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28
제228화
폭풍처럼 흐른 시간의 끝에 간만헤 맞은 달콤한 휴식은 아찔할 정도로 진하고도 느릿하게 흘러갔다.
특히나 유리에겐 어머니와 마주하는 시간이 특별했다.
그냥 앉아만 있어도 차분해지는 느낌.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마주한 모자(母子)는 집무실 테라스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며 같이 시간을 보냈다.
“유리.”
“네, 어머니.”
“네가 올해로 18살이던가?”
“벌써, 그렇게 됐죠.”
가문에 들어오고 꼬박 5년이 흘렀다.
그 동안 먹은 나이보다도 5년 만에 유리는 더할 나위 없이 성장했다.
아버지 세드리치로부터 물려 받은 드래곤 하트만 해도 8서클을 훌쩍 넘겼고, 코어는 진즉에 9서클에 가까워졌다.
지난 용궁을 다녀오면서 성장한 것이다.
남들이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경지에 다다랐고 이쯤 되면 벤헬링턴과도 견줄 법 했다.
“의외로 걱정이 없는 얼굴이구나.”
샤를린느가 그리 운을 뗐다.
유리가 빙긋이 웃었다.
“걱정해봤자 다가올 시간들이 달라지진 않을 거니까요.”
“그 말은…… 미래를 보았구나. 아니지, 미래를 본 자신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해야 되는 건가.”
“어머니도 알고 계셨군요.”
“그 이는 몰랐을 거야. 나야 신이니까 어렴풋이 알 수 있었지만.”
용신(龍神)인 샤를리느는 창조주만큼 전능하지 않으며 인간이라는 육체에 갇혀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리의 전생까지 모를 정도로 권능이 부족하진 않았다.
“언제 아셨어요?”
“알고말고 할 거 없었어. 이 어미는 신이니까. 태어날 때부터 네가 범상치 않았다는 건 알았단다. 그러다 암살이 일어났을 때 살아난 모습을 보고 확신했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말도 안 됐다.
3살짜리 아기가 어찌 암살자를 죽이겠는가. 기적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았었다.
그러다 나이트워커에 들어오면서 유리가 티르빙의 주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
“조금은 섭섭했어.”
“네?”
“그렇잖니. 분명 네가 암살자를 물리쳤는데 넌 이 엄마한테 한 번도 티르빙에 관해서 말해주지 않았었잖아.”
“아, 그건…… 아무래도 티르빙이란 게 그렇잖아요.”
“알아. 그냥 해본 소리란다.”
실없는 대화였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 환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러다 유리가 조금은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제 전생에 대해서 어머니는 얼마나 알고 계신가요.”
“나도 자세히는 모른단다. 확실한 건 전생을 기억하는 자들은 스스로 의도한 환생을 거듭한다는 것 정도.”
“제가 원해서 전생으로 갔다가 다시 태어났다는 거군요.”
“그 이가 그랬었거든.”
그러고 보니 아버지 세드리치도 미뭉을 갖고 환생을 반복했었지.
그렇게까지 삶을 반복하면서 샤를린느와 만나려고 했었다.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제가 미뭉을 쓴 건 아닐까요?”
“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유리는 창조주의 소녀가 보여줬던 클라우드 하트 내용을 샤를린느에게 알려줬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샤를린느의 얼굴엔 어떤 변화도 없었다.
가볍게, 그러나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들은 샤를리느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미뭉에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은 없단다. 하물며 미뭉은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영혼을 옮기는 환생. 그에 반해 너는 다른 사람의 몸이 아닌 본인 그대로 시간을 되돌렸어.”
“그렇군요.”
“물론, 전생에 다른 사람의 몸으로 갔었지만. 난 그 기억조차 믿을 수가 없구나.”
“꾸며졌다는 거군요.”
“그래.”
샤를린느의 추측대로 유리도 전생의 기억이 썩 신뢰도가 높진 않았다.
유리가 유일하게 또렷이 기억나는 전생의 기억은 스마트폰을 통해서 본 소설이었다.
그 외적인 삶은 전무하다시피 허술했다.
“이곳 말고 다른 세계가 있을 순 있겠지. 그건 창조주만 알 거야. 그러나 시간만이 아닌 공간마저 뛰어넘는 능력은 창조주가 아니고선 불가능해.”
“동쪽 대륙에서 서쪽 대륙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죠.”
“그래, 그래서 차라리 이 어미는 전생의 기억이 실존했다기보다 너 스스로 만든 방어기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전생마저 악마에 대비하기 위한 위장이라는 건가.
가능성이 있다. 설령 위장이 아니라 진짜 기억이라 해도 마찬가지.
“어머니, 아버지는 미뭉을 마지막에 어떻게 처리하셨나요?”
“그건 왜?”
“문득 카이가 아버지의 또 다른 환생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어서요.”
물론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유리는 구태여 물었다.
“그럴 리가 없어. 그 이는 죽었어. 그 사람은 죽음으로 장난칠 사람이 아니야. 그 사람도…… 영원불멸의 삶이 괴롭다는 걸 알았거든.”
“아…….”
순간 유리는 제 질문이 보다 더 어리석었다는 걸 알았다.
샤를린느를 만나기 위해서 미뭉의 무한 환생을 이용했지만, 단순히 좋았던 시간만은 아니었으리라.
샤를린느는 그런 세드리치에게 너무나도 큰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고 끝까지 찾아올 걸 알면서도, 그녀는 용신으로서의 사명 때문에 그를 피해 다녔다.
사랑하는 그 이가 괴로울 걸 알면서도 말이다.
결국 그 죄책감을 보상하듯 세드리치와 결혼하여 지금에 이르렀지만.
“어머니 탓이 아니에요.”
샤를린느의 심경을 읽기라도 한 듯 유리가 조심스레 한 마디를 건넸다.
“아버지가 미뭉을 끝끝내 버릴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 덕이에요.”
“알고 있어. 그래서 그 이의 죽음이 더 안타깝구나.”
“…….”
불멸의 저주로부터 벗어나 드디어 필멸을 이룩할 수 있게 되었던 아버지.
남은 생을 행복하게만 보내면 됐거늘.
허무하게도 그는 다이올드에 의해 죽었다. 정확힌 악마의 손에 의해.
유리는 찻잔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복수할 겁니다. 반드시. 아버지의 억울함 죽음을 위해서, 그리고 어머니를 위해서요.”
지금껏 유리에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목표는 어머니였다.
실제로 나이트워커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유리는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아버지가 밉니?”
“아뇨.”
“슬퍼?”
“아뇨.”
“원망스러워?”
“아뇨. 그냥…… 아무렇지도 않아요.”
장례식이 끝나기도 전에 나눴던 그 날의 말들.
그땐 진심이었다. 유리에게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을 어찌 사랑할 수 있으랴.
허나 그리워하지 않았다면 거짓이다. 하물며 아버지와 어울리는 남들을 보며 아버지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고민도 했었다.
그저 어리광을 부리거나 표현하지 않았을 뿐.
“말이라도 고맙구나.”
샤를린느가 일어났다. 원래 그녀는 조금이나마 유리를 위로해주려고 방문했었다.
비록 미앵비슈를 되살리는 기적을 일으켰으나, 릴림으로부터 유리의 전생이라든가 여타 이야기를 듣고 그가 힘들어 할 줄 알았었다.
그러나 역시.
누군가의 아들답게 쓸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구석은 조금도 없었다.
그 누구처럼 올곧고 단단해보였으니.
“아, 참. 유리. 정말로 전생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궁금하다면 굳이 창조주가 아니고서 물어볼 만한 존재가 있단다.”
“그게 누구죠?”
“그건…….”
* * *
미앵비슈가 깨어난 기쁨도 잠시.
가문은 다시금 바쁘게 돌아갔다. 그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이올드를 잡으려는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가문의 정보망으로도 그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혹자는 악마의 도움을 받아 서쪽으로 도망친 거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으나.
서쪽으로 건너갈 방법도 없거니와, 이미 그쪽에 가문의 기사들이 대기하고 있기에 가능성이 없었다.
애초에 다이올드는 무력 면에서 뛰어난 용인은 아니었다.
그나마 용인이니까 평범한 자들에 비해 무력이 뛰어난 것처럼 보였을 뿐.
가문 내에서의 무력은 범상치 않다고 부르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권력욕 때문이었다.
벤헬링턴의 직계들 중 가주의 자리에 욕심을 가졌던 이들은 다이올드 말고는 없었다.
가주 후보였던 블레이머, 세드리치조차 사랑 때문에 가문 밖을 돌아다녔으니.
“의지가 없는 놈들한테 맡길 수도 없고, 참…… 쯧!”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벤헬링턴의 말에 맞은 편에 앉아 위스키를 따르던 마리가 물었다.
두 사람도 오랜만에 시간을 가져 식당에 나와 여유를 부렸다.
마리는 위스키를, 벤헬링턴은 독한 와인을.
어지간해선 일에 빠져 사는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이 아니고선 이런 여유를 부릴 때가 없을 것만 같았다.
마침 할 이야기도 있었고.
“가주 후보 말이야. 이대로 다이올드 그 새끼가 됐으면 어쨌나 싶더군.”
“벌써 그 새끼가 됐군요.”
“내 새끼를 새끼라고 하지, 그럼 뭐라 해?”
“아니에요. 그 새끼 맞죠.”
내색하지 않아서 그렇지. 나이트워커 부부에게 자식의 배신은 크나큰 아픔으로 다가왔다.
제 아무리 냉혈한이라 불리는 벤헬링턴일지라도 하나씩 자식들을 떠나보내는 심경이 썩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더러워서 당장 어디라도 화풀이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마리, 당신 생각은 어때?”
“다이올드 얘기라면 장로들을 다 쳐내야죠.”
“역시 그렇지?”
“그들은 악마가 된 그 놈을 보고서도 붙잡은 썩은 줄을 놓지 못하는 놈들이에요. 놔둬봤자 썩다가 악취만 풍겨요.”
“안 그래도 몇몇은 벌써 솎아냈어.”
다이올드가 떠나고도 벌써 2달이 지났다.
어수선한 가내 분위기를 수습하지 못할지언정. 눈이 먼 장로들은 다이올드의 복권 문제를 놓고 건의나 하고 있었다.
어떤 장로들은 차라리 미앵비슈를 억지로라도 가주를 시키자고 했다.
이에 벤헬링턴이 최근 칼을 빼들었다.
장로 두 명을 처형시킨 것이다.
“지랄 염병도 한 번이지. 악마한테 빠진 놈을 복권하자는 게 말인가?”
“당신답지 않게 빠른 처리네요.”
“나 원래 빨리 죽였어.”
“그게 아니고. 아직 업무처리할 정신은 아니라고 봤거든요.”
가사 상태가 되고 돌아온 미앵비슈를 놓고 벤헬링턴은 웬 종일 그녀 옆에 붙어서 지냈다.
그녀가 깨어난 직후에도 그랬다.
때문에 업무처리는커녕 가문을 돌볼 정신도 없을 줄 알았거늘.
“이래 보여도 할 일은 해.”
“유리가 한 게 아니고요?”
“…….”
“맞나보네요.”
“그야 그 놈 말고는 가문을 맡길 사람이 없으니까.”
현재 가주 후보라 거론되는 인물이라곤 유리가 유일했다. 그런 그에게 가문 업무를 맡기는 편이 가장 그림이 좋았다.
물론, 샤를린느라든가 빌, 겔런, 정 아니면 마리에게 가문을 맡겨도 됐다.
그런데도 벤헬링턴은 유리에게 가문 업무 대부분을 줘버렸다.
“유리에게 힘을 주려고 하는 건가요.”
마리의 물음은 질문이 아니었다. 확신하는 말투였다.
이미 장로 두 명의 처형만 해도 그랬다. 유리 손으로 가문의 핵심 인물들을 쳐내라고 한 꼴이고, 유리 입장에선 자신에게 대적하는 장로들을 죽일 힘을 얻은 셈이다.
노골적인 밀어주기가 분명했다.
그러나 마리는 이 형국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힘으로 억누르는 권력은 좋지 않은 거, 당신도 알잖아요. 하물며 처형이라……. 폭군이나 할 짓을 하면 반발이 일어날 거예요.”
“나도 알아.”
“알고도 그 애한테 권력을 주고 두고 보기만 했다고요?”
“내가 주고 싶어서 준 거 아니야.”
“그럼요?”
“그 놈이 달라고 했어.”
순간 마리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마치 스스로 폭군이 되겠다고 한 말처럼 들리지 않은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