리는 길게 심호흡을 뱉으며 무형검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조금이라도 힘이 흐트러지거나 방향이 틀어지면 무너질 수 있었다. 특히나 무형검이 그어놓은 선 밖으로는 인형들이 계속 다가왔다.
놈들은 선 밖에서 발을 열심히 움직여보고 있겠지만, 핏물에 닿을 때마다 부서지고 사라지고 있을 것이다.
[이런 게 가능할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유리가 만든 세계가 마냥 신기한 티르빙과 아스칼론. 정작 유리는 집중하느라 이마에 땀을 흠씬 흘렸다.
“이론적으로 생각만 했던 거라. 후우. 공간을 유지한다는 게 어렵네.”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라 하면 단연 첫 번째는 공간이다.
빅뱅을 통해서 우주라는 공간이 팽창하듯. 유리도 무형검을 이용해서 자신만의 공간을 넓혀갔다.
불안 요소가 있다면, 소녀의 영혼이라는 세계에 다른 세계를 펼치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공간을 만들면 몰라도.
남의 세계에 다른 세계를 구축한다는 건 아무래도 침략 성향이 강했다.
그러면 소녀의 저항도 더 거세질 터. 누구에게나 방어 기재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별로 저항감이 없는 걸?] [어째서죠? 상대방의 영혼에 침범하면 방어하려고 하잖아요. 악마들이 그 방어를 잘 깨서 문제였던 거고요.] [신의 권능 부릴 줄 알면서도 방어 기재를 펼치지 않는다, 라……. 대체 얘 뭐하는 애니?]유리야 말로 궁금했다.
그녀의 행동에는 의문점이 너무 많았다.
시간을 끌며 무언가를 준비하는 뉘앙스였으면, 막상 들어온 소녀의 세계는 바깥보다 훨씬 약했다.
게다가 신이 방어한다고 한 짓이 겨우 바닥에서 올라오는 물이었다.
그마저도 유리가 상상만 하던 가설을 진짜로 완성 시키면서 쉽게 파훼되었다.
지금도 딱히 신과 소녀는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는 상황.
“둘이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거지.”
신이 바닥에 물을 채우면서부터 소녀와 언쟁을 벌이고 있는 듯했다.
소녀가 나무라면 신은 주눅이 들어서 어깨를 떨어뜨렸다.
‘속셈이 뭐지.’
이쯤 되니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유리는 멀리 있는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어딘가 나른한 얼굴. 달리 말해 의욕이 없고 흥미도 없는 그 얼굴에는 표정이란 걸 지어본 적이 없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나 있는 걸까.”
[응? 뭐라고 했니, 꼬맹이?]“날 방해할 마음이나 있는 건지. 아니면 마음이 있기나 한 건지. 애매해서.”
[그게 무슨 소리야.]“여기 이 세계, 이상하지 않아?”
유리는 무형검 밖으로 펼쳐진 보랏빛 사막을 주시했다.
첫인상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취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보라색이 어디 흔한 색이던가.
보라색 꽃은 푸른 줄기와 파란 하늘, 갈색 토양이라도 같이 있지.
이곳은 그런 것도 없고, 인형에다가 공허한 하늘에 부서진 달만 있을 뿐. 심지어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사막과 하늘, 달, 인형, 그게 전부인 세계야.”
[확실히 우리가 살던 곳에 비하면 뭐가 없긴 하지만. 그게 이상한가? 여긴 저 신과 여자애의 세상이잖아.] [맞아요. 저 둘이 만든 세계라면 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죠. 뭐가 없어도 이상하지 않고요.]“이상하진 않지. 이상하지 않은 걸 우린 못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
이 세계에 오면서부터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그러나 그 다짐이 너무 강했던 건 아닐까. 너무 강해서 오히려 이상한 점들을 못 보고 있던 게 아닐까.
“한 사람의 영혼이자 상상력을 토대로 이 세계가 만들어질 거야. 그렇다면 이 세계의 상상력은 너무 진부하고 부족해.”
[아이라서 그럴 수도…….]“옆에 신이 있어. 여긴 신이 사는 세계라고.”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
이대로라면 유리는 소녀와 신을 죽이게 된다. 물론, 그에겐 그럴 마음이 없었지만.
신과 소녀는 자신들을 죽이러 온다고 알고 있으리라.
그런데도 허술한 이 세계는…….
“의도한 걸 수도.”
시험이니까.
유리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동시에 무형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빠르게 흐르던 핏물들은 소리가 멎어 든다.
이윽고 완전히 멈춘 무형검. 유리는 그마저도 거둬서 없앴다.
[야! 뭐하는 거야!] [주인님!]“기다려봐.”
혈계가 완전히 사그라들자 티르빙과 아스칼론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그러나 유리는 멈추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혈계만이 아니라 유리에게서 살의까지 사라졌고.
밖에 있던 인형들의 시체가 보였다. 얼마나 달려들었는지 작은 둔덕 높이로 쌓여 있었다.
키높이만한 참호를 쌓은 듯한 풍경 때문에 시체의 벽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인형들의 끼리릭 관절이 틀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유리가 힘과 살의마저 거둬들이자 작은 다툼을 하고 있던 소녀와 신이 그를 돌아봤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푹!
유리는 티르빙을 바닥에 꽂고는 그대로 주저 앉았다.
“못 해먹겠네.”
[야!]뜬금없는 행동에 귓가가 따갑도록 울렸다. 티르빙과 아스칼론이 번갈아가며 당장 무기를 뽑고 싸우라며 발악성을 질렀다.
그러나 유리는 앉아서 한쪽 턱을 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무형검을 오래 유지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이건 더하네.”
[야! 갑자기 적들을 눈앞에 두고 신세 한탄이야? 너 죽으려고 그래?]‘어.’
[얼른 일어나서…… 어?]‘어.’
정말로 유리는 싸울 힘도, 마음도 없었다.
무형검을 혈계로 펼친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나 소모도 엄청났고, 잠깐 집중하는 건데도 정신적인 소모가 엄청났다.
물론, 정신력과 집중력 하면 유리를 이길 사람이 세상에 몇 안 되었다.
하다못해 신과 소녀도 이대로 유리가 마지막 힘을 쥐어 짜내면서 혈계를 펼쳤더라면 이기지 못했다.
신과 소녀도 유리의 혈계를 보고 어떻게 뚫어낼지 갑론을박을 펼치고 있던 차였다.
그랬던 유리가 갑작스레 지쳐 주저 앉은 모습에 소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유리도 그런 소녀를 보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관심이 있나 보네.’
유리는 주저 앉았다가 힘든 ‘척’ 티르빙을 지팡이 삼아 일어났다.
그리고 몸에 있던 마나를 일절 지웠다. 오히려 힘들다면 이게 더 힘들었다.
혹시 몰라서 소모할 순 없으니, 숨기는 수밖에.
‘내가 정말 지쳐서 포기한 것처럼 보여야 해.’
이렇게 하는데는 이유가 있었으니.
잠시 후, 그 이유의 일환으로 소녀가 처음으로 먼저 흥미를 보였다.
“죽으려고 하네요.”
소녀는 그리 말했다.
유리가 혈계를 거두면서 인형들이 다시 움직였다.
이미 유리를 죽이라고 명령을 받은 인형들이라 별도의 지시 없이도 그들은 인형 시체의 벽을 넘어 유리에게 접근했다.
소녀가 보기에 유리는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저대론 진짜 죽겠어요.”
[아이야, 죽길 바라지 않는 듯이 말하는구나.]“…….”
[저 자는 우리를 죽이려 왔다. 그렇지 않고서 우리의 영혼에 침범할 이유가 없어. 밖에서도 라지닉소스를 침략하지 않았더냐.]“알고 있어요.”
“마음대로 제 권능을 뺏어쓰셨으면서, 달라고 하실 필요가 있나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데는 한계가 있지. 보다시피 내가 할 수 있었던 건 이 세상을 물로 채우는 것밖에 없었다.]“……그만.”
더는 신의 잔소리를 듣기 싫었다.
허나, 신은 놀랐다.
한 번도 소녀는 신에게 싫다고 한 적이 없었다. 아무리 잔소리를 해도 듣는 둥 마는 둥 넘겼다.
그랬던 그녀가 처음으로 ‘그만’하라고 말했다.
소녀의 영혼에 붙어서 존재를 유지하는 신의 입장에서 그녀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유리가 티르빙과 아스칼론에게 내리는 명령과 같았다.
신이라 해도 이 법칙을 벗어날 순 없었다.
끼리릭!
그 순간.
아래서 인형들이 기어코 유리를 덮쳤다. 마나를 전부 다 쓴(듯한) 유리는 처절하게 티르빙을 휘둘렀다.
약한 인형이라 여전히 쉽게 쓰러졌지만, 이번만큼은 물량 공세를 이겨낼 수 없었다.
시체들의 산은 점점 살아있는 산이 되어갔다.
잠시 후.
“젠장!”
이윽고 유리는 인형들에 파묻혔다. 무덤처럼 뒤덮은 인형 더미가 들썩여보지만 좀처럼 빠져나올 기미가 안 보였다.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어서 겨우 바깥으로 나왔지만.
그 뿐이었다.
그것을 끝으로 유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인형들도 움직임이 멎었다.
드디어 죽은 걸까.
신과 소녀는 갑자기 유리의 마나가 사라진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본 혈계는 누가 보더라도 엄청난 마나를 요구했다.
다른 영혼의 세계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행위가 단순한 마법도 아니고. 적어도 용언 마법을 쓸 줄 알아야지만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듣기로는 유리가 인간의 몸이지만 나이트워커에서 촉망받는 가주 후보였다고 하니.
인간이긴 해도 용언 마법을 쓸 수 있으며, 반대로 인간이기에 용언 마법을 오래 유지하지 못할 거라 봤다.
그렇기에 갑자기 유리가 힘을 잃어도 그들은 의심하지 않은 것이다.
“……응?”
이대로 끝난 줄 알고 내려다보던 소녀는 인형들 틈으로 유리의 얼굴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틈이지만 그녀의 세계에선 거리와 협소함 따위는 무의미했다.
“울고…… 있어?”
확실하다.
유리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죽어가는 눈동자에선 비통한 눈물이 끊이지 않고 흘렀다.
“어째서?”
순간 소녀는 유리가 궁금해졌다. 라지닉소스의 정보망을 이용해서 알아본다고 했지만, 정식 정보기관도 아니고 암살 길드 수준의 실력도 없기에 많은 걸 알지 못했었다.
기껏해야 인간 주제에 당돌하게도 용가에 들어갔다는 정도.
그리고…….
‘서자.’
그러고 보니 유리가 처음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블레이머의 장례식에서였다.
당시에 소녀도 그곳에 있었다.
라지닉소스의 국왕으로서 참석했던 자리라 홀대받는 처지였으나. 그와 별개로 그녀는 유리를 보게 되면서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장례식에서 그는 당당했었어. 맞서려도 하는 사람이었지.’
아무래도 인간의 몸으로 용가에 들어섰으니 주눅이 들법도 하건만.
유리는 조금도 누그러지는 기세 없이 조화를 올리고 아버지에게 마지막 작별을 건넸었다. 당시의 그는 울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신기했었고, 지금도 그런 유리가 신기했다.
‘울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런데 왜 어째서 지금은 울고 있는 거야?
무엇이 당신을 울게 했지? 무엇이 당신을 두렵고 힘들게 한 거냐고?
“안 되겠어.”
그 순간, 갑자기 소녀가 신의 품을 벗어나 달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