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57
제257화
4년 후.
그 날은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을 달리고 있던 때였다.
한 가문의 연무장에선 기사들이 신호에 맞춰 기합을 내지르며 목검을 휘둘렀다.
수습 기사들의 정규 훈련 시간으로, 오늘 훈련 담당은 본래 어떤 여자였다
하지만 단상엔 한 남자가 있었고, 원래 담당이었던 여자가 뒤늦게 뛰어와서 남자한테 따졌다.
“단장님! 또 저 몰래 제 일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 이자벨 양! 오, 오늘은 쉬라니까요! 왜 나왔습니까!”
‘헌드레드’라는 이름을 단 신생 기사 가문에는 그 가주가 호통을 듣곤 어쩔 줄 몰라 했다.
정작 이자벨은 헌드레드 가(家)의 가주이자 나이트워커의 기사단장에게 감히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다.
“제가 애를 가졌다고 해서 제 일까지 하지 말라는 겁니다! 만삭도 아니고 겨우 임신 3개월이라고요!”
“하, 하지만 이자벨 양의 아이는 제 아이이기도 하니까―”
“아아! 그만! 제 일은 그래도 제가 해야 합니다! 그거 마음대로 배정을 바꾸면 권력 남용이라고요!”
두 사람의 싸움 원인은 간단했다.
블레이크가 단장이 됐듯, 이자벨 또한 마법과 검을 같이 쓰는 마검사단을 설립해 단장이 되었는데.
이자벨이 뱃속에 아이를 가지게 되면서 그 업무를 전부 부하들에게 돌린 것이다.
물론.
아이는 두 사람 모두의 아이였다.
“그래도 안 됩니다! 안 되는 건 안 돼요!”
“으악! 단장님, 제발!”
그런 부부를 멀찍이 보던 단원들은 억지로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기사의 표본이라 불리는 그들이 애정행각 같은 싸움을 단원들 가운데서 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더 웃긴 사실은, 부부인데도 직장이라는 이유로 서로 호칭을 단장과 단원으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거기 너! 얼른 이자벨 양을 도와! 안 도우면 어, 엄벌이다!”
“너! 거기 가만히 있어!”
“도와!”
“가만히!”
“두 사람은 여전히 투닥거리네요.”
그때,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한 여성이 끼어들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루비가 박힌 왕관을 쓴 여성, 그녀 옆에는 곰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남자도 같이 있었다.
“엘라트리오 여왕 폐하!”
“됐어요. 격식 갖출 필요 없어요. 우리가 남도 아니고.
나이트워커 식 경례를 올리려던 이자벨에게 엘라트리오가 됐다며 손을 저었다.
그 틈에 블레이크는 렉슬러를 보고 반가움을 감추지 않았다.
바알과 결전 이후, 부쩍 친해진 둘은 대악마로 하던 교류전을 계속 이어나갔다.
최고 무위를 향한 욕망이 가득하다는 공통점 덕분이었다. 그러면서 더욱 돈독해진 우정은 묵묵한 성격의 렉슬러마저 유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폐하께선 결혼식을 언제 올리실 겁니까?”
“글쎄요. 막상 왕이 되고 나니 할 일이 너무 많아서 굳이 해야 되나 싶기도 하네요.”
전쟁을 치른 뒤엔 항상 잡음이 나오기 마련이다.
베리온 제국도 바알과 전쟁을 치르며 국력이 약해지자 이 틈에 테러나 침략이 잦아졌다.
그래봤자 막히기 일쑤였지만, 여전히 수많은 세력이 제국을 건드렸다.
거기다 선황은 황태자 사건의 책임을 피하지 못해서 빠르게 황위를 엘라트리오에게 넘겨야만 했다.
그리하여 왕이 된 엘라트리오가 나이트워커에 찾아온 건 근 반 년만이었다.
“그래도 결혼식 하긴 할 거니까 나중에 꼭 참석해줘요. 황제 즉위식도 제대로 하지 못했는데, 결혼식이라도 성대하게 해야죠.”
“물론입니다.”
엘라트리오와 렉슬러가 연인 관계라는 건 이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
이 때문에 정략결혼이라는 정치 카드가 없어져서 아쉽다는 충신들의 의견이 있었지만.
사람 관계로 상처를 받아본 그녀는(정확히는 가족 관계지만) 그딴 정치 카드는 권위가 없는 군주에게나 해당한다며 일축시켰다.
오히려 황제와 근위대장 간의 세기의 러브 스토리라면서 제국민들이 더 좋아해서 황실 인기도는 항상 하늘을 찔렀다.
기본적으로 엘라트리오가 국정 운영을 잘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런데 가주께선 아직…….”
엘라트리오가 뱉은 한 마디에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하호호 웃던 블레이크도 안색이 삽시간에 굳었다.
쭈뼛대며 떨떠름한 신음을 내던 이자벨은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 * *
“에잇! 우라질!”
서류를 들여다보던 벤헬링턴이 신경질을 내며 펜을 쥐고 던지려 들었다.
그러나 정면에서 마찬가지로 서류를 보던 마리가 곁눈질로 무언의 압박을 주자 도로 펜을 내려놔야 했다.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년이야, 2년. 기껏 가주직을 넘겼더니 코빼기도 안 보인 기간이 2년이라고.”
“압니다.”
“대체 이 놈은 어디 가서 뭘 하는지…….”
바알과의 싸움 이후 갑자기 유리가 모습을 홀연히 감췄다.
어디로 간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한 마디만 남기길.
“마신인 된 채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창조주가 되어야 했으나, 본의 아니가 마신이 되어버려서 유리는 그대로 가문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밝혔다.
그 선택은 타당했다.
이대로 유리가 돌아왔다간 나이트워커는 여전히 악마의 편이라고 손가락질 당할 테니까.
무슨 방법이 있겠거니 싶어서 일단 가라고 보내긴 했으나.
졸지에 가문 업무는 도로 벤헬링턴이 맡았으나.
전후 처리 때문에 할 일이 배로 늘어버려서 마리와 겔런, 빌, 채럿까지 달라붙어야만 했다.
“할아버지도 참. 좀만 참으세요. 오늘 엘라트리오 황제가 온다고 했으니까 오늘 일만 해결하면 앞으로 수월해질 거예요.”
“이 몸은 가주가 아니라고 네놈까지 막 대하는구나.”
“아니에요! 제가 할아버지를 왜 막 대하겠어요!”
“요놈아. 날 할아버지라고 부르는 것부터 막 대하는 거다.”
한때 채럿도 당연히 벤헬링턴을 ‘가주님’이라 불렀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은 가주가 아니라서 할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있지만.
우연치 않게 벤헬링턴이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체 누가 나한테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준 것이냐?”
“작은 어머니가요.”
샤를린느!
쓸데없는 소릴!
“싫으세요?”
“…….”
“안 싫은 걸로 알게요.”
누굴 닮아가는 건지, 채럿은 요 몇 년 동안 많이 달렸다.
그 원흉이 유리라고 생각하던 벤헬링턴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에 다가가 밖을 바라봤다.
“돌아오긴 하는 거냐.”
독백은 잔잔하되 크게 퍼져 방에 있던 이들의 귀로 들어갔다.
전쟁이 끝나 멸망이 사라진 지금. 모두가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그 주인공이 사라졌다.
카이인지 뭔지 하는 놈도 사라져버렸다. 같이 사라진 건지, 아니면 따로 떠난 건지 알 수조차 없었다.
혹시나 해서 채럿의 동물들과 리페리온 쪽에 수색을 부탁했고, 몇 달 전 즈음엔 용궁과 비량 측에도 유리를 찾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생사조차 알지 못한 채 2년을 보냈다.
남은 사람들은 결국 살아있다고 믿은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처연한 눈동자를 본 마리가 쯧쯧 혀를 찼다.
“주접 그만 떨고, 얼른 일 해요. 눈물도 좀 닦고. 엘라트리오 황제 앞에서 추태를 보일 참인가요?”
“누, 눈물은 무슨! 내가 언제 울었다고!”
“운다고 안 했어요. 눈물 닦으라고만 했죠.”
“에잇! 난 눈물도 마음대로 못 흘리는 신세군!”
괜히 투정 한 번 부리고 마지못해 벤헬링턴은 자리로 돌아와서 펜대를 쥐었다.
그래, 일을 해야 한다.
이 가문에 가주를 위해서.
그가 돌아오길 고대하면서.
* * *
모두가 가문 안팎으로 여러 사안을 해결해야 하는 동안, 미앵비슈는 가문 밖에 나갔다가 막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바로 샤를린느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방으로 들어서니 책을 읽고 있는 샤를린느. 그리고 작아진 리리스와 삽살개(에덴부르크)와 투닥투닥 놀고 있는 한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바로 창조주의 권능이 깃들었던 아이였다.
창조주가 완전히 사라진 현재, 그녀는 말 그대로 평범한 소녀가 되었다.
신이 되었다던 기억을 모조리 잃었고, 몸까지 더 어려졌다. 지금 그녀의 나이는 신체적으로 기껏해야 6살.
어린 나이에 큰 권능을 감당한 부작용이었다.
“엄마!”
미앵비슈를 본 소녀가 폴짝 뛰어서 곧장 미앵비슈 품에 안겼다.
“우리 딸, 잘 지냈어?”
“응! 작은 엄마가 책 많이 읽어줬어!”
“착하네.”
미앵비슈가 아이의 등을 찬찬히 토닥여줬다.
창조주의 권능을 잃은 부작용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아이가 됐을 때.
소녀의 처우를 놓고 많은 말들이 오고갔다.
멸망을 조장한 신이었으니 죽여야 한다는 의견, 다른 쪽에선 그 신이 사라져서 평범한 인간이 되었으니 아무 가문에 입양을 보내자는 의견이 나왔다.
그런데 그때 미앵비슈가 나서서 입양을 결정했다.
졸지에 미혼모가 되어서 비웃음을 살 거라며 주변에서 만류했지만, 뭐가 되었든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었다.
“잘 다녀왔나요?”
샤를린느도 뒤이어 미앵비슈를 반겼다.
“네. 아쉽게도 수확은 없었지만요.”
“그렇……군요.”
모두가 가문 일로 바삐 움직이는 동안에 미앵비슈는 직접 유리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짧게는 일주일, 길게는 한 달을 자리를 비웠던 그녀.
헌데 이번 여정은 무려 4달간 소식이 없었기에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는 말에 샤를린느는 애써 실망감을 감춰야 했다.
“그래도 다른 한 명은 찾았어요.”
“한 명이라면…… 카이!”
“네.”
“어, 어디서죠? 유리에 대해선 뭐라 하던가요? 건강하긴 한가요?”
“샤를린느, 천천히.”
“아…….”
어지간해서 흥분을 하지 않는 샤를린느가 속사포로 몰아붙이자 소녀가 울상을 지었다. 무서운 듯했다.
급히 표정을 고쳐 잡은 샤를린느가 차분해진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카이가 뭐라고 하던가요?”
“일단 유리와 그는 서쪽에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서쪽이요? 거긴 왜……. 아, 설마?”
“맞아요. 남은 악마 잔당을 처리하러 갔다고 하더군요.”
72인의 악마 중 주요 군주들이 죽었지만, 여전히 서쪽엔 그들을 대신할 악마들이 넘쳐났다.
이에 마신이 된 유리는 이 참에 서쪽으로 건너가 악마들을 토벌하러 떠났다.
“카이가 돌아온 걸 보니 토벌에는 성공했군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근데 유리는 어디에…….”
“그게…… 설명하기가 좀 힘들어요. 악마들을 전부 죽이면서 마신의 사명이 사라지고 자연스레 인간으로 돌아갔다고 하는데, 카이가 이상한 말들을 했어요.”
“뭐라고요?”
“유리가 잠깐 창조주가 되어야 해서 돌아오는 시기마저 늦어졌다고…….”
“네?”
“뿐만 아니라 데려올 식구도 있다고 했는데, 미안해요. 여기에 대해선 묻지 못했네요.”
마신에서 창조주가 되었다고?
굳이 왜?
방법이야 성검과 마검이 같이 있으니까 가능했겠지만, 멸망이 없어지면서 그럴 필요 또한 없어졌다.
창조주가 되어봤자 가질 수 있는 권능은 ‘탄생’뿐.
거기다 식구라니. 이건 또 뭔…….
“아무튼 곧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마님!!!”
월월!
밖에서부터 릴림의 외침이 들리자 에덴부르크가 힘껏 짖었다.
달리기로 모자랐는지 날개를 달고 문을 박차고 들어온 릴림은 평소답지 않게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마, 마님, 밖에 가주님이!”
“……!”
이미 반사적으로 샤를린느가 움직였다. 뒤따라서 소녀를 안은 미앵비슈와 에덴부르크, 리리스까지 따랐다.
밖은 아직 한적했다. 유리가 온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샤를린느는 더더욱 빠르게 발을 놀려 순식간에 대문까지 다다랐다.
대문에는 경비들이 로브를 쓴 다섯 명의 사람을 가로막고 있었다.
“제대로 신분을 밝히십시오. 거짓 신분, 가주님을 사칭하는 자는 즉결처분입니다.”
“와아~ 꼬맹이. 너 없는 사이에 경비들이 너 얼굴까지 잊어먹었나 봐. 왠지 우리 처음 나이트워커 왔을 때가 떠오르는 걸?”
“그때는 어땠어요, 티르빙 양?”
이번엔 생기발랄한 음성이 물었다.
티르빙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때 이런 경비들은 아니고, 제몬인지 재모인지 꼬마가 가로막았었지.”
“어떻게 됐죠?”
“우리 꼬맹이가 흠씬 두들겨 패줘서 참교육 당했어. 아스칼론도 그걸 봤어야 했는데. 아우, 아쉬워라.”
고혹적인 목소리의 여성은 비단 같이 까만 머리가 무릎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피와 닮은 붉은 눈, 진한 화장, 제일 큰 키가 인상적이었다.
반대편에 선 여성은 제일 키가 작지만 앙칼진 외모를 가졌다. 턱 선까지만 늘어진 백금발은 별처럼 빛이 나는 듯했다.
그리고 후드를 눌러 쓴 남자가 말했다.
“두 사람 다 됐어. 딱 봐도 어려보이는 경비잖아. 난 모를 수도 있지.”
“권위가 바닥을 치는군.”
보다 못한 카이가 조용히 따졌다.
당장이라도 베어서 뚫고 갈 기세였다.
그러나 투 블록에 하얀 머리를 한 남자가 그런 카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금욕적으로까지 보이는 남자였다.
“놔라, 미뭉.”
“…….”
“놓으라고 했어.”
“이제 네놈은 내 주인이 아니다.”
“주인이 아니니 베어도 되겠지.”
“그럼 나도 널 죽인다.”
“아아! 제발 너희 둘도 그만!”
마지막으로 샤를린느가 아는 어떤 목소리가 모두를 뜯어말렸다.
다섯 사람 저마다의 개성이 넘쳤으나 꽤 서로 친한 듯보였다. 적어도 샤를린느 눈에는 그리 비쳤다.
분명 가운데 선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남자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는 샤를린느가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알 수밖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유리!!!”
샤를린느가 다시 달렸다.
후드 속에 감춰졌던 아들의 얼굴이 그녀를 발견하고 환하게 웃더니 같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