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ribe with the magic sword remembers his past life RAW novel - Chapter 45
제45화
갑작스레 밀고 들어온 나이트워커 기사단에 유리를 포함한 모두가 어찌 된 영문인지를 몰랐다.
형국만 봐선 요새가 함락된 모양새였다. 거기다 검은 갑주로 무장한 플레온 기사단의 위용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여느 군단급 위세를 보였다.
등장만으로도 분위기를 압도하던 중.
선두에 있던 블레이크는 피칠갑이 된 유리를 보곤 얼른 말에 뛰어내려 그에게 달려갔다.
“도련님! 이게 어떻게……!”
“별거 아냐. 성력을 잔뜩 먹었더니 구역질이 나더라고.”
“구역질이 아니라 피가 나지 않습니까!”
“괜찮아. 그보다 여긴 왜 왔지? 대기하라고 명령하지 않았나?”
“그게…….”
블레이크는 말끝을 흐리다가 요새 안을 살폈다.
요새 가운데는 여전히 다 끄지 못한 불길이 타고 있다. 주변으로 번진 불씨는 몇몇 가옥들까지 태워서 무너뜨렸다.
솔리드녹스의 기사와 마법사들은 전부 지쳐서 호흡이 고르지 못했다. 몸에는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고, 죽거나 치명상을 입은 자는 없었다.
‘이 모든 게 도련님의 솜씨라고……?’
4년 동안 나이트워커를 위해 일하고 유리에게 충성하면서, 블레이크는 아직까지도 유리의 진짜 실력을 봤던 적이 없었다.
대련이야 수도 없이 봐왔기에 얼추 어느 정도 실력은 되겠거니 싶었다.
그렇게 직접 본 현재의 전장이 상상 이상이라서 놀라웠다.
‘전부 교묘하게 치명상만 피했어. 반면 도련님은 피를 토하신 거 말고는 옷깃조차 찢어지지 않았다. 첫 공식 임무에서 이게 가능하다고?’
감탄도 잠시.
블레이크는 유리가 다치지 않았다는 점에 우선 감사했다.
그리고 이자벨을 바라봤다.
그녀도 몰골이 영 말이 아니었다. 다치지만 않았을 뿐, 뽀얗던 피부는 까맣게 그을려서 하마터면 누군지 못 알아볼 뻔했다.
마지막으로, 이 일의 장본인으로 보이는 야누를 향해 돌아섰다.
“네놈이 여기 책임자인가.”
“뭐……라? 이 건방진 놈이! 내가 누군 줄 알고!”
“누구든 간에 네놈들은 지금 해선 안 되는 짓을 벌였다.”
그리 말한 블레이크가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야누의 발 앞에 던졌다.
건방진 태도였으나 뭔지 몰라서 야누는 반신반의 하는 기분으로 봉투를 집었다.
나이트워커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거칠게 뜯어서 내용물을 꺼내자, 곧 야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망명 허가서?”
“아스발돈 왕국의 솔리드녹스 영지민 이자벨 린테어 솔리드녹스에게, 나이트워커 가로의 망명을 허가하는 서류다.”
“뭐랏?!”
야누는 재빨리 서류를 하나하나 읽어나가며 내용을 확인했다.
망명이라니!
그것도 솔리드녹스의 사람이 나이트워커로 망명을 간다고?
말도 안 된다. 역사상 전례가 없을뿐더러, 나이트워커가 이를 허락할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서류를 끝까지 읽고 나서야 농담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유리도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는 블레이크를 보다가 이자벨에게 해명을 요구하듯 시선을 돌렸다.
“이자벨 님.”
“미안하다, 유리. 이렇게까지 될 일이 아니었는데…….”
그녀는 이 모든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어쩌면 빠르게 망명이란 수단을 써서 싸움까지 번지지 않게 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다.
* * *
유리가 임무를 떠나기 전.
“직접 네 가주한테 말해서 스스로 솔리드녹스를 버려라. 그럼 이곳에 남게 해주겠다.”
터무니없는 벤헬링턴의 제안에 이자벨은 아연실색했다.
사실상 불허랑 뭐가 다른가.
이자벨에겐 자신의 가주를 설득할 힘이 없었다. 오히려 불의 영혼이라는 힘이 있기 때문에 허락해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벤헬링턴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그녀에게 건네줬다.
“받아라. 망명 허가서다.”
“……!”
혹시 거짓말인가 해서 이자벨은 서류를 낚아채듯 집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확인했다.
시간이 걸렸으나 벤헬링턴은 천천히 기다려줬다.
마지막 칸에 이자벨의 사인만 없는 것 빼곤 확실했다.
“진짜, 망명 허가군요.”
“여차하면 이걸 무기로 써라. 아무리 제멋대로인 네놈의 가주라 해도 이 종이 쪼가리 하나면 충분하겠지.”
“통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건 무시할 정도로 그들은…….”
“네놈에게 집착한다는 거 안다. 불의 영혼이 그 놈들한테 어떤 의미인지는 보다 오래 살아 본 내가 더 잘 알지.”
또한 불의 영혼 계승을 위해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안다.
나이트워커 내에서도 몇 번 일어났던 사건이라 모를 수가 없다.
졸업 시험에서 고의로 불의 영혼 계승자들이 죽게 만드는 것이다.
물론 꼭 죽으리라는 법은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죽고 나면 솔리드녹스의 대응이 미적지근했다.
책임 소재조차 묻지 않고, 그저 시신 인도만 해달라고 했었다.
그래서 벤헬링턴은 오래전부터 망명이라는 수단을 준비했다.
대신 조건이 따랐다.
스스로 나이트워커에 남고 싶어 하는 의지.
“거기에 사인만 하는 순간 넌 나이트워커의 영지민으로 우리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생긴다.”
“그럼 당장 사인을…….”
“허나, 다시 한 번 고민해라. 네 가족을 버리는 짓이다. 그걸 감행해도 되는 건지 고민하란 말이다.”
가족…….
한때 가족이란 게 무언지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호기심을 포기하고 말았다.
용인 가문에 가족은 의미가 없다.
혈통에 따른 힘의 이양과 그 속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치열한 투쟁만 있을 뿐.
불의 영혼이라는 능력 덕에 특혜를 누리고 살았던 이자벨이었지만.
“사인하겠습니다.”
이자벨은 깃털펜을 쥐고 과감히 제 서명을 갈겼다.
후회? 그런 게 있을 리가.
저주의 영향으로 시한부가 되고 나선 솔리드녹스에서 세상 쓸모없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오히려 가족이란 의미를 버린 건 이자벨이 아닌, 그녀의 다른 가족들이었다.
서명이 끝나자 벤헬링턴이 비죽 웃었다.
“좋아, 그럼……. 블레이크!”
그의 부름에 재깍 블레이크가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타이밍이었다.
이자벨이 살짝 놀라는 순간, 블레이크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가슴에 손을 얹어 경례를 올렸다.
“밤에 영광을. 부르셨습니까.”
“이번에 이자벨 양 호위 임무를 유리가 맡는다고 들었다. 네가 그 놈을 따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리고, 이 망명서는 네가 가지고 있어.”
블레이크는 봉투에 망명 허가서를 넣어 봉인하고는 블레이크에게 건넸다.
이미 그는 밖에서 모든 이야기를 엿들었다. 그러라고 벤헬링턴이 대기하라고 하기도 했고.
별말 없이 봉투를 받자 벤헬링턴의 설명이 덧붙었다.
“갖고 있다가 솔리드녹스 놈들과 말이 안 통한다면 이걸 내밀어라.”
“그 말은 즉, 군사적 행동을 허가한다고 간주해도 되겠습니까?”
“그러니 최악의 상황에만 쓰라는 거다. 영지민을 보호하는 게 네놈 임무잖냐.”
“알겠습니다.”
그렇게 망명서를 받아든 블레이크. 그리고 결심을 굳힌 이자벨.
두 사람 모두 벤헬링턴이 언급한 최악의 상황이 닥치지 않길 빌었다.
그러나 그건 곧 현실이 되었다.
* * *
숲에서 기다리던 블레이크는 숲으로 수색하러 온 솔리드녹스의 병력과 요새에서 치솟은 불기둥을 보고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때 카이가 말했다.
“저 정도 불길이면 유리가 했을 겁니다. 불길이 잠잠해지면 움직이죠.”
일리가 있다.
요새 안에서 저만한 불길을 솔리드녹스가 만들 리는 없고, 분명 유리가 교란을 위해 벌인 짓이었다.
결국 블레이크는 불길이 잦아들자마자 바로 병력을 움직였다.
숲을 수색하던 솔리드녹스 놈들과 맞닥뜨렸으나, 놈들은 플레온 기사단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사상자 하나 없이 전부 생포한 뒤 블레이크는 병력을 끌고 요새로 향했다.
그렇게 된 경위로 요새로 진입해서 망명 허가서까지 보인 지금.
“지금부터 이자벨 양은 나이트워커의 영지민으로서 보호받을 권리가 생깁니다.”
“어, 어림없는 소리! 누구 마음대로 나이트워커 사람이 된다고……!”
멋대로 망명이라니!
서류를 보고도 야누는 믿지 않았다. 이자벨이 그리 결정했어도 나이트워커가 이를 허락해줬을 리가 없다면서.
“전부 죽여서 없애주마!”
결국 야누는 다시 별빛가지를 들어 마나를 모았다.
그 순간.
블레이크과 플레온 기사단이 일제히 검을 뽑았고.
휘익!
그들보다 한 발 빠르게 검을 뽑은 누군가가 야누의 코앞에 다다랐다.
“어딜.”
“이익?!”
서걱! 툭!
칼날이 번뜩이고. 처음엔 별빛가지가 반으로 잘렸다. 그리고 별빛가지를 쥐고 있던 손목마저 팔꿈치와 상관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고통을 느낄 찰나도 되지 못했다.
검의 주인은 여유롭게 피를 털고 칼집에 도로 검을 넣었다.
그 주인은 카이였다.
“으? 어? 으어어어? ……끄아, 아아아아악!!!”
한참 있다가 야누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기어코 피를 봤으나, 누구도 카이를 질책하지 않았다. 상관인 블레이크조차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다른 병력이 덤빌까 경계했다.
야누만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있고, 다른 솔리드녹스 병력은 잠잠했다.
다들 전의를 상실하고 패색이 짙어진 얼굴이었다.
이대로 싸워봤자 이길 수 없으나, 싸우지 않을 수 있는 관계도 아니었기에.
다들 망설이고 있자, 갑자기 유리가 이자벨 앞으로 나와 소리쳤다.
“팁을 주지.”
뜬금없는 제안(?)에 이목이 쏠렸다.
여전히 저 소년이 누군지 몰라도 블레이크의 행동을 봐선 상급자가 분명했다.
솔리드녹스 병력은 자연스레 귀를 열었다.
“솔리드녹스의 제 3장로는 이자벨 님의 ‘불의 영혼’을 계승하기 위해 그녀를 죽이려 했다. 네놈들도 그걸 알고 있었나?”
“그건…….”
“넌 알았냐?”
“그게, 그냥 소문이…….”
다들 불안한 눈초리로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역시 알고서 그랬던 걸까.
아니면 정말 몰라서 눈치를 보는 걸까.
“뭐, 알고 있든 모르든 상관없어. 네놈들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자위나 하면 돼. 하지만 똑똑히 알아둬라. 네놈들도 야누의 손에 똑같은 희생양이 될 뻔했다는 것을!”
“……!”
“……!”
눈치만 보던 분위기가 단 한 마디에 같은 감정으로 이어졌다.
‘맞다. 3장로가 마법으로 우리까지 죽이려 했지.’
‘목적을 위해선 우리들 따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건가?’
‘저것도 상관이라고!’
유리야 그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나. 의도했던 대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압도적으로 병력을 제압하되 큰 상처를 주지 않고, 오히려 야누가 제 부하들까지 죽이려는 모습.
이러면 야누를 향한 충성심은커녕 배신감마저 들 것이다.
“그래도 싸우고 싶다면 잘 생각하도록. 여기서 더 싸운다는 건 나이트워커 전체를 향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할아버지가 만든 망명서와 명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으나, 유리는 태연하게 이것들을 무기 삼아 이용했다.
다들 어찌할 바를 몰라서 망설임이 길어졌다.
바닥에 쓰러진 야누는 그 와중에도 “싸워! 죽이라고! 네놈들도 항명하는 거냐!”라며 목청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의 명령은 명령이 되지 못했다.
툭! 깡그랑!
솔리드녹스의 어떤 병사가 바닥에 무기를 버렸다. 곧 다른 병사들도 따라서 제각각 무기를 버려 투항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