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34
제234화
대련이 끝난 뒤엔 섬뜩한 고요가 비어있는 공간들을 메웠다.
칼을 든 자도, 날리는 흙먼지도, 하늘을 가득 채웠던 검붉은 기운들도 눈 깜짝할 새에 사라졌다.
그 뒤로는 평범한 밤하늘이 펼쳐졌다.
아까 정면에서 보였던 달은 이제 머리 뒤로 넘어가 있었다.
짤막한 시간처럼 느껴졌지만, 실제론 더한 시간이 흘렀다.
대련 자체의 시간이 오래 흐른 건 아니다. 그보다는 대련이 끝난 직후의 시간이 더 많이 흘렀다.
“…….”
어째선지 벤헬링턴은 대련이 끝나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어깨에서 피가 울컥울컥 솟았다.
맞서고 있던 유리는 상태가 더 나빴다. 옷가지는 전부 찢어지고 그 아래에는 살이 떨어지고 뼈가 튀어나왔다.
누가 보더라도 패배자는 유리였다.
하지만.
“축하한다, 유리.”
벤헬링턴은 진심으로 그리 말했다.
그 순간, 벤헬링턴의 검신이 바사삭 먼지가 되어 흩날렸다.
“네가 이겼구나.”
반면 유리의 티르빙은 여전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을뿐더러 무형검들까지 유리 곁을 지켰다.
검을 쥔 자들의 승부는 벤헬링턴이 이겼을지언정.
검 자체는 유리의 티르빙이 이겼다.
애초에 검을 쥔 자의 상태는 상관 없었다.
이것은 엄연히 대련으로, 죽음으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닌 상대가 전투 불능만 되면 승부가 갈렸다.
그러니 검을 잃은 벤헬링턴이 패배했다.
그리고 유리에게 나이트워커의 모든 정수가 전수되었다.
“감사합니다.”
유리는 자세를 고쳐 세워서 나이트워커 식 경례를 올렸다. 아프더라도 대련의 예의와 가주를 대하는 경외, 존경을 표하고 싶었다.
그러자 벤헬링턴도 같이 경례를 올렸다.
가주의 경례는 처음 보았다.
가주가 누구한테 경례를 올릴 일도 없고, 세계관 최강자인 그가 경례를 할 만큼 대단한 인물도 이곳엔 없었다.
결국 유리는 단순히 전승을 떠나서 가주의 인정을 받은 셈이었으니.
“이제부터 나이트워커의 진짜 가주는 네놈이다.”
* * *
대련이 끝난 직후 유리는 혼절한 채 가문 전용 병실로 실려갔다.
그 후로 일주일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못했다. 수많은 성직자가 오가다가 나중엔 엘카가 다시 한 번 영지를 방문했다가 돌아갔다.
그렇게 깨어난 유리는 눈꺼풀로 스며드는 햇살에 눈두덩을 깜빡거렸다.
병상인 걸 잠시 뒤에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니 옆 병상에서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일어났니?”
미앵비슈가 옆 병상에 걸터 앉아 온화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표현하면 이상하지만, 많이 약해진 고모의 모습은 유리에게 하염없이 아름답게만 보였다.
매번 가문의 대들보 역할을 다하며 강건한 모습만 보다 보니 새삼스럽게 아름다울 수밖에.
원래 미앵비슈의 미모는 어딜 가도 빼어난 편이었다.
“고모님, 여긴…….”
“대련 직후에 바로 실려 왔었어. 꼴이 말이 아니었더구나. 가주님께서 험하게 다루셨어.”
“할아버니께선, 괜찮으신가요?”
“가주님을 걱정하는 거니?”
“그럴 리가요.”
벤헬링턴을 누가 걱정한다고.
비록 마지막 기억에서 어깨가 크게 베이면서 상처가 깊은 듯했으나, 그래도 벤헬링턴에게 그 정도 상처는 상처도 아니었다.
“멀쩡하셔. 하루 만에 나으셨어.”
“그럴 줄 알았어요.”
“그보다 가주님께선 기껏 너한테 일 맡기고 쉬고 있었는데 다시 일을 하게 됐다면서 불만이시더구나.”
그게 불만이었나.
고약한 성격에 맞지 않게 투정 부리고 있을 그를 떠올리니 유리 입가에서 저절로 웃음이 피었다.
유리는 쑤시는 허리를 부여 잡고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어땠니?”
대련이 어땠냐는 질문이었다. 유리는 솔직한 심경을 털어놨다.
“처음부터 죽어있다는 느낌이었어요.”
“패배감으로 시작했다는 거야?”
“안 그러려고 해도 저절로 그렇게 되더라고요.”
미앵비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벤헬링턴을 이기겠다고 도전하는 이조차 없는 세계다. 도전을 하더라도 몇 초 만에 패배하기 일쑤이며 그의 앞에서 서는 순간 이길 수 있다는 판단력이 흐려진다.
그러면 혼란스러워하다가 헤매게 되고, 헤매고만 있다가 패배한다.
“저라고 해서 특별할 거 있나요. 그저 있는 대로 받아들였어요.”
“있는 대로 받아들인다, 라.”
“세상에 대련을 청해놓고 지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이기려고 하니까 패배감이 드는 거죠. 그래서 그대로 받아들였어요.”
“이 고모한테는 어려운 말이네.”
“그런가요.”
자신보다 강한 자와의 싸움은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인정하지 못하면 억지로 이기려 해서 패배했다간 의욕을 잃게 된다.
여기서 다시 도약하는 사람들을 보통 일류라 부른다.
그러나 보통 사람은 일류가 되지 못한다. 괜히 일류이겠는가.
유리도 인정하기 어려웠다. 하필 상대가 벤헬링턴이었기 때문이다.
고로 패배감을 이기고자 허덕일 바에 차라리 인정하기로 했다.
원작을 보면서 벤헬링턴의 위대함은 세상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었다.
“아무튼 뒤늦었지만 축하한다. 이제부터 가주는 너야.”
“제가 가주라고요?”
“그래.”
유리 뒤편을 가리키는 미앵비슈의 손가락, 그 끝을 따라가 본 시선에 수많은 꽃과 편지가 보였다.
다발로 된 꽃부터 바구니에 담긴 꽃, 어떤 꽃은 한 송이만 덩그러니 있기도 했다.
붉은 꽃이 담긴 다발 하나를 집어서 편지만 빼내었다. 봉투엔 이자벨의 이름이 있었다.
“전부 축하한다고 보낸 것들이야.”
미앵비슈의 설명을 들으며 봉투를 열어봤다.
설명 그대로 가주가 된 걸 축하한다는 편지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자벨의 편지만이 아니라 다른 편지들도 다 마찬가지였다.
블레이크, 엘라트리오, 리펠리온 쪽에서도 꽃 없는 밀서로만 축하 인사를 보내왔다.
유리가 기절하고 있는 동안 벤헬링턴이 명망 있는 사람들과 가문에게 벌써 다음 가주를 지목했다고 알린 모양이었다.
이렇게까지 빨리 할 필요가 있었을까.
‘빠르다 못해 급한 느낌이야.’
물론, 유리 입장에서도 얼른 가주가 되어서 전쟁을 준비하고 악마와 싸우면 좋았다.
그걸 목표로 삼아왔으니까.
하지만 벤헬링턴의 결정들은 이미 결정한 것처럼 신속했다.
“가주님께서 왜 이리 빠르게 일들을 진행하고 있는지 궁금하겠지.”
“……예.”
“나도 이번에 알게 된 거지만, 가주님께선 도서관 지하에서 어떤 책을 보고 오래 전부터 악마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하셨어.”
유리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가주니까 도서관 아래서 무얼 보더라도 당연했다.
이미 아칸 검법의 종식까지 보여줬으니 설정집도 보았을 테지. 일전에 비슷한 뉘앙스로 말을 하기도 했었고.
“우리 가문은 예언을 보고 악마와 싸우기 위해 많은 것들을 준비하고 있었어. 그 예언에는 분명 우리 가문에서 악마를 대적할 사람이 나올 거라 했고. 실질적으로 우리 가문의 존재 의의는 악마와의 전쟁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그런 예언이 있었다고요? 대체 어디에…….”
미앵비슈는 머리를 가로 저었다.
“거기까진 가주님도 모르신단다. 가주들끼리 이어져 오는 유지 같은 것이지.”
“…….”
세드리치, 내 아버지.
그 분이 창조주의 예언을 내려왔구나.
세드리치가 가문을 세우고 멸망과 악마에 대한 예언을 해왔다면 미앵비슈의 이야기가 설명이 되었다.
“그래서 가주님은 네가 악마를 대적할 사람이라고 보셨고 일을 서두르시는 거야.”
“혹시 제 아버지가 가주 후보가 됐던 것도 같은 이유인가요?”
“그래.”
어쩐지 블레이머라는 이름의 세드리치가 빠르게 가주 후보로 지목 받은 것이 이상하긴 했었다.
단순히 강하기 때문이 아닌, 강한 사람이 가문을 받아 예언을 막을 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유리도 같은 이유로 빠르게 가주로 지목 받았다.
‘이 모든 게 악마를 위해서 준비되었다는 건가.’
거대한 서사 같아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론 속이 쓰라렸다.
대체 멸망이 뭐라고.
멸망 하나 때문에 지난 세월의 나이트워커는 경쟁하고 치열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수많은 싸움을 겪어오면서 최강으로 군림하기까지, 많은 피들을 흘려왔을 터.
결국 오늘에 이르러서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라고 하니까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다.
그래도 유리는 최대한 마음을 다잡았다.
‘죄책감을 가지더라도 속죄할 방법은 하나다.’
악마를 몰아내야 한다.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 그리고 앞으로 주어진 유일한 과업은 그것 하나 밖에 없었다.
“아, 그리고 유리. 이건 내 선물이란다.”
미앵비슈는 그리 말하며 병상 아래서 종이에 싸인 기다란 물건을 꺼냈다.
그걸 내밀자 유리가 받아들었다.
“뜯어보렴.”
가죽 끈을 조심스레 풀어내자 상아빛 검이 나왔다.
특이하게도 일반적인 검보단 짧고 단검보다 길었다. 숏소드와 비슷한 길이에 한쪽으로 유연하게 굽어있었다.
더욱 신기한 점은 날이 서있지 않았다.
“이건…….”
“미다스에게 슈나이더에 대해 언급했었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네가 잠든 동안 미다스가 재판을 받기 전에 나에게 찾아왔었다.”
검을 받아들자마자 귓가에서 다른 목소리가 소리쳤다.
[이거 아스칼론, 아니지. 그러니까 제 검이에요!]아스칼론이 그녀답지 않게 흥분까지 하자 유리도 좀 더 호기심을 검에 기울였다.
자세히 보니 일전에 클라우드 하트에서 세드리치가 줬던 설계 그대로의 검이었다.
‘드디어 완성된 건가.’
세드리치는 아스칼론에게 필요한 검이라면서 슈나이더를 찾으라고 했었다.
당연히 슈나이더가 이 세상에 있을 리가 만무했다.
‘마신의 손’을 똑같이 만들줄 아는 전설적인 조각가 슈나이더는 항상 행방이 불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슈나이더가 죽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다스를 구하면서 슈나이더에 관해 언급했었다.
마치 슈나이더가 살아있다는 듯이.
‘미다스가 슈나이더일 가능성은 컸으니까.’
힌트는 역시나 ‘마신의 손’이었다.
미다스의 대장간에 방문했을 때, 그곳에서도 ‘마신의 손’을 발견했었다.
물론, 완성품이 아니라 만들다가 만 작품이었지만.
슈나이더라는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래서 그에게 아스칼론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해놨었고, 드디어 완성되어 주인에게 왔다.
“근데 미다스는 재판 중일 텐데요.”
“그러니까 내 선물이라는 거지.”
“재판을 미뤄주셨군요.”
아스칼론 쯤 되는 검을 벼려내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고 했었다.
하지만 미다스는 죄를 지어서 재판에 회부되어야 했다.
그 시간을 미앵비슈가 벌어준 것이다.
“아름다운 검이네. 날이 없는 게 특이하기도 하고.”
“그러게요.”
유리는 검 아스칼론을 쥐고 아스칼론의 힘을 희미하게 밀어 넣었다.
뭉툭하던 날붙이가 점점 날카롭게 반사광을 내기 시작했다.
혹시나 드래곤 하트의 마나를 섞어보내자 바로 빛을 잃었다. 유리 본인의 코어에 있는 마나를 넣어도 마찬가지였다.
그야 말로 아스칼론을 위해 만들어진 검이었다.
“미다스가 남긴 말은 없던가요.”
검을 싸고 있던 종이에는 어떠한 문구라든가 편지가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 그는 재판에서 형을 피할 수 없으리라.
운이 좋다면 종신형이고, 평범하게 죗값을 받는다면 사형을 받게 된다.
적어도 아스칼론의 그의 마지막 작품이라는 뜻이다.
그런 생각에 유리는 씁쓸하니 웃었다.
미앵비슈도 그런 감정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같이 쓰게 웃으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악마를 몰아내거든 다시 보자고 했어. 그때까지 살아있도록 노력하겠다면서.”
“…….”
“유리, 그 자의 죄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벌해야하죠.”
지은 죄가 명확한 탓에 미다스를 구제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설령 죄가 명확하지 않았더라도 유리가 직접 조사해서 명명백백하게 밝혔을 것이다.
물론, 미다스가 원해서 지었던 죄는 아니었다. 유리도 알고 있다.
그는 다이올드에게 붙잡혀서 가짜 마검을 만들었으며, 그 마검은 살인을 저지르려 했다.
심지어 타나토와 제몬은 마검의 저주에 빠져 죽을 위기까지 겪었다. 그런 형제들의 손에 유리도 죽을 뻔했고.
‘미다스 성격이라면 분명 달갑게 죗값을 치르겠다고 했겠지.’
유리는 검에서 마나를 거두었다.
다시 뭉툭해진 하얀 검에 손을 대자 차가운 감촉이 서서히 살갗에 퍼졌다.
죽음의 기운처럼 느껴진다.
성력과 비슷한 마나를 담아내는 검인데도, 이것은 분명 남을 베는 검이기에.
재판에서 운이 나쁘다면 미다스도 이런 검에 죽을 것이다.
하지만.
‘죽어야 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유리는 아스칼론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