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54
제254화
벤헬링턴을 본 유리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항상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했다지만, 이때만큼 반가운 적이 없었다.
“할아버지…….”
“뭘 그리 실신한 꼬락서니로 있느냐! 얼른 발딱발딱 일어나지 못해?!”
아스칼론에 온 힘을 쏟아 썼던 데다가 무형검까지 각각의 악마들을 막아내느라 온 몸에 진이 빠졌다.
그러다 보니 주저 앉아있던 유리.
후들거리는 무릎을 쥐고 일어나자 멀리서 둥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병력이 단숨에 몰아닥쳤다.
리펠리온의 엘프들이 멀리서 지원사격을 가했고, 나이트워커의 기사들이 전방을 맡아 마수들을 밀어붙였다.
확실히 병력이 많아지니 마수를 상대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
특히 나이트워커의 기사는 나이트워커다웠다.
개인의 실력만 해도 8서클에 버금가는 기사들이 합을 짜고 진을 구성하자 일제히 전열이 전진했다.
“이 정도로 헤매고 있었느냐.”
이번엔 마리가 나타났다. 그녀의 검과 뺨엔 벌써 피가 묻어 있었다.
뺨에 묻은 피를 손으로 훔친 마리는 전방의 마수들을 살폈다.
“길을 열어주겠다.”
“할머님.”
“당신은 내 뒤로.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괜히 방해하지 말고.”
“거 말을 참. 내 몸이 성치 않아도 저 정도는―”
“애 앞에서 망신살 뻗치고 싶어요? 얼른 말 들으시죠.”
“크흠!”
실은 유리도 벤헬링턴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자신이 상대했는데 모를 리가.
솔직히 유리가 이겼다고 할 수 없는 대련이었으나, 벤헬링턴이 이겼다고 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비기를 전승하기 위해서 벌였던 대련. 승패를 떠나 중요한 건 그뿐.
그래서 한쪽이 크게 다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신이 되려 한다고.”
벤헬링턴이 어깨를 주물거리며 물었다.
알았구나.
분명 그 소녀가 말했겠지.
창조주의 권능을 가진 그녀라면 유리의 의도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으리라.
한 번 했던 예언, 또 못할 리는 없을 테니.
“네, 신이 될 겁니다.”
“멸망을 막기 위해서냐?”
거창하게 멸망을 막는 행위 따위 관심 없다.
멸망을 막고자 했어도, 그건 주인공인 카이의 몫이다.
유리가 지키고 싶었던 건 원래부터 하나, 어머니였다.
“무리하지 마라.”
“……할아버지?”
“네놈이 굳이 신이 되어가면서까지 이 세상이 지킬 가치가 있는지는 모른다. 허나 한 명을 사지로 몰아넣어가면서 구원받을 수 있다면 오산이다.”
신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벤헬링턴은 모른다.
그러나 유리가 신이 되겠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고, 이는 뒤에 좋지 못한 꿍꿍이가 있다는 얘기였다.
혹자는 유리 혼자서 멸망에서 살아남으려 한다는 오해를 했다. 가문의 장로들이 그랬다.
솎아내지 못한 다이올드의 잔당이었겠으나, 감히 신이 되겠다는 발상을 저지른 자가 무슨 일을 못할까.
그렇다고 벤헬링턴이 유리를 믿어서 그런 장로들의 의견을 묵살한 건 아니었다.
더욱이.
“널 믿어서가 아니다, 유리. 네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
“내 가족이 악이 되겠다 해도 난 말리지 못한다. 다이올드가 그 모양이 될 때까지 얼추 알면서도 이 할애비는 방만 하는 것밖에 못했어. 가주씩이나 되어서 몹쓸 짓을 했지.”
잘못했다. 잘못한 걸 안다.
그래서 사무치도록 마음이 아파서 달랠 곳이 필요했고, 벤헬링턴은 툭 하면 가문을 비웠다.
적어도 다이올드가 ‘진짜’ 탈선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허나 처음부터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의 아둔함을 자책했었다.
유리도 그런 할아버지를 이해했다.
결과적으로 다이올드를 저리 놔뒀다 해도, 원작에서도 그렇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이올드는 알고 있던 모습과 많이 달랐었다.
“당한 게 있는데 제대로 갚아야지.”
[그래도 제몬을 부려먹겠다는 건선 넘었어.]“그러게. 손자라서 안 주는 거 같더라.”
[뭐야. 뉘앙스가 왜 그러니?]“솔직히 벤헬링턴 같이 매정한 사람이라면 돈보단 가족을 팔 줄 알았거든.”
[벤헬링턴을 떠본 거였니?]“…….”
[꺄하하하하! 진짜로 그랬구나!]‘아무래도 내가 벤헬링턴을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아.’
[응? 뭐라고, 꼬맹이?]“아냐, 아무것도.”
가문으로 막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던 시기. 제몬과의 시비로 인해 유리는 보상으로 1000만 골드를 요구했었다.
터무니없는 금액이라 거절할 줄 예상했었다.
그러나 벤헬링턴은 제몬을 보호하는 쪽으로 선택했었다. 분명 제몬의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그때는 그런 벤헬링턴이 가주답지 않았었어. 그렇지만 그게 더더욱 가주다웠던 거지.’
가주는 말 그대로 가문의 주인.
가문에는 수많은 정치적 다툼이 있고 이를 중재하고 가문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택하는 이가 바로 가주였다.
……그런 줄 알았지만.
가주에게 그런 업이 주어진 이유를 망각했었다.
‘가주도 엄연히 가족이었어. 가족을 책임지고 이끄는 가장.’
세드리치가 본 적 없는 아들을 위해서 클라우드 하트를 남긴 것처럼.
블레이머가 아내와 아들을 지키기 위해서 차기 가주 자리를 잠시 버려가면서 가문을 나왔던 것처럼.
그들에겐 책임이 있었고, 그 책임의 이면엔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제가 해야 합니다.”
미래를 아는 책임 또한 져야 한다. 무엇보다 미래에 아버지를 죽였던 그 책임도 같이 등에 지고 나아가야 한다.
‘아버진 내가 회귀하고 나서 알고 계셨을까.’
이젠 살아계시지 않는 아버지에게 허황된 질문에 불과하다.
그러나 왠지 세드리치는, 블레이머는 이리 말했을 것 같았다.
‘모른다.’
유리는 하늘로 손을 뻗었다. 날아갔던 아스칼론이 먼지로 흩어졌다가 빛이 되어 손에 모여들었다.
“자책하지 마세요. 제가 선택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돌아올 겁니다.”
“……그래.”
벤헬링턴과 마리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갑자기 속도를 높여 순식간에 사라졌다가 마수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부상의 여파가 진짜로 있냐는 듯, 벤헬링턴의 검이 칠흑 같은 검기를 발산했다.
“길을 열어라! 가주의 행차에 방해되는 것들을 모조리 몰살하라!!!”
“우오오오!”
“와아아!”
두 사람이 가세하자 수월하던 전세가 더더욱 수월하게 펼쳐졌다.
이에 악마들이 이를 물고 분통을 터뜨렸다.
세에레는 활 끝을 마리에게 겨눴다.
“다 늙은 노장이 여기가 어디라고!”
“호오, 진짜 악마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만. 어디 실력 좀 볼까?!”
쿠쿠쿠쿠쿠!!!
세에레가 화살 하나를 쏠 때마다 대포처럼 튕겨나가 폭발을 일으켰다.
화살 하나를 쏠 때마다 간격은 고작 1초 내외.
대포를 속사로 쏘는 격. 그러나 마리는 여유롭게 하나하나 쳐내면서 앞으로 전진하기까지 했으니.
부활을 겪으며 제대로 회복되지 않아서 제대로 된 힘을 발휘하지 못한 탓도 컸다.
“이익! 디, 디아볼! 발제니르!”
“어딜 가느냐, 돼지와 해골 바가지야!!!”
세에레가 급히 도움을 청해봤으나 이미 디아볼과 발제니르는 벤헬링턴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심지어 부상을 입은 벤헬링턴을 상대로도 두 악마가 밀렸다.
결국 남은 건 하데스와 바알. 바알은 참전이 불가능했고, 하데스는…….
‘저 새낀 여기에 관심도 없겠지!’
마수와 악마가 모두 전투를 벌이는 동안, 하데스의 시선은 처음부터 한 곳에 꽂혀 있었다.
바로 카이.
그는 오랜 세월 카이와 충돌을 일으켰다. 지하 세계에 영혼들을 이끌고 가는 자로서 강력한 영혼을 가진 카이에게 관심이 가는 건 당연했다.
“길이 뚫렸습니다, 가주님! 가십시오!!!”
기사 하나가 소리를 지르기 무섭게 유리와 카이가 쏜살 같이 나아갔다.
완전히 길이 뚫리지는 않아서 몇몇 마수가 흘렀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 끝에 하데스, 그 너머로 바알이 시야에 들어왔다.
유리도 하데스가 카이를 갈망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이번에도 카이에게 하데스를 맡길 참이었다.
어차피 말 안 해도 녀석이 나설 테지만.
“유리, 저 놈은 내가 맡는다.”
“알고 있어. 대신, 혼자선 안 돼!”
악마 자체가 성력에 상성이 맞지 않다고 해도, 하데스와 카이는 특히 극상성이었다.
하데스는 영혼을 끌어당기는 힘을 가진 군주.
그에 반해 카이의 영혼은 환생을 거듭하면서 어떤 영혼보다 강력해졌다.
그런 영혼이 탐났던 하데스는 점점 카이를 향한 집착이 강해졌고, 뜻하지 않은 라이벌 관계가 형성되었다.
카이도 하데스가 이번 전투의 가장 큰 변수라 여길 터.
크워어어어!!!
그때, 멀쩡하던 하늘에 먹구름이 들어차더니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야수의 울음소리가 퍼졌다.
천둥과 번개가 천지를 짓뭉갤 기세로 번쩍거린다.
구름 사이로 수염을 드리운 용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최후의 용, 비량이었다.
「어리석은 자들이 한 데 모였으니. 내 힘을 다 해봐야겠군요.」
비량은 기다란 몸을 꿈틀대다가 곧바로 하데르에게 달라붙었다.
급히 창을 움직여 봤지만, 이미 어깨가 반쯤 뜯겨나갔다.
“큼!”
「악의 죽음을 맡는 자군요. 이만한 상처에도 꿈쩍을 않다니. 과연 악마라는 겁니까.」
비량에게 당하고도 하데스는 당황하는 기색이 없었다.
과연 카이에게 맞섰던 악마다웠다. 힘이 부족해도 주인공의 적수였다는 건가.
유리는 카이에게 거듭 강조했다.
“살아와라. 바알을 죽이려면 그래도 네가 필요해.”
“네놈이야 말로 죽지 말도록.”
“으으으음!!!”
카이가 움직일 걸 느낀 하데스가 들고 있던 창끝에 마기를 모았다. 날카롭던 창은 점점 두께가 두꺼워지더니 철퇴처럼 가시가 나고 둥글게 변했다.
기합 비슷한 소리를 내며 철퇴가 지상으로 떨어졌다.
거대한 크기의 철퇴는 점점 가까워지자 그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고도 남았다.
그러나 카이의 성검은 터무니 없게 철퇴와 맞대었고.
쿠웅!
기어코 철퇴를 막아냈다.
“가라!”
어마어마한 중력파에 카이도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전력을 다해 뛰었다.
지금이야 전황이 유리하게 돌아갈지라도, 정말로 신이 된 바알이라면 끊임없이 마수를 소환할 것이며 악마들은 본래의 힘을 되찾아갈 것이다.
그 전에, 끝을 내야 한다!
“저 새끼 막아, 띨띨이 새끼들아! 절대 바알 님에게 가게 둬선 안 돼!”
“이곳에서 생을 바쳐라, 용가의 기사들이여! 절대 우리의 가주가 죽게하는 불찰을 저질러선 안 된다!!!”
아니나 다를까. 아래서 마수들이 더더욱 올라온다.
그때, 저 밖에서 또 다른 거대 무리가 땅을 울리며 빠르게 달려왔다.
“톤트들아! 우리가 마수일지언정, 악마의 손에 놀아나선 안 된다! 진격하라!”
빅 톤트를 선두로 타락에서 벗어난 톤트들이 다른 마수들을 물고 뜯었다.
언뜻 마수와 악마들이 포위된 형국처럼 보였다.
「귀찮게 하는군.」
보다 못한 바알이 숨을 들이마셨다. 한 호흡에 마나, 마기, 성력 가릴 것 없이 빨려 들어갔다.
곧 무언가가 일어난다.
자리에 있던 모두가 오소소 돋는 소름에 위기를 느꼈다.
[꼬맹이, 저대로 놔두면 안 돼! 저 녀석! 창조주의 권능을 쓸 셈이야!]무슨 권능인지는 뻔하다.
모든 게 불안정한 상황. 마수, 악마, 바알 본인조차 완벽하지 않은 이곳에서 쓸 만한 발악 같은 권능은 단 하나다.
‘여기서 멸망을 일으키려 한다!’
아마 당장 멸망을 일으켜봤자 작은 멸망에 불과할 터. 허나 바알의 계산에서 이 전장만 무너뜨리면 추후를 도모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예정보다 빠르게 멸망을 불러왔어!’
유리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카이가 미뭉을 들고 비량과 함께 하데스와 맞서고 있었다.
확실히 하데스는 다른 악마들과 다르게 카이와 팽팽했다. 물론, 저대로 놔두면 카이의 승리는 자명했다.
그랬는데.
‘젠장!’
바알이 급해질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멸망을 이리 빨리 불러일으킬 줄은 몰랐다.
애초에 바알이 벌써 신에 가까워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성검이 필요해. 하지만 지금 성검을 달라고 하면 카이는…….’
멸망은 신의 권능이다.
그런 신의 권능을 막기 위해선 같은 권능이 있어야 했고, 성검이 그 재료로 필요했다.
하지만 카이에겐 성검이 없으면 하데스와의 싸움에서 밀리게 된다.
‘이 방법을 또 쓰긴 싫지만…….’
두 번째로 둥지를 부술 때, 유리는 일부 권능을 썼었다.
하지만 그건 유리도 완벽하지 않은 권능이었다. 성검 없이 마검으로만 이뤄낸 권능이었으니까.
‘티르빙만으로 완벽한 권능을 써야 한다.’
결국 방법은 하나. 바로 절대신 창조주가 아닌. 마신이 되어 권능을 쓰는 것.
결심은 길지 않았다.
곧 유리의 마검에 한 번도 쓰인 적 없던 마기가 진하게 모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