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29
제29화
블레이크는 이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유리를 바라봤다.
“암살에 성공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겁만 주고 협박했거든요. 그것만으로도 우리 기사단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플레온 기사단을 인수하겠다고 나섰던 자들이 여럿 있었다.
그때마다 블레이크는 직접 나서서 신분을 감추고 그들을 협박했다.
그거 말고는 기사단의 불안한 미래를 막을 방법이 도저히 없었다.
“운이 좋았죠. 인수하려던 자들 중 절반은 돈만 많은 거상들이었거든요. 그들은 목숨 아까운 줄을 알아서 작은 겁박이 통했습니다.”
“귀족이나 왕족도 있었을 텐데요.”
“그들은 세벨 왕가가 많은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협상부터 미적지근했습니다.”
그리 말하는 블레이크의 낯이 허심탄회하면서도 불안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언제까지 계속되진 않겠죠. 나중엔 저희를 헐값에라도 팔 거 같았거든요.”
“제가 섭정이라면 묵혀두는 한이 있어도 어떻게든 비싸게 팔았을 거 같습니다만.”
“저를 비롯한 기사들이 섭정을 귀찮게 하고 있던 차였습니다.”
블레이크는 최근 기사단과 왕정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말해줬다.
기사단을 바깥에 팔 거라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기사들은 탄원서를 모아 국왕에게 올렸다.
이도 모자라 나라 전체에 성명서를 발표했다.
플레온 기사단은 무슨 일이 있든 세벨을 수호할 것이며, 돈으로 우리의 명예와 힘을 살 수 없다며.
블레이크도 직접 국왕과 섭정을 만나 그들을 설득시켰다.
결과적으로, 전부 실패했다.
섭정은 완강했으며, 어린 국왕은 귀찮다며 방관했다.
그럼에도 블레이크와 기사단은 하루에도 몇 번씩 상소문을 올리거나 직접 알현했다.
그럴수록 세벨 왕가는 기사단을 불편한 존재로 취급했다.
“이대로라면 뻔했습니다. 진짜 어딘가에 팔리거나. 기사단이 공중분해 되거나.”
“블레이크 님은 차라리 공중분해를 고려하고 있었겠군요.”
“지킬 것을 잃은 기사는 기사가 아닙니다.”
좋은 신념.
고지식하지만 기사답고, 바보 같지만 충성심이 넘친다.
유리는 짧은 대화를 나눠보면서 블레이크를 그리 판단했다.
“어쨌든 죄송합니다, 유리 님. 암살을 시도했으니 어떤 대가든 치르겠습니다.”
“대가를 받겠다고요?”
“잘못된 걸 알고도 행했던 일들입니다. 당연합니다.”
“……제가 질문 하나 하죠.”
유리는 찻잔의 바닥까지 마시고 잔을 내렸다.
달그락, 유독 소리가 크게 울린다.
“벌을 받겠다는 사람이 저를 체포하려고 기사단을 끌고 오고, 저한테는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설명하고.”
“그거야 원칙적으로―”
“제가 당신을 이해하길 바란 건 아니고요?”
“…….”
체포하려고 했다면 체포하면 된다.
사과하고 벌을 받으려 했다면 벌을 받겠다고 혼자서 찾아왔으면 된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을 만들어버렸다.
“스스로 자신이 어떤 판단을 해야 할지 모르는군요, 블레이크 단장.”
“맞……습니다.”
블레이크는 마지못해 인정했다.
아니, 마지못해 할 건 없다.
그의 심정은 혼돈으로 가득해서 갈피를 잡지 못했다.
옳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무너뜨리고, 어기고, 그런데도 이게 틀리지 않았다며 합리화하길 반복.
그러다 유리를 알게 되었다.
거대한 가문의 자제, 막대한 인수금, 암시장 방화, 기사단에 제공한 출동 명분.
마냥 유리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말도 안 되는 액수를 들었을 땐 인정받았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그 정도로 블레이크는 망가져 있었다.
당황으로 물들었던 그가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참. 발가벗겨진 기분이군요. 전부 유리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전,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감 때문인가요?”
“예.”
세벨에 모든 충성을 바치며 플레온 기사단의 단장까지 되었다.
그 시간과 노력이 새로 들어선 국왕과 섭정 때문에 무너지고 있었다.
국왕은 어리다. 욕심이 많으며 국정을 일부러 팽개치고 있지만, 어려서 그렇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렇게 믿고 싶었을 뿐.
“마음대로 하세요.”
유리가 말했다.
“기사답게 원칙대로 절 체포해서 조사해도 괜찮습니다.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서 제 인수 건을 고려해 봐도 됩니다.”
“하지만……!”
“대신 명심하시길. 당신은 할 만큼 했습니다. 기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짓까지 하면서 기사단과 국가를 지켰죠. 하지만 이제는 두 가지 모두 잡을 수 없다는 걸 알 겁니다.”
“말씀대로 입니다만, 하아. 전…….”
침울해진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새까매진 낯빛이 당장이라도 울 것만 같았다.
유리는 낮고도 힘 있게 목소리를 냈다.
“다른 이유와 명분을 만들지 마십시오 기사단과 나라를 배제하고, 오로지 스스로만 생각해보시길. 나라를 지킬지, 신념을 지킬지.”
“만약 신념을 택했을 때 무엇이 기다리고 있습니까.”
“……새 주인이죠.”
유리가 던진 대답은 그의 동공을 터질 듯이 크게 만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빠르게 선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무너져도 이상할 거 없다고.
블레이크는 손톱이 파고 들 때까지 주먹을 쥐었다.
잠시 후, 그가 입을 열었다.
“기사단만큼은 지키고 싶습니다.”
이에 유리가 답했다.
“그 기사단,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 * *
유리는 솔리드녹스의 개입은 예상보다 중요치 않다는 걸 알았다.
어찌 됐든 간에 원작에서조차 기사단은 인수되지 못하고 와해 됐으며.
블레이크의 말에 따르면 솔리드녹스는 기사단 인수가 아니라 해단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벨이 비용을 지불한다면 솔리드녹스가 군사력을 제공해주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기사단을 아니 곱게 보던 세벨 왕가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제안이었다.
[그러니까, 솔리드녹스가 기사단을 없애려 했다는 거네. 대체 어째서?]‘설정집에선 세벨이 망하고 백성들이 솔리드녹스로 많이 들어갔다고 나와 있어. 좋은 노동력을 얻은 거지.’
[솔리드녹스가 일부러 세벨을 무너뜨렸다는 거니?]‘추측일 뿐이야.’
기사단이 세벨을 떠난 후, 세벨은 자연스레 망국의 길을 걸었다.
군사력 부재에 이어서 왕가의 폭정과 경제의 몰락이 맞물리면서 불러온 사태였다.
그 과정에서 솔리드녹스가 개입했는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세벨의 백성들은 예상보다 큰 피해를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도리어 부패한 왕가가 무너져서 더 좋은 삶을 살게 된다.
‘문제는 솔리드녹스가 좋은 의도로 그랬는지 알 수 없다는 거지.’
[좋은 일 한 거 아닌가.]‘글쎄.’
여러모로 구린내가 풀풀 풍겼다.
솔리드녹스가 굳이 세벨 왕가를 무너뜨려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정말로 정의감에 한 나라를 무너뜨렸을까.
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독 날씨가 맑고 청량했다.
“일단 얼추 마무리됐다는 점에 만족하자.”
방금 유리는 세벨 왕성에서 인수 서약서에 사인을 마치고 나왔다.
왕가 사람들은 멀쩡한 유리의 모습에 놀라워하긴 했으나, 별 문제는 없었다.
결국 블레이크는 유리의 편이 되었다.
블레이크와 플레온 기사단은 정리가 되는 대로 바로 합류하기로 약속했다.
그 전에.
“아직 할 일이 남았네.”
“뭐가요?”
옆에 있던 릴림이 묻자 유리는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그곳에 남루한 차림의 소년이 마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마냥 두 사람을 노려봤다.
카이였다.
그를 모르는 릴림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유리 앞을 가로막으려 했다. 유리는 그런 릴림을 손짓으로 말렸다.
“괜찮아. 일면식이 있는 친구야.”
그렇게 말하곤 유리가 카이에게 접근했다.
대낮에 본 카이는 확실히 남주답게 잘생김이 보기만 해도 묻어나왔다.
참고로 카이의 나이는 유리보다 많은 15살. 이자벨과 동갑이었다.
그러나 무한 환생을 겪으면서 쌓은 나이까지 따지면 드래곤급으로 많았다.
“숙소에서 만나자고 했을 텐데. 여기서 만나는 거 보니 미행했나 보네.”
“어제 숙소로 찾아갔었다. 기사단이 포위하고 있더군.”
“아, 맞다.”
유리는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상황이었다면 만나긴 힘들었겠네.
“할 말이 많겠다만, 우선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할까?”
“아니. 여기서 당장 한다. 대답 여하에 따라 죽여야 해서.”
“나도 똑같은데. 대답에 따라 널 죽여야 해서 자리를 옮기자고 한 거거든.”
“오만하군……!”
스릉!
어느 틈엔가 그의 손아귀에 황금 단검이 쥐어졌다. 릴림이 다시 나서려 하자 역시나 말렸다.
아무도 검의 존재와 그들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을 알아주지 못했다.
도리어 많은 인파 때문에 무슨 대화를 나누고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묻혀있었다.
유리는 원작에서 이와 같은 상황을 봤었다.
거리 한가운데서 악마 추종자 한 명을 붙잡아서 그 자리에서 취조하고 죽이는 장면이었다.
그때까지 누구도 사람이 죽는 걸 목격하지 못했다.
유리도 같았다.
실력과 경험 면에서 훨씬 우월한 카이다. 대응은커녕 검을 꺼낼 수나 있을지.
그래도 최대한 여유를 부렸다.
“피차일반이면서, 무슨……. 애초에 누가 들어서 좋을 얘기는 아니지 않나?”
“누가 듣든 이해 못할 대화다.”
“누가 들어서 좋지 못할 대화이기도 하고.”
릴림에겐 전혀 모를 대화가 이어지겠지만, 그래도 굳이 그녀에게 자리를 피하라고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는 알아야 한다.
걱정되는 쪽은 오히려 카이다.
‘대답해준 대로 믿을지 모르겠군.’
안 그래도 칼을 뽑아든 마당에 기본적으로 카이는 타인을 믿지 않는다.
진실을 말해도 그가 모른다면 아무 소용없다. 그럴싸한 거짓말조차 금방 간파해버린다.
어정쩡한 호의는 두말할 것도 없고. 허튼수작이라며 오해라도 샀다간 원작에서 봤던 장면을 재연출할 터.
그렇다고 피해선 안 된다.
‘카이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야지만 나와 가문이 살면서 원작대로 진행이 가능하다.’
이 순간이 유리에겐 가장 중요했다. 여기서 실패하면 영영 카이는 적이 되고 만다.
유리는 숨을 고르고 말문을 열었다.
“그래, 그럼 뭐부터 얘기할까?”
“내 복수에 대해 뭘 알지.”
“바다 건너에서 첫 번째 삶을 살았고, 이후 여러 삶을 살았고, 살면서 악마들에 의해 주변 사람과 너 자신을 잃었고.”
카이는 모든 대륙에 걸쳐 환생을 겪었다.
그 중 환생을 몰랐던 첫 번째 생이었던 시절, 그를 낳아줬던 부모는 처음으로 나타난 악마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두 번째 삶에선 연인의 모가지만 품으로 돌아왔다.
세 번째는 카이를 대신해서 동료들이 죽었다.
이후로도 악마들은 주인공이 환생할 때마다 터전을 짓밟으며 소중한 사람들을 계속 죽였다.
그때를 떠올리자 카이의 속이 메스껍게 울컥거렸다.
목구멍에 침을 삼키며 그가 간신히 물었다.
“그것들을 어떻게 알고 있지.”
“예언서를 봤어.”
“뭐?”
“내가 용가의 사람이거든. 우연히 제일 깊은 도서관에서 고대 드래곤이 남긴 예언서를 봤지.”
“말도 안 돼. 고대 드래곤의 예언은…….”
“해석이 안 된다고?”
예언서라고 포장한 것의 정체는 유리가 봤던 설정집이었다.
그 설정집은 명백히 해석이 안 됐다.
분명 누군가 한 번쯤은 봤을 거고 미래와 과거 모두를 알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는데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면 해독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맞았다.
그리고 아직 해독할 기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상하게 보지 마. 나도 그게 어떻게 해석이 되고 읽히는지 모르니까. 완벽하게 해석되지도 않고.”
“믿을 수 없군.”
“하지만 내가 너의 과거를 어떻게 알고 있지? 노예장에 있는 널 찾아갔던 건?”
“…….”
당장이라도 겁을 줄 것만 같던 기세가 잠깐이지만 사그라졌었다.
됐다.
대화가 통하는 느낌이다.
“걱정하진 마. 아까도 말했다시피 해석이 완벽하지 않아서 모든 과거를 보진 않았으니까. 미래는 더더욱 모르고.”
“넌 예언서를 곧이곧대로 믿었나?”
“안 믿었으니까 확인해보고 싶어서 여기로 와서 널 도운 거야.”
“플레온 기사단은. 그것도 알고 있었나?”
“그게 뭐가?”
“난 플레온 기사단에 입단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기사단에 네놈에게 인수된다는 얘기가 나오더군.”
“플레온 기사단에 뭐가 있긴 했었는데, 그게 그거였나 보네.”
“…….”
기세가 누그러졌으나 아직 경계심이 높았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유리는 알게 모르게 그를 유혹했다.
과거를 모두 아는 카이가 미래까지 알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그래도 혹여 망설일까봐 유리가 먼저 도움을 주겠노라 말하려 했다.
그 순간.
카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밥 사준다는 거, 아직 먹을 수 있나?”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