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47
제247화
미로가 끝나지 않았다. 그 말을 끝으로 베아트리체는 뜬 눈으로 숨을 거뒀다.
곁을 끝까지 지키던 카이는 두 눈을 질끈 감고는 뜬 눈을 천천히 감겨주었다.
“바알에 놀아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아니다. 멋대로 하는 구석이 많아서 그렇지.”
누구한테 하는 소린지 모를 말들을 뱉던 카이.
“그래도 용서할 수는 없겠지. 멸망을 막으려한 대가는 죽음으로서 치러야지.”
“카이.”
“……위로라면 됐다.”
“위로가 아니라, 너만은 용서해줄 수도 있다고 말하려 했어.”
“멸망을 막으려 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너만 용서하라고. 네 연인이라면서.”
훗날 베아트리체는 마수대전의 영웅이 아닌, 멸망을 방해한 잔악한 사람으로 취급 받을 것이다.
누구도 용서 못하겠지.
유리도 베아트리체의 배신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미워할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어. 너만은 그러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 잘도 지껄이는군.”
“성격이 닳고 닳아서 파타난 사람? 잘 알지. 근데 그런 네가 좋아했던 여자잖아. 그건 그것대로 엄청 큰 의미라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솔직히 카이 같은 성격에 연애는 영 어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그를 좋아해줄 이성이 있다는 점도 신기했고.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했던 건 사실이고, 카이답지 않다는 점도 사실이었으니.
“슬퍼할 시간이라도 줘?”
“…….”
“그래, 그럼.”
대꾸도 하지 않는 카이를 뒤로 하고 유리는 잠시 거리를 벌려 미로의 출구 쪽을 걸었다.
아직 발아래선 피로 물든 호수가 찰랑거렸다.
“티르빙, 들리지.”
[들려~ 꼬맹이.]“미로 구조는? 파악했어?”
넓게 펼쳐진 대양을 지배하게 되면 미로 자체를 지배하는 꼴이 되기에.
대양이 펼쳐지고 티르빙이 퍼지는 순간, 미로의 구조를 파악해달라고 부탁했었다.
[꼬맹이 말대로 물리적인 구조는 평범해. 가짜 벽, 환각과 환청으로 가득해. 정신계 마법보단 권능에 훨씬 가까워. 길도 수시로 바뀌어서 내가 안내해주는 건 의미 없어.]“결국 정석대로 공략해야 한다는 거네.”
[바알이 마신에 더더욱 가까워졌다는 증거이기도 하지.]권능을 부렸으니까.
정신 공격을 파훼하는 방법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정신 공격이 주는 끔찍한 기억들을 옆에서 다른 사람이 보조해주면 된다.
물론, 말이 쉽지 트라우마 같은 기억을 보고서 멀쩡히 나올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이를 대비해서 팀을 짜고, 팀 구성원에 트라우마에 걸릴 법한 사람들을 추렸다.
“잘 하고 있겠지.”
예상대로라면 이자벨과 채럿이 정신 공격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반면 블레이크나 렉슬러는 상대적으로 딱히 괴로운 기억이나 과거가 없어서 보조자 역할을 하고 있겠지.
정작 당사자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정신 공격을 당한다고만 알고 있겠지만 말이다.
‘미리 말해주면 그건 그것대로 기억이 되어서 바알이 막으려 했겠지.’
그렇지만 베아트리체는 뭐였을까.
그녀가 죽기 전 분명 이리 말했다.
미로는 끝나지 않았다고.
“부활을 통한 미로는 아니었던 건가.”
가정이 틀리지 않았다면 상황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미로는 아직 발동하지 않았고, 부활과 미로를 같이 쓸 정도로 바알의 권능이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우선 미로부터 파훼를 해야…….”
그때, 멀리 보이던 미로의 끝자락에서 희미한 빛이 느릿하게 번졌다.
안 그래도 어둡던 풍경에 번지는 빛은 시작은 느렸다가 갑자기 가속도를 높이면서 삽시간에 유리 주변마저 밝게 비췄다.
“……!”
하얗게 변한 세상은 눈이 부셔서 제대로 눈꺼풀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팔을 들어서 시야를 가려봐도 벌어진 약간의 틈으로 들어오는 빛조차 너무나 강렬했다.
그렇게 아찔한 빛이 지나간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유리 앞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일전에 한 번 봤던 곳이기도 했으며 경험은 해보았지만 기억 속에선 잊어버린 장소였다.
“내가 회귀 전에 글을 쓰던 오두막이잖아.”
전에는 안에서만 봤었으나 밖에서 본 오두막은 더욱 처참했다. 본래 크기의 절반이 무너져서 썩어 문드러지는 중이었고, 마당의 잡초들은 허리까지 자랐다.
오두막 안에는 나이든 유리가 오늘도 글을 쓰고 있었다.
한참 글을 쓰던 그는 책을 덮고 마당으로 나왔다.
“저건……?”
성검 미뭉!
확실했다. 나이가 든 유리의 허리춤엔 황금빛 검신이 찬란하게 빛을 내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반대편 허리엔 거무튀튀한 마검 티르빙이 그 빛을 흡수하며 어둠의 존재감을 뽐내었다.
‘왜 두 자루를 전부 가지고 있는 거지?’
본디 성검 미뭉은 블레이머의 손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환생을 거듭했으니까.
아니면 카이의 손에 있던가.
그런데 나이 든 유리가 어째서 가지고 있지?
아니, 성검이야 어떻게 흘러서 유리에게 갔다 하더라도 마검은 대체 왜?
[궁금해?]마음 속 저편에서 갑자기 이질적인 목소리가 귀까지 뚫고 올라왔다.
듣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는 느낌이 들었다.
구역질이 올라면서 몸이 휘청거리더니 앞으로 넘어졌다. 간신히 무릎을 꿇고 바닥을 짚어서 버텨보지만 이내 입으로 신물이 올라왔다.
‘너…… 베아트리체?’
[크크크.]웃음소릴 봐선 그녀가 분명했다.
죽은 줄 알았더니.
[말했다시피 여긴 미로야. 난 미로의 일부이고.]“내가 당했군.”
[맞아, 미로의 공격 대상은 너였어.]“하지만 이 기억은…….”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회귀 전 기억을 기어코 끄집어 낸 건가.
새삼 다시 한 번 바알의 권능이 얼마나 강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근데 궁금하지 않으냐니까? 네가 누구한테서 성검과 마검을 빼앗았을지?]“빼앗다니.”
[빼앗았지.]베아트리체는 당연히 그렇다는 듯이 말했다.
[원래 소유주를 죽여야 가질 수 있는 검들이잖아?]* * *
항구 건설까지 따라갔던 릴림은 리리스와 함께 가문으로 돌아왔다.
유리와 함께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임무는 악마와의 직접적인 전투가 아니었다.
“‘넌 우리 어머니를 보호해야 해.’라면서, 보내셨어요.”
그렇게 돌아온 릴림은 벤헬링턴에게 보고를 올리는 중이었다.
정작 벤헬링턴은 이야기를 듣지 않고 갑주를 챙겨 입으며 릴림 어깨에 타고 있는 작은 악마를 노려봤다.
“뭘 자꾸 보는 거지, 용인?”
“죽일까 말까 고민하고 있다.”
“하핫! 용인 따위가 악마인 나를? 내가 들었던 농담 중 제일 웃기네.”
“손아귀 한줌이면 딱이라고 본다만.”
오래 전부터 악마에 대해 알고서 조사를 해왔던 벤헬링턴으로선 단연 리리스의 존재가 싫었다.
유리 말마따나 악마들을 배신하고 인류의 편에 섰다곤 하지만.
“가주님.”
릴림이 말했다.
“리리스는, 괜찮아요.”
“너까지 그 놈을 옹호하는 거냐?”
“말씀드렸다시피, 제 안에 다른 영혼이 괜찮다고 해요.”
“안다!”
레벤나, 리리스와 자매이자 인간을 사랑해서 릴림의 몸에 정착한 영혼.
사실 레벤나의 존재 또한 벤헬링턴은 알고 지낸지 오래되었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내가 성녀 후보에서 파문당한 너를 왜 데려 왔겠느냐?”
“아…….”
놀라지 않은 표정으로 놀라는 말투를 내뱉는 릴림. 그녀도 얼추 자신이 용가의 사자가 된 진짜 이유를 알고 있었다.
파문당한 성녀를 누가 뭣하러 받아들이겠는가.
“놀라는 척하기는. 됐고, 이거나 도와!”
벤헬링턴이 어깨와 등으로 이어지는 끈을 보였다.
릴림이 묶어주려고 보니 벌어진 갑주 틈으로 피로 물든 붕대가 보였다.
“가주님, 회복이…….”
“누가 가주라더냐! 나 은퇴했어!”
“……벤헬링턴 님, 회복이 덜 됐어요.”
“이 정도면 다 나았다.”
“하지만.”
“시끄러워. 악마들이 본격적으로 침공을 시작한 마당에, 전대 가주라고 하여 놀고먹고 있으란 법이 있더냐!”
본래 나중에 유리와 합류할 벤헬링턴이었다. 유리와 대련 직후 보다 부상이 심한 탓이었다.
그러나 예상보다 빠르게 악마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출정을 서둘렀다.
“가주님!”
마지 못해 릴림이 갑주를 결속하려는 찰나에 문을 박차고 샤를린느가 들어왔다.
뛰어오진 않았으나 급한 걸음으로 들어선 그녀는 벤헬링턴의 얼굴을 보자마자 읍소했다.
“지금 가시면 안 돼요. 몸도 다 안 나으셨잖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자꾸 나한테 가주라 하는군.”
“그 점은 죄송해요. 하지만 가시는 건 꼭 말려야겠어요.”
어느 때보다 샤를린느의 태도는 단호했다. 살짝 굳은 얼굴 표정은 금방이라도 혼내려는 인상이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던 벤헬링턴은 릴림에게 잠시 나가 있으라 명했다.
릴림이 나가자 그는 의자에 앉아 반쯤 차 있던 술잔을 들이켰다.
“샤를린느, 내가 어째서 블레이머랑 너랑 가문을 나갔을 때 바로 잡아오지 않았는지 아느냐?”
“아니요.”
“그건 블레이머가 결정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
“그 놈이 고집이 강해서가 아니야. 원래 용인은 고집이 세다. 하지만 용인의 고집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니 블레이머도 자신의 고집을 끝까지 관철할 수 있다고 봤다.”
이는 샤를린느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블레이머가 성검으로 환생을 거듭하며 끝끝내 샤를린느를 찾으러 왔던 것처럼.
그는 한 번 이루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이뤄냈다.
“그 놈이 나한테 그러더군. 보란 듯이 행복하게 살겠다고.”
“처음 들어요.”
“그렇겠지. 내가 어디 가서 한 번도 밝히지 않았으니까. 하도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삼류극의 대사 같아서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창피해서 말이야. 그런데 난 그 창피한 소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여줬다. 왜 그랬을까.”
샤를린느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도 같은 소원을 바랐으니까.”
“가주님…….”
“가주 아니라니까, 거 참! 여하튼 나라고 해서 가족의 소중함을 모르던 파렴치한 가주는 아니다. 주어진 사명이 내 운명을 강요했을 뿐이지.”
아무리 냉혹하기로 소문난 벤헬링턴이라지만, 그도 가족이 중요했다. 아니, 평범하게 가족을 사랑했다.
그러나 용가의 가주는 대대로 악마와 싸워야 한다는 예언을 받들어 살았고, 나이트워커의 가풍은 무한 경쟁의 장이 되었다.
“가혹하지. 그래서 난 블레이머가 죽을 때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 놈이 죽을 때, 난 악마에 대해 알아보겠다며 출타를 나갔었어.”
가족보다 사명, 가문이 먼저다.
그게 가주된 자의 숙명.
잔인하지만 벤헬링턴은 그 생각이 틀리지 지금도 옳다고 믿었다.
“그런데 그때 유리가 나타났다. 그 놈이 나한테 뭐라 했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라 했어.”
가주가 아니라.
지금도 릴림과 샤를린느, 그 밖에 다른 사람들도 버릇처럼 벤헬링턴을 가주라 불렀다.
허나 딱 한 사람.
유리는 처음 벤헬링턴을 만나자마자 할아버지라 불렀다.
“그 놈이 할아버지라 했다고. 알겠느냐?”
“…….”
“그런데 그 놈 혼자서 저 멀리서 싸우고 있어. 나 편하자고 여기서 죽치고 있을 순 없단 말이다.”
남은 술잔을 털어낸 그는 마저 갑주를 챙겨 입었다.
더는 지체할 수 없다. 한시라도 바삐 떠나야 간신히 제 시간에 도착할 수 있으리라.
“이건 또 왜 안 묶여!”
릴림의 도움을 받아 한쪽 어깨는 단단히 메었지만, 다른 한쪽은 여전히 혼자서 묶을 수 없었다.
“도와드릴게요.”
샤를린느가 손을 거들어 반대편 어깨와 등허리 갑주를 여몄고, 이어서 다른 갑주들도 그녀의 도움을 받아 착용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갑주가 덜그럭거릴 때마다 늘어나는 무게감처럼, 샤를린느의 마음도 무거워졌다.
그녀도 마음 같아선 유리가 있는 곳에 같이 가고 싶었다.
그러나 유리는 절대 샤를린느가 전장에 와선 안 된다고 일렀다.
“어머니가 전쟁터에 있는 건 아들로서 두고 볼 수 없어요.”
“그치만 이 엄마도 그건 같은 마음이란다.”
“그래도…… 아무튼 안 돼요. 어머닌 차라리 가문을 지켜주세요.”
용신으로서 권능과 힘을 대부분 잃었다고 하지만 솔리드녹스의 장로급 마법사와 버금가는 그녀였다.
그럼에도 안 된다는 유리의 만류에 결국 그녀는 이곳에 남기로 했다.
“네가 여기 남아야 하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다.”
정면에서 샤를린느의 어두운 얼굴을 설핏 알아챈 벤헬링턴이 그리 말했다.
“너만 아니라 릴림과 리리스도 여기에 남기지 않았느냐.”
“……압니다. 사정이 있겠죠.”
유리가 언제 틀렸던 적이 있던가.
지금은 묵묵히 그의 말을 믿고 따르는 수밖에.
“가주님!”
그때, 또 다른 이가 문을 박차고 뛰어 들어왔다.
겔런이었다.
“또 가주, 가주! 나 가주 아니라니까!”
“소, 송구합니다. 워낙 급박해서.”
“무슨 일이더냐.”
“그게…… 유리 가주님이 데려온 소녀가 의식을 찾았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