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4
제224화
생경한 광경만큼이나 익숙한 풍경이라는 기분을 사뭇 지울 수가 없었다.
유리는 확신했다.
분명 어디서 봤었다고.
그리고 글을 쓰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이라고.
[꼬맹이.]“…….”
[꼬맹이!]티르빙이 고래고래 소리쳐 봐도 유리는 펼쳐져진 기억에 집중하느라 전혀 듣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놔두는 게 나을 거 같네요, 티르빙 양.] [하 참. 이런 거에 정신이나 팔리고. 얘 정신력이 이거 밖에 안 됐었나.] [그러는 티르빙 양도 충격 받고 있잖아요.] [당연하지. 여긴 미래라고! 아직 벌어지지 않은 세계! 여기에 우리 꼬맹이가 있었다는 게 말이 돼? 이건 마치……. 마치…….]말이 나오다가 말기를 반복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아스칼론도 알고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진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클라우드 하트는 기억을 담아 저장하는 장치. 거짓된 기억을 담아낼 순 없다. 기억을 조작하는 건 신이나 가능하니까.
[신이 장난치고 있는 거 아냐?] [무슨 이유로요.] [자기를 죽이려 하는 줄 알고?] [신의 입장이라면 그리 오해해도 이상하지 않지만. 그럴 바엔 끝까지 싸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그런가……?] [주인님 말로는 신이 시험을 치르고 있다고 했어요. 도망치거나 죽을 건 아니었겠죠. 이건…… 아마 시험의 대가일 거예요.]아스칼론의 추측에 티르빙도 조금은 수긍했다.
너무나도 손쉽게 패배를 인정한 신과 소녀는 유리에게 이 기억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뭐가 되었든 그녀들은 이 기억 끝에 무엇이 나올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를 이미 알아챈 유리는 기억에 더 집중했다.
하나라도 이곳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놓쳐선 안 됐다. 무엇보다 묵묵히 책만 쓰고 있는 또 다른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사이 책의 내용은 다른 날을 기록했다.
1666년 3월 25일.
병력 50만을 잃었다. 바알이 직접 나섰다. 정신지배를 당한 병력들은 기어코 자살하고 말았다.
우습게도 50만 여명의 병력이 절벽에 뛰어내리는 모습을 나는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윽!”
날짜가 넘어갈 때마다 적힌 내용들이 이미지가 되어 뇌리로 들이닥쳤다.
범람하는 기억의 무리는 송곳처럼 뇌를 찔렀다. 뜨끔한 아픔에 유리는 눈살을 구겼다.
특히나 이번 기억은 떠올리기조차 괴로웠다.
알고 있는 얼굴들이 하나씩 절벽을 올라 끝자락에 섰다. 늙어버린 유리는 그들에게 그만두라 소리쳤고, 안 되면 팔다리의 힘줄을 잘라 막았다.
그러나 50만 명의 부하들을 모조리 막아내기란 역부족이었다.
‘제발!’
늙은 유리는 최강자라 불렸다. 부하들에겐 대장이라 통했고, 악마들과 싸우는 선봉대장이었다.
부하들은 유리를 믿고 따랐다. 기꺼이 등을 맞대어 유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자들이기도 했다.
그런 그들이 홀린 듯 절벽 아래로 발을 디뎠다.
‘안 돼!’
늙어버린 유리가 울부짖어봤으나 끝끝내 죽음을 막지 못했다.
그 기억을 받은 지금의 유리는 입을 틀어막았다. 헛구역질이 올라왔다.
하지만 참았다. 기억 속 늙은 유리가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xx년 @xx워 #@이
다음에 적히는 글자들은 일그러져 있었다. 일부러 그렇게 쓴 게 아니라, 마치 잔상이 구겨진 것처럼 시야가 망가진 탓이었다.
그래도 그 다음 내용은 선명했다.
카이 안데르센이라는 신입이 입단했다.
카이!
역겨움도 잠시. 뜻밖의 이름을 보자 눈꺼풀이 절로 뜨였다. 유리는 혹여 집중하지 못해서 기억이 흐려질까 어떻게든 구역질을 참았다.
유리 자신이 있는 것도 놀라운 마당에 카이라니.
그는 성검의 주인이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많이 망가져 있었다.
무언가 잔뜩 어긋나 있었다.
그러나 성검 미뭉의 주인답게 정신 공격에 강했다.
악마를 이길 수단을 발견했다.
그것을 끝으로 늙은 유리는 깃펜을 내려놓았다가 한숨을 깊게 쉬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다른 날의 기억들을 기록했다.
라지닉소스라는 나라를 만들었다.
내 기억은 내 스스로 지울 수 있지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물들의 기억들은 지워야 한다.
그들은 시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들의 기억을 지워서 나를 지운다.
이건 내가 할 수 없다. 라지닉소스가 한다. 영문도 모르는 사명을 주어서 강제로 하게 한다.
그리고 라지닉소스도 마지막엔…….
전생으로 가는 길도 마련했다.
난 도망친다.
이것 말고는 답이 없다.
치직!
다시금 이미지에 노이즈가 꼈다. 전기가 튀는 것 같기도 하고,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 같기도 했다.
노이즈가 지나자 늙은 유리는 책을 덮고는 창밖을 바라바고 있었다.
늙었다고 해봤자 지금의 유리와 고작 10여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았으나.
보다 더 많은 풍파를 겪은 늙은 유리의 얼굴은 나이보다 더 들어 보였다. 악마와 전투를 벌이다가 생명력까지 쓴 탓이었다.
지금의 유리도 늙은 유리가 더 늙은 이유를 뒤늦게 알았다.
예상했지만 악마는 보다 더 강했다. 늙은 유리가 더 높은 경지에 올랐음에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더 강해져야 한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분별이 가지 않았다. 막연히 늙은 유리가 지금의 유리에게 던지는 조언과도 같았다.
담담하면서 단단한 어조에서 각오마저 느껴졌다.
늙은 유리는 책을 덮고 그것들을 바닥에 깔려 있던 양탄자를 들어 그 아래 비밀 공간에 넣었다.
그리고 기억을 구성하던 형태들이 운무처럼 희뿌옇게 변하다가 흩어졌다.
클라우드 하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 * *
“이게 뭐지.”
유리는 다짜고짜 소녀에 물었다. 살기 가득한 말투는 아니었다.
그보단 호기심으로 가득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날아든 질문에 소녀는 숨을 깊게 삼켰다.
“보신 대로에요. 당신은 먼 미래에 있었어요. 그곳에서 당신은 오늘, 아니 그 이전으로 되돌아왔죠.”
“내가 회귀를 했다는 거야?”
“조금은 달라요. 당신은 전생의 기억도 있지 않나요?”
“그걸 어떻게…….”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건 여기까지. 난 이미 당신과의 약속을 어겨가면서 ‘진실’을 건넸어요.”
“나와 약속을 했었다니? 무슨 약속?”
“라지닉소스가 왜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라지닉소스의 존재 이유.
그것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끝까지 오리무중으로 남았다.
원작에서 그들은 거대한 정보 기관을 운영하며 인류를 배신하는 짓까지 저질렀다.
신과 악마의 존재를 지우려 했고, 그 신은 소녀에게 붙어있다.
또한 그 신은 과거 멸망을 예언한 채 방관하고 있고.
만에 하나 어느 것 하나에도 거짓 없이 ‘진실’로만 꾸며졌다면. 클라우드 하트를 소녀가 가지고 있던 이유가 그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면.
“내 기억을 지우려고 했었나.”
“글쎄요.”
“내가 전생으로 간 건 내 선택이었나?”
“답해줄 수 없어요.”
“……부정하진 않는군.”
명확한 답이 돌아오지 않았지만, 이미 유리는 확신하고 있었다.
항상 전생의 기억이 궁금했었다.
어째서 난 전생을 떠올릴 수 있었는가. 무엇이 계기가 되었으며, 계기가 없더라도 전생과 현생을 무슨이유로 오갔는지 알고 싶었다.
평생의 의문이었고 답을 찾지 못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포기하고 멸망에만 매달렸던 유리.
하지만 이제야 윤곽이 보인다.
“내가 악마에게 패배하고 전생으로 도망쳤을 거야. 그리고 어떤 수단을 이용해서 시간을 되돌리면서 내 기억을 추출해냈겠지. 그 클라우드 하트가 증거야.”
클라우드 하트 속 유리는 먼 미래까지 악마와 싸웠었다. 그러나 패배했을 것이다. 패배하는 장면을 보진 않았지만, 유리이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늙어버린 자신에게 어떠한 힘도 없다는 걸.
“다시 묻겠어. 내가 스스로 기억을 지우고 전생으로 도망갔다가 시간을 되돌린 채 돌아온 건가?”
“말해줄 수 없다니까요.”
“그렇다면 너희의 임무는 뭐지? 내 기억을 지우는 것? 아니면 파괴하는 것?”
“후자이지 않을까요.”
“추측성 답변은 안 좋아하는데.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것도 별로고.”
“더 원하는 답을 전 줄 수 없어요. 여기 안에 더 있긴 하지만요.”
소녀의 시선이 클라우드 하트를 가리켰다.
아직 볼 수 있는 기억이 더 남아있는 건가.
“제가 말해줄 수 있는 건 당신이 내게 이 임무를 줬었다는 거예요. 시간을 거슬러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난 당신의 말을 따라 라지닉소스를 세우고 신과 악마의 흔적을 지웠죠.”
“넌…….”
[그만 묻거라, 아이야.]신이 말을 끊으며 끼어들었다.
그림자로 이뤄진 그가 혀를 찼다.
[우린 네가 원했기 때문에 이곳에 있다. 너의 기억 하나를 지켰고, 악마와 신의 존재를 지우며 다른 기억들을 지웠다. 그 사명을 준 것은 너였으니. 시간까지 거슬러가며 너의 부탁을 지켜온 내 아이에게 더 물어가며 고통을 주고 싶은 것이냐?]“내가…….”
잠잠한 어조로 다그치는 말투였다. 유리는 탄식을 뱉으며 반걸음 물러났다.
회귀를 겪었다면 비단 유리만이 아니었다. 눈앞의 소녀도 회귀를 했다.
불행했던 과거를 살아왔던 그녀는 오랜 삶을 겪으며 어떤 유리가 시킨 임무를 수행해왔다.
그 삶의 길이는 기억을 잃은 유리로선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소녀에겐 고통이었을 것이다. 불멸을 살아가는 카이가 그랬듯, 그녀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을 터.
그런 고통을 준 건 유리였다.
여전히 유리 본인은 잊은 기억을 못 보고 있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괴로웠다.
“나 때문에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슬퍼하지 않아도 돼요.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어요.”
“하지만.”
“나를 어둠으로부터 구해준 건 당신이었어요. 비록 잊었겠지만, 난 여전히 당신에게 감사해 하고 있어요.”
잊어버린 기억 속, 유리는 오래 전에 소녀를 구해줬었다.
이름도 이목구비도 흔한 소녀였기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유리만이 그녀를 봐줬다.
단 한 번의 손길이었다.
고작 단 한 번.
하지만 그 한 번이 소녀에겐 구원이었으니.
“제가 결정한 거예요.”
그걸로 충분했다.
“그러니까…….”
스르륵.
그때 갑자기 신의 형체가 흐릿해지더니 바람과 함께 흩날렸다.
[너의 잃어버린 기억이 더 궁금하다면 각오를 다지고 다시 우리와 마주하라. 그때는 기억을 완전히 볼 수 있게 해주겠다.]형체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느껴지던 강대한 기운마저 무너지고, 세계를 구축하던 껍질도 유리 파편이 되어 우수수 떨어졌다.
그야말로 붕괴가 일어났다.
동시에 소녀도 정신을 잃고 바닥에 쓰러졌다.
“이봐!”
다행히 머리가 부딪히기 직전에 유리가 받혀주면서 충격을 면했다.
[죽었니?]“아니, 살아있어. 아무래도 신의 권능을 마구 써서 혼절한 걸 거야.”
영혼 밖에 있는 소녀의 육신은 온갖 실험으로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쉐르만이 신의 권능을 빼앗기 위해서 저지른 실험들이었겠지.
그를 생각하니 속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쉐르만과 소녀는 별개로 움직였을 거다. 쉐르만은 자기 욕심 때문에 라지닉소스에 붙었을 거야.’
라지닉소스의 존재와 설립 의의가 정말로 유리의 기억을 지키고 부수기 위해서였다면, 쉐르만은 여기 있어선 안 되는 인물이었다.
분명 자기 욕심 때문에 라지닉소스에 충성을 다하는 자일 것이다.
설령 아니라 해도 상관없다.
유리는 소녀를 들쳐 업고 티르빙을 뽑았다.
붉은 검신이 검은 세계에 금을 그었다. 갈라진 틈이 점점 커졌고 그 사이로 하얀 빛이 새어 들어왔다.
아직 저 밖에선 싸우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