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1
제41화
살 가치…….
카이는 그 말을 조용히 곱씹다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어도 어쩐지 웃겨서 견디기가 어려웠다.
“좋아, 그럼 갔다 와라.”
“엉? 이런 타이밍엔 같이 가 준다거나 해야 하지 않아?”
“난 그 여자의 가치를 모른다. 너만 알지. 그러니 네가 직접 데려와서 가치를 증명시켜.”
“그게 뭔…….”
그리 말해놓고 카이는 미련 없이 숲으로 돌아섰다.
참으로 어이가 없어서.
실소를 흘리던 유리는 이 또한 카이답다며 수긍하고는 요새 쪽으로 걸었다.
어차피 유리가 사라진 사실을 블레이크가 알았을 때를 대비해서 상황 설명을 해줄 이가 필요했다.
말주변이 부족해서 카이가 얼마나 시간을 벌어 줄진 모르겠다만.
‘블레이크가 잘 판단해주길 바라야지.’
우선 요새의 형태를 아까 가까이서 봤을 때 대충 파악해 뒀다. 높은 담은 이음새가 없어서 매달릴 곳조차 없었다.
이음새가 있다고 쳐도 너무 높은데다가 벽 위에 병력이 많아서 경계를 뚫긴 힘들어 보였다.
하물며 마법으로 뚫고 간다?
‘마법이 특출난 가문인데 마법 방비 정도는 철저하게 됐겠지.’
우선 뭐가 되었든 안쪽 상태를 알아야 들어갈 수 있다.
유리는 품속에서 주먹보다 작은 주머니를 꺼내 풀었다. 묶였던 끈이 풀리기 무섭게 반딧불이 여러 마리가 허공으로 날았다.
이곳으로 떠나기 전 채럿이 선물로 준 길잡이 벌레들이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반딧불이 같아도 채럿의 보살핌 아래 자라면서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지금은 채럿이 아닌 유리의 말을 따르도록 명령을 받은 상태.
활동 반경이 넓지 못해도 가까운 인근의 정보를 가장 빠르고 쉽게 모으는 데는 이만한 놈들이 없었다.
“이자벨이 있는 곳을 찾아. 내가 몰래 갈 수 있을 만한 길도 알아내고.”
파르르르르!
대장 반딧불이가 어깨를 떨다가 앞장서서 날자 다른 반딧불이들이 따랐다.
벌레들이 먼저 요새 쪽으로 사라졌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돌아왔다.
전부 살아있는 걸 봐선 제대로 된 루트를 찾은 듯했다.
“가자.”
벌레들을 따라서 한참을 따라가니 요새 외곽에 있는 작은 수로에 도착했다.
수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요새 외벽과 이어져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벌레들이 요새 외벽으로 유리를 안내했다.
외벽 근처엔 경비병들이 없었으나, 수로와 이어진 벽의 구멍은 터무니없이 작았다.
“여기로 들어가라고?”
부우우웅~!
보란 듯이 벌레들이 수로 입구 안으로 들어가 사라졌다.
벌레들이라서 인간의 체격은 가늠하지 못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할 즈음, 아래 벽 너머로 날갯짓 소리가 들리고 작은 틈으로 불빛이 보였다.
“아하.”
이음새가 없어서 몰랐으나 자세히 보니 수로 입구는 나무판자를 대고 진흙을 발라서 막았다.
유리는 손바닥을 대고 살짝 마나를 주입 시켰다.
세상의 만물은 모두 마나를 가지고 있고 임계점을 넘기면 형체를 유지 못한다.
그 원리로 인해 흙벽은 얼마 못가 먼지로 바스러지면서 무너졌다. 안에 덧댔던 판자는 팔로 차서 부쉈다.
여전히 크기는 작았으나 몸을 수그리기만 해도 들어갈 수 있었다.
유리는 허리를 숙이고 입구로 들어간 뒤로 한참을 기어갔다. 벌레들이 속도를 맞추어 찬찬히 안내했다.
그러던 중 위에서 쿵쿵쿵! 발울림과 목소리가 들렸다.
“얼른얼른 움직여! 나이트워커 놈들이 저 밖에 있단 말이다!”
바쁘네, 바빠.
밖에서 보던 것과 달리 안쪽은 혼잡했다. 병력들이 발맞춰 뛰고 있고 무구들의 절그럭거리는 마찰음이 쉬지 않고 들렸다.
나이트워커 기사들이 왔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그래도.
‘이상할 정도로 과해.’
현재 시각은 꼬박 새벽을 넘기고 있어서 곧 새벽 어스름이 피어오른다.
이 시각까지 병사들이 깨어있으면서 견제한다?
나이트워커와 적대감이 심하다고 해도 엄연히 이자벨을 호위한 기사들이고 예법상 이렇게 모질게 대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적대감이 있기 때문에 매너와 예의를 지키는 게 양 가문이거늘.
‘진짜 무슨 일 생긴 건 아니겠지.’
불안한 정황이 쌓일수록 마음 속 걱정도 점점 커져갔다. 유리는 서둘러 수로를 따라 움직였다.
길잡이 벌레들이 한참을 더 안내하고.
어느 지점에서 허공을 맴돌다가 천장의 작은 틈으로 달라붙었다.
유리는 올라가기 전 귀를 대고 소리를 확인했다.
‘쇠사슬 소리,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쥐 소리, 얕은 호흡……. 감옥?’
이곳에 이자벨이 있다고?
말도 안 돼.
믿지 못하면서도 유리는 이미 천장을 뚫기 위해 준비했다.
아까와 달리 마나는 쓰지 않았다. 감옥이라고 확신한 이상 어떤 경보장치가 되어 있을지 몰랐다.
“티르빙.”
[이럴 때만 언니를 찾니?]“부탁해.”
투덜대면서도 티르빙은 기꺼이 힘을 빌려줬다.
손바닥 위로 이쑤시개만큼 얇은 날이 튀어나왔다. 최대한의 예기로 뽑아낸 마검이었다.
그걸 천장에 찌르자 두부를 찌르듯 쑥 들어갔고 원형으로 벽을 잘랐다.
마찰조차 없을 정도로 날카로워서 자르는 동안 먼지가 떨어지거나 잡음조차 나지 않았다.
이내 잘린 벽이 떨어지고, 손 하나가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만들어졌다.
“유리?”
뚫린 구멍 위로 이자벨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유리를 보자마자 단번에 알아챘다.
“네, 네가 여길 어떻게!”
“그건 나중에 설명하고. 어떻게 된 거죠? 여기 감옥 아닌가요?”
“그게…….”
설명하기에 앞서 이자벨이 주변을 살폈다. 경비병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침을 삼키고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의 제 3장로의 명령으로 나를 가두라 했다.”
“3장로라 하면…… 야누 님이군요.”
솔리드녹스의 가문 체계는 나이트워커와 달랐다.
훨씬 더 체계적이면서 비인간적인 체계랄까.
현 솔리드녹스의 가주를 제 1장로, 그 밑에 가주의 형제들 또한 장로라 불렸다.
여기서 흔히들 오해하는 점이 가주의 형제니까 장로라고 불리는 줄 안다.
그러나 모든 형제가 장로가 될 수는 없다.
가문에서 쓸모없는 자들은 모조리 쫓아내거나 죽었고, 그렇게 살아 남은 형제들이 장로 자리를 차지했다.
뭐, 용인 가문이니까 철저한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른 생존이지.
다만.
‘야누는 달라. 피도 눈물도 없는 쓰레기.’
원작에서의 야누는 마법 좀 잘 쓰는 용인이자 잔악무도한 마법사로 등장한다.
하지만 설정집 속에선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특히 그가 가문의 마법사들에게 시험을 치르던 중 사망 사건이 벌어지는데, 죽은 사람이 다름 아닌 가문의 직계였다.
그런데 야누는 그저 약해서 벌어진 사고라고 치부해버렸고, 다른 가족들 또한 이 의견을 받아들였다.
유리는 그 자의 이력을 되새겨 가면서 물었다.
“하지만 야누 님이 어째서 이자벨 님을 가둬놓으신 거죠?”
“내가 그분의 명령을 어겼다.”
“예?”
“내가 교환 학생으로 떠나기 전, 야누 님께서 그대로 죽으라고 했었다. 돌아오지 말라는 뜻이었지.”
“잠깐만요. 그게 무슨……!”
“더 설명할 시간 없어. 야누 님께서 직접 병사들을 끌고 온다 했다. 그분이라면 무력 충돌도 서슴지 않을 거야. 그러니 혹여 날 도우러 여기까지 왔다면 당장 돌아가라.”
어찌된 사정인지 얼추 윤곽이 잡혔다.
직계 혈통도 약하다며 버렸던 자가 시한부인 친인척 하나 못 버릴까.
‘이번엔 진짜 죽이러 오는 거군.’
물론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아서 좀 더 전후 사정을 알아야만 했다. 그래야 이자벨을 구하든 말든 할 수 있으니까.
“미안하다. 계속 미안하다고 해서 더 미안하지만, 이것밖에 할 말이 없다.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는데…….”
“…….”
거듭되는 사과 속에서 이자벨은 초연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이자벨의 얼굴은 이미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유리의 가슴 속에선 동정이나 슬픈 감정이 안 생겼다.
무슨 감정인지 모르다가, 지식의 관에서 처음 이자벨을 봤을 때를 떠올랐다.
당시 지식의 관에서 봤던 이자벨은 죽음을 알고도 삶에 충실했었다. 발악하며 유리에게 대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걸 포기한 모습으로 일관했다.
그런 그녀가 유리는 짜증났다.
‘카이가 이래서 나랑 대련을 했었던 거였어.’
카이와 대련을 했을 때 그는 짜증 섞인 반응을 종종 보여줬었다.
그때는 카이의 원래 성격이 그러니까 이해했지만, 지금은 동감하다 못해 같은 감정을 느꼈다.
기껏 친분을 쌓고 동료가 될 만 한 사람을 구해줬더니 세상 다 포기한 소리를 하니 오죽 답답했으랴.
그 감정이 이자벨을 향했고 유리는 카이처럼 구태여 참지 않았다.
다만, 대련을 할 수 없어서 방식을 바꿨다.
“이자벨 님. 방금 하신 말씀, 후회하실 거예요.”
“후회하지 않는다. 너라도 살아야 되지 않나.”
“아뇨. 그거 말고요. 차라리 구해달라고 했으면 제가 이렇게까지 안 할 거였거든요.”
유리는 뽑았던 티르빙의 날을 훨씬 더 넓혀서 찌를 자세를 취했다.
위에서 작은 구멍으로 보던 이자벨이 오소소 소름이 돋는 살기에 뒤늦게 소리쳤다.
“아, 안 돼!”
“늦었습니다.”
말이 나오기 전에 이미 티르빙이 천장을 파고들었다. 처음엔 잠잠하더니 마나가 주입되는 순간.
퍼엉!!!
거대한 폭발과 동시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 * *
하늘 위로 드래곤과 비슷한 형상을 한 몬스터 무리가 날아다녔다.
3급 마수종인 와이번 무리였다.
와이번 위에는 붉은 장발의 중년을 비롯한 무장을 한 기사나 마법사들이 각각 한 마리씩 차지했다.
붉은 기를 상징으로 하는 솔리드녹스의 일원으로, 그들은 야누와 함께 메마른 요새로 향하던 중이었다.
야누는 앞으로 몸을 깊숙이 숙인 채 정면만 바라봤다.
“빌어먹을. 죽을 줄 알았더니 멀쩡히 살아 돌아오기나 하고.”
사실 이자벨을 교환 학생으로 추천했던 건 야누였다.
불의 영혼을 계승한 이자벨이 저주를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판명 나자 아예 다른 곳에서 죽으라고 유배를 보낸 것이었다.
괜히 가문 내에서 직계 혈통이 요절했다간 사실과 관계없는 소문이 나기 때문이다.
차라리 나이트워커 안에서 죽는다면 괜한 시비거리라도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이자벨이 떠나고 가문 내에선 그녀의 자리를 대신할 용인을 준비했다.
근데 하필 그녀가 살아 왔다.
“얼른 죽여야겠어.”
귀찮게 됐으나 어쨌든 이자벨만 죽으면 된다. 그럼 문제 될 건 아무것도 없다.
혹시 이자벨이 저항할까 7서클 이상의 마법사만 4명을 더 데려왔다. 그 밖에 가주 직할의 기사 10명, 4서클 마법사는 16명을 대동했다.
거기에 야누 또한 있으니 저항은 소용없었다.
“3장로님! 저기!”
그때 옆에 나란히 날던 기사가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저 멀리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킨 끝에 메마른 요새가 있었는데, 요새 안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그것도 엄청나게 큰 불길이.
“기어코 이 지경으로 만든 건가.”
야누는 혀를 끌, 차며 와이번의 속도를 올렸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이자벨이 참지 못하고 감옥을 빠져 나와 탈출을 감행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까워지면서 그 생각을 지웠다.
‘검은 불길?’
멀리서 봤을 땐 검은 연기가 치솟는 줄 알았다. 헌데 가까이서 보니 검은 연기가 아니라 불꽃이 용솟음쳤다.
검은 불길이라 함은 딱 하나다.
‘헬 파이어!’
누가?
이자벨은 아니다. 그녀가 우수하긴 해도 헬 파이어를 다룰 수준은 아니다. 특히나 저렇게까지 큰 불길을 일으킬 실력은 더더욱 못 된다.
솔리드녹스에서도 헬 파이어를 크게 키울 능력이 되는 자는 몇 없었다.
그럼 진짜 ‘사고’라도 난 걸까.
“젠장, 속도를 올려라!”
뭐가 되었든 간에 불안하기는 마찬가지. 야누는 발을 굴러 와이번을 때리며 빠르게 날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