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52
제252화
둥지가 사라진 직후 사람들은 바알이 사라졌다고 착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너지고 있는 둥지 어디에서도 바알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바알의 흔적을 찾기 위해 숲을 조사하러 다녔던 유리와 동료들이었지만,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유리도 딱히 수색 과정에서 무얼 기대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느낌이 이상했을 뿐.
“드디어 납셨군.”
멀리서 보라색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흡사 안개 같이 낮게 퍼지면서도 구름처럼 농도가 진했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형체가 꿈틀 거렸다.
거리가 먼 데도 풍겨 오는 마기는 지금껏 느꼈던 어떤 것보다 강했다.
유리는 구름 속 존재가 본능적으로 바알임을 직감했다. 다른 동료들도 마찬가지.
“가주님, 저거…….”
블레이크가 구름 아래, 지평선과 맞닿은 곳을 가리켰다.
“마수들입니다. 그리고, 못 보던 것들도 섞여있습니다.”
수색을 해도 보이지 않던 온갖 마수가 갑자기 떼로 나타났다.
자세히 보니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라 땅 아래서 숨어있는 모양이다.
딱히 땅을 파는 재주가 없는 마수 또한 다른 마수의 도움을 받아 숨은 듯했다.
[마수끼리 숨겨준다는 게 말이 되니? 서로 잡아먹으면 또 몰라도!]‘바알의 지휘 아래 이뤄낸 대통합일 거야.’
[바알이 무섭긴 무섭네..]‘그만큼 바알의 영향력이 강하다는 뜻이야. 그렇다면 바알은…….’
생각의 흐름이 끝나기도 전에 마수들 뒤로 꿈틀대던 인영이 몸을 일으켰다.
보라색 구름 안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거대한 남성의 상체였다.
그것도 아주 멀쩡하고 잘 생긴 남자.
“끔찍한 형체가 아니군.”
“악마니까 악마처럼 생길 줄 알았어, 이자벨?”
“그야 당연하지 않나.”
“난 저건 저것대로 끔찍해.”
하얀 피부에 근육질 몸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체, 백금처럼 빛나는 기다란 머리카락.
거대한 크기와 마수만 아니었다면 악마보단 천사라고 착각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리 말에 모두가 공감했다.
터무니없이 인간과 닮은 악마는 도리어 소름끼치게 끔찍했다.
카이는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인간의 형상을 갖췄다는 건 신이 될 준비를 마쳤다는 거다. 아니면 이미 신이 됐거나.”
“하지만 둥지를 유지해야 했잖아요. 그 동안 아무것도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강림도 겨우 힘들었을 텐데 준비를 했다고요?”
채럿이 묻자 유리가 대신 답했다.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바알이 여러모로 준비를 많이 했었던 거 같아.”
당장 베아트리체만 하더라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정신 공격을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당할 수 있다고 가정을 세우긴 했으나, 설마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기적을 일으킬 줄 누가 알았겠는가.
허나 바알이 정말로 신에 가까워졌다면 기적도, 눈앞의 모습도 말이 된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그때, 귓가에서 바로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서로를 바라본다. 너에게도 들려? 라고 묻는 시선들이었다.
같이 들었다는 걸 확인한 뒤에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바알.
그가 입을 열자 대기 중에 공기가 사라진 듯했다.
숨이 턱 막히더니 온몸에 힘이 빠진다. 몸이 약한 채럿은 가슴팍을 움켜쥐고 이자벨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괜찮아?!”
“괘, 괜찮아요. 그보다 이게…… 신?”
유리가 데려왔던 신의 권능을 직접 보긴 했으나, 이 정도의 압박감은 없었다.
그만큼 소녀는 약했고, 막 신이 된 바알의 권능은 훨씬 강했다.
「내 신으로서 마지막 자비를 베풀겠다. 신에게 대항하기를 멈추고 순순히 멸망을 받아들여 내게 목숨을 바쳐라.」
[지랄도 풍년이네.]어지간해서 욕을 하지 않는 티르빙이 찰진 한 마디와 함께 코웃음 쳤다.
그러나 마냥 무시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짐을 목도한 너희들은 알 것이다. 이 몸은 진정한 신이 되었다. 생명으로서 진화한 내게 물질의 구속을 받는 너희들이 이겨낼 순 없다.」
“신이 되었다고 오만해졌군.”
「그대는…… 유리 덴 나이트워커. 인간 중 위대한 업과 덕을 쌓은 자.」
으음? 그 대사, 카이한테 하던 거였는데.
왜인지 바알은 원작과 달리 유리에게 그 대사를 말했다.
원작과 달라진 영향 탓일까.
딱히 상관은 없겠지.
“어떻게 신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완벽하지 않은 상태로 잘도 협박을 지껄이네.”
「짐이 완벽하지 않다? 어리석군. 신체(神體)를 직접 목도하고도 짐을 부정하려 드는가.」
“환각으로 누구보다 재미를 봤던 네놈이 보는 걸 그대로 믿으라는 건 어불성설이지 않나?”
「무얼 어찌 믿던 그대들의 마음이다. 허나 내가 준 기회를 부디 잊어주지 않았으면 좋겠군.」
드디어 나왔다.
원작에서 나왔던 희대의 개소리.
「짐에게 지금이라도 항복하여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대들에게 다음 세대를 살아갈 수 있는 자격을 주겠노라.」
유리는 카이의 눈치를 살폈다.
이 대목에서 카이가 순간적으로 혹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원작 결말에 남은 66명은 바알의 작품이라 해도 무방했다.
카이가 끝끝내 멸망을 막아냈지만(물론, 카이가 아니라 ‘나’일 수도 있지만), 카이도 바알한테서 저 말을 들었었다.
신이 된 자신에게 순순히 죽음을 헌납하면 카이 또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겠다고.
겨우겨우 카이는 무시했지만, 결과적으로 멸망을 막아내진 못했다.
위대한 악마 군주 바알은 기어코 신이 되어서 인류를 멸종시켰다.
카이가 분투하여 군주의 목을 잘랐으나, 남은 인류는 단 66명뿐.
죽음을 앞두고 카이는 현실에 만족했다. 어쨌든 멸망을 막아내고 인류의 일부라도 살아남았으니까.
참으로 웹소설치곤 좋지 않은 결말. 그래서 유리도 이 대목에서 화를 냈었다.
어째서 이런 식의 결말이 됐냐고.
잘 나가다 카이는 왜 마지막에 가서 만족했냐고.
그러나 돌이켜 보면 카이가 바라던 결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한 환생을 겪으며 맹목적인 목적으로 살아왔던 그다. 그런 그가 조금의 인류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을 마지막 죽음에서 보았는데 과연 거부할 수 있겠는가.
단연 거부할 수 없다.
허나 이 마지막 장면에서 유리는 하나의 사실을 알아냈다.
‘내가 원작을 썼다면.’
마지막에 내가 살아있었다면.
그렇다면 66명의 최후 인류에는 내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원작의 내용을 전부 쓸 수 있었고 그런 식으로 끝났던 게 아닐까.
그런 카이를 바꾸기 위해서 회귀를 하진 않았을까.
“괜찮은 유혹이군. 예상했던 정신 공격보다 더 끌려.”
카이가 한 발 나섰다. 손에 들린 성검이 희미한 빛을 내다가 차츰 옅어졌다.
경계심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대로 넘어가나 싶었으나.
“우리가 살면 네놈은 그대로 사라질 건가?”
「그렇다.」
“뭘 믿고?”
「용언을 걸라고 하면 걸겠고, 언령을 걸라고 하면 걸겠다. 신의 약속이야 말로 세상 무엇보다 강력한 결속이니. 그 강제성은 알고 있겠지.」
“신이라면서.”
「뭐라?」
“신이라면서 그 강제성 하나 못 부수는 건가.”
「…….」
“급격히 말이 없어졌군, 신.”
카이의 성검이 다시금 빛을 발했다.
여전히 신의 낯은 평온하기 이를 데가 없었지만,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졌다.
바알이 어떻게 신의 권능을 단기간에 가졌는지 몰라도. 급하게 힘을 얻은 건 분명했다.
고로 그만한 부작용도 있을 터.
원작에서도 바알이 죽기 직전에 저런 제안을 했던 걸 떠올리면 현재의 놈도 구석에 몰렸다는 증거였다.
「후회하게 될 것이다.」
“너도.”
그 길로 신은 눈을 감고 침묵했다. 같잖은 협박과 대화는 그걸로 끝났다.
고요가 찾아오고, 잠시 뒤 마수들이 일제히 진격하기 시작했다.
“어떡하죠, 오라버니? 원래 계획은 둥지가 무너지고 바깥의 병력이 같이 합류하는 거였잖아요.”
“시간을 끌어야지.”
마수와 바알이 직접 등장하면서 둥지의 붕괴는 더더욱 가속화되었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 진입하기 위해선 완전 붕괴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블레이크 경.”
“네, 가주님. 본부 내리십시오.”
벌써 동료들은 전투를 위해 각자 무구를 챙겼다. 블레이크도 켈베로스의 이빨을 들고 유리에게 다가섰다.
“둥지 붕괴까지 밀리샤 경과 빅스터를 보호하도록. 렉슬러 님도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이자벨,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큰 광역 마법을 준비해줘.”
“알겠다.”
“그리고 채럿.”
그녀를 내려다보는 유리의 시선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사실 유리에게 있어서 채럿은 전혀 상상한 적 없는 가족이었다.
물론, 나이트워커 가문 전체가 그렇지만. 그녀로 인해서 많은 것들을 겪었고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채럿도 군말 없이 수많은 일들을 대신 해줬지.
그리고 지금부터 그녀에게 잔인한 부탁을 한 번 더 해야만 했다.
둥지로 떠나오기 전에 미리 말하긴 했지만, 될지도 모르겠고 된다고 해도 과연 어떨지 확신이 없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오라버니!”
유리의 시선에 담긴 감정을 읽어낸 채럿. 소녀는 더할 나위 없이 해맑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한텐 라군도 님도 있고, 엄마도 있으니까요!”
“채럿…….”
“오라버니가 저 때문에 멸망을 막을 계획을 새로이 바꾼 것도 알아요. 제가 중요한 거잖아요.”
채럿이 마수를 다루기 시작하면서 멸망을 막는 계획이 틀을 잡았다.
그 전에는 멸망을 막기보다 유리 개인으로서 성장에 초점을 맞췄고, 채럿이 마수와 정령왕까지 계약을 맺자 계획은 더 구체적으로 잡혔다.
그 사실을 악마가 침공하면서 알려줬었다.
그때도, 지금도, 채럿은 한결 같았다.
“오라버니는 더 큰 일을 할 거잖아요. 전 오히려 오라버니가 걱정된다고요!”
“나야, 뭐어.”
“괜히 분위기 잡지 말고 얼른 명령이나 주세요, 가주님.”
그래, 채럿이 괜찮다는데 걱정부터 해선 안 되겠지. 그건 각오를 다진 그녀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유리는 숨을 골랐다가 말했다.
“채럿, 저기 있는 모든 마수들을 통제해.”
“넵!”
선두로 유리와 카이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 순간, 채럿은 안고 있던 토끼 인형을 놓았다. 곧 인형이 인간형 토끼로 변했다.
언제나처럼 토끼는 늠름했다. 까칠해 보이는 눈빛도 여전하다.
채럿이 알고 있는 엄마라는 이미지와는 멀었어도, 분명 토끼에겐 엄마 알리아스의 의지가 있다.
하지만, 이 인형은 드루이드의 능력과는 별개였다.
말 그대로 알리아스가 남긴 유산.
언젠가는 힘을 다해 사라질 운명이었다.
“엄마, 마지막 부탁이야. 날 지켜줘. 오라버니가 바알에게 갈 수 있을 때까지.”
푸르르!
토끼가 힘차게 울며 주먹을 쥐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걸 직감한 걸까.
“후우.”
숨을 고른 채럿이 드루이드의 언어를 뱉었다.
기이한 소리가 울려퍼지고, 달려오던 마수들이 최전방부터 갑자기 몸을 비틀더니 뒤로 돌아섰다.
그리고 이어진 동족 학살.
“큽!”
채럿의 코와 눈, 귀, 입에서 전부 피가 흘렀다.
옆에서 마법을 준비하던 이자벨이 단말마처럼 그녀를 불렀다.
“괜찮아요, 언니. 이거 하려고…… 훈련 엄청 했다고요.”
“……위험하면 바로 그만둬야 한다. 유리도 무리하는 걸 바라진 않아.”
“알아요.”
여기서부턴 누구도 뒤를 봐주거나 쓰러진 동료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래선 안 되니까.
비록 유리는 희생 없는 계획을 세웠다지만, 모두가 계획대로 일이 흘러가는 법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믿었다.
누구도 죽지 않고 이 멸망을 물리칠 수 있다고.
선두에 선 유리가 해결해거라고.
키아아아악!!!
최전방 마수들이 채럿의 지배력에 서로 물고 뜯는 동안, 그 사이로 유리와 카이가 뛰어들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