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7
제227화
언젠가 닥칠 문제였다.
그러나 유리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다.
진실.
항상 갈구하는 것이지만, 막상 듣고 나면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거부감부터 불러오기 마련이다.
지금 동료들의 표정이 딱 그랬다.
그들은 비량이 나타났을 때와는 달리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비록 하나의 표정이었으나 그 속에 담긴 여러 감정들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했다.
혼란, 의심, 불신, 그리고 괴로움.
유리는 눈꺼풀을 깊이 내리 깔았다가 떴다.
“여러분들을 이용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멸망에 대해 전부 알고 있었고,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가며 동료로 만들었죠.”
“말도 안 돼…….”
“아뇨. 말이 됩니다, 엘라트리오 황녀. 전 미래를 전부 보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회귀했다는 사실은 아직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면서요.”
유리도 정말 자신이 회귀를 했는지, 스스로 전생에 갔다가 돌아온 건지. 어느 것도 확신이 없었다.
그러나 정황상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항상 궁금했었으니까.
난 왜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가. 왜 하필 티르빙으로 암살당하기 직전에 전생을 깨달았는가.
어떻게 그 나이에 티르빙을 자연스레 다루어서 암살자를 죽일 수 있었는가.
단순히 원작을 알고 있어서가 아니라, 분명 회귀를 통해 몸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지금이라도 저와 연을 끊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오라버니. 그랬다간 멸망은…….”
“혼자서 막을 거야. 아예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거든.”
“…….”
무서운 침묵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뭐라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유리는 그들을 둘러보다가 벌떡 일어서서 문고리를 잡았다.
“시간을 좀 드리겠습니다. 당장 결심하기 어려우실 테니까요.”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그가 나가고 나서도 남은 동료들은 선뜻 말문을 열지 않았다. 그나마 카이가 행동으로 유리를 따라 나서려고 움직였다.
엘라트리오가 그에게 물었다.
“어디 가는 거죠?”
“어딜 가는 게 아니다. 여기 있을 필요가 없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눠야 할 거 아니에요. 당신은 유리 공자가 봤다던 소설…… 그러니까 미래의 기억에서…….”
“내 알 바 아니다.”
다른 누구보다 충격을 받았을 사람이 카이 안데르센이었다.
마치 카이의 존재는 유리에 의해서 만들어졌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아직까지 진실이 더 남아있기야 하겠지만, 유리가 일러준 이야기만으로도 카이는 거부감을 느끼고도 남았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저도 같이 가죠.”
비량도 그의 뒤를 따라 나섰다. 카이가 그녀에게 왜 따라오냐는 식으로 돌아봤다.
그녀도 카이처럼 개의치 않아 하고 있었다.
잠시 그녀를 노려보던 카이는 눈을 감곤 마찬가지로 방을 나갔다.
뒤이어서 비량까지 따라나서고.
두 사람은 유리가 사라졌을 방향으로 향했다.
붉은 카펫을 비추는 햇볕이 가득한 복도를 지나 정원으로 나오니 유리는 한 나무 앞에 서 있었다.
과거 별빛나무라 불리던 만금수였다.
나무를 올려다보는 유리 곁에 카이가 바짝 붙어 나란히 섰다. 유리는 그를 보지도 않고 물었다.
“묻고 싶은 게 제일 많은 사람은 너일 텐데.”
“뭘 물어 볼지는 알고 있겠지.”
“알아. 그 전에 네가 라지닉소스와 무슨 거래를 했는지부터 알아야 하겠어.”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카이의 거래는 꼭 알아야 했다.
카이도 만금수를 올려다봤다.
별빛나무의 영혼이 빠져나간 뒤로 만금수는 오히려 더더욱 푸르게 이파리를 피웠다.
“네놈이 봤다던 클라우드 하트 말고 다른 걸 봤다.”
“내 기억을?”
“보자마자 부서져 버리는 바람에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 기억에서 내가 있다는 걸 확인했고, 때 마침 그 기억을 찾으러 왔던 라지닉소스와 마주쳤다. 그들 말로는 클라우드 하트를 없애고 다닌다고 하더군.”
역시 라지닉소스는 내 기억을 찾아다니며 파괴하고 있었던가.
참고로 라지닉소스의 왕이었던 소녀는 기절한 뒤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였다.
영혼을 헤집어 놓은 꼴이니 회복까지는 시간이 걸리리라.
“그래서?”
“그 뒤로 라지닉소스와 거래를 했다. 기억을 찾아서 파괴하는 대신, 그들은 기억이 있을만한 장소들을 알려줬지.”
“……몇 개나 찾았어.”
“아직 두 개다. 하나는 처음 보자마자 파괴된 거고, 하나는 네놈이 본 거다.”
그 기억을 찾기만 했을까. 분명 카이는 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니 아까 전생 이야기를 해주는데도 별 반응이 없던 거겠지. 카이가 라지닉소스를 도왔던 점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떻게 생각해?”
“네놈 전생 말인가?”
“솔직히 난 잘 모르겠거든. 진짜 내가 회귀자이자 귀환자인 거 같긴 한데, 정작 내겐 실감이 나질 않아서.”
“그게 중요한가.”
“넌 그게 중요해서 라지닉소스를 도왔던 거잖아.”
“…….”
혼란스러운 유리만큼이나 카이도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불멸에 가까운 삶을 살면서 카이는 여러 이름으로 살았다.
많은 생과 각기 다른 환경을 지내오면서 결국 하나의 성격으로 귀결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닳고 닳아야지만 불멸을 견딜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카이는 자신이 무엇으로부터 비롯되었는지 궁금해 했다. 성검을 쥐게 된 순간부터 그 이전의 태생까지.
어쩌면 분노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삶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누가 참을 수 있으랴.
‘생각해보면 카이의 첫 삶에 대한 기록은 설정이나 원작에서도 거의 없어.’
뿐만 아니라 카이가 성검을 쥐게 된 경위도 어딘가 부자연스러웠다.
원작에선 카이의 첫 인생이 충직하게 살던 한 병사였다고 한다. 서쪽 대륙 출신이고, 처음 나타난 악마에 의해 모든 가족을 다 잃고 자신마저 죽었다.
그때 우연히 성검을 발견하면서 다음 생을 살기 시작했다는 게 카이의 시작이었다.
주인공답게 불행한 시작이지만, 주인공치곤 부실한 설정이기도 했다.
‘내 기억을 지우면서 카이의 탄생도 다수 지워졌다면, 그것도 이해가 돼.’
물론, 왜 지워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없어진 기억들 대부분이 악마에게 공격받기 쉬운 약점이라면 지우는 게 합당했다.
“뭐, 상관없어.”
유리는 그리 말하며 싱긋 웃었다.
“내가 본 원작에서 넌 결국 악마를 죽여. 내겐 그 사실이면 충분해. 나도 악마를 죽이고자 하는 목적은 변함이 없거든.”
“편리한 마음가짐이군.”
“그러는 너도 의아하긴 해도 악마를 없애는 데는 동조하잖아. 그러니까 날 따라 나온 거고.”
분명 방 안에선 유리를 놓고 오만가지 고민과 설왕설래가 오고 가고 있을 터.
그 속에서 카이가 나왔다는 건 그는 이미 결심했다는 뜻이다.
“……나를 너무 잘 알아서 짜증나는군.”
“기분 나빴다면 미안.”
“네놈 따윌 걱정했던 게 더 짜증나고.”
“뭐……?”
“아무것도 아니다.”
그 길로 카이는 훽 돌아서서 어디론가 걸어갔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밀리샤의 말로는 쉐르만과 싸울 때 카이가 제대로 돕지 않았다고 한다.
그때는 카이가 깨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컨디션을 못 찾은 탓에 그런 줄 알았지만.
“일부러 안 싸우는 느낌이었어. 망설이고 있는 게 분명해.”
밀리샤는 그리 말했었다.
망설임.
카이는 유리는 도와도 되는 건지 재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혹여 유리가 악마의 편이라 가정하면 카이는 그를 도와선 안 되었다.
쉐르만을 죽이는 것도 같은 일환이었으니 망설였겠지.
그러나 유리의 마음을 재차 확인한 마당에 카이라도 뭐라 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는 동료들에게 선택권을 줬다.
떠날 수 있다는 선택권을.
악마라면 그럴 리가 없었다. 악마는 떠나게 선택권을 주기보다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순간 죽이려 들 테니까.
그리고, 유리 본인은 몰랐으나 카이는 그의 고뇌를 잠시나마 엿 보았다.
그것은 불멸을 사는 사람과 똑같은 고뇌였다.
자신의 삶을 의심하고, 하지만 끝끝내 나아길 길을 정하는 고뇌.
카이가 떠나고 뒤이어 나왔던 비량도 유리 옆에 섰다.
“좋은 사람이군요.”
“성격이 좀 더럽긴 하지만, 좋은 사람이죠.”
“유리, 나 또한 악마를 직접 보았기에 그대의 과거와 미래가 어떻든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감사합니다, 비량 님.”
“그럼 전 좀 쉬어야겠네요. 육지가 익숙하지 않아서.”
비량까지 떠나고 나서 다시 유리는 혼자가 되었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푸르른 만금수만이 바람에 나부낄 뿐.
그 뒤로도 한참 동안 만금수를 바라보던 유리는 조용히 자리를 벗어났다.
* * *
미앵비슈가 깨어나고 3일 내내 가문 내는 축제 분위기였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왔으니 당연했다.
그러나 정작 유리는 집무실에 틀어박혀서 머리를 싸매며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리를 비운 동안 쌓인 업무도 있고, 서류 중에선 플레온 기사단에 입단하고 싶다며 찾아온 지원서가 제일 많았다.
보통 용가의 기사단은 다른 용인이나 봉신 가문의 사람들만 입단이 가능했다. 그에 반해 플레온 기사단은 신분, 종족을 막론하고 받아들였다.
노예든 귀족이든, 인간이든 용인이든.
실력만 된다면 얼마든지 수습생도가 될 수 있었다.
“심지어 이건…… 가문 직속 기사잖아.”
눈에 띄는 또 다른 지원서는 발령 요청서였다.
가문의 직속 기사들이 플레온으로 인사 발령을 받고 싶다며 보내온 것이다.
“다이올드가 없으니까 그 업무가 나한테 왔나 보네. 휴우…….”
자유의 관을 비롯해서 실질적인 기사단 총괄 업무는 다이올드가 맡았었다.
가주인 벤헬링턴이나 단장인 마리는 워낙 출타가 잦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와중에 부가주인 미앵비슈는 병상에 누워있으니.
“얼른 마무리 지어야 악마 대비를 하는데 말이야.”
그리 말하면서 유리는 전방을 주시했다.
유리의 집무실 한쪽에는 유독 깔끔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또 다른 환자가 누워 있었다.
라지닉소스에서 데려온 소녀였다.
그녀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했다. 엘카 말로는 실험 기구에 꽂혀있던 후유증 때문에 영영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클라우드 하트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는데 말이야.”
원래는 라지닉소스가 찾고 있다던 기억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일부러 지우려고 했던 기억이라고 하지만, 의아한 점이 있었다.
‘신은 분명 멸망을 예언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도우려고 한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아.’
소녀가 깨어날 수 없다면 그 답은 유리가 뿌려놓은 기억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또한.
애초에 기억을 지우려고 했다면 그냥 지워도 됐을 텐데. 클라우드 하트로 굳이 남겨놓았다는 건 분명 무언가를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그건 유리 본인이기에 추측이 아닌 확신할 수 있었다.
“기억을 지우라고 했지만 실제론 지울 의도가 없었을 거야.”
악마에게 정신 공격을 당할 수 있기에 기억을 지웠다지만, 반대로 카이처럼 닳아버린 성격이라면 기억을 가지도고 대항이 가능했다.
그걸 미래의 유리도 모르진 않을 터.
그도 그럴 것이 원작에선 카이가 악마를 물리쳤다. 이 기록이 남겨졌다는 건 그때까지 유리도 살아있었다는 뜻.
미래의 유리는 거기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하지만.
‘끝끝내 인류는 66명만 남았어. 그건 살아도 산 게 아니야.’
사실 유리가 멸망을 막으려 하지 않아도 카이가 알아서 멸망을 막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66명만 남은 인류의 숫자를 인정할 수 없었기에 유리는 스스로 멸망을 막기로 했다.
모두가 살아남는 미래를 위해서.
어머니가 살아갈 수 있는 세계를 위해서.
“도련님.”
고민으로 머리가 터질 즈음, 문 밖에서 노크와 함께 릴림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