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56
제256화
늦은 시각, 카이는 밤늦게 아무도 모르게 창조주의 권능을 가진 소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혼절하고 깨어나지 못하는 그녀였으나, 미뭉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깨울 생각이었다.
딱히 방법이랄 것도 없었다.
성검에는 반드시 창조주가 반응할 테니까.
미뭉의 찬란한 황금빛이 손끝을 타고 소녀에게 스며들었다.
“일어나라. 깨어있는 거 안다.”
“……미뭉. 아니, 그 주인이군요.”
바로 눈을 뜬 소녀는 그리 중얼대다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미뭉이 준 회복력 덕에 조금은 안색이 되돌아왔다.
그녀는 제 몸을 살피며 마른 입술을 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성검의 기운이네요, 라고 창조주께서 말씀하셨어요.”
“미뭉에 바로 반응해놓고 자아가 분리된 척 하지 마라.”
“……재미없는 사람.”
뾰로통하게 뺨을 부풀렸던 소녀는 지그시 입꼬리를 올렸다.
“나한테 무슨 볼 일이죠? 곧 전장으로 떠나실 분이 유언이라도 남기러 오셨나요?”
“창조주의 권능을 바알에게 넘겨라.”
두서라곤 조금도 없는 제안.
웃다가 놀란 소녀가 다시 웃는다.
“제가 왜 그래야하죠.”
“그 놈은 성검과 마검을 이용해서 자신이 창조주가 되려고 한다.”
“거기까지 알아낼 줄이야. 과연 시간을 되돌린 사람다운 발상답네요.”
“허나 그 놈이 창조주가 되면 반드시 죽는다.”
“으음? 그런가요?”
“창조주의 권능, 탄생.”
한숨 들이키고 카이가 이어 말했다.
“넌 멸망을 탄생시켰다.”
“…….”
“멸망을 탄생시킨 너는 멸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지금까지 존재해왔다. 그러나 창조주의 존재가 사라진다면 권능 또한 사라질 것이고, 탄생시킨 멸망도 사라지겠지.”
용신 샤를린느는 사명의 대상이 사라지면서 권능마저 사라졌다.
바꿔 말하면 사명을 짊어진 그녀가 없어지면 권능 또한 사라질 수 있다.
결국 권능이란 사명을 짊어진 신이 반드시 존재해야만 유효하다.
창조주가 지금껏 존재해온 이유 또한 ‘탄생시킨 멸망’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바알한테 창조주의 권능을 넘긴다 해도 어쩌려는 거죠?”
“바알의 바람 마찬가지로 멸망이다. 그러니 녀석에게 권능을 넘기고 멸망을 지켜보란 뜻이다.”
“방관하라는 게 아니고요?”
“네 특기지 않나.”
“오해는 하지 말아줬으면 하네요. 전 멸망을 바라지 않아요.”
“이제 와서 할 소린 아니군.”
“유리, 그 사람이 날 라지닉소스에 있을 때 죽였다면 자연스레 멸망은 사라졌을 거예요. 뭐, 몰랐으니까 날 살리긴 했지만. 난 기회를 줬었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하.”
카이가 어이없다며 웃자 소녀의 눈꺼풀이 가늘어진다.
“왜 웃죠?”
“그 놈이 정말로 몰라서 널 살렸을 거 같나?”
“알고 있을 리가…….”
“알고 있어.”
“말도 안 돼요.”
“아니, 확실히 안다. 그러니까 놈은 직접 창조주가 되려고 하는 거다.”
강제로라도 창조주가 되고 스스로 소멸하면 멸망도 사라질 테니.
유리는 창조주인 타 존재를 죽이는 것이 아닌, 창조주가 된 스스로를 죽이려 했다.
“그 놈이 자살하는 꼴을 볼 수는 없다.”
“그 사람을 싫어하는 줄 알았는데.”
“싫어한다. 멍청하게 알고서도 널 살려서 왔으니 더 싫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성검만 들었다고 냉혈한이 된 누구보단, 마검을 들고서 누군가를 살리려는 의지가 있는 그 놈이 세상을 구원하기에 어울린다.”
“진짜…….”
카이나, 유리나 재미없는 사람이다.
시답지 못한 사정으로 죽음으로부터 살아있는 것들을 구하려 하다니.
멸망을 탄생시킨 보람이 전혀 없어지지 않나.
“당장은 멸망에서 벗어나도 당장일 뿐이에요. 언젠가 이 세계엔 일어나야 할 순리니까요.”
“안다.”
무한한 환생을 거듭하며 작은 멸망을 목격했었다.
전염병, 전쟁, 통제 없는 혼란, 그리고 악마.
생명을 줄이는 행위는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처음엔 전부 막아보려 했었지만, 곧 카이는 부질없는 짓임을 깨달았다.
그래도.
“멸망 하나쯤만 막으면 된다.”
그리 대화를 끝내놓고 카이는 왔을 때처럼 조용히 떠났다.
남겨진 공간에 멀어지는 발소리마저 잠잠해지고 나서야 소녀는 다시 몸을 침대에 뉘었다.
‘멸망을 일으킨 보람은 없어졌지만. 세드리치, 당신은 성검을 준 보람이 있겠네요.’
* * *
드드드드.
하늘과 땅이 울었다. 처절하게, 처연하게, 삼킨 것을 토해내지 못해 괴로운 울음이 그 아래에 자리한 미물에게 전해졌다.
[이걸로 후회하지 않느냐.]성검 미뭉이 던지는 질문에 카이도 툭 던졌다.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야.]기꺼이 멀어진 미뭉이 새로운 창조주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악마도, 마신도, 창조주도 아닌 모호한 존재가 강제로 성검을 받아 주인이 되려 했다.
[나의 새로운 주인아.]「꺼, 꺼져!」
[너에게 거부할 권한은 없다. 신이 되기로 한 이상, 그때부터 넌 나의 주인됨 자격을 얻었다. 거부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꺼지라고오!!!」
푹!
처절한 절규가 갑자기 멎었다.
마검을 든 유리가 창조주의 가슴팍에 핏물 가득한 칼날을 쑤셔 넣었다.
바알의 선한 부분들이 마검의 악한 기운에 의해 바스라진다.
이어 미뭉이 주인을 바꾸면서 급속도로 ‘환생’ 절차로 넘어갔다.
보통 아무런 영혼에 환생이 되지만, 이번만은 미뭉이 직접 환생할 생명을 골랐다.
안 그래도 주변에 쓸모없는 마수들이 넘쳐났다.
미뭉은 그 중 가장 하찮은 오크에게 환생을 시도했다.
「안 돼! 제발! 내 멸망! 내 세계가!!!」
창조주로서 마검에 당해 죽고.
사소한 생명으로서 환생한다.
한때는 세계를 지탱했던 창조주의 죽음이 일어나자 지축과 시공간이 함께 뒤틀렸다.
빛조차 삼키는 일그러짐 아래.
오크로 환생했으나 바알의 외형은 본래 바알처럼 변해갔다.
여전히 남아있는 마기와 바알 본연의 힘 탓이었다.
하지만 그 힘 대부분을 잃었기에 환생한 육신조차 변하다 말았다.
피부와 근육이 부풀었다가 뼈가 없어 뭉개지고, 어떤 부위는 뼈만 있는 채였다.
“끄으…….”
겨우 신이 되었는데 다시 육신의 감옥에 갇힐 순 없다. 바알은 그런 분노감 하나로 망가진 육신을 움직였다.
조금만 움직여도 피와 살점이 떨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어리석구나.]귓가에서 미뭉의 한탄 비슷한 탄식이 들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미뭉은 계속해서 제 주인을 치료하려 성력을 투입했으나, 악마라는 본질과 마수라는 특성 때문에 육신의 붕괴가 더 빨라졌다.
“하찮아졌군.”
바알 머리 위로 익숙한 음성이 들리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망가진 한 쪽 눈으로 본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바알을 내려다봤다.
“미뭉의, 주, 인……!”
“이젠 미뭉의 주인이 아니다.”
“네놈! 네놈 때문에!”
악성을 내지르며 몸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남아 있던 근육이 모조리 끊어지면서 바알이 무너졌다.
꺾이면 안 되는 방향으로 꺾인 모습에 카이는 무감각하게 혀를 찼다.
“네가 원하던 멸망은 끝났다.”
“아니! 멸망은 다시―!”
퍼억!
뭐라 지껄이기 전에 발로 머리통을 짓밟았다.
튀어 오른 피와 살점들은 마침내 목숨이 끊어지자마자 먼지가 되어 묻지 않고 흩날렸다.
그리고 머리 위로 몰아치던 폭풍들 또한 바알이 죽는 순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멸망이 끝났다.
죽음이 낭자하던 세계와 기다리고 있던 미래가 끝이 나고. 예언에서 벗어난 새로운 미래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누구보다 오늘을 꿈꿔왔던 카이.
그리고 유리.
유일하게 세상을 드리우던 그림자였던 마신 유리도 크기를 줄여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뿔과 날개, 날카로워진 송곳니만 아니면 원래의 유리였다.
“너였지?”
유리가 물었다.
“바알한테 창조주의 권능을 넘기도록 한 거. 네가 그 소녀를 설득한 거지?”
“그래.”
어쩐 일인지 순순히 카이가 수긍했다.
원래 이런 질문을 하면 대답조차 안 했으면서.
“어째서? 그냥 내가 창조주가 되는 방향이었으면 더 쉬웠잖아. 바알로부터 권능을 빼앗는 동시에 예언을 바꿔버리면 되었잖아.”
“예언을 바꾼다는 말을 내가 믿었을 거 같나?”
……거기까지 알고 있었구나.
한 번 탄생한 것들은 그 생을 다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신의 사명처럼 주어진 업을 다하고 끝을 맞이했다.
살아있는 것들이 그랬고, 예언 또한 그랬다.
그래서 유리는 ‘창조주가 되어 예언을 무효화한다’는 거짓말을 했다.
애초에 예언을 무마시키는 방법은 하나.
창조주로서 죽는 것.
예언이 ‘탄생’을 겪어 존재한다한들, 근본적으로 생명과 달랐다.
쉽게 비유하자면 예언은 언어, 창조주의 예언은 곧 용언 같은 ‘언령’과 같았다.
결국 유리가 창조주가 되어 자살했더라면 쉽게 멸망을 막을 수 있었다.
그걸 카이가 멋대로 전대 창조주를 설득해서 더 힘들게 일을 만들어버렸고.
“왜?”
“왜냐고? 지금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아니, 뭐. 나 하나 죽어서 해결하길 바라지는 않았어! 같은 신파적인 멘트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네놈한테는 멸망이 우선이었잖아.”
연인과 척을 지고, 상황이 어쩔 수 없다면 동료들마저 버렸던 잔악한 주인공이 카이 안데르센이다.
주인공한테 이용당할 마음으로 도왔던 유리였으나, 막상 카이가 저지른 짓을 보곤 괜한 위화감마저 느껴졌다.
“글쎄, 왜일까.”
카이는 얼버무리듯 그리 말해버리곤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말 안 하겠다는데 어쩌겠어.
그때.
휘리리리릭! 푹!
하늘에서 두 자루의 검이 동시에 떨어졌다.
미뭉과 티르빙. 미뭉은 유리 앞에, 티르빙은 카이 앞에 꽂혔다.
방식이 달라도 이제 두 사람은 검의 주인들이 아니었다.
물론, 언제든 다시 주인이 될 수 있다. 카이는 미뭉을 쓸 힘이 충만했고, 유리야 마신이 되었으니 구태여 주인됨을 인정 받을 필요조차 없었다.
그러나.
입을 맞춘 듯 누구도 검에 손을 뻗지 않았다.
어쨌든 창조주가 완전히 사라지면서 예언도 사라졌다.
그러나 새로운 창조주가 태어날 무구들이 눈앞에 떡 하니 있었다.
“만에 하나 창조주가 사라져서 다시 태어나도 멸망의 사명을 짊어진다면 이 검들은 있어서 안 된다.”
그리 말한 카이의 말 속엔 검을 파괴해야 한다는 뜻이 은연중에 흘러 나왔다.
유리도 그에 동의했다.
그랬지만.
여전히 두 사람 모두 가만히 검을 지켜보기만 한다.
‘그게 말처럼 쉽겠냐고.’
마검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그렇지, 주인으로 거의 평생을 같이 보낸 티르빙을 갑자기 떠나보내야 한다는 현실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물론, 사전에 티르빙과 미뭉 둘에게 파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었고, 모두 이에 동의했다.
자아를 가지고 있어서 파괴는 곧 죽음이라 해도, 티르빙과 미뭉에게 중요한 건 자신의 안위보다 주인의 명령이었다.
‘더구나 카이는…… 본인이 얼마나 자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미뭉한테 의존적으로 살았어.’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순간에 항상 미뭉이 같이 했다. 카이보다 더 츤데레 같은 말들을 뱉으면서 수많은 시간을 같이 거닐어 왔을 존재.
그런 미뭉을 파괴해야만 하는 숙명 앞에서 카이는 난생 처음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침묵이 이어지고.
결국 유리는 한숨을 내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기왕 내가 마신이 된 김에 한 가지 해줄 수 있는데. 어떻게. 해볼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