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48
제248화
벤헬링턴은 그 길로 소녀가 있는 병실로 향했다.
소녀에 관해선 말로 들은 것 말고는 아는 것이 전혀 없었다.
라지닉소스라는 기관의 존재도 벤헬링턴은 이번에 처음에 알게 되었다.
애초에 관심이 갈만한 집단이 아니었다. 겉으로 역사 자료를 조사하러 다니면서 파괴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설마 악마와 신에 관한 사료들을 직접 지우다 못해, 그 장본인이 창조주라니.
벤헬링턴이 병실로 들어서자 몰려있던 의사와 성직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사람들은 벤헬링턴을 보고 기겁했다.
그의 얼굴이 화가 났다고 노골적으로 표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하고만 있어서 그렇지, 나이트워커의 전대 가주의 침묵을 겪어본 이들은 말보다 무서운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마리, 릴림, 샤를린느 빼고 모두 나가.”
후다다닥!
짤막한 명령 한 번에 모든 인원이 빠릿빠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꽉 찼던 병실이 한산해지자 병상의 소녀가 드디어 모습을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병약하기 짝이 없는 외모를 가진 그녀. 앙상한 뼈에 왜소하기도 하고. 눈동자엔 힘이 없다.
‘이런 놈이 창조주의 권능을 가졌다니.’
실소가 나오려던 걸 간신히 참으며 벤헬링턴은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긴 말할 시간 없다.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해야 할 거야.”
“당신께 대답할 의무가 있던가요.”
“자기 처지를 이해하지 못했군.”
“…….”
“유리가 왜 나한테 널 맡기고 갔는지 아나? 신을 죽일 수 있는 힘이 내게 있기 때문이지.”
허세였다.
신을 죽이는 힘이 개개인에게 있지 않다. 유리나 카이조차도.
물론, 벤헬링턴이라면 가능하겠지만, 현재 그의 몸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녀의 상태도 정상은 아니는 듯하여 부려본 허세였다.
그리고 신이 협조적이지 않다면 정말로 죽여 달라는 유리의 부탁도 있기는 진짜로 있었다.
신이 멸망을 막으려 했다니 당연하다.
“나를 진노케 하지 마라. 하나 뿐인 손주 놈을 건드린 것만 해도 씹어 먹어 시원치 않으니.”
“…….”
“자, 이제 답해라. 창조주의 의도가 무엇이냐. 무슨 생각으로 멸망을 방치하고 있지? 악마와 신의 흔적을 직접 지우는 이유는 또 무엇이고?”
“…….”
허연 얼굴이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할 말이 있어 보이는 얼굴.
그러나 망설이고 망설였다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오히려 내가 묻고 싶어. 당신들은, 유리 덴 나이트워커의 주변에 있는 당신들은 무슨 이유로 그를 돕고 있지? 내 눈에 당신들은 너무 맹목적이야.”
“그 애는 멸망을 막으려 하고 있어. 살아있는 존재로서 도와야 하는 것이 옳지.”
“유리, 그 사람이 도리어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수도 있잖아.”
“……!”
전혀 상정해보지 않았던 이야기다.
유리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하다니.
“헛소리로 노하게 하는 재주가 있군.”
“생각해보라는 거야. 그 사람이 과연 마검을 쥔 게 우연이었을까. 카이는? 성검의 주인이 어쩌다가 성검을 쥐었을까? 두 사람이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 산다는 거 이상하지 않아?”
“이놈!”
“난 그 사람을 막고 싶었을 뿐이야.”
더 큰 분노가 일렁이기 직전, 소녀는 그리 말했다. 용인의 분노가 칼에 금 그어지듯 잘렸다.
“내가 예언한 멸망의 주인공이 악마였을까, 악마 같은 사람이었을까.”
“이제 와서 예언에 말장난이라도 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신은 원래 변덕스러워. 그 변덕을 마음대로 실현할 힘을 갖기도 했고. 멸망의 방치한 건 초심이었다면, 유리를 방해한 건 내 변덕이야.”
“어이가 없군!”
기가 찰 노릇이었다.
유리에겐 멸망을 주도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마검을 들어서? 아니, 그는 마검의 주인이다. 마검이 유리를 지배한 것이 아닌, 주인으로서 마검을 들고 악마 저곳에서 맞서고 있다.
모든 일들을 유리 입맛대로 의도했다고 마찬가지.
그에겐 계획이 있었고, 그 계획대로 상황을 이끌어 내었다. 다이올드를 축출해냈으며 기어코 악마들을 수면으로 끄집어냈으니.
이것이 멸망을 막으려는 행위가 아니고선 대체 뭐란 말인가.
“지금은 유리 그 사람이 멸망이랑 관계없어 보이겠지. 알아. 내 눈에도 그렇게 보여. 헌신적으로 멸망을 막으려는 의지가 강한 인간. 하지만 조심해야 할 거야. 겪어보지 않은 경험을 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세상에 분노할 테니까.”
심오하면서도 끔찍한 발언에 더 이상 아무도 대꾸를 할 수가 없었다.
이후로 소녀는 다시 입을 다물고 창 밖에만 시선을 고정했다.
벤헬링턴의 진노가 이어졌지만 그래도 소녀의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자리에 있던 모두는 찝찝한 기분을 안은 채 빠져나와야만 했다.
그러나 이때 소녀의 중얼거림이 한 번 더 있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마검과 성검을 모두 쥔 자는 과연 신이 될 수 있을까. 신이 되고 나서도 결심을 져버리지 않을 용기가 있을까.”
* * *
말도 안 된다며 유리는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마검과 성검을 내가 빼앗았다고?
왜? 아니, 그보다 대체 누구한테서?
[궁금하면 보여줄게.]환상으로 가득했던 시야가 다른 풍경으로 바뀌면서 뭉개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
오두막 안에 있던 나이든 유리가 조금은 젊어졌고, 주변 광경은 삭막한 흰색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풍경 속 유리 앞에는 웬 검은 머리 남자가 있었다.
‘누구지.’
[블레이머.]환상 속 유리가 그를 그리 불렀다.
블레이머라 불린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블레이머? 우리, 아버지라고……?!’
처음 보는 아버지의 얼굴에 유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환상인 걸 알면서도 나간 손은 애꿎은 허공을 휘저었다.
고개를 든 블레이머의 몰골은 엉망진창이었다. 방금까지 치열한 전투라도 벌였는지 온몸이 피칠갑이 되어 있고 뜯어진 옷 사이사이로 살점과 뼈가 드러났다.
[블레이머, 싸움은 끝났다. 성검이 있는 곳을 말해라.] […….] [다 들었어. 그대는 성검의 힘을 빌어서 환생을 거듭한다고.] [어디서 개소릴.] [역대 성검을 쥐었던 자들의 뒤를 전부 조사했다. 모두 다른 사람이었지만 일관된 행동 패턴이더군. 소름끼칠 정도로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했던 경우도 있고.] [겨우 그런 걸로…….] [겨우라니.]나이 든 유리가 마검을 뽑았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혈관을 뚫고 나온 핏물이 고체로 변해서 단단한 검신이 되기까지.
마검은 블레이머의 목에 겨눠졌다.
[이 마검도 네 손에 있었다. 주인이 아닌 소유의 의미로.] […….] [마검의 주인이 되어 물어보니 성검도 같이 있었다고 하더군. 그런데 이번 환생에선 성검을 놓아버렸다고.] [마검의 입이 너무 가벼웠군.] [내가 주인이 되었으니 주인에게 충성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지.]블레이머는 고개를 힘없이 떨궜다가 삐걱대면서 어깨를 들썩거렸다. 웃고 있는 것이다.
끅, 끅, 끅.
억지로 참는 웃음소리가 흐른다.
[성검을 찾아서 세상이라도 멸망시킬 생각인가.] [신이 될 생각이지.] [어리석군.]현재의 유리는 좀처럼 대화의 흐름을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대충 알아 듣긴 했다.
마검의 주인이 된 미래의 유리는 성검을 찾기 위해 블레이머와 싸웠고,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지만 성검과 마검을 모두 가져서 신이 되겠다니.
[난 두 번째 마검의 주인이 되었다.] [뭐?]‘뭐?’
블레이머와 현재의 유리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정작 미래의 유리만이 태연했다.
[헷갈리는 표현이군. 두 번씩이나 마검의 주인이 됐다고 하는 게 옳겠군.] [회귀를 썼군.]성검이 환생의 힘을 가졌다면 마검은 시간 역행의 힘을 가졌다.
하나는 생을 거스르는 역리를, 또 하나는 시간을 거스르는 역리를.
세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신물(信物).
[맞아, 성검이 환생의 힘을 가졌다면 마검은 시간 회귀의 힘이 있지. 그 힘을 통해 멸망을 보고 왔다.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는 더러운 미래. 난 그걸 바꿀 거다.]나이든 유리는 슬픈 얼굴로 먼 곳을 응시했다.
거짓으로 미래를 봤다고 한 건 아니다. 현재의 유리가 유리이기에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마검 티르빙에 회귀 기능이 있다니.
무한 환생의 힘을 가진 성검처럼 마검도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점이 딱히 이상하진 않았지만, 설마 시간 회귀라는 인과율을 부수는 힘을 가졌을 줄은 몰랐다.
하물며 마검 본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지 않은가.
[멸망의 과오를 막을 수 없다면 바알이 원한 신처럼 나도 신이 된다.] [돌았군.] [그렇다면 너에게 방법이 있던가? 너도 예언을 봤으니 알 텐데.] […….] [완성된 예언은 필연이 된다. 그렇다면 더 먼 필연을 내가 설계한다. 예언보다 아득하게 먼 시점을 바꾸면 돼.] [그게 너 스스로 신이 된다는 거냐.] [미래의 바알은 마신이 되었다. 하짐 그 후에 실패했지. 나도 가능해.]대체 미래의 유리는 어떤 또 다른 미래를 보았던 걸까.
그건 쉽게 추측이 가능했다.
원작을 유리가 썼더라면, 66명이 남은 원작의 결말 또한 직접 봤다는 뜻.
결국 인류가 살아남아도 멸망에 가까운 결말이었으며, 그런 결말에 이르기까지 바알은 진짜로 마신이 되었다가 카이에 의해 죽었다.
‘미래의 나는 예언보다 먼 시간을 바꾸겠다는 건가.’
어떤 식으로 바꾼다는 건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66명밖에 남지 않은 세상.
결국 멸망이 도래한 그곳에 남은 건 하나였다.
새로운 창조.
[마지막으로 묻겠다, 블레이머. 성검이 있는 곳을 말해라.]*
화면은 거기서 끝났다.
귀에선 다시 죽은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려퍼졌다.
[어때? 전혀 몰랐던 시간대를 본 기분은?]“……넌.”
한 가지, 유리는 일전에 자신의 또 다른 시간대를 보고도 믿었던 가정이 있었다.
그때의 유리도 멸망과 싸우고 있었으니 당연히 멸망을 막을 방법을 찾아냈다고. 그래서 시간을 되돌려 다른 세계로 도망쳤었다고.
헌데 기껏 내린 결론이 신이 되겠다고? 아버지를 위협하면서까지?
“알고 있지.”
[뭘 말이야?]“내가 우리 아버지를 죽였는지.”
[…….]이 뒤는 보지 않아도 죽인 게 분명하다. 시간을 되돌렸으니까.
그렇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어서, 혹시라도 아닐까봐 그녀에게 확언을 요구했다.
[큭큭, 그런 멍청한 질문이 싫지는 않아. 꽤나 당황했나 보네.]유리의 마음 속 한 편에는 가족을 향한 애정이 무척이나 강하다.
멸망을 막겠다고 했던 결심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기이기도 하지만, 곁에 있는 어머니를 위해서이지 않았던가.
정신 공격을 통해 잠깐이나마 엿본 기억 속엔 세드리치, 블레이머를 만나면서 느꼈던 감정도 그와 비슷했다.
애틋하다. 아련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립고 슬퍼하는 감정들.
분명 여기가 약점이었다.
“아니.”
유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기색으로 보란 듯이 멀쩡한 얼굴의 그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정신 공격은 기억을 토대로 하는 공격. 내가 잊고 있던 기억을 찾게 해줘서 오히려 고마운 걸.”
[뭐, 이런 미친.]“애초에 이 뒤의 기억을 왜 안 보여주지?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지 않나?”
[만에 하나 죽였다면 어쩌려고.]“난 더할 나위 없는 죄인이지.”
그렇지만.
“지금의 시간대는 아니잖아.”
블레이머는 다이올드가 죽였다.
카이는 멀쩡히 살아있고.
달라진 시간대에서 그들은 다른 삶을 지냈다. ‘현재’의 유리랑은 전혀 상관없었다.
“만에 하나 내가 달라진 시간대에서 관심마저 달라져서 그들을 못 지켰다고 비난하고 싶다면, 하든 말든 신경 안 써.”
[뻔뻔하네, 유리 덴 나이트워커. 지금 시간대에서 아버지가 죽도로 내버려뒀으면서. 그건 죄도 아닌 가봐?]“내 아버지를 죽인 건 다이올드야. 그 놈 뒤엔 악마가 있고. 그걸 내 잘못이라고 비난할 수 있나?”
[넌 모든 걸 알고도 잊은 채 살았어. 기억을 지운 건 너 스스로라고.]아마도 그렇겠지.
어떤 식으로 기억을 지웠는지 몰라도, 그 편이 옳다고 믿었으리라.
그러나 그 믿음이 블레이머의 죽음을 막아내지 못했다.
그 또한 유리에겐 짐이자 죄악.
“내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게 말이나 될까.”
[뭐?]“그렇잖아. 내 아버지는 드래곤인데.”
클라우드 하트에서 세드리치를 이기는 건 그렇다 쳐도. 방금 본 기억의 블레이머는 진짜 드래곤이다.
인간으로 환생했어도 드래곤 하트를 온전히 활용할 수 있는 지상 최강의 생물.
그런 사람을 마검의 주인이 죽였다고?
차라리 죽임을 당해줬다면 더 말이 되겠지.
아버지니까.
“가족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게 너희의 패인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