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6
제26화
지옥에서 올라온 검은 겁화가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절대영도 때만큼 짧게 시전 했지만 작은 불씨는 곧 자연발화에 의해 곧 덩치를 키웠다.
시작은 작은 웅덩이로, 번지던 불길은 누군가의 로브자락으로 번졌다.
“으, 으악! 부, 부부, 불이야!”
한 사람의 외침과 동시에 아수라장으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행히 불이 붙었던 남자는 로브를 벗어내는 데 성공했으나, 불길은 곧 다른 사람에게로 옮겨 붙었다.
“꺄악! 살려줘! 살려달라고!”
“가만히 있어요!”
이번엔 여자였다.
몇몇 남자들이 달려들어서 발로 밟고 망토로 불길을 꺼보려 했으나, 지옥 불길이 쉽사리 꺼질 리가 만무했다.
결국 여자는 서둘러서 겉치마를 벗어 던졌다. 수치심 따윈 잊은 몰골이었다.
“젠장! 불이 안 꺼져!”
“도, 도망쳐야 돼!”
“길을 비켜! 난 귀족이라고!”
“꺼져, 새꺄! 난 왕족이다!”
불이 꺼지질 않자 사람들이 혼동에 허덕거리며 입구로 달려갔다.
경비들과 관리자들은 손님들에게 질서를 요구했으나 누구도 듣지 않았다.
가장 가까이서 불길을 일으켰던 주모자는 티르빙을 거두고 인파 반대로 향했다.
‘속전속결로 끝내야 된다. 소동이 일어난 걸 알면 기사단이 들이닥칠 거야.’
안 그래도 기사단은 이 암시장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던 차다.
원작 주인공이 기사단에 의해 구출되는 것도 이런 기사단의 노력이 있어서였다.
‘아마 지금쯤 습격을 준비하겠지. 그 전에 내가 선수 친다.’
유리의 계획은 이랬다.
원작에서 주인공은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탈출한다.
여기서 유리가 끼어들어서 소동을 일으킨 뒤 주인공과 접촉, 이후 탈출까지만 도와줄 요량이었다. 그 뒤로는 원작대로 기사단에게 맡긴다.
중요한 건 유리와 나이트워커가 주인공을 도왔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했다.
그래야 나이트워커를 향한 적대감을 미리 방지할 수 있으니까.
‘계획대로 되길 바라자고.’
유리는 주변을 살피고 단숨에 무대 뒤 커튼을 비집고 들어섰다.
커튼 뒤에는 널찍한 공간에 판매를 기다리는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암시장을 관리하는 이들은 이 진귀한 물건을 챙기느라, 경비들은 물통을 들고 날랐다.
“움직여, 머저리들아! 여기 망하면 다 같이 망하는 거야!”
“옙!”
[다들 필사적이네.]‘필사적인 덕분에 나는 보이지도 않나봐.’
그래도 혹시 몰라 유리는 언제든 단검을 꺼낼 준비를 했다.
티르빙은 안 된다. 자칫 신분이 노출될 위험이 있다.
유리는 설정집에서 봤던 노예 감옥의 묘사를 떠올리며 벽에 바짝 붙어 걷기 시작했다.
가던 길에 몇몇 사람과 눈이 마주쳤으나 신경 쓰는 이는 별로 없었다.
그러다 삐그덕대는 나무 바닥이 깔린 통로에 다다랐다. 통로 안쪽은 어둡고 습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여기가 노예들이 있는 감옥이었다.
그곳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어이! 거기 너! 꼬마!”
그래, 어쩐지 쉽게 지나가나 했지.
뒤에서 유리는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자는 쿵쿵 대면서 빠르게 접근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부모라도 잃어버린 거냐? 아니면 노예장에서 탈출한 놈이냐?”
“…….”
느껴지는 마나는 없다. 그러나 체격과 근육만 봐선 까다로운 상대.
남자는 유리를 시장에 찾아온 손님이 아닌 노예로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유리에게 손을 뻗는 순간.
유리가 쥐고 있던 단검에 마나를 실어서 목으로 던졌다.
화악! 투두둑!
“어억!”
날카로운 날붙이 두 자루가 목을 깔끔하게 꿰뚫었다.
다져진 근육으로는 마나를 두른 검을 막진 못했다.
거구가 바닥에 쓰러지고 유리는 검을 회수했다.
그리고 얼른 보는 눈이 더 있기 전에 노예장이라 불리는 감옥 쪽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복도에는 바깥과 달리 한 사람도 없었다.
복도에서 유리는 잠시 숨을 골랐다.
“후우, 어지간하면 살인은 안 하려고 했는데.”
[죄책감이라도 들어?]“그럴 리가. 여기 있는 쓰레기들은 살려줄 가치가 없어. 그냥 검을 쓴 흔적이 남는 게 싫어서.”
[사람 하나 안 죽이고 여길 어떻게 빠져나가니?]그렇긴 하지.
유리에겐 이것이 첫 살인은 아니었다. 용병단 시절에 도적질을 하던 몇 놈이 마을에 쳐들어와서 싸워본 적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사람을 죽이면서 든 감각은 의외로 무뎠다.
물론 감정적으로 두렵고 아찔했으나, 살인 자체에 대해선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이 현생을 살던 유리와 소설 속 세상을 사는 유리와의 차이점이었다.
현생이었다면 살인은 말도 안 된다고 했을 거다.
그러나 이 세계는 대한민국만큼 치안이 좋지 못하다. 법이 살인을 막아 봐도 무기와 욕심, 명분만 있다면 얼마든지 피를 보았다.
마치 도적들이 먹고 살겠다며 남을 강탈하듯이 말이다.
“…….”
유리는 쓰러진 사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란이 끝나기 전 복도를 빠르게 통과했다.
복도 끝은 밖과 이어져 있었다. 그곳엔 다른 경비들도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아이라는 점을 이용해 방심을 유발하고 목을 그어 죽였다.
밖으로 나오자 하늘이 보이고 열린 문 바로 양옆에 철창이 있었다.
철창과 철창 사이를 두고 난 길, 그리고 철창 안에는 사슬로 묶이고 입이 틀어 막힌 ‘것’들이 우중충한 시선으로 유리를 바라봤다.
‘여기가 노예장!’
바깥 물건들과 달리 노예장은 VIP나 고위층들이 직접 둘러보고 골라서 이 자리에서 경매를 하는 방식이다.
있어야 하는 병력과 관리인은 불을 끄러 전부 이동한 모양이었다.
방치한 듯 하지만.
[이야~ 여기 함정 마법이 쫙쫙 깔려 있는 걸? 잘못 건드렸다간 연쇄적으로 폭발하는 구조야.]“그게 보여?”
[보이는 게 아니라 느껴지는 거지. 이렇게 마법진을 난장판으로 깔렸는데 안 느껴지면 그게 더 이상해. 경고하는데, 함부로 열지 마.]원작에서도 언뜻 폭발 묘사가 엄청 많긴 했었다. 그게 보이지 않는 함정 마법 때문인가.
유리는 철창들을 가로질렀다.
더 이상의 경비병은 없었다. 있어봤자 말 그대로 감시역만 있어서 빠르게 처리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상했다.
화재가 일어나서 인원이 전부 옮겨졌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허술하진 않았다.
“버렸어.”
유리는 그리 결론을 내렸다.
분명 그들은 노예장을 버렸다.
애초에 여긴 그런 곳이다.
버려도 다시 구할 수 있는 물건 취급을 받는 곳.
가는 동안 동물부터 시작해서 다양한 인종, 환수들의 시선을 받아야만 했다.
혹사를 당한 몇몇은 숨을 헐떡이며 죽어갔다.
가는 내내 속이 울컥울컥 요동쳤다.
“젠장. 글로 보던 것보다…….”
[참아. 어차피 네가 해야 될 일이 아냐. 넌 엄연히 손님이라고.]“알아.”
결과적으로 원작을 따라 이 시장은 오늘 없어지게 되어 있다. 원래부터 기사단이 밖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습격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이에 암시장 관리자들은 빼돌리기 쉬운 물건들만 가져가고 노예장은 아예 불태워버린다.
다행히도 기사단이 막아주긴 하지만…….
“……우선 가자.”
철창은 1층이 아닌 2층, 3층, 전부 제각기 다른 구조를 가졌다.
그 중 제일 깊숙한 곳, 겨우 사람 한 명 있을 법한 철창에 다다랐다.
안에 유리보다 조금 더 큰 소년이 사지에 사슬이 묶인 채 허공에 대 자로 매달려 있었다.
소년은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카이 안데르센.”
유리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몰골이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피딱지가 아무렇게나 터지고 말라붙었고, 손목과 발목은 발버둥 치면서 살갗이 까져서 붉은 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카이의 눈빛만큼은 달빛에 반사되는 금발보다도 선명했다.
“누구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카이. 중요한 건 지금부터 내가 너를 도울 거라는 사실이지.”
유리는 일부러 후드를 벗어서 얼굴을 노출시켰다. 카이가 알아볼 수 있도록.
물론 유리가 누군지 알아볼 리는 없다.
얼굴만 익히면 된다.
“잘 들어. 난 널 도우러 여기에 왔어. 내가 직접 도울 수는 없다만, 기사단이 들이닥쳐서 널 구할 거야.”
“알아듣게 말해.”
“바깥 소동이 내가 저지른 일이라고 하면 될까.”
“……네놈 짓이었군.”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를 직접 구할 형편은 아직 아니라서 작은 소동 좀 피워봤어. 곧 있으면 기사단이 들이닥칠 거야.”
“원하는 게 뭐지?”
카이가 살벌한 눈빛으로 물었다.
역시 말이 잘 통한다고 해야 되나. 아니면 알기 쉽다고 해야 되나.
카이 안데르센은 바다 건너에서부터 온갖 풍파를 겪으면서 살아오면서 점점 성격이 피폐하게 변했다.
그 때문인지.
거두절미하고 나누는 대화 방식이 많았다. 유리는 이런 성격이 썩 마음에 들었다.
“원하는 건 나중에 말하도록 하고.”
유리가 손등을 꽉 물었다. 피가 흐르는 모습에 정작 카이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슨 일이 벌어질까 궁금해 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티르빙이 모습을 갖추자 그가 물었다.
“네놈도?”
“……눈 감아.”
드래곤 하트와 코어까지 전부 개방되고, 티르빙으로 마나가 흘러들어가며 검막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티르빙이 말한 마법이 발동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입으로는 방어 마법 주문을 외웠다.
티르빙이 내려쳐지고 철창과 사슬을 단번에 잘라냈다.
다행히 카이한테는 함정 마법이 없었는지 폭발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카이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언뜻 성깔 있는 10대 소년으로만 보였을 테지.
카이는 자유로워진 손발을 이리저리 움직여보았고, 유리가 티르빙을 거뒀다.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할지 말지는 너의 선택이야. 되도록 구하지 않는 편이 생존에 도움이 되겠지만―”
“구할 거다.”
그렇지. 어련하겠어.
원작에서도 구했으니 하지 말라고 안 할 사람이 아니었다.
유리는 씁 하고 입맛을 다셨다.
“마음대로 하고. 일단 기사단이 도착하면 그들의 도움을 받아. 네 신변을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은 그들뿐이야.”
“뭔지 모르겠지만, 알겠다.”
“그리고.”
유리는 다시 후드를 눌러 쓰며 말했다.
“복수를 원한다면 도시 남쪽에 있는 바람계곡 선술집을 찾아. 원하는 건 그때 얘기하지.”
“뭐? 자, 잠깐!”
서둘러서 등을 돌려 유리가 자리를 빠져나갔다. 뒤쫓으려던 카이는 바로 그만두었다.
당장 유리를 쫓아선 안 된다. 다른 노예들을 먼저 구해야 했기에. 찾아온 기회를 허망한 시간 소비에 쓸 순 없었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카이.
그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오랜 만에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이름을 꺼냈다.
“미뭉.”
그의 부름에 칼집과 손잡이가 없는 검이 서서히 형체를 갖춰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내 금으로 된 짧은 검신이 드러나고.
카이는 바닥에 검을 내리 꽂았다.
쾅!
금빛 기운이 사방으로 퍼지며 공간을 메웠던 함정 마법들을 일제히 풀었다.
그 모습이 멀리서도 보여서 마치 금광이 폭발하는 듯했다.
부서진 빛이 눈처럼 내리다가 사그라들고, 갇혀 있던 이들이 한 명씩 어리둥절해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는 듯했다.
그래도 하나는 확실했다.
저기 저 금칠이 된 검을 든 사람이 우리의 구원자다.
그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카이 쪽으로 모여들었다.
유리는 그 광경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원작의 주인공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