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32
제232화
이 세상에 유리를 오라버니라고 부르는 사람은 단 한명 밖에 없었다.
채럿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바닥에 아무렇게 쌓여 있던 종이 더미를 뚫고 유리에 달려왔다.
그리곤 다짜고짜 푹 안겼다.
“오라버니!”
“채럿? 갑자기 무슨 일…… 아니, 얼굴은 왜 이래?”
그녀의 뽀얀 뺨에는 거뭇거뭇한 자국이 잔뜩 묻어 있었다. 금발도 곳곳이 탄 것처럼 시커멨고, 입고 있는 검은 로브에선 탄내가 풍겼다.
대체 어디서 뭘 하고 왔는지 몰라도, 불의 정령을 다룰 줄 아는 그녀였기에 화상을 입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기다 전투용 로브였으니 망정이지.
“채럿, 뭘 하다 온 거야?”
“저! 드디어 해냈어요!”
“해냈다고? 뭘?”
“라군도 님이요!”“어……?”
불의 정령왕과 직접 계약한 날, 라군도를 소환한 뒤로는 다시는 그를 소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정령들은 어지간해서 계약 자체가 어렵다. 그 중 정령왕은 자아가 가장 강해서 계약을 맺어도 어지간해서 소환에 응하지 않는다.
이를 극복해도 문제다.
정령을 중간계에서 유지하기 위해선 계약자가 가진 모든 에너지를 소모한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공유하는 형태라고 보면 되었다.
마나가 특출 나지 않은 채럿은 육체적인 체력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도 특출 나지 않았으니, 소환 자체가 힘들 수밖에.
“저 이제 1시간 동안 유지할 수 있어요!”
“소환만이 아니라 1시간이나?”
“네!”
요즘 들어서 채럿이 뭘 열심히 하고 있다고 듣긴 했다만.
어쩐지 그 사이 키도 부쩍 큰 거 같기도 하고, 말랐던 팔뚝에도 살집과 근육이 조금은 붙었다.
‘착각이…… 아니다.’
어쨌든 라군도를 소환하고 유지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니. 유리도 진심으로 기뻐하며 축하해줬다.
“대단한 걸. 라군도 님 성격에 밖으로 다시 나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저도 얼마나 고생했는지 몰아요. 대체 그 분은 뭐가 그렇게 불만이 많은지. 제가 진짜 우연히…….”
“크흠!”
그때 옆에 있던 랭글러가 헛기침을 뱉자 채럿도 그제야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유리로부터 떨어졌다.
거뭇해진 뺨 아래로 보일 정도로 붉기가 달아오른 그녀는 랭글러와 눈도 못 마주쳤다.
랭글러도 무안했는지 유리가 보던 서류를 가져가버렸다.
“나중에 다시 뵙겠습니다.”
빠른 걸음과 함께 멀어진 랭글러가 사라지고.
그가 사라진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채럿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풉, 푸하하!”
“크크.”
유리도 한참 동안 따라 웃었다.
이렇게 웃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종종 즐거웠던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닥쳐올 일들을 대비하느라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최근엔 악마 침공이 가속화되면서 작은 여유조차 못 가졌다. 유리만이 아니라 가문 전체가 그랬다.
한참 그렇게 더 웃고 나서야 유리는 책상에서 일어났다.
“잠깐 쉴까? 오랜만에 채럿이 해주는 코코아가 마시고 싶네.”
“와아! 그럴까요? 제가 다른 차는 못 내려도 코코아는 진짜 잘 하거든요!”
“오랜만에 정원에 나가서 마시자. 기왕 쉬는 거 제대로 쉬자고.”
“좋아요!”
산더미 같은 업무는 잠시 미뤄두기로 했다. 어차피 급한 업무는 가주 대행직을 맡고 다 처리했었다.
유리는 집무실을 아예 나와서 정원으로 먼저 나갔다.
그 사이 채럿은 직접 부엌에 갔다가 따듯한 우유와 코코아 가루를 가지고 돌아왔고.
릴림도 눈치껏 담백한 과자들을 잔뜩 챙겨들고 왔다.
나무 아래 그늘에 자리를 깔고서 금방 먹음직한 것들이 차려졌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유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릴림, 그…… 날개는 안 접을 수 없는 거야?”
레벤나와의 교감 이후 날개가 생긴 릴림은 이제 자유로이 날아다닐 수 있었다.
그래서 평소 접고 다니거나 숨길 수 있다고 해서 숨길 줄 알았는데.
딱히 날아다니지 않으면서 날개를 내놓고 다녔다.
분명 하녀들이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을 텐데도 말이다.
“이게 편해요. 레벤나도 이게 낫다고 했고요.”
“그래, 맞아. 날개를 숨기고 다니는 게 얼마나 불편한 줄 알아?”
그때, 유리의 목덜미 아래서 작은 얼굴이 튀어나왔다.
리리스였다.
갑작스레 등장한 작은 사람에 채럿이 기함을 토했다.
“오, 오라버니! 그거?!”
“아, 맞다. 소개를 안 했었구나.”
릴림은 레벤나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기에 놀라지 않는 기색이었다. 도리어 흥미롭게 리리스를 쳐다봤다.
유리로부터 나온 리리스가 날개를 퍼덕이며 그들을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밖에 나온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기지개를 펴듯 날개를 퍼덕이던 그녀는 릴림 코앞에서 멈췄다.
“놀랐니, 용가의 어린 소녀? 하긴 악마를 보고 놀라지 않으면 그게 비정상이지.”
“아, 악마라면…… 아! 혹시 오라버니가 말씀하셨던 리리스!”
“맞아. 반갑단다.”
나이트워커로 유리가 돌아오면서 사정 설명을 다했을 때 리리스에 관한 이야기도 했었다.
당시 리리스의 존재를 말로만 설명해줬었을 뿐, 실제로 보여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다행히 바로 경계심을 지운 채럿은 리리스를 손바닥 위에 얹고 대화까지 시도했다.
“시, 신기해요. 악마가 우리 편이라니.”
“편이란 건 없단다, 소녀야. 난 그냥 그 놈들이 싫을 뿐이야. 그냥 협조 관계로만 생각하렴.”
“그래도요. 아, 마침 코코아를 너무 많이 갖고 왔는데, 같이 드실래요?”
“인간들의 차?”
“제가 진짜 잘 타거든요!”
“그래, 뭐. 한 잔 줘봐.”
예전 같았다면 소심해서 아무와도 말을 섞지 않았을 채럿은 어느덧 처음 보는 리리스에게 차까지 권하고 있었다.
리리스는 작아진 채로 앉아서 코코아가 우유에 녹길 기다렸다.
하얀 우유가 갈색으로 변하는 동안, 여유 속에 또 다른 여유가 지니갔다.
그 틈에 유리는 그간 궁금했던 것들을 속내에서 꺼냈다.
“결심이 좀 섰어?”
“네?”
“내가 원하면 뜻을 같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거 말이야.”
먼저 채럿이 찾아왔다는 것부터 결심이 섰다는 뜻이었다. 그럼에도 구태여 물었다.
내심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혹여 기대했던 방향과는 다른 결심을 했을 수도 있고.
그리고 정말로 채럿은 기대와 다른 대답을 해줬다.
“무슨 말씀이에요, 오라버니. 결심은 오라버니가 절 언더하울에서 도와줬을 때부터 섰었죠!”
“어?”
“뭐가 되었든 오라버니는 그 지하에서 구해줬어요. 그 날 일이 아니었다면 전 더러운 정보나 사고 팔면서 지냈겠죠.”
“그치만 그게 모두 의도된 거라면.”
“괜찮아요.”
채럿은 여느 때처럼 티 없이 웃었다.
미래를 알고 이용했다는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채럿도 상처를 받을 줄로만 알았다.
유리라도 그랬을 테니까.
하지만 한 번도 채럿은 상처를 받지 않았다.
“저한테 오라버니는 오라버니인 걸요. 결심이고 뭐고 가족인데, 같이 싸워야죠.”
“…….”
후두부를 둔기로 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걱정하진 않았었다. 동료들이 배신하지 않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 악마와 싸울 것이다. 싫어도 그렇게 된다. 유리 옆에 같이 싸우리라.
하지만 동지 혹은 전우라 부를 수는 없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벌어질 전투 양상은 상당히 달라진다.
카이가 끝끝내 세상을 구하고도 실패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요.”
채럿이 그리 말했다.
“저뿐만이 아니라 다른 분들도 오히려 오라버니를 기다리고 있어요. 저처럼 훈련하느라 찾아오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다들 훈련하고 있다고? 진짜?”
“그치, 릴림? 릴림도 이자벨 언니랑 대련하고 있잖아.”
“맞아요.”
릴림, 이자벨만이 아니라. 블레이크는 일부러 기사단에 들어오는 외부 의뢰 중에서 어려운 것만 골라서 파견을 다녀왔다. 훈련과 경험을 위해서였다.
베리온 제국 황실의 렉슬러도 따로 기사단을 비밀리에 창설해서 정예를 뽑아 훈련을 시켰다.
엘라트리오도 리펠리온의 협조를 받아 간단한 마법을 배우는 중이었다.
“더 놀라운 거 알려줄까요? 카이 경이 밀리샤 경한테 검술 가르쳐 주고 있어요!”
“……거짓말.”
“진짜에요!”
다른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카이까지 조용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니.
그것도 한 성격하는 밀리샤를 가르쳐주고 있다는 사실은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릴림이 따로 첨언을 해주기 전까지는 작심삼일로 가르쳐 준다고만 믿었다.
‘다들 열심히 하고 있구나.’
걱정하지 않았다.
대신 무서웠다.
멸망을 막더라도 다른 것들을 미리 잃게 될까봐.
그러나 그런 두려움은 기우였다. 유리의 동료들은 차근히 기다리며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너무 일만 하지 마시고 가끔은 찾아가서 얼굴 비춰줘요. 오히려 우리가 오라버니를 걱정하고 있다고요.”
“아, 알았어.”
“자, 여기 코코아요.”
각자 앞에 따끈한 코코아 한 잔씩 내려졌다.
입술이 데이지 않게 조심히 한 모금 들이켰다.
진한 초콜릿향과 부드러운 목 넘김에 몸 전체에 따스하게 퍼졌다. 유리는 울컥하는 것들을 억지로 삼키듯 말없이 코코아 몇 모금을 더 마셨다.
* * *
오후까지 가문 업무를 마치고 나면 유리의 걸음은 벤헬링턴의 전용 대련장으로 향했다.
평소 같았으면 피로감에 걸음이 항상 무거웠다.
허나 오늘은 좀 달랐다.
‘채럿이랑 대화하길 잘했어.’
물론, 채럿이 먼저 찾아와서 나눈 대화였지만.
그녀 말마따나 동료들을 한 번씩 찾아가봤다.
채럿 말대로 다들 자신만의 훈련을 거듭하고 있었다. 제일 믿기 어려웠던 카이와 밀리샤의 지도 대련도 예상과 달리 정상적으로 이뤄졌다.
도리어 대련장에 갔다가 밀리샤한테 타박을 받았다. ‘상판대기가 교제님보다 더 보기 힘드네.’라면서.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상태로 향한 대련장에는 벤헬링턴이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유리를 기다렸다.
“오늘은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용언에 대한 해답이라도 찾았느냐?”
“그런 건 아니지만, 좀 더 좋은 답을 찾았습니다.”
“그거 다행이구나.”
용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는데도 벤헬링턴이 더 만족하는 뉘앙스였다.
거듭되는 패배야 익숙하니까 그렇다 쳐도.
‘용언 마법을 어떻게 써야 하지.’
그간 벤헬링턴이 직접 무언가를 가르치거나 설명조차 해준 적 없었다.
무언의 대련만 이어졌고, 유리는 계속해서 패배를 반복했다.
‘다행히 희망적인 부분은 할아버지의 용언이 유효타를 때리지도 못했어.’
그간의 대련을 통해 용언이 만능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분명 용언 마법은 강력하다. 기존에 정형화된 마법학으론 할 수 없는 것들이 전부 가능했다.
가령 빅스터의 멸(滅) 같은 용언은 지금 돌이켜봐도 충격적이었다.
말 한 번으로 사람을 세상에 지워버릴 수 있는 마법이 어디 있겠는가.
물론, 벤헬링턴이 쓰는 용언은 빅스터와 궤가 달랐다.
빅스터의 용언이 그나마 마법스러운 형태라면, 벤헬링턴의 용언은 통제에 가까웠다.
예를 들자면 이랬다.
“자, 바로 시작하자꾸나. ……개전(開戰)!”
“끅!”
벤헬링턴의 신형이 달려드는 동시에 용언이 펼쳐졌다. 반사적으로 티르빙을 들어보려는 찰나.
근육을 찢는 고통에 팔이 진동했다.
벤헬링턴의 용언은 이랬다.
상대의 육신을 통제하는 힘.
마법이 아닌 검술에 특화된 나이트워커에 어울리는 용언이었다.
“끄윽!”
유리는 억지로 힘을 쓰며 원하는 궤도까지 팔을 움직였다.
콰앙!
방어 자체는 성공했다. 그러나 단 일격에 몸이 저만치 날아서 대련장 제일 끝자락에 처박혔다.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근육이 찢어졌다. 급히 아스칼론으로 치료를 해봐도 사실상 패배나 다름 없었다.
재차 공격이 들어왔으면 죽었을 테니까.
그러나.
벤헬링턴은 유리의 낯을 보고 어깨에 검을 걸치며 기고만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크흐흐, 확실히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반복되는 패배에 고민과 고뇌로 가득해서 불편했던 유리의 얼굴이, 오늘은 시종일관 웃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