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3
제223화
유리가 구사할 수 있는 계는 오로지 혈(血)이 전부였다.
유리에 대해 이미 뒷조사를 해본 소녀와 신도 그가 가진 최선의 패는 혈계 정도일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신은 자신 앞에 펼쳐진 새로운 색감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이게 무어지? 대체 이건……!]붉게 물들었던 세계가 점점 어둡게 변해간다.
흑계인가? 신은 이 세계를 한 번 본 적 있었다.
과거, 그러니까 고대라 불리던 그 시절에 생명체의 정점이 뽐냈던 새로운 세계.
블랙 드래곤 세드리치가 형성했던 어둠은 삽시간에 하늘을 드리우며 공간을 짐어 삼키곤 했었다.
흑계에선 창조주라 할지라도 섣불리 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적어도 물질계 내에선 신은 세드리치를 힘으로 이겨낼 수 없었다.
[어째서 그 놈의 힘이 여기에 있느냔 말이다!]허나 말이 안 된다.
세드리치는 죽었다. 그만이 아니라 모든 드래곤들이 멸종했다.
다시는 계를 발휘할 생명체라고 해봤자 드래곤들이 남긴 용인 중 일부에 국한되었고.
현재로선 벤헬링턴이나 솔리드녹스의 빅스터가 간신히 계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마저도 벤헬링턴과 빅스터의 계(界)는 조상인 드래곤을 흉내 낼 수조차 없었거늘.
유리는 인간의 몸으로 고대 블랙 드래곤의 흑계를 펼치고 있었다.
“예정된 수순일지도.”
[뭐라?]소녀의 혼잣말 같은 한 마디에 신이 반문했다.
소녀는 유리의 힘을 직접 마주하고도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우리는 저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을 거예요.”
[아이야. 우리는 저 남자를 죽여야 한다. 저 자는 침범하지 말아야 할 곳을 침범했어.]“죽일 수 있다고 보세요?”
[…….]신은 답하지 못했다.
흑계를 펼치는 인간이라니. 과거의 창조주였다면 인간 하나 쯤은 우습게 죽였겠으나.
지금은 대부분의 권능과 힘을 잃고 한 인간에 기생해서 사는 처지였다.
물론, 소녀가 원한다면 최후의 힘을 다해 싸울 수 있다.
이곳은 엄연히 소녀의 세계니까.
하지만 소녀는 처음부터 싸울 의지가 없었다.
[아이야, 넌 저 남자에게…….]“그래도 사명을 다해야 해요.”
[그래…….]소녀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바닥 안에서 보라색 모래들이 폭풍우처럼 뿜어져 나와 땅으로 내려앉았다.
작은 씨앗이었던 폭풍우는 점점 덩치를 키워 하늘로 치솟았다.
소녀와 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계(界)였다.
[우리의 사명을 다하자꾸나.]물감이 번지듯 퍼지던 검은 흑계는 폭풍우와 맞닿으며 날카로운 쇳소리를 냈다.
카그그그극!
“큭!”
유리는 잇새를 물며 계의 확장에 집중했다.
계는 곧 영토이자 영지다. 자신의 영지를 얼마나 넓히느냐에 따라 힘의 크기가 결정된다.
힘이 있어야 영지가 넓어지지만, 힘을 보태줄 영혼이 유리에겐 둘이나 더 있었다.
계를 넓히는 힘은 결국 마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영혼의 개수와 영혼이 가진 위세에 따라 갈렸으니.
소녀와 신도 마지막 힘을 다해 유리의 계를 밀어냈다.
그러나 둘의 영혼으로 유리를 이겨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신을 이루고 있던 그림자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신님?”
[집중하거라.]이미 신의 그림자 중 한쪽 눈을 잃고 말았다. 그림자라서 티가 나지 않았을 뿐이지, 눈을 시작으로 영혼의 일부가 유리의 계와 싸우면서 잃어갔다.
소녀도 신에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챘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 정도 각오쯤은 당연했다. 신을 잃더라도 소녀는 유리를 막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캉!
단 한 순간에 승부가 났다.
완전히 흑계가 세상을 먹었고, 보라색으로 가득했던 사막이 새까매졌다.
밤하늘과 지평선의 경계가 사라졌다. 까매진 땅은 쓰러진 인형을 늪처럼 잡아당겼다.
남아있는 건 유리와 소녀, 그림자로 된 신, 그리고 유일하게 빛을 내는 부서진 달이었다.
“졌네요.”
소녀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입에선 주르륵 피가 흘러 내렸다. 그녀를 안고 있던 신도 고개를 저었다.
[패배를 인정해야겠구나.]“그럼 전리품을 줘야겠죠.”
[괜찮겠느냐.]“이대로 우리가 죽어도 저 남자가 가져갈 건 뻔해요. 그럴 바엔 순순히 내주는 게 나아요.”
[알겠다.]신은 소녀를 들어 올리곤 달 아래로 느릿하게 착륙했다.
아래선 유리가 그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티르빙.’
[말 시키지 말아주겠니. 지금 상태가…….] [저도 많이 힘드네요. 상대가 상대였던지라.]유리도 내색하지 않았을 뿐,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불쾌함에 구역질이 올라왔다.
마나야 고갈된지 오래고, 드래곤 하트는 터질 것처럼 뛰어서 격통을 불러왔다.
티르빙과 아스칼론이 머물고 있는 영혼도 쓰라린 느낌이 들었다. 영혼은 물질계와 상관없기에 통증을 느낄 수 없지만, 그만큼 무리를 했다는 방증이었다.
이대로 다시 소녀와 맞붙었다간 유리도 자신이 어찌 될지 장담하기 어려웠다.
계를 완전히 지배한 현재로선 유리에게 승기가 기울었고, 재차 전투를 벌여도 그가 이기겠지만.
결국 양쪽 모두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물론, 소녀와 신이 죽음을 불살라 가며 싸워야 하는 이유가 없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저 여자앤 죽고 싶어 했던 몸이니까.’
다만, 자살을 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죽어서 어떤 결과를 도출해야 하는 건지 확신이 안 들었다.
또한 죽고자 하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해서 싸우는 것도 이상했다.
그래서 어떠한 시험이라고 추측했었던 유리.
마침내 지상으로 내려온 소녀는 사뿐히 땅을 밟으며 유리와 마주했다.
드디어 가까이서 본 소녀는 그림자로 된 신처럼 표현하기가 애매했다.
그냥 평범한 소녀였다.
마을 어딘가에서 볼 법한 10대 소녀. 덧없이 평범하고, 어떤 분위기조차 풍기지 않는다.
만약 길거리에서 봤다면 그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갔을 것이다.
그나마 검푸른 머리색과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갸름한 눈초리가 그녀를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그런 소녀의 모습이 차츰 바뀌었다.
“얼굴이…… 달라지고 있어?”
“전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에요. 전 아무것도 아니에요. 무엇도 되어선 안 되죠. 그러니 당신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내 모습도 달라져요.”
“영문 모를 소리군.”
“모르겠죠. 당신은 다 잊었을 테니까.”
“……뭐?”
안 그래도 의문 부호가 가득하던 유리의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대체 이 여자애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내가 잊었다고? 뭘?
대답을 바라는 시선을 보내보지만, 소녀는 웃지 않는 낯으로 자기 할 말만 이었다.
“당신의 승리에요. 축하드려요. 이런 결과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원하는 대로 됐네요.”
“너무 순순히 인정해서 의심이 드는군.”
“제가 허튼 짓이라도 할까 봐요? 그치만 여긴 당신의 세계가 됐는 걸요.”
“그래봤자 너의 영혼이라는 건 변함 없지.”
“남의 영혼을 자기 세계로 물들여놓고 혹시 모른다는 소리를 하다니. 겸손인가요, 기만인가요. 이건 당신의 승리에요.”
사실 유리도 소녀가 어찌하지 못할 거란 건 알고 있다.
그가 혈계를 훈련하고 흑계까지 익혔던 건 원래 악마의 정신 공격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클라우드 하트에서 세드리치로부터 혈계에 이어서 흑계까지 익힌 유리는 계(界)야 말로 정신 공격을 막을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걸 알았다.
그리고 상대 영혼을 완전히 자신의 계로 지배하면 제 아무리 악마라하더라도 이겨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원작에서 카이도 성검 미뭉의 도움을 받아 계(界) 비슷한 정신 통제로 악마와 대항했었다.
다만, 이번 경우는 악마가 아니라 창조주라서 계를 지배하더라도 어떨지 확신은 없었으나.
완전히 지배하고 나니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달리 신의 기척이 온데간데 사라졌다.
느껴지는 신의 흔적이라 해봤자 소녀 곁에 있는 그림자 뿐.
완전히 제압했다는 확신이 들자 유리도 조금은 여유로운 태도를 취했다.
“하나 궁금하군. 넌 죽고 싶어 했던 건가?”
“맞아요.”
“그런데 왜 싸운 거지? 살고자 하는 본능 때문인가?”
“뒤늦게 살고 싶어서, 라는 대답을 기대하셨나보네요. 하지만 아니에요.”
“아니라고?”
예상을 뒤엎는 이야기에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누구에게나 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죽고 싶다, 라는 절망적인 마음조차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기에 생길 수 있다.
소녀가 싸웠던 것도 죽고 싶어 했지만 마음 속 어딘가에 살고 싶어 해서 그런 줄 알았다.
“죽고 싶었던 건 맞죠. 전 너무 오래 살았거든요. 가지고 있는 기억이라고 해봤자 어렸을 적의 학대, 그리고 주어진 사명 밖에 없으니 더더욱 괴로워서 죽고 싶을 수밖에요.”
“아까부터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는데. 알아 듣게 말해라.”
“그럴 수 없어요.”
“어째서?”
“당신이 바랐던 일인 걸요. 아니야. 당신이 바랄 일이라고 해야 될까요?”
“그 말은…….”
답답한 유리만큼 소녀도 답답했다. 설명하기가 복잡했다. 설명해도 되는지 모르겠고.
그러나 이 또한 ‘정해진 수순’일지도 모르니.
“말로는 어려우니까 조금만 보여드릴게요.”
소녀가 품속에서 조그마한 구체 하나를 꺼냈다.
유리 구슬 안에 구름이 담긴, 바로 클라우드 하트였다.
구름 속에선 천둥 번개가 몰아쳤다. 구름은 구슬 안에서 부는 바람을 따라 빙그르르 회전했다.
리펠리온 가에서 봤던 것에 비해 훨씬 작았으나 내용물은 결코 범상치 않은 게 확실했다.
“리펠리온 가의 보물을 왜 네가 가지고 있는 거지?”
“당신이 줬거든요.”
“내가?”
“답은 이 안에 있어요. 조금만이니까. 다 보진 말아줘요. 그게 우리의 사명이자 약속.”
그 순간 구슬에 금이 가면서 먹구름이 바깥으로 새어나왔다. 이윽고 어둠보다 더 짙은 암전이 유리를 덮쳤다.
* * *
아득해졌던 정신에 빛이 들어서면서 시야를 밝혔다.
유리는 번쩍 눈을 뜨고 몇 번 깜빡인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처음 보이는 광경은 낡은 오두막의 내부였다. 버려진 듯 거미줄이 가득하고 가구들은 본래 형태를 잃고 부서져 있었다.
도저히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았으나, 오두만 한쪽 테이블에 수염이 덥수룩한 한 남자가 앉아서 펜을 끄적였다.
유리가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저기.”
“…….”
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아예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저기요.”
“…….”
역시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
혹시나 싶어 유리는 남자에게 접근해 어깨를 건드려봤다.
하지만 유리의 손이 마치 유령처럼 그를 통과했다.
‘여기서 난 관찰자인가 보네.’
이런 형태의 클라우드 하트도 있다곤 들었다. 그저 기록용으로만 남기는 클라우드 하트는 이런 식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유리는 주변을 살폈다.
주변 환경만으론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버려진 오두막이라는 사실과 창밖에는 녹음 가득한 숲만 보였다.
결국 남자의 맞은편에 앉아 얼굴을 찬찬히 뜯어 살폈다.
덥수룩한 수염 때문에 못 알아볼 뻔했으나, 자세히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이상하게 날 많이 닮았는데…….’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뚫어져라 남자를 쳐다봤다.
부정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남자는 유리와 비슷했다.
그러다 문득 남자가 쓰고 있는 종이로 시선을 내렸다.
종이는 한 장이 아닌 뭉텅이로 가득했다. 책을 쓰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종이 상단에는 기간이 적혀 있었는데.
“날짜가 지금으로부터 11년 뒤라고?”
유리가 있던 현실의 시간은 1655년 가을 무렵이었다. 그런데 종이의 상단에는 1666년이라 적혀 있었다.
‘즉, 11년 뒤 나의 기억이라고?’
이해할 수 없었다.
11년 뒤의 내가 어째서? 아니, 무얼 위해서?
책의 내용을 보고 싶었지만, 지금으로선 클라우드 하트의 기억에 간섭할 수 없었다.
오로지 관찰자의 시점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지켜봐야만 했다.
그나마 단편적인 내용은 이러했다.
1666년 1월 14일.
드디어 시간을 되돌릴 준비가 끝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